范睢蔡澤列傳
范睢者,魏人也,字叔。游說諸侯,欲事魏王,家貧無以自資,乃先事魏中大夫須賈。
須賈為魏昭王使於齊,范睢從。留數月,未得報。齊襄王聞睢辯口,乃使人賜睢金十斤及牛酒,睢辭謝不敢受。須賈知之,大怒,以為睢持魏國陰事告齊,故得此饋,令睢受其牛酒,還其金。既歸,心怒睢,以告魏相。魏相,魏之諸公子,曰魏齊。魏齊大怒,使舍人笞擊睢,折脅摺齒。睢詳死,即卷以簀,置廁中。賓客飲者醉,更溺睢,故僇辱以懲後,令無妄言者。睢從簀中謂守者曰:「公能出我,我必厚謝公。」守者乃請出棄簀中死人。魏齊醉,曰:「可矣。」范睢得出。後魏齊悔,復召求之。魏人鄭安平聞之,乃遂操范睢亡,伏匿,更名姓曰張祿。
當此時,秦昭王使謁者王稽於魏。鄭安平詐為卒,侍王稽。王稽問:「魏有賢人可與俱西游者乎?」鄭安平曰:「臣里中有張祿先生,欲見君,言天下事。其人有仇,不敢晝見。」王稽曰:「夜與俱來。」鄭安平夜與張祿見王稽。語未究,王稽知范睢賢,謂曰:「先生待我於三亭之南。」與私約而去。
王稽辭魏去,過載范睢入秦。至湖,望見車騎從西來。范睢曰:「彼來者為誰?」王稽曰:「秦相穰侯東行縣邑。」范睢曰:「吾聞穰侯專秦權,惡內諸侯客,此恐辱我,我寧且匿車中。」有頃,穰侯果至,勞王稽,因立車而語曰:「關東有何變?」曰:「無有。」又謂王稽曰:「謁君得無與諸侯客子俱來乎?無益,徒亂人國耳。」王稽曰:「不敢。」即別去。范睢曰:「吾聞穰侯智士也,其見事遲,鄉者疑車中有人,忘索之。」於是范睢下車走,曰:「此必悔之。」行十餘里,果使騎還索車中,無客,乃已。王稽遂與范睢入咸陽。
已報使,因言曰:「魏有張祿先生,天下辯士也。曰『秦王之國危於累卵,得臣則安。然不可以書傳也』。臣故載來。」秦王弗信,使舍食草具。待命歲餘。
當是時,昭王已立三十六年。南拔楚之鄢郢,楚懷王幽死於秦。秦東破齊。湣王嘗稱帝,後去之。數困三晉。厭天下辯士,無所信。
穰侯,華陽君,昭王母宣太后之弟也;而涇陽君、高陵君皆昭王同母弟也。穰侯相,三人者更將,有封邑,以太后故,私家富重於王室。及穰侯為秦將,且欲越韓、魏而伐齊綱壽,欲以廣其陶封。范睢乃上書曰:
臣聞明主立政,有功者不得不賞,有能者不得不官,勞大者其祿厚,功多者其爵尊,能治眾者其官大。故無能者不敢當職焉,有能者亦不得蔽隱。使以臣之言為可,願行而益利其道;以臣之言為不可,久留臣無為也。語曰:「庸主賞所愛而罰所惡;明主則不然,賞必加於有功,而刑必斷於有罪。」今臣之胸不足以當椹質,而要不足以待斧鉞,豈敢以疑事嘗試於王哉!雖以臣為賤人而輕辱,獨不重任臣者之無反復於王邪?
且臣聞周有砥砨,宋有結綠,梁有縣藜,楚有和樸,此四寶者,土之所生,良工之所失也,而為天下名器。然則聖王之所棄者,獨不足以厚國家乎?
臣聞善厚家者取之於國,善厚國者取之於諸侯。天下有明主則諸侯不得擅厚者,何也?為其割榮也。良醫知病人之死生,而聖主明於成敗之事,利則行之,害則捨之,疑則少嘗之,雖舜禹復生,弗能改已。語之至者,臣不敢載之於書,其淺者又不足聽也。意者臣愚而不概於王心邪?亡其言臣者賤而不可用乎?自非然者,臣願得少賜游觀之閒,望見顏色。一語無效,請伏斧質。
於是秦昭王大說,乃謝王稽,使以傳車召范睢。
於是范睢乃得見於離宮,詳為不知永巷而入其中。王來而宦者怒,逐之,曰:「王至!」范睢繆為曰:「秦安得王?秦獨有太后、穰侯耳。」欲以感怒昭王。昭王至,聞其與宦者爭言,遂延迎,謝曰:「寡人宜以身受命久矣,會義渠之事急,寡人旦暮自請太后;今義渠之事已,寡人乃得受命。竊閔然不敏,敬執賓主之禮。」范睢辭讓。是日觀范睢之見者,群臣莫不灑然變色易容者。
秦王屏左右,宮中虛無人。秦王跽而請曰:「先生何以幸教寡人?」范睢曰:「唯唯。」有閒,秦王復跽而請曰:「先生何以幸教寡人?」范睢曰:「唯唯。」若是者三。秦王跽曰:「先生卒不幸教寡人邪?」范睢曰:「非敢然也。臣聞昔者呂尚之遇文王也,身為漁父而釣於渭濱耳。若是者,交疏也。已說而立為太師,載與俱歸者,其言深也。故文王遂收功於呂尚而卒王天下。鄉使文王疏呂尚而不與深言,是周無天子之德,而文武無與成其王業也。今臣羈旅之臣也,交疏於王,而所願陳者皆匡君之事,處人骨肉之閒,願效愚忠而未知王之心也。此所以王三問而不敢對者也。臣非有畏而不敢言也。臣知今日言之於前而明日伏誅於後,然臣不敢避也。大王信行臣之言,死不足以為臣患,亡不足以為臣憂,漆身為厲被髪為狂不足以為臣恥。且以五帝之聖焉而死,三王之仁焉而死,五伯之賢焉而死,烏獲、任鄙之力焉而死,成荊、孟賁、王慶忌、夏育之勇焉而死。死者,人之所必不免也。處必然之勢,可以少有補於秦,此臣之所大願也,臣又何患哉!伍子胥橐載而出昭關,夜行晝伏,至於陵水,無以糊其口,厀行蒲伏,稽首肉袒,鼓腹吹篪,乞食於吳市,卒興吳國,闔閭為伯。使臣得盡謀如伍子胥,加之以幽囚,終身不復見,是臣之說行也,臣又何憂?箕子、接輿漆身為厲,被髪為狂,無益於主。假使臣得同行於箕子,可以有補於所賢之主,是臣之大榮也,臣有何恥?臣之所恐者,獨恐臣死之後,天下見臣之盡忠而身死,因以是杜口裹足,莫肯鄉秦耳。足下上畏太后之嚴,下惑於姦臣之態,居深宮之中,不離阿保之手,終身迷惑,無與昭姦。大者宗廟滅覆,小者身以孤危,此臣之所恐耳。若夫窮辱之事,死亡之患,臣不敢畏也。臣死而秦治,是臣死賢於生。」秦王跽曰:「先生是何言也!夫秦國辟遠,寡人愚不肖,先生乃幸辱至於此,是天以寡人慁先生而存先王之宗廟也。寡人得受命於先生,是天所以幸先王,而不棄其孤也。先生柰何而言若是!事無小大,上及太后,下至大臣,願先生悉以教寡人,無疑寡人也。」范睢拜,秦王亦拜。
范睢曰:「大王之國,四塞以為固,北有甘泉、谷口,南帶涇、渭,右隴、蜀,左關、阪,奮擊百萬,戰車千乘,利則出攻,不利則入守,此王者之地也。民怯於私鬬而勇於公戰,此王者之民也。王并此二者而有之。夫以秦卒之勇,車騎之眾,以治諸侯,譬若施韓盧而搏蹇兔也,霸王之業可致也,而群臣莫當其位。至今閉關十五年,不敢窺兵於山東者,是穰侯為秦謀不忠,而大王之計有所失也。」秦王跽曰:「寡人願聞失計。」
然左右多竊聽者,范睢恐,未敢言內,先言外事,以觀秦王之俯仰。因進曰:「夫穰侯越韓、魏而攻齊綱壽,非計也。少出師則不足以傷齊,多出師則害於秦。臣意王之計,欲少出師而悉韓、魏之兵也,則不義矣。今見與國之不親也,越人之國而攻,可乎?其於計疏矣。且昔齊湣王南攻楚,破軍殺將,再辟地千里,而齊尺寸之地無得焉者,豈不欲得地哉,形勢不能有也。諸侯見齊之罷獘,君臣之不和也,興兵而伐齊,大破之。士辱兵頓,皆咎其王,曰:『誰為此計者乎?』王曰:『文子為之。』大臣作亂,文子出走。攻齊所以大破者,以其伐楚而肥韓、魏也。此所謂借賊兵而齎盜糧者也。王不如遠交而近攻,得寸則王之寸也,得尺亦王之尺也。今釋此而遠攻,不亦繆乎!且昔者中山之國地方五百里,趙獨吞之,功成名立而利附焉,天下莫之能害也。今夫韓、魏,中國之處而天下之樞也,王其欲霸,必親中國以為天下樞,以威楚、趙。楚彊則附趙,趙彊則附楚,楚、趙皆附,齊必懼矣。齊懼,必卑辭重幣以事秦。齊附而韓、魏因可虜也。」昭王曰:「吾欲親魏久矣,而魏多變之國也,寡人不能親。請問親魏柰何?」對曰:「王卑詞重幣以事之;不可,則割地而賂之;不可,因舉兵而伐之。」王曰:「寡人敬聞命矣。」乃拜范睢為客卿,謀兵事。卒聽范睢謀,使五大夫綰伐魏,拔懷。後二歲,拔邢丘。
客卿范睢復說昭王曰:「秦韓之地形,相錯如繡。秦之有韓也,譬如木之有蠹也,人之有心腹之病也。天下無變則已,天下有變,其為秦患者孰大於韓乎?王不如收韓。」昭王曰:「吾固欲收韓,韓不聽,為之柰何?」對曰:「韓安得無聽乎?王下兵而攻滎陽,則鞏、成皋之道不通;北斷太行之道,則上黨之師不下。王一興兵而攻滎陽,則其國斷而為三。夫韓見必亡,安得不聽乎?若韓聽,而霸事因可慮矣。」王曰:「善。」且欲發使於韓。
范睢日益親,復說用數年矣,因請閒說曰:「臣居山東時,聞齊之有田文,不聞其有王也;聞秦之有太后、穰侯、華陽、高陵、涇陽,不聞其有王也。夫擅國之謂王,能利害之謂王,制殺生之威之謂王。今太后擅行不顧,穰侯出使不報,華陽、涇陽等擊斷無諱,高陵進退不請。四貴備而國不危者,未之有也。為此四貴者下,乃所謂無王也。然則權安得不傾,令安得從王出乎?臣聞善治國者,乃內固其威而外重其權。穰侯使者操王之重,決制於諸侯,剖符於天下,政適伐國,莫敢不聽。戰勝攻取則利歸於陶,國獘御於諸侯;戰敗則結怨於百姓,而禍歸於社稷。《詩》曰『木實繁者披其枝,披其枝者傷其心;大其都者危其國,尊其臣者卑其主』。崔杼、淖齒管齊,射王股,擢王筋,縣之於廟梁,宿昔而死。李兌管趙,囚主父於沙丘,百日而餓死。今臣聞秦太后、穰侯用事,高陵、華陽、涇陽佐之,卒無秦王,此亦淖齒、李兌之類也。且夫三代所以亡國者,君專授政,縱酒馳騁弋獵,不聽政事。其所授者,妒賢嫉能,御下蔽上,以成其私,不為主計,而主不覺悟,故失其國。今自有秩以上至諸大吏,下及王左右,無非相國之人者。見王獨立於朝,臣竊為王恐,萬世之後,有秦國者非王子孫也。」昭王聞之大懼,曰:「善。」於是廢太后,逐穰侯、高陵、華陽、涇陽君於關外。秦王乃拜范睢為相。收穰侯之印,使歸陶,因使縣官給車牛以徙,千乘有餘。到關,關閱其寶器,寶器珍怪多於王室。
秦封范睢以應,號為應侯。當是時,秦昭王四十一年也。
范睢既相秦,秦號曰張祿,而魏不知,以為范睢已死久矣。魏聞秦且東伐韓、魏,魏使須賈於秦。范睢聞之,為微行,敝衣閒步之邸,見須賈。須賈見之而驚曰:「范叔固無恙乎!」范睢曰:「然。」須賈笑曰:「范叔有說於秦邪?」曰:「不也。睢前日得過於魏相,故亡逃至此,安敢說乎!」須賈曰:「今叔何事?」范睢曰「臣為人庸賃。」須賈意哀之,留與坐飲食,曰:「范叔一寒如此哉!」乃取其一綈袍以賜之。須賈因問曰:「秦相張君,公知之乎?吾聞幸於王,天下之事皆決於相君。今吾事之去留在張君。孺子豈有客習於相君者哉?」范睢曰:「主人翁習知之。唯睢亦得謁,睢請為見君於張君。」須賈曰:「吾馬病,車軸折,非大車駟馬,吾固不出。」范睢曰:「願為君借大車駟馬於主人翁。」
范睢歸取大車駟馬,為須賈御之,入秦相府。府中望見,有識者皆避匿。須賈怪之。至相舍門,謂須賈曰:「待我,我為君先入通於相君。」須賈待門下,持車良久,問門下曰:「范叔不出,何也?」門下曰:「無范叔。」須賈曰:「鄉者與我載而入者。」門下曰:「乃吾相張君也。」須賈大驚,自知見賣,乃肉袒厀行,因門下人謝罪。於是范睢盛帷帳,待者甚眾,見之。須賈頓首言死罪,曰:「賈不意君能自致於青雲之上,賈不敢復讀天下之書,不敢復與天下之事。賈有湯鑊之罪,請自屏於胡貉之地,唯君死生之!」范睢曰:「汝罪有幾?」曰:「擢賈之發以續賈之罪,尚未足。」范睢曰:「汝罪有三耳。昔者楚昭王時而申包胥為楚卻吳軍,楚王封之以荊五千戶,包胥辭不受,為丘墓之寄於荊也。今睢之先人丘墓亦在魏,公前以睢為有外心於齊而惡睢於魏齊,公之罪一也。當魏齊辱我於廁中,公不止,罪二也。更醉而溺我,公其何忍乎?罪三矣。然公之所以得無死者,以綈袍戀戀,有故人之意,故釋公。」乃謝罷。入言之昭王,罷歸須賈。
須賈辭於范睢,范睢大供具,盡請諸侯使,與坐堂上,食飲甚設。而坐須賈於堂下,置莝豆其前,令兩黥徒夾而馬食之。數曰:「為我告魏王,急持魏齊頭來!不然者,我且屠大梁。」須賈歸,以告魏齊。魏齊恐,亡走趙。匿平原君所。
范睢既相,王稽謂范睢曰:「事有不可知者三,有不柰何者亦三。宮車一日晏駕,是事之不可知者一也。君卒然捐館舍,是事之不可知者二也。使臣卒然填溝壑,是事之不可知者三也。宮車一日晏駕,君雖恨於臣,無可柰何。君卒然捐館舍,君雖恨於臣,亦無可柰何。使臣卒然填溝壑,君雖恨於臣,亦無可柰何。」范睢不懌,乃入言於王曰:「非王稽之忠,莫能內臣於函谷關;非大王之賢聖,莫能貴臣。今臣官至於相,爵在列侯,王稽之官尚止於謁者,非其內臣之意也。」昭王召王稽,拜為河東守,三歲不上計。又任鄭安平,昭王以為將軍。范睢於是散家財物,盡以報所嘗困戹者。一飯之德必償,睚眥之怨必報。
范睢相秦二年,秦昭王之四十二年,東伐韓少曲、高平,拔之。
秦昭王聞魏齊在平原君所,欲為范睢必報其仇,乃詳為好書遺平原君曰;「寡人聞君之高義,願與君為布衣之友,君幸過寡人,寡人願與君為十日之飲。」平原君畏秦,且以為然,而入秦見昭王。昭王與平原君飲數日,昭王謂平原君曰:「昔周文王得呂尚以為太公,齊桓公得管夷吾以為仲父,今范君亦寡人之叔父也。范君之仇在君之家,願使人歸取其頭來;不然,吾不出君於關。」平原君曰:「貴而為交者,為賤也;富而為交者,為貧也。夫魏齊者,勝之友也,在,固不出也,今又不在臣所。」昭王乃遺趙王書曰:「王之弟在秦,范君之仇魏齊在平原君之家。王使人疾持其頭來;不然,吾舉兵而伐趙,又不出王之弟於關。」趙孝成王乃發卒圍平原君家,急,魏齊夜亡出,見趙相虞卿。虞卿度趙王終不可說,乃解其相印,與魏齊亡,閒行,念諸侯莫可以急抵者,乃復走大梁,欲因信陵君以走楚。信陵君聞之,畏秦,猶豫未肯見,曰:「虞卿何如人也?」時侯嬴在旁,曰:「人固未易知,知人亦未易也。夫虞卿躡屩檐簦,一見趙王,賜白璧一雙,黃金百鎰;再見,拜為上卿;三見,卒受相印,封萬戶侯。當此之時,天下爭知之。夫魏齊窮困過虞卿,虞卿不敢重爵祿之尊,解相印,捐萬戶侯而閒行。急士之窮而歸公子,公子曰『何如人』。人固不易知,知人亦未易也!」信陵君大慚,駕如野迎之。魏齊聞信陵君之初難見之,怒而自剄。趙王聞之,卒取其頭予秦。秦昭王乃出平原君歸趙。
昭王四十三年,秦攻韓汾陘,拔之,因城河上廣武。
後五年,昭王用應侯謀,縱反閒賣趙,趙以其故,令馬服子代廉頗將。秦大破趙於長平,遂圍邯鄲。已而與武安君白起有隙,言而殺之。任鄭安平,使擊趙。鄭安平為趙所圍,急,以兵二萬人降趙。應侯席槁請罪。秦之法,任人而所任不善者,各以其罪罪之。於是應侯罪當收三族。秦昭王恐傷應侯之意,乃下令國中:「有敢言鄭安平事者,以其罪罪之。」而加賜相國應侯食物日益厚,以順適其意。後二歲,王稽為河東守,與諸侯通,坐法誅。而應侯日益以不懌。
昭王臨朝嘆息,應侯進曰:「臣聞『主憂臣辱,主辱臣死』。今大王中朝而憂,臣敢請其罪。」昭王曰:「吾聞楚之鐵劍利而倡優拙。夫鐵劍利則士勇,倡優拙則思慮遠。夫以遠思慮而御勇士,吾恐楚之圖秦也。夫物不素具,不可以應卒,今武安君既死,而鄭安平等畔,內無良將而外多敵國,吾是以憂。」欲以激勵應侯。應侯懼,不知所出。蔡澤聞之,往入秦也。
범수(范睢)는 위(魏)나라 사람으로 자를 숙(叔)이라 했다. 범수는 제후들에게 유세하며 위왕을 섬기려 했으나 집이 가난하여 활동 경비를 마련할 수 없어 먼저 위나라의 중대부 수고(須賈)를 섬겼다.
수고가 위 소왕(昭王)의 사신으로 제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범수가 수행했다. 몇 달을 체류했으나 회답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제 양왕(襄王)은 범수가 언변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는 사람을 보내 열 근의 금과 소, 술을 보냈다. 범수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수고가 이를 알고는 크게 노했다. 범수가 위나라의 은밀한 일을 알렸기 때문에 이런 선물을 받았다고 여겨서 범수에게 소와 술은 받되 금은 돌려주게 했다.
돌아와서 (수고는) 마음으로 범수를 미워하여 위나라의 재상에게 이를 보고했다. 위나라의 재상은 위나라의 공자들 중 하나인 위제(魏齊)였다. 위제는 크게 화를 내며 사인(舍人)을 시켜 범수에게 매질을 가해 갈비뼈와 이빨을 부러뜨렸다. 범수가 죽은 척하자 대자리로 말아서 변소에다 버렸다. 술에 취한 빈객들이 범수에게 돌아가며 오줌을 갈렸다. 부러 모욕을 주어 뒷사람에게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징계로 삼았다.
범수는 대자리에 싸인 채 간수에게 “그대가 나를 빼내주면 내 반드시 그대에게 크게 갚을 것이오.”라고 했다. 간수는 바로 위제에게 대자리 안의 시신을 버려야겠다고 청했다. 위제는 술에 취해 “그렇게 하라”고 했다. 범수가 탈출했다. 위제가 후회가 되어 다시 사람을 불러 범수를 찾게 했다. 위나라 사람 정안평(鄭安平)이 이를 듣고 바로 범수를 데리고 도망쳐서 숨긴 다음 성과 이름을 장록(張祿)으로 고치게 했다.
이때, 진(秦) 소왕(昭王)이 알자(謁者) 왕계(王稽)를 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정안평은 포졸로 위장하여 왕계를 모셨다. 왕계가 “위나라에 나와 함께 서쪽으로 유세할 만한 유능한 사람이 있소?”라고 물었다. 정안평이 “신의 마을에 장록 선생이 있는데 군을 만나 천하의 일을 말씀드리고 싶어 합니다만 그 사람에게 원수가 있어 낮에는 함부로 나올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왕계는 “밤에 함께 오시오”라고 했다. 정안평이 밤에 장록과 함께 왕계를 만났다. 말을 다 마치기 전에 왕계는 범수가 유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선생께서는 삼정(三亭) 남쪽에서 나를 기다리시오”라는 은밀한 약속을 하고 떠났다.
왕계가 인사를 하고 위를 떠나 지나가다가 범수를 태우고 진나라로 들어갔다. 호현(湖縣)에 이르자 서쪽에서 마차가 오는 것이 보였다. 범수가 “저기 오는 사람이 누구입니까?”라고 하자 왕계는 “진나라의 재상 양후(穰侯)가 동쪽의 현과 읍을 순찰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범수가 “제가 듣기에 양후가 진나라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고 제후국 빈객들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한다고 하던데, 저 사람이 저를 욕보일지 모르니 저는 잠시 수레에 숨어 있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했다. 이윽고 양후가 정말 다가와서 왕계를 위로하면서 수레를 멈추고는 “관동(關東)에 무슨 변화가 있소?”라고 하자 왕계는 “없습니다.”라고 했다. 또 왕계에게 “알자 그대도 제후의 유세객 따위를 데리고 온 것은 아니겠죠? 무익하고 백성과 나라를 어지럽힐 뿐이오.”라고 했다. 왕계는 “어찌 감히”라 하고는 바로 헤어져 자리를 떠났다.
범수는 “제가 듣기에 양후가 지혜롭다고 하더니 일에 대한 반응이 늦군요. 방금 수레 안에 사람이 있는지 의심해놓고 수색하는 것은 잊었으니 말입니다.”라 했다. 그리고 범수는 수레에서 내려 걸으면서 “저 사람이 틀림없이 후회할 겁니다.”라고 했다. 10여 리쯤 가자 과연 기마병을 시켜 수레를 다시 뒤졌다. 유세객이 없자 그만두었다. 왕계는 마침내 범수와 함께 함양에 들어왔다.
(왕계는) 사신 갔다 온 일을 보고하는 틈을 타서 “위에 장록선생이란 분이 있는데 천하의 변사(유세가)입니다. 그가 말하길 ‘진왕의 나라가 달걀을 쌓아놓은 듯 위태로운데 신을 얻으면 안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글로는 전할 수 없습니다.’라 하길래 신이 데리고 왔습니다.”라고 했다. 진왕은 믿지 않았지만 객사와 보잘 것 없는 식사를 갖추어 주게 했다. 그렇게 1년 넘게 명을 기다렸다.
당시는 소왕이 즉위한 지 36년이 지났다. 남으로 초나라의 언영을 빼앗았고, 초 회왕은 진나라에 억류되어 있다가 죽었다. 진나라는 동쪽으로 제나라를 격파했다. 제 민왕이 한때 제(帝)로 자칭하다가 그 뒤에 포기했다. 여러 차례 삼진(한, 조, 위)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천하의 변사를 싫어하여 믿지 않았다.
양후(穰侯)와 화양군(華陽君)은 소왕의 어머니 선태후(宣太后)의 동생이었고, 경양군(涇陽君)과 고릉군(高陵君)은 소왕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동생이었다. 양후는 재상이 되고, 세 사람은 돌아가며 장군이 되어 봉읍을 가졌고, 태후 때문에 각자 집안의 부가 왕실보다 더 부유했다. 양후가 진의 장수가 되어서는 한, 위나라를 넘어 제나라의 강읍(綱邑)과 수읍(壽邑)을 공격해 자신의 봉읍인 도읍(陶邑)을 넓히고자 했다. 범수가 이에 글을 올려 이렇게 말했다.
“신이 듣기에 현명한 군주가 정치를 하면 공이 있는 사람은 상을 받을 수밖에 없고 능력이 있는 자는 관직을 얻지 않을 수 없으며, 공로가 큰 사람은 후한 녹봉을 받으며, 공이 많은 사람은 귀한 작위를 얻게 되며, 백성을 잘 다스리는 자는 높은 벼슬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재능이 없는 자는 감히 관직을 맡지 못하고, 능력이 있는 자 또한 그 능력을 감추지 못합니다. 신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시면 실행하여 다스림에 이익이 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신의 말씀이 옳지 않다면 신을 이곳에 머물게 해봤자 쓸모가 없습니다.
속담에 ‘못난 군주는 자신이 예뻐하는 자에게 상을 주고 미워하는 사람에게 벌을 준다. 영명한 군주는 그렇지 않으니 상은 반드시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고, 형벌은 반드시 죄가 있는 자에게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지금 신의 가슴은 형틀을 감당하기에 부족하고, 허리는 큰 도끼를 받기에 부족한데 어찌 감히 확실치 않은 일로 왕을 시험하겠습니까? 신은 천한 자라 신을 경시하고 욕을 보인다 하더라도 신을 중용한 사람이 왕을 배반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신은 주(周)나라에는 지액(砥砨)이, 송(宋)나라에는 결록(結綠)이, 양(梁)나라에는 현려(縣藜)가, 초(楚)나라에는 화박(和朴)이라는 흙에서 난 네 보물이 있었는데 뛰어난 장인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천하의 이름난 기물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성왕에게 버림받은 자라고 해서 유독 나라에 도움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집안을 부유하게 할 사람은 나라에서 취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할 사람은 제후들에게서 취한다고 들었습니다. 천하에 영명한 군주가 있으면 제후들이 마음대로 부유해질 수 없는데 왜 그렇겠습니까? 군주가 제후의 권력을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의사가 환자의 생사를 알듯이 성군은 일의 성공과 실패를 잘 살펴서 이익이 되면 실행하고 손해가 되면 버리며, 의심스러우면 작게 시험해봅니다. 이는 순이나 우 임금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신이 감히 글에 담지 못했으며, 천박한 말들은 또 들으시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신이 어리석어 왕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면 신을 추천한 사람이 천해서 믿을 수 없으신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신은 (왕께서) 한가한 틈을 타서 잠시 얼굴이라도 뵙길 원하옵니다. 단 한 마디라도 쓸모가 없으면 도끼날에 엎어질 것입니다.”
이에 진 소왕은 크게 기뻐하며 곧 왕계에게 사과하고 전거(傳車)를 보내 범수를 불렀다. 이에 범수는 이궁(離宮)에서 (왕을) 만나게 되었는데 일부러 길을 모르는 척 내궁을 들어갔다. 왕이 도착하자 환관이 화를 내며 범수를 내쫓으면서 “왕께서 이르셨다”고 했다. 범수는 자기 멋대로 “진나라에 왕이 어디 있느냐? 진나라에는 오직 태후와 양후만 있을 뿐이지.”라고 지껄여서 소왕을 화나게 하려고 했다.
소왕이 도착해서 범수가 환관과 말다툼하는 소리를 듣고는 그를 맞이하여 “과인이 일찌감치 몸소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데 의거(義渠)의 일이 급하고, 과인이 또 아침저녁으로 몸소 태후의 명을 받아야 해서요. 지금 의거의 일이 마무리되어 과인이 이에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몸이 어리석고 민첩하지 못하나 삼가 주객의 예로 모시고자 합니다.”라며 사과했다. 범수는 사양했다.
이날 범수의 접견을 본 신하들로서 숙연하게 얼굴색을 바꾸지 않는 자는 없었다. 진왕은 좌우를 물리치고 궁중에 아무도 들이지 못하게 했다. 진왕은 무릎을 꿇고 “선생께서는 과인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시려는지요?”라고 청했다. 범수는 “네, 네”라고만 했다. 잠시 뒤 진왕은 다시 무릎을 꿇으며 “선생께서는 과인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시려는지요?”라고 청했다. 범수는 또 “네, 네”라고만 했다. 이렇게 하길 세 번이나 했다. 진왕이 무릎을 꿇으며 “선생께서는 끝내 과인에게 가르침을 주시지 않으시렵니까?”라고 하자 범수는 이렇게 말했다.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신이 듣기에 옛날 여상(呂尙)이 문왕(文王)을 만났을 때 그는 어부로서 위수 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두 사람은) 그처럼 멀었습니다만 이야기를 나누고는 태사(太師)로 세우고 수레에 함께 태워 돌아왔을 만큼 그 말이 깊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문왕은 여상을 통해 공을 세워 마침내 천하의 왕이 되었습니다. 만약 문왕이 여상을 멀리하여 더불어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주에게 천자의 덕은 없었을 것이며, 문왕과 무왕도 그 왕업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신은 여기에 살고 있는 외국인으로 왕과는 어떤 교분도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모두 왕의 일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자 골육 사이의 일을 논의하고자 하는 것으로, 어리석은 충정을 다하고자 하나 왕의 마음을 잘 모릅니다. 이것이 왕께서 세 번 물으셨으나 감히 대답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신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감히 말하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신은 오늘 앞에서 말하고 내일 뒤에서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만 신은 피하지 않겠습니다. 대왕께서 신의 말씀을 믿고 실행하신다면 죽는다 해도 신은 걱정하지 않을 것이며, 쫓겨난다 해도 신은 근심하지 않을 것이고, 몸에 옻칠을 하고 행려병자가 되거나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치광이가 되더라도 신은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인 같은 오제(五帝)도 죽었고, 어진 삼왕(三王)도 죽었으며, 현명했던 오패(五覇)도 죽었습니다. 오획(烏獲)이나 임비(任鄙)와 같은 장사도 죽었고, 성형(成荊), 맹분(孟賁), 왕경기(王慶忌), 하육(夏育) 같이 용맹한 자들도 죽었습니다. 죽음은 사람이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필연적인 기세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진나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것이 신이 가장 바라는 것이거늘 신이 또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오자서(伍子胥)는 자루에 숨어 소관(昭關)을 빠져나와 밤에는 걷고 낮에는 숨으면서 능수(陵水)에 이르렀으나 먹을 것이 없어 무릎으로 기고 웃통을 벗고 머리를 조아렸으며 배를 두드리고 피리를 불며 오나라 저잣거리에서 구걸했으나 끝내는 오나라를 일으키고 합려를 패자로 만들었습니다. 신으로 하여금 오자서처럼 모략을 다 짜낼 수 있게 해주신다면 옥에 갇혀 평생 다시는 뵈옵지 못한다 하더라도 신의 말씀이 실행될 터이니 신이 또 무엇을 걱정하오리까?
기자(箕子)와 접여(接輿)는 몸에 옻칠을 하고 행려병자 행세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치광이로 꾸몄지만 군주에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만약 신이 기자처럼 행동하여 현명하신 군주에게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이는 신의 큰 영광이니 신이 무엇을 부끄러워하겠습니까? 신이 두려워하는, 오로지 두려워하는 것이라면 신이 죽은 뒤 천하가 신이 충성을 다하고도 죽은 것을 보고 입은 다물고 발은 묶어 진으로 오려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왕께서 위로는 태후의 위엄을 겁내고 아래로는 간신들의 자태에 혹하시고, 깊은 궁궐에 기거하시면서 시종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해 평생토록 미혹되어 간신을 가려내지 못하신다면 크게는 종묘가 없어지고 작게는 몸이 외롭고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궁하고 치욕스러운 일, 죽음의 두려움, 신은 겁내지 않습니다. 신이 죽어 진나라가 잘 다스려진다면, 이는 신의 죽음이 삶보다 나은 것입니다.”
진왕이 무릎을 꿇은 채 이렇게 말했다.
“선생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진나라는 궁벽한 곳에 떨어져 있고, 과인은 어리석고 불초합니다. 선생께서 치욕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온 것은 하늘이 과인에게 선생 덕분에 선왕의 종묘를 보존케 하신 것입니다. 과인이 선생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이는 하늘이 선왕을 어여삐 여기시어 그 고아를 버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어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일에는 크고 작은 것이 없습니다. 위로는 태후, 아래로는 대신들에 이르기까지 선생께서 무엇이든 과인에게 가르침을 주시길 바라니 과인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범수가 절하자 진왕도 절했다. 범수가 말했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요새로 견고합니다. 북으로는 감천(甘泉)과 곡구(谷口)가, 남쪽에는 경수(涇水)와 위수(渭水)가, 서쪽으로는 농산(隴山)과 촉산(蜀山)이, 동쪽으로는 함곡관(函谷關)과 판(阪)이 있습니다. 용맹한 용사가 백만 에, 전차가 1천 승입니다. 백성들은 사사로운 싸움에는 겁을 먹지만 나라의 전쟁에는 용감합니다. 이것이 왕의 백성입니다. 왕께서는 이 둘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대저 진나라가 용맹한 병사에 많은 전차와 기마로 제후들을 다스리는 것은 마치 한로(韓盧)가 절뚝거리는 토끼를 잡는 것과 같아 패왕(覇王)의 업은 충분히 가능합니다만 신하들이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함곡관을 닫은 지 15년, 군대를 일으켜 감히 산동을 엿보지 못하는 것은 양후가 진나라를 위해 충정으로 계책을 내지 않는 것과 대왕의 계책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진왕이 무릎을 꿇으며 “과인의 잘못된 계책에 대해 들길 바랍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좌우에 몰래 엿듣는 자가 많아 범수는 두려워 감히 내부 일은 말하지 않고 바깥일을 먼저 말하면서 진왕의 태도를 살폈다. 그리고는 앞으로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양후가 한나라와 위나라를 넘어 제나라의 강읍(綱邑)과 수읍(壽邑)을 공격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군대를 적게 내면 제에게 해를 입히기에 부족하고, 군대를 많이 내면 진나라에게 해가 됩니다. 신이 왕의 계책을 헤아려 보건대, 군대를 적게 내고 한, 위나라의 병사들을 전부 동원하려고 하시는 모양인데 이는 의롭지 못합니다. 지금 볼 때 우리와 친한 나라와 친하게 지내지 않고 그들 나라를 넘어 공격하려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은 계책이랄 것도 없습니다.
또 옛날 제 민왕(湣王)은 남쪽 초를 쳐서 초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초나라의 장수를 죽여서 사방 1천여 리의 땅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제나라는 한 평의 땅도 얻지 못했습니다. 어찌 땅을 차지하고 싶지 않아서였겠습니까? 형세가 급박해 땅을 점령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후들은 제나라가 지쳐 있고 군주와 신하가 단합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바로 군대를 일으켜 제나라를 공격했습니다. 제나라는 대패하여 장수는 욕을 당하고 병사들은 꺾였습니다. 제나라는 모두 국왕을 비난했습니다. 누군가 왕에게 ‘이 계획은 누가 세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왕이 ‘문자(文子)가 세운 계획이오.’라고 하자 신하들이 모두 들고일어나 문자를 내쫓았습니다.
제나라가 크게 패한 까닭은 제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는 틈에 한나라와 위나라가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적에게 병기를 빌려주고 도적에게 식량을 보태준 것입니다. 왕께서는 멀리 떨어진 나라와는 우호 관계를 맺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하시느니만 못합니다. 이래야만 한 치의 땅을 얻더라도 왕의 한 치의 땅이 되고, 한 자의 땅을 얻더라도 왕의 한 자의 땅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 가까운 나라는 내버려 두고 멀리 원정하려고 하시니 이 얼마나 큰 잘못이겠습니까?
옛날 중산(中山)의 땅이 사방 500리였는데 중산과 가장 가까운 조나라가 혼자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명분은 명분대로 얻고 이익은 조나라로 돌아갔지만 천하 어느 나라도 이를 막지 못했습니다. 지금 한나라와 위나라가 중원에 위치하여 천하 중추 지역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왕께서 패왕이 되시려면 중원 지역 국가를 가까이하여 천하의 중추를 장악한 다음 초나라와 제나라를 제압해야 합니다. 초나라가 강해지면 조나라를 내 편으로, 조나라가 강해지면 초나라를 내 편으로 만드십시오. 초나라와 조나라가 모두 내 편이 되면 제나라는 틀림없이 진나라에게 겁을 먹을 것입니다. 제나라가 겁을 먹으면 분명 말을 공손히 하고, 많은 재물로 진나라를 섬기게 됩니다. 또 제나라가 내 편이 되면 한나라와 위나라를 장악할 수 있습니다.”
진 소왕이 “과인이 오래전부터 위나라와 친하려 했으나 위나라에 변화가 많아 친하지 못했는데 위나라와 가까이 지내려면 어찌하면 되겠소?”라고 물었다. 범수는 “왕께서는 겸손한 말과 많은 예물로 그를 섬기시되 안 되면 땅이라도 떼어 뇌물로 주십시오. 그렇게 해도 안 될 때 군대를 일으켜 그를 공격하시는 것입니다.”라 했다. 진왕은 “선생의 가르침 잘 들었습니다.”라 하고는 바로 범수를 객경(客卿)에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상의했다. 마침내 범수의 계책을 받아들여 오대부(五大夫) 관(綰)을 보내 위나라를 공격하여 회읍(懷邑)을 함락시켰다. 2년 후, 형구(邢丘)를 함락시켰다.
객경 범수가 진 소왕에게 “진나라와 한나라가 국경을 맞댄 지역은 마치 수를 놓은 듯 복잡합니다. 진나라에 들어와 있는 한나라의 땅은 나무에 좀벌레가 붙은 듯, 사람의 내장에 병이 난 듯합니다. 천하에 변고가 없으면 괜찮습니다만 천하에 변고가 생기면 진나라의 적으로 한나라만한 나라가 없습니다. 그러니 왕께서는 한나라를 편으로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했다. 소왕이 “과인이 당초 한나라를 우리 편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한나라가 듣지를 않으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라고 했다. 범수는 이렇게 말했다.
“한나라가 어찌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왕께서 군을 동쪽으로 보내 형양(滎陽)을 공격하면 공읍(鞏邑)과 성고(成皐)의 도로는 바로 통하지 못합니다. 북으로는 태항산(太行山)의 험한 길을 막으면 상당(上黨)의 군대는 남으로 내려오지 못합니다. 왕께서 일단 군을 일으켜 형양을 공격하시면 한나라는 셋으로 쪼개지고 한나라가 망할 것이 뻔한데 한나라가 어찌 듣지 않겠습니까? 한나라가 이를 따른다면 왕께서는 패왕의 업을 이루기 위한 계책을 세울 수 있습니다.”
소왕은 “좋습니다.”라 하고는 바로 사신을 한나라에 보냈다.
범수는 날이 갈수록 진왕과 가까워져 소왕에게 진언하면서 지낸 지 몇 년이 지났다. 범수는 마침내 기회를 보아 진왕에게 “신이 산동에 있을 때 제나라에는 오로지 전문(田文)이 있을 뿐 제왕은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또 진나라에는 태후(太后), 양후(穰侯), 화양군(華陽君), 고릉군(高陵君), 경양군(涇陽君)이 있을 뿐이지 왕은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대저 국정을 오로지 할 수 있는 사람을 왕이라 부르고, 다른 사람에게 이익과 손해를 끼치는 권력을 가진 사람을 왕이라 하며,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위세를 가진 사람을 왕이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태후께서는 왕은 아랑곳 않고 멋대로 행동하고, 양후는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서도 왕께 아뢰지 않으며, 화양군과 경양군도 마음대로 백성들에게 벌을 주고 죽이는 행동을 마구 저지르고 있습니다. 고릉군은 정책을 바꾸고 관리를 기용하는 문제 등을 왕께 아뢰지 않고 멋대로 합니다. 이런 네 부류의 귀하신 몸들이 계시니 나라가 어찌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왕께서 이 네 사람 아랫자리에 계시게 되면 실제로 왕이 아닌 것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왕의 권력은 기울 수밖에 없고, 명령이 왕에게서 나가지 못합니다. 나라를 잘 다스리는 군주라면 안으로는 위신을 단단히 다지고, 밖으로는 권력을 무겁게 한다고 들었습니다.
양후는 왕의 권한을 가로채서 마음대로 사신을 보내 제후들을 다루고, 천하의 땅을 나누어 사람을 봉하고, 적을 무찌르고 다른 나라를 치는 등, 진나라의 국사를 독단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면 그 이익을 자신의 봉읍 도(陶)의 소유로 만들어 제후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패하면 백성을 원망하고 그 화를 다른 나라에 돌립니다.
옛 시(詩)에 ‘열매가 너무 많으면 나뭇가지를 상하게 하고, 가지가 상하게 되면 나무의 정기를 해친다. 수도가 너무 크면 나라가 위태롭고 신하가 높으면 임금은 낮아진다.’라고 했습니다. 최저(崔杼)와 요치(淖歯)가 제나라를 손에 넣자 최저는 제 장공(莊公)의 다리를 화살로 쏘아 죽였고, 요치는 제 민왕(湣王)의 힘줄을 뽑아내서 하룻밤 사이 묘당의 대들보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이태(李兌)가 조나라를 장악하자 주보(主父)를 사구(沙丘)에 가두어서 백일 동안 굶겨 죽였습니다.
지금 진나라에는 태후와 양후가 권력을 잡고 있고, 고릉군, 화양군, 경양군이 그들을 돕고 있으니 끝내는 진왕을 없앨 수 있습니다. 이들이 요치나 이태와 같은 패거리라 할 수 있습니다. 하, 상, 주 삼대의 왕조가 차례로 망한 까닭은 군주가 나라의 큰 권력을 믿는 신하들에게 주고 술과 사냥에 빠져 나라 일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군주들이 믿었던 자들은 모두 덕 있고 유능한 사람들을 시기하여 아래를 누르고 위를 가로막아 사사로움만 꾀한 바, 군주를 위해서는 충성하지 않아도 군주가 그것을 몰랐기에 나라가 망한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에는 지방관을 비롯하여 많은 조정 대신들로부터 심지어 왕 좌우의 시종에 이르기까지 재상 양후의 측근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소인이 보기에 왕께서는 지금 조정에서 완전히 고립되셨습니다. 소인은 만세 뒤 진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왕의 자손이 아닌 자가 될까, 그것이 두렵습니다.”
소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며 “과연 그렇소.”라고 했다. 이에 태후를 폐출시키고, 양후, 고릉군, 화양군, 경양군을 함곡관 밖으로 내쳤다. 진왕은 범수를 진나라의 재상으로 삼고, 양후의 재상 도장을 거두어들여 그를 도읍(陶邑)으로 돌려보냈다. 현의 관리에게 짐을 실어갈 수레와 소를 양후에게 제공하게 했는데 수레가 1천 대를 넘었다. 함곡관에 도착해 관리가 그의 귀중품들을 조사해보니 진귀한 물건들이 왕실보다 더 많았다. 진 소왕이 범수를 응읍(應邑)의 땅에 봉하여 응후(應侯)라고 불렀다. 이때가 진 소왕이 재위한 지 41년째였다.
범수가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지만 진나라에서는 그를 장록(張祿)이라고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위나라에서는 이를 모르고 범수가 죽은 지 오래라고 여겼다. 위나라는 진나라가 동쪽으로 한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수고(須賈)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범수는 이를 듣고 신분을 감추고 다 해진 옷으로 변장하고는 사람이 뜸한 길을 통해 객관으로 수고를 찾아갔다.
수고가 그를 보고는 놀라서 “범숙(范叔)이 그동안 무사했는가?”라고 물었다. 범수는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수고가 웃으면서 “범숙은 진나라에 와서 유세하고 있는가?”라고 했다. 범수는 “아닙니다. 신이 전에 위나라 재상의 미움을 받아 이곳으로 도망을 왔는데 어찌 감히 유세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수고가 “지금 범숙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라고 하자 범수는 “남의 고용살이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수고가 속으로 범수를 가엾게 여겨 자리에 앉힌 다음 술과 밥을 주면서 “범숙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었단 말인가”라면서 두터운 솜옷을 한 벌을 주었다.
그러면서 수고는 “진나라의 재상 장 선생을 아는가? 내가 듣기에 진왕의 총애를 받아 천하의 모든 일이 재상의 의견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던데, 지금 내 일의 성공 여부도 모두 재상 장 선생에게 달려있다네. 혹 재상과 가까운 사람 알고 있지 않은가?”라고 했다. 범수가 “제 주인이 그분을 잘 알고 있고 저 또한 재상을 한 번 뵌 적이 있으니 주인에게 부탁하여 재상을 만날 수 있게 해보겠습니다.”라고 했다. 수고는 “내 말이 병이 들었고 수레 축도 부러지는 통에 네 필 말이 끄는 큰 수레가 없어 대문을 나갈 수가 없다네.”라고 했다. 범수는 “신이 주인에게서 네 필 말이 끄는 수레를 빌려오겠습니다.”라고 했다.
범수가 돌아갔다가 네 필 말이 끄는 수레를 끌고 와서는 몸소 수고를 태워 수레를 몰고 진나라의 재상 저택으로 들어갔다. 저택에 있던 사람들 중 범수를 알아 본 자들은 모두 피해 숨었다. 수고가 이상하게 여겼다. 재상 관저 입구에 도착하자 범수는 수고에게 “잠깐 기다리십시오. 신이 먼저 들어가서 재상에 알릴테니.”라고 했다. 수고가 입구에게 한참을 기다리다가 문지기에게 “범숙이 아직 나오지 않고 있는데 무슨 까닭인가?”라고 물었다. 문지기가 “여기에 범숙이란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하자 수고가 “방금 나와 함께 수레를 타고 와서 안으로 들어간 그 사람인데”라고 하자 문지기는 “그분은 우리 재상이신 장 선생입니다”라고 했다.
수고는 크게 놀라며 자기가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는 곧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나아가 문지기를 통해서 죄를 청했다. 이때 범수는 화려한 장막 안에 앉아서 많은 시종들을 거느린 채 수고를 맞이했다. 수고는 머리를 조아리며 “신은 군께서 이렇게 출세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수고가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으니 다시는 천하의 책을 읽을 생각도 감히 할 수 없을 것이며, 천하의 정치에 참여할 생각도 감히 품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삶겨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러니 용서를 빌고 알아서 북쪽 오랑캐 땅으로 물러가고자 합니다. 그저 공의 너그러우신 처분만을 바라올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범수가 “네 죄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라고 물었다. 수고는 “신의 머리카락을 다 뽑아 헤아려도 모자랄 만큼 많습니다.”라고 했다.
범수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죄는 세 가지이다. 옛날 초 소왕(昭王) 때 신포서(申包胥)가 초나라를 위하여 오나라의 군대를 물리치자 초왕은 형(荊)나라의 땅 5천 호를 그에게 내렸다. 신포서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는데, 그의 조상이 형나라 땅에 묻혀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내 조상의 무덤이 위에 있기에 위나라를 배반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네가 전에 내가 제나라와 내통하여 위나라를 팔아넘기려 한다고 여겨서는 위제(魏齊) 앞에서 나를 모함했으니 이것이 너의 첫 번째 죄목이다. 위제가 나를 욕보이고 변소 안에다 버릴 때 네가 말리지 않은 것, 이것이 두 번째 죄이다. 또 위제의 빈객들이 술에 취해 돌아가며 내 몸에다 오줌을 갈겼는데도 너는 모르는 척했으니 이것이 너의 세 번째 죄이다. 그러나 오늘 너를 죽이지 않는 것은 두툼한 솜옷을 주며 옛정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를 놓아주는 것이다.”
이렇게 접견을 마쳤다. 범수는 궁궐에 들어가 이 일을 소왕에게 보고하고 수고를 돌려보냈다.
수고가 범수에게 작별 인사를 하자 범수는 잔치를 크게 벌여 여러 나라 사신들을 모두 초대했다. 초청된 사신들은 함께 웅장한 대청에서 풍성한 술과 안주를 즐겼다. 범수는 수고를 대청 아래에 앉게 해서는 말과 소가 먹는 여물을 구유에 담아 그 앞에 내놓고는 얼굴에 먹줄로 뜸을 들이는 형벌인 경형(黥刑)을 받은 두 죄인에게 양옆에서 먹이를 먹이듯 수고에게 먹이게 하면서 “위왕에게 전하라! 즉각 위제의 머리를 가지고 오지 않으면 대량성(大梁城)을 허물고 대량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겠다고.”라고 했다. 수고가 돌아가서 이 일들을 위제에게 말하자 위제는 겁을 먹고 조나라로 달아나 평원군(平原君) 집에 숨었다.
범수가 재상이 된 뒤 어느 날 왕계(王稽)는 범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예측하지 못할 일 세 가지와 또 어찌해 볼 수 없는 일 세 가지가 있습니다. 왕께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것이 예측할 수 없는 첫 번째 일이고, 재상께서 갑자기 관저를 버리고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 것이 두 번째 예측할 수 없는 일이며, 제가 언제 구렁텅이에 빠져 죽을지 모르는 것이 세 번째 예측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왕께서 어느 날 돌아가시면 군께서 진작 저를 왕께 추천하지 못한 것을 후회해봐야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재상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게 되어 진작에 저를 기용하지 않은 것을 후회해야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이 구렁텅이에 빠져 죽어 재상께서 신을 도와주지 않을 것을 후회해야 이 역시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범수는 이 말이 불쾌했으나 조정에 나아가 소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로지 왕계의 충심이 아니었더라면 누가 저를 함곡관에서 데려올 수 있었겠습니까? 왕의 현명하고 성스러운 덕이 아니었더라면 신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지금 신의 관직은 재상에 이르고 작위는 후의 반열에 들었는데 왕계의 관직은 아직 알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을 진에 데리고 온 왕계의 뜻은 아닐 줄 압니다.”
소왕이 왕계를 불러서 그를 하동(河東) 군수(郡守)에 임명했다. 왕계는 부임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조정에 시정 보고를 하지 않았다. 범수가 또 정안평(鄭安平)을 추천하자 소왕은 그를 장군에 임명했다. 그 뒤 범수는 집의 재물을 나누어 가난할 때 신세진 진나라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보답했다. 단 한 끼의 식사에 대한 은혜도 반드시 보답했고, 한 번 째려본 원한도 반드시 보복했다.
범수가 진나라의 재상이 된 지 2년, 소왕이 재위한 지 42년째 되는 해, 동쪽으로 한의 소곡(少曲)과 고평(高平)을 공격해 점령했다.
진 소왕이 위제가 평원군의 집에 숨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범수의 원수를 갚아주려고 “내가 오래전부터 그대의 높은 정의감에 대해 들었소. 원컨대 그대와 서로 대등하게 구속받지 않고 친구가 되고 싶으니 그대는 내게로 와서 열흘 동안 술자리를 함께 했으면 하오”라는 거짓 편지를 평원군에게 보냈다.
평원군은 진나라가 두려웠고, 또 편지의 말들이 정말인 줄 알고는 바로 진나라로 가서 소왕을 만났다. 소왕은 평원군과 며칠간 술자리를 함께 한 다음 “옛날 주 문왕은 여상을 얻어 그를 태공(太公)으로 받들었고, 제 환공은 관이오(管夷吾, 관중)를 얻어 그를 중보(仲父)로 삼았소. 나는 지금 범 선생을 숙부(叔父)처럼 여기고 있는데 범 선생의 원수가 그대 집에 숨어 있다 하니 그대가 사람을 시켜 그 목을 베어 오도록 하시오. 아니면 그대를 함곡관에서 못 나가게 할 것이오.”라고 했다.
이에 평원군은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누군가와 사귀는 것은 천한 몸이 되었을 때 도움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위제는 저의 친구이고, 그가 내 집에 있다 해도 내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그는 제 집에 있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소왕은 곧 조왕에게 “지금 왕의 동생이 진나라에 있고, 범 선생의 원수인 위제가 평원군의 집에 숨어 있소. 왕께서는 서둘러 사람을 시켜 위제를 목을 베어 보내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바로 군대를 내어 조나라를 치고, 왕의 동생을 함곡관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것이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조 효성왕(孝成王)은 바로 병사를 보내 평원군의 집을 포위했다. 일이 급해지자 위제는 밤 사이 도망쳐서 조나라의 재상 우경(虞卿)에게 몸을 맡기길 청했다. 우경은 조왕이 진나라를 끝내 설득하지 못할 것으로 알고 재상 도장을 내버리고 위제와 함께 몰래 도망쳤다. 우경이 몸을 맡길 만한 제후를 떠올려 보았으나 느닷없이 찾아갈 만한 곳이 없어 바로 대량(大梁)으로 도망가서는 신릉군(信陵君)의 주선을 받아 초나라로 달아나려고 했다. 신릉군이 이 소식을 들었으나 진이 겁이 나서 머뭇거리면서 만나 주지 않고는 “우경이 어떤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이때 후영(侯嬴)이 신릉군 곁에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본디 자신을 알기도 힘들지만 남을 아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우경은 짚신을 신고 자루 같은 긴 모자를 쓴 남루한 행색으로 조왕을 만났습니다. 조왕은 그를 처음 보고도 그에게 백옥 한 쌍과 황금 100일을 내렸고, 두 번째 만나고는 상경에 임명했으며, 세 번째 만나고는 재상에 기용하여 1만 호의 후작에 봉했습니다. 당시 천하가 다투어 이를 알고자 했지요. 위제는 급하여 우경을 찾아갔고, 우경은 높은 자리와 많은 녹봉을 중시하지 않고 재상의 도장과 만호후의 작위를 버린 채 위제와 함께 몰래 이곳을 찾은 것은 그가 남의 곤란함을 생각하여 공자께 의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물으셨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알기도 어렵지만 남을 알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들은 신릉군은 매우 부끄러워하며 손수 마차를 몰고 그들을 맞이하러 교외까지 나갔다. 위제는 신릉군이 곤란하다며 바로 자신을 만나려 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노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였다. 이 일을 들은 조왕은 위제의 목을 잘라 진나라에 보냈고, 진 소왕은 그제야 평원군을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진 소왕 43년, 진나라는 한나라의 분형(汾陘)을 공격해 함락시킨 다음 황하 가까이 있는 광무산(廣武山)에 성을 쌓았다.
그로부터 5년, 소왕은 응후(범수)의 계책을 받아들여 반간계로 조나라를 속였다. 조나라는 이 꾀임에 넘어가 마복군(馬服君, 조사)의 아들(조괄)을 염파(廉頗) 대신 장군에 임명했다. 진의 군대는 장평(長平)에서 조의 군대를 대파하고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했다.
얼마 뒤 응후는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와 원수 사이가 되어 그를 모함하여 죽였다. 응후는 정안평을 추천하여 그에게 조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정안평은 조나라의 군대에게 포위당해 상황이 급해지자 2만 명의 병사를 데리고 조나라에 항복해버렸다.
이 일로 응후는 멍석을 깔고 앉아 죄받기를 기다렸다. 본래 진나라의 법에 사람을 추천하여 추천받은 사람이 죄를 범하면 추천한 사람도 같은 벌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볼 때 응후의 죄는 삼족을 잡아들여 처벌해야 했다.
진 소왕은 응후가 불안해할까 염려되어 전국에 알리길 감히 정안평 일을 말하는 자는 정안평과 같은 죄로 다스리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재상 응후에게 평소보다 더 많은 음식물 등을 내려서 그의 마음을 다독거렸다.
2년 뒤, 왕계가 하동 군수로서 제후와 내통하다가 법에 걸려 처형되었다. 이런 일들로 응후의 마음이 갈수록 불안해졌다.
어느 날 소왕이 조정에 앉아 한숨을 쉬자 응후가 나아가 “신은 ‘국왕이 근심하면 신하를 치욕을 당하고, 국왕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왕께서 조정에서 걱정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는 신이 부족한 탓이니 제게 벌을 주십시오.”라고 했다.
소왕은 “과인은 초나라의 철검이 대단히 날카롭지만 광대들은 서툴다고 들었는데, 철검이 날카롭다면 병사들은 용감할 것이고, 광대가 서툴다면 생각이 깊다는 것 아니겠소? 초왕이 깊은 계략으로 용감한 병사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할까 두렵소. 일이란 평소 준비하지 않으면 갑작스러운 변고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오. 지금 우리를 보면 무안군은 죽었고, 장안평 무리들은 적에게 투항했소. 나라 안에는 좋은 장수가 없고, 나라 밖에는 많은 적들이 노리고 있지 않소이까? 이래서 과인이 걱정하는 것이라오.”라고 했다.
소왕은 이런 말로 응후를 격려하려 한 것인데, 응후는 송구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이 무렵 이런 이야기를 들은 채택(蔡澤)이 진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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