報任少卿書
司馬遷
太史公牛馬走, 司馬遷再拜言少卿足下。曩者辱賜書, 敎以順於接物, 推賢進士爲務。意氣懃懃懇懇, 若望僕不相師, 而用流俗人之言, 僕非敢如此也? 僕雖罷駑, 亦嘗側聞長者之遺風矣。顧自以爲身殘處穢, 動而見尤, 欲益反損。是以獨鬱悒而與誰語? 諺曰, '誰爲爲之, 孰令聽之?' 蓋鍾子期死, 伯牙終身不復鼓琴。何則? 士爲知己者用, 女爲說己者容。若僕大質已虧缺矣, 雖才懷隨和, 行若由夷. 終不可以爲榮, 適足以見笑而自點耳。書辭宜答, 會東從上來, 又迫賤事。相見日淺, 卒卒無須臾之閒, 得竭志意。今少卿抱不測之罪, 涉旬月, 迫季冬。僕又薄從上雍, 恐卒然不可爲諱。是僕終已不得舒憤懣以曉左右, 則長逝者魂魄, 私恨無窮。請略陳固陋, 闕然久不報, 幸勿爲過。
미천한 사람 태사 사마천이 삼가 소경(少卿)족하에게 재배하며 말씀드립니다. 지난번에 송구스럽게도 서신을 보내셔서 교우 관계를 신중히 하고 현명한 사람을 추천하는 데 힘쓰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간곡한 뜻을 가지고 제가 따르지 않음을 책망하시는 듯했는데, 속인들의 말을 좇았다면 제가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 제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장자의 유풍을 어렴풋이나마 들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스스로 몸이 상하고 오욕(汚辱)에 처해 움직이면 허물을 드러내고 잘하려고 하면 도리어 손해를 봅니다. 그러므로 혼자 답답해 할 뿐, 누구에게 말하겠습니까? 속담에 이르기를 ‘누구를 위해 일하고 또 누구보고 귀를 기울이라고 하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백아(伯牙)는 죽을 때까지 거문고를 타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합니다. 저처럼 몸이 망가지면 비록 재능이 수후주(隋侯珠)나 화씨벽(和氏璧)을 얻을 재주를 품고 있고, 허유(許由)와 백이(伯夷)처럼 행하여도 끝내 영예롭지 못하게 되고, 비웃음을 받게 되어 스스로 더럽혀질 뿐입니다. 서신에 회답을 드렸어야 했는데, 공교롭게 황상(皇上)을 따라 동쪽에서 장안으로 오게 되고 또 잡다한 일도 생겼습니다. 만나 뵐 기회도 적었고, 또 매우 바빠 잠시의 틈도 없어 저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없습니다.
지금 소경께선 뜻하지 않게 죄를 얻으신 지 한 달이 지나 12월이 다가옵니다. 저는 또 황상을 따라 옹(雍)으로 가게 되었는데, 소경께서 갑자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이야말로 저의 마음속에 있는 울분을 끝내 주변에 알리지도 못하고 혼백을 멀리 떠나보내는 일이 될 것이니 제 한스러움은 끝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제 저의 고루한 생각을 대략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랫동안 소식을 끊고 답장을 하지 않은 것을 허물로 여기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注]
牛馬走 : 소나 말처럼 달리는 종이라는 뜻으로, 말하는 이가 자신을 겸손하게 가리키는 말.
辱賜書 : 욕되게 하다. 남에게 대한 겸사(謙辭). 스스로 욕되게도 ~ 편지를 주셨다. 즉 송구스럽게도 ~ 편지를 주셨다.
接勿 : 교제하다. 사물을 접하다. 罷駑 : 지쳐서 둔해진 말이라는 뜻으로, 쓸모없는 둔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側 : 어렴풋하다. 사마천의 글에서 이 표현을 거듭 볼 수 있다. 「側聞屈原兮 自沈汨羅.<屈原賈生列傳>」
悒 : 근심할 읍. 흐느끼다. 마음이 무거운 모양. 즐겁지 아니함.
鍾子期 ~ : 鐘子期와 伯牙의 故事.
伯牙善鼓琴, 鍾子期善聽. 伯牙鼓琴, 志在登高山, 鍾子期曰 : 「善哉! 峨峨兮若泰山.」 志在流水, 鍾子期曰 : 「善哉! 洋洋兮若江河.」 伯
牙所念, 鍾子期必得之. 伯牙游於泰山之陰, 卒逢暴雨, 止於巖下. 心悲, 乃援琴而鼓之. 初爲「霖雨」之操, 更造「崩山」之音. 曲每奏, 鍾子
期輒窮其趣. 伯牙乃舍琴而嘆曰 : 「善哉! 善哉! 子之聽夫. 志想象猶吾心也. 吾於何逃聲哉?」 <列子. 湯問>
士爲知己者用 : 史記 刺客列傳(卷86.) 豫讓傳에 나오는 고사.
豫讓者,晉人也,故嘗事范氏及中行氏,而無所知名。去而事智伯,智伯甚尊寵之。及智伯伐趙襄子,趙襄子與韓、魏合謀滅智伯,滅智伯之後而三分其地。趙襄子最怨智伯,漆其頭以為飲器。豫讓遁逃山中,曰:「嗟乎!士為知己者死,女為說己者容。今智伯知我,我必為報讎而死,以報智伯,則吾魂魄不愧矣。」
質 : 몸. 실체. 모양. 형체. 卒卒 : 바쁘다. 분주하다. 총망하다.
隨和 : 隋侯之珠와 和氏之碧
隨侯之珠 : 수나라 임금이 큰 뱀을 구해 줬는데, 그 뱀이 은혜를 갚기 위해 천하의 보배인 옥구슬을 수후에게 물어다 줬다고 한다.
그 구슬로 참새를 잡는다는 고사가 생겨났다.
隋(隨)珠彈雀, 明珠彈雀 : 작은 것을 탐내다 큰 것을 잃거나,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음을 비유하는 말. <莊子 讓王>
和氏之碧 : 초(楚)나라 사람 화씨가 초산에서 옥을 얻었는데 초나라 여왕에게 올려 감정하게 한 바 평범한 돌이라 하여 벌로 왼쪽
발을 잘렸는데 여왕이 죽자 무왕이 올라 다시 옥을 바쳐 감정하게 한 결과 돌이라 하여 오른쪽 발이 잘렸다. 무왕이 죽
고 문왕이 즉위하였는데 화씨는 초산아래에서 그 옥을 안고 사흘 밤낮을 슬피 울었다. 문왕이 듣고 알아보게 하여 옥을
다듬게 하니 훌륭한 옥이 되었다.
조나라 혜문왕이 화씨벽을 얻었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진 소왕(秦 昭王)이 15개의 성과 화씨벽을 바꾸자 하였고 조나
라에서는 진나라에 속을 것을 알고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하였으나 결국 인상여를 보내게 되었는데 인상여는 무사히 일
을 마치고 돌아와 그 공으로 상경이 되었다. 이에 무장인 염파는 이에 불복하여 인상여를 시기하였으나 후에 염파는 계
속 자신을 피하는 인상여의 속셈을 알고 스스로 인상여를 찾아가 사죄하고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었다.
由夷 : 許由와 伯夷. 허유는 장자 소요유편에 나오는데 堯임금이 천하를 양여하겠다고 하였는데 이를 거절하였다. 백이는 고죽국 군왕의
장남으로 왕위의 승계를 거부하였고 역시 그 동생 숙제도 왕위를 거절하였으며, 주무왕(周武王)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치려고 출정할 때 동생 숙제와 함께 무왕을 말렸으나 듣지 않자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죽었다.
僕聞之, 脩身者智之符也, 愛施者仁之端也, 取與者義之表也, 恥辱者勇之決也, 立名者行之極也。士有此五者, 然後可以託於世, 而列於君子之林矣。故禍莫憯於欲利, 悲莫痛於傷心, 行莫醜於辱先, 詬莫大於宮刑。刑餘之人, 無所比數, 非一世也, 所從來遠矣。昔衛靈公與雍渠同載, 孔子適陳。商鞅因景監見, 趙良寒心。同子參乘, 袁絲變色。自古而恥之。夫以中才之人, 事有關於宦豎, 莫不傷氣, 而況於慷慨之士乎! 如今朝廷雖乏人, 奈何令刀鋸之餘, 薦天下豪俊哉。
제가 듣건대, 수신(修身)이란 지혜에 부합된 것이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것은 인의 발단이며, 주고받는 것은 의의 표현이고, 욕됨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은 용(勇)의 결단이며, 이름을 세우는 것은 행함의 끝이라고 들었습니다. 선비는 이 다섯 가지를 갖춘 후에 세상에 나갈 수 있고 군자의 대열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재앙에는 이익을 탐하는 것보다 더 참담한 것이 없고, 슬픔에는 상심하는 것보다 더 아픈 것이 없으며, 행동에는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것이 없고, 치욕에는 궁형을 받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궁형을 받았던 사람이 보통 사람과 비교될 수 없는 것은 지금 세상뿐 아니라 오래 전부터 그랬습니다. 옛날 위(衛)나라 영공(靈公)과 환관인 옹거(雍渠)가 같이 수레를 타자 공자(孔子)께서는 (위나라를 떠나) 진(陳)나라로 가셨습니다. 상앙(商鞅)이 환관인 경감(景監)을 통해 (진(秦)나라 효공(孝公)을) 만나자 조량(趙良)은 상앙을 한심스럽게 여겼습니다. 환관인 조담(趙談)이 문제(文帝)를 모시고 수레에 오르자 원사(袁絲)가 안색이 변했습니다. 옛날부터 환관을 부끄럽게 여겼던 것입니다. 보통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도 모든 일에 환관이 관련되면 기력을 잃지 않음이 없다는데, 하물며 기개가 있는 선비야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비록 조정에 인재가 모자란다 하더라도 궁형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천하의 호걸과 인재를 천거할 수 있겠습니까?
憯 : 슬퍼할 참. 슬퍼하다. 비통해 함. 참혹하다. 날카롭다. 예리함. 일찌기. 앞서.
詬 : 꾸짖을 후. 꾸짖다. 욕보이다. 망신시킴. 부끄러움. 치욕. 욕을 하며 책망함. 刑餘之人 : 전에 형벌을 받은 적이 있는 자. 전과자.
衛靈公 ~ : 위영공(衛靈公)이 부인 南子와 함께 수레를 타고 환관 옹거(雍渠)를 시위관으로 옆에 태우고 궁문을 나서면서 공자는 다음
수레에 타고 가게 하면서 거드름을 피우며 저자거리를 지나갔다. 그러자 공자가 "나는 여색을 좋아하는 것 같이 덕을 좋아하는
자를 만나보지 못하였다." 고 하면서 그러한 모습을 추하게 여기고 위나라를 떠나 조(曹)나라로 갔다.
霊公與夫人同車, 宦者雍渠參乗, 出, 使孔子為次乗, 招揺巿過之. 孔子曰, 「吾未見好徳如好色者也.」 於是醜之, 去衛, 過曹.
<史記 卷47. 孔子世家>
商鞅 : 상앙의 성은 공손(公孫)이고, 이름은 앙(鞅)이며, 위(衛)나라 왕의 서자 출신이기 때문에 위앙(衛鞅)이라고도 불린다. 상앙의 출생
무렵 위나라는 위(魏), 조(趙)의 속국으로 여겨질 만큼 국력이 약했기 때문에 공자 출신임에도 상앙은 스스로 관직을 찾아야 할
정도로 옹색한 처지였다. 상앙은 법가(法家)출신으로 위(魏)나라 재상 공숙좌(公叔座)의 식객이 되어 위나라 혜공에게 천거되었으나
등용되지 못하였다. 秦나라에서는 효공(曉公)이 즉위하여 널리 인재를 구하고 있었는데 상앙은 환관인 경감(景監)을 통하여 효공에
게 천거되고 변법(變法)의 책임자가 되었다. 상앙은 법을 제정하고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원칙대로 처벌하였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국력이 강해졌으나 반대파의 원한을 샀고 훗날 효공이 죽자 반대파에 의하여 모함을 받아 처벌받을 위기에 처
하자 외국으로 도망쳐 국경지역의 객사에 묵으려 했으나 여행권이 없는 자의 숙박을 거절해야 하는 당시의 법때문에 다시 돌아가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이리하여 상앙은 자신이 만든 법 때문에 죽게되어 '상앙의 법'이라는 고사가 생겨났다.
趙良 : 상앙이 정권을 잡은지 10년이 지나자 종실과 귀족들중 원망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조량은 상앙을 만나 환관인 경감을 통해 등용된
것은 명예롭지 못하며 교화보다는 가혹한 형벌로 원망과 화가 쌓여 일신의 위험이 목전에 닥쳤으니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요구하
였다.
同子參乘 : 동자(同子)는 조동(趙同). 당시 환관이었던 조담(趙談)을 말하며 사마천(司馬遷)의 아버지의 이름이 담(談)이었으므로 휘(諱 :
높은 사람의 이름)를 피하기 위해 조동(趙同)이라고 하였다. 환관 조담(趙談)은 여러 차례 황제의 총애를 받았는데, 항상 원앙을
해치려고 했기 때문에 원앙은 그것을 우려한 것이다.
袁絲 : 한 문제 때 낭중이었던 원앙(袁盎)을 말한다. 효문제가 대궐을 나설 때 조동이 황제를 수행하여 어가에 동승했는데 그때 원앙은
수레 앞에 엎드려 간언했다. “ ....... 지금 비록 한(漢)나라에 인재가 없다고 하나 폐하께서 어찌하여 환관 나부랭이를 수레에 함께
태우십니까!” 이에 황제는 웃으면서 조담을 내리게 하였다.
僕賴先人緖業, 得待罪輦轂下, 二十餘年矣。所以自惟, 上之, 不能納忠效信, 有奇策才力之譽, 自結明主。次之, 又不能拾遺補闕, 招賢進能, 顯巖穴之士。外之, 又不能備行伍, 攻城野戰, 有斬將搴旗之功。下之, 不能積日累勞, 取尊官厚祿, 以爲宗族交遊光寵. 四者無一遂, 苟合取容, 無所短長之效, 可見如此矣。嚮者, 僕亦常廁下大夫之列, 陪外廷末議。不以此時引維綱, 盡思慮, 今已虧形, 爲掃除之隸, 在闒茸之中。乃欲仰首伸眉, 論列是非, 不亦輕朝廷, 羞當世之士邪?
嗟乎! 嗟乎! 如僕尙何言哉? 尙何言哉? 且事本末, 未易明也。僕少負不羈之材, 長無鄕曲之譽。主上幸以先人之故, 使得奏薄伎, 出入周衛之中。僕以爲戴盆何以望天, 故絶賓客之知, 亡室家之業。日夜思竭其不肖之才力, 務一心營職, 以求親媚於主上。而事乃有大謬不然者夫。
저는 부친이 남기신 유업(緖業 : 遺業)에 힘입어 조정의 관직을 수행한지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건대, 위로는 충심과 신의를 다하지 못했으며, 훌륭한 책략이나 재능이 있다는 영예가 있어도 스스로 황상을 가까이 할 수도 없었습니다. 다음으로 또 남의 잘못을 바로잡고 현명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천거하며 재야에 은거하고 있는 훌륭한 선비를 드러나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대외적으로 또 군대를 거느리고 성을 공격하거나 들에서 싸워 적장의 목을 베고 기를 빼앗는 공도 세울 수 없었습니다.
아래로는 오랜 세월 공을 쌓아서 존귀한 관직이나 후한 봉록을 받아 친속이나 친구들이 영광으로 생각하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 네 가지 중에 한 가지도 이루지 못하고 구차히 남의 비위나 맞추고 영합해서 아무런 공로도 세우지 못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전에 한때 제가 하대부의 반열에 끼어 외정(外廷)의 말석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때 법도를 바로잡지 못하고 생각도 깊이 하지 못하여 지금 몸도 온전하게 보존하지 못하고 청소나 하는 노예처럼 천한 사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당당하게 반열에 서서 시비를 논하려고 한다면 또한 조정을 가벼이 보고 당세의 재능 있는 선비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아, 저와 같은 천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게다가 일의 본말도 쉽게 밝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젊었을 때 출중한 재능이 있다고 자부했었으나 장성해서는 고향에서조차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황상께서 다행하게도 저의 선친의 연고로 보잘 것 없는 재능을 펼치도록 하시어 궁중을 출입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동이를 이고 하늘을 쳐다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빈객들과의 왕래도 끊고 집안일도 잊어버렸습니다. 밤낮으로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하고 일심으로 직무에 힘써 황상의 뜻에 따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크게 잘못되어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待罪 : 죄를 기다리다. 옛날, 관리가 자기 직책을 수행하는 것을 겸손하게 이른 말로도 쓰임.
拾遺 : 拾遺補闕. 남이 잃어 버린 물건을 집어 가짐. 빠진 글을 뒤에 보충함. 搴 : 뺄 건. 빼다. 뽑아냄. 들어올리다. 추어올림.
闒 : 용렬할 탑. 용렬하다. 비천함. 어리보기. 얼뜬 사람. 다락문. 마을. 종소리. 북소리. 비천하다. 어리석음.
仰首伸眉 : 얼굴을 쳐들고 만족한 표정을 짓다. 즉 태도가 꼿꼿하여 굽히지 않음을 일컫는 말이다.
周衛 : 주밀(周密)하게 숙위(宿衛)하는 곳으로, 즉 한림(翰林) 등 시종신(侍從臣)을 의미한다.
戴盆何以望天 : 머리에 동이를 이고 하늘을 우러러 보다. 두 가지 일을 함께 하고자 하지만 할 수 없다.
夫僕與李陵, 俱居門下, 素非能相善也。趣舍異路, 未嘗銜盃酒, 接慇懃之餘懽。然僕觀其爲人, 自守奇士, 事親孝, 與士信, 臨財廉, 取與義, 分別有讓, 恭儉下人。常思奮不顧身, 以徇國家之急。其素所蓄積也, 僕以爲有國士之風。夫人臣出萬死不顧一生之計, 赴公家之難, 斯以奇矣。今擧事一不當, 而全軀保妻子之臣, 隨而媒糱其短。僕誠私心痛之。
且李陵提步卒不滿五千, 深踐戎馬之地, 足歷王庭, 垂餌虎口。橫挑彊胡, 仰億萬之師, 與單于連戰十有餘日, 所殺過當。虜救死扶傷不給, 旃裘之君長咸震怖, 乃悉徵其左右賢王, 擧引弓之人, 一國共攻而圍之。轉鬪千里, 矢盡道窮, 救兵不至, 士卒死傷如積。然陵一呼勞, 軍士無不起, 躬自流涕, 沫血飮泣, 更張空弮, 冒白刃, 北嚮爭死敵者。陵未沒時, 使有來報, 漢公卿王侯皆奉觴上壽。
저와 이릉(李陵)은 함께 궁중에서 일을 했지만, 평소 서로 친하지는 않았습니다.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일찍이 함께 술을 마신적도 은근하게 정을 나눠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릉의 사람됨을 보건대 비범한 선비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며, 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사람과 사귐에 신의가 있고 재물에 대해서는 청렴하며 주고받는 데는 의롭고 분별해야 할 일에는 겸양이 있고 아랫사람에게 공손하고 검소했습니다. 항상 분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았으며,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자신을 희생하였습니다. 그가 평소에 쌓은 바를 보고 저는 그가 국사(國士)의 풍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무릇 신하 된 자는 온갖 죽음을 무릅쓰고 필생의 책략을 내어 국가의 어려움을 구하러 달려가야만 비로소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일을 하다가 한 가지만 잘못해도 자신과 처자만을 보호하려는 신하들이 멋대로 그 잘못을 날조합니다. 저는 정말 이런 일을 마음속으로 통탄스럽게 생각합니다.
더구나 이릉은 5천명도 되지 않는 보병을 거느리고 적진 깊숙이 들어가 흉노 선우의 근거지까지 갔으니, 이는 먹이를 호랑이 입에 늘어뜨린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흉포한 오랑캐 억만의 군사를 맞이하여 흉노의 선우와 연이어 10여 일을 싸웠으며 죽인 적군의 수가 오히려 더 많았습니다. 흉노는 사상자를 구하지 못하자 선우가 매우 두려워하고 좌현왕과 우현왕을 모두 불러, 활 쏘는 자들을 모두 인솔하게 하여 온 나라의 군대가 함께 이릉을 치며 포위했습니다. 아군은 천 리 길을 전전하며 싸웠지만 화살도 다 떨어지고 길도 막혔으나, 구원병은 이르지 않고, 사졸들은 죽고 상한 자가 쌓여만 갔습니다. 그러나 이릉이 한 번 외쳐 군사들을 위로하자 군사들이 일어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눈물을 흘리며 피를 뒤집어쓴 채 눈물을 삼키고 빈 쇠뇌를 다시 잡았으며, 번득이는 칼날을 무릅쓰고 북쪽을 향해 목숨을 걸고 적과 싸웠습니다. 이릉이 아직 죽기 전에 사자가 와 보고하자 한(漢)나라에서는 공경과 왕과 제후가 술잔을 들어 천자께 축하를 드렸습니다.
李陵 : 한나라 문제(文帝)때 흉노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중랑(中郞)이 되었고 경제(景帝)를 거쳐 무제(武帝)에 이르기까지 흉노와 싸
웠던 장수 이광(李廣)의 손자. 무제 때인 천한(天漢) 2년 장군 이광리(李廣利)를 따라 흉노와의 전쟁에 참여했다가 보병 사수
(射手) 5천 명을 거느리고 적진 깊숙히 들어가 임무를 마치고 퇴각하던 도중 8만명의 흉노군에게 포위되어 8일동안이나 싸웠으나 고립된 채
힘이 다하여 항복했다. 흉노의 선우는 이릉의 가문을 잘 알고 있어 자신의 딸을 출가시키고 후대하였다. 한나라에서는 이릉의
모친과 처자식을 모두 죽였고 집안이 몰락했다.
懽 : 기뻐할 환. 기뻐하다. 기뻐서 좋아함. 맞다. 들어맞음. 합당함. 循 : 지키다. 호위함. 殉死하다.
國士 : 나라안에서 견줄 만한 사람이 없는 아주 뛰어난 선비. 糱 : 누룩 얼. 누룩. 곡자(麯子). 엿기름. 싹트다. 빚다. 일을 만들어 냄.
媒糱 : 술밑과 누룩을 말하며, 어울려서 술이 된다는 뜻인데, 모든 사물(事物)이 어울려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
戎馬之地 : 전쟁터. 여기서는 적진을 말함. 王庭 : 흉노 선우의 본영. 虜 : 적. 오랑캐. 旃 : 기 전. 모직물(旃裘)
弮 : 쇠뇌 권.
後數日, 陵敗書聞, 主上爲之食不甘味, 聽朝不怡。大臣憂懼, 不知所出。僕竊不自料其卑賤, 見主上慘愴怛悼, 誠欲效其款款之愚。以爲李陵素與士大夫絶甘分少, 能得人死力, 雖古之名將不能過也。身雖陷敗, 彼觀其意, 且欲得其當而報於漢。事已無可奈何, 其所嶊敗, 功亦足以暴於天下矣。僕懷欲陳之而未有路。適會召問, 卽以此指推言陵之功, 欲以廣主上之意, 塞睚眦之辭。未能盡明, 明主不曉, 以爲僕沮貳師, 而爲李陵遊說, 遂下於理。拳拳之忠, 終不能自列。因爲誣上, 卒從吏議.
며칠이 지나, 이릉이 패했다는 문서가 전해지자 천자께서는 밥맛을 잃고, 조회에 참석할 기분이 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들도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저는 자신이 비천하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천자께서 몹시 슬퍼하시는 것을 보고 저의 정성을 다하려 했습니다. 저는 「이릉은 평소 병사와 장수들과 동고동락하여 능히 그들의 사력을 다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며 비록 옛날의 명장이라 할지라도 이릉보다 못할 것이다. 그가 적에게 패하기는 했지만, 그 속뜻을 보건대 적당한 기회를 기다렸다가 나라에 보답하려 한 것이었다. 사태가 이미 어찌할 수 없었지만 그가 적을 무찌른 공로는 세상에 드러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러한 생각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때마침 저를 부르시어 하문하시자 이러한 뜻으로 이릉의 공로를 말씀드려 천자께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다른 신하들의 원망하는 말을 막아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말을 미처 다 밝히지도 못했는데, 천자께서는 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시고, 제가 이사(貳師)장군 이광리를 헐뜯고 이릉을 위해서 변호한다고 여기시어 저를 옥리에게 넘기셨습니다. 저는 간절한 충성스러운 마음을 끝내 다 펼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천자를 기만했다고 여겨서 형리의 판결을 받게 되었습니다.
款款 : 느릿느릿. 성실하다. 천천히. 충성스럽다. 款款之愚 : 자기의 精誠(정성)을 겸손하게 표현한 말. 士大夫 : 병사들과 장수.
絶甘分少 : 맛있는 음식은 남에게 주고 적은 것도 남과 함께 나누다. 스스로 애써 절약하여 남을 도와주다.
嶊 : 산높고 험할 최. 산 높고 험하다. 높고 크다. 험한 모양. 睚 : 눈초리 애. 눈초리. 쳐다보다. 노려보다. 흘겨봄.
眦 : 눈초리 제/노려볼 자. 睚眦 : 화난 눈초리. 사소한 원한. 부릅뜬 눈. 睚眦之怨 : 하찮은 원한.
貳師 : 이사(貳師)장군 이광리(李廣利) 拳拳 : 충성스럽다. 간절하다.
家貧貨賂不足以自贖, 交遊莫救, 左右親近, 不爲一言。身非木石, 獨與法吏爲伍, 深幽囹圄之中, 誰可告愬者? 此眞少卿所親見, 僕行事豈不然乎? 李陵旣生降, 隤其家聲, 而僕又佴之蠶室, 重爲天下觀笑。悲夫, 悲夫。事未易一二爲俗人言也。
僕之先, 非有剖符丹書之功, 文史星歷, 近乎卜祝之閒。固主上所戲弄, 倡優所畜, 流俗之所輕也。假令僕伏法受誅, 若九牛亡一毛, 與螻蟻何以異? 而世又不與能死節者, 特以爲智窮罪極, 不能自免卒就死耳。何也? 素所自樹立使然也。人固有一死, 或重於太山, 或輕於鴻毛, 用之所趨異也。太上不辱先, 其次不辱身, 其次不辱理色, 其次不辱辭令, 其次詘體受辱, 其次易服受辱, 其次關木索, 被箠楚受辱, 其次剔毛髮, 嬰金鐵受辱, 其次毁肌膚, 斷肢體受辱, 最下腐刑極矣。
傳曰, 刑不上大夫, 此言士節不可不勉勵也。猛虎在深山, 百獸震恐, 及在檻穽之中, 搖尾而求食, 積威約之漸也。故士有畵地爲牢, 勢不可入, 削木爲吏, 議不可對, 定計於鮮也. 今交手足, 受木索, 暴肌膚, 受榜箠, 幽於圜牆之中。當此之時, 見獄吏則頭槍地, 視徒隸則正惕息, 何者? 積威約之勢也。及以至是, 言不辱者, 所謂强顔耳。曷足貴乎?
저는 집이 가난해서 돈으로 죄를 대신할 수도 없었으며, 평소 교유하던 사람들 중에도 구해주지 못했고 주변의 친한 사람들도 한마디 말이 없었습니다. 제 자신이 목석이 아니고 홀로 옥리들과 섞여 깊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누가 하소연해 주겠습니까. 이것은 소경께서 친히 본 바이니, 저의 사정이 어찌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이릉은 이미 살아서 항복하여 그 집안의 명성을 무너뜨리고 말았고, 저 또한 뒤이어 궁형을 시행하는 잠실(蠶室)로 끌려가 천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슬프고 슬픕니다. 사정을 일일이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저의 선친께서는 벼슬을 했거나 공신에게 부여되는 단서(丹書)를 가질 만한 공로가 없었습니다. 천문 · 태사 · 율력과 같은 일을 담당하였는데, 점술사나 무당의 일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일은 본래 천자께서 희롱꺼리로 기르던 광대같은 것으로, 세상에서 경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형벌에 복종하여 죽음을 당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아홉 마리의 소에서 털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으니, 땅강아지나 개미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게다가 사람들은 저를 절개를 지켜 죽은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다만 지혜가 모자라고 죄가 극에 달해 마침내 스스로 죽음에 나가 면할 수 없게 되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평소에 스스로 세운 것이 그렇게 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본래 한 번은 죽는데,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기러기 털 하나보다 더 가볍기도 한 것은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선조를 욕되지 않게 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자신을 욕되지 않게 하는 것이며, 그 다음은 이치에 어긋나거나 얼굴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고, 그 다음은 말과 명령에 욕됨이 없게 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몸이 결박당해 욕을 당하는 것이며, 그 다음은 죄수복을 입고 욕을 당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형틀에 묶여 곤장을 맞으며 욕을 당하는 것이며, 그다음은 머리를 깎이고 목에 쇠사슬을 두르고 욕을 당하는 것이며, 그다음은 살갗을 훼손당하고 몸을 잘리는 욕을 당하는 것인데 가장 나쁜 것은 궁형을 받는 것입니다.
옛 책에 이르기를 「대부에게는 형벌을 주지 않는다.」 고 했는데, 이 말은 선비의 절개는 강제로 어찌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나운 범이 깊은 산에 있으면 모든 짐승이 두려워 떨지만 범이 덫이나 함정에 빠지게 되면 꼬리를 흔들며 먹이를 구하게 되는데, 이는 범의 위엄이 점점 쇠하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비는 땅 위에 선을 그어 감옥으로 삼는다면 기개 때문에 그 안에 들어가지 않으며, 나무를 깎아 형리(刑吏)로 삼아 논죄를 해도 응대하지 않는 것은, 이미 계획대로 정해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손발이 묶이고 형구를 쓴 채 몸을 다 드러내며 매질을 당하며 깊숙히 옥에 갇혀 있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옥리를 보면 머리를 조아리고 옥졸을 보면 놀라는데 왜 그러겠습니까. 오랜 감옥생활로 위세가 쇠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욕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소위 뻔뻔스러운 사람이니, 어찌 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隤 : 무너뜨릴 퇴. 무너뜨리다. 무너지다. 허물어 짐. 佴 : 버금 이/성 내. 버금. 잇다. 돕다.
剖符 : 부신(符信). 관료의 직위를 증명하는 것으로, 둘로 갈라 하나는 조정에 보관하고 하나는 본인이 가지고 신표(信標)로 사용.
丹書 : 조정에서 공신에게 하사한 세습 증서로 그 후예들의 작위와 면죄를 보증함. 철제 판에 붉은 글씨로 썼으므로 단서라 하였다.
詘 : 굽힐 굴/내칠 출/말더듬을 눌. 몸을 굽히다. 말이 막히다. 대꾸할 말이 없음. 짧다. 덜다. 감함. 따르다. 따르게 함. 접다. 주름을 잡음.
따르다. 꿀리다. 두려워함. 도리어. 오히려. 뚝 끊어지는 모양. 다하다. 궁지에 빠지다. 기꺼이 절개를 버리는 모양. 나다.
易服 : 여기에서는 죄수복을 입다. 죄수복으로 갈아입다. 箠 : 채찍 추. 채찍. 채찍질 하다. 태형(笞刑). 대 이름. 대의 마디.
剔 : 바를 척/깎을 체. 바르다. 뼈를 발라 냄. 깎다. 풀 따위를 벰. 없애버리다. 파헤쳐 폭로함.
嬰 : 갓난아이 영. 두르다. 돎. 걸다. 목걸이. 갓 끈. 접촉하다. 더하다. 腐刑 : 오형의 하나. 宮刑.
圜 : 두를 환. 두르다. 에워쌈. 둥글다. 하늘. 널리 고루 통함. 감옥. 徒隸 : 牢卒. 獄卒.
且西伯伯也, 拘於羑里。李斯相也, 具於五刑。淮陰王也, 受械於陳。彭越 · 張敖, 南面稱孤, 繫獄抵罪。絳侯誅諸呂, 權傾五伯, 囚於請室。魏其大將也, 衣赭衣, 關三木。季布爲朱家鉗奴, 灌夫受辱於居室。此人皆身至王侯將相, 聲聞鄰國。及罪至罔加, 不能引決自裁, 在塵埃之中。古今一體, 安在其不辱也?
由此言之, 勇怯, 勢也, 强弱, 形也, 審矣, 何足怪乎? 夫人不能早自裁繩墨之外, 以稍陵遲, 至於鞭箠之間, 乃欲引節, 斯不亦遠乎! 古人所以重施刑於大夫者, 殆爲此也。夫人情莫不貪生惡死, 念父母, 顧妻子。至激於義理者不然, 乃有所不得已也。今僕不幸, 早失父母, 無兄弟之親, 獨身孤立。少卿視僕於妻子何如哉? 且勇者不必死節。怯夫慕義, 何處不勉焉? 僕雖怯懦, 欲苟活, 亦頗識去就之分矣。何至自沈溺縲紲之辱哉! 且夫臧獲婢妾, 由能引決, 況僕之不得已乎!
문왕(文王)은 서백(西伯)시절 제후의 우두머리였음에도 유리(羑里)에 갇혔었고, 이사(李斯)는 재상이었어도 오형(五刑)을 받았습니다.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은 왕이었으나 진(陳)에서 사로잡혔고, 팽월(彭越)과 장오(張敖)는 남면하여 고(孤)라 칭하다가 죄를 입고 옥에 갇혔습니다. 강후(絳侯) 주발(周勃)은 여씨(呂氏) 일족을 평정하여 그 권력이 춘추오패를 능가하였으나 청실(請室)에 갇히게 되었고,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은 대장이었으나 죄인의 옷을 입고 목과 손 발에 형틀을 차게 되었습니다. 계포(季布)는 주가(朱家)의 집에서 목에 칼을 쓴 노예가 되었고 관부(灌夫)는 거실에서 욕을 당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몸이 왕후장상에 올라 이웃 나라까지 명성을 떨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더할 수 없는 죄를 지었는데도 스스로 인책하여 자결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구차하게 살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이니 어찌 욕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로써 말하건대 용감한 것과 비겁한 것은 기세에 좌우되는 것이고, 강하고 약한 것은 형세에 달린 것이라 할 수 있으니, 깊이 살펴보면 어찌 이상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법의 적용을 받기 전에 일찌감치 자결하지 못하고, 이미 능지처참을 당하고 태형을 당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자결하려고 하는 것은 이 또한 너무 늦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사람들이 대부에게 법을 적용할 때 신중을 기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것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무릇 인정(人情)이란 살기를 탐하고 죽기를 꺼리며, 부모를 생각하고 처자를 돌보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의리에 격분한 사람은 그렇지 않으니 이는 부득이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는 불행히도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형제도 없이 혼자서 외로이 있습니다. 소경께서 보시기에 제가 처자에게 어찌 하였습니까? 또한 용감한 사람만이 반드시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겁이 많은 사람도 의를 추구하면 어느 곳에선들 힘을 쓰지 않겠습니까. 제가 비록 겁이 많고 나약하여 구차하게 살기를 바라기는 하지만, 또한 생사의 명분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찌 스스로 감옥 안에 갇힌 치욕에 빠져있겠습니까! 비천한 종이나 비첩들도 능히 자결할 수 있는데 하물며 어찌 제가 하지 못하겠습니까!
西伯 : 周나라 문왕(文王)으로 武王의 父親. 어진 정치를 펴 인심이 그에게 쏠리자 숭후호(崇侯虎)의 참언에 의하여 주왕(紂王)이 유리
(羑里)에 가두었다. 신하들이 주왕에게 뇌물을 바쳐 사면을 받은 후 강태공이라고 불리우는 여상(呂尙)을 등용하여 周나라의 기
틀을 닦았다.
李斯 : 진(秦) 시황제 때의 승상 李斯를 말한다. 초(楚) 상채출신으로 순경의 문하에서 수업한 법가 출신. 여불위의 추천으로 진시황을
섬겨 분서갱유를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진시황이 죽은 후 환관 조고의 간계에 빠져 함양의 저자거리에서 요참형에 처해졌다.
韓信 : 한나라의 개국공신으로 소하, 장량과 함께 한초삼걸(漢初三杰)이라 불린다. 어린시절 양친을 여의고 불우한 세월을 보내면서 표모
에게서 밥을 얻어먹기도 하였고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 웃음꺼리가 되기도 하였다. 진(秦)나라 말기 진승과 오광의 봉기
로 각지에서 영웅들이 들고 일어났는데, 한신은 처음에 항우의 휘하에 있었으나 발탁되지 못하자 실망하고 유방에게 투신한 후 대
장군이 되어 마침내 해하에서 사면초가에 빠진 항우군을 격파하고 한나라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한나라 건국후 초왕(楚王)이
되었으나 한고조 유방은 지략이 뛰어난 그를 두려워하여 운몽(雲夢)에서 제후를 소집한다는 핑계로 한신을 사로 잡아 회음후
(淮陰侯)로 강등조치했다. 이때 한신이 탄식한 말에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그후 진희의 반란으로 한고조가 출
진하자 여후(呂后)가 진희의 반란을 진압했다는 구실로 소하를 보내 여후에게 축하인사를 가도록 한 후 매복시킨 병사들로 하여금
사로잡게 하여 바로 참하였다.
彭越 : 진나라 말기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자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초(楚)나라 항우(項羽)의 휘하로 들어갔으나, 항우가 자신의 공을 인정
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유방에게 귀순하여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격파한 후 양왕(梁王)에 봉해졌다. 진희(陳豨)가 대(代) 땅에
서 반란을 일으키자 병을 핑계 대며 유방의 징병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여태후의 모함을 받아 유방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張敖 : 한고조의 사위이며 장이(張耳)의 아들로 본래 전한의 제후국 조나라의 왕이었으나, 부하인 관고와 조오등의 황제 암살 혐의로 인해
왕위를 잃고 고제의 공신 제3위로 격하되었다. 혜제의 장인이다.
絳侯 : 한고조 때의 장군 주발(周勃). 漢 건국후 공로를 인정받아 강후가 되었으며, 漢高祖 死後 여후(呂后)가 국정을 전횡하다가 죽자 승상
진평과 협력하여 여씨일족을 주살하고 나라를 바로 잡는데 기여했다.
五伯(오패) : 춘추시대의 오패(五覇)를 말함. 伯 = 覇. 즉, 제환공(齊桓公), 진문공(晋文公), 진목공(秦穆公), 송양공(宋襄公), 초장왕(楚莊王). 또는 제환공, 진문공, 초장왕, 오왕 합려(呉王闔閭), 월왕 구천(越王勾践)이라고도 한다.
魏其 : 漢 孝文帝 황후(皇后)의 조카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을 말한다. 효경제 3년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 때 대장군으로 임명되어
형양을 지키며 제나라 조나라의 병사를 감독하였다. 오초칠국의 난이 평정된 후 위기후(魏其侯)로 임명되었다. 유학(儒學)을 숭상해
두태후의 뜻을 거슬러 파직되었다. <史記卷107. 魏其武安侯列傳 竇嬰>
赭 : 붉은 흙 자. 붉은 흙. 붉은 빛. 벌거벗기다. 붉은 흙 빛깔의 수의(囚衣). 다하다. 바닥남.
三木 : 예전에, 죄인의 목, 손, 발에 채우던 세 가지 형구. 鉗 : 칼 겸. 칼을 씌우다. 집다. 입을 다물다.
季布 : 楚나라 사람으로 項羽의 武將. 해하에서 항우가 패한 후 계포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한고조 유방은 현상금을 걸고 그를 수배했
다. 추적의 손길이 뻗치자 복양(濮陽)의 주씨(周氏) 집에 숨었다가 스스로 노예가 되어 노(魯)나라의 주가(朱家)에게 팔려갔다.
주가는 그 노예가 계포임을 알아보고 등공(滕公) 하우영(夏侯嬰)을 찾아가 설득하여 한고조에게 간언케 하였다. 한고조는 마침내
사면되어 낭중(郎中)이 되었으며, 혜제(惠帝) 때에는 중랑장(中郞將)이 되었다. <史記 권100. 季布欒布列傳>
灌夫 : 영음(穎陰) 사람. 관부의 부친인 장맹(張孟)은 일찍이 영음후(穎陰侯) 관영(灌嬰)의 가신(家臣)이었다. 장맹은 관영의 총애를 받았고
관영의 추천으로 2천석의 봉록을 받는 신분이 되었다. 그래서 관씨(灌氏) 성을 따서 관맹(灌孟)이 되었다.
효경제 3년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 때 관부는 부친과 함께 관영을 따라 종군하였으나 부친인 관맹이 전사하자, 부자가 함께 종군
하다가 1명이 전사하면 생존자가 유해와 더불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당시의 군법적용을 거부하고 부친의 원수를 갚겠다며 싸우
는 과정에서 이름이 알려져 중랑장이 되었다. 그는 강직하였으나 주벽(酒癖)이 있었다.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과 각별하게 지냈
었는데 당시 승상이던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이 연왕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열린 축하연에서 승상에게 불경죄를 범한 후 체포
되어 탄핵당하고 일족이 주살당했다.
위기후는 관부를 적극 구명했으나 관부가 처형당하자 한동안 실의에 빠졌었는데 결국 그역시 일족과 함께 참수되었다.
繩墨 : 먹통에 딸린 실줄로 법률을 의미. 臧獲 : 예전에, 남의 집에 딸려 대대로 그 집에서 천한 일을 하던 사람. 노비.
所以隱忍苟活, 幽於糞土之中而不辭者, 恨私心有所不盡, 鄙陋沒世, 而文采不表於後世也。古者, 富貴而名摩滅, 不可勝記, 唯倜儻非常之人稱焉。蓋文王拘而演周易, 仲尼厄而作春秋。屈原放逐, 乃賦離騷, 左丘失明, 厥有國語。孫子臏脚, 兵法脩列。不韋遷蜀, 世傳呂覽。韓非囚秦, 說難孤憤。詩三百篇, 大抵聖賢發憤之所爲作也。此人皆意有鬱結, 不得通其道, 故述往事, 思來者。乃如左丘無目, 孫子斷足, 終不可用, 退而論書策, 以舒其憤, 思垂空文以自見。
제가 욕됨을 참고 구차히 살면서 더러운 감옥에 깊숙히 갇혀있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제 뜻을 다 펴지 못하고 비루하게 세상을 떠나 후세에 문장을 남기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부귀했으면서도 이름이 사라져 간 사람들을 이루다 기억할 수 없이 많지만, 오직 뜻이 크고 기개 있는 비범한 인물만은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문왕(文王)께서는 구금되어 주역(周易)을 엮으셨고, 공자(孔子)께서 곤액(困厄)을 당하시면서 춘추(春秋)를 지으셨습니다. 굴원(屈原)은 추방을 당하고서 이소(離騷)를 지었으며, 좌구명(左丘明)은 실명을 하고서 국어(國語)를 편찬했습니다. 손자(孫子)는 다리를 잘린 후에 병법을 저술했고, 여불위(呂不韋)가 촉(蜀)으로 쫓겨난 뒤에 여람(呂覽 : 呂氏春秋)이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한비(韓非)는 진(秦)나라에 갇힌 뒤에 세난(說難)과 고분(孤憤)을 지었습니다. 시경(詩經) 3백 편도 대체로 성현께서 발분하여 지은 것입니다. 이러한 분들은 뜻이 막혀 답답했으나, 자신의 견해와 도리를 전할 방법이 없어 지난 일을 서술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자신의 뜻을 볼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좌구명은 눈이 멀고 손자는 다리를 잘려 끝내 쓰임을 받지 못하게 되자 물러나 책을 써서 마음속의 울분을 풀고 자신의 생각을 남김없이 글로 써서 자신의 뜻을 후세에 드러나게 했던 것입니다.
倜儻 : 호방하다. 뜻이 크고 기개가 있다. 소탈하다. 倜 : 대범할 척. 대범하다. 얽매이지 않음. 뛰어나다. 높이 빼어난 모양. 먼 모양.
屈原 : 굴원(屈原, BC 340 ~ 278)은 중국 전국 시대 초나라의 시인 · 정치가다. 성은 미(羋), 씨는 굴(屈), 이름은 평(平)이다. 초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나 초나라의 회왕(懷王) 때에 좌도(보좌관)에 임명되었다.
학식이 높고 정치적 식견도 뛰어난 정치가였으며, 회왕의 상담역으로 국사를 도모하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으나, 다른 이의
모함을 받아 신임을 잃고 멱라(汨羅江)에 돌덩이를 품에 안고 몸을 던져 죽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離騷〉, 〈漁夫辭〉 등이 있다.
左丘明 : 좌구명(左丘明, BC 556 ~ 451)은 중국 춘추 시대 말기 노나라의 역사가. 춘추좌씨전과 국어(國語)의 저자라고 알려져 있다.
孫子 : 손자는 보통 손무 또는 손무의 후예 손빈에 대한 경칭. 손무는 춘추시대 제나라 사람이며, 일찍이 <병법> 13편을 지었으며
오왕 부차 때 오자서와 함께 등용되어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를 무찔렀다. 그의 저서 <손자병법>은 중국 최초의 병서이다.
손빈은 전국시대의 전략가로 일찍이 방연과 함께 병법을 공부했다. 위(魏)나라 혜왕의 장군이 된 방연은 손빈의 재주를 시기해
그를 위나라로 불러들여 무릎뼈를 도려내는 형벌인 빈형(臏刑)을 가했으나 위나라를 방문한 제나라 사신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제나라의 장군인 전기(田忌)의 빈객이 되었다가 전기의 추천으로 제나라 왕의 병법 스승이 되었다.
그 후 위나라가 조(趙)나라를 침공하여 도읍 한단을 포위하였을 때 전기장군에게 위(魏)나라 도읍을 공격하게 하여 급히 회군하
는 위나라의 군대를 계릉 전투(桂陵戰鬪)에서 크게 이겼고, 13년 후 한(韓)나라를 침공한 위나라의 군대를 유인하여 마릉전투에
서 추격해오는 위군을 대파하자 방연은 자살하고 위나라 태자 신(申)은 포로가 되었다.
그의 저서 〈손빈병법〉은 당나라 이후에 유실되었는데, 1972년 인췌 산 한묘에서 죽간이 발굴되었다.
呂不韋 : 여불위(呂不偉)는 전국시대 말 위(衛)나라 복양(濮陽)출신의 상인으로 조(趙)나라 수도 한단(邯鄲)에 장사차 방문했다가 그곳
에서 인질 생활을 하던 진(秦)나라 공자 영이인(嬴異人)을 만나게 되었다. 여불위는 비참하게 인질생활을 하고 있던 영이인을
기화가거(奇貨可居)로 여기고 그에게 투자하여 그를 진(秦)나라 왕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여불위는 태자가 된 영이인의 부친
안국군의 부인 화양부인을 포섭하여 화양부인이 초(楚)나라 출신인 점을 감안, 영이인의 이름을 자초(子楚)로 고치고 화양부인
의 양자가 되어 안국군과 화양부인에게 효성을 다하게 했다. 소양왕이 죽자 효문왕이 된 안국군의 태자가 되는데 성공했다.
여불위는 미모와 기예(伎藝)가 뛰어난 부인인 조희(趙姬)를 자초에게 바쳤는데 그 조희가 낳은 아들이 훗날 진시황이 된 영정
(嬴政)이다. 효문왕은 즉위한지 1년만에 죽고 자초가 즉위하여 장양왕이 되고 여불위의 공을 인정하여 재상으로 임명했으나 재
위 3년만에 죽어 진시황은 13살에 즉위하였으며 여불위는 태후와 함께 섭정하게 되었다. 여불위의 권세가 커지자 문객들이 몰
려 3,000여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여불위는 문객들에게 당대의 다양한 학설과 사건, 설화 등을 모아 책을 편찬하게 했으며 이것
이 여씨춘추(呂氏春秋)이다.
진시황이 성장함에 따라 여불위와 태후의 불미스러운 일이 발각되고 태후와 노애의 불륜사실이 밝혀지자 노애가 난을 일으켜
결국 노애는 극형에 처해지고 멸족되었으며 여불위를 촉(蜀)땅에 귀양보냈다.
여불위는 귀양지에서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끊어졌음을 생각하고 자결했다.
韓非 : 한비는 한나라 왕 안(安)의 서자로 전국 시대 말기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한비자(韓非子)를 저술했다. 그의 사상은 진시황제가
천하 통일의 대업을 이루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한비는 제(齊)나라 수도 임치로 가서 순자(筍自 : 筍卿)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곳에서 이사를 만났다. 당시 한나라는 국력이 약해
진(秦)나라와 초(楚)나라에 의해 국토를 많이 침식을 당했는데 한비가 안왕에게 부국강병책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진시황이 한비자의 글을 읽고 감탄하여 한비를 얻기 위해 한나라를 침공하였다. 진시황은 한비를 얻고 매우 기뻐했으나 한비의
재주를 시기한 이사의 참언으로 인하여 옥중에서 독살되었다.
僕竊不遜, 近自託於無能之辭, 網羅天下放失舊聞, 略考其行事, 綜其終始, 稽其成敗興壞之紀。上計軒轅, 下至於玆, 爲十表, 本紀十二, 書八章, 世家三十, 列傳七十, 凡百三十篇, 亦欲以究天人之際,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草創未就, 會遭此禍。 惜其不成, 是以就極刑而無慍色。僕誠以著此書, 藏諸名山, 傳之其人, 通邑大都, 則僕償前辱之責。雖萬被戮, 豈有悔哉?
然此可爲智者道, 難爲俗人言也。且負下未易居, 下流多謗議. 僕以口語遇遭此禍, 重爲鄕里所戮笑, 以汗辱先人, 亦何面目復上父母丘墓乎? 雖累百世, 垢彌甚耳。是以腸一日而九迴, 居則忽忽若有所亡, 出則不知其所往。每念斯恥, 汗未嘗不發背沾衣也。身直爲閨閤之臣, 寧得自引於深藏岩穴邪? 故且從俗浮沈, 與時俯仰, 以通其狂惑。今少卿乃敎以推賢進士, 無乃與僕私心刺謬乎? 今雖欲自雕琢曼辭以自飾, 無益於俗, 不信, 適足取辱耳. 要之, 死日然後是非乃定. 書不能悉意,
略陳固陋, 謹再拜. <古文觀止 卷5. > <文選 卷第41>
저는 마음 속으로 불손하게도 능하지도 못한 글에 스스로를 맡겨, 천하에 없어진 옛 일들을 망라하여 행해진 일들을 대략 고증하고 시작과 결말을 종합하여 성공과 실패, 흥성함과 쇠망함의 이치를 검토하였습니다.
위로는 헌원(軒轅)에서 아래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표〉 10편, 〈본기〉 12편, 〈서〉 8장, 〈세가〉 30편, 〈열전〉 70편 등 총 130편을 지어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一家)의 학설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초고가 아직 이루어지기도 전에 이런 재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일을 다 완성하지 못한 것을 애석히 여겨 비록 극형을 당했으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저는 진실로 이 책을 저술하여 여러 명산(名山)에 보관했다가 내 뜻을 알아줄 사람들에게 전해 고을과 도시에 널리 알리고자 하기 때문이며, 그렇게 되면 제가 이전에 받았던 모욕에 대한 질책을 보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몇 만 번 모욕을 당한다 해도 어찌 후회하겠습니까!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이러한 말을 할 수 있지만, 일반 사람에게는 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죄를 지은 몸이라 처신하기가 쉽지 않고 , 하류층의 사람들은 비방을 많이 받습니다. 제가 말로 인해 이렇게 화를 당하고 마을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 조상을 욕되게 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가겠습니까?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수치만 더 심해질 뿐입니다. 이런 까닭에 하루에도 수없이 애간장이 타고, 집에 있으면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처럼 망연자실하며, 문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 할 지를 모릅니다. 항상 이러한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려내려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몸이 환관과 같은 신하가 되었으니, 어찌 스스로 은거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잠시 세상의 부침을 따르고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여 광란과 미혹에 빠진 사람들과 교유하고 있습니다. 지금 소경께서는 저에게 현인을 추천하고 선비를 천거하라고 하셨는데, 이는 제 마음 속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비록 제가 미사여구로 제 자신을 수식한다 해도 세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사람들도 불신할 것이니, 도리어 스스로 부끄러움을 취하게 될 뿐입니다. 결국 죽은 후에나 옳고 그름이 판정될 것입니다. 글로써는 저의 생각을 다 쓸 수 없지만, 고루한 생각을 간략하게 적으며, 삼가 재배 드립니다.
名山 : 서부(書府). 고대 제왕들의 서적을 보관하는 부서. 閨閤之臣 : 궁중에서, 잠자리를 돌보아 주는 신하를 이르던 말. 환관.
刺謬 : 서로 어긋나거나 모순됨. 雕琢 : 문구(文句)를 지나치게 수식하다.
[해설]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 또는 보임안서(報任安書)는 고문관지 및 문선(文選)에 실려 있으며 한(漢)나라의 사학가인 사마천(司馬遷)이 친구인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이다. 임안(任安)은 자(字)가 소경(少卿)으로 한 무제(漢 武帝) 때 익주자사(益州刺史)와 북군사자호군(北軍使者護軍)을 역임하였으며, 여태자(戾太子) 유거(劉據)의 무고(巫蠱) 사건으로 하옥되었었다. 한 무제(漢 武帝) 천한(天漢) 2년(기원전 99년), 이광의 손자인 이릉(李陵)이 흉노를 토벌하러 나갔다가 흉노에게 항복하였다. 사마천은 이릉(李陵)이 항복한 후 무제(武帝)에게 이릉을 변호하다가 궁형에 처해졌다. 궁형의 치욕스런 형벌을 받고 다시 태사령이 되어 사기를 완성시킬 무렵 옛 친구 임안이 황제와 태자간의 무고(巫蠱)의 난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게 되자, 사마천이 친구인 임안에게 답장으로 보낸 개인적인 편지로 임안에 대한 걱정과 자신이 궁형을 받게 된 과정을 한탄하며 쓴 편지이다.
임안(任安)은 한 무제(漢 武帝) 때 사마천(司馬遷)의 벗으로 자(字)가 소경(少卿)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빈곤하였으며 위청(衛青)장군의 가신이 되어 전인(田仁)을 만났으며 전인과 함께 한 무제의 낭관으로 발탁된 후 임안은 익주자사(益州刺史)가 되고 전인은 승상의 장사(長史)가 되었다. 그 후 태자(太子) 유거(劉據)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사형 당했다. <史記列傳 권104. 田叔列傳>
☞司馬遷
그는 BC 140~110년 한(漢)의 조정에서 태사령(太史令)을 지낸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사령이란 천문관측, 달력의 개편, 국가 대사(大事)와 조정 의례(儀禮)의 기록 등을 맡는 직책이었다. 사마천은 젊어서 여러 지역을 여행한 뒤에 조정의 관리가 되었고, BC 111년 중국 남서부지방의 군사원정에 참여했다.
BC 110년 황제가 국가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례인 봉선(封禪)을 거행하기 위해 타이 산[泰山]으로 갈 때 수행원의 자격으로 따라갔다. 그해 아버지가 죽었고, 의무적인 상례기간이 지난 후인 BC 10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었다.
BC 105년 무제(武帝)의 즉위가 한나라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중국 달력의 개편이 이루어지게 되어 사마천이 이 작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이었던, 중국 역사서의 집필에 착수했다. 역사서 집필에 대한 열망은 무제의 통치하에서 중국의 발전이 절정기에 달했으므로, 그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해서 후손들에게 남겨주어야겠다는 믿음으로 인해 한층 강해졌다. 그러나 역사서를 완성하기도 전에 당시 평판이 나쁘던 이릉(李陵) 장군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황제 비방혐의로 심문을 당했다. 무제가 그를 죽이기에는 아까운 인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마천 자신이 역사서를 완성하기 위해 처형의 연기를 간청했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처형되는 대신 궁형(宮刑:去勢刑)을 선고받았다. 훗날 무제의 화가 누그러지자 다시 황실의 총애를 받아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그러나 자기가 당한 치욕을 잊지 못한 채 은퇴해서 역사서 완성에 몰두했다.
〈사기〉는 그에게 커다란 명성을 가져다준 책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많은 역사서가 있었으며, 궁정의 연대기 기록은 이미 이전의 황실에서는 관행으로 되어 있었다. 작은 제후국이었던 노(魯)의 〈춘추 春秋〉가 그러한 종류이다. 공자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 이 책은 기록된 사건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어 유교 경전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역사서인 〈사기〉가 이 위대한 경전 〈춘추〉와는 전혀 비교될 수조차 없으며, 자신은 공자와 같은 창작자가 아니라 단지 과거의 사실들을 전달하는 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한의 역사가로서 그의 뒤를 이은 반고(班固:32경~92)는 사마천이 여러 학파의 주장을 마음대로 이용하고 도가사상에 몰두한 점을 비난했다. 그러나 반고 및 그의 동시대인들이 당연한 규범으로 받아들였던 유교적 도덕기준은 사마천의 시기에는 반고의 시대(1세기경)와 같은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사마천은 자신과 동시대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학파를 절충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국교(國敎) 혹은 널리 통용되는 도덕적·정치적 기준이 아직은 유동적인 상태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주술적·초자연적인 힘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내린 도덕적 평가는 어느 하나의 일관된 이론에 부합될 수 없었다.
〈사기〉에서 그의 주된 업적은 과거의 복잡한 사건들을 질서정연하게 기술했다는 점이다(역사학). 그가 서술한 과거의 사실들은 대부분 각자의 연대기를 따로 가지고 있던 많은 독립적인 제후국에서 유래하는, 서로 모순되는 자료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과거의 사실들을 이전의 역사가들처럼 단순히 연대순으로 정리하지 않고 5부분으로 분류하여 기술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5부분 가운데 본기(本紀)는 당시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왕실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중심으로 하여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다. 표(表)는 연표(年表)인데 여러 독립적인 제후국들의 복잡한 역사를 명확하게 밝혀 어떤 시기에 각 제후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다. 각 제후국의 상세한 역사는 세가(世家)에 기록되어 있다.
서(書)에는 행정의 중요한 측면들을 다루었다. 이들 부분으로부터 그가 유교의 도덕적 이론을 신봉하는 사람들보다는, 당시 점점 중앙집권화되고 있던 조정에서 새로운 정책을 추구하던 실제적·개혁지향적인 정치가들을 더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끝부분은 열전(列傳)으로 다양한 유형의 유명 인물들의 전기를 다루었다. 여기에 선정된 인물들은 여러 가지 유형의 행위에 있어서 본보기가 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열전에는 여러 이민족에 관한 사항도 포함되어 있는데, 중국과 이들 이민족 간의 관계는 무제 때 점점 더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사기〉는 뒷날 기타 왕조사(正史)의 모범이 되기는 했지만, 다른 정사와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사기〉는 다루고 있는 시대가 훨씬 긴데, 사마천 이후의 역사가들은 이 책에서처럼 인류의 전역사를 다루려는 시도를 한 경우가 드물었다. 또한 책을 저술하기 위해 모은 자료도 훨씬 다양했다. 그는 진(秦)·한(漢)의 황실 문헌뿐만 아니라 그보다 이전에 나온 여러 역사서, 제후국들의 궁정 연대기, 경전이나 제자백가의 저술 등의 기록을 모았다. 심지어 역사적인 사실에 어느 정도 근거한 가공의 이야기까지도 자료로 이용했다.
이 책의 주제는 후기의 역사서들처럼 궁정 중심의 정치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훨씬 폭넓은 사회계층을 다루어 대부호·상인·협객·비적떼·배우·총신(寵臣)과 훌륭하거나 혹은 그렇지 못한 관리 등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그는 객관적인 역사를 구성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 역사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교훈적인 역사를 고집해 자신이 서술하고 있는 역사상의 인물들에게 도덕적인 평가를 내렸다.
또 다루고 있는 인물들을 특징에 따라 유형화해 어떤 인물의 본보기가 될 만한 행동을 한 장(章)에서 기록했는가 하면, 동일한 인물의 잘못된 행동을 다른 장에 기록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그가 역사에서 이끌어낸 교훈은 다양한 것이었는데,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것들도 많았다. 그러나 사료(史料)에 대한 그의 비판적 안목이야말로 훨씬 더 주목할 만하다. 그는 각 장의 끝부분에 예리한 비판적 논평을 첨가했다.
그는 역사가로서 뿐만 아니라 생동감있고 유연한 산문의 거장으로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후대의 작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초기 설화문학이나 소설에 미친 영향이 컸다. 그가 살던 시대 이래로 〈사기〉는 줄곧 중국 역사서의 걸작으로 인정받아왔으며, 훗날 중국 역사서의 본보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은 물론이고 중국 문학적 전통의 영향을 받았던 여러 나라에서도 역사서의 모범으로 인식되어왔다. [다음백과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