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卷四 周本記 Ⅰ
周后稷, 名棄.1) 其母有邰氏女, 曰姜原.2) 姜原爲帝嚳元妃.3) 姜原出野, 見巨人跡, 心忻然說, 欲踐之, 踐之而身動如孕者. 居期而生子, 以爲不祥, 棄之隘巷,4) 馬牛過者皆辟不踐;徙置之林中, 適會山林多人, 遷之;而棄渠中冰上, 飛鳥以其翼覆薦之. 姜原以爲神, 遂收養長之. 初欲棄之, 因名曰棄.5)
주(周)의 시조 후직(后稷)은 이름이 기(棄)이다. 그 어머니는 유태씨(有邰氏)의 딸로 강원(姜原)이라 불렀다. 강원은 제곡(帝嚳)의 정비(正妃)였다. 강원이 들에 나가서 거인의 발자국을 보았는데, 마음이 기뻐지면서 그것을 밟고 싶어져 밟으니 아기를 가진 듯 배 안이 꿈틀거렸다. 때가 되어 아들을 낳았는데 불길하게 생각해 비좁은 골목에 버렸으나 말이나 소가 지나가면서 모두 피하고 밟지 않았다. 아이를 숲 속에 옮겨놓았더니 마침 산속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다시 옮겼다. 도랑 얼음 위에 버렸으나 날짐승들이 날개로 아이를 덮고 깃을 깔아주었다. 강원은 신기하게 여겨 마침내 거두어 길렀다. 처음에 아이를 버리려 했기 때문에 이름을 ‘기’라 했다.
棄爲兒時, 屹如巨人之志. 其游戱, 好種樹麻、菽, 麻、菽美. 及爲成人, 遂好耕農, 相地之宜, 宜谷者稼穡焉,6) 民皆法則之. 帝堯聞之, 擧棄爲農師, 天下得其利, 有功. 帝舜曰:「棄, 黎民始飢,7) 爾后稷播時百穀.」 封棄於邰,8) 號曰后稷, 別姓姬氏.9) 后稷之興, 在陶唐、虞、夏之際, 皆有令德.
기는 어릴 때부터 거인의 뜻을 품은 듯 남달랐다. 그는 놀면서도 삼과 콩을 잘 심었는데 삼과 콩 모두 잘 자랐다. 성인이 되자 더욱 농경에 힘써 토지의 특성을 살펴서 곡식을 심어야 할 곳에 농사를 지으니 인민들이 모두 그를 따라했다. 요 임금이 이를 듣고 기를 농사(農師)로 등용하자 천하가 이익을 얻는 공을 세웠다. 요 임금은 “기, 백성들이 굶주림에 처해 있으니 그대 후직이 되어 모든 곡식의 씨를 때맞추어 뿌리시오”라 했다. 기를 태(邰)에 봉하고 후직이라 부르며 따로 희씨(姬氏) 성을 내렸다. 후직이 흥성한 시기는 도당(요), 우(순), 하(우) 때였고, 모두 좋은 덕을 보였다.
后稷卒,10) 子不窋立.11) 不窋末年, 夏后氏政衰, 去稷不務,12) 不窋以失其官而奔戎狄之閒. 不窋卒, 子鞠立. 鞠卒, 子公劉立. 公劉雖在戎狄之閒, 復脩后稷之業, 務耕種, 行地宜, 自漆、沮度渭, 取材用,13) 行者有資, 居者有畜積, 民賴其慶. 百姓懷之, 多徙而保歸焉. 周道之興自此始, 故詩人歌樂思其德.14) 公劉卒, 子慶節立, 國於豳.15)
후직이 죽자 아들 부줄(不窋)이 뒤를 이었다. 부줄 말년 하후씨(夏后氏)의 정치가 쇠락해져 (농사를 책임지는) 직이란 자리를 없애고 힘을 쓰지 않았다. 부줄은 관직을 잃고 융적(戎狄)의 지역으로 달아났다. 부줄이 죽자 아들 국(鞠)이, 국이 죽자 아들 공류(公劉)가 섰다. 공류는 융적의 지역에서 살았지만, 후직의 사업을 다시 익혀서 농경에 힘쓰고 사방으로 다니며 토지의 특성을 살폈으며 칠수, 저수에서 위수를 건너서 목재를 취해 사용했다. 떠돌아다니는 사람에게도 자본이 생겼고, 정착자들은 저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인민들이 그에게 의지했고, 백성들은 그가 그리워 많이 옮겨와 귀의했다. 주의 통치가 이로부터 흥성하기 시작했다. 이에 시인은 노래를 지어 그 덕을 사모했다. 공류가 죽자 아들 경절(慶節)이 즉위해 빈(豳)에 도읍을 정했다.
慶節卒, 子皇僕立. 皇僕卒, 子差弗立. 差弗卒, 子毁隃立.16) 毁隃卒, 子公非立.17) 公非卒, 子高圉立.18) 高圉卒, 子亞圉立.19) 亞圉卒, 子公叔祖類立.20) 公叔祖類卒, 子古公亶父立. 古公亶父復脩后稷、公劉之業, 積德行義, 國人皆戴之. 薰育戎狄攻之, 欲得財物, 予之. 已復攻, 欲得地與民. 民皆怒, 欲戰. 古公曰:「有民立君, 將以利之. 今戎狄所爲攻戰, 以吾地與民. 民之在我, 與其在彼, 何異. 民欲以我故戰, 殺人父子而君之, 予不忍爲.」乃與私屬遂去豳, 度漆、沮,21) 踰梁山,22) 止於岐下.23) 豳人擧國扶老攜弱, 盡復歸古公於岐下. 及他旁國聞古公仁, 亦多歸之. 於是古公乃貶戎狄之俗, 而營築城郭室屋, 而邑別居之.24) 作五官有司.25) 民皆歌樂之, 頌其德.26)
경절이 죽고 아들 황복(皇僕)이 섰다. 황복이 죽자 아들 차불(差弗)이 섰고, 차불이 죽자 아들 훼유(毁隃)가 섰다. 훼유가 죽자 아들 공비(公非)가, 공비가 죽고 아들 고어(高圉)가 섰다. 고어가 죽고 아들 아어(亞圉)가, 아어가 죽고 아들 공숙조류(公叔祖類)가 섰다. 공숙조류가 죽자 아들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섰다. 고공단보가 후직과 공류의 사업을 다시 익히고 덕을 쌓고 의를 행하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받들었다. 훈육(薰育) 융적(戎狄)이 고공단보를 공격해 재물을 요구하자 그들에게 재물을 내주었다. 얼마 안 있어 그들이 다시 공격해 땅과 백성을 요구하자 인민들이 노하여 싸우고자 했다.
고공은 “인민이 군주를 세우는 것은 자신들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오. 지금 융적이 우리를 공격하는 까닭은 우리의 땅과 인민 때문이오. 인민이 내게 있든 저들에게 있든 무슨 차이가 있겠소? 인민들이 나를 위해서 싸우고자 한다면 이는 그들의 아버지나 아들을 죽여가면서 그들의 군주가 되는 것이니, 나는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하겠소”라 했다.
곧 개인에 속한 사람들을 거느리고 빈을 떠나서 칠수, 저수를 건너고 양산을 넘어서 기산 아래 정착했다. 빈에 있던 사람들은 거국적으로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이를 이끌고 다시 기산 아래 고공에게 모두 돌아왔다. 다른 이웃나라도 고공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많이 귀의해왔다. 이에 고공은 융적의 풍속을 개량하고 성곽과 집을 짓고 읍을 나누어 그들을 살게 했으며, 관직과 관련 관청을 두었다. 인민들이 모두 즐거이 노래하며 그 덕을 칭송했다.
古公有長子曰太伯, 次曰虞仲. 太姜生少子季歷,27) 季歷娶太任,28) 皆賢婦人,29) 生昌, 有聖瑞.30) 古公曰:「我世當有興者, 其在昌乎?」長子太伯、虞仲知古公欲立季歷以傳昌, 乃二人亡如荊蠻,31) 文身斷髮,32) 以讓季歷.
고공단보에게는 장남인 태백(太伯)과 차남인 우중(虞仲)이 있었다. 태강(太姜)이 낳은 막내아들 계력(季歷)은 태임(大任)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태강과 태임) 모두 어진 부인들이었다. (태임이) 창(昌)을 낳았을 때 성스러운 길조가 있었다. 고공은 “내 세대에 큰 일을 일으킬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게 창인가”라 했다. 태백과 우중은 고공이 계력을 세워 창에게 전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둘이서 형만(荊蠻)으로 달아나 문신을 하고 머리털을 짧게 자름으로써 계력에게 양보했다.
古公卒, 季歷立, 是爲公季. 公季脩古公遺道, 篤於行義, 諸侯順之.
公季卒,33) 子昌立, 是爲西伯. 西伯曰文王,34) 遵后稷、公劉之業, 則古公、公季之法, 篤仁, 敬老, 慈少. 禮下賢者, 日中不暇食以待士, 士以此多歸之. 伯夷、叔齊在孤竹,35) 聞西伯善養老, 盍往歸之. 太顚、閎夭、散宜生、鬻子、辛甲大夫之徒皆往歸之.36)
고공이 죽고 계력이 즉위했는데, 이가 공계(公季)이다. 공계는 고공이 남긴 도를 닦고 성실하게 의를 행했기에 제후들이 그에게 순종했다.
공계가 죽자 아들 창이 즉위하니 이가 서백(西伯)이다. 서백은 문왕(文王)으로 불렸다. 후직과 공류의 사업을 따르고 고공와 공계의 법도를 본받아 오로지 어진 정치를 행하고 늙은이를 공경하며 어린이를 사랑했다. 어진 사람에게는 자신을 낮추는 예로 대하고 낮에는 선비를 접대하느라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이로써 인재들이 서백에게 많이 몰렸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도 고죽(孤竹)에서 서백이 노인을 잘 대우한다는 소문을 듣고 가서 서백을 따랐다. 태전(太顚), 굉요(閎夭), 산의생(散宜生), 육자(鬻子), 신갑대부(辛甲大夫) 등도 모두 가서 그를 따랐다.
崇侯虎譖西伯於殷紂曰:「西伯積善累德, 諸侯皆嚮之, 將不利於帝.」帝紂乃囚西伯於羑里. 閎夭之徒患之. 乃求有莘氏美女,37) 驪戎之文馬,38) 有熊九駟,39) 他奇怪物, 因殷嬖臣費仲而獻之紂. 紂大說, 曰:「此一物足以釋西伯,40) 況其多乎!」乃赦西伯, 賜之弓矢斧鉞, 使西伯得征伐. 曰:「譖西伯者, 崇侯虎也.」西伯乃獻洛西之地, 以請紂去炮格之刑. 紂許之.
숭후호(崇侯虎)는 은의 주에게 서백에 대해 “서백이 선과 덕을 쌓으므로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 기울어지니, 장차 임금께 불리할 것입니다”라고 헐뜯었다. 주 임금은 곧 서백을 유리(羑里)에 가두었다. 굉요 등이 이 일을 걱정해 유신씨(有莘氏)의 미녀, 여융(驪戎)의 얼룩말, 유웅(有熊)의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 아홉 대를 다른 여러 특산물들과 함께 주 임금이 총애하는 비중(費仲)을 통해 주에게 바쳤다.
주는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한 가지 물건만으로도 서백을 석방시키기에 충분한데, 하물며 이렇게 많으니”라며 바로 서백을 사면하는 한편 활과 화살 그리고 큰도끼를 내리면서 서백에게 주변 제후국을 정벌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리고는 “서백을 비방한 자는 숭후호이다”라고 말했다. 서백이 낙하 서쪽 땅을 바치며 주에게 포격형을 없애도록 청원했고, 주는 그를 허락했다.
西伯陰行善, 諸侯皆來決平. 於是虞、芮之人41)有獄不能決, 乃如周. 入界, 耕者皆讓畔, 民俗皆讓長. 虞、芮之人未見西伯, 皆慚, 相謂曰:「吾所爭, 周人所恥, 何往爲, 祇取辱耳.」遂還, 俱讓而去. 諸侯聞之, 曰「西伯蓋受命之君」.
서백이 몰래 선행을 베풀자 제후들은 모두 그에게 와서 공정한 판결을 청했다. 이때 우(虞)와 예(芮) 사람들에게 해결하지 못하는 다툼이 발생하자 바로 주로 왔다. 경내에 들어서자 밭을 가는 사람들이 서로 밭의 경계를 양보하고, 인민 풍속이 모두 연장자에게 양보하는 것이었다. 우, 예 사람들이 서백을 만나기도 전에 부끄러워하며 서로에게 “우리처럼 싸우는 것을 주 사람들은 부끄러워 하니 가서 뭘 하겠는가? 부끄럽기만 할 텐데”라며 그냥 되돌아가서 서로 양보하고 헤어졌다. 제후들이 이 소문을 듣자 “서백이 아마 천명을 받은 군주인가보다”라고 말했다.
明年, 伐犬戎.42) 明年, 伐密須.43) 明年, 敗耆國.44) 殷之祖伊聞之, 懼, 以告帝紂. 紂曰:「不有天命乎? 是何能爲!」明年, 伐邘.45) 明年, 伐崇侯虎.46) 而作豐邑,47) 自岐下而徙都豐. 明年, 西伯崩,48) 太子發立, 是爲武王.
이듬해 서백은 견융(犬戎)을 정벌하고, 그 다음해 밀수(密須)를 정벌했다. 다음해에는 기국(耆國)을 무찔렀다. 은의 조이(祖伊)가 이러한 소식을 듣자 두려워 주 임금에게 말했다. 주는 “천명이 내게 있거늘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 했다. 다음해는 우(邗)를 정벌했다. 그 다음해에는 숭후호를 정벌하고 풍읍(豐邑)을 건설해 기산 아래에서 풍으로 도읍을 옮겼다. 다음해 서백이 세상을 뜨고 태자 발(發)이 즉위하니, 이가 무왕이다.
西伯蓋卽位五十年. 其囚羑里, 蓋益易之八卦爲六十四卦.49) 詩人道西伯, 蓋受命之年稱王而斷虞芮之訟.50) 後十年而崩,51) 謚爲文王.52) 改法度, 制正朔矣. 追尊古公爲太王, 公季爲王季:53)蓋王瑞自太王興.54)
서백은 대개 50년간 자리에 있었다. 그가 유리에 갇혀 있을 때 『역(易)』의 8괘를 64괘로 만든 것 같다. 시인들은 (서백이) 천명을 받아 왕으로 칭한 해가 우와 예의 송사를 해결한 때라고 말했다. 그 후 10년이 지나 세상을 뜨자 시호를 문왕(文王)이라 했다. (서백은) 법도를 개정하고 달력을 제정했다. 고공단보를 추존해 태왕(太王)이라고 했고, 공계(公季)를 높이어 왕계(王季)라고 했는데, 이것은 대개 (주의) 왕업이 조부인 태왕으로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武王卽位,55) 太公望爲師, 周公旦爲輔, 召公、畢公之徒左右王, 師脩文王緖業.
무왕이 즉위하자 태공망(太公望)을 사(師)로 삼고 주공 단(旦)을 보(輔)로 임명했으며, 소공(召公)과 필공(畢公)은 좌우에서 왕을 도와 문왕의 위업을 배우고 넗히게 했다.
九年, 武王上祭于畢.56) 東觀兵, 至于盟津.57) 爲文王木主, 載以車, 中軍. 武王自稱太子發, 言奉文王以伐, 不敢自專. 乃告司馬、司徒、司空、諸節:58)「齊栗, 信哉! 予無知, 以先祖有德臣, 小子受先功,59) 畢立賞罰, 以定其功.」遂興師. 師尙父號曰:60)「總爾衆庶, 與爾舟楫, 後至者斬.」武王渡河, 中流, 白魚躍入王舟中,61) 武王俯取以祭. 旣渡, 有火自上復于下, 至于王屋, 流爲烏, 其色赤, 其聲魄云.62) 是時, 諸侯不期而會盟津者八百諸侯. 諸侯皆曰:「紂可伐矣.」武王曰:「女未知天命, 未可也.」乃還師歸.
9년, 무왕이 필(畢)에서 제사를 올리고 동쪽으로 가서 군대를 사열하고 맹진(盟津)에 이르렀다. 그는 나로 문왕의 위패를 만들어 중군(中軍)의 수레에 실었다. 무왕은 스스로를 태자 발(發)이라 하고 문왕을 받들어 정벌에 나서는 것이라 해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 무왕은 사마(司馬), 사도(司徒), 사공(司空), 제절(諸節)에게 “모두 단단히 믿음을 가집시다. 나는 무지하지만 선조께서 덕이 있으시어 미천한 이 몸이 선조의 공적을 받았소. 상벌제도를 바르게 세워 공적에 따라 정하겠소”라고 말했다.
마침내 군사를 일으켰다. 사상보(師尙父, 강태공)가 “병사들을 모도 모아 배를 띄워서 출동하시오! 나중에 도착하는 자는 목을 벨 것이오”라고 호령했다. 무왕이 강을 건너서 중류에 이르자 흰 물고기가 왕의 배로 튀어 올랐다. 무왕은 몸을 굽혀 잡아서는 제를 올렸다. 강을 다 건너자 불덩이가 하늘에서 떨어지더니 왕이 머무는 지붕에 이르러 까마귀로 변했다. 그 색은 붉었고 까악까악 하고 울었다. 이때 날짜를 정하지 않았는데도 맹진에 모인 제후는 800이었다. 제후들이 모두 “주는 정벌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으나, 무왕은 “그대들은 천명을 모르오. 아직 정벌할 수 없소”라 하고는 병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居二年, 聞紂昏亂暴虐滋甚, 殺王子比干, 囚箕子. 太師疵、少師彊抱其樂器而奔周. 於是武王遍告諸侯曰:「殷有重罪, 不可以不畢伐.」63)乃遵文王, 遂率戎車三百乘, 虎賁三千人,64) 甲士四萬五千人, 以東伐紂. 十一年十二月戊午, 師畢渡盟津,65) 諸侯咸會. 曰:「孶孶無怠!」武王乃作太誓, 告于衆庶:「今殷王紂乃用其婦人之言, 自絶于天, 毁壞其三正,66) 離逖其王父母弟,67) 乃斷棄其先祖之樂, 乃爲淫聲, 用變亂正聲, 怡說婦人.68) 故今予發維共行天罰. 勉哉夫子,69) 不可再, 不可三!」
2년이 지나자 주(紂)의 어리석음과 포악함이 더 심해져 왕자 비간을 죽이고 기자를 가두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태사(太師) 자(疵)와 소사(少師) 강(强)은 기를 끌어안고 주(周)로 달아났다. 이에 무왕은 제후들에게 “은의 죄가 무거우니 이제 정벌하지 않을 수가 없소이다”라고 널리 고했다. 그리고는 문왕을 받들어 전차 300대와 용사 3,000명, 갑옷을 입은 병사 45,000명을 이끌고 동으로 가서 주(紂)를 쳤다. 11년 12월 무오일에 군사들이 모두 맹진을 건넜다. 제후들이 모두 모여 “게으름 부리지 말고 열심히 싸우자”고 다짐했다.
무왕은 곧 「태서(太誓)」를 지어 많은 모두에게 고했다. “지금 은의 왕 주는 자기 부인의 말만 듣고 스스로 천명을 끊었다. 삼정(三正)을 훼손하고 그의 부모 형제를 멀리했다. 또 선조의 음악을 버리고 음란한 노래를 만들어 바른 소리를 어지럽혀 부인만 기쁘게 했다. 이에 이제 나 발이 삼가 다 함께 천벌을 집행하려고 한다. 힘을 냅시다, 여러분! 두 번 세 번도 하지 않도록!”
二月70)甲子昧爽,71) 武王朝至于商郊牧野, 乃誓.72) 武王左杖黃鉞, 右秉白旄,73) 以麾. 曰:「遠矣西土之人!」74)武王曰:「嗟! 我有國冢君,75) 司徒、司馬、司空, 亞旅、師氏,76) 千夫長、百夫長,77) 及庸、蜀、羌、髳、微、纑、彭、濮人,78) 稱爾戈,79) 比爾干, 立爾矛, 予其誓.」王曰:「古人有言『牝雞無晨. 牝雞之晨, 惟家之索』.80) 今殷王紂維婦人言是用, 自棄其先祖肆祀不答,81) 昏棄其家國, 遺其王父母弟不用, 乃維四方之多罪逋逃是崇是長, 是信是使,82) 俾暴虐于百姓, 以姦軌于商國. 今予發維共行天之罰. 今日之事, 不過六步七步, 乃止齊焉,83) 夫子勉哉! 不過於四伐五伐六伐七伐, 乃止齊焉,84) 勉哉夫子! 尙桓桓,85) 如虎如羆, 如豺如離,86) 于商郊, 不禦克奔, 以役西土,87) 勉哉夫子! 爾所不勉, 其于爾身有戮.」88)誓已, 諸侯兵會者車四千乘, 陳師牧野.
2월 갑자일 동틀 무렵, 무왕은 아침 일찍 상(商)의 교외 목야(牧野)에 이르러 맹세했다. 무왕은 왼손에 누런 도끼, 오른손에 흰색의 깃발을 들고 휘두르며 말했다. “멀리서 와주었구려 서쪽 땅 사람들이여!” 무왕은 “자, 나의 제후들이여! 사도(司徒), 사마(司馬), 사공(司空), 아려(亞旅), 사씨(師氏), 천부장(千夫長), 백부장(百夫長), 그리고 용(庸), 촉(蜀), 강(羌), 모(髳), 미(微), 노(纑), 팽(彭), 복(濮)의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창을 높이 들고 방패를 줄맞추고 창을 치켜드시오! 내가 맹세하겠소.” 왕은 이렇게 선서했다.
“옛말에 ‘암탉은 새벽에 울지 않으니,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이 망한다’라고 했소. 지금 은왕 주는 오직 부인의 말만 듣고 스스로 선조에 지내는 제사를 그만두고 나라를 어지럽혔소. 또한 친족은 등용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죄를 많이 짓고 도망쳐온 사람들을 존중하고 신임해 등용하니, 그들은 백성에게 포학하게 대하고 상나라에서 온갖 악행을 다 저질렀소. 지금 나 발은 하늘의 징벌을 그대들과 함께 집행하겠소. 오늘 싸움에서는 여섯 걸음, 일곱 걸음을 나가면 곧 멈추어 대열을 맞추어야 하오. 그대들은 이 군령을 지키도록 하시오!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공격하고 곧 멈추어 맞추어야 하오! 이 명령을 반드시 지키도록 하시오! 용맹스럽기가 호랑이 같고, 곰 같고, 승냥이 같고, 이무기 같아야 하오! 상의 교외에서 투항하는 자는 거절하거나 죽이지 말고, 그들로 하여금 서쪽 땅을 위해서 힘쓰게 하시오. 힘써주시오! 그대들이 힘쓰지 않는다면 그대들에게 화가 미칠 것이오!”
선서가 끝나고 집결한 제후들 군대 전차 4,000대가 교외의 넓은 들에 도열했다.
帝紂聞武王來, 亦發兵七十萬人距武王. 武王使師尙父與百夫致師,89) 以大卒馳帝紂師.90) 紂師雖衆, 皆無戰之心, 心欲武王亟入. 紂師皆倒兵以戰, 以開武王. 武王馳之, 紂兵皆崩畔紂. 紂走, 反入登于鹿臺之上, 蒙衣其殊玉,91) 自燔于火而死. 武王持大白旗以麾諸侯, 諸侯畢拜武王, 武王乃揖諸侯,92) 諸侯畢從. 武王至商國,93) 商國百姓咸待於郊. 於是武王使群臣告語商百姓曰:「上天降休!」商人皆再拜稽首, 武王亦答拜.94) 遂入, 至紂死所. 武王自射之, 三發而后下車, 以輕劍擊之,95) 以黃鉞斬紂頭, 縣大白之旗. 已而至紂之嬖妾二女, 二女皆經自殺. 武王又射三發, 擊以劍, 斬以玄鉞,96) 縣其頭小白之旗. 武王已乃出復軍.
주(紂)는 무왕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70만 명의 군사를 징발해 무왕을 막게 했다. 무왕은 사상보에게 100명의 용사를 이끌고 앞서게 하고 대졸을 주의 대오로 돌격하게 했다. 주의 군대가 수는 많았지만 모두 싸울 마음이 없이 무왕이 빨리 쳐들어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주의 군사들은 무기를 거꾸로 돌려 싸우면서 무왕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무왕이 돌격하자 주의 병사는 모두 무너져 주를 배반했다. 주는 달아나 녹대에 올라 보석으로 치장한 옷을 뒤집어쓰고는 불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무왕이 커다란 백기를 들고 제후들을 지휘하니 제후들이 모두 무왕에게 절했고, 무왕이 제후들에게 손을 모아 인사하자 제후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무왕이 상나라에 이르자 상나라 백성들은 모두 교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무왕은 군신들로 하여금 상의 백성들에게 “하늘이 휴식을 내려주셨도다”라고 말하게 했다. 상 사람들이 모두 두 번 절하며 머리를 조아리자 무왕 역시 답례했다. 드디어 성으로 들어가 주가 죽은 장소에 이르렀다. 무왕이 직접 (주의 시신을 향해서) 화살 세 발을 쏜 후, 마차에서 내려서 가벼운 검으로 (시신을) 내리치고 누런 도끼로 주의 머리를 베어 커다란 백기에 매달았다. 이어 주의 애첩인 두 여자를 찾으니 두 여자 모두 이미 목을 매어 자살한 뒤였다. 무왕은 또 화살 세 발을 쏘고 검으로 치고 검은색 도끼로 목을 베어 작은 백기에 매달았다. 무왕이 성을 나와 다시 군으로 돌아갔다.
其明日, 除道, 脩社及商紂宮. 及期, 百夫荷罕旗以先驅.97) 武王弟叔振鐸奉陳常車, 周公旦把大鉞, 畢公把小鉞, 以夾武王. 散宜生、太顚、閎夭皆執劍以衛武王. 旣入, 立于社南大卒之左[左], 右畢從. 毛叔鄭奉明水,98) 衛康叔封布茲,99) 召公奭贊采,100) 師尙父牽牲. 尹佚筴祝曰:101)「殷之末孫季紂,102) 殄廢先王明德, 侮蔑神祇不祀, 昏暴商邑百姓, 其章顯聞于天皇上帝.」於是武王再拜稽首, 曰:「膺更大命, 革殷, 受天明命.」武王又再拜稽首, 乃出.
그 이튿날 도로를 정비하고 사당과 주의 궁궐을 수리하게 했다. 때가 되자 100명의 용사가 큰 깃발을 메고 앞서서 나갔고, 무왕의 동생 숙진탁(叔振鐸)은 수레를 진열하고, 주공 단은 큰 도끼를 쥐고, 필공(畢公)은 작은 도끼를 쥐고서 무왕의 좌우에 섰다. 산의생, 태전, 굉요는 모두 검을 들고 무왕을 호위했다. (무왕이 성에) 들어가서 사당 남쪽, 대 부대의 좌측에 서니 좌우 모두 그 뒤를 따랐다. 모숙정(毛叔鄭)은 정화수를 받쳐들고, 위강숙봉(衛康叔封)은 자리를 깔았고, 소공 석(奭)은 예물을 올렸고 사상보는 제물을 끌었다.
윤일(尹佚)은 “은의 마지막 자손 주는 선왕의 밝은 덕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신령을 모욕해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상의 백성을 어리석고 난폭하게 다루었으니, 그 죄악을 상제께 명백히 알리나이다”라고 축문을 읽었다. 이에 무왕은 “신은 큰 명을 받고 은을 혁명했니, 하늘의 영명하신 명을 받겠나이다”라고 말하고는 다시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린 후 떠났다.
封商紂子祿父殷之餘民. 武王爲殷初定未集, 乃使其弟管叔鮮、蔡叔度相祿父治殷.103) 已而命召公釋箕子之囚.104) 命畢公釋百姓之囚, 表商容之閭. 命南宮括散鹿臺之財, 發鉅橋之粟, 以振貧弱萌隷. 命南宮括、史佚展九鼎保玉.105) 命閎夭封比干之墓.106) 命宗祝享祠于軍. 乃罷兵西歸. 行狩, 記政事, 作武成.107) 封諸侯, 班賜宗彝, 作分殷之器物.108) 武王追思先聖王, 乃褒封神農之後於焦,109) 黃帝之後於祝,110) 帝堯之後於薊,111) 帝舜之後於陳,112) 大禹之後於杞.113) 於是封功臣謀士, 而師尙父爲首封. 封尙父於營丘, 曰齊.114) 封弟周公旦於曲阜, 曰魯.115) 封召公奭於燕.116) 封弟叔鮮於管,117) 弟叔度於蔡.118) 餘各以次受封.
무왕은 상주의 아들 녹보(祿父)에게 은의 남은 인민을 다스리게 했다. 무왕은 은이 막 평정되어 아직 안정되지 못했기에 자신의 동생 관숙선(管叔鮮)과 채숙탁(蔡叔度)에게 녹보를 도와서 은을 다스리게 했다. 이어 소공에게 기자를 석방하게 명하고, 필공에게는 감옥에 갇혀 있는 백성을 석방하게 명했으며, 상용이 살던 마을에 상을 내렸다. 남궁괄(南宮括)에게 녹대의 재물과 거교의 곡식을 풀어서 가난하고 무력한 백성을 구제하게 명했고, 남궁괄과 사일(史佚)에게 구정(九鼎)과 보옥을 전시하게 명했고, 굉요에게 비간의 묘에 봉분을 입히도록 했다. 종축(宗祝)에게는 군대에서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 마침내 전쟁을 끝내고 서쪽 땅으로 철수했다.
길을 따라서 순수하며 정무를 기록해 「무성(武成)」을 지었다. 제후를 봉하고 청동 그릇 등을 골고루 나누어 하사하고 「분은지기물(分殷之器物)」을 지었다. 무왕은 선대 성군들 기리어 마침내 신농의 후손을 초(焦)에, 황제의 후손을 축(祝)에, 요의 후손을 계(薊)에, 순의 후손을 진(陳)에, 우(禹)의 후손을 기(杞)에 각각 포상해 봉했다. 또한 공신과 모사를 봉했는데 사상보가 가장 먼저 봉해졌다. 사상보를 영구(營丘)에 봉하고 제(齊)라고 했으며, 동생 주공 단을 곡부(曲阜)에 봉하고 노(魯)라 했다. 소공 석을 연(燕)에 봉했으며, 동생 숙선을 관(管)에 봉했고, 동생 숙탁을 채(蔡)에 봉했다. 나머지도 각기 차례에 따라서 봉했다.
武王徵九牧之君, 登豳之阜, 以望商邑.119) 武王至于周, 自夜不寐.120) 周公旦卽王所, 曰:「曷爲不寐?」王曰:「告女:維天不饗殷, 自發未生於今六十年, 麋鹿在牧,121) 蜚鴻滿野.122) 天不享殷, 乃今有成.123) 維天建殷, 其登名民三百六十夫, 不顯亦不賓滅,124) 以至今. 我未定天保, 何暇寐!」王曰:「定天保, 依天室, 悉求夫惡, 貶從殷王受.125) 日夜勞來126)定我西土,127) 我維顯服, 及德方明.128) 自洛汭延于伊汭, 居易毋固, 其有夏之居.129) 我南望三塗, 北望嶽鄙, 顧詹有河,130) 粵詹雒、伊, 毋遠天室.」131)營周居于雒邑而後去.132) 縱馬於華山之陽,133) 放牛於桃林之虛;134)偃干戈, 振兵釋旅:135)示天下不復用也.
무왕은 구목(九牧)의 군주를 소집하고 빈(豳)의 언덕에 올라 상읍을 바라보았다. 무왕이 주에 이르러서도 밤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주공 단이 왕의 처소에 가서 “어찌해 잠들지 못하십니까”라고 묻자 왕은 이렇게 말했다.
“그대에게 말하리다. 하늘이 은의 제사를 받지 않고, 이 사람 발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60년간 미록(麋鹿)과 비홍(蜚鴻)이 벌판에 가득 찼었소. 하늘이 은의 제사를 받지 않았기에 지금과 같은 성공이 있게 되었소. 은이 하늘의 명을 받아 막 건립되었을 때 등용된 현인이 360명이었으나 그 업적이 드러나지도 없어지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렀소. 하늘이 (주를) 보우하시는지 아직 확신할 수 없는데, 어찌 잠 잘 겨를이 있겠소?”
무왕은 또 말했다.
“하늘이 (주를) 보우하사 하늘에 의지해 은왕을 제거했듯이 모든 악인을 찾아내어 벌할 것이오. 밤낮으로 노력해 나의 서쪽 땅을 안정시키고 일을 공정히 처리해 그 덕을 사방에 비추겠소. 낙수에서 이수까지는 지세가 평탄하고 험하지 않아서 하나라가 정착한 곳이오. 남으로 삼도(三塗)를 바라보고 북으로 악(嶽) 주변을 바라보며 황하를 살펴보고 다시 낙수와 이수 유역을 바라보니, 멀다고 내버려 둘 수가 없소.”
무왕은 주의 (배도인) 낙읍을 조성한 다음 떠나갔다. 화산의 남쪽에 말을 방목하고, 도림(桃林)의 들판에 소를 방목하고, 무기와 병사를 거두어들이고 군대를 해산해 다시는 무기와 병사를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온 천하에 알렸다.
武王已克殷, 後二年, 問箕子殷所以亡. 箕子不忍言殷惡, 以存136)亡國宜告.137) 武王亦醜, 故問以天道.
무왕은 은을 이긴 지 2년 뒤 기자에게 은이 망한 까닭을 물었다. 기자는 차마 은의 죄악을 말할 수 없어 국가 존망의 이치를 고했다. 무왕 역시 난처해 하늘의 도에 대해 물었다.
武王病. 天下未集, 群公懼, 穆卜,138) 周公乃祓齋,139) 自爲質,140) 欲代武王, 武王有瘳. 後而崩,141) 太子誦代立, 是爲成王.
무왕이 병이 들었다.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아 모든 대신들이 두려워서 경건히 점을 쳤다. 주공이 이에 목욕재계를 하고 자신이 무왕 대신 죽거나 병들겠다고 제사 드리며 빌자 무왕의 병세가 잠시 호전되었다. 그 후 무왕이 붕어하고 태자 송(誦)이 이어서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성왕(成王)이다.
成王少, 周初定天下, 周公恐諸侯畔周, 公乃攝行政當國. 管叔、蔡叔群弟疑周公, 與武庚作亂, 畔周. 周公奉成王命, 伐誅武庚、管叔, 放蔡叔. 以微子開代殷後, 國於宋.142) 頗收殷餘民, 以封武王少弟封爲衛康叔.143) 晉唐叔得嘉谷,144) 獻之成王, 成王以歸周公于兵所.145) 周公受禾東土, 魯天子之命.146) 初, 管、蔡畔周, 周公討之, 三年而畢定, 故初作大誥, 次作微子之命,147) 次歸禾, 次嘉禾, 次康誥、酒誥、梓材,148) 其事在周公之篇. 周公行政七年, 成王長, 周公反政成王, 北面就群臣之位.
성왕이 어리고 주가 막 천하를 평정했기에 주공은 제후들이 주를 배반할까 두려워 섭정하며 국정을 맡았다. 주공의 두 동생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은 주공을 의심해 무경(武庚)과 반란을 일으켜 주를 배반했다. 주공은 성왕의 명을 받들어 무경과 관숙을 죽이고 채숙을 귀양 보냈다. 그리고 미자개(微子開)에게는 은의 후대를 계승하게 해 송(宋)에 국가를 세웠다. 은에 남은 백성을 모두 거두어 무왕의 막내 동생 봉(封)에게 주고 그를 위강숙(衛康叔)에 봉했다. 진(晉) 당숙(唐叔)이 좋은 곡식을 얻어 그것을 성왕에게 바치자 성왕은 그것을 병영에 있는 주공에게 보냈다.
주공은 동쪽 땅에서 곡물을 받고 천자의 명령을 선포했다. 처음 관숙과 채숙이 주를 배반해 주공이 그들을 징벌한 지 3년이 지나자 완전히 안정되었으므로 처음에 「대고(大誥)」를 짓고 그 다음으로 「미자지명(微子之命)」을 짓고, 그 다음 「귀화(歸禾)」, 그 다음 「가화(嘉禾)」, 그 다음 「강고(康誥)」, 「주고(酒誥)」, 「자재(梓材)」를 지었다. 사건들은 주공의 이런 문장들에 기록되어 있다. 주공이 정무를 집행한지 7년, 성왕이 성장하자 주공은 정권을 성왕에게 돌려주고 북면하는 신하의 자리로 돌아갔다.
成王在豐, 使召公復營洛邑, 如武王之意. 周公復卜申視, 卒營築, 居九鼎焉. 曰:「此天下之中, 四方入貢道里均.」作召誥、洛誥. 成王旣遷殷遺民, 周公以王命告, 作多士、無佚. 召公爲保, 周公爲師, 東伐淮夷, 殘奄,149) 遷其君薄姑.150) 成王自奄歸, 在宗周,151) 作多方.152) 旣絀殷命, 襲淮夷, 歸在豐, 作周官.153) 興正禮樂, 度制於是改, 而民和睦, 頌聲興.154) 成王旣伐東夷, 息愼來賀, 王賜榮伯作賄息愼之命.155)
성왕은 풍(豐)에 머무르며 소공에게 낙읍을 조성해 무왕의 뜻을 계승하게 했다. 주공이 다시 점을 치고 잘 살핀 다음 마침내 건설을 마치고 구정(九鼎)을 그곳에 안치하고는 “이곳이 천하의 중심으로서 사방에서 공물을 바치러 오는 거리가 모두 같다”라고 말하고 「소고(召誥)」, 「낙고(洛誥)」를 지었다. 성왕이 은의 유민을 그곳으로 옮기자 주공은 성왕의 명을 알리려고 「다사(多士)」, 「무일(無逸)」을 지었다. 소공은 보(保)에 임명되었으며 주공은 사(師)에 임명되어 동으로 회이(淮夷)를 정벌하고 엄(奄)을 멸한 후 그 군주를 박고(薄姑)로 이주시켰다.
성왕이 엄에서 돌아와 종주(宗周)에서 「다방(多方)」을 지었다. 성왕은 은의 남은 세력을 소멸시키고 회이를 습격하고 풍으로 돌아와 「주관(周官)」을 지었다. 이로써 예의와 음악이 바로잡히고 흥성해졌으며 제도가 개혁되었으므로, 인민은 화목하고 칭송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성왕이 동이를 정벌하자 식신족(息愼族)이 와서 축하를 드렸다. 왕은 영백(榮伯)에게 「회식신지명(賄息愼之命)」을 짓게 했다.
成王將崩, 懼太子釗之不任,156) 乃命召公、畢公率諸侯以相太子而立之. 成王旣崩, 二公率諸侯, 以太子釗見於先王廟, 申告以文王、武王之所以爲王業之不易, 務在節儉, 毋多欲, 以篤信臨之, 作顧命.157) 太子釗遂立, 是爲康王. 康王卽位, 遍告諸侯, 宣告以文武之業以申之, 作康誥. 故成康之際, 天下安寧, 刑錯四十餘年不用.158) 康王命作策畢公分居里, 成周郊,159) 作畢命.
성왕이 임종에 앞서 태자 교(釗)가 자리를 제대로 맡지 못할까 걱정해 소공과 필공에게 제후를 거느리고 태자를 보좌해 세우라 했다. 성왕이 세상을 뜨자 소공과 필공은 제후들을 거느리고 태자 교를 인도해 선왕의 묘에 참배하게 하고, 문왕과 무왕이 왕업을 어렵게 이루었음을 거듭 고해, 검약에 힘쓰고 탐욕을 부리지 말며 진실한 믿음으로 통치에 임할 것을 권하는 「고명(顧命)」을 지었다.
태자 교가 마침내 즉위하니 이가 강왕(康王)이다. 강왕은 즉위해 문왕과 무왕의 위업을 널리 알릴 것을 선포하고 「강고(康誥)」를 지었다. 이에 성왕과 강왕의 시대에는 천하가 안정되어 형벌이 40년 넘게 쓰이지 않았다. 강왕은 (왕의 명령인) 책명(策命)을 짓는 필공에게 (백성 일부를) 성주(成周)의 변경으로 옮기게 하고는 「필명(畢命)」을 지었다.
康王卒, 子昭王瑕立. 昭王之時, 王道微缺. 昭王南巡狩不返, 卒於江上. 其卒不赴告, 諱之也.160) 立昭王子滿, 是爲穆王. 穆王卽位, 春秋已五十矣. 王道衰微, 穆王閔文武之道缺, 乃命伯臩161)申誡162)太僕163)國之政, 作臩命.164) 復寧.
강왕이 죽자 아들 소왕(昭王) 하(瑕)가 즉위했다. 소왕 때에는 왕도가 점차 쇠약해졌는데, 소왕은 남쪽으로 순수를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강에서 죽었다. 소왕이 죽었지만 부고를 알리지 않고 숨겼다. 소왕의 아들 만(滿)이 즉위하니 이가 목왕(穆王)이다. 목왕이 즉위할 때 나이가 이미 50이었다. 왕도가 쇠약해지자 목왕은 문왕과 무왕의 도가 쇠약해진 것을 근심해 백경(伯臩)을 태복(太僕)에 임명해 국정을 주의 깊게 살피도록 하고는 「경명(冏命)」을 지었다. 다시 안정을 찾았다.
각주
1 正義因太王所居周原, 因號曰周. 地理志云右扶風美陽縣岐山在西北中水鄕, 周太王所邑. 括地志云:「故周城一名美陽城, 在雍州武功縣西北二十五里, 卽太王城也.」
2 集解韓詩章句曰:「姜, 姓. 原, 字.」或曰姜原, 謚號也. 正義邰, 天來反, 亦作「斄」, 同. 說文云:「邰, 炎帝之後, 姜姓, 封邰, 周棄外家.」
3 索隱譙周以爲「棄, 帝嚳之冑, 其父亦不著」, 與此紀異也.
4 索隱已下皆詩大雅生民篇所云「誕寘之隘巷, 牛羊腓字之;誕寘之平林, 會伐平林;誕寘之寒冰, 鳥覆翼之」, 是其事也.
5 正義古史考云「棄, 帝嚳之冑, 其父亦不著」, 與此文稍異也.
6 正義種曰稼, 斂曰穡.
7 集解徐廣曰:「今文尙書云『祖飢』, 故此作『始飢』. 祖, 始也.」
8 集解徐廣曰:「今斄鄕在扶風.」索隱卽詩生民曰「有邰家室」是也. 邰卽斄, 古今字異耳. 正義括地志云「故斄城一名武功城, 在雍州武功縣西南二十二里, 古邰國, 后稷所封也. 有后稷及姜嫄祠.」毛萇云:「邰, 姜嫄國也, 后稷所生. 堯見天因邰而生后稷, 故因封於邰也.」
9 集解禮緯曰:「祖以履大跡而生.」
10 集解山海經大荒經曰:「黑水靑水之閒有廣都之野, 后稷葬焉.」皇甫謐曰:「冢去中國三萬里也.」
11 索隱帝王世紀云「后稷納姞氏, 生不窋」, 而譙周按國語云「世后稷, 以服事虞、夏」, 言世稷官, 是失其代數也. 若以不窋親棄之子, 至文王千餘歲唯十四代, 實亦不合事情. 正義括地志云:「不窋故城在慶州弘化縣南三里. 卽不窋在戎狄所居之城也.」毛詩疏云:「虞及夏、殷共有千二百歲. 每世在位皆八十年, 乃可充其數耳. 命之短長, 古今一也, 而使十五世君在位皆八十許載, 子必將老始生, 不近人情之甚. 以理而推, 實難據信也.」
12 集解韋昭曰:「夏太康失國, 廢稷之官, 不復務農.」索隱國語云「棄稷不務」. 此云「去稷」者, 是太史公恐「棄」是后稷之名, 故變文云「去」也. 言夏政衰, 不窋去稷官, 不復務農者也.
13 正義公劉從漆縣漆水南渡渭水, 至南山取材木爲用也. 括地志云:「豳州新平縣卽漢漆縣也. 漆水出岐州普潤縣東南岐山漆溪, 東入渭.」
14 索隱卽詩大雅篇「篤公劉」是也.
15 集解徐廣曰:「新平漆縣之東北有豳亭.」索隱豳卽邠也, 古今字異耳. 正義括地志云:「豳州新平縣卽漢漆縣, 詩豳國, 公劉所邑之地也.」
16 集解音踰. 世本作「楡」. 索隱系本作「僞楡」.
17 索隱系本云:「公非辟方.」皇甫謐云:「公非字辟方也.」
18 集解宋衷曰:「高圉能率稷者也, 周人報之.」索隱系本云:「高圉侯侔.」
19 集解世本云:「亞圉雲都.」 皇甫謐云:「雲都, 亞圉字.」 索隱漢書古今表曰:「雲都, 亞圉弟.」按:如此說, 則辟方侯侔亦皆二人之名, 實未能詳.
20 索隱系本云:「太公組紺諸盩.」三代世表稱叔類, 凡四名. 皇甫謐云「公祖一名組紺諸盩, 字叔類, 號曰太公」也.
21 集解徐廣曰:「水在杜陽岐山. 杜陽縣在扶風.」
22 正義括地志云:「梁山在雍州好畤縣西北十八里.」鄭玄云:「岐山在梁山西南.」然則梁山橫長, 其東當夏陽, 西北臨河, 其西當岐山東北, 自豳適周, 當踰之矣.
23 集解徐廣曰:「山在扶風美陽西北, 其南有周原.」駰案:皇甫謐云「邑於周地, 故始改國曰周」.
24 集解徐廣曰:「分別而爲邑落也.」
25 集解禮記曰:「天子之五官曰司徒、司馬、司空、司士、司寇, 典司五衆.」鄭玄曰:「此殷時制.」
26 索隱卽詩頌云「后稷之孫, 實維太王, 居岐之陽, 實始翦商」是也.
27 正義國語注云:「齊、許、申、呂四國, 皆姜姓也, 四岳之後, 太姜之家. 太姜, 太王之妃, 王季之母.」
28 集解列女傳曰:「太姜, 有邰氏之女. 太任, 摯任氏之中女.」正義國語注云:「摯、疇二國, 任姓. 奚仲, 仲虺之後, 太任之家. 太任, 王季之妃, 文王母也.」
29 正義列女傳云:「太姜, 太王娶以爲妃, 生太伯、仲雍、王季. 太姜有色而貞順, 率導諸子, 至於成童, 靡有過失. 太王謀事必於太姜, 遷徙必與. 太任, 王季娶以爲妃. 太任之性, 端壹誠莊, 維德之行. 及其有身, 目不視惡色, 耳不聽淫聲, 口不出傲言, 能以胎敎子, 而生文王.」此皆有賢行也.
30 正義尙書帝命驗云:「季秋之月甲子, 赤爵銜丹書入于酆, 止于昌戶. 其書云:『敬勝怠者吉, 怠勝敬者滅, 義勝欲者從, 欲勝義者凶. 凡事不强則枉, 不敬則不正. 枉者廢滅, 敬者萬世. 以仁得之, 以仁守之, 其量百世. 以不仁得之, 以仁守之, 其量十世. 以不仁得之, 不仁守之, 不及其世』.」此蓋聖瑞.
31 正義太伯奔吳, 所居城在蘇州北五十里常州無錫縣界梅里村, 其城及冢見存. 而云「亡荊蠻」者, 楚滅越, 其地屬楚, 秦滅楚, 其地屬秦, 秦諱「楚」, 改曰「荊」, 故通號吳越之地爲荊. 及北人書史加云「蠻」, 勢之然也.
32 集解應劭曰:「常在水中, 故斷其髮, 文其身, 以象龍子, 故不見傷害.」
33 集解皇甫謐曰:「葬鄠縣之南山.」
34 正義帝王世紀云:「文王龍顔虎肩, 身長十尺, 胸有四乳.」雒書靈準聽云:「蒼帝姬昌, 日角鳥鼻, 高長八尺二寸, 聖智慈理也.」
35 集解應邵曰:「在遼西令支.」正義括地志云:「孤竹故城在平州盧龍縣南十二里, 殷時諸侯孤竹國也, 姓墨胎氏.」
36 集解劉向別錄曰:「鬻子名熊, 封於楚. 辛甲, 故殷之臣, 事紂. 蓋七十五諫而不聽, 去至周, 召公與語, 賢之, 告文王, 文王親自迎之, 以爲公卿, 封長子.」長子今上黨所治縣是也.
37 正義括地志云:「古■國城在同州河西縣南二十里. 世本云莘國, 姒姓, 夏禹之後, 卽散宜生等求有莘美女獻紂者.」
38 正義括地志云:「驪戎故城在雍州新豐縣東南十六里, 殷、周時驪戎國城也.」按:駿馬赤鬣縞身, 目如黃金, 文王以獻紂也.
39 正義括地志云:「鄭州新鄭縣, 本有熊氏之墟也.」按:九駟, 三十六匹馬也.
40 索隱一物, 謂■氏之美女也. 以殷紂淫昏好色, 故知然.
41 集解地理志虞在河東大陽縣, 芮在馮翊臨晉縣. 正義括地志云:「故虞城在陝州河北縣東北五十里虞山之上, 古虞國也. 故芮城在芮城縣西二十里, 古芮國也. 晉太康地記云虞西百四十里有芮城.」括地志又云:「閒原在河北縣西六十五里. 詩云『虞芮質厥成』. 毛萇云『虞芮之君相與爭田, 久而不平, 乃相謂曰:「西伯仁人, 盍往質焉.」乃相與朝周. 入其境, 則耕者讓畔, 行者讓路. 入其邑, 男女異路, 班白不提挈. 入其朝, 士讓爲大夫, 大夫讓爲卿. 二國君相謂曰:「我等小人, 不可履君子之庭.」乃相讓所爭地以爲閒原』. 至今尙在.」注引地理志芮在臨晉者, 恐疏. 然閒原在河東, 復與虞、芮相接, 臨晉在河西同州, 非臨晉芮鄕明矣.
42 集解山海經曰:「有人, 人面獸身, 名曰犬戎.」正義又云:「黃帝生苗龍, 苗龍生融吾, 融吾生幷明, 幷明生白犬. 白犬有二, 是爲犬戎.」說文云「赤狄本犬種」, 故字從犬. 又後漢書云「犬戎, 槃瓠之後也」, 今長沙武林之郡太半是也. 又毛詩疏云「犬戎昆夷」是也.
43 集解應劭曰:「密須氏, 姞姓之國.」瓚曰:「安定陰密縣是.」正義括地志云:「陰密故城在涇州鶉觚縣西;其東接縣城, 卽古密國.」杜預云姞姓國, 在安定陰密縣也.
44 集解徐廣曰:「一作『■』.」正義卽黎國也. 鄒誕生云本或作「黎」. 孔安國云黎在上黨東北. 括地志云:「故黎城, 黎侯國也, 在潞州黎城縣東北十八里. 尙書云『西伯旣戡黎』是也.」
45 集解徐廣曰:「邘城在野王縣西北, 音于.」正義括地志云:「故邘城在懷州河內縣西北二十七里, 古邘國城也. 左傳云:邘、晉、應、韓, 武王之穆也.」
46 正義皇甫謐云夏鯀封. 虞、夏、商、周皆有崇國, 崇國蓋在豐鎬之閒. 詩云「旣伐于崇, 作邑于豐」, 是國之地也.
47 集解徐廣曰:「豐在京兆鄠縣東, 有靈臺. 鎬在上林昆明北, 有鎬池, 去豐二十五里. 皆在長安南數十里.」正義括地志云:「周豐宮, 周文王宮也, 在雍州鄠縣東三十五里. 鎬在雍州西南三十二里.」
48 集解徐廣曰:「文王九十七乃崩.」正義括地志云:「周文王墓在雍州萬年縣西南二十八里原上也.」
49 正義乾鑿度云:「垂黃策者羲, 益卦演德者文, 成命者孔也.」易正義云伏羲制卦, 文王卦辭, 周公爻辭, 孔十翼也. 按:太史公言「蓋」者, 乃疑辭也. 文王著演易之功, 作周紀方贊其美, 不敢專定, 重易故稱「蓋」也.
50 正義二國相讓後, 諸侯歸西伯者四十餘國, 咸尊西伯爲王. 蓋此年受命之年稱王也. 帝王世紀云:「文王卽位四十二年, 歲在鶉火, 文王更爲受命之元年, 始稱王矣.」又毛詩[疏]云:「文王九十七而終, 終時受命九年, 則受命之元年年八十九也.」
51 正義十當爲「九」, 其說在後.
52 正義謚法:「經緯天地曰文.」
53 正義易緯云「文王受命, 改正朔, 布王號於天下」. 鄭玄信而用之, 言文王稱王, 已改正朔布王號矣. 按:天無二日, 土無二王, 豈殷紂尙存而周稱王哉? 若文王自稱王改正朔, 則是功業成矣, 武王何復得云大勳未集, 欲卒父業也? 禮記大傳云「牧之野武王成大事而退, 追王太王亶父、王季歷、文王昌」. 據此文乃是追王爲王, 何得文王自稱王改正朔也?
54 正義古公在邠, 被戎狄攻戰奪民. 太王曰「民之在我, 與彼何異, 殺人父子而君之, 予不忍爲」. 遂遠去邠, 止於岐下. 邠人擧國盡歸古公. 他國聞古公仁, 亦多歸之. 乃貶戎狄之俗, 爲室屋邑落, 而分別居之. 季歷又生昌, 有聖瑞. 蓋是王瑞自太王時而興起也. 然自「西伯蓋卽位五十年」以下至「太王興」, 在西伯崩後重述其事, 爲經傳不同, 不可全棄, 乃略而書之, 引次其下, 事必可疑, 故數言「蓋」也.
55 正義謚法:「克定禍亂曰武.」春秋元命包云:「武王騈齒, 是謂剛强也.」
56 集解馬融曰:「畢, 文王墓地名也.」索隱按:文云「上祭于畢」, 則畢, 天星之名. 畢星主兵, 故師出而祭畢星也. 正義上音時掌反. 尙書武成篇云:「我文考文王, 誕膺天命, 以撫方夏, 惟九年, 大統未集.」太誓篇序云:「惟十有一年, 武王伐殷.」太誓篇云:「惟十有三年春, 大會于孟津.」大戴禮云:「文王十五而生武王.」則武王少文王十四歲矣. 禮記文王世子云:「文王九十七而終, 武王九十三而終.」按:文王崩時武王已八十三矣, 八十四卽位, 至九十三崩, 武王卽位適滿十年. 言十三年伐紂者, 續文王受命年, 欲明其卒父業故也. 金縢篇云:「惟克商二年, 王有疾, 不豫.」按:文王受命九年而崩, 十一年武王服闋, 觀兵孟津, 十三年克紂, 十五年有疾, 周公請命, 王有瘳, 後四年而崩, 則武王年九十三矣. 而太史公云九年王觀兵, 十一年伐紂, 則以爲武王卽位年數, 與尙書違, 甚疏矣.
57 集解徐廣曰:「譙周云史記武王十一年東觀兵, 十三年克紂.」
58 集解馬融曰:「諸受符節有司也.」
59 集解徐廣曰:「一云『予小子受先公功』.」
60 集解鄭玄曰:「號令之軍法重者.」
61 集解馬融曰:「魚者, 介鱗之物, 兵象也. 白者, 殷家之正色, 言殷之兵衆與周之象也.」索隱此已下至火復王屋爲烏, 皆見周書及今文泰誓.
62 集解馬融曰:「王屋, 王所居屋. 流, 行也. 魄然, 安定意也.」鄭玄曰:「書說云烏有孝名. 武王卒父大業, 故烏瑞臻. 赤者, 周之正色也.」索隱按:今文泰誓「流爲鵰」. 鵰, 鷙鳥也. 馬融云「明武王能伐紂」, 鄭玄云「烏是孝鳥, 言武王能終父業」, 亦各隨文而解也.
63 集解徐廣曰:「一作『滅』.」
64 集解孔安國曰:「虎賁, 勇士稱也. 若虎賁獸, 言其猛也.」
65 正義畢, 盡也. 盡從河南渡河北.
66 集解馬融曰:「動逆天地人也.」正義按:三正, 三統也. 周以建子爲天統, 殷以建丑爲地統, 夏以建寅爲人統也.
67 集解鄭玄曰:「王父母弟, 祖父母之族. 必言『母弟』, 擧親者言之也.」
68 集解徐廣曰:「怡, 一作『辭』.」
69 集解鄭玄曰:「夫子, 丈夫之稱.」
70 集解徐廣曰:「一作『正』. 此建丑之月, 殷之正月, 周之二月也.」
71 集解孔安國曰:「昧, 冥也;爽, 明:蚤旦也.」
72 集解孔安國曰:「癸亥夜陳, 甲子朝誓之.」正義括地志云:「衛州城, 故老云周武王伐紂至於商郊牧野, 乃築此城. 酈元注水經云自朝歌南至淸水, 土地平衍, 據皐跨澤, 悉牧野也.」括地志又云:「紂都朝歌在衛州東北七十三里朝歌故城是也. 本妹邑, 殷王武丁始都之. 帝王世紀云帝乙復濟河北, 徙朝歌, 其子紂仍都焉.」
73 集解孔安國曰:「鉞, 以黃金飾斧. 左手杖鉞, 示無事於誅;右手把旄, 示有事於敎令.」
74 集解孔安國曰:「勞苦之.」
75 集解馬融曰:「冢, 大也.」
76 集解孔安國曰:「亞, 次. 旅, 衆大夫也, 其位次卿. 師氏, 大夫官, 以兵守門.」
77 集解孔安國曰:「師率, 卒率.」
78 集解孔安國曰:「八國皆蠻夷戎狄. 羌在西. 蜀, 叟. 髳、微在巴蜀. 纑、彭在西北. 庸、濮在江漢之南.」馬融曰:「武王所率, 將來伐紂也.」正義髳音矛. 括地志云:「房州竹山縣及金州, 古庸國. 益州及巴、利等州, 皆古蜀國. 隴右岷、洮、叢等州以西, 羌也. 姚府以南, 古髳國之地. 戎府之南, 古微、瀘、彭三國之地. 濮在楚西南. 有髳州、微、濮州、瀘府、彭州焉. 武王率西南夷諸州伐紂也.」
79 集解孔安國曰:「稱, 擧也.」
80 集解孔安國曰:「索, 盡也. 喩婦人知外事, 雌代雄鳴, 則家盡也.」
81 集解鄭玄曰:「肆, 祭名. 答, 問也.」
82 集解孔安國曰:「言紂棄其賢臣, 而尊長逃亡, 罪人信用之也.」
83 集解孔安國曰:「今日戰事, 不過六步七步, 乃止相齊. 言當旅進一心也.」
84 集解孔安國曰:「伐謂擊刺也. 少則四五, 多則六七, 以爲例也.」
85 集解鄭玄曰:「威武貌.」
86 集解徐廣曰:「此訓與『螭』同.」
87 集解鄭玄曰:「禦, 彊禦, 謂彊暴也. 克, 殺也. 不得暴殺紂師之奔走者, 當以爲周之役也.」
88 集解鄭玄曰:「所言且也.」
89 集解周禮:「環人, 掌致師.」鄭玄曰:「致師者, 致其必戰之志也. 古者將戰, 先使勇力之士犯敵焉.」春秋傳曰:「楚許伯御樂伯, 攝叔爲右, 以致晉師. 許伯曰:『吾聞致師者, 御靡旌, 摩壘而還.』樂伯曰:『吾聞致師者, 左射以菆, 代御執轡, 御下■馬, 掉鞅而還.』攝叔曰:『吾聞致師者, 右入壘, 折馘, 執俘而還.』皆行其所聞而復.」
90 集解徐廣曰:「帝, 一作『商』.」正義大卒, 謂戎車三百五十乘, 士卒二萬六千二百五十人, 有虎賁三千人.
91 正義衣音於旣反. 周書云:「甲子夕, 紂取天智玉琰五, 環身以自焚.」注:「天智, 玉之善者, 縫環其身自厚也. 凡焚四千玉也, 庶玉則銷, 天智玉不銷, 紂身不盡也.」
92 正義武王率諸侯伐天子, 天子已死, 諸侯畢賀, 故武王揖諸侯, 言先拊循其心也.
93 正義謂至朝歌.
94 索隱武王雖以臣伐君, 頗有慚德, 不應答商人之拜, 太史公失辭耳. 尋上文, 諸侯畢拜賀武王, 武王尙且報揖, 無容遂下拜商人.
95 正義周書作「輕呂擊之」. 輕呂, 劍名也.
96 集解司馬法曰:「夏執玄鉞.」宋均曰:「玄鉞用鐵, 不磨礪.」
97 集解蔡邕獨斷曰:「前驅有九旒雲罕.」東京賦曰:「雲罕九旒.」薛綜曰:「旒, 旗名.」
98 集解周禮曰:「司烜氏以鑑取明水於月.」鄭玄曰:「鑑, 鏡屬也. 取月之水, 欲得陰陽之絜氣. 陳明水以爲玄酒.」索隱明, 明水也. 舊本皆無「水」字, 今本有「水」字者多, 亦是也. 若惟云「奉明」, 其義未見, 不知「奉明」何物也. 烜音毁.
99 集解徐廣曰:「茲者, 籍席之名. 諸侯病曰『負茲』.」索隱茲, 一作「苙」, 公明草也. 言「茲」, 擧成器;言「苙」, 見絜草也.
100 正義贊, 佐也. 采, 幣也.
101 正義尹佚讀筴書祝文以祭社也.
102 正義周書作「末孫受德」. 受德, 紂字也.
103 正義地理志云河內, 殷之舊都. 周旣滅殷, 分其畿內爲三國, 詩邶、鄘、衛是. 邶以封紂子武庚;鄘, 管叔尹之;衛, 蔡叔尹之:以監殷民, 謂之三監. 帝王世紀云:「自殷都以東爲衛, 管叔監之;殷都以西爲鄘, 蔡叔監之;殷都以北爲邶, 霍叔監之:是爲三監.」按:二說各異, 未詳也.
104 集解徐廣曰:「釋, 一作『原』.」
105 集解徐廣曰:「保, 一作『寶』.」
106 正義封, 謂益其土及畫疆界. 括地志云:「比干墓在衛州汲縣北十里二百五十步.」
107 集解孔安國曰:「武功成也.」
108 集解鄭玄曰:「宗彝, 宗廟樽也. 作分器, 著王之命及受物.」
109 集解地理志弘農陝縣有焦城, 故焦國也.
110 正義左傳云:「祝其, 實夾谷.」杜預云:「夾谷卽祝其也.」服虔云:「東海郡祝其縣也.」
111 集解地理志燕國有薊縣.
112 正義括地志云:「陳州宛丘縣在陳城中, 卽古陳國也. 帝舜後遏父爲周武王陶正, 武王賴其器用, 封其子嬀滿於陳, 都宛丘之側.」
113 正義括地志云:「汴州雍丘縣, 古杞國. 地理志云古杞國理此城. 周武王封禹後於杞, 號東樓公, 二十一代爲楚所滅.」
114 集解爾雅曰:「水出其前而左曰營丘.」郭璞曰:「今齊之營丘, 淄水過其南及東.」正義水經注今臨菑城中有丘云. 靑州臨淄縣古營丘之地, 呂望所封齊之都也. 營丘在縣北百步外城中. 輿地志云秦立爲縣, 城臨淄水故曰臨淄也.
115 集解應劭曰:「曲阜在魯城中, 委曲長七八里.」正義帝王世紀云:「炎帝自陳營都於魯曲阜. 黃帝自窮桑登帝位, 後徙曲阜. 少昊邑于窮桑, 以登帝位, 都曲阜. 顓頊始都窮桑, 徙商丘.」窮桑在魯北, 或云窮桑卽曲阜也. 又爲大庭氏之故國, 又是商奄之地. 皇甫謐云:「黃帝生於壽丘, 在魯城東門之北. 居軒轅之丘, (於)山海經云『此地窮桑之際, 西射之南』是也.」括地志云:「兗州曲阜縣外城卽周公旦子伯禽所築古魯城也.」
116 正義封帝堯之後於薊, 封召公奭於燕, 觀其文稍似重也. 水經注云薊城內西北隅有薊丘, 因取名焉. 括地志云:「燕山在幽州漁陽縣東南六十里. 徐才宗國都城記云周武王封召公奭於燕, 地在燕山之野, 故國取名焉.」按:周封以五等之爵, 薊、燕二國俱武王立, 因燕山、薊丘爲名, 其地足自立國. 薊微燕盛, 乃幷薊居之, 薊名遂絶焉. 今幽州薊縣, 古燕國也.
117 正義括地志云:「鄭州管城縣外城, 古管國城也, 周武王弟叔鮮所封.」
118 正義括地志云:「豫州北七十里上蔡縣, 古蔡國, 武王封弟叔度於蔡是也. 縣東十里有蔡岡, 因名也.」
119 正義括地志云:「豳州三水縣西十里有豳原, 周先公劉所都之地也. 豳城在此原上, 因公爲名.」按:蓋武王登此城望商邑.
120 正義周, 鎬京也. 武王伐紂, 還至鎬京, 憂未定天之保安, 故自夜不得寐也.
121 集解徐廣曰:「此事出周書及隨巢子, 云『夷羊在牧』. 牧, 郊也. 夷羊, 怪物也.」
122 索隱按:高誘曰「蜚鴻, 蠛蠓也」. 言飛蟲蔽田滿野, 故爲災, 非是鴻鴈也. 隨巢子作「飛拾」, 飛拾, 蟲也. 正義蜚音飛, 古「飛」字也. 於今猶當今. 於今六十年, 從帝乙十年至伐紂年也. 麋鹿在牧, 喩讒佞小人在朝位也. 飛鴻滿野, 喩忠賢君子見放棄也. 言紂父帝乙立後, 殷國益衰, 至伐紂六十年閒, 諂佞小人在於朝位, 忠賢君子放遷於野. 故詩云「鴻鴈于飛, 肅肅其羽, 之子于征, 劬勞于野」. 毛萇云「之子, 侯伯卿士也.」鄭玄云「鴻鴈知避陰陽寒暑, 喩民知去無道就有道」.
123 索隱言上天不歆享殷家, 故見災異, 我周今乃有成王業者也.
124 集解徐廣曰:「一云『不顧亦不賓成』, 一又云『不顧亦不恤』也.」索隱言天初建殷國, 亦登進名賢之人三百六十夫, 旣無非大賢, 未能興化致理, 故殷家不大光昭, 亦不卽擯滅, 以至于今也. 亦見周書及隨巢子, 頗復脫錯. 而劉氏音破六爲古, 其字義亦無所通. 徐廣云一本作「不顧亦不賓成」, 蓋是學者以周書及隨巢不同, 逐音改易耳. 隨巢子曰「天鬼不顧亦不賓滅」, 天鬼卽天神也.
125 索隱言今悉求取夫惡人不知天命不順周家者, 咸貶責之, 與紂同罪, 故曰「貶從殷王受」.
126 集解徐廣曰:「一云『肯來』.」
127 索隱八字連作一句讀.
128 正義服, 事也. 武王答周公云, 定知天之安保我位, 得依天之宮室, 退除殷紂之惡, 日夜勞民, 又安定我之西土. 我維明於事, 及我之德敎施四方明行之, 乃可至於寢寐也. 自此已上至「武王至于周, 自夜不寐」, 周公問之, 故先書.
129 集解徐廣曰:「夏居河南, 初在陽城, 後居陽翟.」索隱言自洛汭及伊汭, 其地平易無險固, 是有夏之舊居. 正義括地志云「自禹至太康與唐、虞皆不易都城」, 然則居陽城爲禹避商均時, 非都之也. 帝王世紀云:「禹封夏伯, 今河南陽翟是.」汲冢古文云:「太康居斟尋, 羿亦居之, 桀又居之.」括地志云:「故鄩城在洛州鞏縣西南五十八里也.」
130 集解徐廣曰:「周書度邑曰『武王問太公曰, 吾將因有夏之居也, 南望過于三塗, 北詹望于有河』.」索隱杜預云三塗在陸渾縣南. 嶽, 蓋河北太行山. 鄙, 都鄙, 謂近嶽之邑. 度邑, 周書篇名. 度音徒各反. 正義括地志云:「太行、恆山連延, 東北接碣石, 西北接嶽山.」言北望太行、恆山之邊鄙都邑也. 又「晉州霍山一名太岳, 在洛西北, 恆山在洛東北」. 二說皆通.
131 正義粵者, 審愼之辭也. 言審愼瞻雒、伊二水之陽, 無遠離此爲天室也.
132 正義括地志云:「故王城一名河南城, 本郟鄏, 周公新築, 在洛州河南縣北九里苑內東北隅. 自平王以下十二王皆都此城, 至敬王乃遷都成周, 至赧王又居王城也. 帝王世紀云『王城西有郟鄏陌』. 左傳云『成王定鼎於郟鄏』. 京相璠地名云『郟, 山名. 鄏, 邑名』.」
133 正義華山在華陰縣南八里. 山南曰陽也.
134 集解孔安國曰:「桃林在華山東.」正義括地志云:「桃林在陝州桃林縣西. 山海經云『夸父之山, 其北有林焉, 名曰桃林, 廣員三百里, 中多馬, 湖水出焉, 北流入河也』.」
135 集解公羊傳曰:「入曰振旅.」
136 集解徐廣曰:「一作『前』.」
137 索隱六字連一句讀. 正義箕子殷人, 不忍言殷惡, 以周國之所宜言告武王, 爲洪範九類, 武王以類問天道.
138 集解孔安國曰:「穆, 敬也.」
139 正義祓音廢, 又音拂. 齋音札皆反. 祓謂除不祥求福也.
140 正義音至. 周公祓齋, 自以贄幣告三王, 請代武王, 武王病乃瘳也.
141 集解徐廣曰:「封禪書曰『武王克殷二年, 天下未寧而崩』.」皇甫謐曰:「武王定位元年歲在乙酉, 六年庚寅崩.」駰按:皇覽曰「文王、武王、周公冢皆在京兆長安鎬聚東社中也」. 正義括地志云:「武王墓在雍州萬年縣西南二十八里畢原上也.」
142 正義今宋州也.
143 正義尙書洛誥云:「我卜瀍水東, 亦惟洛食, 以居邶、鄘、衛之衆.」又多士篇序云:「成周旣成, 遷殷頑民.」按:是爲東周, 古洛陽城也. 括地志云:「洛陽故城在洛州洛陽縣東北二十六里, 周公所築, 卽成周城也. 輿地志云『以周地在王城東, 故曰東周. 敬王避子朝亂, 自洛邑東居此. 以其迫阨不受王都, 故壞翟泉而廣之』.」按:武王滅殷國爲邶、鄘、衛, 三監尹之. 武庚作亂, 周公滅之, 徙三監之民於成周, 頗收其餘衆, 以封康叔爲衛侯, 卽今衛州是也. 孔安國云「以三監之餘民, 國康叔爲衛侯. 周公懲其數叛, 故使賢母弟主之」也.
144 集解鄭玄曰:「二苗同爲一穗.」
145 集解徐廣曰:「歸, 一作『餽』.」
146 集解徐廣曰:「尙書序云『旅天子之命』.」
147 集解孔安國曰:「封命之書.」
148 集解孔安國曰:「告康叔以爲政之道, 亦如梓人之治材也.」
149 集解鄭玄曰:「奄國在淮夷之北.」正義奄音於險反. 括地志云:「泗(水)[州]徐城縣北三十里古徐國, 卽淮夷也. 兗州曲阜縣奄里, 卽奄國之地也.」
150 集解馬融曰:「齊地.」正義括地志云:「薄姑故城在靑州博昌縣東北六十里. 薄姑氏, 殷諸侯, 封於此, 周滅之也.」
151 正義伐奄歸鎬京也.
152 集解孔安國曰:「告衆方天下諸侯.」
153 集解孔安國曰:「言周家設官分職用人之法.」古文尙書序, 周官, 書篇名.
154 集解何休曰:「頌聲者, 太平歌頌之聲, 帝王之高致也.」
155 集解孔安國曰:「賄, 賜也.」馬融曰:「榮伯, 周同姓, 畿內諸侯, 爲卿大夫也.」
156 正義釗音招, 又古堯反. 任, 而針反.
157 集解鄭玄曰:「臨終出命, 故謂之顧. 顧, 將去之意也.」
158 集解應劭曰:「錯, 置也. 民不犯法, 無所置刑.」
159 集解孔安國曰:「分別民之居里, 異其善惡也. 成定東周郊境, 使有保護也.」
160 正義帝王世紀云:「昭王德衰, 南征, 濟于漢, 船人惡之, 以膠船進王, 王御船至中流, 膠液船解, 王及祭公俱沒于水中而崩. 其右辛游靡長臂且多力, 游振得王, 周人諱之.」
161 集解孔安國曰:「伯冏, 臣名也.」
162 集解徐廣曰:「一作『部』.」
163 集解應劭曰:「太僕, 周穆王所置. 蓋太御衆僕之長, 中大夫也.」
164 正義尙書序云:「穆王令伯臩爲太僕正.」應劭云:「太僕, 周穆王所置. 蓋太御衆僕之長, 中大夫也.」
'中國歷史와文學 > 史記' 카테고리의 다른 글
史記 卷四. 周本記 Ⅲ (0) | 2019.05.11 |
---|---|
史記 卷四. 周本記 Ⅱ (0) | 2019.05.11 |
史記 卷三. 殷本記 (0) | 2017.06.22 |
史記 卷二 . 夏本記 (0) | 2016.08.09 |
史期 卷 一. 五帝本紀 第一 (4) (0) | 2016.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