蒙恬列傳
蒙恬者,其先齊人也。恬大父蒙驁,自齊事秦昭王,官至上卿。秦莊襄王元年,蒙驁為秦將,伐韓,取成皋、滎陽,作置三川郡。二年,蒙驁攻趙,取三十七城。始皇三年,蒙驁攻韓,取十三城。五年,蒙驁攻魏,取二十城,作置東郡。始皇七年,蒙驁卒。驁子曰武,武子曰恬。恬嘗書獄典文學。始皇二十三年,蒙武為秦裨將軍,與王翦攻楚,大破之,殺項燕。二十四年,蒙武攻楚,虜楚王。蒙恬弟毅。
始皇二十六年,蒙恬因家世得為秦將,攻齊,大破之,拜為內史。秦已并天下,乃使蒙恬將三十萬眾北逐戎狄,收河南。筑長城,因地形,用制險塞,起臨洮,至遼東,延袤萬餘里。於是渡河,據陽山,逶蛇而北。暴師於外十餘年,居上郡。是時蒙恬威振匈奴。始皇甚尊寵蒙氏,信任賢之。而親近蒙毅,位至上卿,出則參乘,入則御前。恬任外事而毅常為內謀,名為忠信,故雖諸將相莫敢與之爭焉。
趙高者,諸趙疏遠屬也。趙高昆弟數人,皆生隱宮,其母被刑僇,世世卑賤。秦王聞高彊力,通於獄法,舉以為中車府令。高既私事公子胡亥,喻之決獄。高有大罪,秦王令蒙毅法治之。毅不敢阿法,當高罪死,除其宦籍。帝以高之敦於事也,赦之,復其官爵。
始皇欲游天下,道九原,直抵甘泉,乃使蒙恬通道,自九原抵甘泉,塹山堙谷,千八百里。道未就。
始皇三十七年冬,行出游會稽,并海上,北走瑯邪。道病,使蒙毅還禱山川,未反。
始皇至沙丘崩,祕之,群臣莫知。是時丞相李斯、公子胡亥、中車府令趙高常從。高雅得幸於胡亥,欲立之,又怨蒙毅法治之而不為己也。因有賊心,乃與丞相李斯、公子胡亥陰謀,立胡亥為太子。太子已立,遣使者以罪賜公子扶蘇、蒙恬死。扶蘇已死,蒙恬疑而復請之。使者以蒙恬屬吏,更置。胡亥以李斯舍人為護軍。使者還報,胡亥已聞扶蘇死,即欲釋蒙恬。趙高恐蒙氏復貴而用事,怨之。
毅還至,趙高因為胡亥忠計,欲以滅蒙氏,乃言曰:「臣聞先帝欲舉賢立太子久矣,而毅諫曰『不可』。若知賢而俞弗立,則是不忠而惑主也。以臣愚意,不若誅之。」胡亥聽而系蒙毅於代。前已囚蒙恬於陽周。喪至咸陽,已葬,太子立為二世皇帝,而趙高親近,日夜毀惡蒙氏,求其罪過,舉劾之。
子嬰進諫曰:「臣聞故趙王遷殺其良臣李牧而用顏聚,燕王喜陰用荊軻之謀而倍秦之約,齊王建殺其故世忠臣而用后勝之議。此三君者,皆各以變古者失其國而殃及其身。今蒙氏,秦之大臣謀士也,而主欲一旦棄去之,臣竊以為不可。臣聞輕慮者不可以治國,獨智者不可以存君。誅殺忠臣而立無節行之人,是內使群臣不相信而外使鬬士之意離也,臣竊以為不可。」
胡亥不聽。而遣御史曲宮乘傳之代,令蒙毅曰:「先主欲立太子而卿難之。今丞相以卿為不忠,罪及其宗。朕不忍,乃賜卿死,亦甚幸矣。卿其圖之!」毅對曰:「以臣不能得先主之意,則臣少宦,順幸沒世。可謂知意矣。以臣不知太子之能,則太子獨從,周旋天下,去諸公子絕遠,臣無所疑矣。夫先主之舉用太子,數年之積也,臣乃何言之敢諫,何慮之敢謀!非敢飾辭以避死也,為羞累先主之名,願大夫為慮焉,使臣得死情實。且夫順成全者,道之所貴也;刑殺者,道之所卒也。昔者秦穆公殺三良而死,罪百里奚而非其罪也,故立號曰『繆』。昭襄王殺武安君白起。楚平王殺伍奢。吳王夫差殺伍子胥。此四君者,皆為大失,而天下非之,以其君為不明,以是籍於諸侯。故曰『用道治者不殺無罪,而罰不加於無辜』。唯大夫留心!」使者知胡亥之意,不聽蒙毅之言,遂殺之。
二世又遣使者之陽周,令蒙恬曰:「君之過多矣,而卿弟毅有大罪,法及內史。」恬曰:「自吾先人,及至子孫,積功信於秦三世矣。今臣將兵三十餘萬,身雖囚系,其勢足以倍畔,然自知必死而守義者,不敢辱先人之教,以不忘先主也。昔周成王初立,未離襁緥周公旦負王以朝,卒定天下。及成王有病甚殆,公旦自揃其爪以沈於河,曰:『王未有識,是旦執事。有罪殃,旦受其不祥。』乃書而藏之記府,可謂信矣。及王能治國,有賊臣言:『周公旦欲為亂久矣,王若不備,必有大事。』王乃大怒,周公旦走而奔於楚。成王觀於記府,得周公旦沈書,乃流涕曰:『孰謂周公旦欲為亂乎!』殺言之者而反周公旦。故《周書》曰『必參而伍之』。今恬之宗,世無二心,而事卒如此,是必孽臣逆亂,內陵之道也。夫成王失而復振則卒昌;桀殺關龍逢,紂殺王子比干而不悔,身死則國亡。臣故曰過可振而諫可覺也。察於參伍,上聖之法也。凡臣之言,非以求免於咎也,將以諫而死,願陛下為萬民思從道也。」使者曰:「臣受詔行法於將軍,不敢以將軍言聞於上也。」蒙恬喟然太息曰:「我何罪於天,無過而死乎?」良久,徐曰:「恬罪固當死矣。起臨洮屬之遼東,城塹萬餘里,此其中不能無絕地脈哉?此乃恬之罪也。」乃吞藥自殺。
評價
太史公曰:吾適北邊,自直道歸,行觀蒙恬所為秦筑長城亭障,塹山堙谷,通直道,固輕百姓力矣。夫秦之初滅諸侯,天下之心未定,痍傷者未瘳,而恬為名將,不以此時彊諫,振百姓之急,養老存孤,務修眾庶之和,而阿意興功,此其兄弟遇誅,不亦宜乎!何乃罪地脈哉?
몽염(蒙恬)은 그 선조가 제(齊) 사람이다. 몽염의 할아버지 몽오(蒙驁)가 제에서 진(秦) 소왕(昭王)을 섬기니 벼슬은 상경(上卿)에 이르렀다.
진 장양왕(莊襄王) 원년, 몽오는 진의 장수가 되어 한(韓)을 토벌하여 성고(成皐)와 형양(滎陽)을 빼앗고 삼천군(三川郡) 설치했다. 장양왕 2년, 몽오는 조(趙)를 공격하여 37개 성을 취했다.
시황(秦始皇) 3년, 몽오가 한을 공격하여 13개의 성을 취했다. 5년, 몽오는 위(魏)를 공격하여 20개의 성을 취하고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시황 7년, 몽오가 죽었다. 오의 아들은 무(武)이고, 무의 아들이 염(恬)이다. 몽염은 일찍이 형법을 배워 형옥과 관련한 문서를 관장했다. 시황 23년, 몽무(蒙武)는 진의 비장군(裨將軍)이 되어 왕전(王剪)과 함께 초(楚)를 공격하여 대파하고 항연(項燕)을 죽였다. 24년, 몽무는 초를 공격하여 초왕(楚王)을 사로잡았다. 몽염의 동생은 의(毅)이다.
<몽염의 행적>
시황 26년, 몽염은 집안으로 인해 진의 장군이 되었고, 제를 공격하여 대파하니 내사(內史)에 임명되었다. 진이 천하를 합병하자 곧 몽염에게 30만 무리를 이끌고 북으로 융적(戎狄)을 내쫓고, 하남(河南)을 수습하여 장성을 쌓게 했다. 지형에 따라 험준한 곳을 통제할 수 있게 쌓았는데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요동(遼東)에 이르기까지 만여 리에 걸쳐 있었다. 그리하여 황하를 건너 양산(陽山)을 거점으로 하여 구불구불 북으로 나아갔다. 10년 넘게 군대는 외지를 전전하다 상군(上郡)에 주둔하기에 이르렀고, 이 무렵 몽염의 위세는 흉노를 떨게 했다.
시황은 몽씨 집안을 몹시 존중하고 총애하여 믿고 유능하게 여겼다. 그리고 몽의를 가까이 했는데, 지위가 상경에 이르러 나가면 수레를 함께 타고 들어오면 곁에서 모셨다. 몽염은 바깥일을 맡았고, 몽의는 늘 안에서 계책을 내는 등 충성과 신의로 유명했다. 이 때문에 장상들이라도 감히 그들과 다투려하지 않았다.
조고(趙高)는 조씨 가문의 먼 친속이었다. 조고의 형제 몇 사람은 모두 은궁(隱宮)에서 태어났다. 그 어머니는 형벌을 받았고, 대대로 비천했다. 진왕은 조고가 능력있고 형법에 정통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중거부령(中車府令)으로 삼았다.
조고는 개인적으로 공자 호해(胡亥)를 섬기며 그에게 판결 등을 가르쳤다. 조고가 큰 죄를 짓자 진왕은 몽의에게 법에 따라 다스리게 했다. 몽의는 감히 법을 어기지 못해 조고의 죄를 사형으로 판결하고 그 관적을 없앴다. 황제는 조고가 열심히 일했다고 하여 용서하고 관작을 복구시켰다.
시황이 천하를 순시하기 위해 구원(九原)을 거쳐 곧바로 감천(甘泉)까지 가려고 했다. 이에 몽염에게 길을 뚫게 하니 구원에서 감천까지 산을 깎고 계곡을 메우니 1,800리에 이르렀다. 그러나 길은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
시황 37년 겨울, 순수 길에 나서 회계(會稽)를 순시하고 바다를 따라 북상하여 낭야(琅邪)로 가던 도중 병이 났다. 몽의에게 돌아와 산천에 기도를 드리라 했으나 (몽의는) 돌아오지 못했다.
시황이 사구(沙丘)에서 죽었으나 비밀에 붙였으므로 신하들은 몰랐다. 이 때 승상 이사, 공자 호해, 중거부령 조고가 수행하고 있었다. 조고는 호해의 총애를 받아 왔기 때문에 호해를 옹립하고 싶었다. 또 몽의가 자신을 위하지 않고 법대로 죄를 다스린 것에 원한을 품고 그를 해치려는 마음이 있었으므로 승상 이사, 공자 호해와 음모를 꾸며 호해를 태자로 세웠다.
태자로 옹립되자 사신을 보내 죄를 꾸며 공자 부소(扶蘇)와 몽염에게 죽음을 내렸다. 부소는 죽었으나 몽염은 의심을 품고 다시 밝혀주길 청했다. 사신은 몽염을 관리에게 넘기고 (몽염을) 다른 곳으로 압송했다. 호해는 이사의 사인에게 군을 감독하게 했다. 사신이 돌아와 보고하자 호해는 부소가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고 몽염을 풀어주려 했다. 조고는 몽씨가 다시 귀하게 되어 정권을 잡아 자신에게 원한을 가질까 두려워했다.
몽의가 돌아오자 조고는 호해를 위해 충성스러운 계책을 내는 척하면서 몽씨를 없애버리고자 이렇게 말했다.
“신이 듣기에 선제께서는 오랫동안 유능한 아들을 태자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몽의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유능한 줄 알고도 더더욱 옹립하지 않았으니 이는 불충이자 군주를 가리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를 죽이느니만 못합니다.”
호해는 이 말을 듣고 몽의를 대(代)에다 가두었다. 이에 앞서 몽염은 이미 양주(陽周)에 갇혔다. 운구가 함양(咸陽)에 이르러 장례가 끝나자 태자가 2세 황제로 즉위했다. 그리고 조고는 측근으로 낮밤으로 몽씨를 비방하고 그 죄과를 들추어내서 탄핵하고 나섰다. 자영(子嬰)이 나서 이렇게 간했다.
“신이 듣기에 옛날 조왕(趙王) 천(遷)은 그의 훌륭한 신하 이목(李牧)을 죽이고 안추(顔聚)를 기용했고, 연왕(燕王) 희(喜)는 은밀히 형가(荊軻)의 계책에 따라 진(秦)과의 약속을 저버렸으며, 제왕(齊王) 건(建)은 옛 충신들을 죽이고 후승(后勝)의 건의를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이 세 군주는 모두 각자 옛것을 바꾸었다가 나라를 잃고 그 몸에 재앙이 닥쳤습니다. 지금 몽씨는 진의 대신이자 모사입니다. 주상께서 하루아침에 이들을 제거하려 하신다는데, 신이 가만히 생각하기에 안 됩니다. 신이 듣기에 경솔하게 생각해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고, 혼자 지혜로워서는 군주를 보전할 수 없습니다. 충신을 죽이고 절조 없는 사람을 세운다면 이는 안으로는 신하들을 서로 못 믿게 만들고, 밖으로는 전사의 심기를 흩어놓는 것이니, 신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호해는 듣지 않았다. 그리고 어사 곡궁(曲宮)에게 역마를 타고 대(代)로 가서는 몽의에게 “선주께서 태자를 세우려 하셨을 때 경은 나를 난처하게 했다. 지금 승상이 경을 불충하다고 여겨 가족에게까지 죄를 물으려 한다. 짐은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어 경에게만 죽음을 내리니 잘 생각하기 바란다”라고 전하게 했다.
몽의가 대답해 말했다.
“신이 선주의 뜻을 몰랐다고 하시지만 신은 젊었을 때부터 벼슬을 하여 선주의 뜻에 따르며 돌아가실 때까지 사랑을 받았으니 그 뜻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신이 태자의 영명함을 몰랐다고 하나 오로지 태자만이 선주를 따라 천하를 두루 순시한 것은 다른 공자들을 훨씬 앞질렀다는 것으로 신은 이를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선주께서 태자를 세우려 하신 것은 몇 년에 걸친 생각인데 신이 감히 무슨 말씀을 올릴 것이며 어찌 감히 다른 생각을 먹겠습니까? 감히 말을 꾸며서 죽음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주의 이름에 부끄러움을 더할까 해서이니 대부께서는 잘 생각하시어 신이 제대로 죽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순리에 따라 생명을 보전하는 것은 정도로서 귀하게 여기만 반면 형벌로 죽는 것은 정도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옛날 진(秦) 목공(穆公)은 어진 신하 셋을 죽였고, 백리해(百里奚)에게도 벌을 내렸지만 그의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목(穆)'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소양왕(昭襄王)은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를 죽였고, 초 평왕(平王)은 오사(伍奢)를 죽였고,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오자서(伍子胥)를 죽였습니다. 이들 네 군주는 모두 큰 실수를 했기에 천하가 옳지 않다고 여겼고 현명치 못한 군주로서 제후들 사이에 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정도로 다스리는 자는 죄없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무고한 사람에 벌을 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대부께서는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사신은 호해의 뜻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몽의의 말을 듣지 않고 끝내 그를 죽였다.
2세는 다시 사자를 양주로 보내 몽염에게 “그대의 잘못이 많고, 경의 동생 몽의도 큰 죄를 지었으니 법이 내사 그대에게도 미친다”라고 전했다. 몽염이 이렇게 말했다.
“저의 선조로부터 자손에 이르기까지 진에 쌓은 공과 신의가 3대에 이릅니다. 지금 신은 30만이 넘는 군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몸이 비록 갇혀 있긴 하지만 그 세는 배반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신의를 지키는 것은 선조의 가르침을 욕되게 할 수 없고 선주를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 주 성왕(成王)이 막 즉위하여 강보(襁褓)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주공(周公) 단(旦)이 왕을 업고 조정에 임하여 끝내 천하를 평정했습니다. 성왕이 병에 나서 위태로워지자 주공 단은 자신의 손톱을 잘라 황하에 던지면서 ‘왕께서 아직 아는 것이 없어 이 단이 일을 맡았습니다. 죄가 있어 벌을 내리시려거든 이 단이 그것을 받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글로 써서 문서 창고에 보관하니, 이런 것이 충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왕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되자 어떤 간신이 ‘주공 단이 반란을 꾀한 지 오래입니다. 왕께서 대비하지 않으시면 틀림없이 큰일이 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성왕이 대노하자 주공 단은 도망쳐 초로 달아났습니다. 성왕이 문서 창고를 보다가 주공 단이 황하에 가라앉혔던 글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누가 주공 단이 반란을 꾀한다고 했던가’라며 그 말을 한 자를 죽이고 주공 단을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주서(周書)』에서는 ‘반드시 백방으로 자문하고 살펴라’고 했던 것입니다. 지금 이 몽염의 종족은 대대로 두 마음을 먹지 않았는데 일이 갑자기 이렇게 된 것은 틀림없이 간신이 혼란을 부추겨 안으로 주상을 기망하려는 것입니다. 저 성왕은 실수했지만 다시 떨치고 일어나 끝내 번창했고, 걸(桀)은 관용봉(關龍逢)을, 주(紂)는 왕자 비간(比干)을 죽이고도 뉘우치지 않았기에 몸은 죽고 나라는 망했던 것입니다. 신이 이 때문에 잘못은 바로잡아야 하고 간언은 깨달아야 하며, 백방으로 자문하고 살피는 것이 성왕의 법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이 드리는 말씀은 허물을 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충언을 드리고 죽고자 할 뿐입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만민을 위하여 정도를 따르십시오!”
사신은 “신은 조서를 받들어 장군에게 법을 집행할 뿐 장군의 말씀을 주상에게 감히 전할 수는 없소이다”라고 했다. 몽염이 크게 탄식하며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잘못도 없이 죽는다 말인가”라고 했다. 한참을 있다가 천천히 “몽염의 죄가 죽어 마땅하다. 임조에서 공사를 일으켜 요동에 이르기까지 성을 만여 리나 쌓으면서 어찌 지맥을 끊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바로 몽염의 죄로다”라 하고는 바로 약을 삼키고 자살했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북쪽 변방에 갔다가 직도(直道)로 돌아왔는데, 길을 가면서 몽염이 진을 위해 쌓은 장성의 보루를 보니 산을 깎고 골짜기 메워 직도로 통하게 했다. 정말이지 백성의 힘을 가벼이 여긴 것이다. 대저 진이 제후들을 다 없앤 초기에는 천하의 민심이 아직 안정되지 못했고 상처 입은 사람들은 낫지 않았다. 몽염은 명장으로서 이 때 강력하게 간하여 백성의 급한 일을 돕고 노인과 고아들을 돌보면서 백성이 평안하게 지낼 수 있게 힘을 쓰지 않고 오히려 (황제의) 뜻에 맞추어 큰 공사를 일으켰으니 그 형제가 죽임을 당한 것도 마땅하지 않겠는가? 어찌 지맥 끊은 죄를 운운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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