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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史記列傳

史記 卷六二. 管晏列傳

by 柳川 2019. 6. 2.

                                        管晏列傳



管仲


管仲夷吾者,潁上人也。少時常與鮑叔牙游,鮑叔知其賢。管仲貧困,常欺鮑叔,鮑叔終善遇之,不以為言。已而鮑叔事齊公子小白,管仲事公子糾。及小白立為桓公,公子糾死,管仲囚焉。鮑叔遂進管仲。管仲既用,任政於齊,齊桓公以霸,九合諸侯,一匡天下,管仲之謀也。

管仲曰:“吾始困時,嘗與鮑叔賈,分財利多自與,鮑叔不以我為貪,知我貧也。吾嘗為鮑叔謀事而更窮困,鮑叔不以我為愚,知時有利不利也。吾嘗三仕三見逐於君,鮑叔不以我為不肖,知我不遭時也。吾嘗三戰三走,鮑叔不以我怯,知我有老母也。公子糾敗,召忽死之,吾幽囚受辱,鮑叔不以我為無恥,知我不羞小睗而恥功名不顯于天下也。生我者父母,知我者鮑子也。”

鮑叔既進管仲,以身下之。子孫世祿於齊,有封邑者十餘世,常為名大夫。天下不多管仲之賢而多鮑叔能知人也。

管仲既任政相齊,以區區之齊在海濱,通貨積財,富國彊兵,與俗同好惡。故其稱曰:“倉廩實而知禮節,衣食足而知榮辱,上服度則六親固。四維不張,國乃滅亡。下令如流水之原,令順民心。”故論卑而易行。俗之所欲,因而予之;俗之所否,因而去之。

其為政也,善因禍而為福,轉敗而為功。貴輕重,慎權衡。桓公實怒少姬,南襲蔡,管仲因而伐楚,責包茅不入貢於周室。桓公實北征山戎,而管仲因而令燕修召公之政。於柯之會,桓公欲背曹沫之約,管仲因而信之,諸侯由是歸齊。故曰:“知與之為取,政之寶也。”

管仲富擬於公室,有三歸、反坫,齊人不以為侈。管仲卒,齊國遵其政,常彊於諸侯。后百餘年而有晏子焉。



관중() 이오()는 영수() 출신이다. 젊었을 때 늘 포숙아()와 놀았는데 포숙은 관중의 유능함을 알아주었다. 관중은 가난하여 늘 포숙을 속였지만 포숙은 끝까지 관중을 잘 대하면서 말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포숙은 제()나라의 공자() 소백()을 섬기게 되었고, 관중은 공자 규()를 섬기게 되었다. 소백이 환공()으로 즉위하고, 규가 죽자 관중은 죄수가 되었다. 포숙이 한사코 관중을 추천했다. 관중이 기용되어 제나라 정치를 맡으니, 제나라 환공은 패주가 되어 아홉 번 제후들을 규합하여 단번에 천하를 바로 잡았다. 관중의 계책 덕분이었다.



관중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처음 곤궁할 때 포숙과 장사를 했다. 이익을 나누면 내가 많이 가져갔다. 포숙은 내가 욕심이 많다고 여기지 않았는데,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포숙과 일을 꾀하다가 더 큰 곤궁에 빠진 적이 있었다. 포숙은 내가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시기에 좋고 나쁨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세 번이나 벼슬에 나갔다가 세 번 모두 국군에게 쫓겨났다.

포숙은 내가 못났다고 여기지 않았는데, 내가 때를 못 만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세 번 전투에 나가 세 번 도망쳤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로 생각하지 않았다. 내게 늙은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패하자 소홀()은 죽고 나는 죄수가 되어 굴욕을 당했지만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작은 절개를 지키는 것에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지만 천하에 공명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날 낳아주신 분은 부모지만 날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다!”



포숙은 관중을 추천하고 자신은 관중 아래로 들어갔다. 자손들이 대대로 제나라에서 녹을 받고 10대가 넘도록 봉읍을 소유한 늘 이름난 대부였다. 천하는 유능한 관중을 칭찬하는 사람보다 사람을 알아 준 포숙을 칭찬하는 사람이 많았다.

관중이 국정을 맡아 제나라의 상이 되어 바닷가의 작은 제나라를 화물이 서로 통하고 재화가 쌓이는 부유한 나라와 강한 군대를 가진 나라로 만들고 백성들과 좋고 싫음을 함께 했다. 그래서 관중은 이렇게 말했다.

“창고가 차야 예절을 알고, 입고 먹는 것이 풍족해야 영예와 치욕을 알며, 위에서 법도를 지키면 육친이 굳건해진다. 예의와 염치가 느슨해지면 나라가 망한다. 아래로 내리는 명령은 물이 땅으로 흐르듯 민심에 따라야 한다.”

이렇게 해서 말은 간결하고 실행은 쉬워졌다. 풍속이 하고자 하는 대로 그에 맞춰 주었고, 풍속이 원치 않으면 그에 따라 없애주었다.



관중은 국정을 수행하면서 화가 될 것도 복이 되게 하고, 실패할 것도 성공시켰다. 물가를 중시했고, 거래를 신중하게 처리했다. 환공이 소희() 때문에 진짜 화가 나서 남쪽 채()나라를 습격하자 관중은 그 일을 가지고 초나라를 토벌하여 주나라 왕실에 바치는 공물 포모(, 띠풀)를 바치지 않은 일을 나무랐다. 환공이 북쪽 산융()을 정벌하자 관중은 그 참에 연나라에게 소공()의 정치를 되살리게 했다. 가()나라의 회맹에서 환공이 조말()과의 약속을 어기려고 하자 관중이 약속을 지키게 함으로써 제후들이 제나라로 귀의하게 했다. 그래서 “주는 것이 얻는 것임을 아는 것이 정치의 요체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관중은 공실보다 더 부유하여 삼귀()와 반점()을 갖추고 있었으나 제나라 사람들은 그가 사치스럽다고 여기지 않았다. 관중이 죽고도 제나라는 그 정치를 준수하여 늘 제후들보다 강했다. 그로부터 백여 년 뒤 안자가 나타났다.



晏平仲


晏平仲嬰者,萊之夷維人也。事齊靈公、莊公、景公,以節儉力行重於齊。既相齊,食不重肉,妾不衣帛。其在朝,君語及之,即危言;語不及之,即危行。國有道,即順命;無道,即衡命。以此三世顯名於諸侯。

越石父賢,在縲紲中。晏子出,遭之涂,解左驂贖之,載歸。弗謝,入閨。久之,越石父請絕。晏子懼然,攝衣冠謝曰:“嬰雖不仁,免子於緦何子求絕之速也?”石父曰:“不然。吾聞君子詘於不知己而信於知己者。方吾在縲紲中,彼不知我也。夫子既已感寤而贖我,是知己;知己而無禮,固不如在縲紲之中。”晏子於是延入為上客。

晏子為齊相,出,其御之妻從門閒而闚其夫。其夫為相御,擁大蓋,策駟馬,意氣揚揚甚自得也。既而歸,其妻請去。夫問其故。妻曰:“晏子長不滿六尺,身相齊國,名顯諸侯。今者妾觀其出,志念深矣,常有以自下者。今子長八尺,乃為人仆御,然子之意自以為足,妾是以求去也。”其后夫自抑損。晏子怪而問之,御以實對。晏子薦以為大夫。



안평중() 영()은 내()의 이유() 사람이다. 제나라 영공(), 장공(), 경공()을 섬겼고, 절약하고 검소한 생활에 힘을 써서 제나라에서 중시했다. 제나라의 상이 되어서도 식사 때 고기를 두 종류 올리지 않았고, 첩에게 비단옷을 입지 않게 했다. 조정에서 국군이 그를 칭찬하고 허용하면 말을 더욱 신중하게 했고, 국군의 칭찬이나 허용이 없으면 그 행동을 더욱 신중하게 했다. 나라 정치가 도리가 있으면 그 명에 따랐지만 도리가 없으면 그 명령의 옳고 그름을 따졌다. 이로써 3대에 걸쳐 제후들 사이에 명성을 떨쳤다.

 

월석보()란 현자가 체포되었다. 안자()가 외출했다가 길에서 그를 만나 마차 왼쪽 말을 풀어 (속죄금으로) 주고 그를 태워 돌아와서는 인사도 없이 내실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뒤 월석보가 절교를 청했다. 안자가 놀라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이 안영이 잘나지는 않았지만 당신을 곤경에서 구해드렸는데 어째서 이렇게 서둘러 절교를 말하십니까?”라고 했다. 석보가 이렇게 말했다.


“그게 아니지요. 제가 듣기에 군자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자에게는 굽힐 수 있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는 존중을 받는다고 합니다. 방금 제가 묶여 갇혀 있을 때 저들은 내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당신께서 느끼는 바가 있어 저를 풀어주었으니 저를 안다는 것이지요. 저를 알고도 무례하시니 묶여 있는 것만 못하지요.”

이에 안자는 그를 안으로 모시고 상객으로 대접했다.

안자가 제나라의 재상으로 출타하려는데 그 마부의 아내가 문틈으로 남편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재상의 마부로서 큰 차양을 달고 네 마리의 말에 채찍질을 하며 아주 의기양양 득의만만했다. 일이 끝나 돌아오자 그 아내가 떠나겠다고 했다. 남편이 그 까닭을 묻자 아내는 “안자는 키가 여섯 자도 안 되는 몸으로 제나라 재상이 되어 제후들 사이에 명성이 높습니다. 오늘 첩이 그 출타하는 모습을 보니 생각이 깊고 늘 자신을 낮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키가 여덟 자인데 남을 위해 말을 몰면서도 스스로에 만족해하고 있더군요. 첩이 이 때문에 떠나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 뒤 마부가 겸손해졌다. 안자가 이상해서 물었더니 마부가 사실대로 대답했다. 안자가 추천하여 대부가 되었다.



太史公曰:吾讀管氏牧民、山高、乘馬、輕重、九府,及晏子春秋,詳哉其言之也。既見其著書,欲觀其行事,故次其傳。至其書,世多有之,是以不論,論其軼事。
管仲世所謂賢臣,然孔子小之。豈以為周道衰微,桓公既賢,而不勉之至王,乃稱霸哉?語曰“將順其美,匡救其惡,故上下能相親也”。豈管仲之謂乎?
方晏子伏莊公尸哭之,成禮然後去,豈所謂“見義不為無勇”者邪?至其諫說,犯君之顏,此所謂“進思盡忠,退思補過”者哉!假令晏子而在,余雖為之執鞭,所忻慕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관자의 「목민()」, 「산고()」, 「승마()」, 「경중()」, 「구부()」와 『안자춘추()』를 읽어보니 그 말이 상세했다. 그들의 저서를 보고는 그 행적과 일을 보고 싶어 그 열전을 엮었다. 책은 세상에 많이 나와 있으므로 거론하지 않고 모르는 일들만 거론했다.

관중은 세상이 말하는 유능한 신하였지만 공자는 그를 낮게 보았다. 주의 도가 쇠퇴하고 환공이 능력이 있었음에도 그가 왕도에 힘쓰게 하지 않고 패자로 칭하게 했기 때문인가? “그 사람의 좋은 점을 격려하여 따르고, 그 사람의 나쁜 점을 바로잡으면 위아래가 서로 친목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관중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안자가 장공()의 시신에 엎드려 곡을 하고서는 예를 마친 후에 떠났는데 이른바 “의로움을 보고 행하지 않으면 용기가 아니다.”라는 말이 그것 아니겠는가? 직언을 하되 군주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이른바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만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잘못을 보완할 것만 생각한다.”는 말 아니겠는가? 안자가 살아 있다면 내가 그를 위해 말채찍을 들 만큼 그를 흠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