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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漢詩/其他

戱贈花山 二首 - 徐居正

by 柳川 2022. 7. 18.

                                                                              戱贈花山 二首

 

 

                                                                                                                                                           徐居正(1420 ~ 1488)

 

落魄南州奉使還、                                               남쪽 고을에 사명 받들고 갔다가 돌아와,       

風流晩節謝東山。                                               만년의 풍류가 사안(謝安)이 동산에서 지내던 시절같도다.     

莫敎獅子尋常吼、                                               평소에 큰소리 나게 하지 마소,        

怕見欄邊黑牧丹。                                               난간 가에서 흑모란을 보게 될까 두렵네.

 

退之老去辭桃柳、                                                퇴지는 늘그막에 강도(絳桃)와 유지(柳枝)를 보냈고,

居易殘年別素蠻。                                                백거이도 만년에 번소(樊素)와 소만(小蠻)과 결별했다네.

多病吾今思換馬、                                                병치레 잦은 나는 지금 말과 바꿀까 생각하며,

風情都已屬花山。                                                풍정일랑은 모두 화산에 맡겨버렸다네.

 

                                                                                                  [한국고전종합DB <四佳詩集 第13卷>]

 

 

[해설]

 

花山 : 일찍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영남(嶺南)에 갔다 돌아온, 자가 담수(淡叟)인 윤자영(尹子濚)에 대한 호칭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사가시집 제13권 ‘장난삼아 윤담수(尹淡叟) 동경(同庚)에게 주다. 담수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영남(嶺南)에 갔다가 막 돌아왔다.’ 

東山 : 동진(東晉) 때의 명신(名臣) 사안(謝安)이 40여 세까지 은거하던 산인데, 당시 사안이 매양 내외 자질(內外子姪)들과 기녀들을                  거느리고 동산의 별장에서 주연을 베풀고 풍류를 한껏 즐겼던 데서 온 말.

獅子 : 사자가 으르렁댄다는 것은 부인의 투기가 심하여 남편에게 발악(發惡)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송(宋) 나라 때 진조(陳慥)의 자가 계상(季常)이고 호가 용구거사(龍丘居士)였는데, 그는 빈객을 좋아하고 가무하는 기녀를 좋아

         하였으나, 그의 아내 하동 유씨(河東柳氏)의 투기가 워낙 심했으므로, 소식(蘇軾)이 일찍이 그에게 준 시에서 “용구거사 또한

         가련하기 그지없어라, 공을 말하고 유를 말하며 밤잠도 안 자다가, 문득 하동의 사자 으르렁대는 소리만 들으면, 주장은 손에서

         떨어지고 마음은 아득해지네.〔龍丘居士亦可憐 談空說有夜不眠 忽聞河東獅子吼 拄杖落手心茫然〕”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尋常 :  대수롭지 않고 예사로움.

          심상(尋常)은 고대 중국의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이다. 심(尋)은 8자 길이를 뜻하며, 상(常)은 16자를 뜻한다. 우후죽순처럼 많은

          나라들이 저마다 들고 일어나던 춘추전국시대에 제후들은 얼마 되지 않는 ‘심상의 땅’을 가지고 다투었다고 한다.

          평수로 따지면 한 평 남짓한 땅을 빼앗기 위해 싸웠다는 뜻으로 아주 작은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심상은 짧은 길이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이것이 곧 작고 보잘것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에 비견되기도 했다.

        이 어휘는 『장자』에 등장하는데, 장자는 배를 물에 띄우면 잘 나아가지만 땅에서 밀면 평생을 밀어도 심상만큼 나가기가 힘

        들다고 했다.

​        그뒤 시인 두보(杜甫)의 시 「곡강(曲江)」에도 나온다.  酒債尋常行處有, 人生七十古來稀,

黑牧丹 : 흑모란(黑牧丹)은 무소〔水牛〕의 희칭(戱稱)이다.  破閑集을 보면 李仁老의 시에 두 차례나 쓰였다. (파한집 卷上5, 卷上19.>

            당(唐) 나라 말기 유훈(劉訓)이란 사람은 경사(京師)의 부인(富人)이었는바, 경사에서는 모란꽃 완상을 가장 훌륭한 봄놀이로 여

            겨 왔으므로, 유훈이 한번은 손들을 맞이하여 꽃을 완상할 적에 무소 수백 마리를 앞에 매어두고 그를 가리켜 “유씨의 흑모란이

            다.〔劉氏黑牧丹也〕”라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투기 부리는 아내 앞에서 쩔쩔매는 남편의 모습을 으르렁대는 사자

            앞에서 벌벌 떠는 무소에 비유하여 이른 말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다.

桃柳 :  도류(桃柳)는 한유의 애첩이었던 강도(絳桃)와 유지(柳枝)를 합칭한 말이다.

           《당어림(唐語林)》에 의하면, 한유에게 강도와 유지 두 애첩이 있어 모두 가무를 잘했는데, 뒤에 유지가 담장을 넘어서 도망갔다가

            가인(家人)에게 다시 붙들려 온 일이 있어, 한유의 진주초귀(鎭州初歸) 시에서 “이별한 이후로 길거리의 양류는, 춘풍에 하늘거리

            며 날려고만 했는데, 또한 작은 정원의 도리는 그대로 남아 있어, 낭군 오길 기다리며 꽃을 안 피우고 있었네. 〔別來楊柳街頭樹 擺

            弄春風只欲飛 還有小園桃李在 留花不發待郞歸〕” 하고, 그 후부터는 강도만 오로지 총애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그러나 강도와 유지 두 애첩을 다 사절했다는 설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夕次壽陽驛題吳郎中詩後

            風光欲動別長安,春半邊城特地寒。

            不見園桃幷巷柳,   馬頭惟有月團團。

  

            鎭州初歸

            別來楊柳街頭樹,擺弄春風只欲飛。

            還有小園桃李在,留花不發待郎歸。

 

素蠻 : 소만(素蠻)은 백거이(白居易)의 애첩이었던 번소(樊素)와 소만(小蠻)을 합칭한 말이다.

          번소는 노래를 잘하고, 소만은 춤을 잘 추었으므로, 백거이가 일찍이 시를 지어 “빨간 앵도는 번소의 입이요, 버들가지는 소만의

          허리로다.〔櫻桃樊素口 楊柳小蠻腰〕”라고 했는데, 뒤에 백거이가 병이 들어 끝내 번소와 결별한 일이 있으므로 이른 말이다.

多病 ~  : 후위(後魏) 때 조창(曹彰)이 자못 호기(豪氣)가 있었는데, 한번은 우연히 한 준마를 보고는 대단히 좋아하여 그 주인에게

          “나에게 미첩(美妾)들이 있어 그 말과 바꿀 수 있으니, 그대가 미첩을 고르기만 하라.” 하자, 그 주인이 한 미첩을 가리키므로

          조창이 드디어 그 미첩과 말을 바꾸었던 고사에서 온 말로, 여기서는 병이 많아 미첩이 필요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徐居正(1420 ~ 1488)

 

본관은 달성.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 권근(權近)의 외손자. 1444년(세종 26)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1451년(문종 1) 사가독서 후 집현전박사 등을 거쳐 1457년(세조 3)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공조참의 등을 지냈다. 1460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헌에 올랐으며, 1464년 조선 최초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6조(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1470년(성종 1)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고 달성군(達城君)에 책봉되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 폐위와 사육신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의 혹독한 비평가였던 김시습과도 미묘한 친분관계를 맺은 것으로 유명하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그 자신도 뛰어난 문학저술을 남겨 조선시대 관인문학이 절정을 이루었던 목릉성세(穆陵盛世)의 디딤돌을 이루었다. 〈경국대전〉·〈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동문선〉 편찬에 참여했으며, 왕명으로 〈향약집성방〉을 언해했다. 그의 저술서로는 〈역대연표 歷代年表〉, 객관적 비평태도와 주체적 비평안(批評眼)을 확립하여 후대의 시화(詩話)에 큰 영향을 끼친 〈동인시화〉, 간추린 역사·제도·풍속 등을 서술한 〈필원잡기 筆苑雜記〉, 설화·수필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태평한화골계전 太平閑話滑稽傳〉이 있으며, 관인의 부려호방(富麗豪放)한 시문이 다수 실린 〈사가집 四佳集〉 등이 있다.

명나라 사신 기순(祁順)과의 시 대결에서 우수한 재능을 보였으며 그를 통한 〈황화집 皇華集〉의 편찬으로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그의 글씨는 충주의 화산군권근신도비(花山君權近神道碑)에 남아 있다. 시호는 문충이며, 대구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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