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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古文學/歷史 史實及說話

고구려 안장왕과 을밀의 사랑

by 柳川 2016. 9. 6.

안장왕의  사랑         

그 해는 백제 무령왕(武寧王) 19년. 도읍은 오늘의 충남 공주인 웅진성이었다. 또한 신라는 法興王 6년, 중국은 북위와 양이 겨루던 남북조 시대 말기였다.

 

이러한 무렵에 백제 개백현에는 한씨라는 호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한주라는 아리따운 딸 하나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우리말로 하면 구슬아씨였을 것이다.

안장왕은 장수왕(長壽王)의 손자인 문자명왕(文咨明王)의 아들로서 태자 때의 이름은 흥안(興安)이라고 했다. 이 흥안태자가 어느 날 부왕의 허락을 받고 상인으로 변장한 채 강을 건너 개백현으로 몰래 넘어와 적정을 살피다가 그만 백제의 군사들에게 발각되어 달아나게 되었다.정신없이 도망치던 흥안태자가 막다른 골목으로 쫓기자 다급한 나머지 어느 큰 저택의 담장을 훌쩍 타넘어 몰래 숨었는데, 그 집이 바로 구슬아씨의 집이었다. 

 

그렇게 해서 흥안태자와 구슬아씨는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천생연분이었는지 씩씩하고 잘 생긴 고구려의 태자와 아리따운 백제의 처녀는 그만 첫눈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며칠 숨어 지내는 동안 두 청춘 남녀의 가슴에는 사랑이 싹트고 샘솟아 그만 넘어서는 안 될 선까지 넘고야 말았다.

흥안태자는 그렇게 구슬아씨를 사랑의 포로로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신분을 털어놓고 이렇게 약속했다.

“나는 사실 고구려의 흥안태자입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숨어 있을 수는 없기에 사실을 밝히고 내 나라로 돌아가기 전에 당신에게 약속을 하고 가려 합니다. 내 반드시 군사들을 거느리고 돌아와 그대를 모셔가겠습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혼인을 하여 당신을 대고구려의 황후로 맞이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흥안태자는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는데 한 번 간 태자는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그것은 새로 부임한 성주가 구슬아씨의 미모가 매우 빼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혼인을 강요해온 것이었다. 구슬아씨는 이미 정혼한 남정네가 있다면서 한사코 거절을 했다. 마침내 성주가 애가 타고 노해서 구슬아씨를 잡아들여 매질을 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옥에 가두고 말았다.

성주가 매일같이 혼인을 강요하며 야욕을 채우려고 하자 구슬아씨가 이런 시조를 읊어 자신의 매서운 절개를 표시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든 없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 시조가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읊었던 ‘단심가’로 알고 있는데 丹齋 신채호(申采浩)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그때 한주가 읊었다는 게 바로 이 단심가라고 했다.

 

이 노래를 전해들은 성주가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을 알자 구슬아씨를 아예 죽여 없애기로 작정했다. 

그 며칠 뒤가 성주의 생일이었는데 성주가 구슬아씨를 불러내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노라! 너는 내 각시가 될 터인고? 만일 또다시 거절한다면 오늘이 바로 네 제삿날이 되리라!”

“하늘이 무서운 줄 아시오! 내가 죽으면 내 제삿날이 되려니와 만일 내 뜻을 꺾지 못한다면 오늘이 성주의 제삿날이 되리라!”

성주가 분기충천하여, “저 년 죽여라!” 하고 악을 쓰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와 하는 함성이 울리더니 수십 명의 장사가 창검을 고 잔치판에 뛰어들더니 성주의 부하들을 마구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계속해서 고함쳤다.

“악독한 성주 놈을 죽여라!” “고구려 군사 수만 명이 강을 건너왔다!” “모두 항복하지 않으면 죽는다."                

 

 

 을밀의 사랑

 

고구려 안장왕 때의 장군 을밀(乙密)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는 전하지 않고 해상잡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의하면 을밀에 대한 이야기를 해상잡록에서 발췌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그 책은 전해지지 않아 원전의 사실확인이 불가능하다.

 

고구려 안장왕은 태자 시절 백제 땅인 개백현(皆伯縣)에 사는 한씨 미녀 한주(韓珠)를 사랑하였는데, 즉위하고 나서도 그녀를 잊지 못하여 신하들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일 개백현을 회복하여 한주를 구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천금은 물론 萬戶侯에 봉할 것이다.”

 

이때 장군 을밀이 선뜻 나섰다.

“천금과 만호후도 좋지만, 신의 소원은 안학 공주와 결혼하는 것뿐입니다. 신이 안학 공주를 사랑함이 대왕께서 한씨 미녀를 사랑하심과 마찬가지입니다. 대왕께서 만일 신의 소원대로 안학 공주와 결혼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신이 대왕의 소원대로 한씨 미녀를 구해오겠습니다.”

 

을밀은 오래 전부터 문자명왕의 딸인 안학 공주와 서로 사랑하였다. 문자명왕이 죽고 태자가 왕위에 올라 안장왕이 되었으니, 안학 공주는 바로 왕의 친누이동생이었다. 안장왕은 친누이동생 안학 공주를 아끼는 마음이 한주를 사랑하는 마음에 미치지 못하여, 마침내 을밀의 청을 허락하였다.

 

당시 안장왕은 마음이 급했다. 한주의 미모에 반한 개백현의 태수가 청혼을 하였는데,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면서 그것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태수는 적과 내통을 하였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한주를 옥에 가둔 채 감언이설로 달래고 때로는 엄포를 놓는 등 온갖 고문을 하면서 괴롭혔다.

도무지 한주가 말을 듣지 않자, 태수가 죽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고구려 안장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니 을밀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을밀은 곧 수군 5천 명을 거느리고 바닷길로 떠나면서 안장왕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신이 먼저 백제를 쳐서 개백현을 회복하고 한씨 미녀를 살려낼 것이니, 대왕께서는 대군을 거느리고 천천히 육로로 오시면 수십 일 안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을밀은 곧 배를 타고 바닷길을 통해 백제 땅으로 들어갔다. 개백현은 지금의 행주산성으로 비정되는데, 강화도를 통해 한강으로 곧바로 진입할 수 있는 뱃길이었다. 일단 을밀은 결사대 20명을 뽑아 평복으로 위장하여 개백현으로 잠입시키고, 그는 5천 명의 수군을 지휘하여 바로 그 뒤를 따랐다.

 

한편 그 무렵, 백제의 개백현 태수는 마침 그날이 그의 생일이라 관리와 친구들을 모아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그때까지도 옥에 갇혀 있는 한주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한 태수는 졸개를 보내 그녀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다음과 같은 자신의 말을 전하게 하였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오늘 너를 죽이기로 작정하였으나, 만약 네가 마음을 돌리면 곧 너를 살려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늘이 바로 네가 다시 태어나는 생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주는 태수의 전하는 말에 냉정하게 잘라 대답하였다.

“태수가 내 뜻을 빼앗지 않으면 오늘이 태수의 생일이 되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태수의 생일이 곧 내가 죽는 날이 될 것이요, 만약 내가 사는 날이면 태수의 죽는 날이 될 것입니다.”

졸개로부터 이 같은 한주의 말을 전해들은 태수는 크게 노하여 빨리 처형하라고 명을 내렸다,

이때 을밀의 결사대 20명이 춤추는 광대패로 가장하고 연회장에 들어가서, 갑자기 칼을 빼어들고 많은 사람들을 베어 넘기며 소리쳤다.

“지금 고구려 군사 10만 명이 입성하였다! 너희들은 독 안에 든 쥐니 곧 항복하라!”

연회장에 있던 백제의 태수를 위시하여 많은 사람들이 우왕좌왕 하는 사이, 을밀의 군사 5천 명이 성을 타넘고 들어가 감옥을 부수고 한주를 구하였다.

 

개백현이 고구려 군사들에 의해 점령되자, 육로를 통해 대군을 이끌고 백제 땅을 밟은 안장왕은 한강 일대의 각 성읍을 쳐서 항복받고, 아무런 장애 없이 여러 고을을 거쳐 곧 개백현에 이르렀다. 안장왕은 태자 시절에 사랑했던 한주를 만났으며, 그는 약속대로 친누이동생 안학 공주를 을밀에게 시집보냈다.

 

현재 대성산 아래 그 터가 남아 있는 안학궁(安鶴宮)이나 평양 대동강변의 을밀대(乙密臺)는 당시 안학공주와 을밀 장군의 사랑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역사적으로 사연이 깊은 명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고구려 안장왕과 한주, 을밀과 안학 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나중에 조선시대에 와서 남원 땅의 성춘향과 이도령의 이야기인 《춘향전》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하는데 그렇다면《춘향전》은 창작이라기보다는 고구려 때부터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하겠는데, 다만 무대를 개백현에서 남원으로 옮겨 새롭게 재구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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