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鼠
高尙顔 - 效嚬雜記
옛날에 물건을 훔치는데 신통한 재주가 있는 쥐가 있었다. 늙어지면서 기력도 쇠진하여 스스로 힘으로는 무엇을 훔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때 젊은 쥐들이 찾아와서 훔치는 기술을 배워 늙은 쥐를 먹여 살렸다. 그런데 늙은 쥐가 ‘이제는 기술도 바닥이 나서 더 가르쳐 줄 것이 없다.’ 그랬더니 그 뒤로 다시는 음식을 나누어 주지 않았다. 늙은 쥐는 몹시 분했지만 어쩔 수가 없어 얼마 동안을 그렇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 마을에 사는 한 여인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쥐들이 먹지 못하게 돌로 뚜껑을 눌러 놓고 밖으로 나갔다. 쥐새끼들은 그 음식을 훔쳐 먹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늙은 쥐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 하고 함께 가서 계책을 물었다.
늙은 쥐가 말했다. “너희들이 나의 기술로 배불리 먹고 살면서도 지금은 나를 버렸으니 말해 줄 수 없다.”
쥐새끼들은 “죽을 죄를 졌습니다. 앞으로는 잘 따르겠습니다(往者不諫, 來者可追). 원컨대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사죄하고 간절히 청했다.
그래도 늙은 쥐는 너그러웠다. “솥에 발이 세 개 있다. 그 중 한 다리가 얹혀 있는 곳을 모두 힘을 합쳐 파내거라. 그러면 얼마 파내려 가지 않아 솥은 자연히 그쪽으로 기울어져 솥뚜껑은 저절로 벗겨질 것이다.” 쥐새끼들이 달려가 파내려 가자 과연 늙은 쥐의 말대로 되었다. 쥐들은 배불리 음식을 먹고 남겨 가져다가 늙은 쥐를 대접했다.
☞ 高尙顔 (1553 ~ 1623)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사물(思勿), 호는 태촌(泰村). 할아버지는 충순위증판결사 고극공(高克恭)이며, 아버지는 증 한성우윤 고천우(高天佑)다. 어머니는 신천 강씨(信川康氏) 습독 강희언(康希彦)의 딸이다.
1573년(선조 6) 진사가 되고, 1576년(선조 9)에 문과에 올라 함창현감·풍기군수 등을 지냈다. 40세 되던 해인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침입하자, 향리인 상주 함창에서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어 큰 공을 세웠다.
49세인 1601년(선조 34) 이후지례현감·함양군수를 지냈고, 이덕형(李德馨)·이순신(李舜臣) 등과의 서사 기록(書事記錄)도 남긴 바 있다. 그 뒤 울산판관을 지낸 후, 벼슬을 그만두고 전원 생활을 하였다.
문집으로 1898년(고종 15)에 간행한 목판본 6권 3책이 전한다. 그 가운데 행장(行狀)에 보면 농사에 밝고 문장이 능하며, 농군을 가르치고 농사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하여 학계에서는 현전하는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를 그의 작품이라 추측하고 있다.
이는 문집인 『태촌집(泰村集)』에 「농가월령」이라는 기록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 농경 생활을 했다는 내용이 문집의 행장에 기록되어있어, 「농가월령가」는 고상안과 관련이 깊으리라는 짐작에서 연유된 것이다.
그 밖에 그의 문집에는 총화(叢話) · 여화(餘話)에 해당되는 「효빈잡기(効嬪雜記)」를 비롯하여, 임진왜란 때 유성룡(柳成龍)에게 올린 팔책(八策)과 유합(類合), 『해동운부군옥(海東韻府群玉)』에 대한 기록과 풍속·전설에 관한 기록 등이 전해지고 있어 일반 문집에 비해 이색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점을 종합하여 볼 때, 「농가월령가」의 나타난 계절 감각, 영농 내용 등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까닭에, 학계에서는 그가 「농가월령가」의 작자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문집으로 『태촌집』이 있다.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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