孫子吳起列傳
孫子武者,齊人也。以兵法見於吳王闔廬。闔廬曰:“子之十三篇,吾盡觀之矣,可以小試勒兵乎?”對曰:“可。”闔廬曰:“可試以婦人乎?”曰:“可。”於是許之,出宮中美女,得百八十人。孫子分為二隊,以王之寵姬二人各為隊長,皆令持戟。令之曰:“汝知而心與左右手背乎?”婦人曰:“知之。”孫子曰:“前,則視心;左,視左手;右,視右手;后,即視背。”婦人曰:“諾。”約束既布,乃設鈇鉞,即三令五申之。於是鼓之右,婦人大笑。孫子曰:“約束不明,申令不熟,將之罪也。”復三令五申而鼓之左,婦人復大笑。孫子曰:“約束不明,申令不熟,將之罪也;既已明而不如法者,吏士之罪也。”乃欲斬左古隊長。吳王從臺上觀,見且斬愛姬,大駭。趣使使下令曰:“寡人已知將軍能用兵矣。寡人非此二姬,食不甘味,願勿斬也。”孫子曰:“臣既已受命為將,將在軍,君命有所不受。”遂斬隊長二人以徇。用其次為隊長,於是復鼓之。婦人左右前后跪起皆中規矩繩墨,無敢出聲。於是孫子使使報王曰:“兵既整齊,王可試下觀之,唯王所欲用之,雖赴水火猶可也。”吳王曰:“將軍罷休就舍,寡人不願下觀。”孫子曰:“王徒好其言,不能用其實。”於是闔廬知孫子能用兵,卒以為將。西破彊楚,入郢,北威齊晉,顯名諸侯,孫子與有力焉。
손자(孫子) 무(武)는 제(齊)나라 사람이다. 병법으로 오왕(吳王) 합려(闔廬)를 보게 되었다. 합려가 “그대의 13편을 내가 다 보았소. 간단하게 시범 삼아 병사를 조련해 볼 수 있겠소?”라고 하자 손무는 “좋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합려가 “여자로 시험해볼 수 있소?”라고 하자 손무는 “좋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허락하고 궁중 미녀 108명을 불러냈다. 손자는 두 부대로 나누어 왕이 총애하는 두 사람을 부대장으로 삼고는 모두에게 창을 들게 했다. 그리고는 “너희들이 가슴, 왼쪽 손과 오른쪽 손, 등은 알고 있겠지?”라고 호령하자 여자들은 “알고 있지요.”라고 했다. 손자가 “앞으로 하면 가슴을 보고, 왼쪽으로 하면 왼쪽 손을 보고, 오른쪽으로 하면 오른쪽 손을 보고, 뒤로 하면 등을 보도록 해라.”라고 하자 여자들은 “알겠습니다.”라고 했다. 군령을 정한 다음 바로 큰 도끼를 마련하고 바로 여러 차례 설명을 해주었다.
이윽고 북이 울리며 ‘오른쪽’하자 여자들이 깔깔 웃었다. 손자는 “군령이 분명치 않고 익숙하지 않은 것은 장수의 잘못이다.”라 하고는 다시 몇 차례 군령을 반복한 다음 북을 울려 ‘왼쪽’이라고 했으나 여자들은 다시 깔깔 웃었다. 손자는 “군령이 분명치 않고, 익숙하지 않은 것은 장수의 잘못이지만 군령이 분명한데도 따라하지 않는 것은 병사들의 잘못이다.”라 하고는 바로 좌우 대장의 목을 자르려 했다.
왕이 대 위에서 구경하다가 아끼는 궁녀의 목을 자르려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황급히 사람을 보내 “과인이 이미 장군의 용병이 어떤지 알았소. 과인은 그 두 여자가 없으면 먹어도 맛을 모를 정도이니 목은 베지 마시오.”라고 명령했다. 손자는 “신이 이미 명을 받고 장수가 되었습니다. 장수가 군중에 있으면 군주의 명이라도 받지 않습니다.”라 하고는 끝내 대장 두 사람의 목을 잘라 조리를 돌렸다.
그 다음 여자를 대장으로 삼은 다음 다시 북을 울리니 여자들은 왼쪽, 오른쪽, 앞, 뒤, 꿇어, 일어나를 모두 자로 잰 듯 먹줄을 튕긴 듯 딱 들어맞게 움직였으며, 감히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이어 손무는 사람을 보내 왕에게 “병사들이 이미 정돈되었으니 왕께서는 내려 오셔서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왕께서 이들을 부리고자 한다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 것입니다.”라고 전했다. 오왕이 “장군은 그만 하시고 숙소로 가십시오. 과인이 내려가 보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손자는 “왕께서는 그저 말로만 좋아하시고 실제로 부릴 줄은 모르십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오왕 합려는 손자가 용병에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장수로 삼았다.
서쪽으로 강한 초나라를 격파하여 영(郢)에 진입하고, 북으로 제나라와 진(晉)나라을 위협하여 제후들 사이에 명성을 떨치니 손자의 힘이었다.
孫臏
孫武既死,后百餘歲有孫臏。臏生阿鄄之閒,臏亦孫武之後世子孫也。孫臏嘗與龐涓俱學兵法。龐涓既事魏,得為惠王將軍,而自以為能不及孫臏,乃陰使召孫臏。臏至,龐涓恐其賢於己,疾之,則以法刑斷其兩足而黥之,欲隱勿見。
齊使者如梁,孫臏以刑徒陰見,說齊使。齊使以為奇,竊載與之齊。齊將田忌善而客待之。忌數與齊諸公子馳逐重射。孫子見其馬足不甚相遠,馬有上、中、下、輩。於是孫子謂田忌曰:“君弟重射,臣能令君勝。”田忌信然之,與王及諸公子逐射千金。及臨質,孫子曰:“今以君之下駟與彼上駟,取君上駟與彼中駟,取君中駟與彼下駟。”既馳三輩畢,而田忌一不勝而再勝,卒得王千金。於是忌進孫子於威王。威王問兵法,遂以為師。
其后魏伐趙,趙急,請救於齊。齊威王欲將孫臏,臏辭謝曰:“刑餘之人不可。”於是乃以田忌為將,而孫子為師,居輜車中,坐為計謀。田忌欲引兵之趙,孫子曰:“夫解雜亂紛糾者不控棬,救鬬者不搏撠,批亢擣虛,形格勢禁,則自為解耳。今梁趙相攻,輕兵銳卒必竭於外,老弱罷於內。君不若引兵疾走大梁,據其街路,衝其方虛,彼必釋趙而自救。是我一舉解趙之圍而收獘於魏也。”田忌從之,魏果去邯鄲,與齊戰於桂陵,大破梁軍。
后十三歲,魏與趙攻韓,韓告急於齊。齊使田忌將而往,直走大梁。魏將龐涓聞之,去韓而歸,齊軍既已過而西矣。孫子謂田忌曰:“彼三晉之兵素悍勇而輕齊,齊號為怯,善戰者因其勢而利導之。兵法,百里而趣利者蹶上將,五十里而趣利者軍半至。使齊軍入魏地為十萬灶,明日為五萬灶,又明日為三萬灶。”龐涓行三日,大喜,曰:“我固知齊軍怯,入吾地三日,士卒亡者過半矣。”乃棄其步軍,與其輕銳倍日并行逐之。孫子度其行,暮當至馬陵。馬陵道陜,而旁多阻隘,可伏兵,乃斫大樹白而書之曰“龐涓死于此樹之下”。於是令齊軍善射者萬弩,夾道而伏,期曰“暮見火舉而俱發”。龐涓果夜至斫木下,見白書,乃鉆火燭之。讀其書未畢,齊軍萬弩俱發,魏軍大亂相失。龐涓自知智窮兵敗,乃自剄,曰:“遂成豎子之名!”齊因乘勝盡破其軍,虜魏太子申以歸。孫臏以此名顯天下,世傳其兵法。
손무가 죽은 뒤 백 여 년이 지나 손빈(孫臏)이 나타났다. 손빈은 아(阿), 견(甄) 지역에서 태어났다. 손빈은 또 손무의 후세 자손이었다. 손빈은 일찍이 방연(龐涓)과 함께 병법을 배웠다. 방연이 위(魏)나라를 섬겨 혜왕(惠王)의 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스스로 손빈을 따라잡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몰래 사람을 보내 손빈을 불렀다. 손빈이 오자 방연은 그가 자신보다 잘난 것이 두려워 그를 질투한 끝에 두 발을 자르는 형벌에 경형(黥刑)을 가하여 숨어서 나오지 못하게 했다.
제나라의 사신이 양(梁)에 오자 손빈은 죄인의 몸으로 몰래 만나 제나라의 사신에게 유세했다. 제나라의 사신이 기이하게 여겨 그를 빼내 수레에 태워 제나라로 갔다. 제나라의 장수 전기(田忌)가 잘 보아서 그를 객으로 대접했다.
전기가 제나라의 공자들과 자주 경마로 큰 내기를 하고 있었다. 손빈이 그 말들을 보니 각각 상, 중, 하로 큰 차이가 없었다. 이에 손빈은 전기에게 “군께서는 한껏 크게 거십시오. 신이 군이 이길 수 있게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전기는 그 말을 믿고는 왕과 여러 공자들과 천금을 내기에 걸었다. 시합이 다가오자 손빈은 “이제 군의 하등 말과 저들의 상등 말을 붙이고, 군의 상등 말을 저들의 중들 말과 붙이고, 군의 중들 말을 저들의 하등 말과 붙이십시오.”라고 했다. 세 판을 달려 시합이 끝나자 전기는 1패 2승으로 드디어 왕의 천금을 땄다. 이에 전기는 손빈을 위왕(威王)에게 추천했다. 위왕이 병법을 묻고는 마침내 그를 군사(軍師)로 삼았다.
그 후 위(魏)나라가 조(趙)나라를 정벌하자 조나라는 급하게 제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위왕이 손빈을 장수로 삼으려 했으나, 손빈은 “형벌을 받은 몸이라 안 됩니다.”라고 사양했다. 이에 바로 전기를 장수로 삼고 손빈을 군사로 삼아 수레 안에 앉아서 계책을 내게 했다. 전기가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로 가려 하자 손빈은 “무릇 어지럽게 얽힌 것은 주먹으로 쳐서는 안 되고, 싸우는 자를 말리려면 같이 때려서는 안 됩니다. 강한 곳은 피하고 약한 곳을 치면 형세에 따라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 지금 양나라와 조나라가 서로 싸우고 있는데 날랜 정예병은 틀림없이 밖에서 힘을 다 빼고 노약자만 안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군께서는 병사를 이끌고 대량으로 달려가 그 길을 막고 방비가 허술한 곳을 치면 저들은 분명 조나라에 대한 포위를 풀고 스스로 구하러 올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일격으로 조나라에 대한 포위를 풀고 지친 위나라를 수습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전기가 이에 따르니 위나라가 과연 한단을 떠났다. 제나라는 계릉에서 싸워 양나라의 군대를 대파했다.
그로부터 13년 후에 위나라와 조나라가 한(韓)나라를 공격하자 한나라가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려 왔다. 제나라가 전기를 장군으로 삼아 가게 하니 곧장 대량으로 달려갔다. 위나라의 장수 방연은 이를 듣고는 한나라를 떠나 돌아왔다. 제나라의 군대는 이미 국경을 지나 서쪽으로 오고 있었다. 손빈이 전기에게 “저들 한나라와 조나라의 병사는 평소 사납고 용맹하여 제나라를 깔보면서 제나라를 겁쟁이라 부릅니다. 싸움을 잘 하는 사람은 그 기세를 잘 살펴 형세를 유리하게 이끕니다. 병법에 백리를 달려가 승리를 구하려는 자는 상장을 잃고, 오십 리를 달려가 승리를 구하려는 자는 병사의 절반이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제나라의 군대가 위나라의 땅에 진입했을 때 취사용 아궁이가 십만이었습니다. 내일 이를 5만 개로 줄이고, 또 그 다음날 3만 개로 줄이십시오.”라고 했다.
방연이 사흘을 추격하고는 “내가 제나라의 군대가 비겁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땅에 들어온 지 사흘 만에 도망간 병졸이 절반이구나.”라며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는 보병을 버린 채 날랜 정예병을 데리고 하루를 이틀처럼 추격했다. 손빈은 방연의 행군을 헤아려 보니 날이 저물 무렵 마릉(馬陵)에 도착할 것 같았다. 마릉은 길이 좁고 양 옆으로 험준한 곳이 많아 복병이 가능했다. 바로 큰 나무의 껍질을 벗겨내고는 거기다 ‘방연이 이 나무 아래에서 죽는다’라고 쓰게 했다.
이어 활을 잘 쏘는 제나라의 군사 만 명을 좁은 길 양옆으로 매복시켜 놓고는 “저녁에 불이 올라가면 일제히 발사하라!”고 명령했다. 방연이 과연 밤중에 껍질을 벗겨놓은 나무에 이르러 글씨를 보고는 바로 불을 밝혀 비추었다. 그 글을 미처 다 읽기도 전에 제나라의 화살 만 개 일제히 날아왔다. 위나라의 군대는 큰 혼란에 빠져 어쩔 줄 몰랐다. 방연은 자신의 지혜가 바닥이 나서 패한 것을 알고는 “이 더벅머리 놈의 명성을 세워주는구나!”라며 자결했다. 제나라는 승세를 몰라 나머지 군을 다 격파하고 위나라 태자 신(申)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손빈은 이로써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대대로 그 병법이 전해졌다.
吳起
吳起者,衛人也,好用兵。嘗學於曾子,事魯君。齊人攻魯,魯欲將吳起,吳起取齊女為妻,而魯疑之。吳起於是欲就名,遂殺其妻,以明不與齊也。魯卒以為將。將而攻齊,大破之。
魯人或惡吳起曰:“起之為人,猜忍人也。其少時,家累千金,游仕不遂,遂破其家,鄉黨笑之,吳起殺其謗己者三十餘人,而東出衛郭門。與其母訣,齧臂而盟曰:‘起不為卿相,不復入衛。’遂事曾子。居頃之,其母死,起終不歸。曾子薄之,而與起絕。起乃之魯,學兵法以事魯君。魯君疑之,起殺妻以求將。夫魯小國,而有戰勝之名,則諸侯圖魯矣。且魯衛兄弟之國也,而君用起,則是棄衛。”魯君疑之,謝吳起。
吳起於是聞魏文侯賢,欲事之。文侯問李克曰:“吳起何如人哉?”李克曰:“起貪而好色,然用兵司馬穰苴不能過也。”於是魏文候以為將,擊秦,拔五城。
起之為將,與士卒最下者同衣食。臥不設席,行不騎乘,親裹贏糧,與士卒分勞苦。卒有病疽者,起為吮之。卒母聞而哭之。人曰:“子卒也,而將,軍自吮其疽,何哭為?”母曰:“非然也。往年吳公吮其父,其父戰不旋踵,遂死於敵。吳公今又吮其子,妾不知其死所矣。是以哭之。”
文侯以吳起善用兵,廉平,盡能得士心,乃以為西河守,以拒秦、韓。
魏文侯既卒,起事其子武侯。武侯浮西河而下,中流,顧而謂吳起曰:“美哉乎山河之固,此魏國之寶也!”起對曰:“在德不在險。昔三苗氏左洞庭,右彭蠡,德義不修,禹滅之。夏桀之居,左河濟,右泰華,伊闕在其南,羊腸在其北,修政不仁,湯放之。殷紂之國,左孟門,右太行,常山在其北,大河經其南,修政不德,武王殺之。由此觀之,在德不在險。若君不修德,舟中之人盡為敵國也。”武侯曰:“善。”
(即封)吳起為西河守,甚有聲名。魏置相,相田文。吳起不悅,謂田文曰:“請與子論功,可乎?”田文曰:“可。”起曰:“將三軍,使士卒樂死,敵國不敢謀,子孰與起?”文曰:“不如子。”起曰:“治百官,親萬民,實府庫,子孰與起?”文曰:“不如子。”起曰:“守西河而秦兵不敢東鄉,韓趙賓從,子孰與起?”文曰:“不如子。”起曰:“此三者,子皆出吾下,而位加吾上,何也?”文曰:“主少國疑,大臣未附,百姓不信,方是之時,屬之於子乎?屬之於我乎?”起默然良久,曰:“屬之子矣。”文曰:“此乃吾所以居子之上也。”吳起乃自知弗如田文。
田文既死,公叔為相,尚魏公主,而害吳起。公叔之仆曰:“起易去也。”公叔曰:“柰何?”其仆曰:“吳起為人節廉而自喜名也。君因先與武侯言曰:‘夫吳起賢人也,而侯之國小,又與彊秦壤界,臣竊恐起之無留心也。’武侯即曰:‘柰何?’君因謂武侯曰:‘試延以公主,起有留心則必受之。無留心則必辭矣。以此卜之。’君因召吳起而與歸,即令公主怒而輕君。吳起見公主之賤君也,則必辭。”於是吳起見公主之賤魏相,果辭魏武侯。武侯疑之而弗信也。吳起懼得罪,遂去,即之楚。
楚悼王素聞起賢,至則相楚。明法審令,捐不急之官,廢公族疏遠者,以撫養戰鬬之士。要在彊兵,破馳說之言從橫者。於是南平百越;北并陳蔡,卻三晉;西伐秦。諸侯患楚之彊。故楚之貴戚盡欲害吳起。及悼王死,宗室大臣作亂而攻吳起,吳起走之王尸而伏之。擊起之徒因射刺吳起,并中悼王。悼王既葬,太子立,乃使令尹盡誅射吳起而并中王尸者。坐射起而夷宗死者七十餘家。
오기(吳起)는 위(衛)나라 사람으로 용병(用兵)을 좋아했다. 일찍이 증자(曾子)에게 배우고 노(魯)나라의 국군을 섬겼다. 제(齊)나라 사람이 노나라를 공격하자 노나라가 오기를 장수로 삼고 싶었으나 오기가 제나라의 여자를 아내로 얻었기 때문에 노나라가 이를 의심했다. 이에 오기는 명성을 얻고 싶어 그 아내를 죽이고 제나라를 돕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노나라가 마침내 장수로 삼으로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하여 대파했다.
노나라 사람 누군가가 오기에 대해 “오기란 위인은 잔인합니다. 젊었을 때 집에 천금을 쌓아놓고 여러 곳을 돌며 벼슬을 구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가산만 다 날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비웃자 오기는 자신을 비방한 자 30여 명을 죽이고 도성 동쪽 성문을 통해 달아났습니다. 어머니와 헤어지면서 팔을 깨물며 맹서하길 ‘오기가 경상(卿相)이 못 되면 다시는 위나라로 들어오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증자를 모셨고, 얼마 뒤 어머니가 죽었는데도 오기는 끝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증자가 그를 멸시하여 오기와의 관계를 끊었습니다. 오기는 노나라로 와서 병법을 배워 노나라의 국군을 섬겼는데 노나라의 국군께서 그를 의심하자 오기는 아내를 죽이고 장수 자리를 구걸했지요. 노나라가 작은 나라로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명성을 얻었으니 제후들이 노나라를 도모하려 할 것입니다. 그리고 노나라와 위나라는 형제의 나라입니다. 국군께서 오기를 기용하는 것은 위나라를 버리는 것입니다.”라고 헐뜯었다.
노나라의 국군이 의심하여 오기를 물리쳤다.
이에 오기는 위(魏)나라 문후(文侯)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섬기고자 했다. 문후는 이극(李克)에게 “오기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물었고, 이극은 “오기는 욕심이 많고 색을 밝히지만 용병은 사마양저(司馬穰苴)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위나라 문후는 (오기를) 장수로 삼아 진(秦)나라를 공격하여 다섯 개 성을 함락했다.
장수로서 오기는 사졸들 중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 입고 마셨다. 잘 때는 이불 따위를 깔지 않았고, 행군 때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았다. 식량도 직접 지고 다니면서 사졸들과 노고를 함께 나누었다. 종기가 난 병졸이 있었는데 오기는 그것을 입으로 빨았다.
병졸의 어머니가 그 이야기를 듣고는 통곡을 했다. 어떤 사람이 “아들은 졸병이고, 장군이 직접 그 종기를 입으로 빨아 주었다는데 왜 우는 거요?”라고 했다. 어머니는 “그렇지 않소. 왕년에 오공께서 그 아이 애비의 종기를 빨아 주었는데 그 아이 애비는 전투에서 뒤도 안 돌아보고 싸우다 마침내 적진에서 전사했소. 오공이 지금 또 그 아들의 종기를 빨아주었으니 나는 그 아이도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몰라 이렇게 우는 것이라오!”라고 했다.
문후는 오기가 용병에 능한데다 청렴하고 공평하여 병사들의 마음을 제대로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서하(西河) 태수로 삼아 진(秦)나라, 한(韓)나라를 막도록 했다.
위나라 문후가 죽고, 오기는 그 아들 무후(武侯)를 섬겼다. 무후는 서하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중간쯤에서 고개를 돌려 오기에게 “아름답구나! 이 견고한 산하야말로 위나라의 보물이로다!”라고 했다. 오기가 “ (군주의) 덕에 달려 있지 험준함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옛날 삼묘씨(三苗氏)는 왼쪽으로 동정호(洞庭湖), 오른쪽으로 팽려호(彭蠡湖)를 가지고 있었지만 덕과 신의를 닦지 않아 우(禹)나라에게 멸망당했고, 하나라의 걸은 왼쪽으로는 황하와 제수(濟水), 오른쪽으로는 태산(泰山)과 화산(華山), 남쪽으로는 이궐(伊闕), 북쪽으로는 양장(羊腸)을 갖고도 어진 정치를 하지 않아 탕(湯)에게 추방당했습니다. 은주(殷紂)의 나라는 왼쪽으로 맹문(孟門), 오른쪽으로 태행산(太行山), 북쪽으로 상산(常山)을 끼고 남쪽으로는 황하가 흘렀지만 부덕한 정치를 하다가 무왕(武王)에게 죽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덕에 달렸지 험준함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국군께서 덕을 닦지 않으시면 배 안의 사람이 모두 적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무후는 “좋은 말씀입니다!”라고 했다.
오기가 서하 태수로서 명성이 대단했다. 위나라가 상(相)을 두면서 전문(田文)을 상으로 삼았다. 오기가 기분이 나빠 전문에게 “그대와 공을 한 번 논해보고자 하는데 괜찮겠소?”라고 하니 전문이 “좋습니다.”라고 했다. 오기가 “삼군(三軍)의 장수가 되어 사졸들을 기꺼이 죽을 수 있게 만들고, 적국이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대와 이 오기 중 누가 낫소?”라고 했다. 전문이 “그대만 못하지요.”라고 했다. 오기가 “백관을 다스리고 만민들과 친하게 지내며 창고를 든든하게는 일은 그대와 이 오기 누가 낫소이까?”라고 했다. 전문은 “그대만 못하지요.”라고 했다. 오기가 “서하를 지켜서 진나라의 군대가 감히 동쪽 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고, 한나라와 조나라를 복종시키는 일은 그대와 오기 누가 낫습니까?”라고 했다. 전문은 “그대만 못하지요.”라고 했다. 오기는 “이 세 가지에서 그대는 모두 나보다 못한데 자리는 나보다 위에 있으니 왜 그렇소?”라고 했다. 전문이 “군주는 어리고 나라는 불안하며, 대신들은 따르지 않고 백성들은 믿지 않습니다. 이런 시기라면 그 자리가 그대에게 낫겠습니까, 제게 낫겠습니까?”라고 했다. 오기가 한참 말이 없다가 “그대가 낫소이다.”라고 했다. 전문이 “그것이 내가 그대보다 윗자리에 있는 까닭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오기는 자신이 전문만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문이 죽자, 공숙(公叔)이 재상이 되었는데, 위(魏)나라의 공주를 아내로 얻고도 오기를 시기했다. 공숙의 노복이 “오기를 쉽게 제거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공숙이 “어떻게?”라고 묻자 노복은 이렇게 말했다.
“오기란 위인은 절개가 있고 청렴하며 자신의 명예를 중시합니다. 군께서는 먼저 무후께 ‘오기는 유능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군의 나라는 작고 강한 진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신은 오기가 머무를 마음이 없으면 어쩌나 이것이 걱정입니다’라고 말하십시오. 그러면 무후께서는 ‘어찌 하면 좋겠소’라고 하실 겁니다. 군께서는 그 때 무후께 ‘시험 삼아 공주를 짝지어 주겠다고 하십시오. 오기에게 남을 마음이 있으면 틀림없이 받아들이겠지만 그럴 마음이 없다면 분명 사양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판단하면 됩니다’라고 하십시오. 그런 다음 군께서는 오기를 초대하여 집에 가서 공주를 화나게 하여 군을 마구 대하게 하십시오. 공주께서 군을 깔보는 것을 오기가 보게 되면 틀림없이 사양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오기는 공주가 위나라의 상을 천시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아니나 다를까 위나라 무후의 제안을 거절했다. 무후가 오기를 의심하여 신임하지 않았다. 오기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 마침내 (위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갔다.
초나라 도왕(悼王)이 평소 오기가 유능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오기가) 오자 바로 초나라의 상으로 삼았다. (오기는) 법을 분명하고 명령을 잘 따져 급하지 않은 관직을 없애고 멀어진 공족들의 (특권 등을) 폐지하여 전투 병사들을 길렀다. 강한 군대를 만들고 유세를 일삼는 종횡가(縱橫家)들을 내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남으로는 백월(百越)을 평정하고, 북으로는 진(陳)나라, 채(蔡)나라를 아울러 삼진(三晉)을 격퇴했으며, 서쪽으로는 진(秦)나라를 정벌하니 제후들이 초나라가 강해지는 것을 걱정했다.
이전 초나라의 귀족들은 모두 오기를 해치려 했다. 도왕이 죽자 종실 대신들이 난을 일으켜 오기를 공격했다. 오기는 도망쳐 왕의 시신 위에 엎어졌다. 오기를 공격하는 무리들이 오기에게 화살을 날리고 칼로 찔렀는데, 도왕의 시신도 맞추었다. 도왕의 장례를 치르고 태자가 즉위해서는 영윤(令尹)에게 오기에게 화살을 쏘고 칼로 찌르면서 왕의 시신을 쏜 자들을 모조리 죽이게 하니 오기의 사살에 연루되어 멸족 당한 집안이 70이 넘었다.
太史公曰:世俗所稱師旅,皆道孫子十三篇,吳起兵法,世多有,故弗論,論其行事所施設者。語曰:“能行之者未必能言,能言之者未必能行。”孫子籌策龐涓明矣,然不能蚤救患於被刑。吳起說武侯以形勢不如德,然行之於楚,以刻暴少恩亡其軀。悲夫!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서 군대 일을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손자(孫子)』 13편과 『오기병법(吳起兵法)』을 말한다. 또 세상에 많이 나와 있으므로 논하지 않고 그들이 이루어 놓은 일만 거론해둔다. ‘행동을 잘 하는 사람이 말까지 잘 하는 것은 아니며, 말을 잘 하는 자가 꼭 행동까지 잘 하는 것은 아니다’는 말이 있다. 손빈이 방연에게 쓴 책략은 훌륭했지만 당초 형벌이라는 재앙에서 자신을 구하지는 못했다. 오기가 무후에게 (산천의) 형세가 덕만 못하다고 했지만 초나라에 가서 각박하게 은혜를 베풀지 않다가 그 몸이 죽었으니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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