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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史記世家

史記 卷四二. 鄭世家[厲公]

by 柳川 2019. 6. 23.

                                             卷四二. 鄭世家[公]

 

 

厲公四年, 祭仲専国政. 厲公患之, 陰使其婿雍糾欲殺祭仲.1) 糾妻, 祭仲女也, 知之, 謂其母曰:「父與夫孰親?」母曰:「父一而已, 人尽夫也.」2)女乃告祭仲, 祭仲反殺雍糾, 戮之於市. 厲公無柰祭仲何, 怒糾曰:「謀及婦人, 死固宜哉!」夏, 厲公出居邊邑櫟.3) 祭仲迎昭公忽, 六月乙亥, 复入鄭, 即位.

 

 

여공 4년, 제중이 국가의 대권을 잡자, 여공은 이 일을 걱정해 몰래 제중의 사위 옹규(雍糾)로 하여금 제중을 살해하게 했다. 옹규의 처는 제중의 딸로, 이 일을 알고서 그녀의 어머니에게 “아버지와 남편 중에 누구와 더 가깝습니까?”라고 물으니, 어머니가 “아버지는 단지 한 명밖에 없지만, 남자라면 누구나 남편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리하여 그녀는 이 일을 제중에게 알리자, 제중은 옹규를 살해하고 그의 시체를 거리에 전시해 군중들로 하여금 구경하게 했다. 여공은 제중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옹규에게 실망하고 분노하여 “부인과 공모하다니, 죽어 마땅하다.”라 했다. 여름에 여왕은 쫓겨나 변경의 역읍(櫟邑)에 거주했다. 제중은 소공 희홀을 맞이해, 6월 을해일(乙亥日)에 소공이 다시 정나라의 수도로 돌아와 왕위에 오르게 했다.

 

 

秋, 鄭厲公突因櫟人殺其大夫単伯,4) 遂居之. 諸侯聞厲公出奔, 伐鄭, 弗克而去. 宋頗予厲公兵, 自守於櫟, 鄭以故亦不伐櫟.

 

 

가을에, 정 여공 희돌은 역읍 사람들로 하여금 역읍을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 정나라에서 파견된 대부(大夫) 선백(單伯)을 살해하게 하고 결국 그곳에 정착했다. 제후들이 여공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함께 정나라를 토벌했으나 정복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송나라는 여공에게 매우 많은 원병을 주어 스스로 역읍을 지키게 했다. 정나라 왕은 이러한 이유로 역읍을 토벌하지 않았다.

 

 

昭公二年, 自昭公為太子時, 父荘公欲以高渠弥為卿, 太子忽悪之, 荘公弗聴, 卒用渠弥為卿. 及昭公即位, 懼其殺己, 冬十月辛卯, 渠弥與昭公出猟, 射殺昭公於野. 祭仲與渠弥不敢入厲公, 乃更立昭公弟子亹為君, 是為子亹也, 無謚号.

 

 

소공 2년의 일이었다. 소공이 태자였을 때, 그의 부친 장공은 고거미를 대신에 임명하려고 하자, 태자 홀이 그를 미워해 반대했다. 그러나 장공은 듣지 않고 마침내 고거미를 대신에 임명했다.

 

 

소공이 즉위한 뒤에, 고거미는 살해될까 두려워 이해 겨울 10월 신묘일(辛卯日), 소공과 사냥을 나갔다가 야외에서 소공을 쏘아 죽였다. 제중과 고거미는 여공을 입조시킬 수 없어서 소공의 동생 자미(子亹)를 왕위에 오르게 했다. 자미라고 칭하는 것은 시호(諡號)가 없기 때문이다.

 

 

子亹元年七月, 斉襄公会諸侯於首止,5) 鄭子亹往会, 高渠弥相, 従, 祭仲称疾不行. 所以然者, 子亹自斉襄公為公子之時, 嘗会鬥, 相仇, 及会諸侯, 祭仲請子亹無行. 子亹曰:「斉彊, 而厲公居櫟, 即不往, 是率諸侯伐我, 内厲公. 我不如往, 往何遽必辱, 且又何至是!」卒行. 於是祭仲恐斉并殺之, 故称疾. 子亹至, 不謝斉侯, 斉侯怒, 遂伏甲而殺子亹. 高渠弥亡帰,6) 帰與祭仲謀, 召子亹弟公子嬰於陳而立之, 是為鄭子.7) 是歳, 斉襄公使彭生酔拉殺魯桓公.

 

 

자미 원년 7월, 제 양공(齊襄公)이 수지(首止)에서 제후들과 회합했다. 정 자미도 참가하게 되었는데, 고거미가 보좌해 동행했고, 제중은 병 때문에 가지 않았다.

 

 

자미는 제 양공이 왕자였을 때 서로 싸운 적이 있어서, 그들은 원수관계였다. 제후들과 회합하려고 할 때 제중은 자미에게 가지 말 것을 건의했다. 자미는 “제나라는 강대한 나라요. 여공이 역읍에 있는데, 만약 가지 않으면 제후들을 이끌고 우리를 정벌해 여공에게 되돌려줄 것이오. 그러므로 내가 안 가느니만 못하오. 간다고 해서 어떻게 꼭 욕을 당한다고만 할 수 있겠소? 또 어찌 그대가 하라고 하는 대로만 할 수가 있겠소?”라고 말하고서, 자미는 끝내 참석하러 갔다.

 

 

당시 제중은 제 양공에게 자신도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해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자미가 수지에 도착해 제 양공에게 사과하지 않자, 제 양공은 화가 나서 복병(伏兵)으로 하여금 자미를 살해하게 했다. 고거미는 도망쳐 돌아와서, 제중과 모의한 끝에, 진(陳)나라에 가서 자미의 동생 영(嬰)을 데리고 와서 왕위에 오르게 하니, 그가 곧 정자(鄭子)이다. 이해에 제 양공은 팽생(彭生)을 시켜 노 환공(魯桓公)이 술에 취했을 때를 틈타 늑골을 부러트려 죽게 했다.

 

 

鄭子八年, 斉人管至父等作亂, 弑其君襄公. 十二年, 宋人長萬弑其君湣公. 鄭祭仲死.

 

 

정자 8년, 제나라 사람 관지보(管至父) 등이 난을 일으켜 그들의 국왕 양공을 살해했다. 12년, 송나라 사람 장만(長萬)이 그의 국왕 민공(湣公)을 살해했다. 정나라 대신 제중이 죽었다.

 

 

十四年, 故鄭亡厲公突在櫟者使人誘劫鄭大夫甫仮,8) 要以求入. 仮曰:「舎我, 我為君殺鄭子而入君.」厲公與盟, 乃舎之. 六月甲子, 仮殺鄭子及其二子而迎厲公突, 突自櫟复入即位. 初, 内蛇與外蛇鬥於鄭南門中, 内蛇死. 居六年, 厲公果复入. 入而譲其伯父原9)曰:「我亡国外居, 伯父無意入我, 亦甚矣.」原曰:「事君無二心, 人臣之職也. 原知罪矣.」遂自殺. 厲公於是謂甫仮曰:「子之事君有二心矣.」遂誅之. 仮曰:「重徳不報, 誠然哉!」

 

 

14년, 옛날 정나라에서 도망해 역읍에 있는 여공 희돌이 사람을 보내 정나라 대부 보가(甫假)를 유인해 협박했다. 곧 여공이 조정에 되돌아가 즉위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강요했다. 그러자, 보가가 “나를 풀어주면, 당신을 위해서 정자(鄭子)를 죽이고 당신을 모셔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여공이 그와 함께 신 앞에서 맹서하고, 그를 석방했다. 그로부터 6월 갑자일(甲子日), 보가가 정자와 그의 두 아들을 죽이고 여공 희돌을 영접하자 여공은 조정으로 되돌아와 왕이 되었다.

처음에 정나라 수도의 남문(南門)에서 내사(內蛇)와 외사(外蛇)가 싸웠는데, 결국 내사가 죽었다. 6년 만에, 여공은 과연 조정으로 되돌아와 다시 왕이 되었던 것이다. 여공이 조정에 되돌아온 후에 그의 백부(伯父) 희원(姬原)을 꾸짖어 “내가 도망해 국외에 살았는데, 백부는 나를 입조케 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너무하오.”라고 말하자, 희원이 “군주를 섬김에 두 가지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 신하로서 가져야 할 직무입니다. 저는 저의 죄과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곧 자살했다.

 

 

그러자 여왕은 보가에게 “너는 군주를 섬기면서 두 가지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고, 곧 그를 죽였다. 죽음에 이르러 보가가 “은혜는 갚지 않고 정말 이래도 되는 거요!”라고 말했다.

 

 

厲公突後元年, 斉桓公始霸.

 

 

여공 후(後) 원년, 제 환공이 패(覇)라고 칭했다.

 

 

五年, 燕、衛與周恵王弟穨伐王,10) 王出奔温, 立弟穨為王. 六年, 恵王告急鄭, 厲公発兵撃周王子穨, 弗勝, 於是與周恵王帰, 王居于櫟. 七年春, 鄭厲公與虢叔襲殺王子穨而入恵王于周.

 

 

5년, 연(燕)나라와 위(衛)나라가 주 혜왕(周惠王)의 동생 희퇴(姬頹)와 함께 주 혜왕을 공격해, 혜왕을 온읍(溫邑)으로 내쫓고 혜왕의 동생 희퇴를 주나라 왕으로 옹립했다.

 

 

6년, 혜왕이 정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정 여공은 군대를 이끌고 주나라 왕자 퇴를 공격했으나 정복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왕은 주 혜왕과 함께 정나라로 되돌아와 혜왕을 역읍에 살게 했다.

 

 

7년 봄, 정 여공은 괵숙(虢叔)과 함께 왕자 퇴를 공격해 죽이고, 혜왕을 주나라 수도로 되돌려 보냈다.

 

 

秋, 厲公卒, 子文公踕11)立. 厲公初立四歳, 亡居櫟, 居櫟十七歳, 复入, 立七歳, 與亡凡二十八年.

 

 

가을에 여공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문공(文公) 희첩(姬踕)이 왕위를 계승했다. 여공은 즉위한 지 4년이 지나 역읍으로 도망갔다가, 역읍에서 17년간 살았으며, 다시 되돌아와 7년간 재위했다. 밖으로 도망했던 시기까지 합하면 재위 기간은 모두 28년이다.

 

 

각주

1 集解賈逵曰:「雍糾, 鄭大夫.」

2 集解杜預曰:「婦人在室則天父, 出則天夫. 女以為疑, 故母以所生為本解之.」

3 集解宋忠曰:「今潁川陽翟県.」 索隠按:櫟音歴, 即鄭初得十邑之歴也.

4 集解杜預曰:「鄭守櫟大夫也.」 索隠依左傳作「檀伯」. 檀伯, 鄭守櫟大夫, 事在桓十五年. 此文誤為「単伯」者, 蓋亦有所因也. 按魯荘公十四年, 厲公自櫟侵鄭, 事與周単伯会斉師伐宋相連, 故誤耳.

5 集解服虔曰:「首止, 近鄭之地.」杜預曰:「首止, 衛地. 陳留襄邑県東南有首郷.」

6 索隠左氏云轘高渠弥.

7 索隠左傳以鄭子名子儀, 此云嬰, 蓋別有所見.

8 索隠左傳作「傅瑕」. 此本多仮借, 亦依字読.

9 索隠左傳謂之原繁.

10 索隠恵王, 荘王孫, 僖王子. 子穨, 荘王之妾王姚所生. 事在荘十九年.

11 索隠音在接反. 系本云文公徙鄭. 宋忠云即新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