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申君列傳
春申君者,楚人也,名歇,姓黃氏。遊學博聞,事楚頃襄王。頃襄王以歇為辯,使於秦。秦昭王使白起攻韓、魏,敗之於華陽,禽魏將芒卯,韓、魏服而事秦。秦昭王方令白起與韓、魏共伐楚,未行,而楚使黃歇適至於秦,聞秦之計。當是之時,秦已前使白起攻楚,取巫、黔中之郡,拔鄢郢,東至竟陵,楚頃襄王東徙治於陳縣。黃歇見楚懷王之為秦所誘而入朝,遂見欺,留死於秦。頃襄王,其子也,秦輕之,恐壹舉兵而滅楚。歇乃上書說秦昭王曰:
天下莫彊於秦、楚。今聞大王欲伐楚,此猶兩虎相與鬥。兩虎相與鬥而駑犬受其弊,不如善楚。臣請言其說:臣聞物至則反,冬夏是也;致至則危,累釭是也。今大國之地,遍天下有其二垂,此從生民已來,萬乘之地未嘗有也。先帝文王、莊王之身,三世不妄接地於齊,以絕從親之要。/2/今王使盛橋守事於韓,盛橋以其地入秦,是王不用甲,不信威,而得百里之地。王可謂能矣。王又舉甲而攻魏,杜大樑之門,舉河內,拔燕、酸棗、虛、桃,入邢,魏之兵雲翔而不敢捄。王之功亦多矣。王休甲息眾,二年而後複之;又並蒲、衍、首、垣,以臨仁、平丘,黃、濟陽嬰城而魏氏服;王又割濮磿之北,注齊秦之要,絕楚趙之脊,天下五合六聚而不敢救。王之威亦單矣。
(吾'磿'(력, 朴)은 원문에는 공백이었음. 朴의 磿 이맞을 듯. 磿(력, 朴), 磨(金),
磿 : 관줄 잡는 사람 력, 돌의 작은 소리 력, 磿室 : 戰國時代, 燕나라의 궁전 이름)
王若能持功守威,絀攻取之心而肥仁義之地,使無後患,三王不足四,五伯不足六也。王若負人徒之眾,仗兵革之彊,乘毀魏之威,而欲以力臣天下之主,臣恐其有後患也。詩曰「靡不有初,鮮克有終」。易曰「狐涉水,濡其尾」。此言始之易,終之難也。何以知其然也?昔智氏見伐趙之利而不知榆次之禍,吳見伐齊之便而不知幹隧之敗。此二國者,非無大功也,沒利於前而易患於後也。/3/吳之信越也,從而伐齊,既勝齊人於艾陵,還為越王禽三渚之浦。智氏之信韓、魏也,從而伐趙,攻晉陽城,勝有日矣,韓、魏叛之,殺智伯瑤於鑿台之下。今王妒楚之不毀也,而忘毀楚之彊韓、魏也,臣為王慮而不取也。
詩曰「大武遠宅而不涉」。從此觀之,楚國,援也;鄰國,敵也。詩雲「趯趯毚兎,遇犬獲之。他人有心,餘忖度之」。今王中道而信韓、魏之善王也,此正吳之信越也。臣聞之,敵不可假,時不可失。臣恐韓、魏卑辭除患而實欲欺大國也。何則?王無重世之德於韓、魏,而有累世之怨焉。夫韓、魏父子兄弟接踵而死於秦者將十世矣。本國殘,社稷壞,宗廟毀。刳腹絕腸,折頸摺頤,首身分離,暴骸骨於草澤,頭顱僵僕,相望於境,父子老弱系脰束手為群虜者相及於路。鬼神孤傷,無所血食。人民不聊生,族類離散,流亡為僕妾者,盈滿海內矣。故韓、魏之不亡,秦社稷之憂也,今王資之與攻楚,不亦過乎! (吾 : 원문이 틀렸다. 毚은 누락됐고, 兎는 免으로 오식됐다. 또 遇는 還으로 오식됐다. 이기동 역 《시경강설》기준)
且王攻楚將惡出兵?王將借路於仇讎之韓、魏乎?兵出之日而王憂其不返也,是王以兵資於仇讎之韓、魏也。王若不借路於仇讎之韓、魏,必攻隨水右壤。隨水右壤,此皆廣川大水,山林谿穀,不食之地也,王雖有之,不為得地。是王有毀楚之名而無得地之實也。
且王攻楚之日,四國必悉起兵以應王。秦、楚之兵構而不離,魏氏將出而攻留、方與、銍、湖陵、碭、蕭、相,故宋必盡。齊人南面攻楚,泗上必舉。此皆平原四達,膏腴之地,而使獨攻。王破楚以肥韓、魏於中國而勁齊。韓、魏之彊,足以校於秦。齊南以泗水為境,東負海,北倚河,而無後患,天下之國莫彊於齊、魏,齊、魏得地葆利而詳事下吏,一年之後,為帝未能,其於禁王之為帝有餘矣。이 4 페이지가 金 기준, 정확하게 28행 한 페이지 분량(331쪽)
夫以王壤土之博,人徒之眾,兵革之彊,壹舉事而樹怨於楚,遲令韓、魏歸帝重於齊,是王失計也。臣為王慮,莫若善楚。秦、楚合而為一以臨韓,韓必斂手。王施以東山之險,帶以曲河之利,韓必為關內之侯。若是而王以十萬戍鄭,梁氏寒心,許、鄢陵嬰城,而上蔡、召陵不往來也,如此而魏亦關內侯矣。王壹善楚,而關內兩萬乘之主注地於齊,齊右壤可拱手而取也。王之地一經兩海,要約天下,是燕、趙無齊、楚,齊、楚無燕、趙也。然後危動燕、趙,直搖齊、楚,此四國者不待痛而服矣。」
昭王曰:「善。」於是乃止白起而謝韓、魏。發使賂楚,約為與國。
黃歇受約歸楚,楚使歇與太子完入質於秦,秦留之數年。楚頃襄王病,太子不得歸。而楚太子與秦相應侯善,於是黃歇乃說應侯曰:「相國誠善楚太子乎?」應侯曰:「然。」/6/歇曰:「今楚王恐不起疾,秦不如歸其太子。太子得立,其事秦必重而德相國無窮,是親與國而得儲萬乘也。若不歸,則咸陽一布衣耳;楚更立太子,必不事秦。夫失與國而絕萬乘之和,非計也。原相國孰慮之。」應侯以聞秦王。秦王曰:「令楚太子之傅先往問楚王之疾,返而後圖之。」黃歇為楚太子計曰:「秦之留太子也,欲以求利也。今太子力未能有以利秦也,歇憂之甚。而陽文君子二人在中,王若卒大命,太子不在,陽文君子必立為後,太子不得奉宗廟矣。不如亡秦,與使者俱出;臣請止,以死當之。」楚太子因變衣服為楚使者禦以出關,而黃歇守舍,常為謝病。度太子已遠,秦不能追,歇乃自言秦昭王曰:「楚太子已歸,出遠矣。歇當死,原賜死。」昭王大怒,欲聽其自殺也。應侯曰:「歇為人臣,出身以徇其主,太子立,必用歇,故不如無罪而歸之,以親楚。」秦因遣黃歇。
歇至楚三月,楚頃襄王卒,太子完立,是為考烈王。考烈王元年,以黃歇為相,封為春申君,賜淮北地十二縣。後十五歲,黃歇言之楚王曰:「淮北地邊齊,其事急,請以為郡便。」因並獻淮北十二縣。請封於江東。考烈王許之。春申君因城故吳墟,以自為都邑。
春申君既相楚,是時齊有孟嘗君,趙有平原君,魏有信陵君,方爭下士,招致賓客,以相傾奪,輔國持權。
春申君為楚相四年,秦破趙之長平軍四十餘萬。五年,圍邯鄲。邯鄲告急於楚,楚使春申君將兵往救之,秦兵亦去,春申君歸。春申君相楚八年,為楚北伐滅魯,以荀卿為蘭陵令。當是時,楚複彊。
趙平原君使人於春申君,春申君舍之於上舍。趙使欲誇楚,為玳瑁簪,刀劍室以珠玉飾之,請命春申君客。春申君客三千餘人,其上客皆躡珠履以見趙使,趙使大慚。
春申君相十四年,秦莊襄王立,以呂不韋為相,封為文信侯。取東周。
春申君相二十二年,諸侯患秦攻伐無已時,乃相與合從,西伐秦,而楚王為從長,春申君用事。至函谷關,秦出兵攻,諸侯兵皆敗走。楚考烈王以咎春申君,春申君以此益疏。
客有觀津人硃英,謂春申君曰:「人皆以楚為彊而君用之弱,其於英不然。先君時善秦二十年而不攻楚,何也?秦逾黽隘之塞而攻楚,不便;假道於兩周,背韓、魏而攻楚,不可。今則不然,魏旦暮亡,不能愛許、鄢陵,其許魏割以與秦。秦兵去陳百六十裏,臣之所觀者,見秦、楚之日鬥也。」楚於是去陳徙壽春;而秦徙衛野王,作置東郡。春申君由此就封於吳,行相事。
楚考烈王無子,春申君患之,求婦人宜子者進之,甚眾,卒無子。趙人李園持其女弟,欲進之楚王,聞其不宜子,恐久毋寵。李園求事春申君為舍人,已而謁歸,故失期。還謁,春申君問之狀,對曰:「齊王使使求臣之女弟,與其使者飲,故失期。」春申君曰:「娉入乎?」對曰:「未也。」春申君曰:「可得見乎?」曰:「可。」於是李園乃進其女弟,即幸於春申君。/9/知其有身,李園乃與其女弟謀。園女弟承間以說春申君曰:「楚王之貴幸君,雖兄弟不如也。今君相楚二十餘年,而王無子,即百歲後將更立兄弟,則楚更立君後,亦各貴其故所親,君又安得長有寵乎?非徒然也,君貴用事久,多失禮於王兄弟,兄弟誠立,禍且及身,何以保相印江東之封乎?今妾自知有身矣,而人莫知。妾幸君未久,誠以君之重而進妾於楚王,王必幸妾;妾賴天有子男,則是君之子為王也,楚國盡可得,孰與身臨不測之罪乎?」春申君大然之,乃出李園女弟,謹舍而言之楚王。楚王召入幸之,遂生子男,立為太子,以李園女弟為王后。楚王貴李園,園用事。
李園既入其女弟,立為王后,子為太子,恐春申君語泄而益驕,陰養死士,欲殺春申君以滅口,而國人頗有知之者。
春申君相二十五年,楚考烈王病。硃英謂春申君曰:「世有毋望之福,又有毋望之禍。今君處毋望之世,事毋望之主,安可以無毋望之人乎?」春申君曰:「何謂毋望之福?」曰:「君相楚二十餘年矣,雖名相國,實楚王也。今楚王病,旦暮且卒,而君相少主,因而代立當國,如伊尹、周公,王長而反政,不即遂南面稱孤而有楚國?此所謂毋望之福也。」春申君曰:「何謂毋望之禍?」曰:「李園不治國而君之仇也,不為兵而養死士之日久矣,楚王卒,李園必先入據權而殺君以滅口。此所謂毋望之禍也。」春申君曰:「何謂毋望之人?」對曰:「君置臣郎中,楚王卒,李園必先入,臣為君殺李園。此所謂毋望之人也。」春申君曰:「足下置之,李園,弱人也,僕又善之,且又何至此!」硃英知言不用,恐禍及身,乃亡去。
後十七日,楚考烈王卒,李園果先入,伏死士於棘門之內。春申君入棘門,園死士俠刺春申君,斬其頭,投之棘門外。於是遂使吏盡滅春申君之家。而李園女弟初幸春申君有身而入之王所生子者遂立,是為楚幽王。
是歲也,秦始皇帝立九年矣。嫪毐亦為亂於秦,覺,夷其三族,而呂不韋廢。
太史公曰:吾適楚,觀春申君故城,宮室盛矣哉!初,春申君之說秦昭王,及出身遣楚太子歸,何其智之明也!後制於李園,旄矣。語曰:「當斷不斷,反受其亂。」春申君失硃英之謂邪?
黃歇辯智,權略秦、楚。太子獲歸,身作宰輔。珠炫趙客,邑開吳土。烈王寡胤,李園獻女。無妄成災,硃英徒語。
춘신군(春申君)은 초(楚)나라 사람이다. 이름은 헐(歇), 성은 황씨(黃氏)이다. 두루 다니며 공부하여 박식했고, 경양왕(頃襄王)을 섬겼다. 경양왕은 황헐의 언변 때문에 진(秦)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 전에) 진 소왕(昭王)은 백기(白起)에게 한(韓)나라, 위(魏)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화양(華陽)에서 무찌르고 위나라의 장수 망묘(芒卯)를 사로잡았다. 한나라, 위나라는 굴복하고 진나라를 섬겼다. 이어 진 소왕은 백기에게 한나라, 위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치라는 명령을 내려놓았다. 출병 전에 초나라의 사신 황헐이 마침 진나라에 이르러 진나라의 계책을 알게 되었다.
당시 진나라는 이미 백기에게 초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무군(巫郡), 검중군(黔中郡)을 취했고, 언영(鄢郢)을 빼앗은 다음 동쪽 경릉(竟陵)에까지 이르렀다. 초 경양왕은 도읍을 동쪽 진현(陳縣)으로 옮겼다. 황헐은 초 회왕(懷王)이 진나라의 꼬임에 빠져 진나라에 들어갔다가 결국 속아서 진나라에 억류당했다가 죽는 것을 보았다. 경양왕은 회왕의 아들로 진나라는 그를 깔보았다. (황헐은) (진나라가) 단번에 군대를 일으켜 초나라를 멸망시킬 것이 두려웠다. 이에 글을 올려 진 소왕에게 다음과 같이 유세했다.
“천하에 진나라, 초나라보다 강한 나라는 없습니다. 지금 듣자하니 대왕께서 초나라를 치려 하신다는데, 이는 호랑이 두 마리가 서로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호랑이 두 마리가 서로 싸우면 약한 개가 이익을 얻을 것이니 초나라와 잘 지내느니만 못합니다. 신이 그 이치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신은 사물이 끝에 이르면 되돌아간다고 들었습니다. 여름과 겨울이 그것입니다. 또 너무 높으면 위태로워집니다. 바둑돌을 쌓는 것이 그렇습니다. 지금 대국의 땅은 천하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에 이릅니다. 사람이 생긴 이래 이렇게 넓은 나라는 없었습니다. 선왕이신 문왕(文王), 장왕(莊王)으로부터 3대에 이르기까지 땅은 제(齊)나라와 접경하여 합종의 연맹을 끊고자 하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지금 왕께서 성교(盛橋)를 한나라에 보내 일을 맡게 하니, 성교는 그 땅을 진나라에 편입시켰습니다. 이는 왕께서 군대를 쓰지도 않고 위력을 보이지도 않고 백리의 땅을 얻으신 것이니 왕께서는 정말 능력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께서 또 군대를 일으켜 위나라를 공격하여 대량의 문을 막아버리고, 하내를 탈취하여 연(燕)나라, 산조(酸棗), 허(虛), 도(桃)를 점령한 다음 형(邢)나라까지 들어가셨습니다. 위나라의 군대는 구름처럼 흩어져서는 감히 구원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왕의 공이 참으로 크고 많습니다.
대왕께서는 군대를 쉬게 한 다음 2년 뒤 다시 출병하여 (위나라의) 포(蒲), 연(衍), 수(首), 원(垣)을 합병하고, 인(仁), 평구(平丘)로 나아가니 황(黃), 제양(濟陽)이 성을 닫고 나오지 못했고, 위나라는 굴복했습니다. 왕께서는 또 복(濮), 역(磿) 이북을 나누어 취하여 제나라와 진나라를 연결하고 초나라와 조나라의 척추를 끊어 버리니 천하가 여러 차례 연합했지만 감히 구하러 나서지 못했습니다. 왕의 위세 또한 극에 이르렀습니다.
왕께서 공적과 위세를 지키면서 공격하여 빼앗으려는 마음을 버리고 어질고 의로운 마음을 더 길러 후환이 없게 하실 수 있다면 삼왕이나 오패도 왕을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왕께서 만약 사람 많은 것과 병력 강한 것만 믿고 위나라를 허문 위세를 빌려서 힘으로 천하를 신하로 만들려 하신다면 신은 그에 따르는 후환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경(詩經)』에 ‘없지는 않으나 끝이 좋은 경우는 드물다’라고 했고, 『역경(易經)』에는 ‘여우가 (조심조심) 물을 건너지만 꼬리를 적시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시작하긴 쉽지만 끝까지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겠습니까? 옛날 지씨(智氏; 지백)는 조나라를 치는 이익만 보고 유차(楡次)에서의 화를 못 보았고, 오나라는 제나라를 토벌하는 편리만 보고 간수(干隧)에서의 패배를 몰랐습니다. 이 두 나라는 큰 공이 없는 것도 아닌데 눈앞의 이익에 몰두하다가 뒤이어 올 우환을 몰랐습니다. 오나라는 월나라를 믿고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여 애릉(艾陵)에서 제나라에게 승리했지만 돌아오다가 삼저(三渚)의 물가에서 월나라에게 사로잡혔습니다. 지씨는 한나라와 위나라를 믿고 함께 조나라를 공격하여 진양성(晉陽城)을 포위해 승리를 눈앞에 두었는데 한나라와 위나라가 배반하여 지백요(智伯瑤)를 착대(鑿臺)에서 죽였습니다.
지금 왕께서는 초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에만 불만을 갖고 계실 뿐, 초나라가 망하면 한나라와 위나라가 강해진다는 것은 잊고 계십니다. 신이 왕을 위해 생각해본다면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경』에 ‘천 리 밖 멀리 군대를 보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초나라는 한 편이고, 이웃 나라(한나라, 위나라)가 적입니다. 『시경』에 ‘약은 토끼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사냥개를 만나면 잡힌다. 다른 사람에게 생각이 있지만 내가 한번 헤아리면 바로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 왕께서 한나라와 위나라가 왕을 잘 대한다는 것을 지나치게 믿고 계신데 이것이 바로 오나라의 월나라에 대한 믿음입니다. 신은 적에게 겨를을 주어서는 안 되며 때는 놓쳐서는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신은 한나라와 위나라가 공손한 말로 근심을 없애려는 것이 실은 대국을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닌가 걱정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왕께서 한나라와 위나라에 오랫동안 덕을 베푼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대대로 원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 한나라, 위나라의 부모형제들은 지금까지 계속 진나라에게 죽임을 당해온 지 10대에 이릅니다. 본국은 망하고 사직과 종묘는 허물어졌습니다. 배는 갈라져 내장은 끊어졌고, 목은 잘리어 얼굴이 문드러졌으며, 머리와 몸이 나뉘고, 해골은 풀밭과 연못에 널부러졌고, 머리통은 땅바닥에 엎어진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비와 아들, 노약자들은 손과 목을 묶인 채 줄줄이 포로가 되어 길을 메웁니다. 귀신들은 오갈 데 없고 제사도 받지 못합니다. 백성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 없고 가족은 흩어져 떠돌다 노복이나 첩이 되니 천하를 가득 채울 정도입니다. 그러니 한나라, 위나라가 망하지 않으면 진나라의 사직에 근심거리가 됩니다. 그런데도 지금 왕께서는 그들을 믿고 초나라를 공격하려 하시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왕께서 초나라를 공격하신다면 어떻게 출병하시렵니까? 왕께서는 원수인 한나라, 위나라로부터 길을 빌리시렵니까? 출병 그날부터 왕께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이는 왕께서 군대를 원수인 한나라, 위나라에 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왕께서 원수인 한나라, 위나라에게 길을 빌리지 않는다면 반드시 수수(隨水)의 남안으로 진공해야 합니다. 수수의 남안은 큰 하천과 산 그리고 계곡으로 먹을 것이 나지 않는 땅이라 왕께서 차지하신다 해도 차지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왕께서 초나라를 허물었다는 명성은 얻을지 몰라도 실질적으로 땅은 얻지 못한 꼴이 됩니다.
그리고 왕께서 초나라를 공격하는 날에는 네 나라가 죄다 군대를 일으켜 왕에 대응할 것입니다. 진나라와 초나라의 군대가 얽히어서 떨어지지 않고 싸우면 그 틈에 위나라가 군대를 내어 유(留), 방여(方與), 질(銍), 호릉(湖陵), 탕(碭), 소(蕭), 상(相)을 공격하여 과거 송나라의 땅을 전부 차지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제나라는 남쪽으로 초나라를 공격하여 사수(泗水) 유역을 차지할 것이 뻔합니다. 이곳들은 모두 사통팔달의 평원에 기름진 땅인데 결국 저들이 독차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왕께서 초나라를 공격하면 중국에서 한나라와 위나라를 살찌게 하고 제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한나라와 위나라가 강해져서 진나라에 맞서기에 충분합니다. 거기에 제나라가 남쪽으로 사수를 경계로 삼고, 동으로 바다를 끼고, 북으로 황하를 의지하게 되면 아무런 걱정이 없으니 천하에 제나라와 위나라보다 강한 나라가 없게 됩니다. 제나라와 위나라가 지리적 이점을 얻으면 거짓으로 몸을 낮출 것이고, 그렇게 1년 정도가 흐르면 스스로 제왕을 칭하지는 못하더라도 왕께서 제왕이 되려는 것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게 됩니다.
무릇 왕과 같이 넓은 땅, 많은 백성,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한 번의 일로 초나라와 원수가 지고 한나라, 위나라로 하여금 제왕의 호칭을 제나라에다 바치게 만든다면 이는 왕의 실책입니다. 신이 왕을 위해 생각해보니 초나라와 잘 지내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습니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하나로 합쳐 한나라를 상대하면 한나라는 틀림없이 손을 거둘 것입니다. 왕께서 산동의 험준함을 통제하고 곡하(曲河)의 유리함을 차지하면 한나라는 틀림없이 관내의 제후로 남게 됩니다. 이렇게 하고 왕께서 10만 병력으로 (한나라의 도읍) 정(鄭)을 지키면 양씨(위)의 심장은 서늘해지고, 허(許)와 언릉(鄢陵)은 나오지 못하고 성을 지키게 될 것이니 상채(上蔡)와 소릉(召陵)으로 통하는 길은 왕래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위나라 역시 관내의 제후로 남게 되겠지요. 왕께서 오로지 초나라와 잘 지내시면 만승의 나라 두 군주가 관내후가 되고, (진나라는) 제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어 제나라의 서쪽 땅은 손을 모으고도 취할 수 있게 됩니다. 왕의 땅은 서해에서 동해에 이르러 천하를 통제하게 되니 연나라, 조나라는 제나라, 초나라와 연계하지 못하고, 제나라, 초나라는 연나라, 조나라와 연계하지 못합니다. 그런 다음 연나라, 조나라를 위협하여 곧장 제나라, 초나라를 흔들면 이 네 나라는 공격하지 않아도 굴복할 것입니다.”
소왕은 “좋습니다.”라 하고는 백기의 진격을 제지하는 한편 한나라와 위나라에 이를 알렸다. 또 사신을 초나라에 보내 후한 예물로 연맹하기로 약속했다.
황헐이 약속을 받고 초나라로 돌아오자 초나라는 황헐과 태자 완(完)을 진나라에 인질로 보내니 진나라는 그들을 머무르게 한 지 몇 년이 지났다. 초 경양왕이 병이 났으나 태자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초 태자와 진나라의 재상 응후(應侯)는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황헐은 응후에게 유세하길 “상국께서는 정말 초 태자와 사이가 좋습니까?”라고 했다. 응후가 “그렇소.”라고 했다. 황헐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초왕은 아마 일어나지 못할 것 같으니 진나라는 그 태자를 돌려보내느니만 못합니다. 태자가 즉위하면 틀림없이 진나라를 더욱 귀중하게 섬길 것이고 상국에 대한 고마움은 무궁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라끼리 더욱 가까워지면 만승의 나라의 군주 한 사람을 얻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진나라는 초나라의 태자를 돌려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 돌려보내지 않으면 그냥 함양의 한 평민일 뿐입니다. 초나라가 다른 태자를 세우면 진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친한 나라를 잃고 만승의 나라와 화친을 끊는 것은 계책이 아닙니다. 상국께서는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응후가 이를 진왕에게 전했다. 진왕은 “초 태자의 사부를 먼저 보내 초왕의 병을 살피게 하고 돌아온 다음 다시 의논합시다.”라고 했다. 황헐은 초 태자에게 이런 계책을 일러주었다.
“진나라가 태자를 구류시키는 것은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태자께서는 진나라를 이롭게 할 힘이 없고, 이 황헐은 그것이 몹시 걱정됩니다. 그리고 (초나라에는) 양문군(陽文君)의 두 아들이 있는데 왕께서 돌아가시면 태자는 국내에 안 계시니 양문군의 아들이 후계자로 옹립될 것이 분명하니 태자께서는 종묘를 받들 수 없게 됩니다. 진나라에서 도망쳐서 사신들과 함께 나가느니만 못합니다. 신이 남아서 죽음으로 감당하겠습니다.”
이에 초 태자는 초나라로 가는 사신의 마부로 변복을 하고 관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황헐은 숙소에 머무르며 병을 핑계로 사람 만나기를 사절했다. 태자가 이미 멀리 가서 진나라가 뒤쫓을 수 없게 되자 황헐은 자진해서 진 소왕에게 “태자께서는 이미 귀국길에 올라 멀리 가셨습니다. 황헐은 죽어 마땅하니 죽여주십시오.”라고 했다. 소왕이 크게 성을 내며 그의 자살을 받아들이려 했다. 응후가 “황헐은 신하된 몸으로서 자신의 몸으로 자기 군주를 섬겼습니다. 태자가 즉위하면 틀림없이 황헐을 기용할 터이니 죄를 묻지 않고 돌려보내서 초나라와 친하게 지내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진나라는 황헐은 돌려보냈다.
황헐이 초나라로 온 지 석 달, 초 경양왕이 죽고, 태자 완(完)이 즉위하니 이가 고열왕(考烈王)이다.
고열왕 원년에 왕은 황헐을 재상에 등용하고 춘신군(春申君)에 봉하여 회수 이북 땅 열 두 개의 현을 주었다.
그 뒤 15년에 황헐이 초왕에게 “회수 이북 땅은 제나라와 붙어 있어 급한 일이 발생하니 군으로 삼는 것이 편리합니다.”라 하고는 회수 북쪽 열 두 개의 현을 바치면서 강동을 봉지로 요청했다. 고열왕이 이를 허락했다. 춘신군은 이에 옛 오나라 도성 터에 성을 쌓고 자신의 도성으로 삼았다.
춘신군이 초열 두 개의의 재상으로 있을 당시 제열 두 개의에는 맹상군(孟嘗君)이, 조열 두 개의에는 평원군(平原君)이, 위나라에는 신릉군(信陵君)이 있어 다투어 낮은 자세로 인재를 모시고 빈객들을 초청하여 서로 싸우면서 나라의 권력을 장악했다.
춘신군이 초열 두 개의의 재상이 된 지 4년에 진나라가 장평(長平)에서 조나라의 40여 만 군대를 격파했다.
5년에 (진나라는) 한단을 포위했다. 한단은 초나라에 위급함을 알렸고, 초나라는 춘신군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했으나 진나라의 군대가 떠나고 없어 춘신군도 돌아왔다.
춘신군이 초나라의 재상으로 있은 지 8년에 초나라를 위하여 북으로 노(魯)나라를 토벌하여 멸망시켰고, 순경(荀卿; 순자)을 난릉령(蘭陵令)에 임명했다. 이 무렵 초나라는 다시 강해졌다.
조나라의 평원군이 춘신군에게 사람을 보내자, 춘신군은 그들을 상급 관사에 머무르게 했다. 조나라의 사신들은 초나라에서 자신들을 과시하려고 머리에는 대모잠(玳瑁簪)을 꽂고 구슬과 옥 등으로 장식한 칼집을 차고 춘신군의 식객과 만나고자 했다. 춘신군의 식객은 3천이 넘었는데, 그 중 상급 식객들이 모두 구슬로 장식된 신발을 신고 조나라의 사신을 만났더니 조나라의 사신들은 크게 부끄러워했다.
춘신군이 재상이 된 지 14년에 진나라의 장양왕(莊襄王)이 즉위하여 여불위(呂不韋)를 재상으로 삼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했다. 동주(東周)를 취했다.
춘신군이 재상이 된 지 22년에 제후들은 진나라의 시도 때도 없는 공격이 걱정되어 바로 서로 합종하여 서쪽으로 진나라를 치기로 하고 초왕을 종약장으로 삼고 춘신군에게 일을 맡겼다. 함곡관에 이르렀을 때 진나라가 군대를 내어 공격하자 제후의 군대들은 모두 패주했다. 초 고열왕은 춘신군을 나무랐고, 춘신군은 이로부터 (초왕과) 더 멀어졌다.
식객 중에 관진(觀津) 사람 주영(朱英)이라는 자가 춘신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초나라가 강했지만 군이 약하게 만들었다고 여기고 있으나 이 주영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선군 때 진나라는 20년 동안 초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는데 왜 그랬겠습니까? 진나라가 면애(黽隘)라는 요새를 넘어 초나라를 공격하기가 불편했고, 동주와 서주로부터 길을 빌릴 경우에도 한나라와 위나라를 등지고 초나라를 공격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위나라의 멸망이 아침저녁이라 허와 언릉조차 돌볼 겨를이 없으며, 땅을 떼어서 진나라에게 준다고도 합니다. 그럴 경우 진나라의 군대와 진(陳)나라는 불과 160 리 떨어진 상황이라 신이 보게 될 것은 진나라와 초나라가 허구한 날 싸우는 것입니다.”
초나라는 이에 진(陳)나라를 떠나 수춘(壽春)으로 옮겼다. 그러자 진나라는 위(衛)를 야왕(野王)으로 옮기고, 그곳에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춘신군은 이로써 오(吳)에 봉해져 재상의 일을 보았다.
초 고열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춘신군이 이를 걱정하여 아들을 잘 낳을 여자를 여러 명 구해 들여보냈으나 끝내 아들을 보지 못했다. 조나라 사람 이원(李園)이 자신의 여동생을 데리고 와서 그녀를 초왕에게 들여보내려 했으나 왕이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오래 총애를 받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이에 이원은 춘신군을 모시면서 사인(舍人)이 되었다. 한번은 귀가를 요청했다가 일부러 날짜를 놓쳤다. 돌아와 인사를 올리자 춘신군이 늦은 이유를 물었더니 “제왕이 사신을 보내와 나의 누이를 원해서 그 사신과 술을 마시느라 늦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춘신군은 “폐백이 들어왔소?”라고 묻자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춘신군이 “내가 만나 볼 수 있겠소.”라고 하자 “좋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이원은 그 누이를 춘신군에게 들여보냈고, 이내 춘신군의 사랑을 받았다. 누이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자 이원은 바로 그 누이와 공모했다. 이원의 누이는 틈을 타서 춘신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초왕께서 군을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 형제라도 그렇게 못할 것입니다. 지금 군께서 초나라의 재상을 20년 넘게 지내시고 있고, 왕께는 아들이 없습니다. 왕이 돌아가시면 다른 형제가 즉위할 것이고, 초나라의 왕이 바뀌면 자신과 친했던 사람들을 귀하게 여길 것인데, 군께서 어떻게 오래도록 총애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군께서는 오랫동안 귀하신 몸으로 일을 주도해왔기 때문에 왕의 형제들의 불만을 많이 샀을 것입니다. 왕의 형제가 진짜 즉위하면 그 화가 군에게 미칠 것인데 무슨 수로 재상의 도장을 지니고 강동의 봉지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지금 소첩만 임신한 사실을 알고 있지 아무도 모릅니다. 신첩이 군의 사랑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군의 지위로 신첩을 초왕께서 들여 보내주신다면 왕께서는 틀림없이 신첩을 아끼실 것이고, 신첩이 하늘의 도움을 받아 아들을 낳게 되면 군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이니 초나라를 전부 얻을 것입니다. 뜻하지 않은 화를 당하는 것과 어느 쪽이 더 낫겠습니까?”
춘신군은 매우 맞는 말이라고 여겨 곧 이원의 누이를 관사로 내보낸 다음 초왕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했다. 초왕이 불러서 그녀를 예뻐했고, 마침내 아들을 낳아 태자로 세우니 이원의 누이는 왕후가 되었다. 초왕은 또 이원을 중용했고, 이원은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이원은 그 누이를 들여보내 왕후가 되고 아들이 태자가 되자 춘신군이 이 일을 발설하거나 더욱 교만해질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몰래 결사대를 길러 춘신군을 죽여 입을 막으려 했다. 나라 사람들 중 이를 아는 사람이 많았다.
춘신군이 재상이 된 지 25년에 초 고열왕이 병이 났다. 주영은 춘신군에게 “세상에는 바라지 않던 복이 있을 수도 있고, 바라지 않는 화가 닥칠 수도 있습니다. 지금 군께서는 바라지 않던 세상에 있고, 바라지 않는 군주를 섬기고 계신데 어찌 하여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했다. 춘신군이 “바라지 않던 복이란 무슨 말이오?”라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군께서 초나라의 재상으로 20년 넘게 계셨는데 이름이 재상이지 실은 초왕이었습니다. 지금 초왕께서 병이 나서 죽을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그럴 경우 군께서는 재상으로 어린 군주를 대신하여 국정을 담당하실 터이니 이는 이윤(伊尹), 주공(周公)과 같습니다. 왕이 장성하여 정권을 돌려줄 때도 그렇게 하기 싫으면 남면하여 왕으로 칭하고 초나라를 가지면 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바라지 않던 복이란 것입니다.”
춘신군은 “그럼 바라지 않는 화란 무엇이오?”라고 했다. 주영이 “이원은 나라를 다스리지 않고 있지만 군의 맞수입니다. 군대는 없지만 결사대를 기른 지 오래입니다. 초왕께서 돌아가시면 이원은 틀림없이 먼저 들어가 권력을 차지하고 군을 죽여서 입을 막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바라지 않는 화란 것입니다.”라고 했다. 춘신군이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란 무슨 말이오?”라고 하자 주영은 “군께서는 신을 낭중(郎中)으로 임명해주십시오. 초왕이 돌아가시면 이원은 틀림없이 먼저 궁궐로 들어올 것이니 신이 군을 위하여 이원을 죽이겠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생각지도 못한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춘신군은 “그대는 그만 하시오. 이원은 약한 사람이고 내가 또 잘 해주고 있는데 어찌 그렇게 하겠소.”라고 했다. 주영은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그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이 두려워 바로 도망쳤다.
그로부터 17일 뒤에 초 고열왕이 죽었다. 이원이 과연 먼저 궁궐에 진입하여 결사대를 극문(棘門) 안에 매복시켰다. 춘신군이 극문을 들어서자 이원의 결사대는 춘신군을 찌르고 그 머리를 베어 극문 밖으로 던졌다. 이어 사람을 시켜 춘신군의 집안을 모조리 없앴다. 그리고 이원의 누이는 처음 춘신군의 총애를 받아 임신한 다음 왕궁에 들어가 낳은 아들이 즉위하니 이가 초 유왕(幽王)이다.
이해가 진시황(秦始皇) 즉위 9년이었는데, 노애(嫪毐)가 또 진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발각되어 삼족이 몰살당했고, 여불위(呂不韋)가 쫓겨났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초나라에 가서 춘신군의 옛 성을 보았는데 궁실이 호화로웠다. 당초 춘신군이 진 소왕에게 유세하고, 그 몸을 희생해가며 초 태자를 돌려보냈으니 얼마나 지혜로웠던가! 그 뒤 이원에게 통제 당했으니, 어리석구나. 속담에 ‘잘라야 할 때 자르지 못하면 도리어 그 환란을 당한다.’고 했다. 춘신군이 주영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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