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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史記列傳

史記 卷七五. 孟嘗君列傳

by 柳川 2019. 6. 2.

                                        孟嘗君列傳


孟嘗君名文,姓田氏。文之父曰靖郭君田嬰。田嬰者,齊威王少子而齊宣王庶弟也。田嬰自威王時任職用事,與成

侯鄒忌及田忌將而救韓伐魏。成侯與田忌爭寵,成侯賣田忌。田忌懼,襲齊之邊邑,不勝,亡走。會威王卒,宣王

立,知成侯賣田忌,乃復召田忌以為將。宣王二年,田忌與孫臏、田嬰俱伐魏,敗之馬陵,虜魏太子申而殺魏將龐

涓。宣王七年,田嬰使於韓、魏,韓、魏服於齊。嬰與韓昭侯、魏惠王會齊宣王東阿南,盟而去。明年,復與梁惠

王會甄。是歲,梁惠王卒。宣王九年,田嬰相齊。齊宣王與魏襄王會徐州而相王也。楚威王聞之,怒田嬰。明年,

楚伐敗齊師於徐州,而使人逐田嬰。田嬰使張丑說楚威王,威王乃止。田嬰相齊十一年,宣王卒,湣王即位。即位

三年,而封田嬰於薛。

初,田嬰有子四十餘人。其賤妾有子名文,文以五月五日生。嬰告其母曰:“勿舉也。”其母竊舉生之。及長,其母

因兄弟而見其子文於田嬰。田嬰怒其母曰:“吾令若去此子,而敢生之,何也?”文頓首,因曰:“君所以不舉五月

子者,何故?”嬰曰:“五月子者,長與戶齊,將不利其父母。”文曰:“人生受命於天乎?將受命於戶邪?”嬰默然。

文曰:“必受命於天,君何憂焉。必受命於戶,則可高其戶耳,誰能至者!”嬰曰:“子休矣。”

久之,文承閒問其父嬰曰:“子之子為何?”曰:“為孫。”“孫之孫為何?”曰:“為玄孫。”“玄孫之孫為何?”

曰:“不能知也。”文曰:“君用事相齊,至今三王矣,齊不加廣而君私家富累萬金,門下不見一賢者。文聞將門必

有將,相門必有相。今君后宮蹈綺縠而士不得(短)[裋]褐,仆妾餘粱肉而士不厭糟糠。今君又尚厚積餘藏,

欲以遺所不知何人,而忘公家之事日損,文竊怪之。”於是嬰乃禮文,使主家待賓客。賓客日進,名聲聞於諸侯。

諸侯皆使人請薛公田嬰以文為太子,嬰許之。嬰卒,謚為靖郭君。而文果代立於薛,是為孟嘗君。

孟嘗君在薛,招致諸侯賓客及亡人有罪者,皆歸孟嘗君。孟嘗君舍業厚遇之,以故傾天下之士。食客數千人,無貴

賤一與文等。孟嘗君待客坐語,而屏風后常有侍史,主記君所與客語,問親戚居處。客去,孟嘗君已使使存問,

獻遺其親戚。孟嘗君曾待客夜食,有一人蔽火光。客怒,以飯不等,輟食辭去。孟嘗君起,自持其飯比之。客慚,

自剄。士以此多歸孟嘗君。孟嘗君客無所擇,皆善遇之。人人各自以為孟嘗君親己。

秦昭王聞其賢,乃先使涇陽君為質於齊,以求見孟嘗君。孟嘗君將入秦,賓客莫欲其行,諫,不聽。

蘇代謂曰:“今旦代從外來,見木禺人與土禺人相與語。木禺人曰:‘天雨,子將敗矣。’土禺人曰:‘我生於土,敗

則歸土。今天雨,流子而行,未知所止息也。’今秦,虎狼之國也,而君欲往,如有不得還,君得無為土禺人所笑

乎?”孟嘗君乃止。

齊湣王二十五年,復卒使孟嘗君入秦,昭王即以孟嘗君為秦相。人或說秦昭王曰:“孟嘗君賢,而又齊族也,今相

秦,必先齊而後秦,秦其危矣。”於是秦昭王乃止。囚孟嘗君,謀欲殺之。孟嘗君使人抵昭王幸姬求解。幸姬曰:

“妾願得君狐白裘。”此時孟嘗君有一狐白裘,直千金,天下無雙,入秦獻之昭王,更無他裘。孟嘗君患之,遍問客,

莫能對。最下坐有能為狗盜者,曰:“臣能得狐白裘。”乃夜為狗,以入秦宮臧中,取所獻狐白裘至,以獻秦王幸姬。

幸姬為言昭王,昭王釋孟嘗君。孟嘗君得出,即馳去,更封傳,變名姓以出關。夜半至函谷關。秦昭王后悔出孟嘗

君,求之已去,即使人馳傳逐之。孟嘗君至關,關法雞鳴而出客,孟嘗君恐追至,客之居下坐者有能為雞鳴,而雞

齊鳴,遂發傳出。出如食頃,秦追果至關,已后孟嘗君出,乃還。始孟嘗君列此二人於賓客,賓客盡羞之,及孟嘗

君有秦難,卒此二人拔之。自是之后,客皆服。

孟嘗君過趙,趙平原君客之。趙人聞孟嘗君賢,出觀之,皆笑曰:“始以薛公為魁然也,今視之,乃眇小丈夫耳。

”孟嘗君聞之,怒。客與俱者下,斫擊殺數百人,遂滅一縣以去。

齊湣王不自得,以其遣孟嘗君。孟嘗君至,則以為齊相,任政。

孟嘗君怨秦,將以齊為韓、魏攻楚,因與韓、魏攻秦,而借兵食於西周。蘇代為西周謂曰:“君以齊為韓、魏攻楚

九年,取宛、葉以北以彊韓、魏,今復攻秦以益之。韓、魏南無楚憂,西無秦患,則齊危矣。韓、魏必輕齊畏秦,

臣為君危之。君不如令敝邑深合於秦,而君無攻,又無借兵食。君臨函谷而無攻,令敝邑以君之情謂秦昭王曰 ‘薛

公必不破秦以彊韓、魏。其攻秦也,欲王之令楚王割東國以與齊,而秦出楚懷王以為和’。君令敝邑以此惠秦,秦

得無破而以東國自免也,秦必欲之。楚王得出,必德齊。齊得東國益彊,而薛世世無患矣。秦不大弱,而處三晉之

西,三晉必重齊。”薛公曰:“善。”因令韓、魏賀秦,使三國無攻,而不借兵食於西周矣。是時,楚懷王入秦,秦

留之,故欲必出之。秦不果出楚懷王。

孟嘗君相齊,其舍人魏子為孟嘗君收邑入,三反而不致一入。孟嘗君問之,對曰:“有賢者,竊假與之,以故不致

入。”孟嘗君怒而退魏子。居數年,人或毀孟嘗君於齊湣王曰:“孟嘗君將為亂。”及田甲劫湣王,湣王意疑孟嘗君,

孟嘗君乃奔。魏子所與粟賢者聞之,乃上書言孟嘗君不作亂,請以身為盟,遂自剄宮門以明孟嘗君。湣王乃驚,

而蹤跡驗問,孟嘗君果無反謀,乃復召孟嘗君。孟嘗君因謝病,歸老於薛。湣王許之。

其后,秦亡將呂禮相齊,欲困蘇代。代乃謂孟嘗君曰:“周最於齊,至厚也,而齊王逐之,而聽親弗相呂禮者,欲

取秦也。齊、秦合,則親弗與呂禮重矣。有用,齊、秦必輕君。君不如急北兵,趨趙以和秦、魏,收周最以厚行,

且反齊王之信,又禁天下之變。齊無秦,則天下集齊,親弗必走,則齊王孰與為其國也!”於是孟嘗君從其計,而

呂禮嫉害於孟嘗君。

孟嘗君懼,乃遺秦相穰侯魏冉書曰:“吾聞秦欲以呂禮收齊,齊,天下之彊國也,子必輕矣。齊秦相取以臨三晉,

呂禮必并相矣,是子通齊以重呂禮也。若齊免於天下之兵,其讎子必深矣。子不如勸秦王伐齊。

齊破,吾請以所得封子。齊破,秦畏晉之彊,秦必重子以取晉。晉國敝於齊而畏秦,晉必重子以取秦。是子破齊以

為功,挾晉以為重;是子破齊定封,秦、晉交重子。若齊不破,呂禮復用,子必大窮。”於是穰侯言於秦昭王伐齊,

而呂禮亡。

后齊湣王滅宋,益驕,欲去孟嘗君。孟嘗君恐,乃如魏。魏昭王以為相,西合於秦、趙,與燕共伐破齊。齊湣王亡

在莒,遂死焉。齊襄王立,而孟嘗君中立於諸侯,無所屬。齊襄王新立,畏孟嘗君,與連和,復親薛公。文卒,謚

為孟嘗君。諸子爭立,而齊魏共滅薛。孟嘗絕嗣無后也。

初,馮驩聞孟嘗君好客,躡蹻而見之。孟嘗君曰;“先生遠辱,何以教文也?”馮蹻曰:“聞君好士,以貧身歸於君。

”孟嘗君置傳舍十日,孟嘗君問傳舍長曰:“客何所為?”答曰:“馮先生甚貧,猶有一劍耳,又蒯緱。

彈其劍而歌曰‘長鋏歸來乎,食無魚’。”孟嘗君遷之幸舍,食有魚矣。五日,又問傳舍長。答曰:“客復彈劍而歌曰

‘長鋏歸來乎,出無輿’。”孟嘗君遷之代舍,出入乘輿車矣。五日,孟嘗君復問傳舍長。舍長答曰:“先生又嘗彈劍

而歌曰, ‘長鋏歸來乎,無以為家’。”孟嘗君不悅。

居朞年,馮驩無所言。孟嘗君時相齊,封萬戶於薛。其食客三千人。邑入不足以奉客,使人出錢於薛。歲餘不入,

貸錢者多不能與其息,客奉將不給。孟嘗君憂之,問左右:“何人可使收債於薛者?”傳舍長曰:“代舍客馮公形容

狀貌甚辯,長者,無他伎能,宜可令收債。”孟嘗君乃進馮驩而請之曰:“賓客不知文不肖,幸臨文者三千餘人,

邑入不足以奉賓客,故出息錢於薛。薛歲不入,民頗不與其息。今客食恐不給,願先生責之。”馮驩曰;“諾。

”辭行,至薛,召取孟嘗君錢者皆會,得息錢十萬。乃多釀酒,買肥牛,召諸取錢者,能與息者皆來,不能與息者

亦來,皆持取錢之券書合之。齊為會,日殺牛置酒。酒酣,乃持券如前合之,能與息者,與為期;貧不能與息者,

取其券而燒之。曰:“孟嘗君所以貸錢者,為民之無者以為本業也;所以求息者,為無以奉客也。今富給者以要期,

貧窮者燔券書以捐之。諸君彊飲食。有君如此,豈可負哉!”坐者皆起,再拜。

孟嘗君聞馮驩燒券書,怒而使使召驩。驩至,孟嘗君曰:“文食客三千人,故貸錢於薛。文奉邑少,而民尚多不以

時與其息,客食恐不足,故請先生收責之。聞先生得錢,即以多具牛酒而燒券書,何?”馮驩曰:“然。不多具牛

酒即不能畢會,無以知其有餘不足。有餘者,為要期。不足者,雖守而責之十年,息愈多,急,即以逃亡自捐之。

若急,終無以償,上則為君好利不愛士民,下則有離上抵負之名,非所以厲士民彰君聲也。焚無用虛債之券,捐

不可得之虛計,令薛民親君而彰君之善聲也,君有何疑焉!”孟嘗君乃拊手而謝之。

齊王惑於秦、楚之毀,以為孟嘗君名高其主而擅齊國之權,遂廢孟嘗君。諸客見孟嘗君廢,皆去。

馮驩曰:“借臣車一乘,可以入秦者,必令君重於國而奉邑益廣,可乎?”孟嘗君乃約車幣而遣之。馮驩乃西說秦王

曰:“天下之游士馮軾結靷西入秦者,無不欲彊秦而弱齊;馮軾結靷東入齊者,無不欲彊齊而弱秦。此雄雌之國也,

勢不兩立為雄,雄者得天下矣。”秦王跽而問之曰:“何以使秦無為雌而可?”馮驩曰:“王亦知齊之廢孟嘗君乎?”

秦王曰:“聞之。”馮驩曰:“使齊重於天下者,孟嘗君也。今齊王以毀廢之,其心怨,必背齊;背齊入秦,則齊國

之情,人事之誠,盡委之秦,齊地可得也,豈直為雄也!君急使使載幣陰迎孟嘗君,不可失時也。如有齊覺悟,

復用孟嘗君,則雌雄之所在未可知也。”秦王大悅,乃遣車十乘黃金百鎰以迎孟嘗君。馮驩辭以先行,至齊,說齊

王曰:“天下之游士馮軾結靷東入齊者,無不欲彊齊而弱秦者;馮軾結靷西入秦者,無不欲彊秦而弱齊者。夫秦齊

雄雌之國,秦彊則齊弱矣,此勢不兩雄。今臣竊聞秦遣使車十乘載黃金百鎰以迎孟嘗君。孟嘗君不西則已,西入相

秦則天下歸之,秦為雄而齊為雌,雌則臨淄、即墨危矣。王何不先秦使之未到,復孟嘗君,而益與之邑以謝之?

孟嘗君必喜而受之。秦雖彊國,豈可以請人相而迎之哉!折秦之謀,而絕其霸彊之略。”齊王曰:“善。”乃使人至

境候秦使。秦使車適入齊境,使還馳告之,王召孟嘗君而復其相位,而與其故邑之地,又益以千戶。秦之使者聞

孟嘗君復相齊,還車而去矣。

自齊王毀廢孟嘗君,諸客皆去。后召而復之,馮驩迎之。未到,孟嘗君太息嘆曰:“文常好客,遇客無所敢失,食

客三千有餘人,先生所知也。客見文一日廢,皆背文而去,莫顧文者。今賴先生得復其位,客亦有何面目復見文

乎?如復見文者,必唾其面而大辱之。”馮驩結轡下拜。孟嘗君下車接之,曰:“先生為客謝乎?”馮驩曰:“非為

客謝也,為君之言失。夫物有必至,事有固然,君知之乎?”孟嘗君曰:“愚不知所謂也。”曰:“生者必有死,物

之必至也;富貴多士,貧賤寡友,事之固然也。君獨不見夫(朝)趣市[朝]者乎?明旦,側肩爭門而入;日暮

之后,過市朝者掉臂而不顧。非好朝而惡暮,所期物忘其中。今君失位,賓客皆去,不足以怨士而徒絕賓客之路。

願君遇客如故。”孟嘗君再拜曰:“敬從命矣。聞先生之言,敢不奉教焉。”

太史公曰:吾嘗過薛,其俗閭里率多暴桀子弟,與鄒、魯殊。問其故,曰:“孟嘗君招致天下任俠,姦人入薛中蓋

六萬餘家矣。”世之傳孟嘗君好客自喜,名不虛矣。



맹상군()은 이름이 문(), 성은 전씨()이다. 문의 아버지는 정곽군() 전영()이다. 전영은 제() 위왕()의 막내아들이자 제 선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전영은 위왕 때부터 관직에 임용되어 정사에 관여했으며, 성후() 추기(), 전기()와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한()나라를 구하러 위()나라를 토벌했다.

성후는 전기와 총애를 다투었는데, 성후가 전기를 헐뜯었다. 전기가 두려워서 제나라의 변방 고을을 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도망갔다. 마침 위왕이 죽고, 선왕이 즉위하여 성후가 전기를 모함한 사실을 알고는 다시 전기를 불러들여 장군으로 삼았다.

선왕 2년에 전기는 손빈(), 전영과 함께 위()나라를 쳐서 마릉()에서 패배시키고 위 태자인 신()을 사로잡고 위나라의 장군 방연()을 죽였다.

선왕 7년에 전영이 한나라, 위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한나라, 위나라를 제나라에 복종시켰다. 전영은 한 소후(), 위 혜왕()과 제 선왕을 동아() 남쪽에서 만나 맹약한 다음 돌아가게 했다.

이듬해, 다시 양(위) 혜왕과 견()에서 회맹했다. 그해에 양 혜왕이 죽었다.

선왕 9년에 전영은 제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제 선왕과 위 양왕()이 서주()에서 회맹하여 서로 왕으로 칭했다. 초() 위왕()이 이 소식을 듣고 전영에게 불만을 품었다.

이듬해, 초나라가 서주에서 제나라의 군대를 공격하고 사람을 시켜 전영을 내쫓으려 했다. 전영이 장축()을 시켜 초 위왕에게 유세하자 위왕은 바로 멈추었다. 전영이 제나라에서 재상으로 있은 지 11년 만에 선왕이 죽고, 민왕()이 즉위했다. (민왕은) 즉위 3년에 전영을 설()에 봉했다.

당초 전영에게는 40명이 넘는 아들들이 있었다. 그 중 천한 첩이 낳은 문()이란 이름의 아들이 있었다. 문은 5월 5일에 태어났다. 전영이 그 어미에게 “거두어 기르지 말라.”고 했다. 그 어미가 몰래 문을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그 어미는 형제들을 통해 그 아들 문을 전영에게 보였다. 전영이 노하여 그 어미에게 “내가 당신에게 이 자식을 버리라고 했을 텐데 감히 기르다니 왜 그랬는가?”라고 했다. 문이 머리를 조아리며 “군께서 5월에 태어난 자식을 기르지 못하게 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했다. 전영은 “5월에 태어난 아들의 키가 문설주와 같아지면 그 부모에게 이롭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문이 “사람이 그 명을 하늘에서 받고 태어납니까, 아니면 문설주에게서 받습니까?”라고 했다. 전영은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문이 “하늘에서 받는 것이라면 군께서는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문설주에게서 받는 것이라면 그 문설주를 높이면 될 일이니 누가 그 높이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전영은 “됐다.”라고 했다.


한참 뒤 문이 틈을 타서 그 아버지 전영에게 “아들의 아들을 뭐라 합니까?”라고 물었다.

“손자라고 하지.”

“손자의 손자를 무엇이라 합니까?”

“현손이라고 한다.”

“현손의 손자는 무엇이라 합니까?”

“모른다.”

이에 문은 이렇게 말했다.

“군께서 제나라의 재상 일을 맡아 지금까지 세 분의 왕이 계셨지만 제나라는 그 땅을 넓히지 못했고, 군의 집에는 만금의 부가 쌓여 있지만 문하에 유능한 사람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이 문이 듣기에 장수의 집에서는 장수가 나고, 재상의 집에서는 재상이 난다고 합니다. 지금 군의 후궁들은 땅바닥에 끌리는 수를 놓은 명주옷을 입고 다니지만 선비들은 짧은 바지도 얻어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인과 첩들은 쌀밥에 고기를 먹지만 선비들은 술지게미나 겨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군께서는 또 재물 잔뜩 쌓아 두었다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는 주려고 하시면서 나라의 일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은 잊고 계시니, 이 문이 생각하기에 정말 이상합니다.”

이에 전영은 문을 예우하여 집안일과 빈객을 대우하는 일을 맡겼다. 빈객들이 날이 갈수록 모여들었고 (문의) 명성이 제후들의 귀에 들어갔다. 제후들이 모두 사람을 보내 설공 전영에게 문을 태자로 삼으라고 권하니 전영이 이를 받아들였다. 전영이 죽자, 시호를 정곽군()이라 했다. 문이 과연 설에서 대를 이으니 이가 바로 맹상군()이다.

맹상군이 설에 있을 때 제후와 빈객 및 도망친 범죄자들을 초빙하니, 모두 맹상군에게로 왔다. 맹상군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이들을 후대하니 천하의 인재들이 그에게로 기울었다. 식객이 수천이었지만 귀천 없이 모두 맹상군과 동등했다. 맹상군이 객을 맞이하여 앉아서 대화하면 병풍 뒤에 늘 시사()가 있어 맹상군과 객의 대화를 기록했는데 친인척이 사는 곳을 물었다. 객이 떠날 무렵이면 맹상군은 이미 사람을 보내 친척을 방문하여 예물을 드린 뒤였다. 맹상군이 언젠가 밤에 객과 식사를 했는데 누군가 불빛을 가렸다. 객은 밥과 반찬이 같지 않다고 여기고 화를 내며 밥그릇을 엎고 자리를 떴다. 맹상군이 일어나 직접 밥그릇을 들고 객의 것과 비교하게 해주었다. 객은 부끄러워 자살했다. 이 일로 인재들이 맹상군에게 더 많이 모여들었다. 맹상군은 객을 가리지 않고 모두 잘 대우했으므로 사람마다 각자 자신이 맹상군과 친하다고 여겼다.

진() 소왕()은 그(맹상군)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는 먼저 경양군()을 제나라에 인질로 보내 맹상군을 만나고자 했다. 맹상군이 진나라에 가려고 하자 빈객들은 그가 가길 바라지 않아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소대()가 말했다.

“오늘 아침 이 소대가 밖에서 돌아오는데 나무인형과 흙인형이 대화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무인형이 ‘비가 내리면 너는 허물어지겠지’라고 하자 흙인형은 ‘나는 흙에서 태어났으니 허물어져도 흙으로 돌아가지. 지금 비가 오면 너는 쓸려 내려가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지’라고 하더이다. 지금의 진나라는 호랑이나 이리 같은 나라인데 군께서 가시고 하니 돌아오지 못하신다면 흙인형의 비웃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맹상군이 곧 그만 두었다.

제() 민왕() 25년에 끝내 다시 맹상군을 진나라로 보내니 소왕은 바로 맹상군을 재상으로 삼았다. 누군가가 진 소왕에게 “맹상군은 어질고 또 제나라 왕실의 일족입니다. 지금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으니 틀림없이 제나라를 앞세우고 진나라는 뒤로 미룰 것이니 진나라는 위태로워집니다.”라고 유세했다.

이에 진 소왕은 바로 그만 두고 맹상군을 가둔 다음 그를 죽이려 했다. 맹상군은 소왕이 예뻐하는 총희에게 사람을 보내 구원을 청했다. 총희는 “내가 맹상군의 흰여우 가죽으로 만든 옷을 갖고 싶다”고 했다. 당시 맹상군에게는 천금이 나가는 천하에 둘도 없는 흰 여우 가죽으로 만든 옷이 있었는데 진나라로 들어와서 소왕에게 드렸기 때문에 다른 가죽옷이 있을 리 없었다. 맹상군은 걱정이 되어 식객들에게 두루 물었으나 대답할 수 없었다. 가장 아래쪽에 앉아 있던 개 흉내를 잘 내서 물건을 잘 훔치는 사람이 “신이 흰여우 가죽옷을 가져오겠습니다.”라고 했다. 이어 밤중에 개 흉내를 내서 진나라의 궁궐 창고에 잠입하여 바친 흰여웃 가죽옷을 가지고 나와 진왕의 총희에게 바쳤다. 총희가 소왕에게 말하자 소왕은 맹상군을 석방했다.

맹상군은 감옥을 나와 바로 도망치면서 통행증을 위조하고 성을 바꾸어 관문을 나가려 했다. 밤중에 함곡관에 이르렀다. 진 소왕이 맹상군을 놓아준 것을 후회하여 찾았으나, 이미 떠나고 없어 바로 사람을 시켜 말을 타고 맹상군을 뒤쫓게 했다. 맹상군이 함곡관에 이르렀으나 닭이 울어야 객을 내보낸다는 관문법 때문에 추격당할까 두려웠다. 닭울음소리를 낼 줄 아는 아래 자리에 있던 식객이 닭울음소리를 내자 닭들이 일제히 따라 울어 마침내 통행증을 건네고 탈출했다. 그들이 나가고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지날 무렵 진나라의 추격병들이 관문에 이르렀으나, 맹상군은 이미 관문을 나간 뒤라 되돌아갔다.

당초 맹상군이 이 두 사람을 빈객 대열에 넣었을 때 빈객들이 모두 이들을 부끄러워했다. 맹상군이 진나라에서 어려움을 당하자 모두 이 두 사람이 해결했고 이후 빈객들은 모두 감복했다.

맹상군이 조()나라를 지나가게 되자, 조나라의 평원군()은 그를 손님 대접했다. 맹상군이 잘났다는 소문을 들은 조나라 사람들이 나와서 그를 보더니 모두 “당초 설공이 키가 크고 늠름하다더니 지금 보니 왜소한 장부일세.”라며 웃었다.

맹상군이 이를 듣고는 성을 냈다. 빈객들이 모두 마차에서 내려 닥치는 대로 수백 명을 때려죽이니 마을 하나를 다 없애고 떠났다.


제 민왕은 맹상군을 보내 놓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맹상군이 돌아오자 바로 제나라의 재상으로 삼고 정치를 맡겼다.

진나라에 원한을 품은 맹상군은 제나라가 한나라와 위나라를 위해 초나라를 공격했던 일을 가지고 이참에 한나라, 위나라와 함께 진나라를 공격하고자 서주(西)에서 군사와 양식을 빌리고자 했다. 소대가 서주를 위해 (맹상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군께서 제나라로써 한나라, 위나라를 위해 초나라를 9년 동안 공격하여 완()과 섭()의 이북을 취하여 한나라와 위나라를 강하게 했는데 지금 다시 진나라를 공격하여 한나라와 위나라를 더 이롭게 하시려 합니다. 한나라와 위나라가 남으로 초나라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서쪽으로 진나라를 걱정하지 않게 되면 제나라가 위험해집니다. 한나라와 위나라는 틀림없이 제나라를 깔보고 진나라를 두려워할 것이니 신은 군을 위해 걱정이 됩니다. 군께서는 저희 서주와 진나라를 깊게 화합시켜 공격하시지 말고 군대와 양식도 빌리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군께서는 함곡관에 임하시되 공격하지 말고 서주로 하여금 군의 생각을 진 소왕에게 ‘설공은 진나라를 공격하여 한나라와 위나라를 강하게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진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은 왕이 초왕을 협박하려 동쪽 땅을 떼어서 제나라에 주도록 하고, 진나라는 초 회왕을 놓아주는 것으로 초나라와 화친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라 하게 하십시오. 군께서 서주를 이용하여 진나라에 혜택이 돌아가고 진나라는 공격을 받지 않으면서 동쪽 땅으로 공격을 면하게 된다면 진나라는 틀림없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초왕이 풀려나면 반드시 제나라에 감사할 것입니다. 제나라가 동쪽 땅을 얻어 더욱 강해지면 설은 대대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진나라가 크게 약해지지 않고 삼진 서쪽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면 삼진은 제나라를 중시할 것이 분명합니다.”

설공이 “좋소이다”라 하고는 한경()을 진나라에 보내 축하하고 세 나라가 서로 공격하지 않게 했으며, 서주에서 군사와 양식을 빌리지 않게 했다. 이 무렵 초 회왕이 진나라에 들어갔고, 진나라는 그를 억류한 바 있어 회왕을 꼭 구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나라는 끝내 초 회왕을 보내지 않았다.

맹상군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었는데, 그 사인()인 위자()가 맹상군을 위해 봉읍에서 세금을 거두려고 봉읍을 세 차례나 다녀왔지만 아무 것도 갖고 오지 않았다. 맹상군이 그에게 이유를 묻자 “어진 사람이 있어서 몰래 그에게 주었기 때문에 갖고 오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맹상군은 화가 나서 위자를 물러나게 했다. 몇 년 뒤 어떤 사람이 제 민왕에게 맹상군을 헐뜯길 “맹상군이 반란을 일으킬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전갑()이 민왕을 겁박하기에 이르자, 민왕은 맹상군을 의심했다. 맹상군은 바로 달아났다. 위자에게 양식을 받았던 그 현자가 이 소식을 듣고는 바로 글을 올려 맹상군이 반란을 꾀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의 몸으로 맹세하겠다. 하고는 진짜로 왕궁 문 앞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맹상군의 결백을 밝혔다. 민왕이 놀라 행적을 추적하여 조사해보니 정말 맹상군이 반란을 꾀하지 않았다. 이에 다시 맹상군을 부르니 맹상군은 병을 핑계로 사양하며 설에서 노년을 보내길 청하자 민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 뒤 진나라에서 도망쳐온 장수 여례()가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소대를 곤경에 빠뜨리려 했다. 이에 소대는 맹상군에게 “주최()가 제나라에 있을 때 아주 좋았습니다. 그러나 제왕이 그를 내쫓고 친불()의 말에 따라 여례를 재상으로 삼은 것은 진나라의 비위를 맞춘 것입니다. 제나라와 진나라가 화친하면 친불과 여례가 중시될 것이고, 이들이 기용되면 제나라와 진나라는 분명 군을 깔볼 것입니다. 그러니 군께서는 급히 군을 북으로 보내 조나라를 재촉하여 진나라, 위나라와 화친하게 하고, 주최를 거두어 잘 대우하면서 제왕의 신임을 되찾게 하여 천하에 변화가 생기지 않게 하시느니만 못합니다. 제나라가 진나라와 연맹하지 않으면 천하가 제나라로 모여들 것이고 친불은 틀림없이 달아날 것인 즉, 제왕이 누구와 더불어 그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맹상군이 그 계책을 따르자 여례는 맹상군을 증오했다. 맹상군은 겁이 나서 바로 진나라의 재상 양후() 위염()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제가 듣자하니 진나라가 여례를 통해 제나라와 수교하려고 한다지요. 제나라는 천하의 강국이니 그대는 틀림없이 경시당할 것입니다. 제나라와 진나라가 수교하여 삼진에 대응하면 여례는 재상을 겸하게 될 것이 뻔하니, 이는 그대가 제나라를 통하여 여례를 중요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제나라가 천하 군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 그대에 대한 제나라의 원한이 깊어질 것입니다. 그대는 진왕에게 제나라를 정벌하라고 권하는 것이 낫습니다. 제나라를 격파하면 이 몸이 나서서 그대에게 봉지를 주라고 청하겠습니다. 제나라가 격파되고 나면 진나라는 진나라(; 위)이 강해지는 것이 두려워 틀림없이 그대를 중용하여 진나라(, 위)과 관계를 맺으려 할 것입니다. 진나라(위)가 제나라에 패하면 진()나라를 두려워 할 것이고, 진나라(위)는 분명 그대를 중용하여 진()나라와 수교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는 제나라를 격파한 공로에다 진나라(위)을 끌어들이게 되고, 그대가 제나라를 격파하고 상을 받으면 진나라, 진나라(위)이 그대를 중시할 것입니다. 만약 제나라를 격파하지 못하고 여례가 다시 기용되면 그대는 틀림없이 큰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이에 양후는 진 소왕에게 진나라를 치라고 말했고, 여례는 도망갔다.

그 뒤 제 민왕은 송()나라를 멸망시키자, 더욱 교만해져 맹상군을 제거하려고 했다. 맹상군은 두려워 위()나라로 갔다. 위 소왕()이 재상으로 삼아 서쪽으로 진()나라, 조나라와 연합하고 연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여 격파했다. 제 민왕이 거()나라로 도망갔다가 결국 죽었다. 제 양왕()이 즉위하자 맹상군은 제후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제 양왕은 막 즉위하여 맹상군이 두려워서 그와 연합하고 다시 친하게 지냈다. 전문이 죽자, 맹상군이란 시호를 받았다. 여러 아들들이 자리를 다투자 제나라와 위나라가 함께 설을 없애버리니 맹상군의 후사가 끊어졌다.

당초 풍환()은 맹상군이 객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는 짚신을 신고 그를 보러왔다. 맹상군이 “선생께서 먼 길을 힘들다 않고 오셨는데 저에게 무슨 가르침을 주시렵니까?”라고 했다. 풍환은 “듣자니 군께서 인재를 좋아하신 다기에 빈천한 몸을 이끌고 군에게 왔습니다.”라고 했다.

맹상군이 (풍환을) 전사()에 머무르게 한 지 열 흘, 맹상군은 전사 관리인에게 “손님은 무얼 하고 계신가?”라고 물었다. “풍 선생께서는 너무 가난하여 검 한 자루 밖에 없는데 그나마 풀로 손잡이를 감은 것입니다. 그 검을 두드리며 ‘장검아, 돌아가자꾸나! 식사에 물고기가 없구나.’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맹상군은 그를 행사()로 옮겨주고 식사에 생선을 올리게 했다. 닷새 뒤 다시 전사 관리자에게 물었다. “손님께서는 다시 검을 두드리며 ‘장검아 돌아가자꾸나! 외출하려고 해도 수레가 없구나.’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맹상군은 그를 대사()로 옮기고 출입 때 수레를 탈 수 있게 했다. 닷새 뒤 맹상군은 다시 전사 책임자에게 물었다. 책임자는 “선생께서는 또 검을 두드리며 ‘장검아 돌아가자꾸나! 집이 없구나.’라는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다.”라고 답했다. 맹상군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1년 동안 풍환은 말이 없었다. 맹상군은 그때 제나라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설 땅 1만 호에 봉해졌다. 그 식객이 3천에 이르렀기 때문에 읍에서 들어오는 수입으로는 객을 보살피기 부족하여 사람을 보내 설에다 돈을 빌려주게 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록 수입이 없었다. 돈을 빌려간 사람 대부분이 이자조차 낼 수 없어 객을 보살필 수 없었다. 맹상군이 걱정이 되어서 좌우에게 “누구를 시켜 설에서 빚을 거두어 오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전사 책임자는 “대사의 손님 풍공이 용모가 출중하고 장자인데다 다른 능력도 없으니, 가서 빚을 받아오게 하면 됩니다.”라고 답했다.

맹상군이 바로 풍환을 찾아 이 일을 요청하며 “빈객들께서 이 못난 전문을 마다 않고 3천 명이 넘게 저를 찾아 오셨으나 봉읍의 수입으로는 빈객을 모시기 부족하여 설에 이자를 놓고 돈을 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설의 수확이 좋지 않아 많은 백성들이 이자조차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빈객들의 식사조차 드릴 수 없으니 선생께서 이 일을 맡아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요청했다. 풍환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인사를 하고 설에 와서 맹상군에게 돈을 빌린 사람을 모두 불러 모아 10만 전을 거두었다. 이어 술을 많이 빚고, 살찐 소를 사서 돈을 빌려간 사람을 다 불러 모았는데, 이자를 낼 수 있는 사람도 낼 수 없는 사람도 다 오게 하되 모두 차용증을 가져오게 해서 합쳐 보았다. 모두가 모이자 소를 잡고 술자리를 벌였다. 술이 돌자 이전의 차용증을 합쳐 보고는 이자를 낼 수 있는 사람에게는 기한을 정해주고, 가난하여 이자를 낼 수 없는 사람의 차용증은 거두어 불태웠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맹상군께서 돈을 빌려준 까닭은 생계가 어려운 백성들이 본업에 종사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자를 받는 까닭은 빈객들을 모실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는 기한을 정해주었고, 빈궁한 사람들은 차용증을 불태워 이자를 포기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잘 지내기 바랍니다. 주인이 이러할진대 어찌 그를 배반하겠습니까!”

앉아 있던 사람이 모두 일어나 거듭 절했다.


맹상군은 풍환이 차용증을 불태웠다는 소식을 듣고는 노하여 사람을 시켜 풍환을 불러들였다. 풍환이 오자 맹상군은 이렇게 말했다.

“이 전문의 식객이 3천이나 되기 때문에 설에다 돈을 빌려준 것입니다. 이 전문의 봉지에서 들어오는 수입은 적은데 많은 백성들이 때가 되어도 이자를 내지 않아 빈객들의 식사조차 드리지 못할까 걱정이 되어 선생께 빚을 받아오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듣자하니 선생께서 돈을 받아 많은 고기와 술을 대접하고 차용증은 불태웠다 하니 사실입니까?”

풍환이 “그렇습니다. 소를 잡고 술을 많이 차리지 않으면 다 모을 수가 없고, 그러면 여유가 있는지 부족한지를 모르게 됩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는 기한을 정해주면 됩니다. 부족한 사람은 10년 기한을 주어도 이자만 늘고, 급하면 도망쳐 증서를 버릴 것입니다. 급해지면 어떻게 해도 갚지 못합니다. 위로는 군께서 이익만 밝히고 백성은 아끼지 않는 것이 되고, 아래로는 주인의 빚을 갚지 못해 도망가는 꼴이 되니 이는 인재와 백성을 격려하고 군의 명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쓸모없는 차용증을 불태워 받을 수 없는 헛된 돈을 버림으로써 설의 백성들을 군과 가깝게 하고 군의 좋은 명성을 드러낸 것인데 군께서는 어찌 의심하십니까?”라고 했다. 맹상군은 바로 손뼉을 치며 풍환에게 감사했다.

제왕은 진()나라와 초나라의 비방에 홀려 맹상군의 명성이 그 군주보다도 높고 제나라의 권력을 오로지 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끝내 맹상군을 자리와 봉지를 없앴다. 여러 빈객들이 맹상군이 배척당하는 것을 보고 다 떠났다.

풍환은 “신에게 진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수레 한 대를 빌려주시면 반드시 나라가 군을 중시하고 봉지를 더 줄 수 있게 만들 테니 어떻습니까?”라고 했다. 맹상군은 바로 수레와 예물을 주어 보냈다. 풍환이 곧 서쪽으로 가서 진왕에게 이렇게 유세했다.

“마차를 타고 말을 끌고 서쪽 진나라로 들어오는 천하의 유세객들치고 진나라를 강하게 제나라를 약하게 만들려 하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또 마차를 타고 말을 끌고 동쪽 제나라로 들어오는 자들치고 제나라를 강하게 진나라를 약하게 만들려 하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자웅과 같은 천하의 두 나라는 기세 상 둘 다 수컷이 될 수 없으니 수컷이 천하를 얻을 것입니다.”

진왕이 무릎을 꿇고 그에게 “그럼 어찌 하면 진이 암컷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풍환은 “왕께서도 제가 맹상군을 폐한 사실을 알고 계시죠?”라고 했다. 진왕이 “들었습니다.”라고 했다. 풍환은 이렇게 말했다.

“제나라를 천하의 중요한 나라로 만든 사람이 맹상군입니다. 지금이 제왕이 헐뜯는 말만 듣고 그를 폐했으니 마음으로 원망하며 틀림없이 제나라를 배반할 것입니다. 제나라를 배반하고 진나라에 오면 제나라와 사람들의 실정도 다 진나라로 따라 들어올 것이고 제나라의 땅도 얻을 터인데 어찌 수컷뿐이겠습니까? 그러니 왕께서는 서둘러 예물을 실어 사람을 보내 조용히 맹상군을 맞아들이시되 때를 놓치지 않도록 하십시오. 제나라가 알아채고 다시 맹상군을 기용하는 날에는 자웅이 어디로 갈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진왕이 크게 기뻐하며 바로 수레 10승과 황금 100일을 보내서 맹상군을 맞이하게 했다. 풍환이 진왕에게 인사하고 먼저 움직여 제나라에 이르러 제왕에게 이렇게 유세했다.

“마차를 타고 말을 끌고 동쪽 제나라로 들어오는 천하의 유세객들치고 제나라를 강하게 진나라를 약하게 만들려 하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또 마차를 타고 말을 끌고 서쪽 진나라로 들어오는 자들치고 진나라를 강하게 하고 제나라를 약하게 만들려 하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무릇 진나라와 제나라는 자웅과 같은 나라로 진나라가 강하면 제나라가 약해집니다. 이런 기세 상 두 나라가 모두 수컷이 될 수 없습니다. 지금 신이 가만히 들자하니 진나라가 사신에게 마차 10승과 황금 100일을 딸려보내 맹상군을 맞이하게 했다고 합니다. 맹상군이 서쪽으로 가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서쪽으로 가서 진나라의 재상이 되면 천하가 거기로 붙어 진나라는 수컷이 되고 제나라는 암컷이 될 것이니, 암컷이 되면 임치()와 즉묵()은 위태로워집니다. 왕께서는 어째서 진나라의 사자가 이르기 전에 먼저 맹상군을 다시 기용하고 봉읍을 넓혀줌으로써 그에게 사과하시지 않는 것입니까? 그러면 맹상군은 틀림없이 기쁘게 그것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진나라가 강한 나라이긴 하지만 어찌 남의 나라 사람을 재상으로 맞아들이겠다고 청할 수 있겠습니까? 진나라의 음모를 꺾어서 패자가 되려는 책략을 끊어야 합니다.”

제왕이 “좋습니다.”라 하고는 바로 사람을 시켜 국경에서 진나라의 사신을 살피게 했다. 진나라의 사신이 탄 마차가 제나라의 국경으로 들어오자 사신은 말을 달려 이를 보고했다. 왕은 맹상군을 불러 재상의 지위를 회복시키는 한편 그 옛읍의 땅을 주고 다시 1천 호를 더해주었다. 진나라의 사신은 맹상군이 다시 제나라의 재상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차를 돌려 돌아갔다.

제왕이 비방 때문에 맹상군을 폐한 뒤로 식객들이 모두 떠났었다. 뒤에 다시 불러 자리를 회복시키자 풍환이 맹상군을 맞이했다. (도성에) 도착할 무렵 맹상군은 크게 탄식하며 말했다.

“이 전문이 늘 빈객을 좋아하여 그들을 대우하는데 감히 소홀함이 없어 식객이 3천이 넘은 것은 선생께서도 아시는 바입니다. 식객들은 이 전문이 어느 날 쫓겨나는 것을 보고는 모두 이 전문을 배반하고 떠나서는 이 전문을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지금 선생 덕분에 자리를 회복했는데 빈객들이 또 무슨 면목으로 이 전문을 다시 볼 수 있겠습니까? 만약 다시 이 전문을 보려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그 얼굴에 침을 뱉어 크게 욕을 보일 것입니다!”

풍환이 말고삐를 매고 수레에서 내려와 절을 했다. 맹상군도 수레에서 내려 그를 맞으며 “선생께서 식객들을 대신해서 사과하시는 겁니까?”라고 말했다. 풍환은 “식객들을 위해서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군의 말씀에 실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릇 사물에는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 있고 원래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군께서는 아십니까?”라 하자 맹상군은 “어리석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살아 있는 것이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라는 것은 사물이 꼭 그렇기 되기 때문입니다. 부귀하면 인재가 많이 모이고, 가난하고 천하면 친구가 적어지는 것은 사물의 이치가 원래 그런 것입니다. 군께서는 아침에 시장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날이 밝으면 어깨를 부딪치며 다투어 문으로 들어가지만 날이 저물고 나면 시장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침은 좋고 저녁은 싫어서가 아니라 바라는 물건이 거기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군께서 자리를 잃자 빈객들이 다 떠났다고 해서 이들을 원망하여 그저 빈객들의 길을 끊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군께서는 빈객들을 전처럼 대우하시길 원합니다.”

맹상군은 거듭 절하며 “삼가 그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선생의 말씀을 들었는데 감히 가르침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일찍이 설()을 지난 적이 있는데, 그 동네에 사나운 젊은이들이 많은 것이 추()나라나 노()나라와는 달랐다. 그 까닭을 물으니 ‘맹상군이 천하의 협객을 자처하는 자들과 범법자들을 불러 모으니 설로 들어온 자들이 6만이 넘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세상에 전해오길 맹상군이 빈객을 좋아하는 것을 즐겁게 여겼다고 하던데 그 명성이 헛말이 아닌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