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中國歷史와文學/史記列傳

史記 卷八九. 張耳陳餘列傳

by 柳川 2019. 6. 2.

                                       張耳陳餘列傳


張耳者,大梁人也。其少時,及魏公子毋忌為客。張耳嘗亡命游外黃。外黃富人女甚美,嫁庸奴,亡其夫,去抵父客。父客素知張耳,乃謂女曰:「必欲求賢夫,從張耳。」女聽,乃卒為請決,嫁之張耳。張耳是時脫身游,女家厚奉給張耳,張耳以故致千里客。乃宦魏為外黃令。名由此益賢。陳餘者,亦大梁人也,好儒術,數游趙苦陘。富人公乘氏以其女妻之,亦知陳餘非庸人也。餘年少,父事張耳,兩人相與為刎頸交。

秦之滅大梁也,張耳家外黃。高祖為布衣時,嘗數從張耳游,客數月。秦滅魏數歲,已聞此兩人魏之名士也,購求有得張耳千金,陳餘五百金。張耳、陳餘乃變名姓,俱之陳,為里監門以自食。兩人相對。里吏嘗有過笞陳餘,陳餘欲起,張耳躡之,使受笞。吏去,張耳乃引陳餘之桑下而數之曰:「始吾與公言何如?今見小辱而欲死一吏乎?」陳餘然之。秦詔書購求兩人,兩人亦反用門者以令里中。

陳涉起蘄,至入陳,兵數萬。張耳、陳餘上謁陳涉。涉及左右生平數聞張耳、陳餘賢,未嘗見,見即大喜。

陳中豪傑父老乃說陳涉曰:「將軍身被堅執銳,率士卒以誅暴秦,復立楚社稷,存亡繼絕,功德宜為王。且夫監臨天下諸將,不為王不可,願將軍立為楚王也。」陳涉問此兩人,兩人對曰:「夫秦為無道,破人國家,滅人社稷,絕人後世,罷百姓之力,盡百姓之財。將軍瞋目張膽,出萬死不顧一生之計,為天下除殘也。今始至陳而王之,示天下私。願將軍毋王,急引兵而西,遣人立六國後,自為樹黨,為秦益敵也。敵多則力分,與眾則兵彊。如此野無交兵,縣無守城,誅暴秦,據咸陽以令諸侯。諸侯亡而得立,以德服之,如此則帝業成矣。今獨王陳,恐天下解也。」陳涉不聽,遂立為王。

陳餘乃復說陳王曰:「大王舉梁、楚而西,務在入關,未及收河北也。臣嘗游趙,知其豪桀及地形,願請奇兵北略趙地。」於是陳王以故所善陳人武臣為將軍,邵騷為護軍,以張耳、陳餘為左右校尉,予卒三千人,北略趙地。

武臣等從白馬渡河,至諸縣,說其豪桀曰:「秦為亂政虐刑以殘賊天下,數十年矣。北有長城之役,南有五嶺之戍,外內騷動,百姓罷敝,頭會箕斂,以供軍費,財匱力盡,民不聊生。重之以苛法峻刑,使天下父子不相安。陳王奮臂為天下倡始,王楚之地,方二千里,莫不響應,家自為怒,人自為鬬,各報其怨而攻其讎,縣殺其令丞,郡殺其守尉。今已張大楚,王陳,使吳廣、周文將卒百萬西擊秦。於此時而不成封侯之業者,非人豪也。諸君試相與計之!夫天下同心而苦秦久矣。因天下之力而攻無道之君,報父兄之怨而成割地有土之業,此士之一時也。」豪桀皆然其言。乃行收兵,得數萬人,號武臣為武信君。下趙十城,餘皆城守,莫肯下。

乃引兵東北擊范陽。范陽人蒯通說范陽令曰:「竊聞公之將死,故弔。雖然,賀公得通而生。」范陽令曰:「何以弔之?」對曰:「秦法重,足下為范陽令十年矣,殺人之父,孤人之子,斷人之足,黥人之首,不可勝數。然而慈父孝子莫敢倳刃公之腹中者,畏秦法耳。今天下大亂,秦法不施,然則慈父孝子且倳刃公之腹中以成其名,此臣之所以弔公也。今諸侯畔秦矣,武信君兵且至,而君堅守范陽,少年皆爭殺君,下武信君。君急遣臣見武信君,可轉禍為福,在今矣。」

范陽令乃使蒯通見武信君曰:「足下必將戰勝然後略地,攻得然後下城,臣竊以為過矣。誠聽臣之計,可不攻而降城,不戰而略地,傳檄而千里定,可乎?」武信君曰:「何謂也?」蒯通曰:「今范陽令宜整頓其士卒以守戰者也,怯而畏死,貪而重富貴,故欲先天下降,畏君以為秦所置吏,誅殺如前十城也。然今范陽少年亦方殺其令,自以城距君。君何不齎臣侯印,拜范陽令,范陽令則以城下君,少年亦不敢殺其令。令范陽令乘朱輪華轂,使驅馳燕、趙郊。燕、趙郊見之,皆曰此范陽令,先下者也,即喜矣,燕、趙城可毋戰而降也。此臣之所謂傳檄而千里定者也。」武信君從其計,因使蒯通賜范陽令侯印。趙地聞之,不戰以城下者三十餘城。

至邯鄲,張耳、陳餘聞周章軍入關,至戲卻;又聞諸將為陳王徇地,多以讒毀得罪誅,怨陳王不其筴不以為將而以為校尉。乃說武臣曰:「陳王起蘄,至陳而王,非必立六國後。將軍今以三千人下趙數十城,獨介居河北,不王無以填之。且陳王聽讒,還報,恐不脫於禍。又不如立其兄弟;不,即立趙後。將軍毋失時,時閒不容息。」武臣乃聽之,遂立為趙王。以陳餘為大將軍,張耳為右丞相,邵騷為左丞相。

使人報陳王,陳王大怒,欲盡族武臣等家,而發兵擊趙。陳王相國房君諫曰:「秦未亡而誅武臣等家,此又生一秦也。不如因而賀之,使急引兵西擊秦。」陳王然之,從其計,徙系武臣等家宮中,封張耳子敖為成都君。

陳王使使者賀趙,令趣發兵西入關。張耳、陳餘說武臣曰:「王王趙,非楚意,特以計賀王。楚已滅秦,必加兵於趙。願王毋西兵,北徇燕、代,南收河內以自廣。趙南據大河,北有燕、代,楚雖勝秦,必不敢制趙。」趙王以為然,因不西兵,而使韓廣略燕,李良略常山,張黡略上黨。

韓廣至燕,燕人因立廣為燕王。趙王乃與張耳、陳餘北略地燕界。趙王閒出,為燕軍所得。燕將囚之,欲與分趙地半,乃歸王。使者往,燕輒殺之以求地。張耳、陳餘患之。有廝養卒謝其舍中曰:「吾為公說燕,與趙王載歸。」舍中皆笑曰:「使者往十餘輩,輒死,若何以能得王?」乃走燕壁。燕將見之,問燕將曰:「知臣何欲?」燕將曰:「若欲得趙王耳。」曰:「君知張耳、陳餘何如人也?」燕將曰:「賢人也。」曰:「知其志何欲?」曰:「欲得其王耳。」趙養卒乃笑曰:「君未知此兩人所欲也。夫武臣、張耳、陳餘杖馬箠下趙數十城,此亦各欲南面而王,豈欲為卿相終己邪?夫臣與主豈可同日而道哉,顧其勢初定,未敢參分而王,且以少長先立武臣為王,以持趙心。今趙地已服,此兩人亦欲分趙而王,時未可耳。今君乃囚趙王。此兩人名為求趙王,實欲燕殺之,此兩人分趙自立。夫以一趙尚易燕,況以兩賢王左提右挈,而責殺王之罪,滅燕易矣。」燕將以為然,乃歸趙王,養卒為御而歸。

李良已定常山,還報,趙王復使良略太原。至石邑,秦兵塞井陘,未能前。秦將詐稱二世使人遺李良書,不封,曰:「良嘗事我得顯幸。良誠能反趙為秦,赦良罪,貴良。」良得書,疑不信。乃還之邯鄲,益請兵。未至,道逢趙王姊出飲,從百餘騎。李良望見,以為王,伏謁道旁。王姊醉,不知其將,使騎謝李良。李良素貴,起,慚其從官。從官有一人曰:「天下畔秦,能者先立。且趙王素出將軍下,今女兒乃不為將軍下車,請追殺之。」李良已得秦書,固欲反趙,未決,因此怒,遣人追殺王姊道中,乃遂將其兵襲邯鄲。邯鄲不知,竟殺武臣、邵騷。趙人多為張耳、陳餘耳目者,以故得脫出。收其兵,得數萬人。客有說張耳曰:「兩君羈旅,而欲附趙,難;獨立趙後,扶以義,可就功。」乃求得趙歇,立為趙王,居信都。李良進兵擊陳餘,陳餘敗李良,李良走歸章邯。

章邯引兵至邯鄲,皆徙其民河內,夷其城郭。張耳與趙王歇走入鉅鹿城,王離圍之。陳餘北收常山兵,得數萬人,軍鉅鹿北。章邯軍鉅鹿南棘原,筑甬道屬河,餉王離。王離兵食多,急攻鉅鹿。鉅鹿城中食盡兵少,張耳數使人召前陳餘,陳餘自度兵少,不敵秦,不敢前。數月,張耳大怒,怨陳餘,使張黶、陳澤往讓陳餘曰:「始吾與公為刎頸交,今王與耳旦暮且死,而公擁兵數萬,不肯相救,安在其相為死!茍必信,胡不赴秦軍俱死?且有十一二相全。」陳餘曰:「吾度前終不能救趙,徒盡亡軍。且餘所以不俱死,欲為趙王、張君報秦。今必俱死,如以肉委餓虎,何益?」張黶、陳澤曰:「事已急,要以俱死立信,安知後慮!」陳餘曰:「吾死顧以為無益。必如公言。」乃使五千人令張黶、陳澤先嘗秦軍,至皆沒。

當是時,燕、齊、楚聞趙急,皆來救。張敖亦北收代兵,得萬餘人,來,皆壁餘旁,未敢擊秦。項羽兵數絕章邯甬道,王離軍乏食,項羽悉引兵渡河,遂破章邯。章邯引兵解,諸侯軍乃敢擊圍鉅鹿秦軍,遂虜王離。涉閒自殺。卒存鉅鹿者,楚力也。

於是趙王歇、張耳乃得出鉅鹿,謝諸侯。張耳與陳餘相見,責讓陳餘以不肯救趙,及問張黶、陳澤所在。陳餘怒曰:「張黶、陳澤以必死責臣,臣使將五千人先嘗秦軍,皆沒不出。」張耳不信,以為殺之,數問陳餘。陳餘怒曰:「不意君之望臣深也!豈以臣為重去將哉?」乃脫解印綬,推予張耳。張耳亦愕不受。陳餘起如廁。客有說張耳曰:「臣聞『天與不取,反受其咎』。今陳將軍與君印,君不受,反天不祥。急取之!」張耳乃佩其印,收其麾下。而陳餘還,亦望張耳不讓,遂趨出。張耳遂收其兵。陳餘獨與麾下所善數百人之河上澤中漁獵。由此陳餘、張耳遂有卻。

趙王歇復居信都。張耳從項羽諸侯入關。漢元年二月,項羽立諸侯王,張耳雅游,人多為之言,項羽亦素數聞張耳賢,乃分趙立張耳為常山王,治信都。信都更名襄國。

陳餘客多說項羽曰:「陳餘、張耳一體有功於趙。」項羽以陳餘不從入關,聞其在南皮,即以南皮旁三縣以封之,而徙趙王歇王代。

張耳之國,陳餘愈益怒,曰:「張耳與餘功等也,今張耳王,餘獨侯,此項羽不平。」及齊王田榮畔楚,陳餘乃使夏說說田榮曰:「項羽為天下宰不平,盡王諸將善地,徙故王王惡地,今趙王乃居代!願王假臣兵,請以南皮為捍蔽。」田榮欲樹黨於趙以反楚,乃遣兵從陳餘。陳餘因悉三縣兵襲常山王張耳。張耳敗走,念諸侯無可歸者,曰:「漢王與我有舊故,而項羽又彊,立我,我欲之楚。」甘公曰:「漢王之入關,五星聚東井。東井者,秦分也。先至必霸。楚雖彊,後必屬漢。」故耳走漢。漢王亦還定三秦,方圍章邯廢丘。張耳謁漢王,漢王厚遇之。

陳餘已敗張耳,皆復收趙地,迎趙王於代,復為趙王。趙王德陳餘,立以為代王。陳餘為趙王弱,國初定,不之國,留傅趙王,而使夏說以相國守代。

漢二年,東擊楚,使使告趙,欲與俱。陳餘曰:「漢殺張耳乃從。」於是漢王求人類張耳者斬之,持其頭遺陳餘。陳餘乃遣兵助漢。漢之敗於彭城西,陳餘亦復覺張耳不死,即背漢。

漢三年,韓信已定魏地,遣張耳與韓信擊破趙井陘,斬陳餘泜水上,追殺趙王歇襄國。漢立張耳為趙王。漢五年,張耳薨,謚為景王。子敖嗣立為趙王。高祖長女魯元公主為趙王敖后。

漢七年,高祖從平城過趙,趙王朝夕袒韛蔽,自上食,禮甚卑,有子婿禮。高祖箕踞詈,甚慢易之。趙相貫高、趙午等年六十餘,故張耳客也。生平為氣,乃怒曰:「吾王孱王也!」說王曰:「夫天下豪桀并起,能者先立。今王事高祖甚恭,而高祖無禮,請為王殺之!」張敖齧其指出血,曰:「君何言之誤!且先人亡國,賴高祖得復國,德流子孫,秋豪皆高祖力也。願君無復出口。」貫高、趙午等十餘人皆相謂曰:「乃吾等非也。吾王長者,不倍德。且吾等義不辱,今怨高祖辱我王,故欲殺之,何乃汙王為乎?令事成歸王,事敗獨身坐耳。」

漢八年,上從東垣還,過趙,貫高等乃壁人柏人,要之置廁。上過欲宿,心動,問曰:「縣名為何?」曰:「柏人。」「柏人者,迫於人也!」不宿而去。

漢九年,貫高怨家知其謀,乃上變告之。於是上皆并逮捕趙王、貫高等。十餘人皆爭自剄,貫高獨怒罵曰:「誰令公為之?今王實無謀,而并捕王;公等皆死,誰白王不反者!」乃轞車膠致,與王詣長安。治張敖之罪。上乃詔趙群臣賓客有敢從王皆族。貫高與客孟舒等十餘人,皆自髡鉗,為王家奴,從來。貫高至,對獄,曰:「獨吾屬為之,王實不知。」吏治榜笞數千,刺剟,身無可擊者,終不復言。呂后數言張王以魯元公主故,不宜有此。上怒曰:「使張敖據天下,豈少而女乎!」不聽。廷尉以貫高事辭聞,上曰:「壯士!誰知者,以私問之。」中大夫泄公曰:「臣之邑子,素知之。此固趙國立名義不侵為然諾者也。」上使泄公持節問之箯輿前。仰視曰:「泄公邪?」泄公勞苦如生平驩,與語,問張王果有計謀不。高曰:「人情寧不各愛其父母妻子乎?今吾三族皆以論死,豈以王易吾親哉!顧為王實不反,獨吾等為之。」具道本指所以為者王不知狀。於是泄公入,具以報,上乃赦趙王。

上賢貫高為人能立然諾,使泄公具告之,曰:「張王已出。」因赦貫高。貫高喜曰:「吾王審出乎?」泄公曰:「然。」泄公曰:「上多足下,故赦足下。」貫高曰:「所以不死一身無餘者,白張王不反也。今王已出,吾責已塞,死不恨矣。且人臣有篡殺之名,何面目復事上哉!縱上不殺我,我不愧於心乎?」乃仰絕骯,遂死。當此之時,名聞天下。

張敖已出,以尚魯元公主故,封為宣平侯。於是上賢張王諸客,以鉗奴從張王入關,無不為諸侯相、郡守者。及孝惠、高后、文帝、孝景時,張王客子孫皆得為二千石。

張敖,高后六年薨。子偃為魯元王。以母呂后女故,呂后封為魯元王。元王弱,兄弟少,乃封張敖他姬子二人:壽為樂昌侯,侈為信都侯。高后崩,諸呂無道,大臣誅之,而廢魯元王及樂昌侯、信諸侯。孝文帝即位,復封故魯元王偃為南宮侯,續張氏。


評論[编辑]

太史公曰:張耳、陳餘,世傳所稱賢者;其賓客廝役,莫非天下俊桀,所居國無不取卿相者。然張耳、陳餘始居約時,相然信以死,豈顧問哉。及據國爭權,卒相滅亡,何鄉者相慕用之誠,後相倍之戾也!豈非以勢利交哉?名譽雖高,賓客雖盛,所由殆與大伯、延陵季子異矣。

【索隱述贊】張耳、陳餘,天下豪俊。忘年羈旅,刎頸相信。耳圍钜鹿,餘兵不進。張既望深,陳乃去印。勢利傾奪,隙末成釁。 


장이와 진여   

    장이()는 대량() 사람이다. 그는 젊었을 때 위 공자() 무기()에게 가서 빈객이 된 적이 있었다. 장이는 일찍이 망명하여 외황()에서 유랑했다.

    외황의 한 부잣집 딸이 매우 아름다웠는데, 용렬한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가 도망쳐서 아버지의 빈객에게 갔다. 아버지의 빈객은 평소에 장이를 알고 있었기에 딸에게 “반드시 어진 남편을 구하고 싶다면 장이를 따르거라”라고 했다.

    그 여자는 이 말을 듣고, 마침내 그 남편과의 이혼을 도와달라고 청한 뒤 장이에게 시집을 갔다. 장이는 이때 도망을 나와 유랑을 하고 있었지만, 여자의 집에서 장이를 후하게 받들었기 때문에 장이는 천리의 먼 곳에 있는 사람까지도 부를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위()에서 벼슬을 해 외황의 현령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명성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진여() 또한 대량 사람이다. 유가()의 학술을 좋아해 조()의 고형()이라는 곳을 자주 드나들었다. 부자 공승씨()가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는데, 이 또한 진여가 평범한 사람이 아닌 줄 알았기 때문이다. 진여가 어렸으므로 장이를 아버지처럼 섬겼으며, 그 두 사람은 서로 문경지교()를 맺었다.

    진()이 대량을 멸망시킬 때에 장이는 외황에 살고 있었다. 일찍이 고조(, 유방)가 평민이었을 때에 여러 차례 장이를 따르며 교유하기도 했고, 몇 달 동안 객이 되기도 했다.

    진은 위()를 멸망시킨 몇 해 만에 이 두 사람이 위의 명사()라는 소문을 듣고 현상금을 걸고 이들을 찾았는데 장이는 1천 금, 진여는 5백 금이었다.

    이에 장이와 진여는 성과 이름을 바꾸고 함께 진()으로 가서 어떤 마을의 문지기 노릇을 하며 생활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문을 지키고 있었다. 마을의 관리가 일찍이 잘못이 있다고 진여를 매질했다. 진여가 반항하려고 하자, 장이가 진여의 발을 밟아 매를 맞도록 했다. 관리가 가자 장이가 진여를 뽕나무 아래로 데려가서 꾸짖으며 말하기를 “처음에 내가 그대에게 어떻게 이야기했소? 지금 작은 모욕을 당했다고 일개 관리를 죽으려고 하오?”라고 하자, 진여도 그렇다고 여겼다. 진은 조서()를 내려 현상금을 걸고 이 두 사람을 찾았는데, 이 두 사람은 오히려 문지기로서 마을 안에 조서를 전했다.



    진섭()은 기()에서 일어나 진()에 이르렀을 때 그 군사가 수만 명에 달했다. 장이와 진여가 진섭에게 뵙기를 청했다. 진섭과 좌우의 측근들은 평소에 장이와 진여의 현명함에 대해 자주 들었으나, 아직 만난 적이 없었기에 만나자마자 매우 기뻐했다.

    진()의 호걸과 원로들이 진섭을 설득해 말했다.

    “장군은 몸소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은 채, 사졸을 거느리고 저 포악한 진()을 멸해 초()의 사직()을 다시 세워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후대를 이으셨으니, 그 공과 덕은 마땅히 왕이 되어야 합니다. 게다가 천하의 여러 장수를 살피고 감독하기 위해서라도 왕이 되시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 초왕()이 되어주십시오.”

    진섭이 두 사람에게 물으니, 두 사람이 대답했다.

    “저 진()은 무도()해 남의 나라를 파괴하고 사직을 없앴으며, 남의 후세를 끊어놓았고, 백성의 힘을 약하게 하고 백성의 재물을 고갈시켰습니다. 장군께서 눈을 부릅뜨고 용기를 내어 만 번 죽을지언정 한 번 살기를 돌아보지 않는 계책을 내서 천하를 위해 잔악한 무리를 제거하려고 하십니다.

    이제 막 진()에 와서 왕이 되신다면 이는 천하에 사욕을 보이는 것이 됩니다. 장군께서는 왕위에 오르지 마시고 급히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시고, 사람을 파견해 여섯 나라들의 후계자를 세우십시오. 이는 장군에게는 같은 편을 만드는 것이고, 진에게는 적을 보태는 것입니다. 적이 많으면 힘이 분산되고, 무리와 함께하면 병력은 강해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들에서는 싸우는 병사가 없게 되고, 현()에서는 성을 지키는 자가 없게 되어, 포악한 진을 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함양()에 웅거해 제후들을 호령하십시오. 그 제후들은 망했다가 다시 일어서게 되었으니, 덕으로써 복종시키십시오. 이와 같다면 제왕의 대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제 다만 진의 왕이 되신다면 천하가 분열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진섭은 이 말을 듣지 않고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진여는 이에 다시 진왕()을 설득해 말했다.

    “대왕께서는 양()과 초()의 병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서 함곡관()으로 들어가는 데에 힘을 쓰시느라, 아직 하북()의 땅을 거두어들이지는 못하셨습니다. 신은 일찍이 조()를 유람한 적이 있어서 그곳의 호걸들과 지형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기병()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조를 공략하기를 바라옵니다.”

    이에 진왕()은 예로부터 친하게 지내던 진() 사람인 무신()을 장군으로 삼고, 소소()를 호군()으로 삼았으며, 장이와 진여로써 좌우 교위()를 삼아 3천 명의 병사를 주어 북쪽으로 조를 공략하게 했다.

    무신 등은 백마()에서 황하를 건너 여러 현에 이르러 그곳의 호걸들을 설득해 말했다.

    “진()이 혼란한 정치와 가혹한 형벌로써 천하를 잔혹하게 다스리고 해를 끼쳐온 지 수십 년이 되었습니다. 북쪽으로는 만리장성을 쌓는 노역()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오령()을 수비하는 병역()이 있었기 때문에 안팎으로 소동이 잦아 백성들은 피폐한 실정인데도 엄중하게 인두세를 거두어들여서 군비로 공급했습니다. 그리하여 재물은 고갈되고, 힘은 다했기에 백성들은 삶을 영위해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가혹한 법과 준엄한 형벌로써 백성들을 무겁게 억누르는 까닭에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안심하고 살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진왕()께서는 팔뚝을 걷어붙이고 천하를 위해 앞장을 서서 초 땅에서 왕위에 오르시니, 사방 2천 리의 땅에서 이에 호응하지 않는 곳이 없어 집집마다 스스로 분노하고, 사람마다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 제각기 자신들의 원한을 갚고 원수를 공격했기에, 현()에서는 그 영승()을 죽이고, 군()에서는 그 수위()를 죽였습니다. 이제 초의 세력을 확장시키시고 진()에서 왕위에 오르시고는 오광()과 주문()으로 하여금 1백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격해 진을 공격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때에 제후에 봉해지는 일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은 호걸이 아닙니다. 모두 한번 서로 잘 생각해보십시오. 무릇 천하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진()의 고통을 받은 지 오래되었다고 느낍니다. 천하의 힘에 의거해 무도한 군주를 공격해 부모와 형제의 원수를 갚고, 땅을 나누어 봉토를 받아 일을 이루기 위해 이번은 사내대장부에게 있어서 좋은 기회입니다.”

    호걸들은 모두 이 말에 수긍했다. 이리하여 일을 착수해 군대를 거두어들여 수만 명을 얻었으며, 무신()을 무신군()이라고 칭했다. 이윽고 조()의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켰는데, 그 나머지는 성을 지키며 투항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군대를 이끌고 동북쪽으로 가서 범양()을 공격했다. 그때 범양 사람인 괴통()이 범양령()을 설득해 말하기를 “공께서 곧 돌아가실 것이라는 말을 은밀히 듣고 조문하러 왔습니다. 그러나 공께서 이 괴통을 얻어 살 수 있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라고 했다. 범양령이 “무엇 때문에 조문한단 말이오?”라고 하자, 괴통이 말했다.

    “진()의 법이 준엄해 공께서 범양령이 된 지가 10년 동안 남의 아버지를 죽이고, 남의 아들을 고아로 만들고, 백성의 발을 자르고, 백성의 머리에 경형()을 가하는 짓을 한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렇지만 자애로운 아버지나 효성스러운 아들이 공의 뱃가죽에 비수를 꽂지 못한 것은 진의 법이 두려웠기 때문에 그랬을 뿐입니다.

    지금 천하는 크게 혼란해 진의 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애로운 아버지나 효성스러운 아들이 공의 뱃가죽에 비수를 꽂아 이름을 얻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공을 조문하려는 까닭입니다. 이제 제후들이 진을 배반했고, 무신군의 군사도 곧 이곳에 이를 것입니다. 공께서 범양을 굳게 지키려 하신다면 젊은이들은 모두 앞을 다투어 공을 죽이고 무신군에 항복할 것입니다. 공께서 급히 신을 파견해 무신군을 만나보게 한다면 화를 복으로 돌릴 수가 있는데, 그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범양령은 이에 괴통에게 무신군을 만나게 했는데, 괴통은 이렇게 말했다.

    “공께서는 반드시 싸워 이긴 뒤에야 땅을 얻고, 공격하여 이긴 뒤에야 성을 함락시키려고 하시는데, 신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신의 계책을 들으신다면 공격하지 않고도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며, 싸우지 않고도 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격문()만 전하고도 천리를 평정할 수가 있을 것인데, 어떻습니까?”

    무신군이 “그것이 무슨 말인가?”라고 묻자, 괴통이 말했다.

    “지금 범양령은 마땅히 그 사졸들을 정돈하여 전투를 준비해야 할 터인데, 겁을 먹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탐욕스러워 부귀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천하의 누구보다도 먼저 항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공께서 이전의 10개의 성에서와 같이 진()이 임명한 관리를 죽일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범양의 젊은이들 역시 그 현령을 죽이고 자신들이 성을 차지하고 공에게 항거하려 하고 있습니다. 공께서는 저에게 제후의 인()을 주시어 그를 범양령에 제수하신다면 범양령은 성()을 들어서 공께 항복을 할 것이고, 젊은이들도 감히 그 현령을 죽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고는 범양령으로 하여금 화려한 장식을 한 붉은 수레를 타고 연()과 조()의 교외를 달리게 하십시오. 연과 조 사람들이 교외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고서 모두 ‘이 사람은 범양령인데, 가장 먼저 항복을 했다.’라고 말하면서 기뻐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연과 조의 성()은 싸우지 않고서도 항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한 격문을 전함으로써 천리를 평정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신군은 그의 계책을 좇아 괴통을 사자로 보내어 범양령에게 제후의 인을 하사했다. 조() 땅에서 이러한 소문을 듣고, 싸움을 하지 않고 항복해온 성이 30여 개나 되었다.

    한단()에 이르러 장이와 진여는 주장()의 군대가 함곡관에 들어가 희()까지 이르렀다가 퇴각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또한 여러 장수들이 진왕()을 위해서 땅을 빼앗았으나 참소와 비방으로 죽임을 당한 것을 들었다. 진왕이 자신들의 계책을 사용하지 않고, 또 자신들을 장수로 삼지 않고 교위로 삼은 것을 원망했다. 이에 무신을 설득해 말했다.

    “진왕은 기() 땅에서 봉기한 뒤 진() 땅에 이르러 왕위에 올랐는데, 반드시 육국()의 후대()를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장군께서는 현재 3천 명의 군대로써 조의 수십 성을 항복받아서 홀로 하북()에 웅거하고 계시지만 장군께서 왕이 되지 않고서는 이곳을 진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진왕은 모함하는 말을 듣고 있으니, 돌아가서 보고를 하더라도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차라리 그 형제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조의 후손을 세우도록 하십시오. 장군께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시간이 급박하옵니다.”

    무신은 이 말을 듣고 드디어 조왕()에 즉위했다. 그는 진여를 대장군()으로 삼고, 장이를 우승상, 소소()를 좌승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진왕()에게 알렸다. 진왕은 크게 노하여 무신 등의 집안을 모두 멸하고 군대를 보내 조를 공격하려 했다. 그때 진왕의 상국()인 방군()이 간언하기를 “진()이 아직 멸망하지도 않았는데 무신 등의 집안을 모두 죽인다면, 이는 또 다른 하나의 진이 생기는 것입니다. 차라리 그들을 축하해주고 급히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진을 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진왕은 그렇다고 여기고, 그의 계책에 따라 무신 등의 집안사람을 궁궐 안에 옮겨 연금하고, 장이의 아들 오()를 성도군()에 봉했다.

    진왕은 사자를 보내어 조왕()이 된 것을 축하하고, 군대를 일으켜 서쪽으로 진격해 함곡관에 들어갈 것을 재촉했다. 그러자 장이와 진여는 무신을 설득해 말했다.

    “왕께서 조왕이 되신 것은 초의 뜻이 아니며, 단지 계책에 따라 대왕에게 축하했을 뿐입니다. 초는 진()이 멸망되고 나면 반드시 군사를 더하여 조를 공격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군대를 서쪽으로 움직이지 마시고 북쪽의 연()과 대()를 취하시고, 남쪽으로는 하내()를 거두어 스스로 영토를 넓히시기 바랍니다. 조가 남쪽으로는 대하()를 근거로 하고, 북쪽으로는 연과 대 지방을 차지하게 되면, 초가 비록 진을 이긴다고 하더라도 감히 조를 제압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조왕은 이 말을 옳다고 여겨 군대를 서쪽으로 진격시키지 않고, 한광()에게는 연을, 이량()에게는 상산()을, 장염()에게는 상당()을 각각 공략하게 했다.

    한광이 연에 이르자, 사람들이 그를 연왕()으로 세웠다. 그러자 조왕은 장이, 진여와 더불어 북쪽으로 진격해 연의 변경을 공격했다. 조왕은 한가한 때에 외출했다가 연 군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연의 장군은 조왕을 가두어두고 조의 땅 절반을 나누어주면 왕을 돌려보내겠다고 했다. 조의 사자가 가면 조는 그때마다 죽이고 땅을 요구했다. 장이와 진여는 이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 어떤 잡일을 하는 병사가 같은 막사의 동료들과 헤어지면서 말하기를 “내가 공()을 위해 연을 설득해 조왕과 함께 돌아오겠다.”라고 하자, 동료들이 모두 그를 비웃으며 말하기를 “사신으로 간 사람이 10여 명이나 되지만 번번이 죽었는데, 네가 어찌 왕을 구해올 수 있단 말이냐?”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연의 성벽 아래로 달려갔다. 연 장군이 그를 바라보자 그는 연 장군에게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십니까?”라고 묻자, 그 연 장군은 “너는 조왕을 구하고 싶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그 병사는 “공께서는 장이와 진여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고 계십니까?”라고 묻자, 연 장군은 “현인이다.”라고 답했다. 그 병사가 다시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아십니까?”라고 묻자, 연 장군은 “그들의 왕을 구하고 싶겠지.”라고 했다. 조의 잡일을 하는 병사는 이에 웃으며 말했다.

    “공께서는 이 두 사람이 원하는 바를 알지 못하시는군요. 저 무신·장이·진여는 말채찍을 흔드는 것만으로 조의 수십 개의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들도 제각기 남면()하고서 왕이 되고자 하는데, 어찌 경상()이 되어 몸을 마치려고 하겠습니까? 무릇 신하와 왕의 지위를 어찌 같이 말할 수 있겠습니까?

    조의 세력이 처음 정해질 때를 돌이켜보면 감히 땅을 셋으로 나누어 왕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나이의 많고 적음을 따져 먼저 무신을 왕위에 즉위시켜 조의 인심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이제 조 땅이 모두 안정되니 이 두 사람 역시 조를 나누어 왕이 되려고 합니다. 다만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공께서 조왕을 감금하고 계십니다. 이 두 사람이 명분상 조왕을 구한다고 하지만, 실은 연이 그를 죽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두 사람은 조를 반으로 나누어 각기 왕이 될 것입니다. 대체로 하나의 조로도 연을 가볍게 여기는데 하물며 두 명의 현명한 왕이 서로 지지하며 왕을 죽인 죄를 질책한다면, 연을 멸망시키는 것은 쉬울 것입니다.”

    연 장군은 그의 말이 맞다고 여겨 조왕을 돌려보내었고, 그 잡일을 하는 병사는 마차를 몰아 돌아왔다.

    이량()이 이미 상산을 평정하고 돌아와서 보고를 하니, 조왕은 다시 이량에게 태원()을 공략하게 했다. 석읍()에 이르자 진() 군대가 정형()을 가로막아 전진할 수 없었다.

    그때 진 장군이 2세 황제의 사자라고 속여 이량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 서신은 겉봉이 봉해져 있지 않았으며 “그대는 일찍이 나를 섬기어 귀함과 총애를 누렸다. 그대가 만일 조를 배반하고 진을 위한다면, 그대의 죄를 용서하고 귀하게 대하겠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나 이량은 이 글을 받고 의심하고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한단으로 돌아가서 증원군을 청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한단에 도착하기 전에 길에서 조왕의 손윗누이가 연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행렬과 만나게 되었는데, 기병 1백여 명이 따르고 있었다. 이량은 멀리서 바라보고 왕이라 여기고 길옆으로 비켜서 엎드려 절했다. 왕의 손윗누이는 술에 취해 그가 장군인 줄도 모르고 기병()을 시켜서 이량에게 답례하게 했다.

    이량은 본래 귀한 신분이었으므로 길에서 일어나자 그를 따르는 부하들 보기가 부끄러웠다. 그러자 그를 따르는 부관 한 사람이 말하기를 “천하가 진에 반기를 들고 있으니, 능력 있는 사람이 먼저 왕이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조왕은 본래 장군의 휘하에서 나온 자인데, 지금 그의 누이조차 장군을 위해 수레에서 내리지도 않으니, 제가 쫓아가서 죽이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량은 이미 진의 서신을 받고 조를 배반하려 하면서도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 일로 화가 나서 사람을 보내 길에서 왕의 누이를 죽이고, 마침내 그의 군대를 거느리고 한단을 습격했다. 한단에서는 이러한 일을 모르고 있었기에, 결국 무신과 소소는 죽임을 당했다. 조 사람들 중에는 장이와 진여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사람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무사히 도망할 수가 있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남은 병사를 거두어들이니 수만 명이 되었다. 그들의 빈객 중에 어떤 사람이 장이를 설득해 말하기를 “두 공께서는 나그네의 몸이기 때문에 조에 귀속하려 해도 어렵습니다. 오직 조의 후손을 왕으로 세우고 의()로써 돕는다면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그들은 조헐()이라는 사람을 찾아서 조왕()으로 세우고, 신도()에 거주했다. 그때 이량이 진격해 진여를 공격했으나, 진여가 이량을 깨뜨리니 이량은 도망해 장한()에게 귀의했다.

    장한은 군대를 이끌고 한단에 이르러 그곳의 백성을 모두 하내()로 옮기고, 그 성곽()을 모두 파괴해버렸다.

    장이는 조왕 헐과 함께 도망해 거록성(鹿)에 들어갔는데, 왕리()가 이들을 포위했다. 진여는 북쪽으로 가서 상산의 병력을 거두어 수만 명을 얻어 거록성의 북쪽에 주둔시켰다. 장한은 거록성의 남쪽 극원()에 주둔하고 흙담을 양쪽에서 쌓아올린 제방 길을 만들어 하수()에까지 연결해 왕리에게 군량을 공급했다. 왕리의 군대는 군량이 풍부하자 맹렬하게 거록성을 공격했다. 거록성 안에서는 군량이 거의 바닥나고 병력이 적었다. 장이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진여에게 전진하라고 했으나, 진여는 병력이 적어서 진의 군대를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감히 전진하지 못했다.

    이렇게 몇 개월이 지나자, 장이는 크게 노하여 진여를 원망했으며, 장염()과 진택()을 진여에게 보내 책망했다.

    “처음에 나는 공과 문경지교()를 맺었습니다. 지금 왕과 내가 아침저녁으로 죽을 지경에 빠져 있는데도, 공은 수만 명의 병사를 끼고 앉아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지 않으니, 어디에 서로를 위해 목숨을 버리자는 의리가 있단 말이오? 만일 그대에게 신의가 있다면 어찌 진의 군대에 달려들어 함께 죽고자 하지 않는 것이오? 그리하면 열에 한둘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오.”

    그러자 진여가 말했다.

    “나는 전진해보았자 결코 조를 구원할 수 없고, 군대를 모두 잃기만 할 뿐이라고 생각하오. 내가 공과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지 않는 것은 조왕과 장공을 위해 진에 복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만일 함께 죽고자 한다면, 이는 굶주린 범에게 고기를 던지는 것과 같으니 무슨 이로움이 있겠소?”

    이에 장염과 진택은 “사태가 이미 급박하니 함께 죽음으로써 신의를 세우지, 어찌 이후의 일을 생각한다는 말입니까?”라고 했다. 이에 진여는 “나는 죽어도 아무 이익이 없다고 생각되지만, 공들의 말에 따르도록 하겠소.”라고 말하고, 5천 명의 군사로 하여금 장염과 진택을 따르게 해 먼저 시험 삼아 진의 군대에 맞서보았으나, 붙자마자 모두 몰살당했다.

    이때 연·제·초는 조의 위급함을 듣고 모두 달려와 원조했다. 장오도 북쪽으로 대()의 군대를 거두어 만여 명을 얻었는데 이들을 이끌고 와서 모두 진여의 옆에 성벽을 쌓고 주둔했으나, 감히 진을 공격하지 못했다.

    항우()의 군대는 장한의 군대가 양쪽에서 쌓아올린 길을 여러 번 차단하니, 왕리의 군대는 군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항우가 군대를 모두 이끌고 하수를 건너 마침내 장한의 군대를 격파했다. 장한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서자 제후의 군대는 그제에서야 거록성을 포위하고 있는 진의 군대를 공격해 드디어 왕리를 사로잡았다. 섭간()은 자살했다. 결국 거록성을 보존하게 한 것은 초의 힘이었다.

    이리하여 조왕 헐과 장이는 거록성에서 나와 제후들에게 사례했다. 장이는 진여를 만나자, 진여가 조를 구원하려고 하지 않은 것을 꾸짖고 장염과 진택의 소재를 캐물었다.

    그러자 진여가 노하여 말하기를 “장염과 진택은 반드시 죽기를 각오해야 한다고 나를 책망했기에, 제가 그들에게 5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시험 삼아 진 군에 맞서보도록 했는데, 그들은 모두 몰살당해 빠져나오지 못했소.”라고 했다.

    그러나 장이는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진여가 그들을 죽였다고 생각해 자주 진여에게 물었다. 그러자 진여가 노하여 말하기를 “공께서 저를 이리도 심히 책망할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소! 어찌 제가 장군 자리에서 떠나는 것을 아쉽게 여기겠습니까?”라고 하고는 장군의 인수()를 풀어서 장이에게 밀어주었다.

    장이도 놀라서 받지 않았다. 진여가 일어나 측간으로 갔다. 그때 객 가운데 한 사람이 장이에게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아니하면 도리어 그 허물을 받는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진장군께서 장군의 인수를 주셨는데 공께서 받지 아니하시니, 이는 하늘을 거역하는 것으로 상서롭지 못합니다. 빨리 그것을 받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장이는 마침내 그 인수를 차고 그 휘하의 사람을 거두었다. 진여는 돌아와서 장이가 그 인수를 돌려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며 마침내 급히 그곳을 나와 버렸다. 장이는 마침내 진여의 군대를 거두었다.

    진여는 홀로 휘하 중에서 친하게 지내던 수백 명과 함께 하수의 물가에서 낚시와 사냥을 하며 지냈다. 이로 인해 진여와 장이는 결국 틈이 생기게 되었다.

    조왕 헐은 다시 신도에 거주하게 되었다. 장이는 항우와 제후들을 따라서 함곡관 안으로 들어갔다. 한() 원년 2월에 항우는 제후들을 왕에 봉했다. 장이는 평소에 널리 교유했기에 그를 추천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항우도 평소부터 장이의 현명함에 대해 자주 들었기 때문에 조를 나누어서 장이를 상산왕()이라 하고, 신도를 다스리게 했다. 그리고 신도의 이름을 양국()으로 바꾸었다.



    진여의 빈객들 가운데 여러 사람들이 항우에게 “진여와 장이는 똑같이 조에 공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항우는 진여가 함곡관으로 들어오는 데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와 또 그가 남피()에 있다는 것을 듣고 바로 남피 부근의 세 현을 봉해주었다. 그리고 조왕 헐은 대()의 왕으로 옮겼다.

    장이가 양국으로 가자, 진여는 더욱 노하여 말하기를 “장이와 진여는 공이 같은데 지금 장이는 왕이 되고, 이 진여는 다만 후()가 되었으니, 이는 항우가 공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제왕() 전영()이 초에 반기를 들자, 진여는 이에 하열()을 보내 전영을 설득하게 했다.

    “항우는 천하를 다스림이 공평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여러 장수들을 모두 좋은 땅에 왕으로 봉해주고, 이전의 왕은 나쁜 땅으로 옮겨버렸기에 현재 조왕은 대 땅에 거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신에게 군대를 빌려주십시오. 제가 가진 남피의 땅으로써 엄폐물을 만들겠습니다.”

    전영은 조에 친교 세력을 심어서 초를 배반하고자 했기에 병사를 파견해 진여를 따르게 했다. 진여는 이리하여 세 현의 군사를 모두 이끌고 상산왕 장이를 습격했다. 장이는 패해 도주하게 되었는데 가서 의탁할 만한 제후가 없다고 생각하여 말하기를 “한왕()과 나는 옛날의 친분이 있기는 하지만 항우가 강한 데다가 나를 왕으로 세워주었으니, 나는 초로 가려 한다.”라고 했다.

    그때 감공()이 말했다.

    “한왕이 함곡관에 들어가자 다섯 개의 별이 동정()에 모여들었습니다. 동정은 진()의 분야()입니다. 그곳에 먼저 이르는 사람이 반드시 천하를 제패하게 될 것입니다. 초가 비록 강하지만 뒤에는 반드시 한에 귀속될 것입니다.”

    이리하여 장이는 한으로 도주했다. 한왕도 그 무렵 삼진()을 평정하고 나서 막 장한을 폐구()에서 포위했다. 장이가 한왕을 알현하자 한왕은 그를 후하게 대우했다.

    진여는 이미 장이를 패배시킨 뒤 조의 땅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대()에서 조왕을 맞이해 다시 조왕으로 삼았다. 조왕은 진여를 고맙게 생각해 그를 대왕()에 세워주었다. 진여는 조왕이 약하고, 나라가 겨우 안정되었을 뿐이라고 여기고, 자기 나라로 가지 않고 그대로 머무르며 조왕을 보좌했으며, 하열을 상국으로 삼아 대를 지키게 했다.

    한 2년, 한은 동쪽으로 초를 공격했는데, 사신을 조에 보내어 함께 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자 진여가 “한이 장이를 죽인다면 따르겠소.”라고 하니, 한왕은 장이를 닮은 사람을 찾아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가져다 진여에게 주었다. 진여는 이에 군대를 파견해 한을 도왔다.

    그러나 한이 팽성()의 서쪽에서 패하고, 진여도 장이가 죽지 않은 사실을 알고는 곧 한을 배반했다.

    한 3년, 한신()이 이미 위() 땅을 평정하고, 한은 장이를 파견해 한신과 함께 조를 정형()에서 격파하고, 지수()의 물가에서 진여를 베고 조왕 헐을 추격해 양국 땅에서 죽였다. 한은 장이를 조왕으로 세웠다.

    한 5년, 장이가 죽자 경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장이의 아들인 장오()가 그 뒤를 이어 조왕의 자리에 올랐다. 고조()의 맏딸인 노원공주()는 조왕 장오의 왕후가 되었다.


    장오[ ]    

    한 7년, 고조는 평성()으로부터 조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때 조왕은 아침저녁으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앞치마를 두르고 몸소 음식을 올리고 예를 몹시 공손하게 행함으로써 사위로서의 예를 갖추었다.

    그런데 고조는 두 발을 내벌리고 앉아 꾸짖는 등 그를 몹시 가볍게 대했다. 조의 재상인 관고()와 조오() 등은 나이가 예순이 넘었지만 오래전부터 장이의 객으로서 평소에 기개가 있었다.

    그들이 이에 노하여 “우리의 왕은 나약한 왕이로구나!”라고 말하고는 왕을 설득해 말하기를 “무릇 천하의 호걸들이 함께 봉기하는 상황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먼저 왕이 됩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고조를 몹시 공손하게 섬기고 계신데도 고조는 무례하니, 대왕을 위해 그를 죽이겠습니다.”라고 하자, 장오는 자기의 손가락을 물어 피를 내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공들은 무슨 말을 그렇게 그릇되게 하시오? 선인께서 나라를 잃으셨을 때 고조의 힘을 입어서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으며, 그 덕이 후손에까지 미치고 있으니 털끝만 한 것도 모두 고조의 힘에 의한 것이오. 공들께서는 다시는 이와 같은 말을 입 밖에 내지 마시기 바라오.”라고 했다. 관고와 조오 등 10여 명은 서로 이렇게 말했다.

    “이는 우리들이 잘못한 것이오. 우리 왕은 덕행이 있는 분으로 남의 은덕을 배반하지 아니하셨소. 게다가 우리들의 뜻은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기에, 고조께서 우리의 왕을 모욕한 것을 원망해 고조를 죽이려 한 것이지 어찌 우리의 왕을 더럽히는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겠소? 이 일이 성사가 되면 그 공을 왕께 돌리고, 일이 실패하면 우리들이 그 책임을 지도록 합시다.”

    한 8년, 고조가 동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조에 들렀는데, 관고 등은 박인()이라는 곳의 숙소의 이중벽에 사람을 숨겨놓고 고조를 죽이려고 했다. 고조가 그곳을 지나다가 머물려고 하는데 가슴이 떨려 와서 “이 현의 이름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니 “박인이라고 합니다.”라고 했다. “박인이란 곧 남에게 핍박당한다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고 묵지 아니하고 떠났다.

    한 9년, 관고와 원수지간인 사람이 그들의 음모를 알게 되어 글을 올려 고발했다. 이에 고조는 조왕과 관고 등을 모두 체포했다. 그러자 10여 명의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자살했다.

    관고는 홀로 노하여 꾸짖으며 말하기를 “누가 공들에게 이러한 일을 시켰는가? 지금 왕께서는 참으로 아무런 계책도 세우지 않으셨는데도 왕까지 함께 체포되셨다. 공들이 모두 죽어버리면 누가 왕께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고 밝히겠는가?”라 고 했다. 그러고는 죄수를 태우는 수레에 꼼짝 못하게 실려 왕과 함께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고조는 장오의 죄를 다스렸는데, 조의 여러 신하와 빈객으로서 감히 왕을 쫓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그 족속을 멸하라고 조칙을 내렸다. 관고와 그의 빈객 맹서() 등 10여 명들은 모두 스스로 머리를 깎고 칼을 쓴 채 왕가의 종이 되어 왕을 따라왔다. 관고는 도착하자 옥관에게 “단지 우리들이 한 일이며, 왕께서는 진실로 모르시는 일이오.”라고 했다.

    옥리가 수천 대의 곤장을 치고, 쇠로 살을 찔러 그의 몸이 더 이상 때릴 곳이 없을 지경이 되었어도 끝내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여후()는 조왕이 노원공주 때문에 이러한 일을 했을 리 없다고 여러 번 고조에게 말했다.

    그러자 고조는 화를 내며 “만일 장오가 천하를 차지한다면, 당신 딸과 같은 여자가 줄어들겠습니까?”라고 하고는 여후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정위()가 관고를 문초한 일을 보고하니, 고조는 “장사로구나! 누가 그를 아는 사람이 없는가? 사사로이 물어 보아라.”라고 했다. 그러자 중대부()인 설공()이 말하기를 “관고는 신과 같은 고향 사람으로, 신은 평소부터 그를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조의 명예와 도의를 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자입니다.”라고 했다.

    고조가 설공으로 하여금 황제의 부절()을 가지고 가서 대[]로 만든 가마에 앉아 있는 관고를 만나도록 했다. 관고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고 “설공인가?”라고 했다. 설공은 평소와 다름없이 친근하게 그의 고통을 위로하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장오가 과연 역모의 계획을 했는지 안 했는지 물어보았다. 이에 관고가 대답했다.

    “사람의 정으로써 어찌 자기의 부모와 처자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지금 나는 삼족()이 모두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어찌 왕과 나의 육친을 바꿀 수가 있겠는가? 진실로 대왕께서는 모반하지 않으셨으며, 단지 우리들이 한 것이라네.”

    그리고 사건의 진상과 함께 왕은 이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상황을 자세히 말했다. 이에 설공은 황궁에 들어가 고조에게 모두 보고했고, 고조는 조왕을 풀어주었다.

    고조는 신의를 잘 지키는 관고의 사람됨을 훌륭하게 여겨 설공으로 하여금 그동안의 일을 모두 알려주게 했다. 그래서 관고에게 “조왕은 벌써 석방되었소.”라고 하고 그를 석방했다. 그러자 관고는 기뻐하면서“우리 대왕께서 정말로 석방되셨는가?”라고 묻자 설공은 “그렇소.”라고 대답하고는, 또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그대를 훌륭하다고 여기시어 그대를 사면하셨네.”라고 하니 이 말을 듣고 관고는 말했다.

    “내가 몸에 성한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으면서도 죽지 아니한 것은 조왕께서 모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였다네. 그런데 지금 왕께서 이미 석방되셨으니 나의 책임은 다한 것이므로,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네. 하물며 신하로서 그 임금을 시해하려 했다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군주를 섬기겠는가? 설령 황제께서 나를 죽이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내 마음에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목의 혈관을 끊고 죽었다. 당시 그의 이름은 천하에 널리 알려졌다.

    장오는 석방되어 나온 뒤, 노원공주의 배우자라는 것으로 인해 선평후()에 봉해졌다. 고조가 조왕의 여러 빈객들을 훌륭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칼을 차고 노비가 되어 조왕을 따라 함곡관 안으로 들어왔던 사람들로서 제후의 재상이나 군수 등이 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효혜()·고후()·문제()·효경() 때에 이르러 조왕의 빈객들의 자손은 모두 2천 석의 녹을 받았다.

    장오는 고후 6년에 죽었다. 그리고 아들인 언()은 노원왕()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여후의 딸이었기 때문에 여후는 그를 노원왕에 봉했다. 노원왕은 나약하고 형제가 적었다. 그리하여 장오의 다른 여자에게서 얻은 두 아들도 봉했는데, 그중 수()는 낙창후()가 되었고, 치()는 신도후()가 되었다. 고후가 죽자 여씨() 일족이 무도()했기 때문에 대신들이 그들을 죽이고, 노원왕과 낙창후, 신도후도 폐위시켰다.

    효문제가 즉위하자 다시 노원왕 언을 남궁후()에 봉해 장씨의 뒤를 잇게 했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장이()와 진여()는 세상에 현자()라고 전해진다. 그들의 빈객들과 종들까지도 천하의 준걸이 아닌 사람이 없어서 그들이 사는 나라에서 경상()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장이와 진여가 처음에 빈천할 때에는 서로 죽음을 무릅쓰고 신의를 지켰으니, 어찌 망설임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나라를 움켜쥐고 권력을 다투게 되자, 마침내 서로를 멸망시켰다.

    어찌해 예전에는 서로 사모하고 신뢰함이 진실하더니, 뒤에는 서로 배반하게 되었구나! 어찌 권세와 이익으로써 사귄 것이 아니겠는가? 명예가 비록 높고, 설령 빈객이 많다고 해도 그들이 걸어온 길은 아마도 태백()이나 연릉()의 계자()와 다를 것이다.”



    '中國歷史와文學 > 史記列傳' 카테고리의 다른 글

    史記 卷九一. 黥布列傳   (0) 2019.06.02
    史記 卷九O. 魏豹彭越列傳   (0) 2019.06.02
    史記 卷八八. 蒙恬列傳  (0) 2019.06.02
    史記 卷八七. 李斯列傳  (0) 2019.06.02
    史記 卷八六. 刺客列傳  (0) 2019.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