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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列國志

第三九回. 柳下惠授詞卻敵, 晉文公伐衛破曹.

by 柳川 2021. 3. 22.

第三九回. 柳下惠授詞卻敵, 晉文公伐衛破曹.

 

 

話說晉文公定了溫、原、陽樊、攢茅四邑封境,直通太行山之南,謂之南陽。此周襄王十七年之冬也。時齊孝公亦有嗣伯之意。自無虧之死,惡了魯僖公。鹿上不署,彆了宋襄公。孟會不赴,背了楚成王。諸侯離心,朝聘不至。孝公心懷憤怒,欲用兵中原,以振先業。乃集群臣問曰:「先君桓公在日,無歲不征,無日不戰。今寡人安坐朝堂,如居蝸殼之中,不知外事,寡人愧之!昔年魯侯謀救無虧,與寡人爲難,此仇未報。今魯北與衛結,南與楚通,倘結連伐齊,何以當之?聞魯歲飢,寡人意欲乘此加兵,以杜其謀。諸卿以爲何如?」 上卿高虎奏曰:「魯方多助,伐之未必有功。」 孝公曰:「雖無功,且試一行,以觀諸侯離合之狀。」 乃親率車徒二百乘,欲侵魯之北鄙。邊人聞信,先來告急。魯正値飢饉之際,民不勝兵,大夫臧孫辰言於僖公曰:「齊挾忿深入,未可與爭勝負也,請以辭令謝之!」 僖公曰:「當今善爲辭令者何人?」

 

彆 : 활 뒤틀릴 별. 활이 뒤틀리다. 고집이 세다. 고분고분하지 않다.     

 

 

 

한편 진문공은 온, 원, 양번, 찬모등 4읍의 경계를 정하고 바로 태항산(太行山)의 남쪽으로 가서 남양(南陽)이라 하였다. 

이때가 주 양왕 17년 겨울이었다. 그때 제(齊)나라 효공도 선친인 제환공(齊桓公)의 패업을 이으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무휴가 죽은 때부터 송나라 희공을 싫어했다.  또 녹상에서 서명하지 않은 일로 송양공과도 사이가 뒤틀려버렸다.  우(盂)에서의 회맹에도 가지 않아 초성왕에게도 등을 돌려버렸다. 제후들의 마음이 떠나 조빙사절도 오지 않았다. 

효공은 분노를 품고 중원을 침략하여 선친의 패업을 재현하려고 신하들을 모아 물었다.

"선군이신 환공께서 살아계실 때에는 정벌을 나가지 많은 해가 없었고 싸우지 않은 날이 없었소. 지금 과인이 조당에 편히 앉아 있어 달팽이의 빈껍질 속에 있는 것 처럼 바깥의 일을 모르고 있으니 과인이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오.  옛날 노나라 제후가 무휴를 구원하려고 하여 과인을 어렵게 했는데 그 원한을 아직도 갚지 못하고 있소.  지금 노나라는 북으로 위(衛)나라와 결맹하고 남으로는 초나라와 통하고 있으니 그 나라들과 결연하여 쳐들어 온다면 우리나라에서 어찌 당해내겠소? 듣자니 노나라에서는 해마다 기근이 들었다 하여 과인이 이 틈을 타서 노나라를 쳐 그 음모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합니다. 경들은 어찌 생각하시오?"

상경 고호가 아뢰었다.

"노나라는 바야흐로 제후국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 노나라를 친다 해도 반드시 공을 이룬다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효공이 말했다.

"공을 세우지 못한다 해도 한 번 행동에 옮겨 제후들의 이합집산하는 모습을 보고자 하는 것이오."

마침내 효공이 친히 200승의 병거군을 인솔하고 노나라의 북쪽 변방을 치려고 했다.  변방 사람이 그 소식을 듣고 먼저 노나라 조정에 급히 보고를 올렸다.

노나라는 바로 기근이 한창인 때라 전쟁을 해도 이길 수 없는 상황이라 대부 장손신(臧孫辰)이 희공에게 말했다.

"제나라는 지난 날 무휴를 도운 일에 깊이 원한을 품고 있기 때문에 승부를 다투어서는 안됩니다.  지난 날의 일을 사과하여 물러가게 해야 합니다."

그러자 희공이 물었다.

"지금 사과를 잘 할 수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臧孫辰對曰:「臣擧一人,乃先朝司空無駭之子,展氏獲名,字子禽,官拜士師,食邑柳下。此人外和內介,博文達理,因居官執法,不合於時,棄職歸隱。若得此人爲使,定可不辱君命,取重於齊矣。」 僖公曰:「寡人亦素知其人,今安在?」曰:「見在柳下。」 使人召之,展獲辭以病不能行。臧孫辰曰:「禽有從弟名喜,雖在下僚,頗有口辯。若令喜就獲之家,請其指授,必有可聽。」 僖公從之。展喜至柳下,見了展獲,道達君命。展獲曰:「齊之伐我,欲紹桓公之伯業也。夫圖伯莫如尊王,若以先王之命責之,何患無辭?」 展喜復於僖公曰:「臣知所以卻齊矣。」 僖公已具下犒師之物,無非是牲醴粟帛之類,裝做數車,交與展喜。喜至北鄙,齊師尙未入境,乃迎將上去。至汶南地方,剛遇齊兵前隊,乃崔夭爲先鋒。展喜先將禮物呈送崔夭。崔夭引至大軍,謁見齊侯,呈上犒軍禮物,曰:「寡君聞君親擧玉趾,將辱臨於敝邑,使下臣喜奉犒執事。」

 

士師 : 고대(古代) 중국(中國)에서 법령(法令)과 형벌(刑罰)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재판관.     玉趾 : 임금의 발이나 발걸음의 존칭(尊稱).

 

 

 

장손신이 대답했다.

"신이 한 사람 천거한다면 바로 선공때 사공벼슬을 한 무해(無駭)의 아들로  성은 전씨(展氏)이며 이름은 획(獲), 자는 자금(子禽)이며 관직은 사사(士師)였고 식읍은 유하(柳下)입니다.  이 사람은 외유내강의 성격으로 학문에 박식하고 이치에 통달한 자인데 관직에 있을때 법을 집행하면서 시세에 영합하지 않았던 자로 지금은 관직을 버리고 은둔해 있습니다.  이 사람을 사자로 보낼 수 있다면 반드시 군명을 욕되게 하지 않고 제나라를 물러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희공이 물었다.

"과인도 본래 그를 알고 있소. 그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유하(柳下)에있습니다."

사람을 시켜 그를 불러 오게 했는데 전획은 병으로 움직일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장손신이 말했다.

"그의 종제(從弟)로 희(喜)라고 하는 자가 있는데 현재 하급 관료로 일하고 있지만 말재주가 아주 좋습니다. 희로 하여금 전획의 집에 가서 그의 가르침을 받아오게 한다면 반드시 들어줄 것입니다."

희공이 그 말에 따랐다. 전희가 유하에 도착하여 전획을 만나자 군주의 말을 자세히 전달했다. 

전획이 말했다.

"제나라에서 우리나라를 친것은 환공의 패업을 이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패업을 도모하려고 한다면 왕을 받드는 것이 낫다.  선왕의 명을 들어 제나라 효공을 책한다면 사과를 하지 않아도 무슨 걱정이겠는가?"

전희가 돌아와 희공에게 복명했다.

"신이 제나라 군을 물리칠 방법을 알고 있읍니다."

희공은 이미 제나라 군사들을 호궤할 물건들을 갖추어 놓았는데 희생물로 바쳐질 짐승, 술과 곡식, 비단류 등 없는 것 없이 몇 대의 수레에 실어놓고 전희에게 주었다.  전희가 북쪽 변방에 도착했으나 제나라 군사들이 아직 국경을 넘어 오지 않아 마중을 하고자 나아갔다.  문남(汶南)지방에 이르러 곧바로 제나라 군의 선발대를 만났는데 바로 최요(崔夭)의 선봉대였다.  전희는 우선 예물을 최요에게 보냈는데 최요는 그를 대군 본영으로 인도했다.

제후(齊侯)를 알현하여 군사들에게 호궤할 예물을 바치고 말했다.

"저희 군주께서는 군주께서 친히 발걸음을 하시어 저희 나라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신에게 명을 내리시어 군사들을 호궤하는 일을 담당하도록 하셨습니다."

 

  

 

 

孝公曰:「魯人聞寡人興師,亦膽寒乎?」 喜答曰:「小人則或者膽寒,下臣不知也。若君子則全無懼意。」 孝公曰:「汝國文無施伯之智,武無曹劌之勇,況正逢飢饉,野無靑草,何所恃而不懼?」 喜答曰:「敝邑別無所恃,所恃者先王之命耳。昔周先王封太公於齊,封我先君伯禽於魯,使周公與太公割牲爲盟,誓曰:『世世子孫,同獎王室,無相害也。』 此語載在盟府,太史掌之。桓公是以九合諸侯,而先與莊公爲柯之盟,奉王命也。君嗣位九年,敝邑君臣,引領望齊曰:『庶幾修先伯主之業,以親睦諸侯。』  若棄成王之命,違太公之誓,墮桓公之業,以好爲仇,度君侯之必不然也。敝邑恃此不懼。」孝公曰:「子歸語魯侯,寡人願修睦,不復用兵矣。」 即日傳令班師。

潛淵有詩,譏臧孫辰知柳下惠之賢,不能薦引同朝。詩云:

北望烽煙魯勢危,

片言退敵奏功奇。

臧孫不肯開賢路,

柳下仍淹展士師。

 

膽寒 : 담이 서늘해지도록 몹시 두렵다.                    劌 : 상처입힐 귀. 상처를 입히다. 쪼개다. 만나다. 찔러 상처 나게 함. 

施伯 : 노나라 장공때 장공이 관중을 함거에 실어 제나라에 보내려고 하자 시백이 관중이 귀국하게 되면 장차 노나라에 화근이 될거라

        면서 말렸었다.  ☞  열국지 16회 참조.

曹劌 : 魯나라 莊公때의 장수인 曹沫.  당시 노나라는 제(齊)나라와 세번 싸워 모두 패하자  수읍(遂邑)의 땅을 주고 화해했다.  노장공은 제환

          공과 가(柯)라는 곳에서 회맹하였는데 조말이 비수를 들고 단상에 올라가 제환공에게 비수를 들이대며 협박하므로써 제나라에 바쳤던

          땅을 돌려 받았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柳下惠 : 유하혜에 대하여는 劉向의 列女傳(賢明傳/柳下惠妻)에 잘 설명되어 있으며,  論語(微子 第2章, 8章, 衛靈公第13章),  孟子(盡心上

          第28章, 盡心下第15章, 萬章下第5章)에 수차례 언급되었다. 

 

 

 

효공이 말했다.

"노나라 사람이 과인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간담이 서늘했는가?"

전희가 대답했다.

"소인배라면 혹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나 신은 노나라에 그런 자가 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군자라면 전혀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효공이 물었다.

"그대의 나라에는 이제 문관으로 시백같이 지모있는 자가 없고 무장으로 조귀같이 용맹스러운 자도 없다. 하물며 기근이 들어 들에는 푸른 초목조차 없는데 무엇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는가?"

전희가 대답했다.

"저희 나라에서는 달리 믿을 것이 없습니다만 믿는 것이 있다면 선왕의 명이 있을 뿐입니다. 옛날 주나라 선왕(武王)께서 태공을 제나라에 봉하실 때 우리 선군이신 백금(伯禽 : 周公의 아들)을 노나라에 봉하시면서 주공과 태공으로 하여금 희생물을 바치며 다음과 같이 맹세하도록 하셨습니다. '자손 대대로 함께 왕실을 돕고 서로 해치지 않으리라.' 이 말은 문서로 작성되어 맹부(盟府)에 보관되었는데 태사가 관장하고 있습니다. 환공께서 제후들과 아홉 번이나 회합을 가지시면서도 먼저 우리 노나라의 선군이신 장공과 가(柯)라는 곳에서 회맹하시고 왕명을 받들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군주께서 등극하신지 9년이 지났는데 저희 노나라 군신들은 목을 늘이고 제나라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선공이신 환공이 이룩하신 패업을 닦았으니 이제는 제후국들과 친목하기를 바란다.'  만약에 성왕의 명을 저버리고 태공의 맹세를 거스른다면 환공의 패업을 실추시키고 좋은 교분을 원수로 돌리는 격이라 헤아리건데 군주께서는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저희나라에서는 이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효공이 말했다.

"그대가 돌아가거든 노나라 군주께 전하시오.  과인은 수호조약을 체결하기를 원하며 다시는 전쟁을 위하여 병력을 사용하지 않겠노라."

당일로 영을 내려 군대를 철수해 돌아갔다.

 

잠연이 시를 지어 장손신이 유하혜(展獲)의 현명함을 알고도 조정에 천거하여 함께 일할 수 없었음을 기롱했다. 

 

북쪽에 봉화가 오르는 것을 보니 노나라 형세가 위급한데,

한 마디 말로 적을 물리쳤으니 그 공은 뛰어난 것이었도다.

장손신은 그런 현인을 위해 길을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유하의  전획(展獲)은 사사(士師)로 머무르게 되었다. 

 

 

 

 

展喜還魯,復命於僖公。臧孫辰曰:「齊師雖退,然其意實輕魯。臣請偕仲遂如楚,乞師伐齊,使齊侯不敢正眼覷魯,此數年之福也。」 僖公以爲然。乃使公子遂爲正使,臧孫辰爲副使,行聘於楚。

臧孫辰素與楚將成得臣相識,使得臣先容於楚王,謂楚王曰:「齊背鹿上之約,宋爲泓水之戰,二國者,皆楚仇也。王若問罪於二國,寡君願悉索敝賦,爲王前驅。」 楚成王大喜。即拜成得臣爲大將,申公叔侯副之,率兵伐齊。取陽穀之地,以封齊桓公之子雍,使雍巫相之。留甲士千人,從申公叔侯屯戍,以爲魯之聲援。成得臣奏凱還朝。令尹子文時已年老,請讓政於得臣。楚王曰:「寡人怨宋,甚於怨齊。子玉已爲我報齊矣,卿爲我伐宋,以報鄭之仇。俟凱旋之日,聽卿自便何如?」 子文曰:「臣才萬不及子玉,願以自代,必不誤君王之事。」 楚王曰:「宋方事晉,楚若伐宋,晉必救之。兩當晉宋,非卿不可,卿强爲寡人一行。」 乃命子文治兵於暌,簡閱車馬,申明軍法。子文滿意欲顯子玉之能,是日草草完事,終朝畢事,不戮一人。楚王曰:「卿閱武而不戮一人,何以立威?」

 

 

 

전희가 노나라로 돌아가 희공에게 복명하자  장손신이 말했다.

"제나라 군대가 물러갔지만 그 의도는 사실 노나라를 가볍게 보고 있을 것입니다. 신은 중수(仲遂)와 함께 초나라에 가서 지원군을 요청하여 제나라를 치고자 합니다. 제나라로 하여금 노나라를 감히 엿보지 못하게 한다면 앞으로 몇 년동안은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희공이 옳게 여기고 공자 중수(仲遂)를 정사로 하고 장손신을 부사로 하여 초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장손신은 평소 초나라 장수인 성득신(成得臣)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성득신으로 하여금 먼저 초왕에게 접견을 허락받게 하였다.

장손신이 초왕에게 말했다.

"제나라는 녹상의 맹약을 저버렸고 송나라는 홍수(泓水)에서의 전쟁으로 두 나라는 모두 초나라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왕께서 두 나라에 죄를 묻고자 하신다면 저희 군주께서는  온 나라를 기울여 앞장을 서고자 하십니다."

초나라 성왕이 매우 기뻐하며 즉시 성득신을 대장으로, 신공(申公) 숙후(叔侯)를 부장으로 제수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제나라를 치게 했다. 

양곡(陽穀)이란 곳을 점령했는데 그곳은 제환공이 아들 옹(雍)에게 봉지로 주고 옹무(雍巫)가 그를 돕도록 청했다. 그리고 갑사 천 명을 남겨 신공 숙후가 주둔하며 지키게 하고  노나라를 성원하게 하였다. 

성득신이 개선가를 울리며 조정에 돌아가자 영윤 자문(子文)은 자신이 너무 늙었음을 이유로 성득신에게 정사를 넘기기를 청했다.

초왕이 말했다.

"과인은 송나라에 원한이 있고 제나라에는 원한이 더욱 큽니다. 자옥이 이미 나를 위해 제나라에 보복했으니 경은 송나라를 쳐서 정나라의 원수를갚아주기 바랍니다. 개선하는 날을 기다려 경의 뜻을 들어주고자 하는데 어떻습니까?"

자문이 대답했다.

"신의 재주는 자옥에게 전혀 미치지 못합니다. 자옥이 그 일을 대신 하게 하시어 반드시 왕의 일을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초왕이 말했다.

"송나라가 지금 당진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초나라가 송나라를 치게 되면 당진에서 반드시 구원할 것입니다.  당진과 송나라의 양 쪽을 당해내려면 경이 아니면 불가합니다.  경은 사양하지 말고 과인을 위해 함께 출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명을 내려 자문이 규(暌)에서 군대를 훈련시키게 하고 거마를 사열하여 군법을 밝히게 하였다. 

자문은 의도적으로 자옥의 능력을 드러내게 하고자 매일 대충대충 일을 마치고 오전 중에 모든 일을 끝내며 한 사람도 벌하지 않았다. 

초왕이 물었다.

"경은 부대를 사열하면서 한사람도 벌하지 않았는데 무엇으로 위엄을 세우려 하십니까?"

 

 

 

 

子文奏曰:「臣之才力,比於强駑之末矣。必欲立威,非子玉不可。」 楚王更使得臣治兵於蔿。得臣簡閱精細,用法嚴肅,有犯不赦,竟一日之長,方纔事畢。總計鞭七人之背,貫三人之耳,眞個鐘鼓添聲,旌旗改色。楚王喜曰:「子玉果將才也!」 子文復請致政,楚王許之。乃以得臣爲令尹,掌中軍元帥事。群臣皆造子文之宅,賀其擧薦得人,致酒相款。時文武畢集,惟大夫蔿呂臣有微恙不至。酒至半酣,閽人報:「門外有一小兒求見。」 子文命召人。那小兒擧手鞠躬,竟造末席而坐,飮酒啖炙,傍若無人。有人認識此兒,乃蔿呂臣之子,名日蔿賈,年方一十三歲。子文異之,問曰:「某爲國得一大將,國老無不賀,爾小子獨不賀,何也?」 蔿賈曰:「諸公以爲可賀,愚以爲可弔耳!」 子文怒曰:「汝謂可弔,有何說?」賈曰:「愚觀子玉爲人,勇於任事,而昧於決機。能進而不能退,可使佐鬥,不可專任也。若以軍政委之,必至僨事。諺云『太剛則折』,子玉之謂矣!擧一人而敗國,又何賀焉?如其不敗,賀未晩也。」 左右曰:「此小兒狂言,不須聽之。」 蔿賈大笑而出,眾公卿俱散。

 

僨 : 넘어질 분. 넘어지다. 실패하다. 움직이다. 떨치다.세찬 기세. 

 

 

 

자문이 아뢰었다.

"신의 재주와 기력은 강노에 비유한다면 오래되어 쓰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드시 위엄을 세우고자 하신다면 자옥이 아니면 불가합니다."

초왕은 다시 성득신으로 하여금 위(蔿)라는 곳에서 군사를 훈련시키게 하였다.  성득신의 훈련은 정교하고 치밀하여 법을 엄숙하게 적용시켜 군법을 어기는 자는 용서하지 않으니 마침내 날이 갈수록 성장하여 마침내 훈련을 마쳤다. 모두 집계를 해보니 7명이 등에 채찍을 맞았고, 세 사람이 귀를 뚫는 형을 받았다.  그대로 종과 북을 울리게 하니 정기의 색깔이 바뀐 것 같았다. 

초왕이 기뻐하며 말했다.

"자옥이 과연 장수의 재목이로다."

자문이 다시 은퇴하겠다고 청하자 초왕이 허락했다.  이리하여 성득신이 영윤이 되어 중군의 군사를 총괄하게 되었다.  신하들이 모두 자문의 집으로 가서 그가 천거한 사람이 영윤이 된 일을 경하했는데 자문은 주연을 베풀어 정성껏 대접했다. 

당시 문무신하들이 모두 모였는데 오직 대부 위여신(蔿呂臣)만이 건강이 좋지 못해 불참했다.

술이 거나해졌는데 문지기가 와서 보했다.

"문 밖에서 한 소년이 뵙기를 청합니다."

자문이 명을 내려 불러들였다. 그 소년은 손을 들어 국궁하고는 말석으로 가서 앉아 술을 마시며 구은 고기를 먹는데 그 태도가 방약무인이었다. 어떤 자가 그 아이를 알아보았는데 그 아이는 바로 위여신의 아들로 이름은 위가(蔿賈)이며 나이가 13세였다. 

자문이 괴이히 여겨 물었다. 

"나는 나라를 위해 한 사람의 대장을 얻어 나라의 원로들로서 경하하지 않는 자가 없다. 너는 어린아이가 되어 홀로 경하하지 않는데 왜 그러느냐?"

위가가 대답했다.

"제공들은 경하했지만 저는 조문(弔問)을 하려고 합니다."

자문이 노하여 말했다.

"네가 조문을 하겠다니 무슨 말이냐?"

위가가 말했다.

"제가 자옥의 사람됨을 보건대, 일을 맡는데는 용감하지만 기회를 잡는데에는 어둡습니다.  나아가는 것은 능하지만 물러나는 일에는 능하지 못하며 싸움을 돕게 할 수는 있지만 싸움을 모두 맡길 수는 없습니다.  만약 군정을 모두 그에게 맡긴다면 반드시 낭패를 보게 될 것입니다.  속담에 '지나치게 강하면 부러진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자옥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한 사람을 천거하여 나라가 망하게 되었는데 또 무슨 경하입니까?  그가 패배하지 않았다면 그때 경하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좌우에서 말했다.

"이 말은 어린 아이의 철없는 소리이니 괘념치 마십시오."

위가가 큰 소리로 웃으며 나가자 공경들도 모두 흩어져 갔다. 

 

 

  

明日,楚王拜得臣爲大將,親統大兵,糾合陳、蔡、鄭、許四路諸侯,一同伐宋,圍其緡邑。宋成公使司馬公孫固如晉告

急。晉文公集群臣問計。先軫進曰:「方今惟楚强橫,而於君有私恩。今楚戍穀伐宋,生事中原,此天授我以救災恤患之

名也。取威定伯,在此擧矣!」 文公曰:「寡人欲解齊宋之患,如何而可?」 狐偃進曰:「楚始得曹而新婚於衛,是二國又皆主公之仇也。若興師以伐曹衛,楚必移兵來救,則齊宋寬矣。」 文公曰:「善。」 乃以其謀告公孫固,使回報宋公,令

其堅守。公孫固領命去了。文公以兵少爲慮。趙衰進曰:「古者大國三軍,次國二軍,小國一軍。我曲沃武公,始以一軍

受命。獻公始作二軍,以滅霍、魏、虞、虢諸國,拓地千里。晉在今日,不得爲次國,宜作三軍。」  文公曰:「三軍旣作,遂可用否?」 趙衰曰:「未也。民未知禮,雖聚而易散。君盍大蒐以示之禮,使民知尊卑長幼之序,動親上死長之心,然後可用。」

 

다음날 초왕은 성득신을 대장으로 삼고 친히 대병을 통솔하고 진(陳), 채(蔡), 정(鄭), 허(許)의 4로제후를 규합하여 함께 송나라의 정벌에 나서 민읍(緡邑)을 포위했다.

 

 

文公曰:「作三軍,必須立元帥,誰堪其任?」趙衰對曰:「夫為將者,有勇不如有智,有智不如有學。君如求智勇之將,不患無人。若求有學者,臣所見惟郤縠一人耳。縠年五十餘矣,好學不倦,說《禮》《樂》而敦《詩》《書》。夫《禮》、《樂》、《詩》、《書》,先王之法,德義之府也。民生以德義為本,兵事以民為本。惟有德義者,方能恤民。能恤民者,方能用兵。」文公曰:「善。」乃召郤縠為元帥,縠辭不受。文公曰:「寡人知卿,卿不可辭!」強之再三,乃就職。擇日,大蒐於被廬,作中上下三軍。郤縠將中軍,郤溱佐之,祁瞞掌大將旗鼓。使狐偃將上軍,偃辭曰:「臣兄在前,弟不可以先兄。」乃命狐毛將上軍,狐偃佐之。使趙衰將下軍,衰辭曰:「臣貞慎不如欒枝,有謀不如先軫,多聞不如胥臣。」乃命欒枝將下軍,先軫佐之。荀林父御戎,魏犨為車右,趙衰為大司馬。郤縠登壇發令。三通鼓罷,操演陣法,少者在前,長者在後,坐作進退,皆有成規。有不能者,教之;三教而不遵,以違令論,然後用刑。一連操演三日,奇正變化,指揮如意。眾將見卻縠寬嚴得體,無不悅服。方欲鳴金收軍,忽將臺之下,起一陣旋風,竟將大帥旗杆,吹為兩段,眾皆變色。卻縠曰:「帥旗倒折,主將當應之。吾不能久與諸子同事,然主公必成大功。」眾問其故,縠但笑而不答。時周襄王十九年,冬十二月之事也。

  

明年春,晉文公議分兵以伐曹衛,謀於郤縠。縠對曰:「臣已與先軫商議停當矣。今日非與曹衛為難也,分兵可以當曹衛,而不可以當楚。主公宜以伐曹為名,假道於衛,衛曹方睦,必然不允。我乃從南河濟師,出其不意,直搗衛境,所謂『迅雷不及掩耳』,勝有八九。既勝衛,然後乘勢而臨曹。曹伯素失民心,又惕於敗衛之威,其破曹必矣!」文公喜曰:「子真有學之將也!」即使人如衛假道伐曹。衛大夫元咺請於成公曰:「始晉君出亡過我,先君未嘗加禮。今來假道,君必聽之。不然,彼將先衛而後曹矣。」成公曰:「寡人與曹共服於楚,若假以伐曹之路,恐未結晉歡,而先取楚怒也。怒晉,猶恃有楚,並怒楚,將何恃乎?」遂不許。晉使回報文公。文公曰:「不出元帥所料也!」乃命迂道南行。渡了黃河,行至五鹿之野,文公曰:「嘻!此介子推割股處也!」不覺淒然淚下,諸將皆感嘆助悲。魏犨曰:「吾等當拔城取邑,為君雪往年之恥,何用嘆息?」先軫曰:「武子之言是也。臣願率本部之兵,獨取五鹿。」文公壯其言,許之。魏犨曰:「吾當助子一臂。」二將升車前進。先軫令軍士多帶旗幟,凡所過山林高阜之處,便教懸插,務要透出林表。魏犨曰:「吾聞『兵行詭道』,今遍張旗表,反使敵人知備,不知何意?」先軫曰:「衛素臣服於齊,近改事荊蠻,國人不順,每虞中國之來討。吾主欲繼齊圖伯,不可示弱,當以先聲奪之。」

  

卻說五鹿百姓,不意晉兵猝然來到,登城瞭望,但見旌旗布滿山林,正不知兵有多少。不論城內城外居民,爭先逃竄,守臣禁止不住。先軫兵到,無人守禦,一鼓拔之。遣人報捷於文公。文公喜形於色,謂狐偃曰:「舅云得土,今日驗矣!」乃留老將郤步揚屯守五鹿,大軍移營,進屯斂盂。郤縠忽然得病,文公親往視之。郤縠曰:「臣蒙主公不世之遇,本欲塗肝裂腦,以報知己。奈天命有限,當應折旗之兆,死在旦夕!尚有一言奉啟。」文公曰:「卿有何言?寡人無不聽教。」縠曰:「君之伐曹衛,本謀固以致楚也。致楚必先計戰,計戰必先合齊秦。秦遠而齊近,君速遣一使結好齊侯,願與結盟。齊方惡楚,亦思結晉。倘得齊侯降臨,則衛曹必懼而請成,因而收秦。此制楚之全策也。」文公曰:「善。」遂遣使通好於齊,敘述桓公先世之好,願與結盟,同攘荊蠻。

  

時齊孝公已薨,國人推立其弟潘,是為昭公。潘,葛嬴所生也,新嗣大位。以取穀之故,正欲結晉以抗楚。聞知晉侯屯軍斂盂,即日命駕至衛地相會。衛成公見五鹿已失,忙使寧速之子寧俞,前來謝罪請成。文公曰:「衛不容假道,今懼而求成,非其本心。寡人旦夕當踏平楚丘矣。」寧俞還報衛侯。時楚丘城中,訛傳晉兵將到,一夕五驚。俞謂衛成公曰:「晉怒方盛,國人震恐,君不如暫出城避之。晉知主公已出,必不來攻楚丘。然後再乞晉好,保全社稷可也。」成公嘆曰:「先君不幸失禮於亡公子,寡人又一時不明,不允假道,以至如此。累及國人,寡人亦無面目居於國中!」乃使大夫咺同其弟叔武攝國事,自己避居襄牛之地;一面使大夫孫炎,求救於楚。時乃春二月也。髯翁有詩云:

    

納姬贈馬怪紛紛,患難何須具主賓?

誰知五鹿開疆者,便是當年求乞人!

 

是月,郤縠卒於軍。晉文公悼惜不已,使人護送其喪歸國。以先軫有取五鹿之功,升為元帥。用胥臣佐下軍,以補先軫之缺。(因趙衰前薦胥臣多聞,是以任之。)文公欲遂滅衛國,先軫諫曰:「本為楚困齊宋,來拯其危,今齊宋之患未解,而先覆人國,非伯者存亡恤小之義也。況衛雖無道,其君已出,廢置在我。不如移兵東伐曹。比及楚師救衛,則我已在曹矣。」文公然其言。

  

三月,晉師圍曹。尊共公集群臣問計。僖負羈進曰:「晉君此行,為報觀脅之怨也。其怒方深,不可較力。臣願奉使謝罪請平,以救一國百姓之難。」曹共公曰:「晉不納衛,肯獨納曹乎?」大夫于朗進曰:「臣聞晉侯出亡過曹,負羈私餽飲食,今又自請奉使,此乃賣國之計,不可聽之。主公先斬負羈,臣自有計退晉。」曹共公曰:「負羈謀國不忠,姑念世臣,免殺罷官。」負羈謝恩出朝去了。正是:「閉門不管窗前月,吩咐梅花自主張。」共公問于朗:「計將安出?」于朗曰:「晉侯恃勝,其氣必驕。臣請詐為密書,約以黃昏獻門。預使精兵挾弓弩,伏於城堧之內,哄得晉侯入城,將懸門放下,萬矢俱發,不愁不為齏粉。」曹共公從其計。晉侯得于朗降書,便欲進城。

 

先軫曰:「曹力未虧,安知非詐?臣請試之。」乃擇軍中長鬚偉貌者,穿晉侯衣冠代行。寺人勃鞮自請為御。黃昏左側,城上豎起降旗一面,城門大開,假晉侯引著五百餘人,長驅而入。未及一半,但聞城堧之內,梆聲亂響,箭如飛蝗射來。急欲回車,門已下閘。可惜勃鞮及三百餘人,死做一堆!幸得晉侯不去,不然,「崑崗失火,玉石俱焚」了。晉文公先年過曹,曹人多有認得的,其夜倉卒不辨真偽。于朗只道晉侯已死,在曹共公面前,好不誇嘴!及至天明辨驗,方知是假的,早減了一半興。其未曾入城者,逃命來見晉侯。晉侯怒上加怒,攻城愈急。于朗又獻計曰:「可將射死晉兵,暴屍於城上,彼軍見之,必然慘沮,攻不盡力。再延數日,楚救必至,此乃搖動軍心之計也。」曹共公從之。晉軍見城頭用枰竿懸屍,纍纍相望,口中怨嘆不絕。文公謂先軫曰:「軍心恐變,如之奈何?」先軫對曰:「曹國墳墓,俱在西門之外。請分軍一半,列營於墓地,若將發掘者,城中必懼,懼必亂,而後乃可乘也。」文公曰:「善。」乃令軍中揚言:「將發曹人之墓。」使狐毛狐偃率所部之眾,移屯墓地,備下鍬鋤,限定來日午時,各以墓中髑髏獻功。城內聞知此信,心膽俱裂。

 

曹共公使人於城上大叫:「休要發墓,今番真正願降!」先軫亦使人應曰:「汝誘殺我軍,復磔屍城上,眾心不忍,故將發墓,以報此恨!汝能殯殮死者,以棺送還吾軍,吾當歛兵而退矣。」曹人覆曰:「既如此,請寬限三日!」先軫應曰:「三日內不送屍棺,難怪我辱汝祖宗也!」曹共公果然收取城上屍骸,計點數目,各備棺木,三日之內,盛歛得停停當當,裝載乘車之上。先軫定下計策,預令狐毛、狐偃、欒枝、胥臣整頓兵車,分作四路埋伏。只等曹人開門出棺,四門一齊攻打進去。到第四日,先軫使人於城下大叫:「今日還我屍棺否?」曹人城上應曰:「請解圍退兵五里,即當交納。」先軫稟知文公,傳令退兵,果退五里之遠。城門開處,棺車分四門推出。纔出得三分之一,忽聞砲聲大舉,四路伏兵一齊發作,城門被喪車填塞,急切不能關閉,晉兵乘亂攻入。曹共公方在城上彈壓,魏犨在城外看見,從車中一躍登城,劈胸揪住,縛做一束。于朗越城欲遁,被填頡獲住斬之。晉文公率眾將登城樓受捷。魏犨獻曹伯襄,顛頡獻于朗首級,眾將各有擒獲。晉文公命取仕藉觀之,乘軒者三百人,各有姓名,按藉拘拿,無一脫者。籍中不見僖負羈名字,有人說:「負羈為勸曹君行成,已除籍為民矣。」文公乃面數曹伯之罪曰:「汝國只有一賢臣汝不能用,郤任用一班宵小,如小兒嬉戲,不亡何待」喝教:「幽於大寨,俟勝楚之後,待聽處分。」其乘軒三百人,盡行誅戮,抄沒其家,以賞勞軍士。僖負羈有盤飱之惠,家住北門,環北門一帶,傳令:「不許驚動,如有犯僖氏一草一木者斬首!」晉侯分調諸將,一半守城,一半隨駕,出屯大寨。胡曾先生詠史詩云:

    

曹伯慢賢遭縶虜,負羈行惠免誅夷。

眼前不肯行方便,到後方知是與非。

 

郤說魏犨顛頡二人,素有挾功驕恣之意,今日見晉侯保全僖氏之令,魏犨忿然曰:「吾等今日擒君斬將,主公並無一言褒獎。些須盤飱,所惠幾何,郤如此用情,真個輕重不分了!」顛頡曰:「此人若仕於晉,必當重用,我等被他欺壓,不如一把火燒死了他,免其後患。便主公曉得,難道真個斬首不成?」魏犨曰:「言之有理。」二人相與飲酒,候至夜靜,私領軍卒,圍住僖負羈之家,前後門放起火來,火燄沖天。魏犨乘醉恃勇,躍上門樓,冒著火勢,在簷溜上奔走如飛,欲尋僖負羈殺之。誰知棟榱焚毀,倒塌下來,撲陸一聲,魏犨失腳墜地,跌個仰面朝天。只聽得天崩地裂之聲,一根敗棟刮喇的,正打在魏犨胸脯上。魏犨大痛無聲,登時口吐鮮血,前後左右,火毬亂滾,只得掙䦟起來,兀自攀著庭柱,仍躍上屋,盤旋而出。滿身衣服,俱帶著火,扯得赤條條,方免焚身之禍。魏犨雖然勇猛,此時不繇不困倒了。剛遇顛頡來到,扶到空閒去處,解衣衣之,一同上車,回寓安歇。

  

卻說狐偃胥臣在城內,見北門火起,疑有軍變,慌忙引兵來視。見僖負羈家中被火,急教軍士撲滅,已自焚燒得七零八落。僖負羈率家人救火,觸煙而倒,比及救起,已中火毒,不省人事。其妻曰:「不可使僖氏無後!」乃抱五歲孩兒僖祿奔後園,立污池中得免。亂到五更,其火方熄。僖氏家丁死者數人,殘毀房舍民居數十餘家。狐偃胥臣訪知是魏犨顛頡二人放的火,大驚,不敢隱瞞,飛報大寨。那大寨離城五里,是夜雖望見城中火光,不甚明白,直到天明,文公接得申報,方知其故。即刻駕車入城,先到北門來看僖負羈,負羈張目一看,遂瞑。文公嘆息不已。負羈妻抱著五歲孩兒僖祿,哭拜於地。文公亦為垂淚,謂曰:「賢嫂不必愁煩,寡人為汝育之。」即懷中拜為大夫,厚贈金帛,殯葬負羈,攜其妻子歸晉。直待曹伯歸附之後,負羈妻願歸鄉省墓,乃遣人送歸。僖祿長成,仍仕於曹為大夫。此是後話。

  

當日文公命司馬趙衰,議違命放火之罪,欲誅魏犨顛頡。趙衰奏曰:「此二人有十九年從亡奔走之勞,近又立有大功,可以赦之!」文公怒曰:「寡人所以取信於民者,令也。臣不遵令,不謂之臣,君不能行令於臣,不謂之君。不君不臣,何以立國?諸大夫有勞於寡人者甚眾,若皆可犯令擅行,寡人自今不復能出一令矣!」趙衰復奏曰:「主公之言甚當。然魏犨材勇,諸將莫及,殺之誠為可惜!且罪有首從,臣以為借顛頡一人,亦足警眾,何必並誅?」文公曰:「聞魏犨傷胸不能起,何惜此旦暮將死之人,而不以行吾法乎?」趙衰曰:「臣請以君命問之,如其必死,誠如君言。倘尚可驅馳,願留此虎將,以備緩急。」文公點頭道:「是。」乃使荀林父往召顛頡,使趙衰視魏犨之病。

 

不知魏犨性命如何,且看下回分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