禮曹判書具允明上疏乞骸.
「臣立朝已過半百, 殘齡亦近九旬, 而平生拙規, 惟知守分, 閱歷世故, 轉成畏約, 深居簡出, 幾三十年。 所至於三字美稱, 亦近標致, 此所以十五歲之間, 不敢援引年至之例者也。 夫懸車之義, 禮經之所載, 先輩之攸行。 以臣文質無當, 顧其年齒則已至于此, 今雖晩矣, 亦足有辭於後。 臣家之世世遭遇, 恩山德海, 不足以喩其萬一, 而到今四代食祿, 五世登筵, 又是古今之所罕有, 而鳧雁之蹤, 不關於去來; 犬馬之忱, 無間於進退。 乞賜矜許, 以卒生成之澤。」
批曰:
「卿年九耋, 登第又近六十年, 而資至輔國, 秩視大官, 四代同朝, 祿仕五世, 一堂晉對。 卿之周甲所得之曾孫, 柑榜接武, 卿子重臣, 受知於冑筵, 掌中權而叨文任, 將以再明年臘, 卿可作僚於耆社。 元朝輸送歲饌也, 稱之以遐壽純嘏, 誠非溢美之稱。 際見卿章, 申申於三字美稱, 卿旣老矣。 固難責以事務, 則懸車之請, 於禮當而亦足爲賁飾之吉祥善事。 卿奉朝之稱, 當於便殿親臨宣麻。」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정조 20년 1월 4일>
<[태백산사고본] 44책 44권 4장 A면/[국편영인본]46책 624면/[분류] 人事>
致仕 : 대부는 나이 70세면 치사한다는 〈예경 禮經〉의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경국대전주해〉에서는 관직을 왕에게 되돌리고 나이들었음을 고하는 뜻이라고 했다. 치사제는 퇴직 후의 대우규정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치사자에게는 관직에 따라 차등 있게 녹봉을 지급하고 일정한 예우를 했다. 따라서 치사라는 용어는 고위관료에게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 치사제는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665년(문무왕 5)에 중시(中侍) 문훈(文訓)이 치사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분명한 정년퇴직제도로 운영되었다. 1115년(숙종 10) 나이 70세가 되면 퇴직해야 한다는 기록이 있다. 대우도 봉군(封君)과 관직의 고하에 따라 차등이 있었는데 정확한 규정은 알 수 없다.
조선시대에는 당상관 이상에게 사용했으며 이들에게는 봉조하라는 관직을 부여했다. 성종 때는 치사자에게 해당 관아나 읍에서 술과 고기를 보내도록 했다. 또 치사를 허용할 수 없는 사람이거나 업적이 큰 사람에게는 왕이 궤장을 내렸다(예를 들면 664년 신라 문무왕이 김유신에게 궤장을 내림). 치사한 후에도 원로대신들은 왕과 관료들의 자문에 응하며 국정에 영향력을 발휘한 경우가 많았다. → 봉조하
선마(宣麻) : 임금이 치사(致仕)한 관원에게 궤장을 하사할 때 함께 주는 조서(詔書)를 이름.
예조 판서 구윤명(具允明)이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윤명이 상소하기를,
"신이 조정에 선 지 이미 50년이 되었고 나이도 90에 가까워졌습니다. 평생 동안 한 일이 옹졸하여 오직 분수를 지키는 것만 알았고 세상의 변고를 두루 겪다 보니 점점 조심하는 것만 습관이 되어 깊숙이 기거하면서 출입이 드문 지가 이미 30년이 되었는데, 띠고 있는 삼자함(三字啣) 의 미칭(美稱)은 또한 자신을 표방하기에 가까운지라 이 때문에 15년 동안이나 나이가 차서 벼슬을 그만두는 예를 감히 끌어대지 못했던 것입니다. 대저 치사(致仕)하는 의리는 예경(禮經)에 실려 있어 선배 등이 행한 바인데, 신 같은 문질(文質)이야 선배들에 비하면 가당치도 않지만 그 나이를 돌아보면 이미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비록 늦었으나 또한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습니다. 신의 집안이 대대로 은우(恩遇)를 입어 은혜가 산과 같고 덕이 바다와 같다고 하더라도 그 만분의 하나도 비유되기에 부족한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4대가 녹(祿)을 먹고, 5세(世) 동안 연석(筵席)에 올랐으니, 이는 또 고금에 드문 일입니다. 오리나 기러기의 자취는 오거나 가거나 관계될 것이 없고, 견마(犬馬) 같은 신의 정성은 나가거나 물러나는 데에 아무런 간격이 없으니, 윤허를 내리시어 생성(生成)해 주시는 은택을 끝까지 다하소서."
라 하였다.
"경은 나이가 90이고, 등제(登第)한 지도 60년에 가까우며, 자급은 보국(輔國)에 이르렀고, 작질은 대관(大官)과 맞먹게 되었다. 4대가 같은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5세가 같은 당(堂)에서 진대(晉對)하고 있다. 경이 회갑 때 얻은 증손(曾孫)이 감귤제(柑橘製) 방(榜)에 합격하였고, 경의 아들은 중신(重臣)으로 주연(胄筵)에서 지우(知遇)를 받아 일찍이 군무(軍務)를 관장하고 문임(文任)도 담당했었다. 장차 내명년 섣달이 되면 경이 기사(耆社)의 요원(僚員)이 되겠기에 설날에 세찬(歲饌)을 보내면서 ‘나이가 많고 복이 많다.’고 일컬은 것은 참으로 지나친 미칭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경의 글을 보니 삼자(三字)의 미칭을 거듭 말하였거니와, 경은 이미 늙어서 진실로 사무를 책임지울 수 없으니, 치사의 청은 예에 있어서 타당하며 또한 자랑할 만한 상서로운 일이 되기에 충분하다. 경의 봉조하(奉朝賀)의 칭호는 의당 편전에 친림하여 선마(宣麻) 하겠다."
具允明(1711 ~ 1797)
18세기 조선 후기의 문신. 능천부원군 인후의 봉사손이었다. 승지직에 있으면서 영조의 신임을 받았다. 5조의 판서를 거친 후, 봉조하가 되었다. 어제편차인으로《열성지장》을 편집, 정조의 명으로《무원록》을 언해, 편저에 《전율통보》가 있다.
본관 능성(綾城). 자 사정(士貞). 호 겸산(兼山). 한성판윤 택규(宅奎)의 아들로 큰아버지 몽규(夢奎)에게 입양되었다. 또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 인후(仁垕)의 봉사손(奉祀孫)으로서 능은군(綾恩君)을 습봉(襲封)하였다. 1743년(영조 1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사관(史官) ·사헌부(司憲府)의 지평(持平) ·장령(掌令) 등을 지내고, 1749년 승지에 오른 후 10여 년 간 승지직에 있으면서 영조의 신임을 받았다.
이후 6조(六曹) 중 이조(吏曹)를 제외한 5조의 판서를 두루 거치고, 1796년 예조판서로 물러난 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앞서 1757년 채제공(蔡濟恭) ·조명정(趙明鼎)과 함께 어제편차인(御製編次人)으로 뽑혀 《열성지장(列聖誌狀)》을 편집하였고, 1791년(정조 15) 정조의 명으로 《무원록(無寃錄)》을 언해하였다. 편저에 《전율통보(典律通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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