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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書/中庸

中庸. 第一章

by 柳川 2020. 2. 28.

 

中者不偏不倚無過不及之名, 庸平常也。

 

 

중이라는 것은 치우침도 없고 기울어짐도 없으며, 지나침과 모자람도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용은 평상을 말한다.

 

 

○子程子曰 不偏之謂中, 不易之謂庸, 中者天下之正道, 庸者天下之定理. 此篇乃孔門傳授心法, 子思恐其久而差也, 故筆之於書以授孟子, 其書始言一理, 中散爲萬事, 末復合爲一理, 放之則彌六合, 卷之則退藏於密, 其味無窮, 皆實學也. 善讀者 玩索而有得焉, 則終身用之, 有不能盡者矣.

 

○정자가 말했다. 치우치지 않은 것을 中이라 하고, 바꾸지 않는 것을 庸이라 한다.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바른 도이며, 용이라는 것은 천하의 정해진 이치이다. 이 책은 공자의 문하에서 전수한 심법이다. 자사는 그것이 오래되어 어긋날 것을 두려워 하였으므로 책을 집필하여 맹자에게 전했다. 중용은 하나의 이치를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가운데에서는 모든 일을 말하며 끝에 가서는 다시 하나의 이치로 합쳐진다. 그것을 펼쳐 놓으면 상하 사방의 육합에 미치며 그것을 거두면 물러나 은밀한데 감춰지니 그 의미가 끝이 없고 모두 실제의 학문이다. 잘 읽는 자라면 즐기며 찾아 얻어 종신토록 그것을 써도 다 쓸 수가 없을 것이다.

 

 

 

 

 

 

第一章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道也者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天下之達道也。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  도라는 것은 잠깐이라도 떠날 수 없다.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보이지 않더라도 경계하고 삼가하며 들리지 않아도 두려워한다. 숨은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은 없으며, 미미한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가 홀로 있어도 삼가한다.

희노애락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中이라 하고, 희로애락이 나타났지만 절도에 맞는 상태를 和라고 하는데, 中이라 하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며,  和라는 것은 천하에 두루 통하는 도이다.

 

 

[해설]

 

천명 = 성(性), 솔성 = 도(道), 수도 = 교(敎)는 대학의 첫머리에 나오는 삼강령인 명명덕(明明德)과 친민(親民)과 지어지선(止於至善)과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 대학과 마찬가지로 중용도 天地人 삼재로 시작함을 알 수 있다.

하늘이 우리에게 명해준 것이 성품이므로 곧 天命之謂性이고, 하느님에게서 타고난 성품을 내가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길(道)이므로 곧 率性之謂道이고, 그 성품을 따르는 도를 잘 닦아 나가 마름질 해놓은 것이 가르침이므로 곧 修道之謂敎이다. 도를 잘 닦아 나가는 것, 즉 마름질하는 것이 바로 교육적인 가르침(敎)이 되는 것이다. 그 가르침을 받아 道를 따라가는 것이며, 그 도를 가다 보면 率性이 되고 결국 천명을 그대로 받드는 것이 된다. 성품을 이룬 것으로 볼 수 있다.

주역 계사상전 제8장에서 공자가 “이루어진 성품을 존하고 존함이 도의의 문이라(成性存存道義之門)” 하신 말씀과 통하는 글귀이다. 주역 계사상전 제5장에서는 “한 번은 陰을 하고 한 번은 陽을 하는 것이 道이고, 이를 이어나가는 것은 善이 되며, 이를 이룬 것은 性이라(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하였다. 사람은 원래 善하게 타고 난다. 그 선을 바탕으로 이어나가면서 이룬 것이 性이 된다. 繼之者善은 1년으로 말하면 元亨의 봄과 여름을 말하고, 成之者性은 利貞의 가을과 겨울에 해당한다. 하늘 그대로 이어받기는 받았지만 어떻게 여물지 모르는 상태가 繼之者善이고 가을이 되면 부여받은 성질대로 여무는 것이 成之者性이다. 그 成之者性이 계속 存存하는 成性存存만 된다면 道義의 문이 된다는 것이다. 도는 그 體이고 義는 그 用이다. 곧 도덕과 의리이다. 성성존존하게 된다면 이것은 곧 도덕과 의리를 행하는 문이 되어서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이나 우리 몸은 모두가 역의 이치로 만들어졌다. 자신의 몸을 자연과 더불어 순수하게 천명 그대로 이끌어나갈 때 率性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存存하는 것이다.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모습 그대로 천성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주역의 본체로 들어가서 역을 깨닫고 도를 통하게 되는데, 중용을 소주역이라 하는 이치를 맨 먼저 중용 머릿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으로 黃帝陰符經을 보면 “天性人也, 人心機也, 立天之道, 以定人也.(하늘의 성품이 곧 사람의 것이고 사람의 마음은 움직이는 기틀인 것이니 하늘의 도를 잘 세움으로써 사람을 정립하느니라)”라 하였다. 또한 물건에서 마음이 나오고 물건에서 죽으니 그 기틀이 눈에 있다(心生於物, 死於物, 機在於目.) 하였다. 사람의 마음은 보는 것에 따라 항상 흔들리므로 항상 하늘의 도를 잘 세워 용맹정진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논어의 가장 첫머리에서 ‘學而時習之(배우고 때로 익힌다)’를 내세워 항상 공부해야 함을 강조함도 흔들리는 사람의 마음을 다잡기 위한 방법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命猶令也, 性卽理也。 天以陰陽五行, 化生萬物, 氣以成形, 而理亦賦焉, 猶命令也。於是人物之生, 因各得其所賦之理, 以爲健順五常之德, 所謂性也。

 

○명은 영(令)과 같고 성은 즉 이치이니라. 하늘이 음양과 오행으로써 화하여 만물을 내니 기운으로써 형체를 이루고 이치를 부여해주니 (하늘이 사람에게) 명령함과 같음이라. 이에 사람과 모든 물건의 생함에는 각기 그 부여받은 바의 이치로 인하여 건순오상의 덕을 갖추고 나왔으니 성품이라 이르느니라.

 

 

[해설]

 

윗글은 주자가 달아놓은 앞주이다. 천명은 하늘의 命令이며, 性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이 사람에게 어떻게 살라고 부여해준 보이지 않는 이치를 말함이다. 하늘이 음양오행의 이치로 만물을 화생하여 그 기운으로써 형체를 이루고 그 속에 보이지 않는 이치를 준 것이다. 천명지위성의 이치를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하늘의 이치에는 건순오상의 덕이 있다. 주역 건괘 대상전에서 공자는 “하늘의 움직임은 굳건하여 군자가 이로써 스스로 굳세어 쉬지 않는다(天行健, 君子以 自彊不息.)”라고 하여 하늘은 순양으로써 굳셈을 나타내었고, 곤괘 문언전에서는 “곤의 도가 순한저! 하늘을 이어 때로 행하느니라(坤道其順乎!. 承天而時行.)”고 하여 땅은 순음으로써 유순함을 말하였다. 곧 사람은 하늘과 땅의 음양의 도에 따라 健順함을 부여받았으며, 음양이 사귀는 가운데 나온 오행에 따라 仁義禮智信이라는 다섯 가지의 떳떳한 덕인 五常의 덕을 부여받은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란 누구나가 健順五常이라는, 하늘이 명한 성품을 갖고 나왔다는 것이다.

중용을 ‘소주역’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머릿장에 천명을 언급하고 있으니 그것은 곧 주역의 음양 이치에 따른 글이기 때문이다.

 

 

○率 循也, 道 猶路也. 人物 各循其性之自然, 則其日用事物之間, 莫不各有當行之路, 是則所謂道也.

 

○‘솔’은 ‘따를 순’과 같고, ‘도’는 ‘길 로’와 같음이라. 사람이나 모든 물건이 각각 그 성품의 자연함을 따르면, 날로 쓰는 사물의 사이에 각각 마땅히 행해야 할 길이 있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곧 도이니라.

 

 

[해설]

 

道와 路를 합하여 道路가 된다. 道는 ‘머리 수(首)’와 ‘갈 지(之)’가 합한 글자로 머리가 가는 것이 으뜸이요 원칙이고, 路는 ‘발 족(足)에 ’각기 각(各)‘을 합하였으니 각각 나아가는 것으로 道는 나아가는 길의 體가 되고, 路는 用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야 할 길이 있는 한편으로,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각기 처한 바 위치에 따라서 마땅히 가야 할 길이 있음을 말한다.

 

 

○修 品節之也.  性道雖同, 而氣稟或異.  故 不能無過不及之差,  聖人 因人物之所當行者, 而品節之, 以爲法於天下, 則爲之敎, 若禮樂刑政之屬, 是也.

 

○수는 품절(마름질하는 것)이라. 성과 도는 비록 같으나 기품이 혹 다르니라. 그러므로 과하거나 불급함의 차이가 없지 않기 때문에 성인이 사람과 물건의 마땅히 가야할 바를 인하여 잘 품절하여 써 천하의 법을 삼으니 이를 일러 교라고 하니 예를 들어 예절과 음악과 형벌과 정치 같은 등속이니라.

 

 

[해설]

 

닦는다는 것은 마름하는 것이다. 물품을 잘 손질하고 다듬어 절도있게 하는 것이다. 하늘의 명이 性이고 그 성품을 닦는 것이 道이므로 하늘이 부여하는 원리는 같으나 사람마다 타고 나는 기질적인 품성(稟性)은 각기 다르다. 타고난 성질이 급한 사람도 있고 느린 사람도 있으며, 타고난 기질이 강한 사람도 있고 유약한 사람도 있다. 사람마다 모두가 똑같이 중을 지켜나간다면 별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타고난 과불급의 차이가 있기에 성인이 사람마다 물건마다 마땅히 가야 할 바에 대해 잘 닦아나갈 수 있도록 마름질을 한다. 그것이 곧 ‘敎’, 가르침인데 이에는 예절과 음악, 형벌과 정치 등등의 여러 방법이 있다.

 

 

○蓋人知己之有性, 而不知其出於天, 知事之有道, 而不知其由於性, 知聖人之有敎, 而不知其因吾之所固有者裁之也.  故 子思於此, 首發明之, 而蕫子所謂道之大原出於天, 亦此意也.

 

○대개 사람이 자기에게 성품이 있음을 알되 그것이 하늘에서 나옴을 알지 못하며, 사물이 가야 할 길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이 하늘이 부여해준 성품을 따라야 하는 연유는 알지 못하며, 성인의 가르침이 있는 것을 알면서 그 나의 진실로 둔 바를 인하여 마름하는 것은 알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자사가 이에 (중용의) 머릿장에 밝히시니 동자(董子 ; 동중서)란 이가 도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왔다 이르니 또한 이 뜻이니라.

 

 

 

道也者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도라는 것은 잠깐이라도 떠날 수 없다.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보이지 않더라도 경계하고 삼가하며 들리지 않아도 두려워한다.

 

 

[해설]

 

우리가 가야 할 길, 곧 도라는 것은 내 몸에서 잠깐이라도 떠나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길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도를 실천하지 않아 벌어질 무서움이나 두려움을 보고 난 뒤에야 어거지로 하는 도가 아니라 처음부터 보지 않고(不睹) 듣지 않더라도(不問) 이것이 사람이 가야 할 길이겠구나 하는 원리에 입각해 스스로 늘 조심조심 도를 따라가야 한다(戒愼恐懼)는 것이다.

불가(佛家)의 금강경(金剛經) 사구게(四句偈)에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약 빛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니 영원히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니라)라고 한 말도 바로 不睹하고 不聞이라 하여 도를 닦지 않음을 경계한 말이다.

 

 

○道者 日用事物當行之理, 皆性之德而具於心, 無物不有, 無時不然, 所以不可須臾離也. 若其可離, 則豈率性之謂哉! 是以 君子之心, 常存敬畏, 雖不見聞, 亦不敢忽, 所以存天理之本然, 而不使離於須臾之頃也.

 

○도라 하는 것은 날로 쓰는 사물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이치이니 모두가 성품의 덕이요 그것이 마음에 다 갖추어져 물건마다 (도를) 두지 않음이 없고 때로 그렇지 않음이 없으니 써한 바가히 잠깐이라도 떠날 수 없음이니라. 만약 가히 떠나면 어찌 하늘이 정한 성품을 따른다고 할 수 있으리요. 이로써 군자의 마음이 항상 경외롭게 두어(곧 戒愼恐懼) 비록 보고 듣지 못하나 또한 감히 경솔히 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이 써한 바 천리의 본연(곧 性道)을 존하는 것이고 잠깐의 경각이라도 떠나지 못함이니라.

 

 

[해설]

 

윗 글의 常存敬畏는 대학 전문 제6장 제2절의 “小人閒居爲不善, 無所不至, 見君子而后, 厭然掩其不善, 而著其善, 人之視己, 如見其肺肝, 然則何益矣. 此謂誠於中, 形於外.  故 君子必愼其獨也.

소인이 한가하게 있을 때에 불선을 행함이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다가 군자를 보고 난 뒤에 슬며시 그 불선을 가리고 선을 드러내지만, 남들이 자기를 알아봄이 마치 나의 폐장과 간장을 보는 듯할 것이니 그렇다면 어찌 유익하겠는가. 이를 일컬어 ‘속마음에 성실하면 밖으로 드러난다’고 하는 것이니, 때문에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를 삼가니라." 는 내용과 같이 항상 .戒愼恐懼하는 마음으로 도를 닦아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숨은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은 없으며, 미미한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가 홀로 있어도 삼가한다.

 

 

[해설]

 

천자문에 屬耳垣墻(속이원장), 寓目囊箱(우목낭상)이라는 말이 있다. 귀는 담장에 붙어 있고, 눈은 내가 늘 쓰는 상자 속이나 천장에 붙어 있으니 말조심 행동조심 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숨어있는 것이 절대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더 잘 나타나고, 미미한 것이라 하여 결코 드러나지 않으리라 여기지만 역시 다 드러나기 때문에 숨어 있을 때나 은미할 때나 남이 보지 않고 듣지 않을 때라도 다시 말해 홀로 있을 때라도 스스로를 삼가야 한다.

주역 풍화가인(風火家人)괘에서 언급한 ‘君子言有物, 而行有恒.(말에는 실물이 있고 행동에는 항상함이 있다)’ 하여야 하고 앞서도 나왔듯이 必愼其獨해야 한다는 뜻이다.

 

 

 

○隱 暗處也. 微 細事也. 獨者 人所不知, 而己所獨知之地也. 言幽暗之中 細微之事, 跡雖未形, 而幾則已動, 人雖不知, 而己獨知之, 則是天下之事, 無有著見明懸而過於此者. 是而 君子旣常戒懼, 而於此尤加謹焉, 所以遏人欲於將萌, 而不使其潛滋暗長於隱微之中, 以至離道之遠也.

 

○隱은 어두운 곳이요 微는 가느다란 일이라. 홀로란 것은 남이 알지 못하는 바이며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것이라. 그윽하고 어두운 가운데 세미한 일이 비록 자취라는 형체는 있지 아니하나 기미는 이미 움직이고 있어 남들이 비록 알지 못하나 나 홀로는 아는 것이 곧 천하의 일이니 나타나고 밝게 드러나 여기에 지남이 있지 않느니라. 이로써 군자가 항상 계신공구하야 이에 더욱 더 삼갈 것이니, 써한 바 사람의 욕심이 장차 싹 트는 것을 막아 은미한 가운데 푹 잠겨 차차 불어나고(潛滋) 어두운 속에서 점차 커져(暗長) 도를 떠나 멀리 이르지 않게 함이니라

 

 

[해설]

아무리 비밀스럽게 하는 일이라도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기에 형체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미 기미는 드러나 있는 것이니 곧 만천하에 다 알려진다. 주역 14번째 화천대유(火天大有)괘에 보면 "遏惡揚善, 順天休命”하였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모든 것이 많아지고 풍성해지다보니 이를 탐하고 욕심을 내어 죄짓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물질이 풍요롭고 빈부의 격차가 나면 없는 사람는 없기에 가지려고 죄짓고, 있는 사람은 더 가지려고 죄를 짓는다. 그래서 遏惡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맹자에도 ‘遏人欲存天理(사람의 욕심을 막아 하늘의 이치를 보존해야 한다)’라 하였다. 즉 하늘이 부여해주 性道를 지키기 위해서는 항상 戒愼恐懼해야 함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대목이다.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天下之達道也。

 

 

희노애락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中이라 하고, 희로애락이 나타났지만 절도에 맞는 상태를 和라고 하는데, 中이라 하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며,  和라는 것은 천하에 두루 통하는 도이다.

 

 

[해설]

 

여기서부터는 중용을 설명하고 있다. 앞에서는 도를 말하였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기뻐하거나 성내거나 슬퍼하거나 즐거워할 때가 있다. 이것이 아직 마음 속에 있을 때가 중이고, 그것을 잘 조절해 적절히 나타났을 때를 和, 곧 조화, 화합이라고 한다. 이것이 곧 中和이며, 中庸을 말한다. 中은 언제나 中이고, 和는 ‘떳떳함(庸)’, 正, 節로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中和라 하면 中庸이요, 中正이요 中節이요 中道로도 얘기할 수 있다.

中은 속에 있는 것이므로 뿌리가 되기에 大本으로 표현했고, 근본에서 나와 가지를 뻗어 나가는 것이 道이므로 누구나 다 가야할 길이기에 和를 達道로 표현했다. 곧 내적인 大本이 中, 外的인 達道가 和가 된다.

 

 

○喜怒哀樂 情也, 其未發則性也. 無所偏倚. 故 謂之中, 發皆中節, 情之正也. 無所乖戾. 故 謂之和. 大本者 天命之性, 天下之理 皆由此出, 道之體也. 達道者 循性之謂, 天下古今之所共由 道之用也. 此言 性情之德, 以明道不可離之意.

 

○희노애락은 (사람의) 감정(情)이니 그것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를 性이라 함이라. 치우치고 기울어지는 바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이를 중이라 함이요 발하되 절도에 맞는 것을 감정의 바름이니라. 어긋나거나 거스리는 바가 없으므로 이를 和라 이르니라. 대본이라는 것은 천하의 성품이니 천하의 이치가 모두 이로 말미암아 나오니 도의 體이니라. 통한 도라고 하는 것은 성품을 따름을 이름이니 천하와 고금이 한가지로 말미암은 바이니 도의 用이라. 이것은 성정의 덕을 말함이니 써 밝은 도는 가히 떨어질 수 없다는 의미니라.

 

 

[해설]

 

大本은 곧 道之體가 되며 中이 되며, 바로 중용 맨첫머리에 언급한 天命之謂性을 말한다. 達道는 곧 道之用이 되며 和가 되고 率性之謂道에 해당하고 性情之德을 말한다.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중화에 이르면 천지가 자리를 잡고 만물이 길러진다.

 

 

 

[해설]

 

주역 계사상전 첫머리에 “易簡而天下之理 得矣, 天下之理 得, 而成位乎其中矣.(쉽고 간단함에 천하의 이치를 얻으니, 천하의 이치를 얻음에 위를 그 가운데에 이루느니라)’고 하였으며, 천부경에도 ‘人中天地一’라 하여 가운데 자리하는 것을 매우 소중함을 밝히고 있다. 하늘이나 땅이나 중화라는 제 위치를 잃는다면 만물이 길러질 수 없음을 표현해 중화는 곧 천지로부터 시작됨을 알 수 있다.

 

 

○致 推而極之也.  位者 安其所也. 育者는 遂其生也. 自戒懼而約之, 以至於至靜之中, 無所偏倚而其守不失, 則極其中而天地 位矣,  自謹獨而精之, 以至於應物之處, 無小差謬, 而無適不然, 則極其和, 而萬物育矣. 蓋天地萬物 本吾一體, 吾之心正, 則天地之心亦正矣, 吾之氣順, 則天地之氣 亦順矣. 故 其效驗至於如此, 此學問之極功, 聖人之能事. 初非有待於外, 而修道之敎, 亦在其中矣. 是其一體一用, 雖有動靜之殊, 然 必其軆立而後, 用有以行, 則其實 亦非有兩事也. 故 於此合而言之, 以結上文之意.

 

○치는 미루어 극함이라, 위라는 것은 그 곳에서 편안함이오, 육은 그 생함을 이룸이니라. 계신공구로부터 간략히 하여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 이르러 치우치거나 미뤄지는 바가 없어 그 지키는 바를 잃지 않으면 그 중이 지극해져 천지가 위를 얻게 되고, 근독(홀로를 삼가함)으로부터 정미롭게 해서 써 물건을 응하는 곳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어긋남이 없어서 어디를 가든지 그렇지 않음이 없으면(中이라는 體를 잘 잡는다면) 그 화함을 극하게 해서 만물이 길러지느니라. 대개 천지만물이라 함은 본래 내 한 몸이니 나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를 것이요 나의 기운이 순하면 천지의 기운도 또한 순하느니라. 그러므로 그 효험이 이와 같은데 이르니 이것은 (중용이라는) 학문의 지극한 공이며 성인의 능한 일이니라. 처음에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지 아니하나(내 성품 밖으로 나가지 않으나) 도를 마름하는 敎(修道之敎)가 또한 그 가운데 있느니라(도를 잘 마름하고 밖으로 나가 가르치니 효험이 커짐이 있음이라). 이 그 일체일용이 비록 동하고 정하는 다름이 있으나 반드시 그 체가 선 뒤에 용이 써 행함이 있으면 즉 그 실지(실상)가 두 가지 일이 있지 않음이니 고로 이에 합해서 말하니 윗글의 뜻을 여기에 말함이라

 

 

[해설]

 

천지인이 모두가 하나임을 밝히고 있다. 천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 속에 있음을 부연설명하고 체용의 이치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체를 바로 세우고 행해야 함을 덧붙이면서 一體一用은 곧 一原을 밝히고 있다.

 

 

 

右 第一章。

 

 

○子思述所傳之意以立言, 首明道之本原, 出於天而不可易, 其實 體備於己而不可離,  此言 存養省察之要, 終言聖神功化之極, 蓋欲學者 於此反求諸身, 而自得之, 以去夫外誘之私, 而充其本然之善. 楊氏所謂一篇之體要, 是也. 其下十章 蓋子思引夫子之言, 以終此章之意.

 

○자사가 전한 바의 뜻을 지어서 써 말을 세워서 먼저 도의 본원이 하늘에서 나와서 가히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밝혀 놓았으니 그 실지는 체가 몸에 갖추어져 가히 떠나지 못함을 (머릿장에) 밝힌 것이오, 이 말은 살피고 살핌의 중요함을 잘 존양하고(말해놓고 ) 마침내는 성신(성인의 신비로움)의 공되고 화하는 지극함을 말해 놓았으니, 대개 배우는 자가 이에 저 몸에 돌이켜 구해(反求諸身) 스스로 얻어써 밖으로 유혹되는 사사로움을 버리고 본연의 선함을 충족시키게 함이라 .양씨가 한편의 체요라고 말한 바가 이것이니라. 이하 십장은 대개 자사가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써 이 장의 뜻을 마무리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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