屈原賈生列傳
屈原
屈原者,名平,楚之同姓也。為楚懷王左徒。博聞彊志,明於治亂,嫻于辭令。入則與王圖議國事,以出號令;出則接遇賓客,應對諸侯。王甚任之。
上官大夫與之同列,爭寵而心害其能。懷王使屈原造為憲令,屈平屬草槁未定。上官大夫見而欲奪之,屈平不與,因讒之曰:「王使屈平為令,眾莫不知,每一令出,平伐其功,(曰)以為『非我莫能為』也。」王怒而疏屈平。
屈平疾王聽之不聰也,讒諂之蔽明也,邪曲之害公也,方正之不容也,故憂愁幽思而作離騷。離騷者,猶離憂也。夫天者,人之始也;父母者,人之本也。人窮則反本,故勞苦倦極,未嘗不呼天也;疾痛慘怛,未嘗不呼父母也。屈平正道直行,竭忠盡智以事其君,讒人閒之,可謂窮矣。信而見疑,忠而被謗,能無怨乎?屈平之作離騷,蓋自怨生也。國風好色而不淫,小雅怨誹而不亂。若離騷者,可謂兼之矣。上稱帝嚳,下道齊桓,中述湯武,以刺世事。明道德之廣崇,治亂之條貫,靡不畢見。其文約,其辭微,其志絜,其行廉,其稱文小而其指極大,舉類邇而見義遠。其志絜,故其稱物芳。其行廉,故死而不容自疏。濯淖汙泥之中,蟬蛻於濁穢,以浮游塵埃之外,不獲世之滋垢,皭然泥而不滓者也。推此志也,雖與日月爭光可也。
屈平既絀,其後秦欲伐齊,齊與楚從親,惠王患之,乃令張儀詳去秦,厚幣委質事楚,曰:「秦甚憎齊,齊與楚從親,楚誠能絕齊,秦願獻商、於之地六百里。」楚懷王貪而信張儀,遂絕齊,使使如秦受地。張儀詐之曰:「儀與王約六里,不聞六百里。」楚使怒去,歸告懷王。懷王怒,大興師伐秦。秦發兵擊之,大破楚師於丹、淅,斬首八萬,虜楚將屈丐,遂取楚之漢中地。懷王乃悉發國中兵以深入擊秦,戰於藍田。魏聞之,襲楚至鄧。楚兵懼,自秦歸。而齊竟怒不救楚,楚大困。
明年,秦割漢中地與楚以和。楚王曰:「不願得地,願得張儀而甘心焉。」張儀聞,乃曰:「以一儀而當漢中地,臣請往如楚。」如楚,又因厚幣用事者臣靳尚,而設詭辯於懷王之寵姬鄭袖。懷王竟聽鄭袖,復釋去張儀。是時屈平既疏,不復在位,使於齊,顧反,諫懷王曰:「何不殺張儀?」懷王悔,追張儀不及。
其後諸侯共擊楚,大破之,殺其將唐眛。
時秦昭王與楚婚,欲與懷王會。懷王欲行,屈平曰:「秦虎狼之國,不可信,不如毋行。」懷王稚子子蘭勸王行:「柰何絕秦歡!」懷王卒行。入武關,秦伏兵絕其後,因留懷王,以求割地。懷王怒,不聽。亡走趙,趙不內。復之秦,竟死於秦而歸葬。
長子頃襄王立,以其弟子蘭為令尹。楚人既咎子蘭以勸懷王入秦而不反也。
屈平既嫉之,雖放流,睠顧楚國,系心懷王,不忘欲反,冀幸君之一悟,俗之一改也。其存君興國而欲反覆之,一篇之中三致志焉。然終無可柰何,故不可以反,卒以此見懷王之終不悟也。人君無愚智賢不肖,莫不欲求忠以自為,舉賢以自佐,然亡國破家相隨屬,而聖君治國累世而不見者,其所謂忠者不忠,而所謂賢者不賢也。懷王以不知忠臣之分,故內惑於鄭袖,外欺於張儀,疏屈平而信上官大夫、令尹子蘭。兵挫地削,亡其六郡,身客死於秦,為天下笑。此不知人之禍也。《易》曰:「井泄不食,為我心惻,可以汲。王明,并受其福。」王之不明,豈足福哉!
令尹子蘭聞之大怒,卒使上官大夫短屈原於頃襄王,頃襄王怒而遷之。
屈原至於江濱,被髪行吟澤畔。顏色憔悴,形容枯槁。漁父見而問之曰:「子非三閭大夫歟?何故而至此?」屈原曰:「舉世混濁而我獨清,眾人皆醉而我獨醒,是以見放。」漁父曰:「夫聖人者,不凝滯於物而能與世推移。舉世混濁,何不隨其流而揚其波?眾人皆醉,何不餔其糟而啜其醨?何故懷瑾握瑜而自令見放為?」屈原曰:「吾聞之,新沐者必彈冠,新浴者必振衣,人又誰能以身之察察,受物之汶汶者乎!寧赴常流而葬乎江魚腹中耳,又安能以皓皓之白而蒙世俗之溫蠖乎!」
乃作懷沙之賦。其辭曰:
陶陶孟夏兮,草木莽莽。傷懷永哀兮,汩徂南土。眴兮窈窈,孔靜幽墨。冤結紆軫兮,離愍之長鞠;撫情效志兮,俛詘以自抑。
刓方以為圜兮,常度未替;易初本由兮,君子所鄙。章畫職墨兮,前度未改;內直質重兮,大人所盛。巧匠不斲兮,孰察其揆正?玄文幽處兮,矇謂之不章;離婁微睇兮,瞽以為無明。變白而為黑兮,倒上以為下。鳳皇在笯兮,雞雉翔舞。同糅玉石兮,一而相量。夫黨人之鄙妒兮,羌不知吾所臧。
任重載盛兮,陷滯而不濟;懷瑾握瑜兮,窮不得余所示。邑犬群吠兮,吠所怪也;誹駿疑桀兮,固庸態也。文質疏內兮,眾不知吾之異采;材樸委積兮,莫知余之所有。重仁襲義兮,謹厚以為豐;重華不可牾兮,孰知余之從容!迸固有不并兮,豈知其故也?湯禹久遠兮,邈不可慕也。懲違改忿兮,抑心而自彊;離湣而不遷兮,願志之有象。進路北次兮,日昧昧其將暮;含憂虞哀兮,限之以大故。
亂曰:浩浩沅、湘兮,分流汨兮。修路幽拂兮,道遠忽兮。曾唫恒悲兮,永嘆慨兮。世既莫吾知兮,人心不可謂兮。懷情抱質兮,獨無匹兮。伯樂既歿兮,驥將焉程兮?人生稟命兮,各有所錯兮。定心廣志,餘何畏懼兮?曾傷爰哀,永嘆喟兮。世溷不吾知,心不可謂兮。知死不可讓兮,願勿愛兮。明以告君子兮,吾將以為類兮。
於是懷石遂自(投)[沈]汨羅以死。
屈原既死之後,楚有宋玉、唐勒、景差之徒者,皆好辭而以賦見稱;然皆祖屈原之從容辭令,終莫敢直諫。其後楚日以削,數十年竟為秦所滅。
自屈原沈汨羅後百有餘年,漢有賈生,為長沙王太傅,過湘水,投書以弔屈原。
굴원(屈原)은 이름이 평(平)이고, 초(楚)나라 왕실과 성이 같았다. 초 회왕(懷王)의 좌도(左徒)였다. 널리 들은 것이 많고 뜻이 굳세었으며, 다스림과 혼란의 이치에 밝고 외교사령에도 능했다. 조정에 들어가서는 왕과 나라 일을 도모하여 호령을 내렸고, 나가서는 빈객을 접대하고 제후들을 상대했다. 왕이 그를 매우 신임했다.
상관대부(上官大夫)가 그와 같은 반열이었는데 총애를 다투자 마음으로 굴원을 질투했다. 회왕이 굴원에게 법령을 만들게 하여 굴평이 아직 초고를 완성하지 않았는데 상관대부가 그것을 보고는 자기 것으로 하고 싶어 했으나 굴평이 주지 않자 굴평을 이렇게 헐뜯었다.
“왕께서 굴평에게 법령을 기초하라고 한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법령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굴평이 그 공을 떠벌리며 ‘내가 아니면 할 수 없지’라고 합니다.”
왕이 노하여 굴평을 멀리했다.
굴원은 한쪽 말만 듣는 왕의 총명치 못함, 총명을 가리는 아첨하는 말, 공정함을 해치는 간사한 무리, 방정한 사람이 허용되지 못하는 것 등이 한이 되어 우울함과 근심걱정으로 「이소(離騷)」를 지었다. ‘이소’는 고민에 빠졌음을 가리킨다.
무릇 하늘은 인간의 시원이며, 부모는 인간의 근본이다. 인간이 궁하면 근본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힘들과 지치면 소리쳐 하늘을 찾지 않을 수 없고, 질병으로 고통스럽고 참담해지면 부모를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굴평은 바른 도리를 곧게 실천하고 충성을 다하고 지혜를 다 짜내서 그 군주를 섬겼지만 참소를 일삼는 자들에게 이간질을 당했으니 궁하다고 할 것이다. 신의를 지켰으나 의심을 받았고, 충성을 다했으나 비방을 당했으니 어찌 원망이 없겠는가?
굴평이 지은 「이소」는 대개 원망에서 나온 것이다. 「국풍(國風)」은 애정을 노래하지만 음탕하지 않고, 「소아(小雅)」는 원망과 비난을 담고 있으나 반란의 마음은 없다. 이 「이소」는 그 둘을 겸한 것이라 하겠다. 위로는 제곡(帝嚳)을 칭송하고, 아래로는 제(齊) 환공(桓公)을 말하고, 그 사이에 탕(湯) 임금과 무왕(武王)을 기술하여 세상사를 풍자하려 했다.
그 문장은 간략하지만 그 의미는 심장하고, 그 뜻은 고결하고, 그 행동은 청렴하며, 문장의 언어는 작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바는 크고, 거론된 사례는 가깝지만 그것에 깃든 사상은 매우 깊고 멀다. 그의 뜻이 고결하기 때문에 거론한 사물들이 향기롭고, 그 행동이 청렴했기에 죽을 때까지 허용되지 못했던 것이다. 진흙구덩이와 오물에 빠져 있어도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빠져나와 흙먼지 저 밖으로 날아가 세속의 때를 덮어쓰지 않으며 진흙탕에 있어도 물들지 않았다. 이런 지조는 해와 달과도 그 빛을 다툴 만하다.
굴원이 쫓겨난 뒤 진(秦)나라가 제(齊)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제나라와 초나라는 동맹 관계라 (진나라) 혜왕은 그것이 염려되어 장의에게 거짓으로 진나라를 떠나 후한 예물을 가지고 초나라에 몸에 맡기면서 “진나라는 제나라를 몹시 증오하는데 제나라는 초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으니 초나라가 정말 제나라와 관계를 끊는다면 진나라는 상(商)과 오(於)의 땅 600 리를 바칠 의사가 있습니다.”라고 말하게 했다.
초 회왕은 욕심 때문에 장의를 믿고 마침내 제나라와 관계를 끊는 한편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 땅을 받아오게 했다. 장의는 “이 장의가 왕과 약속한 것은 6 리였지 600 리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초나라의 사신은 성이 나서 돌아가 회왕에게 보고했다. 회왕은 성이 나서 군을 크게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했다. 진도 군을 내서 초나라를 공격하여 단(丹)과 석(淅)에서 초나라의 군대를 대파하여 8만의 목을 베고, 초나라의 장수 굴개(屈丐)를 사로잡음으로써 마침내 초나라의 한중(漢中) 땅을 빼앗았다.
회왕은 나라 안의 군을 전부 동원하여 깊숙이 들어가 진을 공격하니 남전(藍田)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위(魏)나라가 이를 듣고는 초나라를 습격하여 등(鄧)에 이르렀다. 초나라의 군대는 겁이 나서 진나라에서 철수했다. 그리고 제나라도 결국은 화가 나서 초나라를 구하지 않으니 초나라가 큰 곤경에 처했다.
이듬해, 진나라는 한중 땅을 떼어 초나라에 주면서 화의하려고 했다. 초왕은 “땅은 얻고 싶지 않다. 장의를 얻을 수 있다면 그걸로 그만이다.”라고 했다. 장의가 이를 듣고는 바로 “이 장의 한 사람으로 한중과 바꿀 수 있다면 신은 초나라로 가길 청합니다.”라고 했다. 초나라로 가서는 또 후한 예물로 권신 근상(靳尙)과 통하고, 회왕이 총애하는 정수(鄭袖)를 궤변으로 끌어들였다. 회왕은 결국 정수의 말을 듣고 다시 장의를 풀어주었다.
이때 굴원은 이미 배척을 당해 자리에 있지 못하고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돌아와서 회왕에게 “어째서 장의를 죽이지 않으셨습니까?”라고 간했다. 회왕이 후회가 되어 장의를 뒤쫓았으나 이미 늦었다.
그 후 제후들이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여 대파하고 그 장수 당말(唐眛)을 죽였다. 당시 진 소왕은 초나라와의 혼인 때문에 회왕과 만나고자 했다. 회왕이 가려고 하자 굴평은 “진나라는 호랑이와 이리 같은 나라이므로 믿을 수 없습니다. 가지 않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회왕의 어린 아들 자란(子蘭)은 왕에게 갈 것을 권하며 “진나라의 호의를 어떻게 거절합니까?”라고 했다. 회왕은 기어코 갔다. 무관(武關)에 들어서자 진나라의 복병이 그 뒤를 차단하고 회왕을 억류시킨 다음 땅을 떼어줄 것을 요구했다. 회왕이 화가 나서 들어주지 않았다. 조나라로 도망쳤으나 조나라가 받아주지 않았다. 다시 진나라로 가서 결국 진나라에서 죽자 (진나라는 그 시신을) 장례를 위해 초나라로 돌려보냈다.
큰아들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했고, 그 동생 자란은 영윤(令尹)이 되었다. 초나라 사람들은 자란이 회왕에게 진나라에 갈 것을 권하여 돌아오지 못한 일에 대해 못마땅해 했다.
굴원은 그것이 한스러웠다. 비록 추방당했지만 초나라를 그리워하고 회왕에 대한 마음이 남아서 돌아가길 잊지 않았다. 왕이 깨닫고, 나라의 풍속이 바뀌길 희망했다. 그래서 군주를 지키고 나라를 일으켜 다시 회복시켜 보고자 작품에 그 뜻을 거듭 밝혔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어쩌지 못해서 돌아오지 못했으니, 이로 보면 결국 회왕이 끝까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군주는 어리석건 지혜롭건 현명하든 불초하든 자신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유능한 인재를 기용하여 보좌하길 바라지 않는 자는 없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고 집안이 파산하는 일이 계속되며, 성군의 치세가 몇 대가 지나도록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충신이 실제로는 충신이 아니고, 그들이 말하는 현명한 자가 실은 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왕은 충신과 간신을 가릴 줄 몰랐다. 그래서 안에서는 정수에게 홀렸고, 밖에서는 장의에게 속았다. 굴원을 멀리 하고 상관대부와 자란을 믿었던 것이다. 군대는 꺾였고 땅은 깎여 여섯 개 군을 잃었으며 그 자신은 진나라에서 객사하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는 인간으로 인한 화를 몰랐기 때문이다. 『역경(易經)』에 “내 이미 우물을 깨끗하게 했거늘 마시는 사람이 없으니 마음이 아프다. 이 물은 길어 마실 수 있거늘. 왕이 영명하면 그 복을 받는다.”라고 했다. 그런데 왕이 밝지 못하니 어찌 복을 말하리오!
영윤 자란이 이를 듣고 크게 화를 냈고, 결국 상관대부를 시켜 경양왕에게 굴원의 나쁜 점을 말하게 하니 경양왕도 노하여 굴원을 추방했다.
굴원이 강가에 이르렀는데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채 물가를 거닐며 중얼거렸다. 안색은 초췌했고 몸은 야위어 있었다. 어부가 이를 보고는 “그대는 삼려대부(三閭大夫)가 아니십니까?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굴원은 “세상은 온통 흐린데 나 혼자 깨끗하고, 모두가 취해 있는데 나만 깨어 있어서 이렇게 추방당한 것이라오.”라고 했다.
어부는 “대저 성인은 사물에 구속받지 않고 세속과 더불어, 함께 변하는 사람 아닙니까? 세상이 온통 흐리다면 어째서 그 흐름을 따르거나 그 파도를 밀어 올리지 않는 것입니까? 모두가 취했다면 어째서 그 지게미를 먹거나 술을 마시지 않는 것입니까? 어째서 한사코 지조를 지키려다 추방을 자초한 것입니까”라고 했다. 굴원은 “나는 ‘머리를 새로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을 털어서 쓰고, 막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다.’고 들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가 깨끗한 자기 몸에 오물을 묻히려 하겠습니까? 차라리 흐르는 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 뱃속에 장례를 지낼지언정 또 어찌 백옥 같은 품격에다 먼지를 뒤집어쓰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회사(懷沙)>라는 부(賦)를 지었는데, 그 가사는 이랬다.
양기가 넘쳐흐르는 초여름 4월
풀과 나무는 우거졌는데
상심한 마음 마냥 슬퍼하면서
강남으로 쫓겨 가네.
산수는 눈부시고 아득하여
고요히 말이 없구나.
원통한 생각은 가슴에 맺히고
근심과 슬픔에 걸려 한없이 막혔네.
감정을 달래고 의지를 다져서
머리 숙이고 스스로의 마음을 눌러본다네.
모난 것을 깎아 둥근 것을 만들 때도
떳떳한 법도를 바꾼 적 없네.
처음부터 지켜야 할 본래의 길을 바꾸는 짓을
군자는 더럽게 여긴다네.
긋는 것은 먹줄로 분명하게 퉁겨
본래의 법도를 고치지 않으며,
바른 마음과 중후한 자질을
대인은 아름답게 여긴다네.
솜씨 있는 목수라도 깎고 다듬지 않으면
그 줄과 자가 바르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검은 무늬 어둠 속에 두었더니
장님은 무늬 없다 하고
눈 밝은 이루離婁의 눈을
판수는 멀었다고 하는구나.
흰 것을 검다 하고
아래 위를 뒤집네.
봉황은 새장 안에 갇혀 있고
오리는 자유롭게 날아다니는구나.
옥은 돌과 뒤섞어
분간할 수 없게 만드는구나.
패거리를 지은 저들의 더러운 질투여!
아, 나의 잘난 점을 모르는구나.
나의 능력은 무겁고 큰 임무도 짊어지고 견딜 수 있건만
꺼지고 막혀 성취할 길이 없구나.
귀한 옥 같은 아름다움을 품었건만
가려져 그것을 보일 수 없네.
마을의 개들이 떼지어 짖는 것은
저들 눈에 이상하게 보이기 때문이겠지.
영재를 비방하고 호걸을 의심하는 것은
본래 비열한 자들의 흔한 짓거리라네.
바탕과 교양을 다 갖추어 막힘이 없건만
여러 사람은 이 이채로움을 알지 못하는구나.
재목과 원목이 쌓였건만
내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네.
인의를 쌓고 쌓아 부지런하고 후덕하고 넉넉하건만
순임금 같은 성군을 만날 수 없으니
이 몸이 조용히 인의에 안주하고 있다는 것을
누가 알아주랴!
예로부터 성군과 현명한 신하가 때를 같이하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성탕과 하우는 너무 오래고 멀리 떨어져 있어
사모하지만 만날 길이 없구나.
한을 참고 분노를 삼키고
마음을 눌러 스스로 애쓰면서
어두운 세상을 만났어도 내 절개를 바꾸지 않았다.
내 뜻이 길이 후세에 귀감이 되길 원하네.
북쪽으로 길을 잡아 어딘가에서 묵으려 하니
해는 이미 황혼, 날이 저물려 하네.
근심을 삼키고 슬픔을 즐기면서
이를 한계 삼아 죽으리라.
넓고 넓은 완수와 상수의 물이여
두 갈래로 갈라져 흐르는구나.
저 멀리 이어진 길은
깊고도 어두워 쓸쓸하기 짝이 없고
멀고도 멀어 끝이 없구나.
이렇게 읊조리며 슬퍼하고
길게 한숨지어도
이미 세상에 나를 아는 이 없으니
인간의 마음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네.
충정과 훌륭한 자질을 품었어도
내 마음을 제대로 아는 자 없구나.
말 잘 고르던 백락이 이미 죽었으니
준마가 어디에서 능력을 평가받으리.
인생은 명이 있어
제각기 돌아갈 곳이 있겠지.
마음을 가라앉히고 뜻을 크게 가지니
내, 무엇을 두려워하랴.
늘 속상하여 슬퍼하며
길게 한숨짓고 탄식하네.
세상이 혼탁하여 나를 알지 못하니
내 마음을 말해 무엇 하랴?
죽음을 사양할 수 없음을 알기에,
바라노니 나를 위해 슬퍼하지 말라.
세상 군자들에게 분명히 밝히노니,
내 장차 이로써 군자들이 본받을 선례를 남기고자 하노라!
그리하여 바위를 품고 마침내 멱라수(汨羅水)에 스스로 가라앉아 죽었다.
굴원이 죽은 뒤 초나라에는 송옥(宋玉), 당륵(唐勒), 경차(景差)와 같은 무리들이 있어 모두 문장 짓는 것을 좋아하니 부(賦)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모두들 굴원의 은근한 문장을 본받았지만 감히 (굴원처럼) 직간하지는 못했다. 그 후로 초나라는 날이 갈수록 쇠약해져 수십 년 뒤에는 결국 진나라에게 망했다.
굴원이 멱라수에 가라앉은 지 백 여 년 뒤 한(漢)나라에 가생(賈生)이 있었는데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가 되어 상수(湘水)를 지나다가 글을 굴원을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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