司馬穰苴列傳
司馬穰苴者, 田完之苗裔也. 斉景公時, 晉伐阿、甄, 而燕侵河上, 斉師敗績. 景公患之. 晏嬰乃薦田穰苴曰:「穣苴雖田氏庶孽, 然其人文能附衆, 武能威敵, 願君試之.」景公召穣苴, 與語兵事, 大説之, 以為將軍, 將兵扞燕晉之師. 穣苴曰:「臣素卑賎, 君擢之閭伍之中, 加之大夫之上, 士卒未附, 百姓不信, 人微権軽, 願得君之寵臣, 國之所尊, 以監軍, 乃可.」於是景公許之, 使荘賈往. 穣苴既辭, 與荘賈約曰:「旦日日中會於軍門.」 穣苴先馳至軍, 立表下漏待賈. 賈素驕貴, 以為將己之軍而己為監, 不甚急;親戚左右送之, 留飲. 日中而賈不至. 穣苴則仆表決漏, 入, 行軍勒兵, 申明約束. 約束既定, 夕時, 荘賈乃至. 穣苴曰:「何後期為?」賈謝曰:「不佞大夫親戚送之, 故留.」穣苴曰:「將受命之日則忘其家, 臨軍約束則忘其親, 援枹鼓之急則忘其身. 今敵國深侵, 邦內騒動, 士卒暴露於境, 君寢不安席, 食不甘味, 百姓之命皆懸於君, 何謂相送乎!」召軍正問曰:「軍法期而後至者雲何?」対曰:「當斬.」荘賈懼, 使人馳報景公, 請救. 既往, 未及反, 於是遂斬荘賈以徇三軍. 三軍之士皆振慄. 久之, 景公遣使者持節赦賈, 馳入軍中. 穣苴曰:「將在軍, 君令有所不受.」 問軍正曰:「馳三軍法何?」正曰:「當斬.」使者大懼. 穣苴曰:「君之使不可殺之.」乃斬其僕, 車之左駙, 馬之左驂, 以徇三軍. 遣使者還報, 然後行. 士卒次舎井灶飲食問疾醫薬, 身自拊循之. 悉取將軍之資糧享士卒, 身與士卒平分糧食. 最比 其羸弱者, 三日而後勒兵. 病者皆求行, 爭奮出為之赴戦. 晉師聞之, 為罷去. 燕師聞之, 度水而解. 於是追撃之, 遂取所亡封內故境而引兵帰. 未至國, 釈兵旅, 解約束, 誓盟而後入邑. 景公與諸大夫郊迎, 勞師成禮, 然後反帰寢. 既見穣苴, 尊為大司馬. 田氏日以益尊於斉.
已而大夫鮑氏、高、國之屬害之, 譖於景公. 景公退穣苴, 苴発疾而死. 田乞、田豹之徒 由此怨高、國等. 其後及田常殺簡公, 盡滅高子、國子之族. 至常曾孫和, 因自立為斉威王, 用兵行威, 大放穣苴之法, 而諸侯朝斉.
斉威王使大夫追論古者司馬兵法而附穣苴於其中, 因號曰司馬穣苴兵法.
太史公曰:餘読司馬兵法, 閎廓深遠, 雖三代征伐, 未能竟其義, 如其文也, 亦少褒矣. 若夫穣苴, 區區為小國行師, 何暇及司馬兵法之揖譲乎? 世既多司馬兵法, 以故不論, 著穰苴之列傳焉.
사마양저(司馬穰苴)는 전완(田完)의 후예다. 제(齊)나라 경공(景公) 때 진(晉)나라는 아(阿)나라, 견(甄)나라를 공격하고, 연(燕)나라는 하상(河上)을 침범하여 제나라 군대가 잇따라 패하자 경공이 이를 걱정했다.
이에 안영(晏嬰)이 “양저는 비록 전씨(田氏)의 서자지만 그 사람의 문무가 사람을 따르게 하고 적을 위협할 수 있으니, 국군께서 한 번 시험해보시기 바랍니다.”라며 전양저를 추천했다. 경공이 양저를 불러 군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는 크게 기뻐하며 장군으로 삼아 병사를 거느리고 연나라와 진나라의 군대를 막게 했다.
양저는 “신은 본래 미천하지만 국군께서 평민의 무리에서 저를 발탁하시어 대부 윗자리에 올리셨으니 사졸들이 따르지 않고 백성들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미천하고 권력은 가벼우니 원하옵건대 국군께서 총애하시고 나라가 존중하는 사람으로 군을 감독하게 해주시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경공은 이를 허락하고 장고(莊賈)에게 가도록 했다.
양저가 인사를 드리고는 장고와 “내일 해가 중천에 떴을 때 군문에서 만납시다.”라고 약속했다. 양저가 먼저 군대로 달려가 해시계와 물시계를 세워놓고는 장고를 기다렸다.
장고는 평소 교만하고 귀하신 몸인지라 장수가 이미 군으로 갔고 자신은 감군이므로 그렇게 서두를 것 없다고 생각했다. 친척과 가까운 자들이 송별 자리를 만들자 그곳에 눌러 앉아 술을 마셨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장고는 도착하지 않았다. 양저는 해시계와 물시계를 엎어버리고는 들어가 병사들을 점검하고 군기를 다 잡고 군령을 내렸다. 군기를 잡고 군령을 내리고 저녁 무렵에 되어서야 장고가 도착했다. 양저가 “어째서 약속 시간에 늦었소?”라고 하자 장고는 “이 몸의 대부와 친척들이 송별 자리를 만들어주어 늦었소.”라고 사과했다.
양저는 “장수는 명을 받은 날부터 집을 잊어야 하고, 군령을 내리고 군기를 잡고나면 그 친인척을 잊어야 하며, 진격의 북이 울리면 자기 몸을 잊어야 합니다. 지금 적국이 깊이 쳐들어와 나라 안이 소란스럽고 사졸들은 뙤약볕에서 변경을 지키고 있습니다. 국군께서는 잠도 편히 주무시지 못하고 먹어도 맛을 모르십니다. 백성의 생명이 모두 당신에게 달려 있는데 무슨 송별회란 말이오!”라 하고는 군정(軍正)을 불러 “군법에는 약속시간에 늦은 자는 어떻게 하라고 되어 있는가?”라고 물었다. “목을 벱니다!”라고 대답했다. 장고는 겁이 나서 사람을 경공에게 보내 보고하고 구원을 청했다. 간 사람이 돌아오기 전에 장고의 목을 베어 삼군에 조리를 돌리니 삼군의 병사들이 모두 떨었다.
이윽고 장고를 용서하라는 부절을 가진 경공의 사신이 군중으로 달려 들어왔다. 양저가 말했다. “장수는 군에 있으면 국군의 명령이라도 받지 않는다!”라며 군정에게 “말을 타고 삼군에 들어오면 군법은 어떻게 하는가?”라고 물었다. 군정이 “목을 벱니다.”라고 했다. 사자가 몹시 두려워했다. 양저는 “국군의 사자를 죽일 수는 없다.”며 그 마부의 목을 베고, 수레 왼쪽의 부목을 자르고, 왼쪽 말을 베어 삼군에 조리를 돌렸다. 사자를 보내 보고한 다음 출정했다.
(양저는) 사졸들의 숙소, 우물, 취사, 물, 문병, 의약을 몸소 보살폈다. 장군의 물품과 식량을 사졸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고, 자신은 사졸들과 똑같이 양식을 나누되 가장 적은 양을 기준으로 삼았다. 사흘 뒤 병사들을 출정시키는데 아픈 자들도 모두 함께 가길 요구하는 등 양저를 위해 앞을 다투어 출전하려 했다.
진(晉)나라의 군대가 이를 듣고는 철수해버렸고, 연나라 군대도 이를 듣고는 황하를 건너 철수했다. 이에 그들을 추격하여 마침내 잃었던 경내의 옛 땅을 취하고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도성에 도착하기 앞에 무장을 해제하고 군령을 거두고는 맹서한 다음 도성으로 들어갔다. 경공이 제후들과 교외까지 나와 맞이하여 군사들을 위로하고 의식을 마친 다음 돌아가 쉬었다. 양저를 접견하고는 대사마로 승진시켰다. 전씨가 제나라에서 갈수록 높아졌다.
얼마 지나자 대부 포씨(鮑氏), 고씨(高氏), 국씨(國氏) 족속들이 양저를 해치려고 경공에게 모함했다. 경공이 양저를 물러나게 했고, 양저는 병이 나서 죽었다. 전걸(田乞), 전표(田豹)의 무리가 이 때문에 고씨, 국씨 등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 후 전상(田常)이 간공(簡公)을 시해하고 고씨, 국씨의 족속을 모두 없앴다. 증손 전화(田和)에 이르러 제나라 위왕(威王)으로 자립했다. 군대을 동원하여 위세를 떨치려 양저의 병법을 크게 따르니 제후들이 제나라에 조회를 왔다.
제나라 위왕은 대부들에게 옛날 『사마병법(司馬兵法)』을 토론케 하고 양저도 그 안에 덧붙이게 하니 『사마양저병법(司馬穰苴兵法)』으로 불렸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사마병법』을 읽으니 방대하고 깊이가 대단하여 삼대의 전쟁에서도 그 의미를 다 발휘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문장에 대해서는 칭찬이 다소 지나친 바가 있다. 양저는 작은 나라의 군사에 지나지 않았으니 어찌 『사마병법』의 겸양의 예절을 돌아 볼 수 있었겠는가? 세간에 『사마병법』이 많이 퍼져 있기 때문에 논하지 않고 그저 양저의 열전만 기록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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