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 卷第二十三 [百濟本紀 第一]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宣撰
百濟本紀 第一 始祖 溫祚王·多婁王·己婁王·盖婁王·肖古王
百濟始祖 溫祚王 其父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 或云 朱蒙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來爲太子 沸流·溫祚 恐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 ※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陁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 春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其於開 ※基創業 頗 ※有內助 故朱蒙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及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太 ※子 以至嗣位焉 於是 沸流謂弟溫祚曰 “始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勸勞多矣 及大王厭世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鬱鬱如疣贅 不如奉母氏 南遊卜地 別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至彌鄒忽以居之 北史及隋 ※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 ※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未知孰是
元年 夏五月 立東明王廟
二年 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宜繕兵積穀 爲拒守之計” 三月 王以族父乙音 有智識膽力 拜爲右輔 委以兵馬之事
三年 秋九月 靺鞨侵北境 王帥勁兵 急擊大敗之 賊生還者十一二 冬十月 雷 桃李華
四年 春夏 旱 饑疫 秋八月 遣使樂浪修好
五年 冬十月 巡撫北邊 獵獲神鹿
六年 秋七月辛未 ※晦 日有食之
八年 春二月 靺鞨賊 ※三千 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 賊糧盡而歸 王簡銳卒 追及大斧峴 一戰克之 殺虜五百餘人 秋七月 築馬首城 竪甁山柵 樂浪太守使告曰 “頃者 聘問結好 意同一家 今逼我疆 造立城柵 或者其有蠶食之謀乎 若不渝舊好 隳城破柵 則無所猜疑 苟或不然 請一戰以決勝負” 王報曰 “設險守國 古今常道 豈敢以此有渝於和好 宜若執事之所不疑也 若執事恃强出師 則小國亦有以待之耳” 由是 與樂浪失和
十年 秋九月 王出獵 獲神鹿 以送馬韓 冬十月 靺鞨寇北境 王遣兵二百 拒戰於昆彌川上 我軍敗績 依靑木山自保 王親帥精騎一百 出烽峴救之 賊見之卽退
十一年 夏四月 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殺掠一百餘人 秋七月 設禿山·狗川兩柵 以塞樂浪之路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嫗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夏五月 王謂臣下曰 ※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日 ※ 況今妖祥屢見 國母棄 ※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腴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畫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九月 立城闕
十四年 春正月 遷都 二月 王巡撫部落 務勸農事 秋七月 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
十五年 春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十七年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 夏四月 立廟以祀國母
十八年 冬十月 靺鞨掩至 王帥兵 逆戰於七重河 虜獲酋長素牟 送馬韓 其餘賊盡坑之 十一月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乃還
二十年 春二月 王設大壇 親祠 ※天地 異鳥五來翔
二十二年 秋八月 築石頭·高木二城 九月 王帥騎兵一千 獵斧峴東 遇靺鞨賊 一戰破之 虜獲生口 分賜將士
二十四年 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宜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如義何” 王慙遂壞其柵
二十五年 春二月 王宮井水暴溢 漢城人家馬生牛 一首二身 日者曰 “井水暴溢者 大王㪍興之兆也 牛一首二身者 大王幷鄰國之應也” 王聞之喜 遂有幷呑辰·馬之心
二十六年 秋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久 ※ 儻爲他所幷 則唇 ※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 固守不下
二十七年 夏四月 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秋七月 築大豆山城
二十八年 春二月 立元子多婁爲太子 委以內外兵事 夏四月 隕霜害麥
三十一年 春正月 分國內民戶爲南北部 夏四月 雹 五月 地震 六月 又震
三十三年 春夏 大旱 民饑相食 盜賊大起 王撫安之 秋八月 加置東西二部
三十四年 冬十月 馬韓舊將周勤 據牛谷城叛 王躬帥兵五千 討之 周勤自經 腰斬其尸 幷誅其妻子
三十六年 秋七月 築湯井城 分大豆城民戶居之 八月 修葺圓山·錦峴二城 築古沙夫里城
三十七年 春三月 雹大如雞子 鳥雀遇者死 夏四月 旱 至六月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 浿帶之間 空無居人
三十八年 春二月 王巡撫 東至走壤 北至浿河 五旬而返 三月 發使勸農桑 其以不急之事擾民者 皆除之 冬十月 王築大壇 祠 ※天地
四十年 秋九月 靺鞨來攻述川城 冬十一月 又襲斧峴城 殺掠百餘人 王命勁騎二百拒擊之
四十一年 春正月 右輔乙音卒 拜北部解婁爲右輔 解婁本扶餘人也 神識淵奧 ※ 年過七十 膂 ※力不愆 故用之 二月 發漢水東北諸部落人年十五歲以上 修營慰禮城
四十三年 秋八月 王田牙山之原五日 九月 鴻鴈百餘集王宮 日者曰 “鴻鴈民之象也 將有遠人來投者乎” 冬十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
四十五年 春夏 大旱 草木焦枯 冬十月 地震 傾倒人屋
四十六年 春二月 王薨
[역주:23권1] 백제(百濟)
온조가 세운 나라. 최초의 국호는 十濟였으나 뒤에 백제로 바꾸었다. 그후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면서 일시적으로 南夫餘로 고쳤으나 곧 백제로 환원되었다. 《帝王韻紀》 卷下에는 ‘後王或號 南夫餘 或稱鷹準’이라 하여 사비로 천도한 이후의 국호를 鷹準으로도 표기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사의 경우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에는 마한을 구성한 78국의 하나로서 伯濟國이 나오고, 《송서》 이후에는 백제로 표기되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를 구다라(クダラ)로 훈독하고 있다. 백제라는 국호가 생겨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百姓樂從'說과 '百家濟海'說이 있다. 본권 주석 20 참조. 鷹準은 《三國遺事》 권3 興法篇 黃龍寺九層塔條에 나오는 鷹遊와 연결된다. 응준이란 국호는 백제의 扶餘系 지배세력과는 관계짓기가 힘들며 백제가 馬韓 등의 지역을 영유하면서 그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매' 관련 문화를 포용하게 됨으로써 국호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한다(趙法鍾, 〈百濟 別稱 應準考〉, 《韓國史硏究》 66, 1989).
[역주:23권2] 온조왕(溫祚王)
백제의 시조. 재위기간은 서기전 18~서기 28년. 《帝王韻紀》 권하에는 殷祚로 나온다. 그의 出系에 대해 즉위년조의 본문에서는 주몽과 졸본왕녀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細注에는 주몽과 졸본인 延陀勃의 딸 召西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주몽의 첫째 아들 유리가 북부여에서 졸본 부여로 와서 태자가 되자 형 비류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와 서기전 18년에 한강 유역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웠다. 온조집단은 扶餘族 출신이라는 의미에서 扶餘를 姓으로 하였으며, 원년(서기전 18)에는 부여족의 族祖인 東明王의 祠堂을 세워 부여적 전통을 확립하였다.
왕에 대한 백제의 고유한 칭호로는 《周書》 권49 열전 百濟傳에는 『王姓扶餘氏 號於羅瑕 民呼爲鞬吉支 夏言王也 妻號於陸』이라 하여 於羅瑕와 鞬吉支가 있었다. 《日本書紀》에 의하면 백제왕을 'コニキシ:코니키시'(《日本書紀》 권9 神功紀 46년조) 및 'コキシ:코키시’(《日本書紀》 권9 神功紀 46년조 및 같은 책 권14 雄略紀 23년조)로 나온다. 'コ:코'와 'コニ:코니'는 같은 표기로서 우리말의 “큰(大)”을 音寫한 것이고, 이는 건길지의 '건'과 통한다. 그리고 '吉支’는 'キシ:키시'와 통하며 '吉師'와 같이 貴人이나 왕을 칭하는 말이라고 한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을유문화사, 351쪽의 주1). 한편 於羅瑕에 대해 이를 종래 巫歌에 “어라아만수”의 어라아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하는 견해(李丙燾, 앞의 책, 351쪽의 주1)도 있으나, 於羅瑕의 “瑕”는 족장을 의미하는 고구려나 부여의 加 또는 신라의 干과 계통을 같이 하는 것으로(都守熙, 《백제어 연구》Ⅲ, 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94, 38~42쪽) 볼 수 있겠다.
왕에 대한 백제의 고유한 칭호로는 《周書》 권49 열전 百濟傳에는 『王姓扶餘氏 號於羅瑕 民呼爲鞬吉支 夏言王也 妻號於陸』이라 하여 於羅瑕와 鞬吉支가 있었다. 《日本書紀》에 의하면 백제왕을 'コニキシ:코니키시'(《日本書紀》 권9 神功紀 46년조) 및 'コキシ:코키시’(《日本書紀》 권9 神功紀 46년조 및 같은 책 권14 雄略紀 23년조)로 나온다. 'コ:코'와 'コニ:코니'는 같은 표기로서 우리말의 “큰(大)”을 音寫한 것이고, 이는 건길지의 '건'과 통한다. 그리고 '吉支’는 'キシ:키시'와 통하며 '吉師'와 같이 貴人이나 왕을 칭하는 말이라고 한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을유문화사, 351쪽의 주1). 한편 於羅瑕에 대해 이를 종래 巫歌에 “어라아만수”의 어라아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하는 견해(李丙燾, 앞의 책, 351쪽의 주1)도 있으나, 於羅瑕의 “瑕”는 족장을 의미하는 고구려나 부여의 加 또는 신라의 干과 계통을 같이 하는 것으로(都守熙, 《백제어 연구》Ⅲ, 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94, 38~42쪽) 볼 수 있겠다.
[역주:23권3] 추모(鄒牟)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다른 이름, 朱蒙이라고도 하였다. 추모라는 표기는 〈廣開土王陵碑〉에 나온다. 고구려 시조의 이름 표기에 대해서는 본서 권13 주석 3 참조.
[역주:23권4] 북부여(北扶餘)
서기전 2세기 경부터 494년까지 북만주지역에 있었던 국가. 중국측 기록인 《論衡》과 《三國志》에 인용된 《魏略》에는 시조 동명이 북에서부터 이주해 와서 건국한 것으로 나온다. 《삼국지》 권30 魏書 동이전 扶餘傳에 의하면(북)부여의 위치는 서로는 烏桓·鮮卑와 접하고, 동으로는 읍루와 잇닿아 있고, 남으로는 고구려와 이웃하고, 서남으로는 요동의 중국세력과 연결된 것으로 나온다. 부여의 중심지인 扶餘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의 중국 흑룡강성의 農安·長春지역으로 보는 설(李基白·李基東, 《한국사 강좌》 I 고대 편, 일조각, 1982, 75쪽), 阿勒楚喀 일대로 보는 설(池內宏, 〈扶餘考〉, 《滿鮮史硏究》 上世篇1에 재수록, 吉川弘文館, 동경, 1951, 452~454쪽), 초기에는 吉林市 지역이 중심이었다가 후기에는 고구려에 밀려서 慶安이 중심지가 되었다고 보는 설(盧泰敦, 〈扶餘의 境域과 그 變遷〉 《國史館論叢》 4, 국사편찬위원회, 1989) 등이 있다. 한편 《삼국유사》 권1 紀異篇 북부여조에는 천제의 아들임을 칭한 解慕漱가 서기전 59년에 해부루를 쫓아 내고 세운 나라로 나온다. 주몽이 남으로 피난하기 이전에 있었던 나라에 대해 본 기사와 〈광개토왕릉비〉에는 북부여로 나오나 본서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즉위년조에는 東扶餘로 나와 차이가 난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13 주석 13 참조.
[역주:23권5] 졸본부여(卒本扶餘)
부여족의 일파가 卒本지역(현재의 중국 吉林省 桓因지방)에 세운 나라. 《삼국유사》 권1 紀異篇 고구려조에는 『高句麗卽卒本扶餘』라 하여 고구려=졸본부여로 보고 있고, 安鼎福도 주몽이 沸流水에 나라를 세운 후 『國號高句麗 亦號卒本扶餘』라 하여 졸본부여를 고구려의 다른 이름으로 파악하고 있다(安鼎福, 《東史綱目》 제 1 下 甲申 馬韓條). 그러나 본 기사에는 주몽이 졸본부여로 도망와서 졸본부여의 왕녀와 결혼하였다가, 졸본부여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본다. 그런데 주몽이 난을 피하여 정착한 곳에 대해 본 기사에는 졸본부여로, 본서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즉위년조에는 卒本川으로, 《魏書》 권100 열전 고구려전에는 紇升骨城으로, 〈광개토왕릉비〉에는 忽本西城山으로 나온다. 졸본의 위치는 현재의 중국 吉林省 渾江상류의 桓因지방으로 추정된다(이병도, 앞의 책, 351쪽). 한편 《삼국유사》 권1 紀異篇 고구려조에서는 『高句麗卽卒本扶餘 或云今和州 又成州等皆誤矣 卒本州在遼東界』라 하여 和州說과 成州說은 잘못이라고 하면서 遼東界說을 주장하고 있다.
[역주:23권6] 부여 왕은 …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본서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즉위년조에 細註로 간략히 나온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권13 주석 45 참조. 주몽이 졸본부여의 둘째 딸과 결혼한 후 졸본부여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주몽이 북부여에서 이동해 와서 졸본지역 세력을 무력으로 정복한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토착세력과 공존하다가 이를 흡수한 것을 반영해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역주:23권7] 둘째 아들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東明第三子 一云第二子』로 나온다. 《삼국유사》에서 제3자라고 한 것은 주몽의 전처의 소생인 孺留(瑠璃)까지를 넣어서 계산한 것이다. 온조 중심의 건국설화에서든 비류중심의 건국설화에서든 비류와 온조가 형제로 나오는 것은 비류를 시조로 하는 집단과 온조를 시조를 하는 집단이 연맹을 형성한 후 이 연맹 관계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이를 시조형제설화라고 할 수 있다. 시조형제설화의 예로는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慶尙道 高靈縣 建置沿革條에 고령의 대가야의 시조인 惱窒朱日과 김해의 금관가야의 시조인 惱窒靑裔가 천신 夷毗詞之와 가야산신 正見母主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 것을 들 수 있다(盧重國, 《百濟政治史硏究》, 일조각, 1988, 62~63쪽 참조).
[역주:23권8] 월군(越郡)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이 越郡을 지명으로 보지 않고 건너편 고을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351쪽).
[역주:23권9] 오간(烏干)
온조를 수행하여 백제국을 세우는데 보필한 신하. 그러나 이 이상의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
[역주:23권10] 마려(馬黎)
烏干과 더불어 온조를 수행하여 백제국을 세우는 데 보필한 신하. 그러나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
[역주:23권11] 한산(漢山)
본 기사에 나오는 한산의 위치는 백제의 최초의 도읍지를 어디로 볼 것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최초의 도읍지를 하북 위례성으로 볼 경우 이 한산은 北漢山에 비정할 수 있다(丁若鏞, 〈我邦疆域考〉 3; 李丙燾,《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491 ~ 497쪽). 그러나 하남위례성으로 볼 경우 南漢山에 해당시킬 수 있다(李弘植, 《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1971, 321~327쪽). 그런데 뒤에 나오는 負兒岳을 三角山에 비정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 이때의 한산은 북한산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역주:23권12] 부아악(負兒嶽)
현재의 서울 삼각산을 말한다. 조선 영조 21년(1745)에 편찬된 《北漢志》 山河조 참조. 金正浩, 《大東地志》 권1 漢城府 山水條에도 『三角山(距府北十五里 百濟稱負兒岳 又云橫岳 又云華山…)』이라 하여 부아악을 삼각산에 비정하고 있다.
[역주:23권13] 한수(漢水)
한강으로도 표기된다. 현재의 한강은 남한강 ·북한강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와 구분하는 의미에서 현재의 서울 지역을 통과하는 한강을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한수=한강의 다른 이름으로는 阿利水(〈광개토왕릉비〉), 都里河(본서 권25 백제본기 개로왕 20년조) 등이 있다.
[역주:23권14] 미추홀(彌鄒忽)
현재의 仁川을 말한다. 본서 권35 잡지 地理2의 漢州 栗津郡 郡城縣條에 『邵城縣 本高句麗買召忽縣 景德王改名 今仁州(一云 慶原 買召一作彌鄒)』라 한 기사와 《高麗史》 권56 志10 地理一 楊廣道 仁州條에 『仁州本高句麗買召忽 一云彌鄒忽』이라 한 기사 참조. 인천의 文鶴山上에는 沸流城基·城門扉板·沸流井이 남아 있다고 하고(安鼎福, 《東史綱目》 제1 癸卯 馬韓條), 또 文鶴洞에는 彌鄒王 陵으로 불리는 유적도 있다고 한다(鄭永鎬, 〈서울지역의 百濟文化〉, 《馬韓百濟文化》 3, 馬韓百濟文化硏究所, 1979, 87쪽).
[역주:23권15] 한수 남쪽[河南]의 위례성(慰禮城)
백제가 한수 이북에서 한수 이남으로 천도한 후의 도읍지. 학계에서는 흔히 河南慰禮城으로 부른다. 이 위례성에 대해 본서 권37 잡지 지리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그러나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都慰禮城 一云蛇川 今稷山』으로, 같은 책 권2 紀異篇 南扶餘·前百濟條에는 『彌鄒忽 仁州慰禮 今稷山』이라 하여 위례성의 一名이 蛇川임을 전하면서 현재의 충청남도 천안군 稷山으로 비정하고 있다. 위례성을 직산에 비정하는 설은 조선후기까지 대체로 받아들여졌으나 丁若鏞이 직산설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한강유역설을 주장하면서 부정되고 말았다.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경기도 河南市 春宮洞 일대로 보는 설(李丙燾, 앞의 책, 352쪽 주1), 서울시 송파구 풍납동에 있는 風納洞土城으로 보는 설(金廷鶴, 〈서울近郊의 百濟遺蹟〉, 《鄕土서울》 39, 1981), 서울시 송파구 오륜동에 있는 夢村土城으로 보는 설(崔夢龍, 〈漢城時代의 百濟의 都邑地와 領域〉, 《震檀學報》 60, 진단학회, 1985) 등이 있는데 이 중 몽촌토성설이 통설로 되어 있다. 위례성의 명칭의 기원에 대해 '위례'는 ‘우리’ 또는 '울타리'를 뜻하는 것이라는 견해(丁若鏞, 《我邦疆域考》 및 成周 鐸, 〈漢江流域 百濟初期 城址硏究〉, 《百濟硏究》 14, 충남대 백제연구소, 1984), 阿利水·郁里河의 阿利·都里가 '大'의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기원하였다고 보는 견해(都守熙, 〈百濟의 國號에 관한 몇 問題〉, 《百濟硏究》 22, 충남대 백제연구소, 1991) 등이 있다.
[역주:23권16] 전한(前漢)
중국 왕조의 하나. 高祖 劉邦이 秦을 멸하고 長安에서 제위에 오르고서부터 王莽에게 簒奪되기까지의 漢을 말한다. 西漢이라고도 한다. 존속 기간은 서기전 202 ~ 서기 8년.
[역주:23권17] 성제(成帝)
중국 漢나라 제12대 황제. 元帝의 태자. 字는 太孫. 재위기간은 서기전 33 ~ 서기전 8년.
[역주:23권18] 홍가(鴻嘉)
前漢 성제 때의 연호로 서기전 20~17년까지이다. 홍가 3년은 서기전 18년이다.
[역주:23권19]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
비류가 미추홀에 정착하고 온조가 위례에 정착하였다는 것은 이들이 각각 미추홀과 위례에서 소국을 세운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는 것은 위례세력이 미추홀세력을 병합한 것을 말한다. 위례세력이 미추홀 세력을 병합한 시기에 대해 본 기사에서는 온조왕 즉위년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온조왕대는 한강 유역을 기반으로 나라를 세운 초창기이므로 인천지역까지를 병합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이는 비류와 온조가 형제로 나오는 것은 두 집단이 연맹을 형성한 것을 의미하며, 또 비류가 형으로 나오는 것은 초기에는 비류집단이 연맹의 주도권을 잡은 것을 반영해 준다는 사실에서 방증된다. 그러므로 본 기사는 후대의 사실을 시조대에 소급 ·부회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위례세력이 미추홀 세력을 병합한 시기는 2세기 말의 초고왕대로 추정된다. 이는 백제왕 계상에서 볼 때 초고왕대에 부여씨를 칭하고 그 후손이 왕위를 계승하고 있는 것에서 추론할 수 있다(盧重國, 《百濟政治史硏究》, 일조각, 1988, 66~77쪽 참조).
[역주:23권20] 국호를 백제(百濟)
백제라는 국호가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 본 기사에는 『百姓樂從』으로 나오나 《隋書》 권81 열전 百濟傳에는 『百家濟海 因號百濟』라 하여 百家가 바다를 건넜다는 데서 백제라는 국호가 만들어진 것을 전해주고 있다. 이 두 기사는 모두 국호에 대한 후대의 덧붙여진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역주:23권21] 그 계통[世系]은 고구려인과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이 기사는 백제 왕실의 出自가 부여족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조 온조의 아버지가 고구려를 세운 주몽임에도 불구하고 그 출자를 고구려에서 나온 것으로 하지 않고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나왔다고 한 것은 부여족임을 강조하여 고구려와 比肩하려는 의식의 소산이 아닐까 한다. 이는 개로왕이 북위에 국서를 보내 『臣與高句麗源出扶餘』라 한 기사(본서 권25 백제본기 蓋國王 18년조 및 《魏書》 권100 열전 백제전)에서 짐작할 수 있다. 백제 왕실과 고구려 왕실이 동일 계통이라는 것은 《日本書紀》 권19 흠명기 14년조에 성왕의 아들 餘昌(威德王)이 고구려 장수와 對戰하기 전에 『今欲早知 與吾可以 禮問答者姓名年位 餘昌對曰 姓是同姓 位是扞率 年二十九矣』라 한 기사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역주:23권22] 부여(扶餘)를 씨(氏)로 삼았다.
백제 왕실의 성에 대해 본 기사는 부여씨라고 하고 있다. 한편 《삼국유사》 권1 紀異篇 남부여·전백제조에는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解爲氏』라 하여 解氏설을 전해주고 있다. 부여씨와 해씨가 왕성으로 나오는 것에 대해 해씨는 沸流집단이 칭한 성씨이고, 부여씨는 온조집단이 칭한 성씨인데 이 두 집단이 연맹장을 배출하였기 때문에 해씨와 부여씨가 왕성으로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온조집단이 扶餘氏를 칭하게 된 것은 비류를 시조로 하는 解氏집단을 대신하여 온조집단이 연맹의 맹주가 되자 자기 집단의 권위를 높이고 扶餘族으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盧重國, 앞의 책, 66~77쪽 참조). 한편 백제의 王姓에는 扶餘氏와 優氏가 있는 것으로 보고 부여씨는 주몽-온조-초고계의 성씨로, 우씨는 우태-비류-고이계의 성씨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 下, 《韓國學報》 3, 一志社, 1976, 134~137쪽).
[역주:23권23] 시조 비류왕(始祖沸流王)
생몰년대는 미상. 《海東高僧傳》에는 避流로 나온다. 본 기사에는 비류가 미추홀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비류중심의 건국설화라고 할 수 있다. 비류중심의 시조설화에서 그 조상이 解扶婁로 나오고 있는 것에서 미루어 볼 때 비류집단의 성은 解氏로 추정된다. 온조를 시조로 하는 건국설화와 비류를 시조로 하는 건국설화가 남게 된 것은 처음 비류가 인천의 미추홀에서, 온조는 서울의 한강유역에서 각각 나라를 세운 후 두 집단이 중심이 되어 연맹을 형성하고 연맹장을 배출한 것을 반영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비류건국 설화가 후대까지 남아 전하게 된 것은 비류를 시조로 하는 집단이 백제 후기까지 계속 그 세력을 존속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본서 백제본기에 전하는 왕실계보는 모두 온조계로 나오고 있는데 이는 연맹단계에서 두 집단이 배출한 연맹장들을 온조 중심으로 재편성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의 왕실 계보 가운데 多婁-己婁-盖婁는 沸流系 집단의 왕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盧重國, 앞의 책, 70-77쪽 참조).
[역주:23권24] 우태(優台)
해부루의 庶孫. 할아버지 해부루의 이름에서 미루어 볼 때 우태의 성은 해씨로 추정된다. 그는 卒本人 延陁勃의 딸 召西奴와 결혼하여 沸流와 溫祚를 낳았다고 한다. 생몰연대는 미상. 이 우태의 실체에 대해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에 나오는 仇台와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 下, 《韓國學報》 3, 1976), 尊長者를 의미하는 官名이 人名化한 것으로서 고구려의 관명인 于台와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견해(金哲埈, 〈高句麗·新羅 官階組織의 成立過程〉, 《韓國古代社會硏究》에 재수록, 지식산업사, 1975) 등이 있다. 백제의 시조로 나오는 온조와 비류가 溫祚 중심의 건국설화에서는 주몽의 아들로, 沸流 중심의 건국설화에서는 우태의 아들로 나오는 것에 대해 비류를 우태의 아들로, 온조를 주몽의 아들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앞의 논문). 한편 본서 권32 잡지 제사 百濟祀禮條에는 《海東古記》를 인용하면서 始祖優台설도 전하고 있다. 그러나 본서 편찬자의 견해대로 시조 優台설은 취신하기 어렵다고 본다.
[역주:23권25] 해부루(解扶婁)
동부여를 건국한 왕. 그의 출자에 대해서는 북부여의 시조로서 天帝之子를 자칭한 解慕漱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고(《三國遺事》 권1 紀異篇 북부여조), 壇君과 西河河伯女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앞의 책 권1 紀異篇 고구려조). 원래 북부여의 왕이었던 해부루는 天帝의 계시를 받은 재상 阿蘭弗의 권유에 의해 東海 가의 迦葉原으로 옮겨 동부여를 세웠다(《三國遺事》 권1 紀異篇 북부여조, 동부여조 및 본서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즉위년조 참조). 늙도록 아들이 없다가 鯤淵 부근의 큰 바위 밑에서 金色蝸形의 아이를 얻어 金蛙라 이름짓고 태자로 삼았다고 한다(《三國遺事》 권1 紀異篇 동부여조 및 본서 권13 동명성왕 즉위년조).
[역주:23권26] 연타발(延陀勃)
卒本지역 사람. 이 지역의 首長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를 주몽이 도망해 왔을 당시의 卒本扶餘王과 동일한 존재로 보는 견해도 있다(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1976, 490쪽).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그는 召西奴와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역주:23권27] 건소(建昭)
前漢의 제10대 황제인 元帝의 연호. 서기전 38~서기전 34년. 건소 2년은 서기전 37년이다.
[역주:23권28] 예씨(禮氏)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맞이한 부인. 고구려 제2대 王인 琉璃를 낳았다. 자세한 것은 본서 권13 고구려본기 琉璃明王 즉위년조 참조.
[역주:23권29] 유류(孺留)
주몽과 禮氏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고구려 제2대 王이 되었다. 본서에는 琉璃·類利 등으로도 표기되었고, 《삼국유사》권1 왕력편에는 瑠璃·累利로도 표기되었다. 재위기간은 서기전 19~서기 18년. 자세한 것은 본서 권13 주석 64 참조.
[역주:23권30] 패수(浿水)
浿河·浿江이라고도 하였다. 패수의 위치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고조선 시기의 패수에 대해서는 淸川江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眞番郡考〉, 《韓國古代史硏究》에 재수록, 박영사, 1976), 鴨綠江으로 보는 견해(丁若鏞, 《我邦疆域考》 浿水考), 遼西지방의 大凌河로 보는 견해(이지린, 《고조선연구》, 1963) 등이 있다. 한편 삼국시대의 패수는 《高麗史》 권58 志12 지리3 黃州牧 平州條의 『平州本高句麗大谷郡(一云 多知忽)…又號東陽 有猪淺(一云浿江)』이라 한 기사와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1 황해도 平山都護府 山川條에 『猪灘…高麗史云 猪川 一云 浿江…按百濟始祖十三年 自慰禮城 移都漢山下 定疆域 北至浿河…若平壤浪河則在高句麗都城傍 豈得爲百濟之境 所謂浿河 疑則此水』라 한 기사에 보이는 '猪川' 또는 '猪灘'으로서 현재의 禮成江을 말한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1977, 355쪽 주1).
[역주:23권31] 대수(帶水)
패수를 예성강으로 보면 패수 다음에 나오는 대수는 임진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355쪽의 주1 참조).
[역주:23권32] 북사(北史)
중국의 正史 二十四史의 하나. 北魏·北齊·北周·隋나라 4왕조 242년 동안의 역사책. 唐나라 李延壽가 편찬하였는데 총 100권이다.
[역주:23권33] 수서(隋書)
隋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正史로서 중국의 二十四史의 하나. 魏徵이 당 태종의 명을 받아 636년에 완성하였는데 총 85권이다. 中宗壬申刊本에 '隋'는 缺字이나 본 기사의 인용문이 《隋書》 백제전의 기사와 일치하므로 '隋'字를 補入하였다.
[역주:23권34] 동명(東明)
扶餘의 시조로도 나오고(《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부여조), 고구려의 시조로도 나오고(본서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즉위년조), 백제의 시조로도 나오는 인물. 이처럼 동명이 부여·고구려·백제의 시조로 나오고 있는 것은 동명이 夫餘族의 族祖이기 때문이라고 한다(盧明鎬,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 《歷史學硏究》 10, 전남대학교 사학회, 1981 참조).
[역주:23권35] 구태(仇台)
백제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사람의 하나. 이 구태의 실체에 대해 仇台를 '구이'로 읽어 백제의 제8대 古爾王과 동일인물로 보는 견해(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1976, 472 ~ 476쪽), 비류 중심의 건국설화에 보이는 優台와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 下, 《韓國學報》 3, 1976) 등이 있다. 한편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에는 『又每歲四祠其始祖仇台之廟』라 하여 시조 仇台廟에 대한 기사가 나오는데, 이 仇台廟를 백제가 국가체제로 이행한 후에도 왕실의 宗廟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 彌鄒忽 집단의 종묘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盧明鎬, 앞의 논문 참조).
[역주:23권36] 대방의 옛 땅[帶方故地]
帶方郡이 설치되었던 지역을 말한다. 대방군은 後漢말 중국의 遼東지역에 웅거하였던 公孫康이 204년경에 屯有縣 이남의 荒地에 설치한 郡으로서 현재의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 지방을 그 治所로 하였다. 이는 沙里院驛 부근의 한 고분에서 『帶方太守 張撫夷』라는 銘文이 새겨진 塼이 발견된 것에 의해서 입증된다(이기백·이기동, 《한국사강좌》 1 고대편, 일조각, 1982, 72쪽). 그런데 대방군은 백제가 건국될 당시에는 아직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백제가 대방고지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연대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본 기사에 나오는 '대방의 옛 땅'이라 한 것은 백제가 건국된 곳이 대방군의 전신인 옛 진번군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355쪽의 주3).
[역주:23권37] 공손도(公孫度)
중국 後漢末의 사람. 度를 '탁'으로 읽는 경우도 있으나 본서에서는 ‘도’로 읽었다. 그는 요동태수가 되어 190년에 요동군을 遼西와 中遼로 나누고 스스로 遼東侯 平州牧을 칭하였다. 그의 아들 公孫康 손자 公孫淵代에 와서는 요동의 覇者가 되었으나 魏나라 장군 司馬懿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三國志》 권8 魏書 公孫度傳 附康·淵傳 참조.
[역주:23권38] 공손도(公孫度)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공손도가 자기의 딸을 구태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는 것은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부여조에 『扶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强 度以扶餘在二廣之間 妻以宗女』라 한 것에서 보듯이 부여의 경우에도 보인다. 그런데 公孫度는 2세기말 3세기초의 사람이기 때문에 기원 전후 한 시기의 백제 시조와 생존한 시기가 다르다. 이 기사는 《北史》나 《隋書》의 편찬자가 백제의 구태를 扶餘의 尉仇台로 誤認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李丙熹, 《韓國古代史硏究》, 1976, 472~473쪽 참조).
[역주:23권39] 동이(東夷)
중국이 주로 동방 지역에 위치한 異民族을 낮추어 일컫던 명칭. 중국 正史에서 사방의 이민족을 東夷, 西我, 南蠻, 北狄으로 부른 것은 《三國志》부터이다. 동이의 뜻에 대해서는 《후한서》 권85 열전 동이전 序에 『王制云 東方曰夷 夷者柢也 言仁而好生 萬物柢地而出』로 나온다. 한편 東夷의 '夷'字를 '大弓'의 合字로 보아 중국인이 활을 잘 쏘는 동쪽의 종족을 東夷라고 한 주장도 있다. 夷에는 9種이 있는데 畎夷·于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라고 한다(《후한서》 권85 열전 동이전 序 참조).
[역주:23권40]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백제의 시조에 대해서는 5가지의 설이 있다. 첫째는 본서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년조 본문에 보이는 시조 溫祚설, 둘째는 본서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년조의 細注에 보이는 시조 沸流설, 셋째는 본서 권32 잡지 제사조에 보이는 시조 優台설, 넷째는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과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에 보이는 시조 仇台설, 다섯째는 본서 권32 제사조 및 《續日本紀》 권40 延曆 9년 秋7월조에 보이는 태조 東明=都慕설이다.(李丙燾,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469~473쪽 참조). 백제본기에서 시조 온조설과 시조 비류설 및 시조 구태설을 기록한 본서의 撰者는 본서 권32 제사 百濟祀禮條에서 『按海東古記 或云始祖東明 或云始祖優台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立國於帶方 此云始祖仇台 然東明爲始祖 事迹明白 其餘不可信也』라 하여 시조 동명설을 취신하고 여타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역주:23권41] 동명왕묘(東明王廟)
동명왕을 제사 지내는 사당. 본서 권32 잡지 제사조에는 백제의 역대 왕들이 동명왕묘에 배알한 일들이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서 백제본기에는 나라를 세운 建國祖인 온조를 모신 사당에 대한 기사는 나오지 않는다. 백제가 동명왕의 사당을 세워 제사드린 것은 부여족의 族祖인 동명을 시조묘에 모심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백제가 건국조인 온조의 사당을 세우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백제가 국가체제로 이행한 후 왕실의 宗廟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 彌鄒忽 집단의 종묘를 고구려의 경우처럼 철저하게 격하시키는 단계를 거치지 못했고, 그에 따라 위례 집단 이래의 종묘를 백제 국가의 종묘로 격상시킴도 그만큼 제약을 받은 결과로 보는 견해도 있다(盧明鎬,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 《歷史學硏究》 10, 전남대학교 사학회, 1981 참조). 한편 東明王廟는 廟堂이 아니고 始祖王陵 등 穀靈信仰의 대상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井上秀雄 譯註, 《三國史記》 2, 평범사, 1983, 295쪽).
[역주:23권42] 말갈(靺鞨)
만주지역에 거주하였던 퉁구스族의 일종. 이 말갈은 중국의 先秦시대에는 肅愼으로, 漢나라 때에는 邑婁로, 北魏代에는 勿吉로 불리다가 唐나라 때에 와서 말갈로 불리게 되었다. 이 말갈족은 松花江 이동으로 바다에 이르고, 混同江 이남으로 長白山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였다. 南北朝시대에 와서 비로소 중국과 교통하였고, 당나라 高祖 武德(619~626) 이후로는 말갈로 총칭되었다. 원래 7部로 나뉘어져 있었고 각각 추장이 통솔하였으나 당나라 초에 이르러 7부 가운데 黑水를 중심으로 한 黑水靺鞨과 栗末水를 生活圈域으로 한 栗末靺鞨의 2部가 강성하였다. 그런데 본 기사에 보이는 말갈은 시대가 당나라보다 앞서므로 당나라 시대의 말갈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그 때문에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보이는 말갈은 대체로 함경도 지역을 근거지로 하였던 東濊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李丙燾, 《한국고대사연구》, 1976 및 兪元載, 〈三國史記 僞靺鞨考〉, 《史學硏究》 29, 한국사학회, 1979 참조)
[역주:23권43] 우보(右輔)
백제 초기의 관제. 고구려에도 이 관직이 보인다.(본서 권14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8년조). 군국정사를 관장하였다고 한다. 안정복은 고구려나 백제의 우보를 훗날의 宰相으로 파악하고 있다(安鼎福, 《東史綱目》 圖下 官職沿革圖).
[역주:23권44] 낙랑(樂浪)
중국의 漢나라 武帝가 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서기전 108년에 설치한 四郡 중의 하나.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 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李丙燾, 《한국고대사연구》, 1976, 133~157쪽)와 이와는 달리 한사군의 위치를 모두 遼東지역에 비정하는 견해(이지린, 《고조선연구》, 1963) 등이 있다. 평안도 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에 의하면 낙랑군의 郡治는 현재의 평양 지역의 土城里 일대였다고 하며, 遼東지역에 비정하는 견해에 의하면 낙랑군의 중심지는 大凌河 동쪽 1백리 되는 곳 즉 遼河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설치 당시의 낙랑군에 속한 縣은 朝鮮·遂成 등 11개 현이었는데 이 중 朝鮮縣이 首縣으로서 郡治가 되었다. 이 낙랑군은 서기전 82년에 臨屯郡을 合屬시킴으로써 25縣을 거느린 큰 郡이 되었으나, 서기 8년에 낙랑의 土人 王調가 반란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都尉制가 폐지되면서 18縣으로 줄었다.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 미천왕에 의해 멸망되기까지 400여년간 존속하였다. 한편 한반도에는 중국 군현으로서의 낙랑군이 아닌 토착인이 세운 樂浪國도 있었다. 이 낙랑국은 崔理가 다스렸는데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에 의해 멸망되었다. 본서 권14 주석 29 참조.(한반도에 두어진 중국 군현의 하나인 樂浪郡에 대해서는 權五重, 《樂浪郡硏究》, 일조각, 1992 참조)
[역주:23권45] 신비스러운 사슴[神鹿]
사슴은 사슴과에 속하는 짐승의 총칭이다. 중국에서는 사슴은 여러 사냥꾼들이 다투어 쫓아가 잡는 짐승이므로 여러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얻으려고 하는 목적물로서 특히 帝位를 이르기도 하였다. 백제를 비롯한 扶餘族들이 사슴을 신성히 여겼던 것은 李奎報의 〈東明王篇幷序〉에 『東明西巡時 偶獲雪色麂(大鹿曰麂) 倒懸蟹原上 敢自呪而謂天不雨沸流 漂沒其都鄙 我固不汝放… 鹿鳴聲甚哀 上徹天之耳 淋雨注七日 霈若傾淮泗…』이라 하여 동명이 사슴을 매달아 비를 오게 하였다는 설화에 의해서도 알 수 있는 바이다.
[역주:23권46] 일식(日食)
지구와 태양과의 사이에 달이 들어가서 태양의 전부 또는 일부가 달에 의하여 가리어지는 현상. 태양의 전부가 가리어지는 皆旣食, 일부가 가리어지는 部分食, 태양의 중앙부만 가리어지고 그 변두리가 고리모양으로 남는 金環食이 있다. 《漢書》 권26 天文志 제6에 『星傳曰 日者德也 月者刑也 故曰日食修德 月食修刊』이라 하여 일식이 일어나면 천자는 덕을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禮記》 권61 昏義 제44에도 『是故日食 則天子素服 而修六官之職 蕩天下之陽事』라 하여 천자의 謹愼을 기록하고 있다.
[역주:23권47] 대부현(大斧峴)
본서 권37 잡지 地理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대부현은 斧峴과 연관되는데 斧縣은 본서 권35 잡지 지리2 신라 漢州 富平郡 平康縣의 고구려 지명인 斧壤縣과 음이 상사하므로 斧壤縣과 같은 곳이라 할 수 있다. 부양현은 현재의 강원도 平康郡 平康面에 비정된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354쪽).
[역주:23권48] 마수성(馬首城)
본서 권37 잡지 地理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마수성은 본서 권35 잡지 지리2 漢州 堅城郡의 고구려 때 지명인 馬忽郡과 음이 상사하므로 같은 곳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경기도 抱川郡 郡內面에 비정할 수 있다.
[역주:23권49] 병산책(甁山柵)
마수성과 이웃한 곳이므로 마수성이 抱川郡 郡內面에 비정될 수 있다면 병산책은 포천 부근의 어느 곳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 비정은 어렵다.
[역주:23권50] 마한(馬韓)
진한·변한과 더불어 三韓의 하나. 기원전 1세기 이전의 어느 시기부터 서기 3세기 경까지 한강유역으로부터 충청도·전라도 지역에 위치하였던 정치집단의 통칭이다. 마한을 구성한 國들로는 伯濟國·目支國 등을 포함하여 54개의 국이었으며, 정치적 성격은 諸國聯盟體라고 할 수 있다. 마한을 구성한 國의 규모는 大國은 1萬餘家였고 小國은 數千家였다. 마한을 구성한 國들의 성립시기는 동일하지 않아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성립된 國도 있고, 초기철기 문화를 배경으로 한 國도 있고, 百濟國처럼 扶餘系 유이민의 정착에 의해 이루어진 國도 있었다. 諸國의 지배자의 칭호는 대국은 臣智라 하였고, 소국은 邑借라 하였다. 3세기 중엽경까지 이 마한의 맹주는 辰王으로 불리워졌으며 진왕의 治所는 目支國이었다. 이 목지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충남 稷山설, 전북 益山설, 충남 禮山설, 전남 羅州설, 충남 天安설 등이 있는데 문헌기록상으로는 직산설이 타당하다고 본다. 《삼국지》 권30 魏書 동이전 辰韓條에는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이라 하여 진왕의 지위는 진왕 스스로의 힘에 의해 세습되는 것이 아니라 諸國의 臣智들의 추대나 선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보여준다. 마한의 성립에 대해 고조선의 準王이 南下 하여 마한을 성립시켰다는 견해(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 《韓國古代史硏究》에 재수록, 1976)도 있고, 이와는 달리 遼東지역에 있던 北馬韓이 남으로 이동하여 마한을 성립시켰다는 견해(千寬宇, 〈三韓考〉 제1부-- 三韓의 成立過程-- 《史學硏究》 26, 한국사학회, 1976)도 있다. 마한의 성립과 그 성격에 대해서는 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 《韓國古代史硏究》에 재수록, 을유문화사, 1976; 千寬宇, 《古朝鮮·三韓史硏究》, 일조각, 1990; 金貞培, 〈準王 및 辰國과 三韓正統論〉, 《韓國史硏究》 13, 한국사연구회, 1976; 李賢惠, 《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 일조각, 1984 등 참조.
[역주:23권51] 곤미천(昆彌川)
현재의 위치는 미상. 이를 현재의 경기도 禮成江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千爲宇, 〈三韓의 國家形成〉下, 《韓國學報》 3, 일지사, 1976, 120쪽).
[역주:23권52] 청목산(靑木山)
청목산의 위치에 대해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 開城府 上 山川 松嶽조에서는 송악산 二龍의 하나가 靑木이 되었다는 故事와 관련하여 현재의 경기도 開城市 松岳山으로 비정하였고, 安鼎福은 《東史綱目》 제1 上 壬子 馬韓 百濟始祖 十年조에서 開城·金川 경계의 靑石洞(현재의 경기도 開豊郡 嶺南面 天摩山)으로 추정하였다. 이와는 달리 永平지역으로 추정하는 견해(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6, 355쪽)도 있다.
[역주:23권53] 봉현(烽峴)
본서 권37 잡지 地理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현재의 위치는 未詳이다. 金正浩는 《大東地志》권3 麻田 및 連川의 山水조에서 현재의 경기도 連川郡 旺澄面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역주:23권54] 독산책(禿山柵)
본서 권37 잡지 地理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이 독산책은 본서 권24 근초고왕 28년(373)조에 나오는 禿山城과 더불어 낙랑 또는 고구려와 접경 지대인 경기도 북부나 황해도 남부 지역이 아닐까 하나 확실하지 않다.
[역주:23권55] 구천책(狗川柵)
본서 권37 地理 제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백제가 구천책을 세워 낙랑과의 통로를 막은 것에서 미루어 볼 때 독산책과 마찬가지로 낙랑 또는 고구려와 접경 지대인 경기도 북부나 황해도 남부 지역이 아닐까 하나 확실하지 않다. 이를 본서 권26 백제본기 聖王 32년조에 성왕이 신라군에게 弑害당한 곳으로 나오는 狗川(현재의 충북 沃川지방)과는 같은 곳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으나(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408쪽) 양자는 서로 다른 곳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역주:23권56] 늙은 할멈[老嫗]
고대사회에서 초기에는 여자 무당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다가 뒤에 남자 무당으로 그 역할이 옮겨진 것으로 보고, 이 노구를 단순히 늙은 여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여자 무당이라고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崔光植, 〈三國史記 所載 老嫗의 성격〉, 《史叢》 25, 1981).
[역주:23권57] 우리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樂浪과 靺鞨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낙랑은 백제의 북쪽인 평양지방을 중심으로 존재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고, 말갈은 함경도에 위치한 동예를 비롯한 濊族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견해에 의할 때 본문의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은 『國家北有樂浪 東有靺鞨』로 고쳐 보아야 할 것이다(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1976, 479쪽). 이와는 달리 정약용은 위의 기사를 그대로 받아들여 동쪽의 낙랑은 春川지방의 土酋로, 북쪽의 말갈은 東濊로 파악하고 있다(丁若鏞, 《疆域考》 권1 辰韓考 및 권2 靺鞨考 참조).
[역주:23권58] 내가 어제 …. 한수(漢水) 남쪽을 보니
본서 온조왕 즉위년조에는 온조집단이 처음부터 하남위례성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운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 기사는 온조집단이 처음에 한강 북쪽에 자리를 잡았다가 뒤에 한강 남쪽으로 이동한 것을 보여주고 있어 즉위년 조의 기사와 상치된다. 이 기사를 取信한다면 온조집단은 처음에는 한강 북쪽의 하북위례성에 자리 잡았다가 뒤에 하남위례성으로 중심지를 옮겨 온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역주:23권59] 한산(漢山)
백제가 하북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으로 옮긴 이후에 나오는 한산은 현재의 南漢山을 가리킨다. 남한산은 경기도 廣州郡 中部面에 위치하였다. 이 한산은 통일신라기에는 南漢山으로 불리다가 조선 光海君 때에 와서 南漢山城으로 불리웠다. 백제가 새로이 도읍을 정한 곳에 대해 《삼국유사》 권1 王曆篇 및 같은 책 권2 紀異篇 南扶餘·前百濟조에는 『丙辰 移都漢山 今廣州』라 하여 경기도 廣州로 나온다. 한편 洪敬謀의 《南漢志》에는 온조가 도읍한 곳을 南漢山이 아니라 廣州古邑인 지금의 黔丹山 아래의 二聖山城이라고 하였다.
[역주:23권60] 패하(浿河)
浿水·浿江으로도 씌어졌다. 패하의 위치는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본 기사의 浿河는 《高麗史》 권58 志12 지리3 黃州牧 平州條의 『猪淺(一云浿江)』이라 한 기사와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1 황해도 平山都護府 山川條에 보이는 『猪川 또는 猪灘』이라 한 기사에 의할 때 현재의 禮成江이라 할 수 있다. 앞의 주석 30 참조.
[역주:23권61] 웅천(熊川)
웅천의 위치에 대해서는 충남 公州의 錦江설과 경기도 安城郡 安城川설이 있다. 安城川설은 본 기사의 熊川을 '곰내'로 읽고 마한의 맹주국인 目支國이 稷山·成煥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또 안성천 유역인 孔道面에 있는 熊川橋가 속칭 ‘고무다리’로 불리고 안성천 하류에 있는 平澤의 軍勿津(昆池津)이 軍門里津(군문이 나루)로 불린다고 하는 사실 등에 근거하여 주장한 것이다(李丙燾, 《韓國古代史硏究》, 1976, 247 ~ 248쪽). 한편 본서에 나오는 웅천은 대개 충남 공주지역을 흐르는 금강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충남 공주 지방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 下, 《韓國學報》 3, 일지사, 1976).
[역주:23권62] 주양(走壤)
현재의 강원도 春川지방을 말한다. 춘천의 옛 명칭이 首若州 또는 走壤城이었는데 이는 본서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3년조에 『九月 築國原城…首若州走壤城(一名迭岩城)』이라는 기사에 의해 확인된다. 走壤·走壤城의 다른 이름으로는 烏根乃·首次若·迭巖城 등이 있었다.
[역주:23권63] 마침내 강역을 구획하여 … 주양(走壤)에 이르렀다.
백제의 영역이 북쪽의 浿河(예성강)로부터 동쪽의 走壤(춘천), 서쪽의 大海(서해), 남쪽의 熊川(안성천)에 이르게 되었다고 할 때 이것이 어느 시기의 사실을 반영하는가가 문제이다. 이 문제는 본서 초기기록을 취신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설명이 달라진다. 초기기록을 취신하는 입장에서는 본 기사대로 온조왕 13년대로 보고 있으나(千寬宇, 앞의 논문, 120~121쪽), 본서 백제본기 溫祚紀의 領域확장 기사는 후대의 사실이 온조왕대에 附會된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古爾王代의 사실로 보고 있다(李丙燾, 앞의 책, 476~477쪽).
[역주:23권64] 도읍을 옮겼다.
백제가 하북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으로 수도를 옮긴 시기에 대해 본서 초기기록의 연대를 취신하는 입장에서는 溫祚本紀의 기록대로 온조왕 14년으로 보고 있다(千寬宇, 앞의 논문, 116~117쪽). 그러나 초기기록이 후대에 이루어진 사실을 온조대로 소급 ·부회한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하북에서 하남으로 도읍을 옮긴 시기에 대해 책계왕-비류왕대로 보는 견해(李丙燾, 앞의 책, 479쪽)와 肖古王대로 보는 견해(盧重國, 《百濟政治史硏究》, 일조각, 1988, 56~58쪽) 등이 있다.
[역주:23권65] 한강 서북쪽에 성을 쌓고
金正浩는 《大東地志》 권3 경기도 楊州 城池條에서 이때 쌓은 성을 楊州城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이렇게 비정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역주:23권66] 국모(國母)에게 제사지냈다
國母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국모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국모신앙은 본서 권13 고구려본기 東明聖王 14년조에 『王母柳花薨於東扶餘 其王金蛙以太后禮葬之 遂立神廟』라 하여 신묘를 세워 王母를 제사한 것과 《周書》 권49 열전 상 高麗條에 『又有神廟二所 一曰扶餘神 刻木作婦人之象 一曰登高神 云是其始祖扶餘神之子 竝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與朱蒙云』이라 하여 주몽을 낳은 河伯女를 扶餘神으로서 섬긴 것에서 볼 때 고구려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新羅에서는 始祖와 始祖妃를 '二聖'으로 표현하고 있다(본서 권1 신라본기 南解次次雄 2년조).
[역주:23권67] 칠중하(七重河)
七重城과 관련되는 강. 현재의 臨津江에 비정된다. 칠중성은 본래 고구려의 지명으로 難隱別이라고 하였는데 신라가 重城縣으로 고쳤으며(본서 권35 잡지 지리2 한주 來蘇郡 重城縣조), 현재의 경기도 坡州市 積城面이다.
[역주:23권68]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에 보내고
백제가 말갈 추장을 포로로 잡아 마한에 보냈다고 하는 것은 앞서 神鹿을 잡아 마한에 보낸 것이라든가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하면서 마한에 천도 사실을 告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 백제가 마한에 대해 附庸的 관계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역주:23권69] 우두산성(牛頭山城)
춘천을 일컫는 牛頭州·牛首州·牛頭郡 등과 연계시켜 현재의 春川지방으로 보는 견해(千寬宇, 앞의 논문, 118쪽)도 있고, 낙랑이 백제의 북쪽에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황해도 金川郡 牛峰지역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356쪽).
[역주:23권70] 구곡(臼谷)
정약용은 《疆域考》 권1 樂浪別考에서 『今昭陽江 兩水合衿之處有大村 曰牛頭 其裡面有所謂貊國古墟 此卽古樂浪國之遺墟也 又春川南界水村有曰方牙兀者 譯之以文 卽臼谷也』라 하여 구곡을 '방아골'로 읽어 춘천 남쪽 경계의 水村인 ‘방아올’로 비정하였다. 이와는 달리 경기도 楊州·加平지역의 九谷驛으로 보는 견해(千寬宇, 앞의 논문, 118쪽)도 있다.
[역주:23권71] 석두성(石頭城)
본서 권37 잡지 地理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이 석두성은 신라 漢州 兎山郡 朔邑縣의 고구려 때의 지명인 所邑豆縣과 音韻上 비슷하므로 현재의 경기도 漣川郡 朔寧面 일대로 비정할 수 있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356쪽 참조).
[역주:23권72] 고목성(高木城)
본서 권37 잡지 地理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 에 실려 있다. 고목성은 신라 한주 功成縣의 고구려 때 지명인 功木達縣과 音韻上 비슷하므로 현재의 경기도 漣川郡 連川邑에 비정할 수 있다(李丙燾, 앞의 책, 356쪽; 千寬宇, 앞의 논문, 120쪽 참조).
[역주:23권73] 부현(斧峴)
斧峴은 음운상에서 볼 때 본서 권35 잡지 지리 제1 漢州 富平郡 平康縣의 고구려 지명인 斧壤縣과 비슷하므로 현재의 강원도 平康郡 平康面에 비정할 수 있다(李丙燾, 《국역 삼국사기》, 356쪽 참조).
[역주:23권74] 생구(生口)
산 채로 사로잡은 사람 즉 포로를 말한다.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자들은 대체로 노비가 되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생구는 포로로 잡혀 노비로 된 자를 말한다. 장수와 군사들에게 분배된 전쟁포로들은 고대사회에서는 奴婢공급의 주요한 원천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生口의 존재는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23년조에도 나온다.
[역주:23권75]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이 기사는 온조 집단이 마한의 용인 아래 한강유역에 정착하여 국가를 형성한 것을 반영해 준다. 이는 《삼국지》 권30 魏書 동이전 진변한전에 『其耆老傳世自言 古之亡人避秦役 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라 하여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떼어 주어 진한이 성립된 것과 유사한 형태이다. 한편 이병도는 본 기사의 河水는 漢水를 말하는 것이므로 한수의 界線的 의의를 잃은 溫祚시대의 이야기로 볼 수 없다고 하면서 본 기사를 앞에서 인용한 《삼국지》의 기사에 대응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본 기사는 온조에 관한 사실이 아니라 衛滿에게 쫓겨 내려온 고조선의 準王에 관련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李丙燾, 《韓國史》 고대편, 1959, 진단학회, 269~273쪽). 그러나 《삼국지》의 기사는 辰韓의 성립과 관계되는 것이 분명하므로 이를 고조선의 準王의 남하와 연계시키는 견해는 성립할 수 없다고 본다.
[역주:23권76] 일관(日官)
天文의 변화와 자연의 災異를 관찰하고 그 의미를 점치는 사람. 중국의 경우 日官은 曆數干支를 맡고 天文을 관장하였는데 天官이라고도 하였다. 《春秋左氏傳》 桓公 17년 『冬十月朔 日有食之不書 日官失之也 天子有日官 諸侯有日御(日官月御典曆數者)』라 한 기사 참조.
[역주:23권77] 진한(辰韓)
마한·변한과 합쳐 三韓이라 하였다. 《삼국지》 권30 魏書 東夷傳 진변한전에 의하면 秦人이 망명해 와서 세웠기 때문에 秦韓으로도 불리웠다고 하고 있다. 이 진한은 《삼국지》 동이전에 『辰韓者 古之辰國』이라 한 것에서 보듯이 진국의 後身이며 그 정치적 성격은 12國으로 구성된 諸國연맹체라고 할 수 있다. 진한연맹체를 구성한 諸國은 처음에는 6國이었으나 점차 분화하여 12國으로 확대되었다. 12국 가운데 大國은 4~5千家로 구성되었고, 小國은 數百家로 구성되었다. 이 12國은 대체적으로 소백산맥 이남, 낙동강 동쪽의 경상도 지역에 자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12국 가운데 위치 비정이 확실한 것은 경북 경주에 자리한 사로국, 경남 울산에 자리한 優由國 등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진한연맹체의 성립의 하한은 《삼국지》 동이전에 인용된 《魏略》에 王莽 地皇 年間(서기 20~22)에 진한 右渠帥 廉斯鑡가 자신의 邑落을 떠나 樂浪郡에 항복하러 갔다고 하고 있으므로 기원 전후한 시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철기와 청동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된 경남 창원시 다호리 유적이 서기전 1세기로 편년되고 있는 사실 등을 참고할 때 성립의 상한은 서기전 1~2세기로 올라 갈 수 있다. 한편 진한 연맹체가 소멸된 시기에 대해 본서 권1 신라본기 혁거세조에는 혁거세 당시에 이미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삼국지》 동이전에는 3세기 중엽경까지 진한연맹체가 존속한 것으로 나오고 있고, 특히 魏나라 正始 6~7년(245 ~246) 경에 辰韓 8國의 분할 문제로 韓과 대방군이 전쟁을 하여 韓이 패배하고 那癸國 등 수십국이 이탈하였다고 하는 구체적인 사건이 기술되어 있는 것에서 미루어 볼 때 진한연맹체의 소멸은 3세기 중엽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진한연맹체의 해체과정은 진한의 한 구성체였던 사로국이 성장하여 진한제국을 병합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병도, 〈三韓問題의 硏究〉, 《韓國古代史硏究》, 을유문화사, 1976; 千寬宇, 《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1990; 金貞培, 〈準王 및 辰國과 三韓正統論〉, 《韓國史硏究》 13, 1976; 李賢惠, 《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 일조각, 1984 참조)
[역주:23권78] 국읍(國邑)
삼한을 구성한 여러 국들은 몇개의 邑落으로 구성 되었다. 이 읍락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세력이 강하거나 중심기능을 가지는 大邑落을 國邑이라고 하였다(李賢惠, 《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 일조각, 1984, 104~105쪽). 따라서 이 기사의 국읍은 마한 연맹체의 맹주국인 목지국의 정치적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국읍의 정치적 기능은 여러 읍락들을 통할하는 것이나 3세기 중엽경까지 삼한의 각 國들은 《삼국지》 동이전 韓條에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 無跪拜之禮』라 한 것에서 보듯이 국읍이 읍락을 완전히 제어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역주:23권79] 원산성(圓山城)
본서 권37 地理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이 원산성이 肖古王 24년(190: 신라 伐休尼師今 7)조에 보이는 『新羅西境圓山鄕』과 동일한 곳이라면 경북 醴泉郡 龍宮面에 비정할 수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5 경상도 龍宮縣 建置沿革조에 『本新羅竺山(一云園山)』이 나오는데 이 園山=龍宮縣은 현재의 경북 예천군 龍宮面이다. 그러나 용궁면은 마한의 중심지가 직산일 경우 지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3 전라도 珍山縣 古蹟조에 나오는 『猿山鄕(在縣東三十里)』이라는 기사에 의거하여 충남 진산으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 하, 《韓國學報》 3, 일지사, 1976, 128쪽). 한편 圓山을 完山의 異寫로 보아 지금의 전북 全州市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全榮來, 〈完山과 比斯伐論〉, 《馬韓百濟文化》 창간호, 원광대학교, 1975).
[역주:23권80] 금현성(錦峴城)
본서 권37 잡지 地理 제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다. 정약용은 『錦峴者 或是今羅州也 故與古沙夫里幷學也』라 하여 나주로 비정하고 있으나(丁若鏞, 《疆域考》 권1 馬韓考) 취신하기 어렵다. 한편 이 금현을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9 鎭安縣 山川조에 나오는 熊嶺縣의 異寫로 보고 그 위치를 지금의 鎭安郡 富貴面 곰치리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全榮來, 앞의 논문).
[역주:23권81]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마한의 멸망 시기에 대해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초기기록을 취신하는 입장에서는 본 기사대로 온조왕 27년으로 보고 있다(천관우, 앞의 논문). 그러나 《晉書》 권97 열전 마한전에는 太熙 원년(290)에도 마한이 西晉에 견사한 것으로 나온다. 따라서 마한이 온조왕대에 멸망하였다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고, 마한연맹체의 맹주국이 망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시기 마한의 맹주국은 직산의 目支國이었다. 이 목지국은 魏나라 正始 6~7년(245~246)에 일어난 韓과 帶方郡과의 전쟁에서 韓이 패배하여 그 위상이 약화되자 백제국의 古尒王에 의해 멸망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시기는 대체로 3세기 중엽경으로 추정된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盧重國, 《百濟政治史硏究》, 일조각, 1988, 85~94쪽; 李基東, 〈백제국의 성장과 마한병합〉, 《백제논총》 2, 1990 참조)
[역주:23권82] 대두산성(大豆山城)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다. 이를 충남 공주 또는 서천(舒川) 지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앞의 논문, 130쪽).
[역주:23권83] 남부(南部)
백제 5部의 하나. 이 시기의 部는 종래 연맹체를 구성하였던 國의 수장들을 중앙귀족화하고 이들을 편제하여 이루어진 지배자공동체이다. 이와는 달리 이 部를 지방행정구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朴賢淑, 〈百濟初期의 지방통치체제 - 部의 성립과 변화과정을 중심으로-〉, 《百濟文化) 20,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1990). 그러나 이 시기에는 지방관을 파견할 만큼 중앙집권력이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 기사의 部는 중앙의 지배자 집단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部는 우리나라 古代國家의 발전과정에서 諸國연맹체단계에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단계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성립된 정치조직을 말한다. 연맹체단계에서 점차 집권력을 강화시킨 盟主國은 연맹체를 구성하였던 여러 국들의 독자성을 약화시키고 그 수장을 중앙 귀족으로 전환시켰다. 이 과정에서 지배자집단이 형성되어 이들이 왕실과 더불어 중앙의 部를 형성하게 되었다. 각 部는 자치권과 독자적인 지배조직을 가졌으나 무역·외교·전쟁 등 국가 전체와 관련된 문제는 왕의 통제를 받았다. 이 부는 왕권의 강화가 진전되고 일원적인 지배체제가 갖추어지게 되면서 해체되어 王京의 行政구역으로 전환되었다. (部의 성격과 구조에 대해서는 盧泰敦, 〈三國時代의 部에 관한 硏究〉, 《韓國史論》 2,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975 참조)
[역주:23권84] 북부(北部)
백제 五部의 하나. 이 시기의 部의 성격에 대해서는 앞의 주석 83 참조.
[역주:23권85] 동부(東部)와 서부(西部)의 두 부(部)를 더 설치하였다.
동부와 서부는 각각 백제 5부의 하나이다. 이를 앞서 설치된 남부·북부 및 중앙을 합치면 5部가 된다. 백제는 초기에 중앙의 지배자집단으로서의 이 5部가 중심이 되어 정치를 운영하였으므로 이를 5部體制라고 할 수 있다. 백제의 5부의 명칭은 고구려나 신라와는 달리 방위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백제의 部名도 본래는 토착적인 명칭이었으나 훗날 방위명으로 바뀌게 되면서 방위명으로 된 部의 명칭만이 사료에 남게 된 결과로 생각된다. 백제에서 5부제의 성립시기에 대해 온조왕대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李鍾旭, 〈百濟王國의 成長〉, 《大丘史學》 12·13 합집, 대구사학회, 1977), 백제의 정치발전과정에 비추어 볼 때 古尒王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盧泰敦, 앞의 논문). (백제의 部體制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는 李宇泰, 〈百濟의 部體制〉, 《百濟史의 比較硏究》, 百濟硏究叢書 3, 忠南大 百濟硏究所, 1993 참조)
[역주:23권86] 탕정성(湯井城)
현재의 충청남도 牙山市(舊 溫陽市). 그 중 심지는 아산시 邑內洞山城으로 비정되고 있다. 이 산성에서는 백제시대의 瓦片과 土器片이 상당량 수습되었다. (兪元載, 〈百濟 湯井城 硏究〉, 《百濟論叢》 3, 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92 참조)
[역주:23권87]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
현재의 전북 井邑市 古阜面. 고사부리성은 본서 권36 잡지 지리3에는 '古妙夫里郡'으로, 권5 신라본기 무열왕 8년조에는 古沙比城으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는 古泗로, 《周書》 권49 열전 백제조에는 中方 古沙城으로 나온다. 한편 이 고사부리성을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0 충청도 禮山縣 驛院條에 『古沙院(在縣東十三里)』라 한 기사에 보이는 古沙院 지역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 하, 《한국학보》 3, 일지사, 1976, 128~131쪽).
[역주:23권88] 술천성(述川城)
현재의 경기도 驪州郡 興川面 일대이다(李丙燾, 《국역 삼국사기》, 1981, 359쪽 및 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 하, 《한국학보》 3, 1976). 본서 권35 잡지 지리4 漢州 泝川郡조에 『泝川郡 本高句麗述川郡』으로 나온다. 말갈은 肖古王 49년(219)에도 이 述川 지역을 공격하여 왔다.
[역주:23권89] 해루(解婁)
백제 온조왕대의 인물. 扶餘 출신으로 북부의 실권자였다. 우보의 직에 있던 온조왕의 재종숙부[族父] 乙音이 죽자 우보에 임명되었다. 이외에 구체적인 활동은 알 수 없다.
[역주:23권90] 위례성(慰禮城)
백제 초기의 도성. 위례성의 명칭의 기원에 대해 '위례'는 ‘우리’ 또는 울타리를 뜻하는 것으로서 성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 阿利水·郁里河의 阿利·都里가 '大'의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기원하였다고 보는 견해, 백제에서 왕을 가리키는 말인 於羅瑕의 ‘於羅’에서 기원하였다는 견해 등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앞의 주석 30 참조. 위례성에는 하북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이 있다. 온조집단이 고구려 지역에서 남하하여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곳인 위례성이 河北위례성(현재의 서울시 中浪川 일대로 비정된다)이고, 한강 남쪽으로 정치적 중심지를 옮긴 이후의 위례성을 河南위례성(현재의 서울시 송파구 夢村土城으로 비정된다)이라고 한다.
[역주:23권91] 아산(牙山)
현재의 충남 牙山市 靈仁面이다. 본서 권36 잡지 지리5 熊州 陰峯縣조에 『陰峯(一云陰岑)縣 本百濟 牙述縣』으로 나오는데 牙述縣은 현재의 충남 아산시이다.
[역주:23권92] 기러기[鴻雁]
기러기 가운데 큰 것을 鴻이라 하고 작은 것을 雁이라고 한다. 《詩經》 小雅 鴻鴈之什 鴻鴈에 『鴻鴈于飛 肅肅其羽(大曰鴻 小曰僞)』이라 한 기사 참조. 《詩經》의 鴻鴈은 周 宣王이 離散한 民을 위로하여 오게 하고 安集한 사실을 記述한 것인데 이로 말미암아 亂離로 遊離한 민을 鴻鴈이라고도 하였다. 본 기사에서 『기러기는 백성의 상징』이라고 한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역주:23권93] 남옥저(南沃沮)
東沃沮라고도 하였다. 동옥저라는 명칭은 고구려의 동쪽에 있는 沃沮라는데서 생긴 것이고, 남옥저는 두만강 유역의 북옥저와 對稱으로서 사용된 명칭이다. 南沃沮=東沃沮는 현재의 함경남도 해안지대에서 두만강 유역 일대에 걸쳐 존재하였는데 그 중심지는 현재의 함경남도 함흥시 일대였다. 동옥저가 위치한 곳은 동북이 좁고 서남이 길었는데 북으로는 挹婁·扶餘와 남으로는 歲貊과 접하였다. 동옥저를 구성한 세력 중에서는 불내·화려·옥저 등이 유력하였다. 고구려에 신속되어 맥포·어염·해중식물과 미녀들을 멀리서 공급하였다. 《삼국지》 권30 위서 동이전 동옥저조에 의하면 3세기 중반경 동옥저는 5,000여 호였으며, 언어는 고구려와 大同小異하였고, 음식과 의복·가옥·예절 등도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옥저의 여러 읍락들은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해 大君長은 없었고 각 邑落별로 渠帥들이 자치적으로 읍락내의 일을 운영해 나갔다. 옥저인들 은 步戰에 능하였고, 혼인풍속으로는 賣買婚的 성격의 일면을 띠고 있는 민며느리제가 행해졌으며, 장례는 시체를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뼈만 추려 커다란 木槨에 넣는 일종의 二次葬을 행하였는데 한 집안 사람 모두가 동일한 목곽을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남옥저는 처음에는 樂浪郡 東部都尉의 治下에 귀속되었다가 뒤에 고구려의 세력이 蓋馬고원을 넘어 진출해 오자 고구려의 지배하에 귀속되었다. 고구려는 이 지역에 대해 각 읍락 단위로 大人을 고구려의 使者로 삼아 貢納을 징수하게 하는 등 간접적으로 지배하였다. (옥저에 대해서는 《三國志》 30 魏書 東夷傳 동옥저전; 李丙燾, 〈後方行列社會의 扶餘·沃沮 및 東濊〉,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金哲埈,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1975 참조)
[역주:23권94] 46년
온조왕의 재위기간. 그러나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癸卯立 在位四十五年』으로 나와 1년의 차이가 있다. 이 1년의 차이는 본서가 卽位年稱元法에 의한 것이고 《三國遺事》는 踰年稱元法에 의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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