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三九. 晉世家
晉唐叔虞者,1) 周武王子而成王弟. 初, 武王與叔虞母会時,2) 夢天謂武王曰:「余命女生子, 名虞, 余與之唐.」及生子, 文在其手曰「虞」, 故遂因命之曰虞.
武王崩, 成王立, 唐有亂,3) 周公誅滅唐. 成王與叔虞戯, 削桐葉為珪以與叔虞, 曰:「以此封若.」史佚因請択日立叔虞. 成王曰:「吾與之戯耳.」史佚曰:「天子無戯言. 言則史書之, 礼成之, 樂歌之.」於是遂封叔虞於唐. 唐在河、汾之東, 方百里, 故曰唐叔虞.4) 姓姫氏, 字子于.
진(晉)나라의 당숙우(唐叔虞)는 주 무왕(周武王)의 아들이요 성왕(成王)의 아우이다. 일찍이 무왕이 숙우의 모친과 결혼할 때 꿈에 천신이 무왕에게 이르기를 “내가 너에게 아들 하나 낳게 할 터이니 이름을 우(虞)라고 하라. 내가 당(唐) 지역을 그에게 주겠노라.”라 했다. 무왕이 아들을 낳자 과연 그 손바닥에 무늬로 ‘우(虞)’라는 글자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우라 했다.
무왕이 죽자 성왕이 뒤를 이었다. 당(唐)나라에 난이 발생하자 주공(周公)은 당나라를 멸망시켰다. 성왕이 숙우와 함께 있다가 장난삼아 오동나무 잎으로 규(珪)를 만들어 숙우에게 주며 말하기를 “이것으로 너를 봉하노라.”라 했다.
사일(史佚)이 이런 까닭으로 성왕에게 숙우를 제후로 봉하게 청했다. 성왕이 말하기를 “과인은 그에게 농담했을 뿐이다.”라 했다. 사일은 “천자께서는 농담을 하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말씀을 하시면 곧 사관이 그것을 기록하고 예의로써 그것을 완성하고 음악으로 그것을 노래하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마침내 숙우를 당나라에 봉하게 되었다.
당나라는 황하와 분하(汾河)의 동쪽에 있으며 그 넓이는 백리나 된다. 해 그를 당숙우라고 칭했다. 그의 성은 희(姬)요, 자는 자우(子于)이다.
唐叔子燮, 是為晉侯.5) 晉侯子寧族,6) 是為武侯. 武侯之子服人, 是為成侯. 成侯子福,7) 是為厲侯. 厲侯之子宜臼, 是為靖侯. 靖侯已來, 年紀可推. 自唐叔至靖侯五世, 無其年數.
靖侯十七年, 周厲王迷惑暴虐, 国人作亂, 厲王出奔于彘, 大臣行政, 故曰「共和」.8)
十八年, 靖侯卒, 子釐侯司徒立. 釐侯十四年, 周宣王初立. 十八年, 釐侯卒, 子献侯籍9)立. 献侯十一年卒, 子穆侯費王10)立.
당숙의 아들은 섭(燮)이니, 그가 곧 진후(晉侯)이다. 진후의 아들은 영족(寧族)으로 무후(武侯)이다. 무후의 아들은 복인(服人)으로 성후(成侯)이다. 성후의 아들은 복(福)으로 여후(厲侯)이다. 여후의 아들은 의구(宜臼)로 정후(靖侯)이다. 정후 이후부터 재위한 연수를 추산할 수 있다. 당숙우에서 정후까지 5대는 그 재위 연수를 알 수 없다.
정후 17년, 주 여왕(周厲王)이 미혹하고 포학해 주나라 사람들이 난을 일으켰는데 여왕은 체(彘) 지방으로 도망을 가고 대신들이 정치를 대행했다. 이를 ‘공화(共和)’라고 불렀다.
18년에 여후가 죽고 아들 희후(釐侯) 사도(司徒)가 왕위에 올랐다. 희후 14년, 주 선왕(周宣王)이 즉위했다. 18년, 희후가 죽고 아들 헌후(獻侯) 적(籍)이 왕위를 이었다. 헌후는 재위 11년 만에 죽고 아들 목후(穆侯) 비왕(費王)이 왕위에 올랐다.
穆侯四年, 取斉女姜氏為夫人. 七年, 伐条. 生太子仇.11) 十年, 伐千畝, 有功.12) 生少子, 名曰成師.13) 晉人師服曰:14)「異哉, 君之命子也! 太子曰仇, 仇者讎也. 少子曰成師, 成師大号, 成之者也. 名, 自命也;物, 自定也. 今適庶名反逆, 此後晉其能毋亂乎?」
二十七年, 穆侯卒, 弟殤叔自立, 太子仇出奔. 殤叔三年, 周宣王崩. 四年, 穆侯太子仇率其徒襲殤叔而立, 是為文侯.
文侯十年, 周幽王無道, 犬戎殺幽王, 周東徙. 而秦襄公始列為諸侯.
목후 4년, 제나라의 여자 강씨(姜氏)를 부인으로 삼았다. 7년, 조(條) 지방을 정벌했다. 태자 구(仇)를 낳았다. 10년, 천무(千畝)를 정벌하고 전공을 세웠다. 둘째 아들을 얻었는데 이름을 성사(成師)라 했다. 진나라 대부 사복(師服)이 말하기를 “괴이하도다! 군왕이 아들들에게 이름을 붙인 것이! 태자는 구(仇)라고 했는데 구는 원수라는 뜻이다. 그리고 작은아들을 성사(成師)라고 했는데 성사는 큰 이름으로 무엇을 이룬다는 뜻이다. 이름이라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을 칭하는 것이며 그 실질적인 내용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지금 적자와 서자의 이름이 반대로 되었으니 이것은 이후에 진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을 예고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 했다.
27년에 목후가 죽고 아우 상숙(殤叔)이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태자 구는 피신했다. 상숙 3년에 주 선왕이 붕어했다. 4년, 목후의 태자 구가 그의 무리들을 이끌고 상숙을 습격해 왕위에 올랐는데 이 사람이 곧 문후(文侯)이다.
문후 10년, 주 유왕(周幽王)이 무도(無道)해 견융(犬戎)이 유왕을 시해하자 주나라는 동쪽으로 옮겼다. 진 양공(秦襄公)이 처음으로 제후의 열에 올랐다.
三十五年, 文侯仇卒, 子昭侯伯立.
35년에 문후가 죽고 아들 소후(昭侯) 백(伯)이 왕위를 이었다.
昭侯元年, 封文侯弟成師于曲沃.15) 曲沃邑大於翼. 翼, 晉君都邑也.16) 成師封曲沃, 号為桓叔. 靖侯庶孫欒賓17)相桓叔. 桓叔是時年五十八矣, 好徳, 晉国之衆皆附焉. 君子曰:「晉之亂其在曲沃矣. 末大於本而得民心, 不亂何待!」
소후 원년, 문후의 아우 성사를 곡옥(曲沃)에 봉했다. 곡옥의 성읍(城邑)은 익성(翼城)보다 컸다. 익성은 진나라의 도성(都城)이다. 성사가 곡옥에 봉해지자 환숙(桓叔)으로 칭해졌다. 정후의 서얼 손자 난빈(欒賓)이 재상이 되어 환숙을 보좌했다. 환숙은 이때 58세로 덕치를 즐겨 베풀었으므로 진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를 따랐다. 군자가 말하기를 “진나라의 환란은 장차 곡옥에 있을 것이다. 그 가지가 근본보다 크고 민심을 얻었으니 어찌 난이 없기를 바라겠는가?”라 했다.
七年, 晉大臣潘父弑其君昭侯而迎曲沃桓叔. 桓叔欲入晉, 晉人発兵攻桓叔. 桓叔敗, 還帰曲沃. 晉人共立昭侯子平為君, 是為孝侯. 誅潘父.
7년, 진나라의 대신 반보(潘父)가 그의 주군 소후를 시해하고 곡옥의 환숙을 맞아들였다. 환숙은 진나라의 도성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진나라 사람들이 군사를 일으켜 환숙을 공격했다. 환숙은 실패하자 곡옥으로 돌아갔다. 진나라 사람들은 함께 소후의 아들 평(平)을 임금으로 삼았다. 이 사람이 효후(孝侯)이다. 그리고 반보를 주살했다.
孝侯八年, 曲沃桓叔卒, 子鱔18)代桓叔, 是為曲沃荘伯. 孝侯十五年, 曲沃荘伯弑其君晉孝侯于翼. 晉人攻曲沃荘伯, 荘伯复入曲沃. 晉人复立孝侯子郄19)為君, 是為鄂侯.
효후 8년, 곡옥의 환숙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 선(鮮)이 환숙을 대신했다. 그가 곡옥의 장백(莊伯)이다. 효후 15년, 곡옥의 장백이 익성에서 그의 주군 효후를 시해했다. 진나라 사람들이 장백을 공격하자 장백은 다시 곡옥으로 후퇴했다. 진나라 사람들은 또 효후의 아들 극(郄)을 주군으로 옹립했으니 그가 악후(鄂侯)이다.
鄂侯二年, 魯隠公初立.
악후 2년, 노나라의 은공(隱公)이 새로 즉위했다.
鄂侯六年卒. 曲沃荘伯聞晉鄂侯卒, 乃興兵伐晉. 周平王使虢公将兵伐曲沃荘伯, 荘伯走保曲沃. 晉人共立鄂侯子光, 是為哀侯.
악후는 재위 6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곡옥의 장백은 진 악후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진의 도성을 공격했다. 주 평왕이 괵공(虢公)을 파견해 군사를 이끌고 장백을 토벌하게 하자 장백은 도망가서 곡옥을 지켰다. 진나라 사람들은 다 함께 악후와 아들 광(光)을 옹립했는데 그가 애후(哀侯)이다.
哀侯二年曲沃荘伯卒, 子称代荘伯立,20) 是為曲沃武公. 哀侯六年, 魯弑其君隠公. 哀侯八年, 晉侵陘廷.21) 陘廷與曲沃武公謀, 九年, 伐晉于汾旁,22) 虜哀侯. 晉人乃立哀侯子小子為君, 是為小子侯.23)
애후 2년, 곡옥의 장백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칭(稱)이 뒤를 이었는데 그가 곧 곡옥의 무공(武公)이다. 애후 6년, 노나라가 그의 주군 은공을 시해했다. 애후 8년, 진나라는 형정(陘廷)을 침략했다. 형정 사람들은 곡옥의 무공과 상의해 9년에 진나라를 공격해 분하 근방에서 애후를 포로로 잡았다. 진나라 사람들은 애후의 아들 소자(小子)를 주군으로 옹립했는데 그가 소자후(小子侯)이다.
小子元年, 曲沃武公使韓萬殺所虜晉哀侯.24) 曲沃益彊, 晉無如之何.
소자 원년에 곡옥의 무공이 한만(韓萬)을 보내어 포로인 애후를 죽였다. 곡옥은 더욱 강성해져 진나라는 그곳을 어찌할 수 없었다.
晉小子之四年, 曲沃武公誘召晉小子殺之. 周桓王使虢仲25)伐曲沃武公, 武公入于曲沃, 乃立晉哀侯弟緡為晉侯.
소자 4년, 무공이 소자를 유인해 그를 시해했다. 주 환왕(周桓王)은 괵중(虢仲)을 보내어 무공을 정벌하려 했다. 그러자 무공은 곡옥으로 후퇴해 애후의 아우 민(緡)을 진후(晉侯)로 세웠다.
晉侯緡四年, 宋執鄭祭仲而立突為鄭君. 晉侯十九年, 斉人管至父弑其君襄公.
진후 희민 4년, 송나라가 정(鄭)나라의 대부 제중(祭仲)을 잡고 강제로 희돌(姬突)을 정나라 주군으로 옹립하려고 했다. 진후 19년, 제나라 사람 관지보(管至父)가 그의 주군 양공(襄公)을 시해했다.
晉侯二十八年, 斉桓公始霸. 曲沃武公伐晉侯緡, 滅之, 尽以其宝器賂献于周釐王. 釐王命曲沃武公為晉君, 列為諸侯, 於是尽併晉地而有之.
진후 28년, 제 환공이 패자(覇者)로 칭하기 시작했다. 곡옥의 무공이 진후 민을 공격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보화와 기물을 주 희왕(周釐王)에게 뇌물로 바쳤다. 희왕은 곡옥의 무공을 진나라의 주군으로 임명하고 제후로 삼았다. 이때 무공은 진 나라의 토지를 전부 병탄해 자신의 소유로 삼았다.
曲沃武公已即位三十七年矣, 更号曰晉武公. 晉武公始都晉国, 前即位曲沃, 通年三十八年.
곡옥 무공은 재위한 지 37년이 되었을 때 진 무공(晉武公)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제에서야 진 무공은 진나라의 도성으로 옮겼다. 이전에 곡옥에서 즉위한 것을 통합하면 모두 38년이 된다.
武公称者, 先晉穆侯曾孫也,26) 曲沃桓叔孫也. 桓叔者, 始封曲沃. 武公, 荘伯子也. 自桓叔初封曲沃以至武公滅晉也, 凡六十七歳, 而卒代晉為諸侯. 武公代晉二歳, 卒. 與曲沃通年, 即位凡三十九年而卒. 子献公詭諸立.
무공 칭은 이전 진 목후(晉穆侯)의 증손이며, 곡옥 환숙의 손자이다. 환숙은 곡옥에서 처음으로 봉작을 받았다. 무공은 장백의 아들이다. 환숙이 곡옥에서 봉작을 받을 때부터 무공이 진나라를 멸망시킬 때까지 도합 67년이 걸려서야 마침내 진나라를 대신해 제후가 된 것이다. 무공은 진나라를 대신한 지 2년 만에 죽었다. 곡옥에서 있을 때부터 합산하면 재위39년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들 헌공(獻公) 궤제(詭諸)가 그 뒤를 이었다.
献公元年, 周恵王弟穨攻恵王, 恵王出奔, 居鄭之櫟邑.27)
헌공 원년, 주 혜왕의 아우 퇴(穨)가 혜왕을 공격했다. 혜왕은 도성을 빠져나가 난을 피하고, 정나라의 역읍(櫟邑)에 머물렀다.
五年, 伐驪戎, 得驪姫、28)驪姫弟, 倶愛幸之.
5년, 헌공은 여융(驪戎)을 정벌하고 여희(驪姬)와 여희의 여동생을 얻었는데, 그는 그 둘을 모두 총애했다.
八年, 士蔿説公29)曰:「故晉之群公子多, 不誅, 亂且起.」乃使尽殺諸公子, 而城聚都之,30) 命曰絳, 始都絳.31) 九年, 晉群公子既亡奔虢, 虢以其故再伐晉, 弗克. 十年, 晉欲伐虢, 士蔿曰:「且待其亂.」
8년, 대부 사위(士蔿)가 헌공에게 건의하며 말했다. “진나라의 공자들은 원래 많아서 그들을 다 죽이지 않으면 환란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래서 헌공은 사람을 파견해 그 공자들을 모두 살해했다. 그리고 성을 쌓아 도읍으로 하고 이름은 강(絳)이라고 했으니, 이때부터 강은 도성이 되었다.
9년, 진나라의 공자들이 이미 괵나라로 도망을 하고 괵나라는 이를 트집삼아 진나라를 재차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10년, 진나라가 괵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자 사위가 “그들이 난을 일으킬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 했다.
十二年, 驪姫生奚斉. 献公有意廃太子, 乃曰:「曲沃吾先祖宗廟所在, 而蒲邊秦, 屈邊翟,32) 不使諸子居之, 我懼焉.」於是使太子申生居曲沃, 公子重耳居蒲, 公子夷吾居屈. 献公與驪姫子奚斉居絳. 晉国以此知太子不立也. 太子申生, 其母斉桓公女也, 曰斉姜, 早死. 申生同母女弟為秦穆公夫人. 重耳母, 翟之狐氏女也. 夷吾母, 重耳母女弟也. 献公子八人, 而太子申生、重耳、夷吾皆有賢行. 及得驪姫, 乃遠此三子.
12년, 여희가 해제(奚齊)를 낳았다. 헌공은 의도적으로 태자를 폐할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말하기를 “곡옥은 우리의 선조의 묘소가 있는 곳이며, 포읍(蒲邑)은 진(秦)나라와 가까우며, 굴읍(屈邑)은 적(翟)과 가깝다. 만약 아들들을 보내 그곳을 지키게 하지 않는다면 난이 일어날까 걱정스러울 것이다.”라 했다.
그래서 태자 신생(申生)은 곡옥에, 공자 중이(重耳)는 포읍에, 공자 이오(夷吾)는 굴읍에 각각 머물도록 했다. 헌공과 여희의 아들 해제는 도성인 강(絳)에 머물렀다. 진나라 사람들은 이로써 태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할 줄을 알았다. 태자 신생의 어머니는 제 환공의 딸로 이름은 제강(齊姜)이었는데 일찍 죽었다. 어머니가 같은 신생의 누이동생은 진 목공(秦穆公)의 부인이 되었다. 중이의 어머니는 적족(翟族) 고씨(孤氏)의 딸이었다. 이오의 어머니는 중이의 어머니의 여동생이었다. 헌공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태자 신생과 공자 중이, 이오가 현명하고 품행이 선량했다. 그러나 여희를 얻고 난 후, 헌공과 그의 세 아들은 소원해졌다.
十六年, 晉献公作二軍.33) 公将上軍, 太子申生将下軍, 趙夙御戎, 畢萬為右, 伐滅霍, 滅魏, 滅耿.34) 還, 為太子城曲沃, 賜趙夙耿, 賜畢萬魏, 以為大夫. 士蔿曰:「太子不得立矣. 分之都城,35) 而位以卿,36) 先為之極,37) 又安得立! 不如逃之, 無使罪至. 為呉太伯, 不亦可乎,38) 猶有令名.」39)太子不従. 卜偃曰:「畢萬之後必大.40) 萬, 盈數也;魏, 大名也.41) 以是始賞, 天開之矣.42) 天子曰兆民, 諸侯曰萬民, 今命之大, 以従盈數, 其必有衆.」43)初, 畢萬卜仕於晉国, 遇屯之比.44) 辛廖占之曰:「吉.45) 屯固比入, 吉孰大焉.46) 其後必蕃昌.」
16년, 진 헌공이 상, 하 2군(二軍)을 만들었다. 헌공 자신은 상군, 태자 신생은 하군을 각각 통솔했다. 그리고 조숙(趙夙)은 어가와 병거를 담당하고, 필만(畢萬)은 호위를 담당하게 해 괵(虢), 위(魏), 경(耿) 나라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군대를 거두고 돌아와 태자더러 곡옥에 성을 쌓도록 하고 경나라의 땅은 조숙에게, 위나라의 땅은 필만에게 주어 그들을 대부로 삼았다. 사위가 태자 신생에게 말하기를 “태자께서는 왕위에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도성을 나누어주고 경(卿)의 작위를 주었는데 이것으로 녹위(祿位)의 극점에 도달했으니 어찌 다시 직위를 얻을 수 있겠사옵니까? 차라리 도망해 죄가 이르는 것을 미연에 피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오나라 태백(太伯)이 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사옵니까? 그러면 좋은 이름을 남길 것이옵니다.” 태자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복언(卜偃)이 말하기를 “필만의 후손들은 반드시 발전할 것이다. 만(萬)이란 수가 가득 찬 것이요, 위(魏)는 높고 크다는 뜻이다. 위나라 땅을 필만에게 상으로 주었으니 하늘이 그의 복을 열어준 것이다. 천자에게는 억조창생이 있고 제후에게는 만민(萬民)이 있는데 지금 그에게 큰 이름을 내리고 그로써 숫자를 채우게 하니 반드시 무리들이 따를 것이다.”라 했다.
처음에 필만이 점을 쳐서 진나라에서의 관리생활을 물었더니 “둔(屯)” 괘에서 “비(比)” 괘로 변했다. 신료(辛廖)가 예측하기를 “길하다. 둔은 견고하다는 뜻이며 비는 들어간다는 의미가 있으니, 무엇이 이보다 길할 것인가! 그의 후대는 반드시 번창할 것이다.”라 했다.
十七年, 晉侯使太子申生伐東山.47) 里克諫献公曰:48)「太子奉冢祀社稷之粢盛, 以朝夕視君膳者也,49) 故曰冢子. 君行則守, 有守則従,50) 従曰撫軍,51) 守曰監国, 古之制也. 夫率師, 専行謀也;52)誓軍旅,53) 君與国政之所図也:54)非太子之事也. 師在制命而已,55) 稟命則不威, 専命則不孝, 故君之嗣適不可以帥師. 君失其官,56) 率師不威, 将安用之?」57)公曰:「寡人有子, 未知其太子誰立.」里克不対而退, 見太子. 太子曰:「吾其廃乎?」里克曰:「太子勉之! 教以軍旅,58) 不共是懼, 何故廃乎? 且子懼不孝, 毋懼不得立.59) 修己而不責人, 則免於難.」太子帥師, 公衣之偏衣,60) 佩之金玦.61) 里克謝病, 不従太子. 太子遂伐東山.
17년, 헌공은 태자 신생을 보내 동산(東山)을 정벌하게 했다. 이극(里克)이 헌공에게 다음과 같이 간했다. “태자는 종묘의 제사와 사직의 제물을 봉헌하며, 조석으로 주군의 음식을 점검하는 사람이옵니다. 그래서 ‘적자 맏아들’이라고 하는 것이옵니다. 주군께오서 밖으로 행차하오시면 안에서 지키시고, 주군께오서 안에서 지키시오면 태자는 수행하십니다. 수행하는 것을 ‘무군(撫軍)’, 즉 주군을 보필하며 군사들을 위무하는 것이라 하고, 지키는 것을 ‘감국(監國)’, 즉 주군을 대신해서 국정을 관리 감독하는 것이라 하옵니다. 이는 옛날부터 내려온 제도이옵니다.
군대를 통솔하는 것은 군무를 전담하는 것이요, 명령을 내리는 것은 주군과 경(卿)이 도모하는 것이오니 이는 태자가 할 일은 아니옵니다. 군대의 총사령관은 명령을 제정하고 발포(發布)하는 데에 있을 뿐, 만약 주군께 보고하고 지시를 받는다면 위엄이 없어질 것이요, 독단으로 전횡한다면 이것은 불효이옵니다. 하여 주군의 왕위를 이을 적자(嫡子)는 군대를 통솔할 사령관이 될 수는 없사옵니다. 주군께서 태자더러 군대를 통솔하라 하시어 사람을 잘못 쓰시면, 태자께서 군대를 통솔하시는 데 위엄이 없어지실 것이니 이렇게 되면 장차 어떻게 하시겠사옵니까?”
그러자 헌공이 말하기를 “과인에게는 몇 명의 아들이 있는데 장차 누구를 태자로 세울지 아직 모르겠소?”라 했다. 이극은 대답을 하지 않고 물러났다. 태자를 만났는데 태자가 말했다. “나는 장차 폐위될 것인가?” 이극이 말했다. “태자께서는 노력하십시오. 군사 일을 배우시고 임무를 잘 완성하지 못할까만을 걱정하신다면 폐출될 이유가 있겠사옵니까? 또 태자께서는 불효하지 않을까만을 걱정하시고 왕위를 계승하지 못할까 하는 것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사옵니다. 자신을 닦으며 남을 질책하지 않으시면 위난을 면하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태자가 군대를 통솔하자 헌공은 그에게 좌우가 서로 다른 옷을 입게 하고 병권을 상징하는 금제(金製) 패옥을 차게 했다. 이극은 병이 있다고 사양하고 태자를 따르지 않았다. 태자는 마침내 동산을 정벌했다.
十九年, 献公曰:「始吾先君荘伯、武公之誅晉亂, 而虢常助晉伐我,62) 又匿晉亡公子, 果為亂. 弗誅, 後遺子孫憂.」乃使荀息以屈産之乗63)仮道於虞. 虞仮道, 遂伐虢,64) 取其下陽以帰.65)
19년, 헌공이 말하기를 “예전 우리들의 주군이신 장백과 무공께서 진(晉)나라의 난신을 주살할 때, 괵나라는 항상 진(晉)나라를 도와 우리를 공격했으며 진나라에서 도망한 공자를 은닉하기도 했다. 만약 그들을 토벌하지 않으면 이후 자손들에게 우환을 남길 것이다.”라 했다. 그래서 순식(荀息)을 파견해 굴읍에서 난 말을 타고 우(虞)나라에게 길을 빌려 달라 했다. 우나라가 길을 빌려주자 마침내 괵나라를 정벌해 그 하양(下陽) 지방을 취하고 돌아왔다.
献公私謂驪姫曰:「吾欲廃太子, 以奚斉代之.」驪姫泣曰:「太子之立, 諸侯皆已知之, 而數将兵, 百姓附之, 柰何以賎妾之故廃適立庶? 君必行之, 妾自殺也.」驪姫詳誉太子, 而陰令人譖悪太子, 而欲立其子.
헌공은 비밀리에 여희에게 말하기를 “과인은 태자를 폐출하고 해제로 그를 대신하려고 하오.”라고 하자, 여희가 울며 말하기를 “태자의 지위는 모든 제후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이며, 또 그는 수차례나 군대를 통솔해 백성들이 그에게 기울어져 있는데 천첩이 어떻게 고의로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운다는 말씀이십니까? 군왕께서 반드시 그리 하시겠다면 첩은 자살하겠사옵니다.”라 했다. 여희가 태자를 칭찬하는 척했으나 암암리에 사람들로 하여금 태자를 비방하게 해 자신의 자식을 태자로 세우려고 한 것이었다.
二十一年, 驪姫謂太子曰:「君夢見斉姜, 太子速祭曲沃,66) 帰釐於君.」太子於是祭其母斉姜於曲沃, 上其薦胙於献公. 献公時出猟, 置胙於宮中. 驪姫使人置毒薬胙中. 居二日,67) 献公従猟來還, 宰人上胙献公, 献公欲饗之. 驪姫従旁止之, 曰:「胙所従來遠, 宜試之.」祭地, 地墳;68)與犬, 犬死;與小臣, 小臣死.69) 驪姫泣曰:「太子何忍也! 其父而欲弑代之, 況他人乎? 且君老矣, 旦暮之人, 曾不能待而欲弑之!」謂献公曰:「太子所以然者, 不過以妾及奚斉之故. 妾願子母辟之他国, 若早自殺, 毋徒使母子為太子所魚肉也. 始君欲廃之, 妾猶恨之;至於今, 妾殊自失於此.」70)太子聞之, 奔新城.71) 献公怒, 乃誅其傅杜原款. 或謂太子曰:「為此薬者乃驪姫也, 太子何不自辞明之?」太子曰:「吾君老矣, 非驪姫, 寝不安, 食不甘. 即辞之, 君且怒之. 不可.」或謂太子曰:「可奔他国.」太子曰:「被此悪名以出, 人誰内我? 我自殺耳.」十二月戊申, 申生自殺於新城.72)
21년, 여희가 태자에게 말했다. “군왕께서 꿈에 돌아가신 어머니 제강을 보셨사온데, 태자는 곧 곡옥으로 가서 제사를 올려야겠소. 그리고 제사에 올렸던 음식은 군왕께 보내시오.” 태자는 곡옥에 가서 그의 어머니 제강에게 제사를 드리고 제사 고기를 헌공에게 보냈다.
헌공은 이때 밖으로 사냥을 나간 터라 태자는 고기를 궁중에 놓아두었다. 여희는 사람을 시켜 그 속에 독을 넣게 했다. 이틀이 지나 헌공이 사냥터에서 돌아오자 주방장이 제사 고기를 헌공에게 바쳤다. 헌공이 그것을 먹으려고 하자 여희가 옆에서 나오며 제지했다. “제사 고기가 온 곳이 멀기 때문에 반드시 검사해 보아야 하옵니다.”라고 하며 땅에 던져 개에게 주니 개가 먹고 죽었다. 어린 환관에게 먹였더니 그 역시 죽었다.
여희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태자가 이렇게도 잔인하다니! 자신의 부친도 시해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려고 하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야? 군왕께서는 늙으셔서 머잖아 돌아가실 분이신데 그걸 참지 못하고 시해하려 하다니!” 그리고 헌공에게 말했다. “태자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소첩과 해제 때문이옵니다. 저와 해제 두 사람은 다른 나라로 피할까 하옵니다. 혹여 다소 일찍이 자살하더라도 우리 두 모자가 태자의 어육(魚肉)이 되지 않기를 바라옵니다. 애초에 군왕께서 그를 폐출하시려 할 때 소첩은 오히려 유감이라 느꼈는데 이제 보니 소첩이 크게 잘못했사옵니다.”
태자는 이 소식을 듣고 곡옥의 신성(新城)으로 도망쳤다. 헌공은 분노하여 그의 사부 두원관(杜原款)을 죽였다. 어떤 사람이 태자에게 묻기를 “독약을 넣은 사람은 여희인데 태자께서는 어찌해 스스로 해명을 하지 않으시옵니까?”라고 하자, 태자는 “우리의 군왕께서는 늙으셔서 여희가 아니면 잠도 편안히 들 수 없고 식사도 달게 드시지 못하오. 만약 해명을 하면 군왕께서 여희에게 화를 내실 터인데, 그러면 아니 되오.”라고 대답했다. 또 어떤 사람이 태자에게 말하기를 “다른 나라로 도망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옵니다.”라고 하자 태자는 “이 오명을 지고 밖으로 도망한다면 누가 나를 받아주겠소? 스스로 자살할 뿐이오.”라고 대답했다. 12월 무신일(戊申日)에 태자 신생이 신성에서 자살했다.
此時重耳、夷吾來朝. 人或告驪姫曰:「二公子怨驪姫譖殺太子.」驪姫恐, 因譖二公子:「申生之薬胙, 二公子知之.」二子聞之, 恐, 重耳走蒲, 夷吾走屈, 保其城, 自備守. 初, 献公使士蔿為73)二公子築蒲、屈城, 弗就. 夷吾以告公, 公怒士蔿. 士蔿謝曰:「邊城少冦, 安用之?」退而歌曰:「狐裘蒙茸, 一国三公, 吾誰適従!」74)卒就城. 及申生死, 二子亦帰保其城.
이때 중이와 이오가 헌공을 알현했다. 어떤 사람이 여희에게 말했다. “두 공자는 여희께서 참언을 하셔서 태자를 죽게 한 사실을 원망하고 있사옵니다.” 여희는 두려워해 헌공에게 두 사람의 잘못을 말했다. “신생이 제사 고기에 독약을 넣을 때 이 두 공자들은 이 사실을 알았사옵니다.” 두 공자는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해 중이는 포읍으로, 이오는 굴읍으로 도망을 가서 그들의 성을 굳게 닫고 친히 방비를 했다. 애초에 헌공은 사위를 보내어 두 공자를 위해서 포읍과 굴읍의 성벽을 수리하고 축조하게 했으나 완공을 하지 못했다. 이오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했고 헌공은 사위를 질책했다. 사위가 사죄하며 말하기를 “변경의 성읍에는 도적이 적은데 성벽을 쌓을 필요가 있겠사옵니까?”라고 하고 물러나왔다.
이후 그는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호피로 만든 옷 털이 어수선한데, 한 나라에 세 군주라, 나는 누구를 따라야 할꼬?”라 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포읍과 굴읍의 성벽이 완성된 것이었다. 신생이 죽자 두 공자도 돌아가 그들의 성읍을 방비했다.
二十二年, 献公怒二子不辞而去, 果有謀矣, 乃使兵伐蒲. 蒲人之宦者勃鞮75)命重耳促自殺. 重耳踰垣, 宦者追斬其衣袪.76) 重耳遂奔翟. 使人伐屈, 屈城守, 不可下.
22년, 헌공은 두 아들이 말도 없이 돌아간 것에 분노하여 과연 모반할 의사가 있었다고 인정하고 군대를 보내 포읍을 치게 했다. 포읍의 환관 발제(勃鞮)가 중이에게 빨리 자진하라고 명했다. 중이는 담을 넘어 달아났고 그 환관은 뒤를 쫓아가서 그의 옷소매를 베었다. 중이는 적(翟)나라로 도망을 갔다. 헌공은 또 사람을 보내 굴읍을 치도록 했으나 굴읍은 견실하게 방어해 깨뜨릴 수 없었다.
是歳也, 晉复仮道於虞以伐虢. 虞之大夫宮之奇諫虞君曰:「晉不可仮道也, 是且滅虞.」虞君曰:「晉我同姓, 不宜伐我.」宮之奇曰:「太伯、虞仲, 太王之子也, 太伯亡去, 是以不嗣. 虢仲、虢叔, 王季之子也, 為文王卿士, 其記勳在王室, 蔵於盟府.77) 将虢是滅, 何愛于虞? 且虞之親能親於桓、荘之族乎? 桓、荘之族何罪, 尽滅之. 虞之與虢, 脣之與歯, 脣亡則歯寒.」虞公不聴, 遂許晉. 宮之奇以其族去虞. 其冬, 晉滅虢, 虢公醜奔周.78) 還, 襲滅虞, 虜虞公及其大夫井伯百里奚79)以媵秦穆姫,80) 而修虞祀.81) 荀息牽曩所遺虞屈産之乗馬奉之献公, 献公笑曰:「馬則吾馬, 歯亦老矣!」82)
이해 진나라는 또 우(虞)나라에게 괵나라를 정벌하겠노라고 길을 빌려 달라 했다. 우나라의 대부 궁지기(宮之奇)가 우나라 주군에게 간언하기를 “진나라에게 길을 빌려주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이렇게 하면 장차 우리나라도 멸망시킬 것이옵니다.”라 했다.
우나라의 주군이 “진나라 군주와 과인은 성이 같으니 과인을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궁지기가 다시 말했다. “태백(太伯)과 우중(虞仲)은 주 태왕(周太王)의 아들로서, 태백이 도망하자 이 때문에 왕위를 계승할 수 없게 되었사옵니다. 괵중과 괵숙은 왕계(王季)의 아들이며 문왕(文王)의 경사(卿士)로 그들의 공훈은 조정에 기록되어 있고 맹약의 서류를 보존하고 있는 맹부(盟府)에 저장되어 있사옵니다. 장차 괵나라가 멸망한다면 어찌 우나라를 애석해 하겠사옵니까? 다시 말씀드려 우나라가 환숙과 장백의 자손들보다 더 친하옵니까? 환숙과 장백의 자손은 무슨 죄가 있어 전부 멸망했사옵니까? 우나라와 괵나라는 마치 이와 입술과도 같아서 입술이 없으면 이빨이 시리게 될 것이옵니다.”
우공은 듣지 않고 진나라에게 길을 허락해 주었다. 궁지기는 그의 가솔들을 데리고 우나라를 떠났다. 이해 겨울 진나라는 괵나라를 멸망시켰고 괵공 축(丑)은 주나라의 수도로 도주했다. 진나라의 군대가 돌아오면서 우나라를 습격해 멸망시키고 우공과 그의 대부 정백(井伯)과 백리해(百里奚)를 포로로 잡아 헌공의 여식 진 목희(秦穆姬)의 몸종으로 삼았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우나라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
순식이 예전에 우나라에게 준, 굴읍의 말을 끌고 헌공에게 바쳤더니 헌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말은 과인의 말이지만 이빨이 늙었도다!”라 했다.
二十三年, 献公遂発賈華等伐屈,83) 屈潰.84) 夷吾将奔翟. 冀芮曰:「不可,85) 重耳已在矣, 今往, 晉必移兵伐翟, 翟畏晉, 禍且及. 不如走梁, 梁近於秦, 秦彊, 吾君百歳後可以求入焉.」遂奔梁. 二十五年, 晉伐翟, 翟以重耳故, 亦撃晉於齧桑,86) 晉兵解而去.
23년, 헌공은 가화(賈華) 등을 보내 굴읍을 토벌하게 했다. 굴읍 사람들은 도망해 흩어졌고 이오는 적나라로 도주하려고 했다. 기예(冀芮)가 말했다. “아니 되옵니다. 중이가 이미 그곳에 있는데 당신께서 또 그곳으로 간다면 진나라는 반드시 군대를 몰아 적나라를 칠 것이옵니다. 적나라는 진나라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화는 우리들의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이옵니다. 그럴 바이면 양(梁)나라로 도주하시는 편이 나을 것이옵니다. 양나라는 진(秦)나라와 가까이 있고 진(秦)나라는 강대해 우리들의 군주가 죽고 나면 그들에게 당신을 환국하게 청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래서 이오는 양나라로 피신했다.
25년, 진(晉)나라가 적나라를 공격했다. 적나라는 중이가 있었기 때문에 설상(齧桑)에서 진나라를 공격하니 진나라는 후퇴하고 말았다.
當此時, 晉彊, 西有河西, 與秦接境, 北邊翟, 東至河内.87)
이때 진나라는 강대해 서쪽으로는 하서(河西) 지역을 차지해 진(秦)나라와 접경을 이루었고, 북쪽으로는 적나라와 인접했으며, 동쪽으로는 하내(河內) 지역에 이르렀다.
驪姫弟生悼子.88)
여희의 동생이 도자(悼子)를 낳았다.
二十六年夏, 斉桓公大会諸侯於葵丘.89) 晉献公病, 行後, 未至, 逢周之宰孔. 宰孔曰:「斉桓公益驕, 不務徳而務遠略, 諸侯弗平. 君弟毋会,90) 毋如晉何.」献公亦病, 复還帰. 病甚, 乃謂荀息曰:「吾以奚斉為後, 年少, 諸大臣不服, 恐亂起, 子能立之乎?」荀息曰:「能.」献公曰:「何以為験?」対曰:「使死者复生,91) 生者不慚,92) 為之験.」於是遂属奚斉於荀息. 荀息為相, 主国政. 秋九月, 献公卒. 里克、邳鄭欲内重耳, 以三公子之徒作亂,93) 謂荀息曰:「三怨将起, 秦、晉輔之, 子将何如?」荀息曰:「吾不可負先君言.」十月, 里克殺奚斉于喪次, 献公未葬也. 荀息将死之, 或曰不如立奚斉弟悼子而傅之, 荀息立悼子而葬献公. 十一月, 里克弑悼子于朝,94) 荀息死之. 君子曰:「詩所謂『白珪之玷, 猶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為也』,95) 其荀息之謂乎! 不負其言.」初, 献公将伐驪戎, 卜曰「歯牙為禍」.96) 及破驪戎, 獲驪姫, 愛之, 竟以亂晉.
26년 여름, 제 환공이 규구(葵丘)에서 각국의 제후와 성대한 회맹(會盟)을 가졌다. 진 헌공(晉獻公)은 병이 나서 출발이 늦어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때 주 왕실의 재공(宰孔)을 만났다. 재공이 말하기를 “제 환공이 더욱더 교만해져 덕을 닦지 않고 변방을 경략하려 해 제후들이 불평하고 있습니다. 공께서는 굳이 회맹에 참석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진나라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외다.”라 했다. 헌공도 병이 심하므로 돌아갔다. 병이 매우 위중하게 되자 순식을 불러 물었다. “과인은 해제를 후사로 삼을 것이오. 그러나 나이가 적어 대신들이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킬지도 모르니 그대가 그를 능히 옹립할 수 있겠소?” 순식은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헌공이 “무엇으로 보증할 수 있겠소?”라고 하니 순식은 “반드시 군왕께서 사후에도 다시 살아나신 듯하게 명령을 따를 것이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자가 부끄럽지 않도록 할 것이오니 이로써 보증하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헌공은 해제를 순식에게 맡겼다. 순식은 재상이 되어 국정을 주관했다.
가을 9월에 헌공이 세상을 떠났다. 이극과 대부 비정(邳鄭)은 중이를 영접하고자 해 3공자의 무리를 이용해 난을 일으켰다. 순식에게 말하기를 “세 사람의 원한이 일어나려고 하며 밖으로는 진(秦)나라가 안으로는 나라 사람들이 도우려고 하는데 그대는 장차 어떻게 할 것이오?”라고 하자 순식이 말했다. “나는 선군의 말씀을 어길 수 없소이다.”
10월, 이극이 장례를 지내는 곳에서 해제를 살해했다. 헌공의 장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순식이 해제를 따라서 죽고자 할 때 어떤 사람이 “해제의 아우 도자를 옹립해 그를 보좌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라고 말했다. 순식은 곧 도자를 옹립하고 헌공의 장례를 완전히 마쳤다.
11월, 이극은 조정에서 도자를 시해했다. 순식도 따라서 죽었다. 군자가 말하기를 “『시경』에서 말하기를 ‘백옥의 반점은 더욱 닦을 수 있으나, 말이 잘못된 것은 고칠 수 없다’라고 했으니 이 말은 순식을 두고 한 말인가 한다. 그는 그의 말을 어기지 않았다.”라 했다. 애초에 헌공이 여융을 공격할 때 점[卜]에 말하기를 “치아(齒牙)가 화근이 된다.”라 했다. 뒷날 여융을 쳐서 여희를 얻고 그녀를 총애했으나 마침내 이로써 난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里克等已殺奚斉、悼子, 使人迎公子重耳於翟,97) 欲立之. 重耳謝曰:「負父之命98)出奔, 父死不得脩人子之礼侍喪, 重耳何敢入! 大夫其更立他子.」還報里克, 里克使迎夷吾於梁. 夷吾欲往, 呂省、99)郤芮100)曰:「内猶有公子可立者而外求, 難信. 計非之秦, 輔彊国之威以入, 恐危.」乃使郤芮厚賂秦, 約曰:「即得入, 請以晉河西之地與秦.」及遺里克書曰:「誠得立, 請遂封子於汾陽之邑.」101)秦繆公乃発兵送夷吾於晉. 斉桓公聞晉内亂, 亦率諸侯如晉. 秦兵與夷吾亦至晉, 斉乃使隰朋会秦倶入夷吾, 立為晉君, 是為恵公. 斉桓公至晉之高梁而還帰.
이극 등이 이미 해제와 도자를 죽이고 적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공자 중이를 영접하고 그를 왕으로 옹립하고자 했다. 중이는 사양하며 말했다. “어버이의 명령을 거역해 나라 밖으로 도주했고, 어버이가 돌아가셨는데도 자식의 예로써 장례를 치르지도 못했으니 내 어찌 감히 환국하겠소! 대부들은 다른 공자를 옹립하시오.” 사자가 이극에게 보고하니 이극은 양나라에 사람을 보내 이오를 영접하고자 했다. 이오는 가려고 했으나 여성(呂省)과 극예(郤芮)가 말했다. “국내에 아직 왕위를 이을 공자가 있는데 국외에서 찾는다는 것은 믿을 수 없사옵니다. 만약 진(秦)나라로 가서 강국의 도움을 받지 않고 환국한다면 위험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극예로 하여금 후한 뇌물을 가지고 진(秦)나라로 가게 해 “만약 환국할 수 있게 한다면 진(晉)나라의 하서(河西) 지방을 진(秦)나라에게 주도록 한다.”라는 약속을 했다. 동시에 이극에게 서신을 보내어 “진실로 왕위를 이을 수 있다면 분양(汾陽)의 성읍을 당신에게 봉토로 주겠다.”라 했다.
진 목공(秦穆公)은 곧 이오에게 군대를 보내어 환국할 수 있도록 했다. 제 환공도 진(晉)나라에 내란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후들을 인솔해 진나라로 갔다. 진(秦)나라 군대와 이오도 진나라에 도착했다. 제나라에서 습붕(隰朋)을 보내 진(秦)나라와 회동해 함께 이오를 환국시키고 그를 진(晉)나라의 군왕으로 옹립했으니 그가 곧 혜공(惠公)이다. 제 환공은 진(晉)나라의 고량(高梁)에 이르렀다가 돌아갔다.
恵公夷吾元年, 使邳鄭謝秦曰:「始夷吾以河西地許君, 今幸得入立. 大臣曰:『地者先君之地, 君亡在外, 何以得擅許秦者?』寡人争之弗能得, 故謝秦.」亦不與里克汾陽邑, 而奪之権. 四月, 周襄王使周公忌父102)会斉、秦大夫共礼晉恵公. 恵公以重耳在外, 畏里克為変, 賜里克死. 謂曰:「微里子寡人不得立. 雖然, 子亦殺二君一大夫,103) 為子君者不亦難乎?」里克対曰:「不有所廃, 君何以興? 欲誅之, 其無辞乎? 乃言為此! 臣聞命矣.」遂伏剣而死. 於是邳鄭使謝秦未還, 故不及難.
혜공 이오 원년, 비정을 진(秦)나라에 보내어 사과의 말을 전했다. “처음에 이오가 하서 지방을 군왕에게 드리기로 해 이제 다행히 환국해 왕위에 올랐소이다. 대신들이 말하기를 ‘토지는 선군의 토지인데 주군께서 국외로 도주하셨다가 무엇을 믿고 마음대로 진(秦)나라에게 허락하셨습니까?’라고 해서 과인은 수차례 논쟁을 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어 이렇게 귀국에 대해서 사과를 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분양의 땅을 이극에게 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권력을 빼앗았다.
4월, 주 양왕(周襄王)이 주공(周公) 기보(忌父)를 보내어 제나라와 진(晉)나라의 대부와 회동해 공동으로 진 혜공(晉惠公)을 방문하기로 했다. 혜공은 중이가 국외에 있기 때문에 이극이 정변을 일으킬까 두려워 그에게 자살을 명했다. “그대가 없었더라면 과인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오. 비록 그렇더라도 그대 역시 두 군주와 한 명의 대부를 살해했으니 그대의 임금된 사람으로 어찌 난처하지 않겠소?” 이극이 대답했다. “이전에 주군을 폐하지 않았다면 주군께서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겠사옵니까? 그러나 이미 즉위하신 지금, 저를 죽이시려 하신다면 그 또한 어찌 구실이 없겠사옵니까? 마침내 이같이 말씀하신다면 신은 명령을 따르겠사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칼로 자진했다.
비정은 진(秦)나라에 사죄의 사절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변을 당하지 않았다.
晉君改葬恭太子申生.104) 秋, 狐突之下国,105) 遇申生, 申生與載而告之106)曰:「夷吾無礼, 余得請於帝,107) 将以晉與秦, 秦将祀余.」狐突対曰:「臣聞神不食非其宗, 君其祀毋乃絶乎? 君其図之.」申生曰:「諾, 吾将复請帝. 後十日,108) 新城西偏将有巫者見我焉.」109)許之, 遂不見.110) 及期而往, 复見, 申生告之曰:「帝許罰有罪矣, 獘於韓.」111)児乃謠曰:「恭太子更葬矣,112) 後十四年, 晉亦不昌, 昌乃在兄.」
진나라의 주군 이오는 태자 신생의 무덤을 개장(改葬)했다. 가을에 호돌(狐突)이 옛 도성, 즉 곡옥으로 갔다가 신생을 만났다. 신생이 호돌더러 수레를 함께 타라고 하며 그에게 말했다. “이오는 무례하다. 내가 천제(天帝)께 청을 드려 진(晉)나라를 진(秦)에게로 귀속시키게 할 것이다. 그러면 진(秦)나라는 나를 위해서 제사를 지낼 것이다.” 호돌이 대답했다. “제가 듣기로 신령은 자신의 친족이 아닌 사람이 지내는 제사는 흠향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렇게 한다면 당신의 제사가 단절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당신께서는 이러한 이치를 다시 한 번 고려하셔야 합니다.” 신생이 말했다. “내 천제께 다시 청해 보겠다. 열흘 이후 신성(新城) 서쪽에 무당이 있어 나의 신령을 현현시킬 것이다.” 호돌이 대답하자 신생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호돌은 기한이 되자 약속 장소로 가서 신생을 또 만났다. 신생이 그에게 말했다. “천제께 죄 있는 사람을 징벌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한원(韓原)에서 패배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태자의 묘 개장했네. 14년 이후 진나라도 창성(昌盛)하지 못하리. 창성하는 것은 형(兄)에게 있지.”라는 동요가 생겼다.
邳鄭使秦, 聞里克誅, 乃説秦繆公曰:「呂省、113)郤称、冀芮実為不従.114) 若重賂與謀, 出晉君, 入重耳, 事必就.」秦繆公許之, 使人與帰報晉, 厚賂三子. 三子曰:「幣厚言甘, 此必邳鄭売我於秦.」遂殺邳鄭及里克、邳鄭之党七輿大夫.115) 邳鄭子豹奔秦, 言伐晉, 繆公弗聴.
비정은 진나라로 사신을 갔다가 이극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진 목공(秦穆公)에게 말했다. “여성(呂省), 극칭(郤稱), 기예(冀芮)는 확실히 하서 지역을 진(秦)나라에게 주기를 반대했었사옵니다. 만약 그들에게 많은 재물을 주고 상의해 진군(晉君) 이오를 축출하고 중이를 환국시키도록 한다면 일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옵니다.” 진 목공은 이를 허락하고 사람을 파견해 비정과 함께 진(晉)나라로 들어가서 세 사람에게 뇌물을 듬뿍 보냈다.
세 사람은 말했다. “선물이 많고 말이 달콤한 것으로 보아서 이것은 비정이 우리를 진(秦)나라에게 팔아넘기려는 수작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들은 비정과, 이극·비정의 무리인 일곱 명의 대부를 주살했다. 비정의 아들 비표(邳豹)는 진(秦)나라로 도주해 진나라를 공격하자고 건의했으나 목공은 듣지 않았다.
恵公之立, 倍秦地及里克, 誅七輿大夫, 国人不附. 二年, 周使召公過116)礼晉恵公, 恵公礼倨,117) 召公譏之.
혜공은 즉위한 이후 진(秦)나라에게 땅을 주겠다는 약속과 이극에게 봉토를 주겠노라는 약속을 어겼다. 뿐만 아니라 일곱 대부마저 살해했으니 민심이 그에게로 향하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2년, 주 왕실이 소공(召公) 과(過)를 보내어 진 혜공을 방문하게 했는데 혜공의 태도가 오만해 소공은 그를 비난했다.
四年, 晉饑, 乞糴於秦. 繆公問百里奚,118) 百里奚曰:「天菑流行, 国家代有, 救菑恤鄰, 国之道也. 與之.」邳鄭子豹曰:「伐之.」繆公曰:「其君是悪, 其民何罪!」卒與粟, 自雍属絳.
4년, 진(晉)나라는 기근이 발생하자 진(秦)나라에게 양식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목공은 백리해(百里奚)에게 물었다. 백리해가 대답했다. “하늘의 재앙은 돌고 도는 것이라 각국에서 돌아가며 발생하는 것이옵니다. 기근의 재앙을 구제하고 이웃 나라를 두루 도와주는 것은 국가의 정당한 도리일 것이옵니다. 도와주시지요.” 비정의 아들 표가 말했다. “그들을 공격해야 하옵니다.” 목공이 말했다. “그 나라의 국왕은 과인도 매우 싫어하지만 그의 백성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 마침내 그들에게 양식을 주기로 하고 진(秦)나라의 도성 옹(雍)에서 진(晉)나라의 강읍(絳邑)까지 수송해 주었다.
五年, 秦饑, 請糴於晉. 晉君謀之, 慶鄭曰:119)「以秦得立, 已而倍其地約. 晉饑而秦貸我, 今秦饑請糴, 與之何疑? 而謀之!」虢射曰:120)「往年天以晉賜秦, 秦弗知取而貸我. 今天以秦賜晉, 晉其可以逆天乎? 遂伐之.」恵公用虢射謀, 不與秦粟, 而発兵且伐秦. 秦大怒, 亦発兵伐晉.
5년, 진(秦)나라에 기근이 발생해 진(晉)나라에게 식량을 청했다. 진(晉)나라의 혜공은 신하들과 상의했다. 경정(慶鄭)이 말했다. “진(晉)나라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르셨고 그들에게 땅을 주기로 한 약속마저 어겼는데도 우리 진나라가 기근이 들자 그들은 우리에게 양식을 팔아주었사옵니다. 이제 그들이 기근이 들어 우리에게 식량판매를 요청하니 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무슨 의문이 있어 상의하오리까?” 괵석(虢射)이 말했다. “작년에 하늘이 진(晉)나라를 진(秦)나라에게 주고자 했을 때 진(秦)나라는 공격할 줄 모르고 오히려 우리에게 식량을 팔아주었습니다. 지금 하늘이 진(秦)나라를 우리 진(晉)나라에게로 주고자 하는데 어찌 하늘의 뜻을 거역하겠사옵니까? 이 기회를 이용해서 그들을 쳐야 하옵니다.” 혜공은 괵석의 계획을 채택해 진(秦)나라에게 식량을 팔지 않고 오히려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공격했다. 진(秦)나라는 크게 노하여 역시 군대를 일으켜 진(晉)나라를 공격했다.
六年春, 秦繆公将兵伐晉. 晉恵公謂慶鄭曰:「秦師深矣,121) 柰何?」鄭曰:「秦内君, 君倍其賂;晉饑秦輸粟, 秦饑而晉倍之, 乃欲因其饑伐之:其深不亦宜乎!」晉卜御右, 慶鄭皆吉. 公曰:「鄭不孫.」122)乃更令歩陽御戎, 家僕徒為右,123) 進兵. 九月壬戌, 秦繆公、晉恵公合戦韓原.124) 恵公馬驇不行,125) 秦兵至, 公窘, 召慶鄭為御. 鄭曰:「不用卜, 敗不亦當乎!」遂去. 更令梁繇靡御,126) 虢射為右, 輅秦繆公.127) 繆公壮士冒敗晉軍, 晉軍敗, 遂失秦繆公, 反獲晉公以帰. 秦将以祀上帝. 晉君姊為繆公夫人, 衰絰涕泣. 公曰:「得晉侯将以為樂, 今乃如此. 且吾聞箕子見唐叔之初封, 曰『其後必當大矣』, 晉庸可滅乎!」乃與晉侯盟王城128)而許之帰. 晉侯亦使呂省等報国人曰:「孤雖得帰, 毋面目見社稷, 卜日立子圉.」晉人聞之, 皆哭. 秦繆公問呂省:「晉国和乎?」対曰:「不和. 小人懼失君亡親,129) 不憚立子圉, 曰『必報讎, 寧事戎、狄』.130) 其君子則愛君而知罪, 以待秦命, 曰『必報徳』. 有此二故, 不和.」於是秦繆公更舎晉恵公, 餽之七牢.131) 十一月, 帰晉侯. 晉侯至国, 誅慶鄭, 修政教. 謀曰:「重耳在外, 諸侯多利内之.」欲使人殺重耳於狄. 重耳聞之, 如斉.
6년 봄, 진 목공(秦穆公)이 군대를 통솔해 진나라를 공격했다. 진 혜공(晉惠公)이 경정에게 물었다. “진(秦)나라의 군대가 국경 깊이 들어오는데 어찌해야 하오?” “진(秦)나라가 주군(主君)을 환국시켜 왕위를 잇게 했는데 주군께서는 그와의 약속을 어겼사옵고, 우리 진나라가 기근이 들었을 때 진(秦)나라는 양곡을 수송해 주었는데 그 진(秦)나라가 기근이 들자 우리 진나라는 오히려 은혜를 저버리고 그 기근을 틈타 그들을 공격했사옵니다. 그러니 이제 진(秦)나라가 국경 깊이 침공해 들어오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진(晉)나라는 점을 쳐서 수레와 호위를 담당할 사람으로 경정이 모두 길하다고 해 그로 결정했다. 그런데 혜공이 “경정은 불손하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보양(步陽)으로 하여금 수레와 병거를 맡게 하고, 가복도(家僕徒)로 하여금 호위를 책임지게 해서 진공하게 했다.
9월 임술일(壬戌日), 진 목공과 진 혜공이 한원에서 접전했다. 혜공의 말은 매우 무거워 진흙 속에 깊이 빠져 움직이지 못하는데 진(秦)나라 병사가 다가왔다. 혜공은 매우 급해서 경정에게 수레를 끌어오라고 소리를 쳤다. 경정이 말했다. “점쳐서 나온 말을 믿지 않으셨으니 실패해도 당연하지 않겠사옵니까?”라고 하며 떠나갔다. 다시 양요미(梁繇靡)를 보내 수레를 끌게 하고 괵석에게 호위를 담당하게 해 진 목공을 맞아 싸웠다. 진 목공의 장사가 진(晉)나라의 군대를 치니 진나라는 패퇴해 마침내 진 목공을 놓친 것은 물론, 진(秦)나라는 오히려 진 혜공을 사로잡아 귀환했다.
진(秦)나라는 장차 그를 죽여 하늘에 제사를 올리려고 했다. 진 혜공의 누이가 바로 진 목공의 부인이었는데 소복을 입고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진 목공이 말했다. “진(晉)나라의 주군을 잡아 장차 그를 즐거운 일에 쓰려고 했는데 지금 그대가 이와 같이 하다니! 그리고 과인은 들었소. 기자(箕子)가, 당숙(唐叔)이 비로소 봉작을 받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그의 후손은 반드시 창대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진(晉)나라가 실로 멸망하겠소?” 그래서 진 혜공과 왕성(王城)에서 회맹을 하고 그를 석방할 것을 허락했다.
진 혜공도 여성(呂省) 등을 파견해 백성들에게 알리기를 “과인이 비록 귀국할 수 있지만 종묘사직을 뵈올 면목이 없노라. 길일을 잡아 자어(子圉)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라.”라 했다.
진(晉)나라 백성들은 이 말을 듣자 모두 통곡을 했다. 진 목공이 여성에게 물었다. “진(晉)나라는 화목한가?” 여성은 “화목하지 않사옵니다. 백성들은 주군을 잃고 양친까지 희생당할까봐 두려워할 뿐 자어를 옹립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말하기를 ‘원수는 반드시 갚을 것이다. 비록 융(戎)이나 적(狄)과 같은 오랑캐를 섬길지언정 진(秦)나라는 섬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옵니다. 귀족들은 주군을 사랑하고 보호하려 하나 자신들이 죄 있는 줄 아는 까닭에 진(秦)나라의 명령을 기다리면서 ‘반드시 은혜에 보답할 것’이라고 하고 있으니 이러한 두 종류의 주장이 있어 화목하지 않다고 말씀 드리는 것이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진 목공은 진 혜공이 머무는 곳을 바꾸고 그에게 7뢰(牢)의 가축을 보냈다.
11월, 진 혜공을 돌려보냈다. 진 혜공은 국내로 돌아오자 경정을 주살하고 정치와 교화를 밝게 닦았다. 신하들과 계획하기를 “중이가 국외에 있다. 제후들은 대부분 그를 환국시켜 옹립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한다.”라고 판단하고서 사람을 적나라로 보내어 중이를 살해하고자 했다. 중이는 이 소식을 듣고 제나라로 피신했다.
八年, 使太子圉質秦.132) 初, 恵公亡在梁, 梁伯以其女妻之, 生一男一女. 梁伯卜之, 男為人臣, 女為人妾, 故名男為圉, 女為妾.133)
8년, 태자 어를 진(秦)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애초에 혜공이 양나라에 도망해 있을 때 양나라의 임금, 즉 양백(梁伯)이 자신의 딸을 그에게 출가시켰는데 그녀는 1남 1녀를 낳았다. 양백이 점을 쳐보았더니 남자 아이는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될 것이며 여자 아이는 타인의 첩이 될 것이라 했다. 그래서 남자 아이의 이름은 어(圉)라고 했고 여자 아이는 첩(妾)이라 했다.
十年, 秦滅梁. 梁伯好土功, 治城溝,134) 民力罷怨,135) 其衆數相驚, 曰「秦冦至」, 民恐惑, 秦竟滅之.
10년, 진(秦)나라가 양나라를 멸망시켰다. 양백은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키는 것을 좋아해서 성벽을 쌓고 호구(壕溝)를 만드는 등 백성들을 피로하게 했기에 원한을 샀다. 그리고 백성들은 수차 자기들끼리 소란을 피우며 말하기를 “진(秦)나라 놈들이 온다!”라고 하여 두려워하다가 결국 진나라에게 멸망당한 것이다.
十三年, 晉恵公病, 内有數子. 太子圉曰:「吾母家在梁, 梁今秦滅之, 我外軽於秦而内無援於国. 君即不起, 病大夫軽, 更立他公子.」乃謀與其妻倶亡帰. 秦女曰:「子一国太子, 辱在此. 秦使婢子侍,136) 以固子之心. 子亡矣, 我不従子, 亦不敢言.」子圉遂亡帰晉. 十四年九月, 恵公卒, 太子圉立, 是為懐公.
13년, 진 혜공이 병이 났는데 그에게는 국내에 많은 자식이 있었다. 태자 어가 말했다. “나의 어머니의 친정은 양나라에 있는데 양나라는 지금 진(秦)나라에게 망했다. 나는 국외에서 진나라에게 경시되고 있으며 국내에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주군께서 일어나지 못하신다면 대부들이 나를 경시할까 걱정이다. 다른 공자를 옹립하라.” 그리고 그의 처와 상의해 함께 도주하려 했다.
그러자 진(秦)나라 여자인 태자 어의 처가 말하기를 “그대는 일국의 태자로서 여기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진(秦)나라가 저더러 그대를 시봉케 해 그대의 마음을 안정시키라고 했지요. 그대가 도주하면 저는 그대의 뒤를 따를 수 없고 또 감히 도주했다고 보고할 수도 없습니다.” 어는 마침내 진(秦)나라로 돌아갔다. 14년 9월, 혜공이 죽고 태자 어가 뒤를 이었다. 이 사람이 회공(懷公)이다.
子圉之亡, 秦怨之, 乃求公子重耳, 欲内之. 子圉之立, 畏秦之伐也. 乃令国中諸従重耳亡者與期, 期尽不到者尽滅其家. 狐突之子毛及偃従重耳在秦, 弗肯召. 懐公怒, 囚狐突. 突曰:「臣子事重耳有年數矣, 今召之, 是教之反君也. 何以教之?」懐公卒殺狐突. 秦繆公乃発兵送内重耳, 使人告欒、郤之党137)為内應, 殺懐公於高梁, 入重耳. 重耳立, 是為文公.
태자 어가 도주하자 진(秦)나라는 그를 원망했다. 그래서 공자 중이를 찾아 그로 하여금 돌아가서 왕위를 잇게 하려고 했다. 태자 어는 왕위에 오르자 진(秦)나라가 공격할까 두려워, 국내에 중이를 따라 도망한 사람들을 기간 내에 환국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기간 내에 도착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가족들을 몰살시키겠다고 했다. 호돌의 아들 호모(狐毛)와 호언(狐偃)이 중이를 따라 진(秦)나라에 있었는데 호돌은 그들을 돌아오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회공은 화가 나서 호돌을 구금했다. 호돌이 말하기를 “나의 아들은 중이 공자를 모신 지 몇 해나 되었는데 지금 그들을 소환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주군을 배반하라고 교사하는 것입니다. 하면 무슨 이치로 그들을 설복시킬 수 있겠습니까?”라 했다. 회공은 마침내 호돌을 죽였다.
진 목공은 군대를 파병해 중이를 보내고, 사람을 보내어 난지(欒枝), 극곡(郤穀)의 무리와 내응하고는 고량에서 회공을 죽이고 중이를 환국시켰다. 중이가 왕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문공(文公)이다.
晉文公重耳, 晉献公之子也. 自少好士, 年十七, 有賢士五人:曰趙衰;狐偃咎犯, 文公舅也;賈佗;先軫;魏武子. 自献公為太子時, 重耳固已成人矣. 献公即位, 重耳年二十一. 献公十三年, 以驪姫故, 重耳備蒲城守秦. 献公二十一年, 献公殺太子申生, 驪姫讒之, 恐, 不辞献公而守蒲城. 献公二十二年, 献公使宦者履鞮138)趣殺重耳. 重耳踰垣, 宦者逐斬其衣袪. 重耳遂奔狄. 狄, 其母国也. 是時重耳年四十三. 従此五士, 其余不名者數十人, 至狄.
진 문공(晉文公)은 희중이(姬重耳)로 진 헌공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선비를 좋아해 나이 17세에 이미 현사(賢士) 5명을 곁에 둘 정도였다. 그들은 조최(趙衰)와 문공의 외삼촌인 호언구범(狐偃咎犯)과 가타(賈佗), 선진(先軫), 위무자(魏武子) 등이었다. 중이는 헌공 시절 태자로 있을 때 이미 성년이었다. 헌공이 즉위할 때 중이는 21세였다. 헌공 13년, 여희 때문에 중이는 포성(蒲城)에 주둔하며 진(秦)나라를 방어했다. 헌공 21년, 헌공이 태자 신생을 죽이고 여희가 그를 모함하자 그는 두려워 헌공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포성을 지켰다. 헌공 22년, 헌공이 환관 이제(履鞮), 즉 발제를 보내어 급히 중이를 주살하라고 명했다. 중이가 담을 넘어 도주하자 환관은 그를 추격해 그의 옷소매를 베어갔다. 중이는 적(狄)나라로 도주했다. 적나라는 모친의 나라였다. 이때 중이의 나이는 43세였고, 수행한 5명의 현사 외에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 수십 명이 적나라에 도착했다.
狄伐咎如,139) 得二女:以長女妻重耳, 生伯鯈、140)叔劉;以少女妻趙衰, 生盾.141) 居狄五歳而晉献公卒, 里克已殺奚斉、悼子, 乃使人迎, 欲立重耳. 重耳畏殺, 因固謝, 不敢入. 已而晉更迎其弟夷吾立之, 是為恵公. 恵公七年, 畏重耳, 乃使宦者履鞮與壮士欲殺重耳. 重耳聞之, 乃謀趙衰等曰:「始吾奔狄, 非以為可用與,142) 以近易通, 故且休足. 休足久矣, 固願徙之大国. 夫斉桓公好善, 志在霸王, 収恤諸侯. 今聞管仲、隰朋死, 此亦欲得賢佐, 盍往乎?」於是遂行. 重耳謂其妻曰:「待我二十五年不來, 乃嫁.」其妻笑曰:「犂二十五年,143) 吾冢上柏大矣.144) 雖然, 妾待子.」重耳居狄凡十二年而去.
적나라는 구여(咎如)를 토벌하고 두 여자를 얻었다. 장녀는 중이에게 보내어져 백조(伯鯈)와 숙유(叔劉)를 낳았다. 어린 여자는 조최에게 시집을 가서 조순(趙盾)을 낳았다. 중이가 적나라에서 5년 동안 머무르고 있을 때, 진 헌공이 죽자 이극이 이미 해제와 도자를 시해하고 사람을 보내어 중이를 맞아 그를 옹립하려고 했다. 중이는 피살될까 두려워 극구 사양하고 돌아가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진나라는 그의 아우 이오를 맞아 왕위를 잇게 했으니, 그가 바로 혜공이었다. 혜공 7년, 중이를 두려워해 환관 이제로 하여금 장사들을 데리고 가서 중이를 살해하고자 했다.
중이는 이 소식을 듣고 조최 등과 의논했다. “애초에 내가 적나라로 도망했으나 적나라가 나를 지원해 줄 것으로는 결코 믿지 않았소. 다만 거리가 가까워 쉽게 오갈 수 있었기 때문에 잠시 머무른 것뿐이오. 머무름이 오래되었으니 이제 큰 나라로 옮기기를 바라오. 제 환공은 선행을 좋아하고 패왕(覇王)이 되어 왕도를 펼치고 제후들을 거두어들여 도우는 데 마음을 쓰고 있지요. 이제 들으니 관중과 습붕이 죽었다는데 이때는 현명하고 능력 있는 선비를 얻고자 할 것이니 어찌 가지 않겠소?” 그래서 제나라로 출발했다.
중이가 그의 처에게 말했다. “25년을 기다려도 내가 오지 않으면 재가하시오.” 처가 웃으며 말하기를 “25년을 기다리면 제 무덤의 측백나무도 이미 크게 자랐겠사옵니다. 비록 말은 그렇지만 소첩은 그대를 기다릴 것입니다.” 이렇게 해 중이는 적나라에서 무려 12년을 머무른 후 떠났다.
過衛, 衛文公不礼. 去, 過五鹿,145) 飢而従野人乞食, 野人盛土器中進之. 重耳怒. 趙衰曰:「土者, 有土也, 君其拝受之.」
중이가 위(衛)나라를 지나가게 되었다. 위 문공(衛文公)은 예로써 그를 접대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출발해 오록(五鹿)을 지나가는데 배가 고팠다. 시골 사람에게 밥을 구걸하자 시골 사람은 그릇에다 흙을 숨겨서 그에게 주었다. 중이가 성을 냈다. 조최가 말했다. “진흙은 토지를 가진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사옵니다. 그에게 절을 하고 받으셔야 하옵니다.”
至斉, 斉桓公厚礼, 而以宗女妻之, 有馬二十乗, 重耳安之. 重耳至斉二歳而桓公卒, 会豎刀等為内亂, 斉孝公之立, 諸侯兵數至. 留斉凡五歳. 重耳愛斉女, 毋去心. 趙衰、咎犯乃於桑下謀行. 斉女侍者在桑上聞之, 以告其主. 其主乃殺侍者,146) 勧重耳趣行. 重耳曰:「人生安樂, 孰知其他! 必死於此,147) 不能去.」斉女曰:「子一国公子, 窮而來此, 數士者以子為命. 子不疾反国, 報勞臣, 而懐女徳, 窃為子羞之. 且不求, 何時得功?」乃與趙衰等謀, 酔重耳, 載以行. 行遠而覚, 重耳大怒, 引戈欲殺咎犯. 咎犯曰:「殺臣成子, 偃之願也.」重耳曰:「事不成, 我食舅氏之肉.」咎犯曰:「事不成, 犯肉腥臊, 何足食!」乃止, 遂行.
중이가 이번에는 제나라에 도착했다. 제 환공(齊桓公)은 융성하고 엄중한 예절로 그를 대접했다. 그리고 그의 친족 여자를 그에게 시집보내고 말 20승을 주었다. 중이는 이러한 생활에서 안정을 찾았다. 중이가 제나라에 온 지 2년 만에 환공이 세상을 떠나고 수조(竪刁) 등이 내란을 일으켰다.
제 효공(齊孝公)이 즉위하자 제후의 군대가 수차례 쳐들어왔다. 중이가 제나라에 있은 지 5년이 지났다. 중이는 제나라의 여인을 사랑하게 되어 제나라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조최와 구범이 뽕나무 아래에서 앞으로의 행동을 상의했다. 그 여인의 시종이 뽕나무 아래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여인에게 알렸다. 여인은 시종을 죽이고 중이에게 급히 움직이기를 권했다. 중이가 말했다. “사람이 태어나 안락하면 누가 그 다른 일을 하려고 하겠소? 반드시 여기에서 죽을 일이지 떠나지는 않겠소.”
그러자 그 제나라 여인이 말했다. “당신은 일국의 공자로서 사정이 곤궁해 여기에 오셨사옵니다. 저 현사들은 당신에게 생명을 맡기고 있는데 당신께서는 급히 환국해 신하들의 노고에 보답하시지 않고 여색에 마음을 두시니 첩은 당신을 대신해 부끄럽사옵니다. 또한 만약 지금 움직이지 않으시면 언제 공을 이루시겠사옵니까?” 그래서 조최 등과 상의해 중이를 취하게 해서는 수레에 그를 태우고 가게 했다. 일행이 한참 멀리 간 뒤 중이가 깨어났다. 그는 매우 화가 나서 창을 들고 구범을 죽이려고 했다.
구범이 말했다. “저를 죽이시어 주군의 뜻을 이루신다면 그건 저의 바람이옵니다.” 중이가 말했다. “만약 성공하지 않는다면 외삼촌의 살을 씹어 먹을 것이오.” “만약 일을 성공시키지 못하시더라도 저의 살은 비리고 상하여, 드시기에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중이는 그제에서야 멈추고 계속 전진했다.
過曹, 曹共公不礼, 欲観重耳駢脅. 曹大夫釐負羈曰:「晉公子賢, 又同姓, 窮來過我, 柰何不礼!」共公不従其謀. 負羈乃私遺重耳食, 置璧其下. 重耳受其食, 還其璧.
조(曹)나라를 지나갔으나 조나라의 공공(共公)은 예로써 대하지 않고 중이의 변협(騈脇)이라는 신체만을 보고자 할 따름이었다. 조나라의 대부 희부기(釐負羈)가 말했다. “진나라의 공자는 현명하고 능력이 있으며 또 같은 성씨로 곤궁에 빠져 우리 나라를 경유하게 되었는데 어찌 예로써 대하시지 않으십니까?” 공공은 그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 희부기는 사사로이 음식물을 중이에게 보내고 그 음식물 밑에다 옥구슬을 놓아두었다. 중이는 그의 음식을 받고 옥구슬은 돌려보냈다.
去, 過宋. 宋襄公新困兵於楚, 傷於泓, 聞重耳賢, 乃以国礼礼於重耳.148) 宋司馬公孫固善於咎犯, 曰:「宋小国新困, 不足以求入, 更之大国.」乃去.
다시 조나라를 떠나 송나라를 지나갔다. 송 양공(宋襄公)은 최근 초 나라의 군대에게 곤욕을 치르고 홍수(泓水)에서 부상을 입었다. 그는 중이가 현명하고 능력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 나라의 국왕을 대하는 예절로 중이를 접대했다.
송나라의 사마(司馬) 공손고(公孫固)는 구범과 서로 친해 그에게 말했다. “송나라는 작은 나라인 데다 최근에 곤란함을 당했지요. 송나라를 의지해서는 진나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니 큰 나라로 가시지요.” 그래서 다시 떠났다.
過鄭, 鄭文公弗礼. 鄭叔瞻諫其君曰:「晉公子賢, 而其従者皆国相, 且又同姓. 鄭之出自厲王, 而晉之出自武王.」鄭君曰:「諸侯亡公子過此者衆, 安可尽礼!」叔瞻曰:「君不礼, 不如殺之, 且後為国患.」鄭君不聴.
정나라를 지나갔으나 정 문공(鄭文公)은 예로써 접대하지 않았다. 정나라의 대부 숙첨(叔瞻)이 그의 주군에게 간했다. “진나라의 공자는 현명하고 능력이 있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모두 국가의 대들보들이옵고 또한 같은 성이옵니다. 우리 정나라는 주 여왕(周厲王)에서 나왔으나 진나라는 무왕(武王)에서 나왔사옵니다.”
정 문공이 말했다. “각국에서 망명해 온 제후들의 공자들 중 여기를 거쳐 간 사람이 매우 많은데 어떻게 그들을 모두 예로써 대한단 말이요!” 숙첨이 말했다. “주군께서 예로써 대하시지 않으시겠다면 그를 주살하시는 것이 좋사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후에 나라의 우환이 될 것이옵니다.” 문공은 듣지 않았다.
重耳去之楚, 楚成王以適諸侯礼待之,149) 重耳謝不敢當. 趙衰曰:「子亡在外十余年, 小国軽子, 況大国乎? 今楚大国而固遇子, 子其毋譲, 此天開子也.」遂以客礼見之. 成王厚遇重耳, 重耳甚卑. 成王曰:「子即反国, 何以報寡人?」重耳曰:「羽毛歯角玉帛, 君王所余, 未知所以報.」王曰:「雖然, 何以報不谷?」重耳曰:「即不得已, 與君王以兵車会平原広沢, 請辟王三舎.」150)楚将子玉怒曰:「王遇晉公子至厚, 今重耳言不孫, 請殺之.」成王曰:「晉公子賢而困於外久, 従者皆国器, 此天所置, 庸可殺乎? 且言何以易之!」151)居楚數月, 而晉太子圉亡秦, 秦怨之;聞重耳在楚, 乃召之. 成王曰:「楚遠, 更數国乃至晉. 秦晉接境, 秦君賢, 子其勉行!」厚送重耳.
중이는 정나라를 떠나 초 나라로 갔다. 초 성왕(楚成王)은 제후에 상당하는 예절로 그를 접대했다. 중이는 사양하고 감히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조최가 말했다. “주군께서 국외에 도망한 지 10여 년이라 작은 나라들도 경시하는데 큰 나라들이야 오죽하겠사옵니까? 지금 초 나라는 큰 나라인데 주군을 우대한다면 주군께서도 겸양해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건 하늘이 주군께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이도 객의 예로써 초 성왕을 대했다. 성왕은 중이를 후대했으나 중이는 매우 겸손하게 행동했다. 성왕이 말했다. “당신이 만약 환국하신다면 무엇으로 나에게 보답하시겠소?” 중이가 말했다. “진기한 금수나 옥구슬이나 비단과 같은 물건들은 국왕께도 남아도는 바일 것이니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성왕이 말했다. “비록 그렇다고 하지만 어쨌든 무엇으로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소?” 중이가 말했다. “만약 부득이해 평원(平原)의 너른 못 지역에서 병거(兵車)가 서로 만나게 되면 국왕께 90 리를 피해드리겠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초 나라의 장군 자옥(子玉)이 화를 내며 말했다. “주군께서 진나라의 공자를 지극히 후대하셨는데 이제 중이의 말이 이처럼 불손하니 그를 죽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성왕이 말했다. “진나라의 공자는 현명하고 능력이 있는데 오히려 국외에서 곤궁하고 군색하게 지낸 지 매우 오래되었소. 그리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치국의 인재들이라 이것은 모두 하늘께서 안배하신 것! 어떻게 그를 죽일 수 있겠는가? 또 그가 어떻게 말을 해야 했는지 그대가 말해 보라.”
중이가 초 나라에서 수개월을 머무르고 있을 때 진(晉)나라의 태자 어가 진(秦)나라에서 탈출했다. 진(秦)나라는 그를 매우 원망하며, 중이가 초 나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청했다. 초 성왕이 말했다. “초 나라는 거리가 많이 떨어져 다시 몇 나라를 경유해야 진(晉)나라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오. 진(秦)나라와 진나라는 서로 접경하고 있으니 그대는 부디 잘 가시오!” 그는 많은 예물을 중이에게 주었다.
重耳至秦, 繆公以宗女五人妻重耳, 故子圉妻與往. 重耳不欲受, 司空季子152)曰:「其国且伐, 況其故妻乎! 且受以結秦親而求入, 子乃拘小礼, 忘大醜乎!」遂受. 繆公大歓, 與重耳飲. 趙衰歌黍苗詩.153) 繆公曰:「知子欲急反国矣.」趙衰與重耳下, 再拝曰:「孤臣之仰君, 如百穀之望時雨.」 是時晉恵公十四年秋. 恵公以九月卒, 子圉立. 十一月, 葬恵公. 十二月, 晉国大夫欒、郤等聞重耳在秦, 皆陰來勧重耳、趙衰等反国, 為内應甚衆. 於是秦繆公乃発兵與重耳帰晉. 晉聞秦兵來, 亦発兵拒之. 然皆陰知公子重耳入也. 唯恵公之故貴臣呂、郤之属154)不欲立重耳. 重耳出亡凡十九歳而得入, 時年六十二矣, 晉人多附焉.
중이가 진나라에 도착하자 진 목공(秦穆公)은 친척 여자 다섯 명을 중이의 처로 삼게 했다. 원래 태자 어의 전처도 여기에 있었다. 중이는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으나 사공계자(司空季子)가 말했다. “그의 나라도 정벌하고자 하는데 하물며 그의 전처이겠사옵니까? 받아들여 진나라와 친분을 맺고 환국을 하셔야 할 터인데 주군께서는 어찌 소소한 예절에 구속되어 큰 치욕을 잊으시옵니까?” 그래서 중이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목공은 크게 기뻐해 중이와 함께 술을 마셨다. 조최가 “서묘(黍苗)” 시를 낭송했다. 목공이 말했다. “그대가 황급히 환국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겠소.” 조최가 중이와 함께 좌석을 떠나면서 재배(再拜)하며 말했다. “떠돌아다니던 외로운 신하가 군왕을 숭앙(崇仰)함이 마치 온갖 곡식이 때맞게 내리는 비를 바라는 것과 같사옵니다.” 이때가 진 혜공(晉惠公) 14년 가을이었다.
혜공은 9월에 세상을 떠나고 태자 어가 뒤를 이었다. 11월, 혜공을 안장했다. 12월, 진(晉)나라의 대부 난지와 극곡 등이 중이가 진(秦)나라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암암리에 와서 중이와 조최에게 환국하기를 권했으며, 내응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이때 진 목공이 중이에게 파병해 환국을 지원했다. 진(晉)나라는 진(秦)나라의 군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일으켜 그들에게 대항했다. 그러나 모든 백성들은 공자 중이가 돌아온다는 것을 암암리에 알고 있었다. 다만 혜공의 옛 신하 여성과 극예와 같은 사람들은 중이를 옹립하려 하지 않았다. 이로써 중이는 망명한 지 19년 만에 귀국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62세였다. 진나라의 대부분의 백성이 그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文公元年春, 秦送重耳至河. 咎犯曰:「臣従君周旋天下, 過亦多矣. 臣猶知之, 況於君乎? 請従此去矣.」重耳曰:「若反国, 所不與子犯共者, 河伯視之!」155)乃投璧河中, 以與子犯盟. 是時介子推従, 在船中, 乃笑曰:「天実開公子, 而子犯以為己功而要市於君, 固足羞也. 吾不忍與同位.」乃自隠渡河. 秦兵囲令狐, 晉軍于廬柳.156) 二月辛丑, 咎犯與秦晉大夫盟于郇.157) 壬寅, 重耳入于晉師. 丙午, 入于曲沃. 丁未, 朝于武宮,158) 即位為晉君, 是為文公. 群臣皆往. 懐公圉奔高梁. 戊申, 使人殺懐公.
문공 원년 봄, 진(秦)나라가 중이를 황하까지 환송했다. 구범이 말했다. “신이 주군을 따라 천하를 주유한 지 이미 오래되었사옵니다. 신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사온대 하물며 주군께선 어떠하시겠사옵니까? 청컨대 이곳을 떠나시지요.” 중이가 말했다. “만약 환국한다면 그대 구범과 마음이 같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하백(河伯)이시여! 굽어 살피소서!” 그리고는 구슬을 황하 속으로 던지고 구범과 맹서했다.
이때 개자추(介子推)가 뒤에서 따르고 있다가 배 위에서 웃으며 말했다. “실제로 하늘이 공자께 길을 열어주셨는데 구범이 자신의 공이라 생각하고 주군께 그 대가를 구하려고 하는 것은 실로 매우 부끄러운 일이옵니다. 저는 그와 함께 관직에 있기를 원하지 않사옵니다.” 그래서 개자추는 자신을 숨기고 황하를 건넜다.
진(秦)나라 병사들이 영호(令狐)를 포위하자 진(晉)나라는 여류(廬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2월 신축일(辛丑日), 구범과 진(秦) 및 진(晉) 나라의 대부들이 순(郇)에서 회맹을 했다. 임인일(壬寅日)에 중이가 진(晉)나라의 군영 속으로 들어갔다. 병오일(丙午日), 곡옥으로 진격했다. 정미일(丁未日), 무궁(武宮)에 도착해 묘에 배알하고 즉위해 진나라의 국왕이 되었으니 이 사람이 곧 문공(文公)이다. 대신들은 모두 곡옥으로 갔다. 회공 어는 고량으로 도주했다. 무신일(戊申日), 사람을 보내어 회공을 주살했다.
懐公故大臣呂省、郤芮本不附文公, 文公立, 恐誅, 乃欲與其徒謀焼公宮, 殺文公. 文公不知. 始嘗欲殺文公宦者履鞮知其謀, 欲以告文公, 解前罪, 求見文公. 文公不見, 使人譲曰:「蒲城之事, 女斬予袪. 其後我従狄君猟, 女為恵公來求殺我. 恵公與女期三日至, 而女一日至, 何速也? 女其念之.」宦者曰:「臣刀鋸之余, 不敢以二心事君倍主, 故得罪於君. 君已反国, 其毋蒲、翟乎? 且管仲射鈎, 桓公以霸. 今刑余之人以事告而君不見, 禍又且及矣.」於是見之, 遂以呂、郤等告文公. 文公欲召呂、郤, 呂、郤等党多, 文公恐初入国, 国人売己, 乃為微行, 会秦繆公於王城,159) 国人莫知. 三月己丑, 呂、郤等果反, 焚公宮, 不得文公. 文公之衛徒與戦, 呂、郤等引兵欲奔, 秦繆公誘呂、郤等, 殺之河上, 晉国复而文公得帰. 夏, 迎夫人於秦, 秦所與文公妻者卒為夫人. 秦送三千人為衛, 以備晉亂.
회공의 옛 대신 여성과 극예는 본래 문공에게 귀속하지 않았다. 문공이 즉위하자 피살될까 두려워 그들의 무리들과 함께 궁을 불사르고 문공을 시해할 계획을 세웠다. 문공은 이것을 알지 못했다.
옛날에 문공을 살해하려고 했던 환관 이제(履鞮)가 그들의 음모를 알고 이러한 일을 문공에게 알리고 과거의 죄를 갚으려고 문공을 알현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문공은 그를 접견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 그를 질책하기를 “포성에서는 네가 과인의 옷소매를 베었지. 그 후 과인이 적나라의 군왕과 사냥을 갔을 때 너는 혜공을 위해 과인을 추적하고 과인을 죽이려고 했다. 혜공이 너에게 3일의 기한을 주었는데 너는 하루 만에 이르렀으니 어찌 그리 빨랐느냐? 너는 그것들을 생각해야 할 것이야.”라 했다.
이제가 말했다. “저는 궁형을 받은 사람으로서 감히 두 마음으로 주군을 섬기거나 주인을 배반할 수 없었사옵니다. 그래서 주군께 죄를 지었던 것이옵니다. 주군께서는 이미 환국하셨는데 설마 포성과 적나라에서의 이러한 일을 잊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하물며 관중(管仲)은 활을 쏘아 제 환공(齊桓公)의 대구(帶鉤)를 맞추었으나 제 환공은 관중에게 의지해 패자로 불리지 않았사옵니까? 이제 궁형을 받은 이 사람이 매우 긴요한 일을 보고하려 하옵는데 주군께서는 접견을 허락하지 않으시니 재난이 임박했사옵니다.” 그래서 문공은 그를 접견했다. 그 환관은 여성과 극예 등의 행동을 문공에게 고했다. 문공은 여성과 극예를 부르려고 했으나 저들의 무리가 너무 많았다. 또 문공은 처음 환국해 즉위할 때 백성들이 자기를 배반할까봐 두려워, 변복(變服)을 하고 미행(微行)해 왕성(王城)에 도착해서 몰래 진 목공(秦繆公)을 만났다. 이때 백성들은 아무도 몰랐다.
3월 기축일(己丑日), 여성과 극예 등이 과연 반란을 일으켜 궁성을 불살랐으나 문공을 찾지 못했다. 문공의 호위군들은 그들과 싸웠다. 여성과 극예 등이 군대를 이끌고 도주하려 하자 진 목공이 여성과 극예 등을 유인해 황하 강변에서 그들을 죽였다. 진(晉)나라가 평정을 회복하자 문공은 다시 환국했다. 여름, 문공은 진(秦)나라에 도착해서 부인을 맞아들였는데, 진 목공이 문공에게 주어 처로 삼았던 사람들은 마침내 모두 부인이 되었다. 진(秦)나라는 군사 3천 명을 보내어 문공을 경호하고 진(晉)나라의 반란을 방비했다.
文公修政, 施恵百姓. 賞従亡者及功臣, 大者封邑, 小者尊爵. 未尽行賞, 周襄王以弟帯難出居鄭地, 來告急晉. 晉初定, 欲発兵, 恐他亂起, 是以賞従亡未至隠者介子推. 推亦不言祿, 祿亦不及. 推曰:「献公子九人, 唯君在矣. 恵、懐無親, 外内棄之;天未絶晉, 必将有主, 主晉祀者, 非君而誰? 天実開之, 二三子以為己力, 不亦誣乎? 窃人之財, 猶曰是盗, 況貪天之功以為己力乎? 下冒其罪, 上賞其姦, 上下相蒙,160) 難與処矣!」其母曰:「盍亦求之, 以死誰懟?」推曰:「尤而效之, 罪有甚焉. 且出怨言, 不食其祿.」母曰:「亦使知之, 若何?」対曰:「言, 身之文也;身欲隠, 安用文之? 文之, 是求顕也.」其母曰:「能如此乎? 與女偕隠.」至死不复見.
문공은 정치를 잘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즉 문공은 자신을 따라서 떠돌던 사람과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상을 내렸는데, 공이 많은 사람에게는 봉토를 내리고 적은 사람에게는 작위를 내렸다. 아직 모두에게 논공행상을 마치기 전인데 주 양왕(周襄王)의 아우 희숙(姬叔)이 난을 일으켜 양왕이 정나라로 도망했으며, 그곳에 거주하고 있다며 진나라에게 급박함을 알려왔다. 진나라는 이제 안정되기 시작하는데 군대를 파병한다면 다른 변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염려했다. 그래서 이래저래 은자(隱者) 개자추에게는 아직 상이 돌아오지 않았다. 개자추도 봉록을 말하지 않았고, 실제로 봉록 또한 그에게 미치지 않았다.
개자추가 말했다. “헌공의 아들이 아홉이 있는데 지금의 주군만이 살아 계실 뿐입니다. 혜공과 회공은 가까운 사람이 없었고 국내외에서도 그를 버렸다. 그러나 하늘은 진나라를 멸절(滅絶)시키지 않으셨다. 반드시 주인이 있어 제사를 주관하게 할 것이니 지금의 주군이 아니시면 누구이겠는가? 실로 하늘께서 그분의 길을 여셨는데 몇몇 사람이 자신의 공이라 생각하고 있으니 이 또한 황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타인의 재물을 훔치는 것을 도둑이라고 한다면, 황차 하늘의 공을 탐내어 자신의 공으로 삼는 사람은 무엇이라고 해야겠는가? 신하들이 그들의 죄를 덮고 주군께서는 그들의 간사함에 상을 내려 상하가 서로 속이고 있으니 그들과 함께 거하기 어렵도다!”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어째서 가서 구하지 않느냐? 죽음으로써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추가 말했다. “더욱이 그들을 본받는 것은 죄가 더욱 심해질 뿐입니다. 하물며 이미 원망하는 말을 했으니 그들의 봉록을 먹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말했다. “그래도 그들로 하여금 알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말이란 사람의 꾸미는 것일 뿐인데 사람이 자신을 숨기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꾸미겠습니까? 꾸미는 것은 현달(顯達)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말했다. “능히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나도 너와 함께 은둔하겠다.”
그리하여 죽을 때까지 그들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介子推従者憐之, 乃懸書宮門曰:「竜欲上天, 五蛇為輔.161) 竜已升雲, 四蛇各入其宇, 一蛇独怨, 終不見処所.」文公出, 見其書, 曰:「此介子推也. 吾方憂王室, 未図其功.」使人召之, 則亡. 遂求所在, 聞其入綿上山中,162) 於是文公環綿上山中而封之, 以為介推田,163) 号曰介山, 「以記吾過, 且旌善人」.164)
개자추의 시종이 그들을 가련하다 생각하고 궁문에다가 글을 써서 붙였다. “용이 하늘에 오르고자 하니 다섯 마리의 뱀이 보좌한다. 용이 이미 구름 속에 오르니 네 마리 뱀은 각각 자기의 집으로 들어가는데 한 마리는 홀로 원망해 마침내 그 처소를 볼 수가 없도다.”
문공이 나와서 이 글을 보고 말했다.
“이것은 개자추이다. 과인이 왕실의 일을 우려하고 있다가 그의 공로를 아직 생각하지 못했구나.” 사람을 보내어 그를 청했으나 그는 이미 가고 없었다. 문공은 그의 소재를 찾았다. 그가 이미 금상(錦上)에 있는 산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듣고 문공은 금상 산속 그 주위를 그에게 봉토로 주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개산(介山)’이라고 하고 “이로써 과인의 과실을 기억하게 하며, 선한 사람을 표창하노라.”라 했다.
従亡賎臣壷叔曰;「君三行賞, 賞不及臣, 敢請罪.」文公報曰:「夫導我以仁義, 防我以徳恵, 此受上賞. 輔我以行, 卒以成立, 此受次賞. 矢石之難, 汗馬之勞, 此复受次賞. 若以力事我而無補吾欠者, 此[复]受次賞. 三賞之後, 故且及子.」晉人聞之, 皆説.
함께 따라 망명생활을 했던 천신(賤臣) 호숙(壺叔)이 말했다. “군왕께서 3차에 걸쳐 논공행상을 하셨는데 저에게는 돌아오지 않으니 청컨대 저는 무슨 죄가 있사옵니까?” 문공이 대답했다.
“인의로써 과인을 인도한 사람과 덕혜(德惠)로써 과인을 방어한 사람은 1등상을 받았다. 행동으로 과인을 보좌해 마침내 공업(功業)을 이루게 한 사람은 2등상을 받았으며, 활과 바위의 위험을 무릅쓰고 땀을 흘린 공로가 있는 사람은 그 다음 상을 받았다. 힘을 다해 과인을 섬겼으나 과인의 잘못을 보완해 주지 못한 사람은 그 다음 상을 받았다. 이 상을 다 내린 다음에는 그대에게도 돌아갈 것이다.” 진나라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들 기뻐했다.
二年春, 秦軍河上,165) 将入王. 趙衰曰;「求霸莫如入王尊周. 周晉同姓, 晉不先入王, 後秦入之, 毋以令于天下. 方今尊王, 晉之資也.」三月甲辰, 晉乃発兵至陽樊,166) 囲温, 入襄王于周. 四月, 殺王弟帯. 周襄王賜晉河内陽樊之地.
2년 봄, 진(秦)나라 군대가 황하 가에 주둔하고 있다가 주 양왕을 수도로 호송하려고 했다. 조최가 말했다. “패자가 되시려면 양왕을 수도로 호송하며 주(周)나라를 존중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사옵니다. 양왕은 주군과 같은 성인데 진(晉)나라가 먼저 양왕을 수도로 모시지 않고 진(秦)나라로 하여금 양왕을 모시게 하신다면 각국을 향해서 호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양왕을 존중하는 것이 진나라의 크나큰 자본이 될 것이옵니다.” 드디어 3월 갑진일(甲辰日), 진(晉)나라가 양번(陽樊)에 군대를 파병해 온(溫)을 포위하고 주 양왕을 주나라 수도로 호송했다. 4월, 양왕의 아우 희숙 대(帶)를 죽였다. 주 양왕은 하내의 양번 지방을 진나라에게 상으로 내렸다.
四年, 楚成王及諸侯囲宋, 宋公孫固如晉告急. 先軫曰:「報施定霸, 於今在矣.」167)狐偃曰:「楚新得曹而初婚於衛, 若伐曹、衛, 楚必救之, 則宋免矣.」於是晉作三軍.168) 趙衰挙郤縠将中軍, 郤臻佐之;使狐偃将上軍, 狐毛佐之, 命趙衰為卿;欒枝将下軍,169) 先軫佐之;荀林父御戎, 魏犨為右:170)往伐. 冬十二月, 晉兵先下山東, 而以原封趙衰.171)
4년, 초 성왕과 제후들이 송나라를 포위했다. 송나라의 공손고(公孫固)가 진(晉)나라에 와서 시급함을 알렸다. 선진(先軫)이 말했다.
“송양공의 은혜에 보답하고, 패업을 확립하시려면 바로 지금이옵니다.” 호언(狐偃)이 말했다. “초 나라가 최근 조(曹)나라를 얻고 위(衛)나라와 혼약을 맺었으니 만약 조와 위 나라를 공격하면 초 나라는 반드시 그들을 구하고자 할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송나라는 포위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진(晉)나라는 삼군(三軍)을 만들었다. 조최는 극곡이 중군(中軍)을 통솔하게 추천했고, 극진(郤臻)은 그를 보좌하게 했다. 호언은 상군(上軍)을 통솔하고 호모(狐毛)가 그를 보좌했으며, 조최는 경(卿)에 임명되었다. 난지는 하군(下軍)을 통솔하고 선진이 그를 보좌했다. 순임보(荀林父)가 어가와 병거를 담당했고, 위주는 호위를 담당했다. 그리고는 정벌하러 나갔다.
겨울 12월, 진나라 군사가 태행산 동쪽 지방을 먼저 공격해, 원읍(原邑)을 조최에게 봉토로 주었다.
五年春, 晉文公欲伐曹, 仮道於衛, 衛人弗許. 還自河南度, 侵曹, 伐衛. 正月, 取五鹿. 二月, 晉侯、斉侯盟于斂盂.172) 衛侯請盟晉, 晉人不許. 衛侯欲與楚, 国人不欲, 故出其君以説晉. 衛侯居襄牛,173) 公子買守衛. 楚救衛, 不卒.174) 晉侯囲曹. 三月丙午, 晉師入曹, 數之以其不用釐負羈言, 而用美女乗軒者三百人也. 令軍毋入僖負羈宗家以報徳. 楚囲宋, 宋复告急晉. 文公欲救則攻楚, 為楚嘗有徳, 不欲伐也;欲釈宋, 宋又嘗有徳於晉:患之.175) 先軫曰:「執曹伯, 分曹、衛地以與宋, 楚急曹、衛, 其勢宜釈宋.」176)於是文公従之, 而楚成王乃引兵帰.
5년 봄, 진 문공이 장차 조(曹)나라를 공격할 생각으로 위(衛)나라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했으나, 위나라는 허락하지 않았다. 진나라는 방향을 바꾸어 황하의 남쪽을 건너 조나라를 습격하고 이어 위나라를 공격했다.
정월, 오록을 탈취했다. 2월, 진 문공과 제나라의 군왕이 위나라의 염우(斂盂)에서 회맹했다. 위나라의 군왕이 진나라와 동맹을 맺기를 청했으나 진나라는 응낙하지 않았다. 그래서 위나라의 군왕은 초 나라에 귀속하려고 했으나 백성들이 원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군왕을 축출하여 진나라의 환심을 사기에 이르렀다. 위나라의 군왕은 양우(襄牛)에 있었고 공자 매(買)가 위나라를 지키고 있었다. 초 나라가 위나라를 원조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진 문공이 조나라를 포위했다. 3월 병오일에 진나라의 군대가 조나라의 도성으로 들어가서 조나라의 임금을 질책했다. 그가 희부기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미녀 3백 명을 화려한 수레에 태워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군사들에게 희부기 일족의 집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으니 이로써 그의 은덕에 보답한 것이 되었다.
초 나라가 송나라를 포위하자 송나라는 또 진(晉)나라에게 시급함을 알렸다. 문공은 그들을 원조하고 초 나라로 진공하고 싶었으나 초 나라에게 일찍이 은혜를 입었으므로 진격할 수 없었다. 또 송나라를 구하고 싶지 않았으나 송나라도 일찍이 진(晉)나라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있었다. 난감했다. 이때 선진이 말했다. “조나라의 군왕을 잡고 조와 위나라의 땅을 송나라에게 주면 초 나라는 조와 위 두 나라를 구하기에 급급할 것이고, 이러한 상황이라면 송나라를 놓아둘 것이옵니다.” 진 문공은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초 성왕도 군대를 끌고 돌아갔다.
楚将子玉曰:「王遇晉至厚, 今知楚急曹、衛而故伐之, 是軽王.」王曰:「晉侯亡在外十九年, 困日久矣, 果得反国, 険阨尽知之, 能用其民, 天之所開, 不可當.」子玉請曰:「非敢必有功, 願以閒執讒慝之口也.」177)楚王怒, 少與之兵. 於是子玉使宛春告晉:178)「請复衛侯而封曹, 臣亦釈宋.」咎犯曰:「子玉無礼矣, 君取一, 臣取二, 勿許.」179)先軫曰:「定人之謂礼. 楚一言定三国, 子一言而亡之, 我則毋礼. 不許楚, 是棄宋也. 不如私許曹、衛以誘之, 執宛春以怒楚,180) 既戦而後図之.」181)晉侯乃囚宛春於衛, 且私許复曹、衛. 曹、衛告絶於楚. 楚得臣怒,182) 撃晉師, 晉師退. 軍吏曰:「為何退?」文公曰:「昔在楚, 約退三舎, 可倍乎!」楚師欲去, 得臣不肯. 四月戊辰, 宋公、183)斉将、184)秦将185)與晉侯次城濮.186) 己巳, 與楚兵合戦, 楚兵敗, 得臣収余兵去. 甲午, 晉師還至衡雍,187) 作王宮于践土.188)
초 나라의 장군 성자옥(成子玉)이 말했다. “군왕께서 진나라의 군왕을 특별히 우대하셨는데 현재 우리 초 나라가 조나라와 위나라를 구하기에 급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의로 그들을 공격하고 있으니 이것은 군왕을 경시하는 것이옵니다.”
성왕이 말했다. “진(晉)나라의 군왕이 국외에서 유망(流亡)한 지 19년! 곤욕스럽고 군색했던 시기가 꽤 오래되었노라. 그러다가 마침내 환국하게 되었으니 모든 어려움과 곤란을 알고 있을 터! 그의 백성들을 능히 이용할 수 있으니 이것은 하늘이 그에게 길을 열어준 것이라, 우리는 그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성자옥이 청했다. “반드시 공을 세울 것이라고는 감히 말씀을 드릴 수 없사옵니다만, 저 사악한 소인의 입을 막아버리시기를 바라옵니다.”
성왕이 노해서 그에게 군대를 적게 주었다. 이때 자옥이 대부 완춘(宛春)을 보내어 진나라에 통고했다. “위나라 임금을 복위하고 조나라를 보존케 하신다면 우리도 송나라를 풀어놓을 것입니다.” 구범이 말했다. “자옥은 무례하구나. 주군께서는 하나를 취하시는데 그는 두 개를 취하려 하니, 이는 허락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선진이 말했다.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을 예(禮)라고 합니다. 초 나라가 한마디 말로써 세 나라를 보존하고 당신은 한마디 말로써 그들을 멸망하게 하려고 하니 우리들이 오히려 무례한 것이오. 초 나라의 요구에 응낙하지 않으면 이것은 송나라를 포기하는 것이오. 비밀리에 조나라와 위나라를 회복시키려고 한다고 대답해 그들을 유인한 뒤 완춘을 포로로 잡아 초 나라를 격노하게 해 결전을 치른 다음에 다시 의논하는 것이 나을 것이오.”
진 문공은 완춘을 위나라에 감금하고 조나라와 위나라를 회복시킨다고 비밀리에 허락했다. 조나라와 위나라는 초 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한다고 선포했다. 자옥은 성이 나서 진나라의 군대를 공격했다. 진나라의 군대는 후퇴했다. 한 장수가 말했다. “왜 후퇴를 하시는 겁니까?” 문공이 말했다. “과인이 예전에 초 나라에 있을 때 대치하게 되면 90 리를 후퇴하겠다고 약정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위배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초 나라 군대도 철수하려 했으나 자옥이 찬성하지 않았다.
4월 무진일(戊辰日), 송나라의 군왕, 제나라의 장군, 진(秦)나라의 장군 등이 진나라 문공의 군대와 함께 성복(城濮)에 주둔했다. 기사일(己巳日), 진과 초 나라의 군대가 회전했는데 초 나라 군사가 패배하자 자옥은 나머지 병사들을 거두어 철수했다. 갑오일(甲午日), 진나라의 군대가 형옹(衡雍)으로 돌아가서 천토(踐土)에 왕궁을 건립했다.
初, 鄭助楚, 楚敗, 懼, 使人請盟晉侯. 晉侯與鄭伯盟.
처음에 정나라는 초 나라를 도왔는데 초 나라가 패하자 두려워서 진후(晉侯)에게 사람을 보내어 맹약을 청했다. 진후는 정백(鄭伯)과 동맹을 맺었다.
五月丁未, 献楚俘於周,189) 駟介百乗, 徒兵千.190) 天子使王子虎命晉侯為伯,191) 賜大輅, 彤弓矢百, 玈弓矢千,192) 秬鬯一卣, 珪瓚,193) 虎賁三百人.194) 晉侯三辞, 然后稽首受之.195) 周作晉文侯命:「王若曰:父義和,196) 丕顕文、武, 能慎明徳,197) 昭登於上, 布聞在下,198) 維時上帝集厥命于文、武.199) 恤朕身、継予一人永其在位.」200)於是晉文公称伯. 癸亥, 王子虎盟諸侯於王庭.201)
5월 정미일, 초 나라의 포로들을 주(周)나라에 바쳤는데 모두 네 마리 말이 끄는 사마(駟馬) 수레 1백 승과 보병 1천명이었다. 천자는 왕자호(王子虎)를 보내 진후를 백(伯), 즉 제후국의 맹주(盟主) 또는 패주(覇主)로 선포하고 큰 수레와 붉은 색 화살 1백 개, 검은 색 화살 1천 개, 좋은 술 한 독, 옥 주걱 그리고 용사 3천 명을 내렸다. 진 문공은 3차례 사양한 후에 절을 하고 선물을 받았다. 주나라 왕이 「진문후명(晉文侯命)」을 지었다.
왕께서 말씀하셨다. “의화 숙부여! 크게 빛나는 문왕, 무왕의 밝은 덕이 삼가 하늘 위에까지 알려지고 아래로 백성들에게 널리 퍼졌습니다. 그리하여 천제는 천명을 문왕, 무왕에게 내렸습니다. 과인을 돌보아주시오. 그대들이 공을 세우면 과인은 길이 왕위에 편안히 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 문공은 패자로 칭해졌다. 계해일(癸亥日), 왕자 호는 왕궁에서 제후들과 동맹을 맺었다.
晉焚楚軍, 火數日不息, 文公歎. 左右曰:「勝楚而君猶憂, 何?」文公曰:「吾聞能戦勝安者唯聖人, 是以懼. 且子玉猶在, 庸可喜乎!」子玉之敗而帰, 楚成王怒其不用其言, 貪與晉戦, 譲責子玉, 子玉自殺. 晉文公曰:「我撃其外, 楚誅其内, 内外相應.」於是乃喜.
진나라 군대가 초 나라 군대를 불살랐다. 불은 며칠이 지나도 꺼지지 않았다. 문공이 탄식하자 좌우의 신하들이 말했다. “초 나라에게 전승했는데 주군께서 근심하시니 무슨 까닭이옵니까?” 문공이 말했다. “내가 듣기로 전쟁에서 이겨도 마음이 편안한 사람은 오직 성인뿐이라고 했으니 그래서 두려운 것이오. 하물며 자옥이 아직도 살아 있는데 어찌 즐거워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옥은 전쟁에서 패하고 돌아갔다. 초 성왕은 그가 자기의 말을 듣지 않고 공을 탐해서 진나라와 접전했다고 노여워하며 자옥을 견책했다. 그러자 자옥은 자살했다. 진 문공이 기뻐하며 말했다. “우리들은 그 바깥을 공격했는데 초 나라의 국왕은 안에서 대신을 주살했으니 안과 밖이 상응하도다.”
六月, 晉人复入衛侯. 壬午, 晉侯度河北帰国. 行賞, 狐偃為首. 或曰:「城濮之事, 先軫之謀.」文公曰:「城濮之事, 偃説我毋失信. 先軫曰『軍事勝為右』, 吾用之以勝. 然此一時之説, 偃言萬世之功, 柰何以一時之利而加萬世功乎? 是以先之.」
6월, 진나라가 위나라 임금을 환국시켰다. 임오일(壬午日), 진 문공이 황하를 건너 북쪽으로 귀국했다. 논공행상을 하니 호언이 으뜸이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성복의 일은 선진의 책모였사옵니다.” 문공이 말했다. “성복의 일을 말하자면, 호언은 과인에게 믿음을 잃지 말라고 권했었소. 선진은 ‘군대는 오직 이기는 것을 으뜸으로 삼는다.’라고 말했는데 과인은 그것으로써 승리를 획득했지. 그러나 이것은 한때의 유리한 방법이었고 호언의 말은 만세의 공적이니, 어찌 한때의 유리함으로 만세의 공적을 뛰어넘을 수 있겠소? 이것이 과인이 호언을 앞에 둔 이유요.”
冬, 晉侯会諸侯於温, 欲率之朝周. 力未能, 恐其有畔者, 乃使人言周襄王狩于河陽. 壬申, 遂率諸侯朝王於践土.202) 孔子読史記至文公, 曰「諸侯無召王」、「王狩河陽」者, 春秋諱之也.
겨울, 진 문공은 온읍에서 제후들과 만나 제후를 이끌고 주 천자를 알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역량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사람을 보내어 주 양왕으로 하여금 하양(河陽)에 와서 순시하시라고 전하게 했다. 임신일(壬申日), 제후들을 이끌고 천토에 와서 주 양왕을 알현했다. 공자(孔子)가 역사서를 읽다가 문공 부분에 이르러 말한 “제후는 왕을 부를 수 없다.”, “왕이 하양을 순시하다.”라고 한 것은 『춘추(春秋)』가 이를 피한 것이다.
丁丑, 諸侯囲許. 曹伯臣或説晉侯曰:「斉桓公合諸侯而国異姓, 今君為会而滅同姓. 曹, 叔振鐸之後;晉, 唐叔之後. 合諸侯而滅兄弟, 非礼.」晉侯説, 复曹伯.
정축일(丁丑日), 제후들이 허(許)나라를 포위했다. 조백(曹伯)의 대신 중에 어떤 사람이 진 문공에게 말했다. “제 환공은 제후들을 모아 성이 다른 나라를 보존하고 있는데, 현재 주군께서는 제후들을 모아 성이 같은 나라를 멸망시키고 있사옵니다. 조(曹)나라는 숙진탁(叔振鐸)의 후예이고, 진나라는 당숙(唐叔)의 후예인데 제후들을 모아 형제 나라를 멸망시킨다면 예가 아니옵니다.” 진 문공은 기뻐하며 조백을 복위시켰다.
於是晉始作三行.203) 荀林父将中行, 先縠将右行,204) 先蔑将左行.205)
이때 진나라는 좌, 우, 중 3행(三行)의 보병 부대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순임보는 중행을, 선곡(先縠)은 우행을, 선멸(先蔑)은 좌행을 통솔했다.
七年, 晉文公、秦繆公共囲鄭, 以其無礼於文公亡過時, 及城濮時鄭助楚也. 囲鄭, 欲得叔瞻. 叔瞻聞之, 自殺. 鄭持叔瞻告晉. 晉曰:「必得鄭君而甘心焉.」鄭恐, 乃閒令使206)謂秦繆公曰:「亡鄭厚晉, 於晉得矣, 而秦未為利. 君何不解鄭, 得為東道交?207)」秦伯説, 罷兵. 晉亦罷兵.
7년, 진 문공(晉文公)과 진 목공(秦穆公)은 공동으로 정나라를 포위했다. 문공이 국외로 유망하고 있을 때 정나라가 무례했으며, 성복 전쟁 당시 정나라가 초 나라를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정나라를 포위한 것은 희숙첨(姬叔瞻)을 잡기 위해서였다. 숙첨이 이 소식을 듣고 자살했다. 정나라는 숙첨의 일로써 진 문공에게 고했다. 그러나 진 문공은 “반드시 정나라의 국왕을 잡아야만 마음에 찰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나라의 군주 정백(鄭伯)은 두려워하며 틈을 타서 진 목공에게 사자를 보내 말했다. “정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진(晉)나라를 증강시키는 것으로, 이것은 진(晉)나라에게는 득이 될 것이지만 진(秦)나라에게는 이익이 없을 것이옵니다. 군주께서는 왜 정나라를 놓아주어 동쪽 길의 친구로 삼지 않으십니까?”
진 목공은 기뻐하며 병사를 철수했다. 진 문공도 철병했다.
九年冬, 晉文公卒, 子襄公歓立. 是歳鄭伯亦卒.
9년 겨울, 진 문공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 양공(襄公) 희환(姬歡)이 뒤를 이었다. 이해에 정나라의 군주도 죽었다.
鄭人或売其国於秦,208) 秦繆公発兵往襲鄭. 十二月, 秦兵過我郊. 襄公元年春, 秦師過周, 無礼, 王孫満譏之. 兵至滑, 鄭賈人弦高将市于周, 遇之, 以十二牛勞秦師. 秦師驚而還, 滅滑而去.
정나라의 어떤 사람이 나라를 진(秦)나라에게 팔려고 하자 진 목공은 군대를 보내어 정나라를 습격했다. 12월, 진(秦)나라의 군대가 진(晉)나라의 교외를 지나갔다. 양공 원년 봄, 진(秦)나라 군대가 주(周)나라의 도성을 지나갔다. 왕손만(王孫滿)이 그들을 무례하다고 비방했다. 진나라의 군대가 활(滑)나라에 도착하자 정나라 상인 현고(弦高)가 장차 주나라의 도성에 가서 장사를 하려고 그들을 만났다. 그리고 열두 마리의 소로 그들을 위로했다. 진나라의 군대는 매우 놀라 되돌아가서 활나라를 멸망시키고 갔다.
晉先軫曰:「秦伯不用蹇叔, 反其衆心, 此可撃.」欒枝曰:「未報先君施於秦, 撃之, 不可.」先軫曰:「秦侮吾孤, 伐吾同姓, 何徳之報?」遂撃之. 襄公墨衰絰.209) 四月, 敗秦師于殽, 虜秦三将孟明視、西乞秫、白乙丙以帰. 遂墨以葬文公.210) 文公夫人秦女, 謂襄公曰:「秦欲得其三将戮之.」公許, 遣之. 先軫聞之, 謂襄公曰:「患生矣.」軫乃追秦将. 秦将渡河, 已在船中, 頓首謝, 卒不反.
진(晉)나라 대부 선진이 말했다. “진(秦)나라의 군주는 건숙(蹇叔)의 말을 듣지 않고 백성들의 마음과 위배되고 있으니 공격할 만합니다.” 난지가 말했다. “진(秦)나라가 선군께 베푼 은혜를 아직 보답하지 않았는데 공격한다는 것은 불가합니다.” 선진이 말했다. “진(秦)나라는 우리의 새로운 주군을 모욕하고 우리와 성이 같은 나라를 공격하고 있는데 보답할 무슨 은덕이 있다는 말씀이시오?” 그래서 진(晉)나라는 진(秦)나라를 공격했다. 양공은 검은 색의 상복을 입었다. 4월, 효산(殽山)에서 진나라를 패퇴시키고 진의 세 장수 맹명시(孟明視), 서기술(西乞秫), 백을병(白乙丙)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그리고 검은 색 상복을 입고 문공을 안장했다.
문공의 부인은 진(秦)나라 여자로, 양공에게 이렇게 말했다. “진(秦)나라의 군주가 그의 세 장수를 죽이려고 한답니다.” 양공은 이를 허락하고 그들을 보내주었다. 선진이 이 소식을 듣고 양공에게 말했다. “우환이 생겼사옵니다.” 선진은 진의 세 장수를 쫓아갔으나 그들은 이미 황하를 건너 배 위에서 고개를 숙이며 감사인사를 올리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後三年, 秦果使孟明伐晉, 報殽之敗, 取晉汪以帰.211) 四年, 秦繆公大興兵伐我, 度河, 取王官,212) 封殽尸而去. 晉恐, 不敢出, 遂城守. 五年, 晉伐秦, 取新城,213) 報王官役也.
3년 후, 진(秦)나라는 맹명시를 보내어 진(晉)나라를 쳤다. 효산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 진(晉)나라의 왕(汪) 땅을 취하고 돌아왔다. 4년, 진 목공은 대대적으로 진(晉)나라를 침공해 황하를 건너고 왕관(王官)을 탈취하고 효산에 병사들의 무덤을 세운 다음 떠났다. 진(晉)나라는 두려워하며 감히 나오지 못하고 성을 방어하고 있었다. 5년, 진(晉)나라가 진(秦)나라를 쳐서 새로 지은 성을 탈취하고 왕관의 일을 보복했다.
六年, 趙衰成子、欒貞子、咎季子犯、霍伯皆卒.214) 趙盾代趙衰執政.
6년, 조최성자(趙衰成子), 난정자(欒貞子) 즉 난지, 구계자범(咎季子犯), 곽백(霍白) 등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조순(趙盾)이 조최의 뒤를 이어 집정했다.
七年八月, 襄公卒. 太子夷皐少. 晉人以難故,215) 欲立長君. 趙盾曰:「立襄公弟雍. 好善而長, 先君愛之;且近於秦, 秦故好也. 立善則固, 事長則順, 奉愛則孝, 結旧好則安.」賈季曰:「不如其弟樂. 辰嬴嬖於二君,216) 立其子, 民必安之.」趙盾曰:「辰嬴賎, 班在九人下,217) 其子何震之有!218) 且為二君嬖, 淫也. 為先君子,219) 不能求大而出在小国, 僻也. 母淫子僻, 無威;220)陳小而遠, 無援:将何可乎!」使士会如秦迎公子雍. 賈季亦使人召公子樂於陳. 趙盾廃賈季, 以其殺陽処父.221) 十月, 葬襄公. 十一月, 賈季奔翟. 是歳, 秦繆公亦卒.
7년 8월, 양공이 세상을 떠났다. 태자 이고(夷皐)는 아직 어렸다. 진나라 사람들은 누차 환난이 있어왔던 까닭에 나이가 많은 군주를 옹립하려고 했다. 조순이 말했다.
“양공의 아우님이신 옹(雍)을 세웁시다. 그는 선행을 좋아하며 나이도 많소. 뿐만 아니라 선군께서도 그분을 총애하셨소이다. 또 진(秦)나라와 가까운데 진나라는 본래 우리와 우방이었지요. 선량한 사람을 세우면 공고해지고, 나이든 사람을 섬기면 순리에 맞으며, 선군께서 총애하신 분을 시봉하는 것은 효가 되며, 오랫동안 잘 지낸 나라와 손을 잡으면 안정이 될 것이오.”
가계(賈季)가 말했다. “그분의 아우 공자 낙(樂)을 세우느니만 못하오. 신영(辰嬴)은 두 군주의 총애를 받았으니 그녀의 아들을 옹립하면 백성들은 반드시 안심할 것이오.”
조순이 말했다. “신영은 비천해 그 지위가 아홉 사람 다음에 있소. 그런데 그의 아들에게 무슨 위망(威望)이 있겠소! 또 그녀가 두 군주의 총애를 받은 것은 음란한 일이며, 선군의 아들로서 큰 것을 구하지 않고 작은 나라에 거처하고 있는 것은 고립된 것이오. 모친이 음란하고 그 아들은 고립되어 있으니 어찌 위망이 있을 수 있겠소! 또 진(陳)나라는 작고도 멀어 도움이 되지 않는데 장차 어찌 가능하겠소?”
그래서 사회(士會)를 진(秦)나라에 보내어 공자 옹을 맞으려고 했다. 가계도 사람을 진(陳)나라에 보내어 공자 낙을 부르게 했다. 조순이 가계를 폐출했다. 그가 양거보(陽處父)를 살해했기 때문이었다.
10월, 양공을 안장했다. 11월, 가계가 적(狄)나라로 도주했다. 이해에 진 목공도 세상을 떠났다.
霊公元年四月, 秦康公曰:「昔文公之入也無衛, 故有呂、郤之患.」乃多與公子雍衛. 太子母繆嬴日夜抱太子以号泣於朝, 曰:「先君何罪? 其嗣亦何罪? 舎適而外求君, 将安置此?」222)出朝, 則抱以適趙盾所, 頓首曰:「先君奉此子而属之子, 曰『此子材, 吾受其賜;不材, 吾怨子』.223) 今君卒, 言猶在耳,224) 而棄之, 若何?」趙盾與諸大夫皆患繆嬴, 且畏誅, 乃背所迎而立太子夷皐, 是為霊公. 発兵以距秦送公子雍者. 趙盾為将, 往撃秦, 敗之令狐. 先蔑、随会亡奔秦. 秋, 斉、宋、衛、鄭、曹、許君皆会趙盾, 盟於扈,225) 以霊公初立故也.
영공(靈公) 원년 4월, 진 강공(秦康公)이 말하기를 “예전에 문공이 환국할 때 경호 인원이 없었기 때문에 여성과 극예의 환란이 있었다.”라고 하면서 공자 옹에게 많은 경호 인원을 붙여주었다.
태자 이고의 모친 목영(穆嬴)은 조정에서 낮이나 밤이나 태자를 껴안고 울면서 말했다. “선군께서 무슨 죄가 있으셨는가? 또 그의 아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적자를 버리고 밖에서 주군을 찾아온다면 이를 장차 어찌할 것인가?” 궁궐을 나와서 태자를 안고 조순의 처소로 갔다. 조순에게 머리를 숙이고 말했다. “선군께서 이 아이를 그대에게 맡기면서 말씀하셨지요. ‘이 아이가 쓸모 있는 재목이 되면 내 그대의 은혜에 감사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그대를 원망할 것이오.’라고. 지금 선군께서 돌아가셨으나 그 말씀이 귀에 쟁쟁한데 그대는 오히려 이를 버리려 하니 어떻게 하실 셈이오?”
조순과 대부들은 모두 목영을 두려워했다. 뿐만 아니라 견책을 받을까 염려해 맞아들이려 하던 공자 옹을 버리고 태자 이고를 옹립했다. 이 사람이 곧 영공(靈公)이다. 그리고 군대를 보내어 공자 옹을 호송하고 있는 진(秦)나라 호위군을 제지시켰다. 조순이 장군이 되어 진나라의 군대를 공격하고 영호(令狐)에서 그들을 패퇴시켰다. 선멸(先蔑)과 사회(士會)는 진(秦)나라로 도주했다. 가을, 제, 송, 위(衛), 정, 조(曹) 등 각국의 군주와 조순이 회합해 호읍(扈邑)에서 동맹을 맺었다. 영공이 막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四年, 伐秦, 取少梁. 秦亦取晉之郩.226) 六年, 秦康公伐晉, 取羈馬. 晉侯怒, 使趙盾、趙穿、郤欠撃秦, 大戦河曲, 趙穿最有功. 七年, 晉六卿患随会之在秦, 常為晉亂, 乃詳令魏寿余反晉降秦. 秦使随会之魏, 因執会以帰晉.
4년, 진(秦)나라를 쳐서 소량(少梁)을 탈취했다. 진(秦)나라도 진(晉)의 효읍(郩邑)을 탈취했다. 6년, 진 강공이 진(晉)나라를 공격해 기마(羈馬) 지역을 탈취했다. 영공이 성이 나서 조순과 조천(趙穿), 극결(郤欠)을 보내어 진나라를 치게 해 하곡(河曲)에서 크게 싸웠다. 조천에게 가장 큰 공이 돌아갔다.
7년, 진(晉)나라의 육경(六卿)은 사회가 진(秦)나라에 있으면서 반란을 획책할까 우려해 위수여(魏壽餘)로 하여금 진(晉)나라에 반란한 척하며 진(秦)나라에 투항하게 했다. 진(秦)나라가 사회를 보냈는데 그가 위읍(魏邑)에 도착하자 위수여는 즉시 그를 붙잡아 진(晉)나라로 돌아왔다.
八年, 周頃王崩, 公卿争権, 故不赴.227) 晉使趙盾以車八百乗平周亂而立匡王.228) 是年, 楚荘王初即位. 十二年, 斉人弑其君懿公.
8년, 주 경왕(周頃王)이 세상을 떠나자 공경대부들이 권력을 다투느라 상을 치르지도 못했다. 진나라는 조순에게 병거 8백승을 거느리고 가서 주 왕실의 내란을 평정하게 하고 광왕(匡王)을 옹립했다. 이해에 초 장왕이 왕위에 올랐다. 12년, 제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군주 의공(懿公)을 시해했다.
十四年, 霊公壮, 侈, 厚斂以彫牆.229) 従台上弾人, 観其避丸也. 宰夫胹熊蹯不熟,230) 霊公怒, 殺宰夫, 使婦人持其屍出棄之, 過朝. 趙盾、随会前數諫, 不聴;已又見死人手, 二人前諫. 随会先諫, 不聴. 霊公患之, 使鉏麑刺趙盾.231) 盾閨門開, 居処節, 鉏麑退, 歎曰:「殺忠臣, 棄君命, 罪一也.」遂触樹而死.232)
14년, 영공이 성장하자 생활이 사치스럽고 심하게 착취해 담벽에까지 채색으로 장식할 정도였다. 게다가 무대에서 사람에게 탄환을 쏘게 하고, 또한 사람이 그것을 피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했다. 궁중 요리사에게 곰발바닥 요리를 덜 구웠다고 화를 내며 그를 죽이고는 그의 부인으로 하여금 그의 시신을 들고 나가버리라 했다. 조순과 사회가 이전에 수차례나 간했으나 영공은 듣지 않았으며, 또 오래지 않아서 죽은 사람의 손을 보게 되자 두 사람이 나아가 간했다. 사회가 먼저 간언했으나 영공은 듣지 않았다.
영공은 그들을 두려워해 역사(力士) 서마(鉏麑)를 시켜 조순을 죽이도록 했다. 조순의 내실 문은 열려 있었고 처소는 절제가 있었다. 그래서 서마는 물러나서 탄식하기를 “충신을 죽이는 것과 주군의 명령을 어기는 것! 그 죄는 같다.”라고 하면서 스스로 나무에 부딪쳐서 죽었다.
初, 盾常田首山,233) 見桑下有餓人. 餓人, 示眯明也.234) 盾與之食, 食其半. 問其故, 曰:「宦三年,235) 未知母之存不, 願遺母.」盾義之, 益與之飯肉. 已而為晉宰夫, 趙盾弗复知也. 九月, 晉霊公飲趙盾酒, 伏甲将攻盾. 公宰示眯明知之, 恐盾酔不能起, 而進曰:「君賜臣, 觴三行236)可以罷.」欲以去趙盾, 令先, 毋及難. 盾既去, 霊公伏士未会, 先縦237)齧狗名敖.238) 明為盾搏殺狗. 盾曰:「棄人用狗, 雖猛何為.」然不知明之為陰徳也. 已而霊公縦伏士出逐趙盾, 示眯明反撃霊公之伏士, 伏士不能進, 而竟脱盾. 盾問其故, 曰:「我桑下餓人.」問其名, 弗告.239) 明亦因亡去.
일찍이 조순은 자주 수산(首山)에 사냥을 가곤 했다. 하루는 뽕나무 아래에서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은 시미명(示眯明)이었다. 조순이 그에게 먹을 것을 주자 그가 반 정도만을 먹었다. 그 이유를 물었다. 그가 말했다. “바깥에서 관직생활 3년이 되었는데 지금 어머니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알지를 못합니다. 남겨놓아 어머니께서 드시도록 해야겠습니다.” 조순은 그가 의로운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에게 먹을 것과 고기를 더 많이 남겨놓았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그 사람이 진 영공의 주방장이 되었으나 조순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9월, 진 영공이 조순을 청해 술을 먹인 후 병사를 매복시켜 놓고 그를 살해하려고 했다. 영공의 주방장 시미명이 이 사실을 알았다. 그는 조순이 술에 취해서 일어서지 못할까 우려해 앞으로 나아가서 말했다. “주군께서 저에게 술 석 잔을 마셔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조순으로 하여금 먼저 떠나게 해 화가 미치지 않도록 했다. 조순이 이미 떠나자 매복한 병사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우선 무서운 맹견 한 마리를 풀었다. 시미명이 조순을 위해 개를 죽였다. 조순이 말했다. “사람을 버리고 개를 쓰다니. 비록 사납기는 하나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조순은 시미명이 은연중에 자신을 보호해 준 은덕을 알지 못했다.
영공의 지휘에 따라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조순을 추격하자 시미명이 그들에 반격을 가하며 그들의 추격을 저지해 마침내 조순이 도주할 수 있게 했다. 조순이 시미명에게 자신을 구해 준 이유를 물었다. 조순이 “저는 뽕나무 아래에서 배고파 죽어가던 그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조순이 이름을 물어도 말해 주지 않았다. 시미명도 기회를 보아 도주했다.
盾遂奔, 未出晉境. 乙丑, 盾昆弟将軍趙穿襲殺霊公於桃園240)而迎趙盾. 趙盾素貴, 得民和;霊公少, 侈, 民不附, 故為弑易.241) 盾复位. 晉太史董狐書曰「趙盾弑其君」, 以視於朝. 盾曰:「弑者趙穿, 我無罪.」太史曰:「子為正卿, 而亡不出境, 反不誅国亂, 非子而誰?」孔子聞之, 曰:「董狐, 古之良史也, 書法不隠.242) 宣子, 良大夫也, 為法受悪.243) 惜也, 出疆乃免.244)」
조순이 도주했으나 아직 진나라의 경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을축일(乙丑日), 조순의 아우 조천이 도원(桃園)에서 영공을 습격해 시해하고는 조순을 맞이했다. 조순은 평소 고귀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라 민심을 얻었고, 영공은 나이도 적은데 사치해 백성들이 그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시해하기가 용이했던 것이다. 조순은 원래의 관직을 회복했다.
진(晉)나라의 태사(太史) 동호(董狐)가 “조순은 그의 주군을 시해했다.”라고 쓰고, 그것을 조정에서 모두에게 보였다. 조순은 말했다. “주군을 시해한 것은 조천이다. 나는 죄가 없다.” 태사가 말했다. “당신은 수석 대신으로서 도주를 했으나 국경을 벗어나지 않았고, 돌아와서도 난을 일으킨 사람을 주살하지 않으니 당신이 아니면 누구란 말이요?” 공자(孔子)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동호는 옛날의 훌륭한 사가(史家)로서 그의 역사 기록원칙은 숨기지 않는 것이었다. 조선자(趙宣子)는 훌륭한 대부로서 원칙을 준수하다가 오명을 썼다. 안타깝도다. 만약 국경을 벗어났더라면 오명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趙盾使趙穿迎襄公弟黒臀于周而立之, 是為成公.
조순은 조천을 주나라의 도성으로 보내어 양공의 아우 흑둔(黑臀)을 영접하게 했으니, 이 사람이 성공(成公)이다.
成公者, 文公少子, 其母周女也. 壬申, 朝于武宮.
성공은 문공의 작은아들로, 그의 모친은 주 왕실의 여자였다. 임신일(壬申日), 그는 무궁(武宮)으로 가서 조종(朝宗)을 배알했다.
成公元年, 賜趙氏為公族.245) 伐鄭, 鄭倍晉故也. 三年, 鄭伯初立, 附晉而棄楚. 楚怒, 伐鄭, 晉往救之.
성공 원년, 상으로 조씨(趙氏)를 공족대부(公族大夫)에 임명했다. 정나라를 정벌했다. 진나라를 배반했기 때문이다. 3년, 정나라의 군주가 갓 왕위에 올라 진(晉)나라를 가까이하고 초 나라를 버렸다. 초 나라 왕이 화가 나서 정나라를 공격하자 진나라가 그들을 구원했다.
六年, 伐秦, 虜秦将赤.246)
6년, 진(秦)나라를 쳐서 진나라의 장군 적(赤)을 포로로 잡았다.
七年, 成公與楚荘王争彊, 会諸侯于扈. 陳畏楚, 不会. 晉使中行桓子247)伐陳, 因救鄭, 與楚戦, 敗楚師. 是年, 成公卒, 子景公拠立.
7년, 성공과 초 장왕이 강함을 다투며 호읍에서 제후들과 회합했다. 진(陳)나라는 초 나라를 두려워해 회맹에 참가하지 않았다. 진(晉)나라의 군주가 중항환자(中行桓子), 즉 순임보를 보내어 진나라를 공격했다. 그는 정나라를 구원하려고 초 나라와 싸워 초 나라의 군대를 패퇴시켰다. 이해에 성공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경공(景公) 거(據)가 즉위했다.
景公元年春, 陳大夫夏徴舒弑其君霊公. 二年, 楚荘王伐陳, 誅徴舒.
경공 원년 봄, 진(陳)나라의 대부 하징서(夏徵舒)가 그의 군주 영공(靈公)을 시해했다. 2년, 초 장왕이 진(陳)나라를 정벌해 하징서를 주살했다.
三年, 楚荘王囲鄭, 鄭告急晉. 晉使荀林父将中軍, 随会将上軍, 趙朔将下軍, 郤克、欒書、先縠、韓厥、鞏朔佐之. 六月, 至河. 聞楚已服鄭, 鄭伯肉袒與盟而去, 荀林父欲還. 先縠曰:「凡來救鄭, 不至不可, 将率離心.」卒度河. 楚已服鄭, 欲飲馬于河為名而去. 楚與晉軍大戦. 鄭新附楚, 畏之, 反助楚攻晉. 晉軍敗, 走河, 争度, 船中人指甚衆. 楚虜我将智罃. 帰而林父曰:「臣為督将, 軍敗當誅, 請死.」景公欲許之. 随会曰:「昔文公之與楚戦城濮, 成王帰殺子玉, 而文公乃喜. 今楚已敗我師, 又誅其将, 是助楚殺仇也.」乃止.
3년, 초 장왕이 정나라를 포위하자 정나라는 진(晉)나라에 시급함을 알렸다. 진나라는 순임보로 하여금 중군(中軍)을, 사회로 하여금 상군(上軍)을, 조삭(趙朔)으로 하여금 하군을 통솔하게 했고, 극극(郤克), 난서(欒書), 선곡(先縠), 한궐(韓厥), 공삭(鞏朔) 등으로 하여금 그들을 보좌하게 했다.
6월, 그들은 황하에 도착했다. 초 나라의 군대가 이미 정나라를 항복시켰으며 정나라의 군주가 옷을 벗어 어깨를 드러내고 초 나라와 동맹을 맺으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순임보는 군대를 돌려 귀국하려고 했다. 선곡이 말했다. “어쨌든 정나라를 구원하러 왔는데 가보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군사들의 마음이 흩어질 것입니다.”
마침내 황하를 건넜다. 초 나라는 이미 정나라를 항복시키고 황하 강변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며 위명을 뽐내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초 나라는 진나라와 크게 싸웠다. 정나라는 최근 초 나라에 복속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초 나라의 군대를 도와서 진나라의 군대를 공격했다. 진나라가 패전한 후 황하로 도주해 배를 다투어 타며 강을 건넜다. 배 안에는 사람들의 잘라진 손가락이 매우 많았다. 초 나라의 군대는 진나라의 장군 지앵(智罃)을 포로로 잡았다. 돌아온 후 순임보가 말했다. “소신은 전군을 통솔하는 대장으로서 군대가 패했으니 응당 처벌받아야 할 것이옵니다. 청컨대 죽여주시옵소서.” 경공이 이를 허락하려고 했다.
그러자 사회가 말했다. “예전에 문공께서 초 나라와 성복에서 싸우셨을 때 초 성왕이 돌아가서 자옥을 죽이자 문공께서는 기뻐하셨사옵니다. 지금 초 나라가 이미 우리의 군대를 패퇴시켰는데 또 우리가 우리의 장수를 죽인다면 이것은 초 나라를 돕는 일이 되옵니다.” 경공은 그만두었다.
四年, 先縠以首計而敗晉軍河上, 恐誅, 乃奔翟, 與翟謀伐晉. 晉覚, 乃族縠. 縠, 先軫子也.
4년, 선곡은 먼저 황하 강변으로 가자고 의견을 내었다가 패했기 때문에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서 적(狄)나라로 도주했다가 적나라와 상의해 진(晉)나라를 치기로 했다. 진나라에서 이를 알고 선곡의 모든 친족을 주살했다. 선곡은 선진의 아들이다.
五年, 伐鄭, 為助楚故也. 是時楚荘王彊, 以挫晉兵河上也.
5년, 정나라를 공격했다. 초 나라를 도왔기 때문이다. 이때 초 장왕은 강대해져 있었다. 황하 강변에서 진나라의 군대를 패퇴시켰기 때문이다.
六年, 楚伐宋, 宋來告急晉, 晉欲救之, 伯宗謀曰:248)「楚, 天方開之, 不可當.」乃使解揚紿為救宋.249) 鄭人執與楚, 楚厚賜, 使反其言, 令宋急下. 解揚紿許之, 卒致晉君言. 楚欲殺之, 或諫, 乃帰解揚.
6년, 초 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자 송나라는 진(晉)나라에 시급함을 알렸다. 진나라는 송을 구원하려고 했다. 그때 백종(伯宗)이 계책을 올리며 말했다. “초 나라는 하늘이 길을 열어주고 있으니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그래서 해양(解揚)으로 하여금 송나라를 구하려 한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했다. 정나라 사람이 그를 잡아 초 나라 군대로 보냈다. 초 나라의 군대는 그에게 매우 많은 재물을 주며 그더러 반대의 말을 하게 해 송나라로 하여금 빨리 투항하게 할 셈이었다. 해양은 가짜로 응답한척했으나 결국은 진나라의 주군의 말을 송나라에 전했다. 초 나라의 군대는 그를 죽이려고 했으나 어떤 사람이 간언해서 해양을 석방해 돌려보냈다.
七年, 晉使随会滅赤狄.
7년, 진나라는 사회를 적적(赤狄)에 사신으로 보냈다.
八年, 使郤克於斉. 斉頃公母従樓上観而笑之. 所以然者, 郤克僂, 而魯使蹇, 衛使眇, 故斉亦令人如之以導客. 郤克怒, 帰至河上, 曰:「不報斉者, 河伯視之!」至国, 請君, 欲伐斉. 景公問知其故, 曰:「子之怨, 安足以煩国!」弗聴. 魏文子請老休, 辟郤克, 克執政.
8년, 극극을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제 경공(齊頃公)의 모친이 누각 위에서 사신들을 보고 웃었다. 웃는 이유인즉 극극이 꼽추였고 노나라의 사신은 절름발이였으며 위(衛)나라의 사신은 애꾸눈이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제 경공도 또한 이 사신들과 같은 비정상적인 사람을 택했던 것이다. 극극은 노하여 황하 강변으로 돌아와서 말했다. “반드시 제나라에 보복할 것이다. 하백께서 보고 계신다!” 도성으로 돌아와서 진나라의 군주에게 제나라를 공격하기를 청했다. 경공은 그 이유를 물어 알고 난 뒤 말했다. “그대의 원한으로 어찌 나라를 번거롭게 하겠소!”라고 하며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위 문자(魏文子)가 연로해 은퇴하기를 간청하며 극극을 추천했다. 극극은 이로써 집권하게 되었다.
九年, 楚荘王卒. 晉伐斉, 斉使太子彊為質於晉, 晉兵罷.
9년, 초 장왕이 세상을 떠났다. 진(晉)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자 제나라는 태자 강(彊)을 진나라에 인질로 삼게 했다. 그러자 진나라의 군대가 물러났다.
十一年春, 斉伐魯, 取隆.250) 魯告急衛, 衛與魯皆因郤克告急於晉. 晉乃使郤克、欒書、韓厥以兵車八百乗與魯、衛共伐斉. 夏, 與頃公戦於鞍, 傷困頃公. 頃公乃與其右易位, 下取飲, 以得脱去. 斉師敗走, 晉追北至斉. 頃公献宝器以求平, 不聴. 郤克曰:「必得蕭桐姪子251)為質.」斉使曰:「蕭桐姪子, 頃公母;頃公母猶晉君母, 柰何必得之? 不義, 請复戦.」晉乃許與平而去.
11년 봄,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해 융읍(隆邑)을 탈취했다. 노나라가 위(衛)나라에 시급함을 알리니 위나라와 노나라가 극극을 거쳐 진(晉)나라에게 시급함을 알렸다. 진나라는 극극과 난서, 한궐을 보내어 병거 8백승으로써 노나라, 위나라와 공동으로 제나라로 진격했다.
여름, 안(鞍)이라는 땅에서 제 경공과 교전해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 곤란을 당하게 했다. 경공은 그의 시위병과 위치를 바꾸고 우물물을 마시며 겨우 탈출했다. 제나라의 군대가 도주에 실패하자 진나라의 군대는 북쪽 제나라까지 쫓아갔다. 경공은 보물과 옥을 바치며 강화를 청했으나 진나라의 군대는 듣지 않았다. 극극이 말했다. “반드시 소동(蕭桐)의 질녀를 인질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제나라의 사신이 말했다. “소동의 질녀는 경공의 모친이요. 경공의 모친은 진나라의 주군의 모친과 같은데 어떻게 그녀를 인질로 요구하십니까?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다시 결전을 치릅시다.” 그러자 진나라는 제나라와 강화를 맺고 떠났다.
楚申公巫臣盗夏姫以奔晉, 晉以巫臣為邢大夫.252)
초 나라의 신공무신(申公巫臣)이 하희(夏姬)를 훔쳐 진(晉)나라로 도망해 진나라는 무신을 형(邢) 지역의 대부(大夫)로 삼았다.
十二年冬, 斉頃公如晉, 欲上尊晉景公為王, 景公譲不敢. 晉始作六(卿)[軍],253) 韓厥、鞏朔、趙穿、荀騅、254)趙括、趙旃皆為卿. 智罃自楚帰.
12년 겨울, 제 경공이 진나라에 와서 진 경공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경공은 사양해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나라가 비로소 6군(六軍)을 만들고, 한궐, 공삭, 조천, 순추(荀騅), 조괄(趙括), 조전(趙旃)을 경(卿)으로 삼았다. 포로로 있던 지앵이 초 나라에서 귀국했다.
十三年, 魯成公朝晉, 晉弗敬, 魯怒去, 倍晉. 晉伐鄭, 取氾.
13년, 노 성공이 진나라를 방문했으나 진나라가 그를 존경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 성공은 화가 나서 떠나버렸고 그는 진나라를 배반했다. 진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해 범(氾) 땅을 빼앗았다.
十四年, 梁山崩.255) 問伯宗, 伯宗以為不足怪也.256)
14년, 양산(梁山)이 붕괴되었다. 진나라의 군주가 백종에게 물었으나 백종은 괴이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十六年, 楚将子反怨巫臣, 滅其族. 巫臣怒, 遺子反書曰:「必令子罷於奔命!」乃請使呉, 令其子為呉行人, 教呉乗車用兵. 呉晉始通, 約伐楚.
16년, 초 나라의 장수 자반(子反)이 신공무신에게 반감을 가져 그의 종족을 몰살시켰다. 무신은 화가 나서 자반에게 서신을 보냈다. “반드시 그대로 하여금 쫓겨 다니다가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오나라에 사신으로 나가기를 청해 그의 아들을 오나라의 행인(行人)으로 있게 했으며 오나라의 수레를 몰고 용병하는 방법을 배우도록 했다. 오나라와 진나라가 바야흐로 왕래를 하게 되어 공동으로 초 나라를 공격하기로 약정했다.
十七年, 誅趙同、趙括, 族滅之. 韓厥曰:「趙衰、趙盾之功豈可忘乎? 柰何絶祀!」乃复令趙庶子武為趙後, 复與之邑.
17년, 진나라는 조동(趙同)과 조괄을 주살하고 그의 집안을 멸족시켰다. 한궐이 말했다. “조최와 조순의 공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어찌 그의 제사를 단절시킬 수 있겠는가?” 그래서 다시 조씨의 서자 조무(趙武)를 조씨의 후손으로 삼고 다시 그에게 봉읍을 주었다.
十九年夏, 景公病, 立其太子寿曼為君, 是為厲公. 後月余, 景公卒.
19년 여름, 경공의 병이 깊어 태자 수만(壽曼)을 주군으로 세웠다. 이 사람이 여공(厲公)이다. 그 후 1개월쯤 지나자 경공은 세상을 떠났다.
厲公元年, 初立, 欲和諸侯, 與秦桓公夾河而盟. 帰而秦倍盟, 與翟謀伐晉. 三年, 使呂相譲秦,257) 因與諸侯伐秦. 至涇, 敗秦於麻隧, 虜其将成差.
여공 원년, 여공은 갓 즉위해 제후들과 잘 지내려고 진 환공(秦桓公)과 황하를 사이에 두고 회맹했다. 귀국하자마자 진(秦)나라가 동맹을 깨고 적나라와 상의해 진(晉)나라를 치고자 했다. 3년, 여상(呂相)을 진(秦)나라에 보내어 질책하고 제후들과 함께 진나라를 쳤다. 경하(涇河)에 도착하자 마수(麻隨)에서 진나라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진나라의 장수 성차(成差)를 포로로 잡았다.
五年, 三郤讒伯宗, 殺之.258) 伯宗以好直諫得此禍, 国人以是不附厲公.
5년, 세 명의 극씨가 여공에게 백종을 참언해 그를 죽였다. 백종은 직언과 간언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로써 화를 입은 것이다. 백성들은 그리하여 여공을 따르지 않았다.
六年春, 鄭倍晉與楚盟, 晉怒. 欒書曰:「不可以當吾世而失諸侯.」乃発兵. 厲公自将, 五月度河. 聞楚兵來救, 范文子請公欲還. 郤至曰:「発兵誅逆, 見彊辟之, 無以令諸侯.」遂與戦. 癸巳, 射中楚共王目, 楚兵敗於鄢陵.259) 子反収余兵, 拊循欲复戦, 晉患之. 共王召子反, 其侍者豎陽谷進酒, 子反酔, 不能見. 王怒, 譲子反, 子反死. 王遂引兵帰. 晉由此威諸侯, 欲以令天下求霸.
6년 봄, 정나라가 진나라를 배반하고 초 나라와 동맹을 맺자 여공은 화가 났다. 난서가 말했다. “우리들의 이 세대에서 제후들의 신뢰를 잃어버릴 수가 없사옵니다.” 그리고 병사를 일으켰다. 여공은 스스로가 원수가 되어 5월에 황하를 건넜다. 초 나라 군대가 와서 정나라를 구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범문자(范文子)가 군대를 돌리기를 청했다. 극지(郤至)가 말했다. “군사를 일으켜 반역의 무리를 주살하고자 하는데 강한 적을 만났다고 해서 피한다면 제후들을 명령할 수가 없게 됩니다.”
마침내 초 나라와 교전했다. 계사일(癸巳日), 화살로 초 공왕(楚共王)의 눈을 쏘아 맞히자 초 나라의 군대는 언릉(鄢陵)에서 패배했다. 자반(子反)이 남은 병사들을 거두어 위무하고 다시 접전을 하고자 했으나 진나라는 이것을 우려했다. 공왕이 자반을 소환했는데 마침 자반의 시종 수양곡(豎陽穀)이 술을 올려 자반은 술에 취했기 때문에 공왕을 알현할 수 없었다. 공왕은 노발대발해 자반을 질책했다. 자반은 자살했다. 공왕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진나라는 이 이후로 제후들을 위협해 패권을 잡게 되었다.
厲公多外嬖姫, 帰, 欲尽去群大夫而立諸姫兄弟. 寵姫兄曰胥童, 嘗與郤至有怨, 及欒書又怨郤至不用其計而遂敗楚,260) 乃使人閒謝楚. 楚來詐厲公曰:「鄢陵之戦, 実至召楚, 欲作亂, 内子周立之. 会與国不具, 是以事不成.」厲公告欒書. 欒書曰:「其殆有矣! 願公試使人之周261)微考之.」果使郤至於周. 欒書又使公子周見郤至, 郤至不知見売也. 厲公験之, 信然, 遂怨郤至, 欲殺之. 八年, 厲公猟, 與姫飲, 郤至殺豕奉進, 宦者奪之.262) 郤至射殺宦者. 公怒, 曰:「季子欺予!」263)将誅三郤, 未発也. 郤錡欲攻公, 曰:「我雖死, 公亦病矣.」郤至曰:「信不反君, 智不害民, 勇不作亂. 失此三者, 誰與我? 我死耳!」十二月壬午, 公令胥童以兵八百人襲攻殺三郤. 胥童因以劫欒書、中行偃于朝, 曰:「不殺二子, 患必及公.」公曰:「一旦殺三卿, 寡人不忍益也.」対曰:「人将忍君.」264)公弗聴, 謝欒書等以誅郤氏罪:「大夫复位.」二子頓首曰:「幸甚幸甚!」公使胥童為卿. 閏月乙卯, 厲公游匠驪氏,265) 欒書、中行偃以其党襲捕厲公, 囚之, 殺胥童, 而使人迎公子周266)于周而立之, 是為悼公.
여공에게는 총애하는 첩이 많았다. 언릉에서 귀국한 후 모든 대부들을 면직시키고 첩의 형제들을 임용하려고 했다. 어떤 첩의 오빠는 서동(胥童)이라고 했는데 일찍이 극지와 원한이 있었다. 그런데 또 난서도 극지가 그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고 초 나라의 군대를 패배시킨 일에 대해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기회를 만들어서 몰래 초 나라 왕에게 사죄를 했다.
초 나라 왕은 사람을 보내어 여공을 속였다. “언릉의 전쟁은 실은 극지가 초 나라의 군대를 불러 전란을 만들려고 한 것이며 그는 공자 주(周)를 맞아 옹립하려 했소이다. 마침 다른 동맹국이 없어서 이 일이 성사되지 않았던 것이오.”
여공이 난서에게 묻자 난서가 말했다. “이건 거의 있을 만한 일이옵니다! 주군께서 시험 삼아 주나라 도성으로 사람을 보내어 암암리에 그를 살펴보게 하기를 원하옵니다.” 그러자 여공은 극지를 주나라로 보냈다. 난서는 또 공자 주로 하여금 극지를 만나게 했으나 극지는 속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여공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극지를 미워하게 되어 그를 죽이려고 했다.
8년, 여공이 사냥을 나가서 희첩과 술을 마셨는데 극지가 산돼지를 잡아 바쳤다. 여공을 모시는 자가 그것을 가로채자, 극지가 그 자를 쏘아 죽였다. 여공이 크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계자(季子)가 과인을 속였도다!” 그리고는 세 사람의 극씨를 죽이려고 했으나 아직 손을 쓰지 않았다.
극의(郤錡)가 여공을 공격하려고 하면서 말했다. “내 비록 죽을지 모르나 그도 재앙을 만날 것이다.” 극지가 말했다. “신의는 주군을 배반하지 않는 것이요, 지혜는 백성을 해롭게 하지 않는 것이며, 용맹은 난을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잃게 되면 누가 나와 함께 하겠소? 나는 차라리 죽을 뿐이오.”
12월 임오일, 여공은 서동에게 병사 8백 명을 주어 세 극씨를 습격하게 했다. 서동은 이 때문에 조정에서 난서와 중항언(中行偃)을 위협하며 말했다. “그들 두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면 반드시 당신들에게 우환이 미칠 것이오.” 여공이 말했다. “하루아침에 세 사람의 대신을 죽인다니, 과인은 차마 더 이상 죽일 수는 없소.” 서동이 다시 말했다. “사람들은 장차 주군을 잔혹하게 해할 것입니다.”
여공은 듣지 않고 난서 등에게 감사하며 극씨의 죄를 처벌하려고 할 뿐이었다. “대부들의 직위를 회복시키는 바이오.” 두 사람은 머리를 조아렸다. “매우 다행이옵니다.” 여공은 서동을 경(卿)으로 임명했다. 윤달 을묘일(乙卯日), 여공은 장려씨(匠驪氏)의 집으로 가서 놀았는데 난서와 중항언이 그들의 무리를 보내어 여공을 습격, 체포하게 했다. 그리고 그를 구금시키고 서동을 죽이고 사람을 주나라의 도성에 보내어 공자 주를 영접하게 해 그를 옹립했다. 이 사람이 도공(悼公)이다.
悼公元年正月庚申, 欒書、中行偃弑厲公, 葬之267)以一乗車.268) 厲公囚六日死, 死十日庚午, 智罃迎公子周來, 至絳, 刑雞與大夫盟而立之, 是為悼公. 辛巳, 朝武宮. 二月乙酉, 即位.
도공 원년 정월 경신일(庚申日), 난서와 중항언이 여공을 죽이고 한 량의 수레로 그를 매장했다. 여공은 구금된 지 6일 만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사후 열흘이 지난 경오일(庚午日)에 지앵이 공자 주를 맞아들여 강성(絳城)으로 왔다. 닭을 잡아 대부들과 상의한 후 그를 옹립했다. 이 사람이 곧 도공인 것이다. 신사일(辛巳日), 무궁(武宮)으로 가서 참배하고, 2월 을유일(乙酉日)에 즉위했다.
悼公周者, 其大父捷, 晉襄公少子也, 不得立, 号為桓叔, 桓叔最愛. 桓叔生恵伯談, 談生悼公周. 周之立, 年十四矣. 悼公曰:「大父、父皆不得立而辟難於周, 客死焉. 寡人自以疏遠, 毋幾為君.269) 今大夫不忘文、襄之意而恵立桓叔之後, 頼宗廟大夫之霊, 得奉晉祀, 豈敢不戦戦乎? 大夫其亦佐寡人!」於是逐不臣者七人, 修旧功, 施徳恵, 収文公入時功臣後. 秋, 伐鄭. 鄭師敗, 遂至陳.
도공 주(周)의 조부는 희첩(姬捷)으로 진 양공(晉襄公)의 작은아들이라 왕위를 이을 수 없기 때문에 환숙(桓叔)이라고 불렸다. 그는 양공에게 가장 총애를 많이 받았다. 환숙이 혜백(惠伯) 희담(姬談)을 낳았고, 담은 도공 주를 낳았다. 도공 주가 즉위했을 때의 나이는 14세였다.
그가 말했다. “조부와 부친께서는 왕위에 오를 수 없기 때문에 난을 피해서 주나라의 도성으로 가셨다가 거기에서 객사하셨소. 과인 자신도 진나라와는 많이 소원(疏遠)하게 생각되어 임금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소. 지금 대부들이 문공과 양공의 뜻을 잊지 않고 은혜롭게 환숙의 후손을 옹립했으니 조종과 대부들의 영혼에 의지해 진(晉)나라의 제사를 받들며 어찌 감히 삼가고 두려워하지 않겠소? 대부들은 모름지기 과인을 잘 보좌해 주시오!”
그리하여 여공에게 불충한 신하 7명을 축출하고 조종(朝宗)의 옛 공업(功業)을 계승하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문공이 환국할 때의 여러 공신들의 후손을 거두었다. 가을, 정나라를 공격했다. 정나라를 패배시키고 다시 진(陳)나라까지 침공하기에 이르렀다.
三年, 晉会諸侯.270) 悼公問群臣可用者, 祁傒挙解狐. 解狐, 傒之仇. 复問, 挙其子祁午. 君子曰:「祁傒可謂不党矣! 外挙不隠仇, 内挙不隠子.」方会諸侯, 悼公弟楊干亂行,271) 魏絳戮其僕.272) 悼公怒, 或諫公, 公卒賢絳, 任之政, 使和戎, 戎大親附. 十一年, 悼公曰:「自吾用魏絳, 九合諸侯,273) 和戎、翟, 魏子之力也.」賜之樂, 三譲乃受之. 冬, 秦取我櫟.274)
3년, 진나라가 계택(鷄澤)에서 제후들과 회합했다. 도공은 여러 신하에게 등용할 만한 사람을 물었다. 기해(祁傒)가 해호(解狐)를 추천했다. 해호는 기해와 원수지간이었다. 도공이 다시 물으니 기해는 자신의 아들 기오(祁午)를 추천했다. 그때 군자가 말했다. “기해는 진실로 공평무사하도다! 바깥사람을 추천함에는 원수라고 해서 숨기지 않았고, 안쪽의 사람을 추천함에는 아들을 숨기지 않았다.”
제후들이 회합할 때 도공의 아우 양간(楊干)이 대열을 혼란하게 했다. 위강(魏絳)이 그의 마부를 죽였다. 도공이 노하자 어떤 사람이 도공에게 간언했다. 도공은 마침내 위강이 현명하고 능력 있음을 알게 되어 그에게 정사를 맡기고 융족(戎族)에게 사신으로 보냄으로써, 융족이 아주 가까이 따르게 되었다. 11년, 도공이 말했다. “과인이 위강을 등용한 후 아홉 차례나 제후들을 회합하며 융(戎), 적(翟)과 화목하게 된 것은 모두 위강의 힘이다.” 도공은 그에게 음악을 내렸다. 위강은 세 차례나 사양하다가 받았다. 겨울, 진(秦)나라가 정나라의 역(櫟) 땅을 빼앗았다.
十四年, 晉使六卿率諸侯伐秦, 度涇, 大敗秦軍, 至棫林而去.
14년, 진 도공이 육경으로 하여금 제후들을 이끌고 진(秦)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경하(涇河)를 건너서 진(秦)나라의 군대를 대패시키고 혹림(棫林)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十五年, 悼公問治国於師曠. 師曠曰:「惟仁義為本.」冬, 悼公卒, 子平公彪立.
15년, 도공이 악사(樂師) 광(廣)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에 대해서 물었다. 사광이 말했다. “오직 인의가 있을 뿐이옵니다.” 겨울, 도공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평공(平公) 표(彪)가 왕위에 올랐다.
平公元年, 伐斉, 斉霊公與戦靡下,275) 斉師敗走. 晏嬰曰:「君亦毋勇, 何不止戦?」遂去. 晉追, 遂囲臨菑, 尽焼屠其郭中. 東至膠, 南至沂, 斉皆城守, 晉乃引兵帰.
평공 원년, 제나라를 쳤다. 제 영공(齊靈公)은 진의 군대와 미하(靡下)에서 교전했으나 패하고 도주했다. 제나라의 안영(晏嬰)이 말했다. “주군께서는 용기가 없으십니다. 어찌 계속 싸우시지 않으십니까?”
마침내 제나라의 군대는 떠났다. 진나라의 군대가 추격해 도성 임치(臨菑)를 포위하고 외성(外城)의 모든 집을 모조리 불태우고 사람들을 도살했다. 동쪽으로는 교수(膠水), 남쪽으로는 기수(沂水)에까지 이르자 제나라는 모든 성을 굳게 닫고 방어했다. 진나라는 군대를 이끌고 철수했다.
六年, 魯襄公朝晉. 晉欒逞有罪, 奔斉. 八年, 斉荘公微遣欒逞於曲沃, 以兵随之. 斉兵上太行, 欒逞従曲沃中反, 襲入絳. 絳不戒, 平公欲自殺, 范献子止公, 以其徒撃逞, 逞敗走曲沃. 曲沃攻逞, 逞死, 遂滅欒氏宗. 逞者, 欒書孫也.276) 其入絳, 與魏氏謀. 斉荘公聞逞敗, 乃還, 取晉之朝歌去, 以報臨菑之役也.
6년, 노 양공(魯襄公)이 진나라를 방문했다. 진나라의 난령(欒逞)이 죄를 지어 제나라로 도주했다. 8년, 제 장공(齊莊公)이 비밀리에 난령을 곡옥으로 보내며 병사를 뒤따르게 했다. 제나라 병사들이 태행산(太行山)에 오르자 난령이 곡옥으로 가는 중도에서 돌아와 진나라의 도성 강성을 기습했다. 강성은 경계를 하지 않았다. 평공은 자살하려고 했으나 범헌자(范獻子)가 평공을 말리고 그의 무리로 난령을 반격하자 난령은 패해 곡옥으로 도주했다. 평공은 곡옥에서 난령을 공격해 그를 죽였다.
마침내 그의 집안을 멸족시켰다. 난령은 난서의 손자이다. 그는 강성으로 들어와서 위씨(魏氏)와 모의했다. 제 장공은 난령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돌아와 진나라의 조가(朝歌)를 쳐서 빼앗았다. 그래서 임치의 일을 보복했다.
十年, 斉崔杼弑其君荘公. 晉因斉亂, 伐敗斉於高唐去, 報太行之役也.
10년, 제나라의 최서(崔杼)가 그의 주군 장공을 시해했다. 진나라는 제나라의 내란을 틈타 고당(高唐)에서 제나라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태행의 일을 보복했다.
十四年, 呉延陵季子來使, 與趙文子、韓宣子、魏献子語, 曰:「晉国之政, 卒帰此三家矣.」
14년, 오나라 연릉계자(延陵季子)가 사신으로 와서 조문자(趙文子), 한선자(韓宣子), 위헌자(魏獻子)와 이야기를 나눈 후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의 정권은 마침내 이 세 사람의 손에 돌아갈 것이다.”
十九年, 斉使晏嬰如晉, 與叔嚮語. 叔嚮曰:「晉, 季世也. 公厚賦為台池而不恤政, 政在私門, 其可久乎!」晏子然之.
19년, 제나라가 안영을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안영은 숙향(叔向)과 이야기했다. 숙향이 말했다. “진나라는 현재 쇠하는 시기입니다. 주군은 조세를 많이 거두어 누대나 연못을 만들며 정사를 돌보지 않아서 정사는 마침내 사가(私家)들의 문(門)에서 나오고 있으니 어찌 오래 갈수 있겠소?” 안영도 이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二十二年, 伐燕. 二十六年, 平公卒, 子昭公夷立.
22년, 연나라를 공격했다. 26년, 평공이 죽고 그의 아들 소공(昭公) 이(夷)가 왕위에 올랐다.
昭公六年卒. 六卿彊,277) 公室卑. 子頃公去疾立.
소공은 재위 6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육경들은 강성해지고 공실(公室)은 쇠미해졌다. 아들 경공(頃公) 거질(去疾)이 왕위에 올랐다.
頃公六年, 周景王崩, 王子争立. 晉六卿平王室亂, 立敬王.
경공 6년, 주 경왕(周景王)이 세상을 떠나고 왕자들의 왕위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진나라의 육경이 왕실의 내란을 평정하고 경왕(敬王)을 옹립했다.
九年, 魯季氏逐其君昭公, 昭公居乾侯. 十一年, 衛、宋使使請晉納魯君. 季平子私賂范献子, 献子受之, 乃謂晉君曰:「季氏無罪.」不果入魯君.
9년, 노나라의 계씨가 그의 주군 소공(昭公)을 축출했다. 소공은 간후(乾侯)에 머물렀다. 11년, 위(衛)와 송 두 나라가 사신을 파견해 진나라가 노나라의 주군을 환국할 수 있도록 해주기를 청했다. 노나라의 계평자는 비밀리에 범헌자에게 뇌물을 주었고, 범헌자는 이를 받아 진나라의 주군에게 말했다. “계씨는 죄가 없사옵니다.” 그래서 노나라의 주군을 환국시키지 않았다.
十二年, 晉之宗家祁傒孫, 叔嚮子, 相悪於君. 六卿欲弱公室, 乃遂以法尽滅其族. 而分其邑為十県, 各令其子為大夫. 晉益弱, 六卿皆大.
12년, 진나라의 종실 집안인 기해의 손자와 숙향의 아들이 주군의 면전에서 서로를 비방했다. 6경은 종실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법을 이용해서 그들의 일족을 멸하고 그들의 봉읍을 10현으로 나누어 각각 자신들의 아들을 보내 대부로 삼았다. 진나라의 주군의 권력은 더욱 약화되었고 6경은 더욱 강대해졌다.
十四年, 頃公卒, 子定公午立.
14년, 경공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정공(定公)이 즉위했다.
定公十一年, 魯陽虎奔晉, 趙鞅簡子舎之. 十二年, 孔子相魯.
정공 11년, 노나라의 양호(陽虎)가 진나라로 도망하자 조앙간자(趙鞅簡子)가 그를 머무르게 했다. 12년, 공자(孔子)가 노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十五年, 趙鞅使邯鄲大夫午, 不信, 欲殺午, 午與中行寅、278)范吉射279)親攻趙鞅, 鞅走保晉陽. 定公囲晉陽. 荀櫟、韓不信、魏侈與范、中行為仇, 乃移兵伐范、中行. 范、中行反, 晉君撃之, 敗范、中行. 范、中行走朝歌, 保之. 韓、魏為趙鞅謝晉君, 乃赦趙鞅, 复位. 二十二年, 晉敗范、中行氏, 二子奔斉.
15년, 조앙이 한단(邯鄲)의 대부 경오(耿午)를 사신으로 보냈으나 믿을 수 없어 그를 죽이려고 했다. 경오는 중항인(中行寅), 범길석(范吉射)과 함께 직접 조앙을 공격했고, 조앙은 도주해 진양(晉陽)을 지켰다. 정공이 진양을 포위했다.
순력(荀櫟), 한불신(韓不信)과 위치(魏侈) 등은 범길석과 중항인 등과 원수를 졌으므로 군대를 되돌려 범길석, 중항인을 공격했다. 범길석과 중항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정공은 그들을 공격해 패퇴시켰다. 범길석과 중항인이 조가로 도망가서 성을 굳게 지켰다. 한불신과 위치가 조앙을 위해 정공에게 사죄해 정공은 조앙을 사면해 주고 그의 직위를 복직시켰다. 22년, 진나라가 범길석과 중항인을 공격해 패배시키자 그 두 사람은 제나라로 도주했다.
三十年, 定公與呉王夫差会黄池, 争長, 趙鞅時従, 卒長呉.280)
30년, 정공과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황지(黃池)에서 회맹해 수장(首長)을 다투었다. 조앙이 이때 수행해 마침내 오왕이 수장으로 되었다.
三十一年, 斉田常弑其君簡公, 而立簡公弟驁為平公. 三十三年, 孔子卒.
31년,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그의 주군 간공(簡公)을 시해하고 간공의 아우 오(驁)를 옹립했다. 이 사람이 제 평공(齊平公)이다. 33년, 공자(孔子)가 세상을 떠났다.
三十七年, 定公卒, 子出公鑿立.
37년, 정공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출공(出公) 착(鑿)이 뒤를 이었다.
出公十七年,281) 知伯與趙、韓、魏共分范、中行地以為邑. 出公怒, 告斉、魯, 欲以伐四卿.282) 四卿恐, 遂反攻出公. 出公奔斉, 道死. 故知伯乃立昭公曾孫驕為晉君, 是為哀公.283)
출공 17년, 지백(知伯)이 조씨, 한씨, 위씨와 함께 범씨와 중항씨의 땅을 나누어 자신들의 봉읍으로 했다. 출공이 화가 나서 제와 노 두 나라에게 알려 그들에게 의지해서 4명의 경들을 토벌하려고 했다. 4명은 두려워해 마침내 출공에게 반격을 가했다. 출공은 제나라로 도망가다 길에서 죽었다. 그래서 지백은 소공의 증손자 교(驕)를 주군으로 옹립했다. 이 사람이 애공(哀公)이다.
哀公大父雍, 晉昭公少子也, 号為戴子.284) 戴子生忌. 忌善知伯, 蚤死, 故知伯欲尽并晉, 未敢, 乃立忌子驕為君. 當是時, 晉国政皆決知伯, 晉哀公不得有所制. 知伯遂有范、中行地, 最彊.
애공의 조부 옹(雍)은 진 소공의 작은아들이며 대자(戴子)로 불렸다. 대자는 기(忌)를 낳았다. 희기(姬忌)는 지백과 잘 통했으나 일찍이 죽었다. 그래서 지백은 진나라를 완전히 삼키려고 했다. 그러나 감히 그러지를 못하고 기의 아들 교를 군주로 옹립한 것이다. 이때 진나라의 정치는 모두 지백에 의해서 결정되었고, 애공은 그에게 어떠한 제재도 가할 수 없었다. 지백이 마침내 범씨와 중항씨의 땅을 소유하게 되자 가장 강성해졌다.
哀公四年, 趙襄子、韓康子、魏桓子共殺知伯, 尽并其地.285)
애공 4년, 조양자(趙襄子), 한강자(韓康子), 위환자(魏桓子)가 공동으로 지백을 살해하고 그의 전영토를 삼켰다.
十八年, 哀公卒, 子幽公柳立.
18년, 애공이 죽고 그의 아들 유공(幽公) 유(柳)가 왕위에 올랐다.
幽公之時, 晉畏, 反朝韓、趙、魏之君.286) 独有絳、曲沃, 余皆入三晉.
유공의 시대에는 진(晉)나라의 군주가 권신을 매우 두려워해 오히려 반대로 한씨, 조씨, 위씨의 군주를 알현했다. 진나라의 군주는 다만 강성과 곡옥을 가지고 있을 뿐 그 나머지는 모두 이 삼진(三晉)에게로 돌아갔다.
十五年, 魏文侯初立.287) 十八年, 幽公淫婦人, 夜窃出邑中, 盗殺幽公.288) 魏文侯以兵誅晉亂, 立幽公子止, 是為烈公.289)
15년, 위 문후(魏文侯)가 새로 즉위했다. 18년, 유공(幽公)이 부녀자를 간음하며 밤에 사사로이 성 밖을 나섰다가 강도에게 살해되었다. 위 문후가 군대로 진나라의 동란을 평정하고 유공의 아들 지(止)를 옹립했다. 그가 열공(烈公)이다.
烈公十九年, 周威烈王賜趙、韓、魏皆命為諸侯.
열공 19년, 주나라의 위열왕(威烈王)이 한(韓), 조(趙), 위(魏) 나라에게 봉작을 내리고 제후로 임명했다.
二十七年, 烈公卒, 子孝公頎立.290) 孝公九年, 魏武侯初立, 襲邯鄲, 不勝而去. 十七年, 孝公卒,291) 子静公倶酒立.292) 是歳, 斉威王元年也.
27년, 열공이 죽자 그의 아들 효공(孝公) 기(頎)가 즉위했다. 효공 9년, 위 무후(魏武侯)가 새로 즉위해 조(趙)나라의 한단을 기습했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 17년, 효공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정공(靜公) 구주(俱酒)가 왕위에 올랐다. 이해가 제 위왕(齊威王) 원년이다.
静公二年, 魏武侯、韓哀侯、趙敬侯滅晉後而三分其地.293) 静公遷為家人, 晉絶不祀.
정공 2년, 위 무후, 한 애후(韓哀侯), 조 경후(趙敬侯)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했다. 정공은 평민으로 강등되고 진나라는 제사가 단절되었다.
太史公曰:晉文公, 古所謂明君也, 亡居外十九年, 至困約, 及即位而行賞, 尚忘介子推, 況驕主乎? 霊公既弑, 其後成、景致厳, 至厲大刻, 大夫懼誅, 禍作. 悼公以後日衰, 六卿専権. 故君道之御其臣下. 固不易哉!
태사공은 말한다.
“진 문공(晉文公)은 고대에서 말하는 영명한 군주로서 국외에서 19년 동안을 떠돌며 매우 곤궁했다. 왕위에 오른 후 논공행상을 하던 중 비록 개자추(介子推)를 잊기는 했으나 어찌 교만한 군주라고 할 것인가?
영공(靈公)은 이미 시해되었고 이후 성공(成公), 경공(景公)은 극히 엄격했으며 여공(厲公)에 이르러 특히 가혹했으니 대부들이 모두 살해될까 두려워해 마침내 화란(禍亂)이 일어난 것이다. 도공(悼公) 이후 하루하루 쇠약해져 6경(六卿)들이 전횡했다. 그래서 군주가 자신의 신하를 부리는 책략은 본시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각주
1 索隠按:太叔以夢及手文而名曰虞, 至成王誅唐之後, 因戯削桐而封之. 叔, 字也, 故曰唐叔虞. 而唐有晉水, 至子燮改其国号曰晉侯. 然晉初封於唐, 故称晉唐叔虞也. 且唐本尭後, 封在夏墟, 而都於鄂. 鄂, 今在大夏是也. 及成王滅唐之後, 乃分徙之於許、郢之閒, 故春秋有唐成公是也, 即今之唐州也.
2 集解左傳曰:「邑姜方娠太叔.」服虔曰:「邑姜, 武王后, 斉太公女也.」
3 正義括地志云:「故唐城在絳州翼城県西二十里, 即尭裔子所封. 春秋云夏孔甲時, 有尭苗裔劉累者, 以豢竜事孔甲, 夏后嘉之, 賜氏御竜, 以更豕韋之後. 竜一雌死, 潜醢之以食夏后;既而使求之, 懼而遷於魯県. 夏后(召孟)[蓋]別封劉累之孫于大夏之墟為侯. 至周成王時, 唐人作亂, 成王滅之, 而封大叔, 更遷唐人子孫于杜, 謂之杜伯, 即范■所云『在周為唐杜氏』. 按:魯県汝州魯山県是. 今随州棗陽県東南一百五十里上唐郷故城即[是]. 後子孫徙於唐.」
4 集解世本曰:「居鄂」. 宋忠曰:「鄂地今在大夏.」, 不合在鄂, 未詳也.
5 正義燮, 先牒反. 括地志云:「故唐城在并州晉陽県北二里. 城記云尭築也. [徐才]宗国都城記云『唐叔虞之子燮父徙居晉水傍. 今并理故唐城. 唐者, 即燮父所徙之処, 其城南半入州城, 中削為坊, 城牆北半見在』. 毛詩譜云『叔虞子燮父以尭墟南有晉水, 改曰晉侯』.」
6 索隠系本作「曼期」, 譙周作「曼旗」也.
7 索隠系本作「輻」字.
8 正義厲王奔彘, 周、召和其百姓行政, 号曰「共和」.
9 索隠系本及譙周皆作「蘇」.
10 索隠鄒誕本作「弗生」, 或作「沸王」, 並音袐.
11 集解杜預曰:「条, 晉地.」
12 集解杜預曰:「西河介休県南有地名千畝.」
13 集解杜預曰:「意取能成其衆也.」
14 集解賈逵曰:「晉大夫.」
15 索隠河東之県名, 漢武帝改曰聞喜也.
16 索隠翼本晉都也, 自孝侯已下一号翼侯, 平陽絳邑県東翼城是也.
17 正義世本云欒叔賓父也.
18 索隠音時戦反. 又音善, 又音陀.
19 索隠系本作「郄」, 而他本亦有作「都」. 正義音丘戟反.
20 正義称, 尺証反.
21 集解賈逵曰:「翼南鄙邑名.」
22 正義白郎反. 汾水之旁.
23 集解礼記曰:「天子未除喪曰余小子, 生名之, 死亦名之.」鄭玄曰:「晉有小子侯, 是取之天子也.」
24 集解賈逵曰:「韓萬, 曲沃桓叔之子, 荘伯弟.」
25 正義馬融云:「周武王克商, 封文王異母弟虢仲於夏陽.」
26 索隠晉有両穆侯, 言先, 以別後也.
27 索隠櫟, 鄭邑, 今河南陽翟是也. 故鄭之十邑有櫟有華也.
28 集解韋昭曰:「西戎之別在驪山也.」
29 集解賈逵曰:「士蔿, 晉大夫.」
30 集解賈逵曰:「聚, 晉邑.」
31 索隠春秋荘二十六年傳「士蔿城絳」是也. 杜預曰「今平陽絳邑県」. 應劭曰「絳水出西南」也.
32 集解韋昭曰:「蒲, 今蒲阪;屈, 北屈:皆在河東.」杜預曰:「蒲, 今平陽蒲子県是也.」
33 集解左傳曰王使虢公命曲沃伯以一軍, 為晉侯. 今始為二軍.
34 集解服虔曰:「三国皆姫姓, 魏在晉之蒲阪河東也.」杜預曰:「平陽皮氏県東南有耿郷, 永安県東北有霍太山也.」 索隠按:永安県西南汾水西有霍城, 古霍国;有霍水, 出霍太山. 地理志河東河北県, 古魏国. 地記亦以為然. 服虔云在蒲阪, 非也. 地記又曰皮氏県汾水南耿城, 是故耿国也.
35 集解服虔曰:「邑有先君之主曰都.」
36 集解賈逵曰:「謂将下軍也.」
37 集解服虔曰:「言其祿位極尽於此也.」
38 集解王粛曰:「太伯知天命在王季, 奔呉不反.」
39 集解王粛曰:「雖去猶可有令名, 何與其坐而及禍也.」
40 集解賈逵曰:「卜偃, 晉掌卜大夫郭偃.」
41 集解服虔曰:「數従一至萬為満. 魏喩巍, 巍, 高大也.」
42 集解服虔曰:「以魏賞畢萬, 是為天開其福.」
43 集解杜預曰:「以魏従萬, 有衆多之象.」
44 集解賈逵曰:「震下坎上屯, 坤下坎上比. 屯初九変之比.」
45 集解賈逵曰:「辛廖, 晉大夫.」
46 集解杜預曰:「屯, 険難也, 所以為堅固. 比, 親密, 所以得入.」
47 集解賈逵曰:「東山, 赤狄別種.」
48 集解賈逵曰:「里克, 晉卿里季也.」
49 集解服虔曰:「厨膳飲食.」
50 集解服虔曰:「有代太子守則従之.」
51 集解服虔曰:「助君撫循軍士.」
52 集解杜預曰:「率師者必専謀軍事.」
53 集解杜預曰:「宣号令.」
54 集解賈逵曰:「国政, 正卿也.」
55 集解杜預曰:「命, 将軍所制.」
56 集解杜預曰:「太子統師, 是失其官也.」
57 集解杜預曰:「専命則不孝, 是為師必不威也.」
58 集解賈逵曰:「将下軍.」
59 集解服虔曰:「不得立己也.」
60 集解服虔曰:「偏裻之衣, 偏異色, 駮不純, 裻在中, 左右異, 故曰偏衣.」杜預曰:「偏衣左右異色, 其半似公服.」韋昭曰:「偏, 半也. 分身之半以授太子.」 正義上「衣」去声, 下「衣」如字.
61 集解服虔曰:「以金為玦也.」韋昭曰:「金玦, 兵要也.」 正義玦音決.
62 正義言虢助晉伐曲沃也.
63 集解何休曰:「屈産, 出名馬之地. 乗, 備駟也.」
64 集解賈逵曰:「虞在晉南, 虢在虞南.」
65 集解服虔曰:「下陽, 虢邑也, 在大陽東北三十里. 谷梁傳曰下陽, 虞、虢之塞邑.」
66 集解服虔曰:「斉姜廟所在.」
67 索隠左傳云「六日」, 不同.
68 集解韋昭曰:「将飲先祭, 示有先也. 墳, 起也.」
69 集解韋昭曰:「小臣, 官名, 掌陰事, 今閹士也.」
70 索隠太子之行如此, 妾前見君欲廃而恨之, 今乃自以恨為失也.
71 集解韋昭曰:「新城, 曲沃也, 新為太子城.」
72 索隠国語云:「申生乃雉経於新城廟.」韋昭云:「曲沃也, 新為太子城, 故曰新城.」
73 正義蔿, 為詭反. 為, 于偽反.
74 集解服虔曰:「蒙茸以言亂貌. 三公言君與二公子. 将敵, 故不知所従.」
75 正義勃, 白没反. 鞮, 都提反. 韋昭云:「伯楚, 寺人披之字也, 於文公時為勃鞮也.」
76 集解服虔曰:「袪, 袂也.」
77 集解杜預曰:「盟府, 司盟之官也.」
78 集解皇覧曰:「虢公冢在河内温県郭東, 済水南大冢是也. 其城南有虢公台.」
79 正義南雍州記云:「百里奚宋井伯, 宛人也.」
80 集解杜預曰:「穆姫, 献公女. 送女曰媵, 以屈辱之.」
81 集解服虔曰:「虞所祭祀, 命祀也.」
82 集解公羊傳曰:「蓋戯之也.」何休曰:「以馬歯戯喩荀息之年老也.」
83 集解賈逵曰:「賈華, 晉右行大夫.」
84 正義民逃其上曰潰.
85 集解韋昭曰:「冀芮, 晉大夫.」
86 集解左傳作「采桑」, 服虔曰「翟地」. 索隠裴氏云左傳作「采桑」. 按:今平陽曲南七十里河水有采桑津, 是晉境. 服虔云翟地, 亦頗相近. 然字作「齧桑」, 齧桑衛地, 恐非也.
87 索隠河内, 河曲也. 内音汭.
88 索隠左傳作「卓子」, 音恥角反. 弟, 女弟也.
89 正義在曹州考城県東南一里.
90 索隠弟, 但也.
91 索隠謂荀息受公命而立奚斉, 雖复身死, 不背生時之命, 是死者复生也.
92 索隠言生者見荀息不背君命而死, 不為之羞慚也.
93 集解賈逵曰:「邳鄭, 晉大夫. 三公子, 申生、重耳、夷吾也.」
94 集解列女傳曰:「鞭殺驪姫于市.」
95 集解杜預曰:「詩大雅, 言此言之玷難治甚於白珪.」
96 集解韋昭曰:「歯牙, 謂兆端左右釁坼有似歯牙, 中有縦畫, 以象讒言之為害也.」
97 正義国語云:「里克及邳鄭使屠岸夷告公子重耳於翟曰:『国亂民擾, 得国在亂, 治民在擾, 子盍入乎?』」
98 正義負音佩.
99 正義省音眚. 杜預曰:「姓瑕呂, 名飴甥, 字子金.」
100 正義■成子, 即冀芮.
101 集解賈逵曰:「汾, 水名. 汾陽, 晉地也.」 索隠按:国語「命里克汾陽之田百萬, 命邳鄭以負蔡之田七十萬」. 今此不言, 亦其疏略也.
102 集解賈逵曰:「周卿士.」
103 集解服虔曰:「奚斉、悼子、荀息也.」
104 集解韋昭曰:「献公時申生葬不如礼, 故改葬之.」
105 集解服虔曰:「晉所滅国以為下邑. 一曰曲沃有宗廟, 故謂之国;在絳下, 故曰下国也.」
106 集解杜預曰:「忽如夢而相見. 狐突本為申生御, 故复使登車.」
107 集解服虔曰:「帝, 天帝. 請罰有罪.」
108 集解左傳曰:「七日.」
109 集解杜預曰:「将因巫以見.」
110 集解杜預曰:「狐突許其言, 申生之象亦没.」
111 集解賈逵曰:「獘, 敗也. 韓, 晉韓原.」
112 索隠更, 作也. 更喪謂改喪. 言後十四年晉不昌.
113 索隠左傳作「呂甥」.
114 集解杜預曰:「三子, 晉大夫. 不従, 不與秦賂也.」 索隠呂省、■称、冀芮三子, 晉大夫.
115 集解韋昭曰:「七輿, 申生下軍之衆大夫也.」杜預曰:「侯伯七命, 副車七乗.」
116 集解韋昭曰:「召武公, 為王卿士.」
117 索隠謂受玉惰也. 事見僖十一年.
118 集解服虔曰:「秦大夫.」
119 集解杜預曰:「慶鄭, 晉大夫.」
120 集解服虔曰:「虢射, 恵公舅.」
121 集解韋昭曰:「深, 入境. 一曰深猶重.」
122 集解服虔曰:「孫, 順.」
123 集解服虔曰:「二子, 晉大夫也.」
124 索隠在馮翊夏陽北二十里, 今之韓城県是.
125 索隠驇音竹二反. 謂馬重而陥之於泥.
126 正義韋昭云:「梁由靡, 大夫也.」
127 集解服虔曰:「輅, 迎也.」 索隠輅音五稼反. 鄒誕音五額反.
128 集解杜預曰:「馮翊臨晉県東有王城.」
129 正義君, 恵公也. 親, 父母也. 言懼失君国亂, 恐亡父母, 不憚立子圉也.
130 正義小人言立子圉為君之後, 必報秦. 終不事秦, 寧事戎、狄耳.
131 正義餽音匱. 一牛一羊一豕為一牢.
132 正義質音致.
133 集解服虔曰:「圉人掌養馬臣之賎者. 不聘曰妾.」
134 集解賈逵曰:「溝, 塹也.」
135 正義罷音皮.
136 集解服虔曰:「曲礼曰『世婦以下自称婢子』. 婢子, 婦人之卑称.」
137 正義欒枝、■縠之属也.
138 索隠即左傳之勃鞮, 亦曰寺人披也.
139 集解賈逵曰:「赤狄之別, 隗姓.」 索隠赤狄之別種也, 隗姓也. 咎音高. 鄒誕本作「囷如」, 又云或作「囚」.
140 正義直留反.
141 索隠左傳云伐廧咎如, 獲其二女, 以叔隗妻趙衰, 生盾;公子取季隗, 生伯鯈、叔劉. 則叔隗長而季隗少, 乃不同也.
142 索隠與音余. 諸本或為「興」. 興, 起也. 非翟可用興起, 故奔之也.
143 索隠犂猶比也.
144 正義杜預云:「言将死入木也, 不复成嫁也.」
145 集解賈逵曰:「衛地.」杜預曰:「今衛県西北有地名五鹿, 陽平元城県東亦有五鹿.」
146 集解服虔曰:「懼孝公怒, 故殺之以滅口.」
147 集解徐広曰:「一云『人生一世, 必死於此』.」
148 索隠以国君之礼礼之也.
149 索隠適音敵.
150 集解賈逵曰:「司馬法『従遯不過三舎』. 三舎, 九十里也.」
151 索隠子玉請殺重耳, 楚成王不許, 言人出言不可軽易之.
152 集解服虔曰:「胥臣臼季也.」
153 集解韋昭曰:「詩云『芃芃黍苗, 陰雨膏之』.」
154 正義呂甥, 郤芮也.
155 索隠視猶見也.
156 集解韋昭曰:「廬柳, 晉地也.」
157 集解杜預曰:「解県西北有郇城.」 索隠音荀, 即文王之子所封. 又音環.
158 集解賈逵曰:「文公之祖武公廟也.」
159 索隠杜預云:「馮翊臨晉県東有故王城, 今名武郷城.」
160 集解服虔曰:「蒙, 欺也.」
161 索隠竜喩重耳. 五蛇即五臣, 狐偃、趙衰、魏武子、司空季子及子推也. 旧云五臣有先軫、顛頡, 今恐二人非其數.
162 集解賈逵曰:「綿上, 晉地.」杜預曰:「西河介休県南有地名綿上.」
163 集解徐広曰:「一作『国』.」
164 集解賈逵曰:「旌, 表也.」
165 索隠晉地也.
166 集解服虔曰:「陽樊, 周地. 陽, 邑名也, 樊仲山之所居, 故曰陽樊.」
167 集解杜預曰:「報宋贈馬之施.」
168 集解王粛曰:「始复成国之礼, 半周軍也.」
169 集解賈逵曰:「欒枝, 欒賓之孫.」
170 正義犨, 昌由反, 又音受.
171 集解杜預曰:「河内沁水県西北有原城.」
172 集解杜預曰:「衛地也.」
173 集解服虔曰:「衛地也.」
174 集解徐広曰:「一作『勝』.」
175 索隠晉若攻楚, 則傷楚子送其入秦之徳;又欲釈宋不救, 乃虧宋公贈馬之恵. 進退有難, 是以患之.
176 索隠楚初得曹, 又新婚於衛, 今晉執曹伯分曹、衛之地與宋, 則楚急曹、衛, 其勢宜釈宋.
177 集解服虔曰:「子玉非敢求有大功, 但欲執蔿賈讒慝之口, 謂子玉過三百乗不能入也.」杜預曰:「執猶塞也.」
178 集解賈逵曰:「宛春, 楚大夫.」
179 集解韋昭曰:「君, 文公也. 臣, 子玉也. 一謂釈宋囲, 二謂复曹、衛.」
180 集解韋昭曰:「怒楚, 令必戦.」
181 集解杜預曰:「須勝負決乃定計.」
182 集解得臣即子玉.
183 索隠成公王臣.
184 索隠国帰父.
185 索隠小子憖也.
186 集解賈逵曰:「衛地也.」
187 集解杜預曰:「衡雍, 鄭地, 今滎陽巻県也.」
188 集解服虔曰:「既敗楚師, 襄王自往臨践土, 賜命晉侯, 晉侯聞而為之作宮.」 索隠杜預云践土, 鄭地. 然拠此文, 晉師還至衡雍, 衡雍在河南也. 故劉氏云践土在河南. 下文践土在河北, 今元城県西有践土駅, 義或然也.
189 正義俘音孚, 囚也.
190 集解服虔曰:「駟介, 駟馬被甲也. 徒兵, 歩卒也.」
191 集解賈逵曰:「王子虎, 周大夫.」
192 集解賈逵曰:「大輅, 金輅. 彤弓, 赤;玈弓, 黒也. 諸侯賜弓矢, 然後征伐.」 正義彤, 徒冬反. 玈音廬.
193 集解賈逵曰:「秬, 黒黍;鬯, 香酒也. 所以降神. 卣, 器名, 諸侯賜珪瓚, 然後為鬯.」
194 集解賈逵曰:「天子卒曰虎賁.」
195 集解賈逵曰:「稽首首至地.」
196 集解孔安国曰:「同姓, 故称曰父.」馬融曰:「王順曰, 父能以義和我諸侯.」 索隠按:尚書文侯之命是平王命晉文侯仇之語, 今此文乃襄王命文公重耳之事, 代數懸隔, 勳策全乖. 太史公雖复弥縫左氏, 而系家頗亦時有疏謬. 裴氏集解亦引孔、馬之注, 而都不言時代乖角, 何習迷而同酔也? 然計平王至襄王為七代, 仇至重耳為十一代而十三侯. 又平王元年至魯僖二十八年, 當襄二十年, 為一百三十余歳矣, 学者頗合討論之. 而劉伯荘以為蓋天子命晉同此一辞, 尤非也.
197 集解孔安国曰:「文王、武王能詳慎顕用明徳.」
198 集解馬融曰:「昭, 明也. 上謂天, 下謂人.」
199 集解孔安国曰:「惟以是故集成其王命, 徳流子孫.」
200 集解孔安国曰:「當憂念我身, 則我一人長安王位.」
201 集解服虔曰:「王庭, 践土也.」 索隠服氏知王庭是践土者, 拠二十八年五月「公会晉侯, 盟于践土」, 又此上文「四月甲午, 作王宮于践土」. 王庭即王宮也.
202 索隠按:左氏傳「五月, 盟于践土;冬, 会諸侯于温, 天王狩于河陽;壬申, 公朝于王所」. 此文亦説冬朝于王, 當合於河陽温地, 不合取五月践土之文.
203 集解服虔曰:「辟天子六軍, 故謂之三行.」
204 索隠左傳屠撃将右行, 與此異.
205 集解杜預曰:「三行無佐, 疑大夫帥也.」 索隠拠左傳, 荀林父並是卿, 而云「大夫帥」者, 非也. 不置佐者, 當避天子也. 或新置三行, 官未備耳.
206 索隠使謂燭之武.
207 索隠交猶好也. 諸本及左傳皆作「主」.
208 正義左傳云秦、晉伐鄭, 燭之武説秦, 師罷. 今杞子、逢孫、楊孫三大夫戍鄭. 杞子自鄭使告於秦曰:「鄭人使我掌其北門之管, 若潜師以來, 国可得也.」
209 集解賈逵曰:「墨, 変凶.」杜預曰:「以凶服従戎, 故墨之.」
210 集解服虔曰:「非礼也.」杜預曰:「記礼所由変也.」
211 索隠按:左傳文二年, 秦孟明視伐晉, 報殽之役, 無取晉汪之事. 又其年冬, 晉先且居等伐秦, 取汪、彭衙而還. 則汪是秦邑, 止可晉伐秦取之, 豈得秦伐晉而取汪也? 或者晉先取之秦, 今伐晉而収汪, 是汪従晉來, 故云取晉汪而帰也. 彭衙在郃陽北, 汪不知所在.
212 正義括地志云:「王官故城在同州澄城県西北六十里.」左傳文公三年, 秦伐晉, 取王官, 即此. 先言度河, 史文顛倒耳.
213 集解服虔曰:「秦邑, 新所作城也.」
214 集解賈逵曰:「欒貞子, 欒枝也. 霍伯, 先且居也.」
215 集解服虔曰:「晉国數有患難.」
216 集解服虔曰:「辰嬴, 懐嬴也. 二君, 懐公、文公.」
217 集解服虔曰:「班, 次也.」
218 集解賈逵曰:「震, 威也.」
219 正義樂, 文公子也.
220 正義僻, 匹亦反. 言樂僻隠在陳, 而遠無援也.
221 集解案:左傳, 此時賈他為太師, 陽処父為太傅.
222 集解服虔曰:「此, 太子.」
223 集解王粛曰:「怨其教導不至也.」
224 集解杜預曰:「在宣子之耳.」
225 集解杜預曰:「鄭地. 滎陽巻県西北有扈亭.」
226 集解徐広曰:「年表云北徴也.」 索隠徐云年表曰徴. 然按左傳, 文十年春, 晉人伐秦, 取少梁. 夏, 秦伯伐晉, 取北徴, 北徴即年表之徴. 今云郩者, 字誤也. 徴音懲, 亦馮翊之県名.
227 索隠按:春秋魯文十二年「頃王崩, 周公閲與王孫蘇争政, 故不赴」是也.
228 索隠文十四年傳又云「晉趙盾以諸侯之師八百乗納捷菑于邾, 不克, 乃還」. 而「周公閲與王孫蘇訟于晉, 趙宣子平王室而复之」. 則以車八百乗, 自是宣子納邾捷菑, 不関王室之事, 但文相連耳, 多恐是誤也.
229 集解賈逵曰:「彫, 畫也.」
230 集解服虔曰:「蹯, 熊掌, 其肉難熟.」 正義胹音而. 蹯音樊.
231 集解賈逵曰:「鉏麑, 晉力士.」 正義鉏音鋤. 麑音迷.
232 集解杜預曰:「趙盾庭樹也.」
233 集解徐広曰:「蒲阪県有雷首山.」
234 索隠鄒誕云示眯為祁弥也, 即左傳之提弥明也. 提音市移反, 劉氏亦音祁為時移反, 則祁提二字同音也. 而此史記作「示」者, 示即周礼古本「地神曰祇」, 皆作「示」字. 「鄒」為「祁」者, 蓋由祇提音相近, 字遂変為「祁」也. 眯音米移反. 以「眯」為「弥」, 亦音相近耳. 又左氏桑下餓人是霊輒也. 其示眯明, 是嗾獒者也, 其人鬥而死. 今合二人為一人, 非也.
235 集解服虔曰:「宦, 宦学事也.」
236 索隠如字.
237 索隠縦, 足用反. 又本作「嗾」, 又作「蹴」, 同素后反.
238 集解何休曰:「犬四尺曰敖.」
239 集解服虔曰:「不望報.」
240 集解虞翻曰:「園名也.」
241 索隠以豉反.
242 集解杜預曰:「不隠盾之罪.」
243 集解服虔曰:「聞義則服.」杜預曰:「善其為法受屈也.」 正義為, 于偽反.
244 集解杜預曰:「越境則君臣之義絶, 可以不討賊也.」
245 集解服虔曰:「公族大夫也.」
246 索隠赤即斥, 謂斥候之人也. 按:宣八年左傳「晉伐秦, 獲秦諜, 殺諸絳市」. 蓋彼諜即此赤也. 晉成公六年為魯宣八年, 正同, 故知然.
247 索隠荀林父也.
248 集解賈逵曰:「伯宗, 晉大夫.」
249 集解服虔曰:「解揚, 晉大夫.」
250 索隠劉氏云「隆即竜也, 魯北有竜山」. 又此年當魯成二年, 経書「斉侯伐我北鄙」, 傳曰「囲竜」. 又鄒誕及別本作「瓀」字, 瓀當作「鄆」. 文十二年「季孫行父帥師城諸及鄆」, 注曰「瓀即鄆也, 字変耳」. 地理志云在東莞県東也.
251 索隠左傳作「叔子」.
252 集解賈逵曰:「邢, 晉邑.」
253 集解賈逵曰:「初作六軍, 僭王也.」
254 索隠音佳. 謚文子.
255 集解公羊傳曰:「梁山, 河上山.」杜預曰:「在馮翊夏陽県北也.」
256 集解徐広曰:「年表云伯宗隠其人, 用其言.」
257 集解賈逵曰:「呂相, 晉大夫.」
258 集解賈逵曰:「三郤, 郤錡、郤犨、郤至也.」
259 集解徐広曰:「鄢, 一作『焉』.」服虔曰:「鄢陵, 鄭之東南地也.」 索隠鄢音偃, 又於連反.
260 集解左傳曰:「欒書欲待楚師退而撃之, 郤至云『楚有六閒, 不可失也』.」
261 集解虞翻曰:「周京師.」
262 索隠宦者孟張也.
263 集解杜預曰:「公反以為郤至奪豕也.」
264 集解杜預曰:「人, 謂書、偃.」
265 集解賈逵曰:「匠驪氏, 晉外嬖大夫在翼者.」
266 集解徐広曰:「一作『糾』.」
267 集解左傳曰:「葬之于翼東門之外也.」
268 集解杜預曰:「言不以君礼葬也. 諸侯葬車七乗.」
269 索隠幾音冀, 謂望也.
270 索隠於雞沢也.
271 集解賈逵曰:「行, 陳也.」
272 集解賈逵曰:「僕, 御也.」
273 集解服虔曰:「九合:一謂会于戚, 二会城棣救陳, 三会于鄢, 四会于邢丘, 五同盟于戯, 六会于柤, 七戍鄭虎牢, 八同盟于亳城北, 九会于蕭魚.」
274 索隠音歴. 釈例云在河北, 地闕.
275 集解徐広曰:「靡, 一作『歴』.」 索隠劉氏靡音眉綺反, 即靡笄也.
276 集解左傳「逞」作「盈」.
277 索隠韓、趙、魏、范, 中行及智氏為六卿. 後韓、趙、魏為三卿, 而分晉政, 故曰三晉.
278 索隠寅, 荀偃之孫也.
279 索隠音亦. 范献子, 士鞅之子.
280 集解徐広曰:「呉世家説黄池之盟云『趙鞅怒, 将戦, 呉乃長晉定公』. 左氏傳云『乃先晉人』, 外傳云『呉公先歃, 晉公次之』.」
281 集解徐広曰:「年表云出公立十八年. 或云二十年.」
282 索隠時趙、魏、韓共滅范氏及中行氏, 而分其地, 猶有智氏與三晉, 故曰「四卿」也.
283 索隠按:趙系家云驕是為懿公. 又年表云出公十八年, 次哀公忌二年, 次懿公驕十七年. 紀年又云出公二十三年奔楚, 乃立昭公之孫, 是為敬公. 系本亦云昭公生桓子雍, 雍生忌, 忌生懿公驕. 然晉、趙系家及年表各各不同, 何況紀年之説也!
284 集解徐広曰:「世本作『相子雍』, 注云戴子.」
285 索隠如紀年之説, 此乃出公二十二年事.
286 索隠畏, 懼也. 為衰弱故, 反朝韓、趙、魏也. 宋忠引此注系本, 而「畏」字為「衰」.
287 索隠按紀年, 魏文侯初立在敬公十八年.
288 索隠紀年云夫人秦嬴賊公於高寝之上.
289 索隠系本云幽公生烈公止. 又年表云魏誅幽公, 立其弟止.
290 索隠系本云孝公傾. 紀年以孝公為桓公, 故韓子有「晉桓侯.」
291 索隠紀年云桓公二十年趙成侯、韓共侯遷桓公於屯留. 已後更無晉事.
292 索隠系本云静公倶.
293 索隠按:紀年魏武侯以桓公十九年卒, 韓哀侯、趙敬侯並以桓公十五年卒. 又趙系家烈侯十六年與韓分晉, 封晉君端氏, 其後十年, 粛侯遷晉君於屯留. 不同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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