朋黨論
歐陽脩
臣聞朋黨之說, 自古有之, 惟幸人君辨其君子小人而已。 大凡君子與君子以同道爲朋, 小人與小人以同利爲朋, 此自然之理也。然臣謂小人無朋, 惟君子則有之, 其故何哉? 小人所好者利祿也, 所貪者財貨也。當其同利之時, 暫相黨引以爲朋者, 僞也。及其見利而爭先, 或利盡而交疏, 甚者反相賊害, 雖其兄弟親戚, 不能相保。故臣謂小人無朋, 其暫爲朋者僞也。君子則不然, 所守者道義, 所行者忠信, 所惜者名節。以之修身, 則同道而相益, 以之事國, 則同心而共濟, 終始如一, 此君子之朋也。故爲人君者, 但當退小人之僞朋, 用君子之眞朋, 則天下治矣。
堯之時 小人共工驩兜等四爲一朋, 君子八元八愷十六人爲一朋。舜佐堯退四凶小人之朋, 而進元愷君子之朋, 堯之天下大治。及舜自爲天子, 而皐夔稷契等二十二人, 幷列于朝, 更相稱美, 更相推讓, 凡二十二人爲一朋, 而舜皆用之, 天下亦大治。
書曰, 「紂有臣億萬, 惟億萬心, 周有臣三千惟一心。」 紂之時億萬人各異心, 可謂不爲朋矣。然紂以此亡國, 周武王之臣三千人爲一大朋, 而周用以興。後漢獻帝時, 盡取天下名士, 囚禁之目爲黨人, 及黃巾賊起漢室大亂, 後方悔悟, 盡解黨人而釋之, 然已無救矣。 唐之晩年漸起朋黨之論, 及昭宗時盡殺朝之名士, 或投之黃河曰, 「此輩淸流可投濁流。」 而唐遂亡矣。
夫前世之主, 能使人人異心不爲朋莫如紂, 能禁絶善人爲朋莫如漢獻帝, 能誅戮淸流之朋, 莫如唐昭宗之世。然皆亂亡其國。 更相稱美, 推讓而不自疑, 莫如舜之二十二人, 舜亦不疑而皆用之。然而後世不誚舜爲二十二人朋黨, 而稱舜爲聰明之聖者, 以其能辨君子與小人也。
周武之世, 擧其國之臣三千人, 共爲一朋, 自古爲朋之多且大莫如周。然周用此以興者, 善人雖多而不厭也。夫興亡治亂之迹, 爲人君者, 可以鑑矣。
신은 듣건대 붕당(朋黨)의 설은 예로부터 있었으니, 오직 임금께서는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대체로 군자는 군자와 더불어 도(道)를 함께하여 붕당을 이루고, 소인은 소인과 더불어 (利益)을 함께하여 붕당을 이루니, 이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신은 소인에게는 붕당이 없고 군자에게만 붕당이 있다고 여기니, 그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소인이 좋아하는 것은 이익(利益)과 봉록(俸祿)이고, 탐내는 것은 재화(財貨)입니다. 저들이 이익을 함께할 때에 잠시 서로 붕당을 결성하고 끌어들여 벗으로 삼는 것은 거짓입니다. 이익을 보기에 이르러서는 서로 먼저 차지하려고 다투고, 혹 이익이 다 없어져서 교분이 소원하게 되어서는 도리어 서로 해쳐서, 비록 형제 친척이라도 서로 보호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신은 소인에게는 붕당이 없으니, 저들이 잠시 붕당을 이루는 것은 거짓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자는 그렇지 않아서 지키는 것은 도의(道義)요, 행하는 것은 忠信이요, 아끼는 것은 名譽와 節操입니다. 이로써 몸을 닦으면 道를 함께하여 서로 유익하고, 이로써 국가에 일하면 마음을 함께하여 서로 도와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니, 이것이 군자의 朋黨입니다. 그러므로 人君이 된 자는 소인의 거짓 붕당을 물리치고 군자의 참된 붕당을 써야 하니, 그렇게 된다면 천하는 다스려질 것입니다.
堯 임금 때에 소인인 共工․驩兜 등 4인이 하나의 붕당을 이루고, 군자인 八元․八凱 등 16인이 하나의 붕당을 이루었는데, 舜이 堯임금을 도와 四凶인 소인의 붕당을 물리치고 팔원․팔개인 군자의 붕당을 등용하여 요의 천하가 크게 다스려졌습니다. 순이 스스로 천자가 되기에 이르러서는 皐陶․夔․后稷․契 등 22인이 함께 조정에 늘어서서 번갈아 서로 칭찬하고 번갈아 서로 자리를 미루고 사양하여 22인이 한 붕당이 되었는데, 순은 이들을 모두 등용하여 천하가 또한 크게 다스려졌습니다.
≪書經≫ 〈虞書 泰誓〉에 이르기를 “商 紂王은 신하 억만 명이 있으나 억만의 마음이었거니와, 周나라는 신하 3천 명이 있는데 오직 한마음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紂王 때에는 억만 사람이 각기 마음이 달랐으니, 朋黨을 이루지 않았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러나 紂王은 이 때문에 나라를 망쳤고, 周 武王의 신하는 3천 명이 하나의 큰 붕당을 이루었으나 周나라는 이들을 등용하여 흥하였습니다.後漢 獻帝 때에는 천하의 名士들을 모두 잡아들여 감금하여 黨人이라고 지목하였는데, 黃巾賊이 일어나 漢나라 황실이 크게 혼란해지자, 그러한 뒤에야 비로소 뉘우치고 깨달아 黨人들을 모두 풀어 석방하였으나 이미 구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唐나라 말년에 점점 朋黨論이 일어났는데, 昭宗 때에 이르러 조정의 명사들을 모두 죽여서 黃河에 다 던지며 말하기를 “이들은 淸流이니 濁流에 던질 만하다.”라고 하더니, 唐나라가 마침내 망하였습니다.
前代의 君主 중에 사람마다 마음을 달리하여 朋黨을 이루지 못하게 한 것은 紂王만 한 이가 없고, 善人들이 붕당을 이룸을 금지한 것은 後漢의 獻帝만 한 이가 없고, 淸流의 붕당을 誅戮한 것은 唐 昭宗의 시대만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그 나라를 혼란시켜 망하게 하였습니다.번갈아 서로 칭찬하고 번갈아 서로 자리를 미루고 사양하여 서로 의심하지 않은 것은 舜의 22명의 신하만 한 이가 없었고, 舜 또한 이들을 의심하지 않고 모두 등용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세에서는 舜이 22명의 붕당에게 속았다고 비꼬지 않고, 舜을 총명한 聖君이라고 칭찬한 것은 군자와 소인을 분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周 武王의 세대에 온 나라의 신하 3천 명이 함께 하나의 붕당을 이루었으니, 예로부터 붕당을 이룸이 많고 또 큰 것은 주나라만 한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나라가 이들을 등용하여 흥한 것은 善人은 비록 많더라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니, 興亡과 治亂의 자취를 人君이 된 자는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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朋黨論 : 歐陽脩가 慶曆 4년(1044)에 지은 글이다. 그 당시 宋 仁宗이 杜衍, 富弼, 韓琦, 范仲淹 등을 進用해서 개혁할 마음을 품었는데, 歐陽脩 등 諫官의 대대적인 지지를 얻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守舊勢力의 강렬한 반대를 만났으니, 呂夷簡․夏竦(송) 등이 여론을 크게 조성하여 부필, 범중엄, 구양수 등을 무함하여 朋黨이라고 하였다. 저본의 제목 아래, “諫院에 있을 때 올린 것이다. [在諫院進]”라는 註가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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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工驩兜等四人 : 堯임금 때의 네 명의 惡人인 四凶으로, 共工․驩兜․三苗․鯀을 가리킨다. ≪書經≫ 〈虞書 舜典〉에 “공공을 幽洲에 유배하고, 환도를 嵩山에 유치하고, 삼묘를 三危에 몰아내고, 곤을 羽山에 가두어 네 사람을 벌주었다.[流共工于幽洲 放驩兜于嵩山 竄三苗于三危 殛鯀于羽山 四罪]”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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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元八凱十六人 : 八元은 高辛氏의 여덟 아들로 伯奮, 仲堪, 叔獻, 季仲, 伯虎, 仲熊, 叔豹, 季貍이고, 八凱는 高陽氏의 여덟 아들로 蒼舒, 憒攲, 檮戭, 大臨, 尨降, 庭堅, 仲容, 叔達이다. ≪春秋左氏傳 文公 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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舜佐堯……而進元凱君子之朋 : ≪春秋左氏傳≫ 文公 18년 조에 “舜이 堯임금의 신하가 되어 八凱를 천거하여 后土를 주관하게 하고 八元을 천거하여 사방에 敎化를 펴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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皐夔稷契等二十二人 : 皐는 皐陶로 舜임금 때 법의 집행을 맡은 士였고, 夔는 교육과 음악을 전담한 典樂이었고, 稷은 后稷으로 농업을 담당하였고, 契은 민정 장관이라 할 司徒의 직책을 관장하였다. 22인은 四岳 1인과 중앙 장관인 9官과 지방 장관인 12牧을 합친 것이다. ≪書經 虞書 舜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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紂有臣億萬……惟一心 : ≪書經≫ 〈周書 泰誓 上〉에 나온다. 저본의 ‘紂’와 ‘周’는 ≪서경≫에 ‘受’와 ‘予’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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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獻帝時……目爲黨人 : 黨錮之禍를 말한다. 後漢 桓帝 때 환관이 정권을 독단하다가 朝官과 太學生의 반대를 만났는데, 환관이 이들이 조정을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李膺 등 200여 명을 黨人이라고 명명하여 체포하였다. 靈帝 때에 竇武․陳藩 등이 환관을 죽여 없애려고 도모하였는데 일이 누설되어 살해당하였다. 그 후에 李膺․范滂 등 100여 명은 사사되었고, 6, 7백 명은 囚禁되었다. ≪後漢書 권67 黨錮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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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巾賊起 : 後漢 鉅鹿 사람인 張角이 黃老를 숭봉하여 五斗米道를 행하면서 제자 수십만 명을 거느리고 靈帝 때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무리들이 모두 누런 두건을 착용하였으므로 黃巾賊이라고 불렀다. 그 뒤 皇甫嵩에 의하여 평정되었다. ≪後漢書 권101 皇甫嵩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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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之晩年 漸起朋黨之論 : 唐나라 穆宗에서 武宗 때까지 牛僧孺와 李德裕가 서로 뜻이 맞지 않아 알력이 심했는데, 그로 인해 결국 牛僧孺․李宗閔을 우두머리로 하는 당과 李吉甫․李德裕 父子를 우두머리로 하는 당으로 갈라져서 40년간 대립하였다. 당시 이를 일러 ‘牛李之黨’이라 불렀다. ≪新唐書 권180 李德裕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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及昭宗時……可投濁流 : 昭宗은 昭宣帝의 잘못이다. 소선제는 바로 哀帝이다. 唐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昭宣帝 天祐 2년(905)에 재상 柳瓚이 朱全忠의 뜻에 영합하여 大臣인 裴樞 등 7인을 모함해서 滑州 白馬驛에서 죽일 적에, 과거에 누차 급제하지 못해서 불만을 품고 있던 李振이 주전충의 佐吏로 있다가 “이들이 스스로 淸流라고 말을 하니 黃河에 던져 넣어서 영원히 濁流가 되게 하는 것이 좋겠다.[此輩自謂淸流 宜投於黃河 永爲濁流]”라고 하자, 주전충이 웃으면서 허락하였다고 한다. ≪舊五代史 梁書 권18 李振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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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遂亡矣 : 907년에 唐나라가 朱全忠에게 멸망한 것을 말한다. 주전충이 바로 後梁의 太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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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獻帝 : 漢나라 桓帝와 靈帝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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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昭宗 : 唐나라 昭宣帝가 되어야 한다.
[출처] 朋黨論(붕당론) 歐陽脩(구양수)|작성자 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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