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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史記列傳

史記 卷七二. 穣侯列傳

by 柳川 2019. 6. 2.

                                        侯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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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후() 위염()은 진() 소왕()의 어머니인 선태후()의 동생이다. 그(선태후) 선조는 초()나라 사람이고 성은 미씨()이다.

진 무왕()이 죽고, 아들이 없어 그 동생을 세우니 이가 소왕이다. 소왕의 어머니는 미팔자()로 불렸으나, 소왕이 즉위하자 미팔자는 선태후로 불렸다. 선태후는 무왕의 생모가 아니다. 무왕의 어머니는 혜문후()라 했는데, 무왕에 앞서 죽었다. 선태후에게는 동생이 둘 있었다. 아버지가 다른 큰동생 양후()는 성이 위(), 이름은 염()이고, 아버지가 같은 동생 미융()은 화양군()이다. 그리고 소왕에게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고릉군()과 경양군()이 있었다.

그리고 위염이 가장 유능하여 혜왕()과 무왕 때 자리를 받아 중용되었다. 무왕이 죽고, 여러 동생들이 자리를 다툴 때 위염만 있는 힘을 다해 소왕을 옹립했다. 소왕이 즉위하여 위염을 장군으로 삼아 함양()을 지키게 했다. (위염은) 계군()의 난을 토벌하고, 무왕의 왕후를 위()나라로 축출했으며, 소왕의 여러 형제들 중 불순한 자들을 모두 없애 진나라에서 위세를 떨쳤다. 소왕이 나이가 어려 선태후가 나서 다스리면서 위염에게 국정을 맡겼다.

소왕 7년에 저리자()가 죽자, 경양군을 제()나라에 인질로 보내었다. 조()나라 사람 누완()이 와서 진()나라의 승상()이 되자 조나라는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구액()을 진나라에 보내 위염을 진나라의 승상으로 삼을 것을 요청하게 했다. 구액이 떠나려는데 그 문객 송공()이 누액에게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가 공의 청을 듣지 않으면, 누완은 틀림없이 공을 원망할 것입니다. 그러니 공께서는 누완에게 ‘공을 위해서라도 진나라 일은 서두르지 마십시오.’라고 하십시오. 진왕이 조나라가 위염을 승상으로 삼는 일을 서두르지 않는 것을 보면 공의 청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공께서 요청하여 일이 성사되지 않아도 누완에게 덕을 베푸는 것이 되고, 일이 성사되면 위염이 그 때문에 공에게 감사할 것입니다.”

구액은 그의 말을 따랐고, 진나라는 과연 누완을 면직시키고, 위염을 진나라의 승상으로 삼았다.

(진나라가) 여례()를 죽이려고 하자, 여례는 제나라로 도망쳤다. 소왕 14년에 위염은 백기()를 추천하여 상수()를 대신해서 군대를 이끌고 한()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이궐()에서 물리치니 24만 명의 목을 베고 위나라의 장수 공손희()를 포로로 잡았다. 이듬해, 다시 초나라의 완()과 엽()을 취했다. 위염이 병으로 승상을 사직하자, 객경 수촉()을 승상으로 삼았다.

이듬해, 수촉이 면직되자 다시 위염을 승상으로 삼고, 위염을 양()에 봉한 다음 다시 도()를 더 봉해 양후()라 불렀다.



양후에 봉해진 지 4년에 진나라의 장수가 되어 위()나라를 공격했다. 위나라는 하동() 400리를 바쳤다. 위나라의 하내()를 함락하고 크고 작은 성 60여 개를 취했다.

소왕 19년에 진나라는 서제(西)로, 제나라는 동제()로 칭했다. 한 달쯤 지나 여례가 돌아왔고, 제나라와 진나라는 다시 ‘제’를 취소하고 다시 ‘왕’을 칭했다.

위염이 다시 승상이 되었다가 6년 뒤 면직되었다.

4년 뒤 백기에게 초나라의 영()을 점령하게 하고, 진나라는 남군()을 두었다. 이에 백기를 무안군()으로 삼았다. 백기는 위염의 추천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사이가 좋았다. 이 무렵 양후의 부는 왕실보다 더 부유했다.

소왕 32년에 양후는 상국()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하여 망묘()를 도주하게 하고, 북택()에 진입하여 마침내 대량()을 포위했다. 양나라(위)의 대부 수고()가 양후에게 이렇게 유세했다.

“신은 위나라의 고관들이 위왕께 ‘옛날 양나라(위) 혜왕()께서 조나라를 토벌하여 삼량()에서 승리하고, 한단()을 점령했지만 조나라는 땅을 떼어 주지 않고 끝내 한단을 수복했습니다. 제나라가 위()나라를 공략하여 옛 도성(초구; )를 함락하고 자량()을 죽였지만 위나라는 땅을 떼어주지 않고 옛땅을 수복했습니다. 위나라, 조나라가 나라를 보전하고 군대를 보유하면서도 제후에게 땅을 합병당하지 않은 것은 고난을 잘 견디고 가볍게 땅을 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송나라와 중산은 여러 차례 정벌을 당해 땅을 떼어 주다가 나라도 따라서 망했습니다. 신은 위나라, 조나라는 본받고 송나라, 중산을 경계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나라는 욕심이 많고 잔인한 나라라,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위나라를 잠식하여 진()나라의 땅을 다 차지했으며, 포연()과 싸워 이겨서 여덟 개의 현을 떼어 받았는데 땅을 다 거두기도 전에 다시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그러니 진나라가 어찌 만족하겠습니까? 지금 또 망묘를 패주시키고 북택에 진입했는데 이는 양나라(위)를 공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왕을 협박하여 땅을 많이 떼어받으려는 것입니다. 왕께서는 절대 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왕께서 초나라와 조나라를 배신하고 진나라와 강화한다면 초나라와 조나라는 분노하여 왕을 버리고 왕과 더불어 진나라를 섬기는 일을 다툴 것이고 진나라는 틀림없이 이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진나라가 초나라와 진나라의 군대를 끼고 다시 양나라(위)을 공격하면 나라를 멸망에서 구할 수 없습니다. 왕께서는 결코 강화해서는 안 됩니다. 왕께서 기어이 강화를 하시겠다면 땅을 조금 떼어 주되 인질을 잡으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속게 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신이 위나라에서 들은 말입니다. 그러니 원컨대 군께서는 이 일에 대해 잘 생각하십시오.

『주서()』에 ‘천명은 불변이 아니다’라 했는데, 이는 요행은 잇따라 발생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대저 포연과 싸워 이기고 여덟 개 현을 떼어 받은 것은 병력이 강해서도 아니고 계책이 정교해서도 아닌 천행이 많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또 망묘를 도망가게 하고 북택에 진입하여 대량을 공략한 것은 천행이 잇따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렇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듣기에 위나라는 100개 현의 병사들을 모조리 징집하여 대량을 지키려 한다는데, 신은 적어도 30만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30만 병력으로 높이 7인()의 대량을 지킨다면, 신이 생각하기에 탕왕과 무왕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공략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초나라와 조나라의 군대를 경솔하게 등 뒤에 두고, 7인이나 되는 성을 공격하여 30만 군대와 싸워 이기겠다는 것은 신이 보기에 하늘과 땅이 처음 나눈 이래로 지금까지 없었던 일입니다. 공격해도 이기지 못하고, 진나라의 군대는 지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장군의 봉지인) 도읍도 잃게 될 것이 뻔한 것인 즉, 앞서 세운 공로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지금 위왕은 머뭇거리고 있으니 땅을 조금만 떼어 받겠다고 하면 받아들일 것입니다. 군께서는 초나라, 조나라의 군대가 대량으로 오기 전에 빨리 땅을 조금 떼어 받는 것으로 위나라를 수습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위나라가 머뭇거리고 있다가 땅을 조금 떼어주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면 틀림없이 그렇게 할 것이니 군께서도 원하는 바를 얻으실 것입니다. 초나라와 조나라는 위나라가 먼저 진나라와 강화한 일에 분노하여 틀림없이 다투어 진나라를 섬기려 할 것이니, 이로써 합종은 흩어지고 군께서는 그런 다음 선택하시면 됩니다. 또 군께서 땅을 얻는데 무엇 하러 병력을 씁니까! 진()나라의 땅을 떼어달라고 압박하면 진나라가 군대로 공격하지 않아도 위나라는 틀림없이 강()과 안읍()으로 성의를 나타낼 것입니다. 또 도()로 통하는 두 길을 열면 옛 송()나라의 땅을 거의 다 차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위나라는 분명 단보 땅으로 성의를 보일 것입니다. 진나라는 군대를 보전하고, 군은 이를 통제할 것이니 무엇을 구한들 못 얻을 것이며 무슨 일을 한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원하옵건대 군께서는 이를 깊이 생각하시어 위험한 일을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양후는 “좋습니다!”라 하고는 바로 대량에 대한 포위를 풀었다.

이듬해, 위나라가 진나라를 배반하고 제나라와 합종했다. 진나라는 양후에게 위나라를 정벌하게 하여 4만의 목을 베었다. 위나라의 장수 포연()은 달아났고, 위나라의 세 개의 현을 얻었다. 양후는 봉지가 더 늘었다.

이듬해, 양후는 백기() 및 객경() 호양()과 함께 다시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를 공격하여 화양()에서 망묘()를 격파하고 10만 명의 목을 베는 한편 위의 권(), 채양(), 장사() 및 조나라의 관진()을 취했다. 그리고 조나라에게 관진을 돌려주고 조나라의 군대와 함께 제나라를 토벌하려고 했다. 제 양왕()은 겁이 나서 소대()에게 제나라를 위해 비밀리에 양후에게 이런 편지를 전하게 했다.

“신이 (진나라를) 오가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진나라가 조나라에 군대 4만을 더해 제나라를 정벌하려 한다.’고 합니다. 이에 신은 가만히 당신의 왕에게 ‘진왕은 현명하고 계책에 뛰어나며, 양후는 지혜롭고 일을 잘 하는데 조나라에 군대 4만을 보태주어 제나라를 토벌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대저 삼진()이 서로 힘을 합치는 것을 진나라는 가장 싫어합니다. (그들이) 수없이 배반하고, 수없이 속이고도 신의가 없다고 여기지 않고 실행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나라를 깨서 조나라를 살찌우면 조나라는 진나라의 적이 되어 진나라에 불리해집니다. 이것이 그 하나입니다. 진나라의 모사()들은 틀림없이 ‘제나라를 치는 것은 진나라와 초나라를 피폐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고, 그런 다음 진나라와 초나라를 제압해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대저 제나라는 이미 피폐해졌고, 천하가 제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천 균()이나 나가는 쇠뇌로써 온 몸에 종기가 난 환자를 쏘는 것과 같아 분명 죽겠지만 진나라와 초나라를 어떻게 피폐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 둘입니다. 진나라가 군대를 적게 출병시키면 진나라와 초나라는 믿지 않을 것이고, 병력을 많이 내면 진나라, 초나라는 진나라에게 통제당할 것이라 여길 것입니다. 제나라는 겁을 먹고 진나라에게로 오지 않고 분명 진나라, 초나라로 달려갈 것입니다. 이것이 그 셋입니다. 진나라가 제나라의 땅을 떼어 진나라와 초나라에게 먹인다면 진나라와 초나라는 군대로 맞설 것이니 진나라는 반대로 적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 넷입니다. 이는 진나라와 초나라가 진나라를 이용하여 제나라를 꾀하고 제나라를 이용하여 진나라를 꾀하려는 것이니 진나라와 초나라는 얼마나 영리하고 진나라와 제나라는 얼마나 멍청합니까? 이것이 그 다섯입니다.

그러므로 안읍을 얻어 일을 잘 처리하면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진나라가 안읍을 얻으면 한나라는 상당()을 지키지 못합니다. 이렇게 천하의 위장()을 차지하는 것과 군대를 출병시켜 돌아오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것 중 어느 쪽이 유리합니까? 이 때문에 신이 ‘진왕은 현명하고 계책에 뛰어나며, 양후는 지혜롭고 일을 잘 하는데 조나라에 군대 4만을 보태주어 제나라를 토벌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이에 양후는 (제나라로) 가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소왕 36년에 상국 양후는 객경 조()와 논의하여 제나라를 공격해서 강(), 수()를 취하여 (자신의 봉지) 도읍()을 넓히고자 했다. 그러자 위()나라 사람 범수()가 스스로 장록(祿)이란 이름으로 양후가 제나라를 정벌하면서 삼진()을 지나 제나라를 치려 한다고 지적하고, 그 참에 진 소왕에게 유세를 청했다. 소왕은 이에 범수를 기용했고, 범수는 선태후와 양후가 제후들에게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일과 경양군(), 고릉군() 등의 지나친 사치와 왕실보다 더한 부유함을 말했다. 이에 진 소왕은 깨닫는 바가 있어 양후를 바로 면직시키고 경양군 등을 모두 함곡관 너머 봉지로 내쳤다. 양후가 함곡관을 나설 때 짐을 실은 수레가 천 대를 넘었다.

양후는 도읍()에서 죽어, 그곳에 장례를 지냈다. 진나라는 (양후의) 도읍을 거두어 다시 군을 두었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양후는 진 소왕의 친 외삼촌이다. 진나라가 동쪽으로 땅을 넓혀 제후들을 약화시키고 천하에다 ‘제’로 칭하여 천하가 서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린 것은 모두 양후의 공이었다. 그러나 그 부귀가 극에 이르고 넘쳐 날 때 한 남자의 유세로 몸은 꺾이고 권세를 잃어 울화로 죽었으니 아무 것도 없는 보통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