調信說話
昔新羅爲京師時 有世逵寺(今興敎寺也)之莊舍 在溟州捺李郡(按地理志 溟州無捺李郡 唯有捺城郡 本捺生郡 今寧越 又牛首州領縣有捺靈郡 本捺己郡 今剛州 牛首州今春州 今言捺李郡 未知孰是)。
本寺遺(遣)僧調信爲知莊。信到莊上 悅(太)守金昕公之女, 惑之深。屢就洛山大悲前 潛祈得幸。方數年間 其女已有配矣。又往堂前怨大悲之不遂已, 哀泣至日暮。情思倦憊 俄成假寢, 忽夢金氏娘容豫入門, 粲然啓齒而謂曰, 兒早識上人於半面, 心乎愛矣 未嘗暫忘, 迫於父母之命, 强從人矣。今願爲同穴之友, 故來爾 信乃顚喜 同歸鄕里。
昕 : 새벽 흔. 새벽, 아침. 해뜰무렵. 밝은모양. 처마.
計活四十餘霜, 有兒息五, 家徒四壁 藜藿不給。遂乃落魄, 扶携糊其口於四方。 如是十年 周流草野, 懸鶉百結, 亦不掩體。適過溟州蟹縣嶺, 大兒十五歲者忽餧死, 痛哭收瘞於道。從率餘四口, 到羽曲縣(今羽縣也) 結茅於路傍而舍。夫婦老且病 飢不能興。十歲女兒巡乞, 乃爲里獒所噬 號痛臥於前, 父母爲之歔欷, 泣下數行。
藜藿 : 명아주 잎과 콩잎이라는 뜻으로, 변변치 못한 거친 음식을 이르는 말.
懸鶉 : 낡고 헤진 옷. 옷이 해어져서 너덜너덜한 것이 메추리의 꽁지깃이 빠진 것과 같다는 뜻으로 이르는 말이다. 누더기.
餧 : 먹일 위. 먹이다. 밥. 음식물. 주리다. 기아(餧死 : 굶어죽다). 생선이 썩다.
瘞 : 묻을 예. 묻다. 무덤. 獒 : 개 오. 噬 : 씹을 서. 씹다. 물어뜯음. 깨뭄. 미치다. 이름.
歔欷 : 한숨을 짓다. 한숨을 쉼. (中)흐느끼다.
歔 : 흐느낄 허. 흐느끼다. 훌/적훌/적 움, 두려워하다. 콧김을 내쉬다. 欷 : 흐느낄 희. 흐느끼다. 한숨쉬다. 두려워하다.
어언간 사십 여년이 지나 자녀 다섯을 두었다. 집은 다만 네 벽 뿐이요. 나물죽으로도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마침내 실의에 찬 두 사람은 서로 부축하며 사방을 떠돌아 다니며 입에 풀칠을 하였다. 이와 같이 10년 동안 두루 초야를 떠도니 옷은 누더기로 몸조차 가리지 못했다.
婦乃[皺]澁拭涕, 倉卒而語曰, "予之始遇君也. 色美年芳 衣袴稠鮮。 一味之甘 得與子分之, 數尺之煖 得與子共之 出處五十年, 情鐘莫逆 恩愛稠繆 可謂厚緣。自比年來 衰病歲益深 飢寒日益迫, 傍舍壺漿人不容乞 千門之耻 重似丘山。兒寒兒飢 未遑計補, 何暇有愛悅夫婦之心哉!
皺 : 주름 추. 주름잡히다. 주름. 마른대추. 오그라들다.
澁 : 떫을 삽. 떫다. 껄끄럽다. 말하기를 어려워 하다. 말을 더듬음. 나아가기 어렵다. 막히다.
拭 : 닦을 식/씻을 식.
부인이 차마 말을 못하고 눈물만 훔치다가 갑자기 말했다.
紅顔巧笑 草上之露, 約束芝蘭 柳恕飄風。君有我而爲累 我爲君爲足憂。細思昔日之歡 適爲憂患所階。君乎予乎 奚至此極? 與其衆鳥之同餧 焉知隻鸞之有鏡。寒弃炎附 情所不堪, 然而行止非人 離合有數, 請從此辭。"
信聞之大喜 各分二兒將行 女曰, "我向桑梓 君其南矣。"
方分手進途而形開。殘燈翳吐 夜色將闌。
弃 : 棄의 古字
桑梓(상자) :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고향이나 고향의 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시경(詩經) 小雅 · 小弁》에 나오는 말로, 집 담 밑에 양
잠(養蠶)에 쓰이는 뽕나무와 기구(器具)를 만드는 데 쓰이는 가래나무를 심어 자손들에게 조상을 생각하게 했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形開 : 잠에서 깨어남. 分手 : 함께 있다가 헤어지다.
及旦鬢髮盡白 惘惘然殊無人世意 。已壓勞生 如飫百年辛苦。貪染之心 洒然氷釋。於是慚對聖容 懺滌無已。 歸撥蟹峴所埋兒塚 乃石彌勒也。灌洗奉安于隣寺。 還京師免莊任 傾私財 創淨土寺 懃修白業。後莫知所終。
惘 : 멍할 망. 멍하다. 심심하다. 황급하다. 멍한 모양.
飫 : 포식할 어. 포식하다. 실컷 먹음. 서서 하는 주연. 편안히 먹다. 편안한 식사. 주다. 하사함.
議曰 讀此傳 掩卷而追繹之 何必信師之夢爲然。今皆知其人世之爲樂, 欣欣然役役然 特未覺爾 乃作詞誡之曰,
快適須臾意已閑、
暗從愁裏老蒼顔。
不須更待黃粱熟、
方悟勞生一夢間。
治身藏否先誠意、
鰥夢蛾眉賊夢藏。
何以秋來淸夜夢、
時時合眼到淸凉。
[三國遺事 卷第三. 塔像 第四]
- 지금의 강원도 춘천 일대이다.
- 註 2
- 태종무열왕이 9세손으로, 증조부는 이찬 주원(周元)이고, 할아버지는 시중을 지낸 소판 종기(宗基)이며, 아버지
- 는 시중을 지낸 파진찬 장여(璋如)이다.
- 822년 당나라에 건너가 숙위하고 1년 뒤에 귀국하였는데, 이때 당나라의 목종으로부터 벼슬을 받기도 하였다.
- 839년에는 대장군이 되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김양 등이 지휘하는 김우징의 군사를 대구에서 방어하다가 실
- 패하여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그 뒤 소백산으로 들어가 승려들과 함께 지내다가 849년 8얼 27일 47세로 죽었다.
- 註 3
- ≪枕中記≫에 보면, 중국 당나라 때 노생(盧生)이란 젊은이가 한단(邯鄲) 땅 어느 주막에서 도사 여옹(呂翁)의
- 베개를 빌어 베고 잠이 들었다. 그는 꿈속에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80세 까지 살았다. 그러나 꿈에서 깨
- 어보니 아까 주인이 짓던 좁쌀밥이 채 익지도 않았더라는 것이니, 부귀와 공명이 덧없음을 비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