刺客列傳
曹沫
曹沫者,魯人也,以勇力事魯莊公。莊公好力。曹沫為魯將,與齊戰,三敗北。魯莊公懼,乃獻遂邑之地以和。猶復以為將。
齊桓公許與魯會于柯而盟。桓公與莊公既盟於壇上,曹沫執匕首劫齊桓公,桓公左右莫敢動,而問曰:「子將何欲?」曹沫曰:「齊彊魯弱,而大國侵魯亦甚矣。今魯城壞即壓齊境,君其圖之。」桓公乃許盡歸魯之侵地。既已言,曹沫投其匕首,下壇,北面就群臣之位,顏色不變,辭令如故。桓公怒,欲倍其約。管仲曰:「不可。夫貪小利以自快,棄信於諸侯,失天下之援,不如與之。」於是桓公乃遂割魯侵地,曹沫三戰所亡地盡復予魯。曹沫者,魯人也,以勇力事魯莊公。莊公好力。曹沫為魯將,與齊戰,三敗北。魯莊公懼,乃獻遂邑之地以和。猶復以為將。
其後百六十有七年而吳有專諸之事。
조말(曹沫)은 노(魯)나라 사람으로 용기와 힘으로 노 장공(莊公)을 섬겼다. 장공은 힘이 있는 사람을 좋아했다. 조말은 노나라의 장수가 되어 제(齊)나라와 싸워 세 번이나 패배했다. 노 장공은 두려워서 수읍(遂邑)의 땅을 바치고 화친을 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말을) 다시 장수로 삼았다.
제 환공(桓公)이 노나라와 가(柯)라는 곳에서 모여 회맹할 것을 허락했다. 환공과 장공이 이미 단상에서 맹약을 맺었는데, 조말이 비수를 잡고 제 환공을 위협했다. 환공 좌우의 사람들은 감히 움직이지 못한 채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조말은 “제나라는 강하고 노나라는 약한데 큰 나라가 노나라를 침략하는 것이 너무 심합니다. 지금 노나라의 성이 무너져 제나라의 국경을 덮칠 판이니 군께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라고 했다.
환공이 이에 노나라에게서 빼앗은 땅을 모두 돌려줄 것을 허락했다. 말이 끝나자 조말은 비수를 던지고 단을 내려와 북쪽의 여러 신하들의 자리로 돌아갔지만 안색은 변함이 없었고 응대하는 말도 전과 같았다.
환공은 화가 나서 그 약속을 어기려 했다. 관중이 “안 됩니다. 무릇 작은 이익을 탐하고 스스로 좋아한다면 제후들에게 믿음을 얻지 못하고 천하의 도움을 잃게 되니 돌려주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환공이 노나라에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니, 조말이 세 번 싸워 잃었던 땅은 모두 노나라로 되돌아갔다.
그로부터 167년 뒤 오(吳)나라에서 전제(專諸)의 일이 있었다.
專諸
專諸者,吳堂邑人也。伍子胥之亡楚而如吳也,知專諸之能。伍子胥既見吳王僚,說以伐楚之利。吳公子光曰:「彼伍員父兄皆死於楚而員言伐楚,欲自為報私讎也,非能為吳。」吳王乃止。伍子胥知公子光之欲殺吳王僚,乃曰:「彼光將有內志,未可說以外事。」乃進專諸於公子光。
光既得專諸,善客待之。九年而楚平王死。春,吳王僚欲因楚喪,使其二弟公子蓋餘、屬庸將兵圍楚之灊;使延陵季子於晉,以觀諸侯之變。楚發兵絕吳將蓋餘、屬庸路,吳兵不得還。於是公子光謂專諸曰:「此時不可失,不求何獲!且光真王嗣,當立,季子雖來,不吾廢也。」專諸曰:「王僚可殺也。母老子弱,而兩弟將兵伐楚,楚絕其後。方今吳外困於楚,而內空無骨鯁之臣,是無如我何。」公子光頓首曰:「光之身,子之身也。」
四月丙子,光伏甲士於窟室中,而具酒請王僚。王僚使兵陳自宮至光之家,門戶階陛左右,皆王僚之親戚也。夾立侍,皆持長鈹。酒既酣,公子光詳為足疾,入窟室中,使專諸置匕首魚炙之腹中而進之。既至王前,專諸擘魚,因以匕首刺王僚,王僚立死。左右亦殺專諸,王人擾亂。公子光出其伏甲以攻王僚之徒,盡滅之,遂自立為王,是為闔閭。闔閭乃封專諸之子以為上卿。
其後七十餘年而晉有豫讓之事。
전제는 오나라의 당읍(堂邑) 사람이다. 오자서(伍子胥)가 초(楚)나라에서 도망쳐 오나라로 가서 전제의 능력을 알게 되었다. 오자서는 오왕 요(僚)를 만나서 초나라를 토벌하는 이로운 점에 대해 말했다.
오 공자 광(光)이 “저 오원의 아버지와 형은 모두 초나라에서 죽었습니다. 오원(伍員, 오자서)이 초나라를 치자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서이지 오나라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오왕이 이에 (초나라를 토벌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오자서는 공자 광이 오왕 요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저 광이 나라 안의 일에 뜻을 두고 있으니 나라 밖의 일은 말해서는 안 되겠구나!”라고 여기고 이에 전제를 공자 광에게 추천했다.
공자 광의 아버지는 오왕 제번(諸樊)이다. 제번에게는 아우가 셋이 있었는데, 바로 밑의 아우는 여채(餘祭)이고, 그 다음은 이말(夷眛)이며, 끝의 아우는 계자찰(季子札)이다. 제번은 계자찰이 현명한 것을 알았지만 태자로 세우지 않았다. 이는 왕위를 차례대로 세 아우에게 전해, 결국에는 계자찰에게 나라를 다스리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제번이 죽자 여채에게 전했고, 여채가 죽은 뒤에는 이말에게 전했다. 이말이 죽자 응당 계자찰에게 전해야 했으나, 계자찰이 달아나 즉위하려고 하지 않으니, 오나라 사람들은 결국 이말의 아들 요(僚)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공자 광이 말하기를 “만일 형제의 순서대로 한다면 계자가 응당 즉위해야 하며, 만일 아들로서 한다면 내가 진정한 적사(適嗣, 정실 소생의 맏아들)이니, 당연히 임금이 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일찍부터 은밀하게 지모가 뛰어난 신하를 길러, 자기가 임금이 되는 길을 찾았다.
광은 전제를 얻고 나서, 그를 빈객(賓客)으로 잘 대우했다. 오왕 요 9년에 초 평왕(楚平王)이 죽었다. 그해 봄에 오왕 요가 초나라의 국상(國喪)을 틈타 그의 두 아우인 공자 갑여(蓋餘)와 촉용(屬庸)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초나라 잠(潛)을 포위하게 했다. 그리고 연릉(延陵)의 계자를 진(晉)나라에 보내서 제후들의 상황을 살피게 했다. 초나라가 군대를 출동시켜 오 장군 갑여와 촉용의 퇴로를 차단하자 오나라 군대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공자 광이 전제에게 말했다. “이때를 놓쳐서는 아니 되오. 구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얻을 수 있겠소! 게다가 나는 진정한 왕의 후계자이니 마땅히 왕위에 서야 하오, 설사 계자가 오더라도 나를 폐하지는 못할 것이오.”
전제가 말하기를 “왕 요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늙었고 아들은 어립니다. 또한 두 아우가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치러 갔는데, 초나라가 그들이 돌아올 길을 끊어버렸습니다. 지금 오나라는 밖으로는 초나라에게 곤란을 당하고, 안으로는 정직하고 강건한 신하가 전혀 없으니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공자 광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몸이 그대의 몸이오.”라고 말했다.
4월 병자일(丙子日)에, 광이 지하실에 무장한 병사를 숨겨두고 술자리를 마련해 왕 요를 초청했다. 왕 요는 병사들에게 왕궁으로부터 광의 집까지 진을 치게 했는데, 문과 계단 좌우에는 모두 왕 요의 친척이었다.
도로 양쪽을 따라 서서 모시고 있었는데, 모두 긴 칼을 지니고 있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공자 광은 발이 아프다고 말하고, 지하실로 들어가서 전제에게 뱃속에 비수가 들어있는 구운 물고기를 올리게 했다. 왕 앞에 이른 전제가 물고기를 가르고 비수로 왕 요를 찌르자 왕 요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 역시 전제를 죽였다. 왕의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게 되자 공자 광은 매복시켰던 무사들을 나오게 해 왕 요의 무리를 공격하여 모두 없앤 뒤, 마침내 스스로 즉위해 왕이 되니, 그가 바로 합려(闔閭)이다. 합려는 전제의 아들을 봉해 상경(上卿)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70여 년 뒤 진(晉)나라에서 예양(豫讓)의 사건이 발생했다.
豫讓
豫讓者,晉人也,故嘗事范氏及中行氏,而無所知名。去而事智伯,智伯甚尊寵之。及智伯伐趙襄子,趙襄子與韓、魏合謀滅智伯,滅智伯之後而三分其地。趙襄子最怨智伯,漆其頭以為飲器。豫讓遁逃山中,曰:「嗟乎!士為知己者死,女為說己者容。今智伯知我,我必為報讎而死,以報智伯,則吾魂魄不愧矣。」乃變名姓為刑人,入宮涂廁,中挾匕首,欲以刺襄子。襄子如廁,心動,執問涂廁之刑人,則豫讓,內持刀兵,曰:「欲為智伯報仇!」左右欲誅之。襄子曰:「彼義人也,吾謹避之耳。且智伯亡無後,而其臣欲為報仇,此天下之賢人也。」卒醳去之。
居頃之,豫讓又漆身為厲,吞炭為啞,使形狀不可知,行乞於市。其妻不識也。行見其友,其友識之,曰:「汝非豫讓邪?」曰:「我是也。」其友為泣曰:「以子之才,委質而臣事襄子,襄子必近幸子。近幸子,乃為所欲,顧不易邪?何乃殘身苦形,欲以求報襄子,不亦難乎!」豫讓曰:「既已委質臣事人,而求殺之,是懷二心以事其君也。且吾所為者極難耳!然所以為此者,將以愧天下後世之為人臣懷二心以事其君者也。」
既去,頃之,襄子當出,豫讓伏於所當過之橋下。襄子至橋,馬驚,襄子曰:「此必是豫讓也。」使人問之,果豫讓也。於是襄子乃數豫讓曰:「子不嘗事范、中行氏乎?智伯盡滅之,而子不為報讎,而反委質臣於智伯。智伯亦已死矣,而子獨何以為之報讎之深也?」豫讓曰:「臣事范、中行氏,范、中行氏皆眾人遇我,我故眾人報之。至於智伯,國士遇我,我故國士報之。」襄子喟然嘆息而泣曰:「嗟乎豫子!子之為智伯,名既成矣,而寡人赦子,亦已足矣。子其自為計,寡人不復釋子!」使兵圍之。豫讓曰:「臣聞明主不掩人之美,而忠臣有死名之義。前君已寬赦臣,天下莫不稱君之賢。今日之事,臣固伏誅,然願請君之衣而擊之,焉以致報讎之意,則雖死不恨。非所敢望也,敢布腹心!」於是襄子大義之,乃使使持衣與豫讓。豫讓拔劍三躍而擊之,曰:「吾可以下報智伯矣!」遂伏劍自殺。死之日,趙國志士聞之,皆為涕泣。
其後四十餘年而軹有聶政之事。
예양은 진(晉)나라 사람으로, 일찍이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를 섬겼으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을 떠나서 지백(智伯)을 섬겼는데, 지백은 예양을 매우 존중하고 총애했다. 지백이 조양자(趙襄子)를 치자, 조양자는 한씨(韓氏)·위씨(魏氏)와 공모해 지백을 없애고, 지백을 없앤 뒤에 그 땅을 셋으로 나누었다. 조양자는 지백을 가장 원망해, 그 두개골에 옻칠을 해서 술잔으로 사용했다.
예양이 산 속으로 숨으며 말하기를 “아아!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고, 여자는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얼굴을 단장한다.’라고 했다. 이제 지백이 나를 알아주었으니, 내 반드시 원수를 갚고 죽어 지백에게 보답한다면, 내 혼백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성명을 바꾸고 죄수가 되어 조양자의 궁에 들어가 뒷간의 벽을 발랐는데, 몸속에 비수를 품고 기회를 틈타 자양을 찔러 죽이려 했다.
양자가 뒷간에 갔다가 마음에 놀라는 바가 있어 뒷간의 벽을 바르는 죄수를 잡아다 심문하니, 바로 예양으로 몸속에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예양이 말하기를 “지백을 위해서 원수를 갚으려 했다!”라고 하니,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했다. 그러자 양자가 말하기를 “저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다. 단지 내가 그를 삼가고 피하면 된다. 게다가 지백이 죽고 후사가 없는데, 그의 가신(家臣)이 원수를 갚으려 하니, 이 사람이 천하의 현인이로다.”라고 하고, 마침내 그를 풀어주었다.
얼마 뒤 예양은 또 몸에다 옻칠을 해 문둥이처럼 꾸미고, 숯을 삼켜 목을 쉬게 해 형상을 알아볼 수 없게 한 뒤 저자에 가서 구걸을 했다. 그의 아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의 벗을 만나보니 그의 벗은 그를 알아보고 말하기를 “자네는 예양이 아닌가?”라고 하자, 예양이 말하기를 “바로 나일세.”라고 했다.
그의 벗이 울면서 말하기를 “자네의 재능으로 예물을 바치고 신하가 되어 양자를 섬긴다면, 양자는 반드시 자네를 가까이하고 총애할 것일세. 가까이하고 총애하는 신하가 되어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오히려 쉽지 않겠는가? 왜 자기 몸을 해치고 몸에 고통을 주면서 양자에게 보복하려고 하는가? 이는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그러자 예양이 말했다. “기왕 예물을 바치고 남의 신하가 되어 섬기면서, 그를 죽이려 한다면, 이는 두 마음을 품고서 군주를 섬기는 짓이네. 또한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바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네. 그러나 이를 하는 까닭은 장차 천하 후세에 남의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고 군주를 섬기는 자들로 하여금 부끄럼을 알게 하려는 것일세.”
얼마 뒤 양자가 외출하려고 할 때, 예양은 양자가 지나가려는 다리 밑에 숨어 있었다. 양자가 다리에 이르자 말이 놀랐다. 양자가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예양 때문일 것이다.”라고 하고는, 사람을 시켜 심문하니 과연 예양이었다.
이에 양자가 예양을 꾸짖어 말했다. “그대는 일찍이 범씨와 중항씨를 섬기지 않았는가? 지백이 그들을 모두 없앴는데, 그대는 복수는 하지 않고, 도리어 예물을 바쳐 지백의 신하가 되었다. 지백도 이미 죽었는데, 그대 홀로 어찌 그를 위해서 단단히 복수를 하려고 하는 것인가?” 예양이 말했다. “신이 범씨와 중항씨를 섬겼으나, 범씨와 중항씨는 모두 저를 보통 사람으로 대우했기에, 저 또한 보통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보답했을 뿐입니다. 지백에 대해 말하자면 저를 국사(國士)로 대우했기에, 저도 국사로서 그에게 보답하는 것입니다.”
양자가 위연(喟然)히 탄식하고 울면서 말했다. “아, 예자(豫子)여! 그대가 지백을 위했다는 명예는 이미 이루어졌고, 과인(寡人)이 그대를 용서한 것도 이미 충분하다. 그대가 스스로 헤아려 보라. 과인은 다시 그대를 풀어주지 않으리라!”라고 하고는 병사들에게 그를 포위하게 했다.
예양이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 ‘현명한 군주는 남의 아름다움을 덮어 가리지 아니하고, 충신은 명예를 위해 죽을 의리가 있다.’라고 합니다. 이전에 군주께서 이미 신을 너그럽게 용서하셨기에 천하에 군주의 어짊을 칭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오늘의 일은 신이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원컨대 군주의 옷을 청해 그것을 쳐서 원수를 갚으려는 뜻을 이루게 해주신다면, 비록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감히 바랄 수 없는 일이오나, 감히 진심을 털어놓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양자는 그가 대의를 아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이윽고 사람을 보내 옷을 가져다 예양에게 주도록 했다. 예양은 칼을 뽑아들고 세 번을 뛰어 그 옷을 치면서 “내가 지백에게 보답할 수 있게 되었구나!”라고 말하고, 드디어 칼에 엎어져 자결했다. 그가 죽던 날, 조(趙)나라의 지사(志士)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그로부터 40여 년 뒤 지(軹)나라 땅에서 섭정(聶政)의 사건이 있었다.
聶政
聶政者,軹深井里人也。殺人避仇,與母、姊如齊,以屠為事。
久之,濮陽嚴仲子事韓哀侯,與韓相俠累有卻。嚴仲子恐誅,亡去,游求人可以報俠累者。至齊,齊人或言聶政勇敢士也,避仇隱於屠者之閒。嚴仲子至門請,數反,然後具酒自暢聶政母前。酒酣,嚴仲子奉黃金百溢,前為聶政母壽。聶政驚怪其厚,固謝嚴仲子。嚴仲子固進,而聶政謝曰:「臣幸有老母,家貧,客游以為狗屠,可以旦夕得甘毳以養親。親供養備,不敢當仲子之賜。」嚴仲子辟人,因為聶政言曰:「臣有仇,而行游諸侯眾矣;然至齊,竊聞足下義甚高,故進百金者,將用為大人麤糲之費,得以交足下之驩,豈敢以有求望邪!」聶政曰:「臣所以降志辱身居市井屠者,徒幸以養老母;老母在,政身未敢以許人也。」嚴仲子固讓,聶政竟不肯受也。然嚴仲子卒備賓主之禮而去。
久之,聶政母死。既已葬,除服,聶政曰:「嗟乎!政乃市井之人,鼓刀以屠;而嚴仲子乃諸侯之卿相也,不遠千里,枉車騎而交臣。臣之所以待之,至淺鮮矣,未有大功可以稱者,而嚴仲子奉百金為親壽,我雖不受,然是者徒深知政也。夫賢者以感忿睚真諼而親信窮僻之人,而政獨安得嘿然而已乎!且前日要政,政徒以老母;老母今以天年終,政將為知己者用。」乃遂西至濮陽,見嚴仲子曰:「前日所以不許仲子者,徒以親在;今不幸而母以天年終。仲子所欲報仇者為誰?請得從事焉!」嚴仲子具告曰:「臣之仇韓相俠累,俠累又韓君之季父也,宗族盛多,居處兵衛甚設,臣欲使人刺之,(眾)終莫能就。今足下幸而不棄,請益其車騎壯士可為足下輔翼者。」聶政曰:「韓之與衛,相去中閒不甚遠,今殺人之相,相又國君之親,此其勢不可以多人,多人不能無生得失,生得失則語泄,語泄是韓舉國而與仲子為讎,豈不殆哉!」遂謝車騎人徒,聶政乃辭獨行。
杖劍至韓,韓相俠累方坐府上,持兵戟而衛侍者甚眾。聶政直入,上階刺殺俠累,左右大亂。聶政大呼,所擊殺者數十人,因自皮面決眼,自屠出腸,遂以死。
韓取聶政尸暴於市,購問莫知誰子。於是韓縣之,有能言殺相俠累者予千金。久之莫知也。
政姊榮聞人有刺殺韓相者,賊不得,國不知其名姓,暴其尸而縣之千金,乃於邑曰:「其是吾弟與?嗟乎,嚴仲子知吾弟!」立起,如韓,之市,而死者果政也,伏尸哭極哀,曰:「是軹深井里所謂聶政者也。」市行者諸眾人皆曰:「此人暴虐吾國相,王縣購其名姓千金,夫人不聞與?何敢來識之也?」榮應之曰:「聞之。然政所以蒙污辱自棄於市販之閒者,為老母幸無恙,妾未嫁也。親既以天年下世,妾已嫁夫,嚴仲子乃察舉吾弟困污之中而交之,澤厚矣,可柰何!士固為知己者死,今乃以妾尚在之故,重自刑以絕從,妾其柰何畏歿身之誅,終滅賢弟之名!」大驚韓市人。乃大呼天者三,卒於邑悲哀而死政之旁。
晉、楚、齊、衛聞之,皆曰:「非獨政能也,乃其姊亦烈女也。鄉使政誠知其姊無濡忍之志,不重暴骸之難,必絕險千里以列其名,姊弟俱僇於韓市者,亦未必敢以身許嚴仲子也。嚴仲子亦可謂知人能得士矣!」
其後二百二十餘年秦有荊軻之事。
섭정은 지나라 땅의 심정리(深井里) 사람이다. 그는 사람을 죽이고 원수를 피해서,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제(齊)나라로 가서, 가축 잡는 일을 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났다. 복양(濮陽)의 엄중자(嚴仲子)가 한애후(韓哀侯)를 섬겼는데, 그는 한(韓)의 재상 협루(俠累)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엄중자는 죽음이 두려워 그곳에서 도망가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협루에게 원수를 갚아줄 사람을 구했다.
제(齊)에 이르자, 어떤 제 사람이 말하기를 “섭정이라는 용감한 사나이가 있는데, 원수를 피해서 백정들 사이에 숨어 있습니다.”라고 했다. 엄중자가 그의 집으로 찾아가 만나기를 청했다. 이를 자주 반복한 뒤에 술자리를 마련해 손수 섭정의 어머니 앞에서 술잔을 올렸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엄중자는 황금 100일(鎰)을 받쳐 들고 앞으로가서 섭정 어머니의 장수를 축원했다. 섭정은 후한 예물에 놀라며 이상하게 여기고 굳이 사양했다. 엄중자가 억지로 주려고 하자, 섭정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신에게는 다행히 늙은 어머니가 계시고, 집이 가난하지만, 객지를 떠돌며 개백정 노릇을 해, 아침저녁으로 맛있는 음식을 얻어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께 봉양할 음식이 마련되었으니, 당신이 주는 예물을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엄중자가 사람을 피해 섭정에게 말했다. “내게 원수가 있어, 여러 제후 나라를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제에 와서 당신의 의기(義氣)가 매우 높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황금 100일을 드려 어머니의 변변치 않은 음식비용에나 쓰게 해서 당신과 친교를 맺자는 뜻이었지, 어찌 감히 다른 바람이 있어서 그랬겠습니까?” 그러자 섭정이 말하기를 “제가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해 시정(市井)에서 백정 노릇을 하는 까닭은 단지 늙은 어머니 봉양을 위해서입니다. 노모가 세상에 계신 동안에는 제 몸을 남에게 감히 허락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엄중자가 굳이 권해도, 섭정은 끝내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엄중자는 끝까지 빈객과 주인의 예를 다하고 떠났다.
오랜 뒤에 섭정의 어머니가 죽었다. 장례를 마치고 상복을 벗은 뒤 섭정이 말하기를 “아! 나는 바로 시정의 사람으로 칼을 들고 짐승을 도살한다. 그러나 엄중자는 제후의 경상(卿相)인데도 천 리를 멀다 여기지 않고 몸을 낮추고 수레를 타고 와서 나와 사귀었다. 내가 그를 대우함은 가볍고 대수롭지 않았고, 아직까지 일컬을 만한 큰 공도 없다. 그런데도 엄중자는 황금 100일을 받들어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했다. 내가 비록 받지 않았지만, 그렇게까지 한 것은 오로지 나를 깊이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무릇 현명한 사람이 격분해 원수를 흘겨보고, 나 같은 궁벽한 곳의 사람을 가까이하고 믿어주었으니, 내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지난번 그가 나를 원했지만, 나는 단지 노모 때문에 사양했다. 노모께서 이제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셨으니, 나는 장차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힘을 쓰겠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서쪽으로 가서 복양에 이르러, 엄중자를 만나서 말했다. “일전에 중자를 (당신을) 허락하지 않은 까닭은, 단지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불행히도 모친께서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중자께서 원수를 갚으려는 자가 누구입니까? 제가 그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엄중자가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나의 원수는 한의 재상 협루인데, 협루는 또한 한 임금의 막내 숙부입니다. 그 일족이 대단히 많고, 거처는 경비가 대단히 삼엄합니다. 내가 사람을 시켜 그를 찔러 죽이려고 했지만, 끝내 이룰 수 없었습니다. 지금 당신이 다행히도 마다하지 않으니,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수레 · 말 · 장사들을 더 보태주리다.” 섭정이 말하기를 “한나라가 위(衛)나라와 서로 떨어진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습니다. 지금 남의 재상을 죽이려고 하는데, 재상 또한 그 나라 임금의 친족인지라 이러한 형세에서 많은 사람을 쓰면 안 됩니다. 사람이 많다 보면 과실이 없을 수 없습니다. 과실이 발생하면 말(비밀)이 샐 것입니다. 말이 새면 한은 거국적으로 중자 (그대)와 원수가 될 것이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마침내 수레 · 말 · 장사들을 모두 사양하고, 섭정은 작별 인사를 하고 홀로 떠났다.
(섭정이) 칼을 차고 한나라에 이르렀을 때, 한나라의 재상 협루가 마침 관부(官府)의 당상에 앉아 있었는데, 무기를 들고 호위하는 자들이 아주 많았다. 섭정이 바로 들어가서 섬돌에 올라가 협루를 찔러 죽이니, 좌우에 있던 부하들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섭정이 크게 외치며 수십 명을 (칼로) 쳐서 죽이고, 스스로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을 도려내고, 자신의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내고, 마침내 죽었다.
한나라는 섭정의 시체를 가져다가 저자에 드러내놓고, 돈을 써서 (그의 신원을) 물었으나 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한나라는 그것에 상금을 걸고, 재상 협루를 죽인 자를 말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 천금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알지 못했다.
섭정의 누나 섭영(聶榮)은 한나라의 재상을 찔러 죽인 자가 있고, 시체를 얻었지만, 나라에서 그 성명을 몰라 범인의 시체를 드러내어 천금을 걸었다는 소문을 듣고, 목메어 말하기를 “그는 내 동생일 것이다. 아, 엄중자가 내 동생을 알아주었구나!”라고 하고는 곧바로 일어나 한나라의 저자로 갔다. 죽은 자는 과연 섭정이었다.
시체 위에 엎드려 매우 슬피 울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지 땅 심정리의 섭정이라는 자입니다.”라고 했다. 저자에 가던 여러 사람들이 모두 말했다. “이 자는 우리나라의 재상에게 포악한 짓을 해, 임금께서 그 성명을 알고자 천금을 걸었는데, 부인은 듣지 못했소? 어찌 감히 와서 이 자를 안다고 하시오?” 섭영이 말했다. “그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섭정이 오욕을 뒤집어쓰고 저자 거리에 몸을 던진 것은 노모가 다행스럽게 병이 없고, 제가 시집을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이미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나셨고, 저도 이미 시집을 갔습니다.
엄중자는 곤궁하고 천한 형편에 있는 제 동생의 행동을 관찰하고 그와 사귀었으니, 은택이 두터우니, 어찌하겠습니까? 남자는 본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고 했습니다. 지금 내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동생은) 자신의 몸을 해쳐 종적을 없앴습니다. 내가 어찌 죽임을 당하는 벌이 두려워 어진 동생의 이름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한나라의 저자 거리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그녀는) 이윽고 크게 하늘을 부르고, 마침내 울면서 슬퍼하다가 섭정의 곁에서 죽었다.
진(晉)·초(楚)·제(齊)·위(衛)나라에서 그것을 듣고 모두 말하기를 “단지 섭정만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의 누나 역시 열녀이다. 만일 섭정이 진실로 그의 누나가 참고 견디는 뜻이 없어 해골이 드러나는 어려움을 무겁게 여기지 않고, 반드시 몹시 험한 천 리 길을 달려와서 그 이름을 나란히 해, 누나와 동생이 모두 한의 저자 거리에서 죽게 될지 알았다면, 또한 과감하게 몸을 엄중자에게 허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엄중자도 사람을 알아보고 현사(賢士)를 얻었다고 이를 만하다.”라고 했다.
그로부터 220여 년 뒤 진(秦)나라에서 형가(荊軻)의 사건이 있었다.
荊軻
荊軻者,衞人也。其先乃齊人,徙於衞,衞人謂之慶卿。而之燕,燕人謂之荊卿。
荊卿好讀書擊劍,以術說衞元君,衞元君不用。其後秦伐魏,置東郡,徙衞元君之支屬於野王。
荊軻嘗游過榆次,與蓋聶論劍,蓋聶怒而目之。荊軻出,人或言復召荊卿。蓋聶曰:「曩者吾與論劍有不稱者,吾目之;試往,是宜去,不敢留。」使使往之主人,荊卿則已駕而去榆次矣。使者還報,蓋聶曰:「固去也,吾曩者目攝之!」
荊軻游於邯鄲,魯句踐與荊軻博,爭道,魯句踐怒而叱之,荊軻嘿而逃去,遂不復會。
荊軻既至燕,愛燕之狗屠及善擊筑者高漸離。荊軻嗜酒,日與狗屠及高漸離飲於燕市,酒酣以往,高漸離擊筑,荊軻和而歌於市中,相樂也,已而相泣,旁若無人者。荊軻雖游於酒人乎,然其為人沈深好書;其所游諸侯,盡與其賢豪長者相結。其之燕,燕之處士田光先生亦善待之,知其非庸人也。
居頃之,會燕太子丹質秦亡歸燕。燕太子丹者,故嘗質於趙,而秦王政生於趙,其少時與丹驩。及政立為秦王,而丹質於秦。秦王之遇燕太子丹不善,故丹怨而亡歸。歸而求為報秦王者,國小,力不能。其後秦日出兵山東以伐齊、楚、三晉,稍蠶食諸侯,且至於燕,燕君臣皆恐禍之至。太子丹患之,問其傅鞠武。武對曰:「秦地徧天下,威脅韓、魏、趙氏,北有甘泉、谷口之固,南有涇、渭之沃,擅巴、漢之饒,右隴、蜀之山,左關、殽之險,民>而士厲,兵革有餘。意有所出,則長城之南,易水以北,未有所定也。柰何以見陵之怨,欲批其逆鱗哉!」丹曰:「然則何由?」對曰:「請入圖之。」
居有閒,秦將樊於期得罪於秦王,亡之燕,太子受而舍之。鞠武諫曰:「不可。夫以秦王之暴而積怒於燕,足為寒心,又況聞樊將軍之所在乎?是謂『委肉當餓虎之蹊』也,禍必不振矣!雖有管、晏,不能為之謀也。願太子疾遣樊將軍入匈奴以滅口。請西約三晉,南連齊、楚,北購於單于,其後迺可圖也。」太子曰:「太傅之計,曠日彌久,心惛然,恐不能須臾。且非獨於此也,夫樊將軍窮困於天下,歸身於丹,丹終不以迫於彊秦而棄所哀憐之交,置之匈奴,是固丹命卒之時也。願太傅更慮之。」鞠武曰:「夫行危欲求安,造禍而求福,計淺而怨深,連結一人之後交,不顧國家之大害,此所謂『資怨而助禍』矣。夫以鴻毛燎於爐炭之上,必無事矣。且以鵰鷙之秦,行怨暴之怒,豈足道哉!燕有田光先生,其為人智深而勇沈,可與謀。」太子曰:「願因太傅而得交於田先生,可乎?」鞠武曰:「敬諾。」出見田先生,道「太子願圖國事於先生也」。田光曰:「敬奉教。」乃造焉。
太子逢迎,卻行為導,跪而蔽席。田光坐定,左右無人,太子避席而請曰:「燕秦不兩立,願先生留意也。」田光曰:「臣聞騏驥盛壯之時,一日而馳千里;至其衰老,駑馬先之。今太子聞光盛壯之時,不知臣精已消亡矣。雖然,光不敢以圖國事,所善荊卿可使也。」太子曰:「願因先生得結交於荊卿,可乎?」田光曰:「敬諾。」即起,趨出。太子送至門,戒曰:「丹所報,先生所言者,國之大事也,願先生勿泄也!」田光俛而笑曰:「諾。」僂行見荊卿,曰:「光與子相善,燕國莫不知。今太子聞光壯盛之時,不知吾形已不逮也,幸而教之曰『燕秦不兩立,願先生留意也』。光竊不自外,言足下於太子也,願足下過太子於宮。」荊軻曰:「謹奉教。」田光曰:「吾聞之,長者為行,不使人疑之。今太子告光曰:『所言者,國之大事也,願先生勿泄』,是太子疑光也。夫為行而使人疑之,非節俠也。」欲自殺以激荊卿,曰:「願足下急過太子,言光已死,明不言也。」因遂自刎而死。
荊軻遂見太子,言田光已死,致光之言。太子再拜而跪,膝行流涕,有頃而后言曰:「丹所以誡田先生毋言者,欲以成大事之謀也。今田先生以死明不言,豈丹之心哉!」荊軻坐定,太子避席頓首曰:「田先生不知丹之不肖,使得至前,敢有所道,此天之所以哀燕而不棄其孤也。今秦有貪利之心,而欲不可足也。非盡天下之地,臣海內之王者,其意不厭。今秦已虜韓王,盡納其地。又舉兵南伐楚,北臨趙;王翦將數十萬之>距漳、鄴,而李信出太原、雲中。趙不能支秦,必入臣,入臣則禍至燕。燕小弱,數困於兵,今計舉國不足以當秦。諸侯服秦,莫敢合從。丹之私計愚,以為誠得天下之勇士使於秦,闚以重利;秦王貪,其勢必得所願矣。誠得劫秦王,使悉反諸侯侵地,若曹沫之與齊桓公,則大善矣;則不可,因而刺殺之。彼秦大將擅兵於外而內有亂,則君臣相疑,以其閒諸侯得合從,其破秦必矣。此丹之上願,而不知所委命,唯荊卿留意焉。」久之,荊軻曰:「此國之大事也,臣駑下,恐不足任使。」太子前頓首,固請毋讓,然後許諾。於是尊荊卿為上卿,舍上舍。太子日造門下,供太牢具,異物閒進,車騎美女恣荊軻所欲,以順適其意。
久之,荊軻未有行意。秦將王翦破趙,虜趙王,盡收入其地,進兵北略地至燕南界。太子丹恐懼,乃請荊軻曰:「秦兵旦暮渡易水,則雖欲長侍足下,豈可得哉!」荊軻曰:「微太子言,臣願謁之。今行而毋信,則秦未可親也。夫樊將軍,秦王購之金千斤,邑萬家。誠得樊將軍首與燕督亢之地圖,奉獻秦王,秦王必說見臣,臣乃得有以報。」太子曰:「樊將軍窮困來歸丹,丹不忍以己之私而傷長者之意,願足下更慮之!」
荊軻知太子不忍,乃遂私見樊於期曰:「秦之遇將軍可謂深矣,父母宗族皆為戮沒。今聞購將軍首金千斤,邑萬家,將柰何?」於期仰天太息流涕曰:「於期每念之,常痛於骨髓,顧計不知所出耳!」荊軻曰:「今有一言可以解燕國之患,報將軍之仇者,何如?」於期乃前曰:「為之柰何?」荊軻曰:「願得將軍之首以獻秦王,秦王必喜而見臣,臣左手把其袖,右手揕其匈,然則將軍之仇報而燕見陵之愧除矣。將軍豈有意乎?」樊於期偏袒搤捥而進曰:「此臣之日夜切齒腐心也,乃今得聞教!」遂自剄。太子聞之,馳往,伏屍而哭,極哀。既已不可柰何,乃遂盛樊於期首函封之。
於是太子豫求天下之利匕首,得趙人徐夫人匕首,取之百金,使工以藥焠之,以試人,血濡縷,人無不立死者。乃裝為遣荊卿。燕國有勇士秦舞陽,年十三,殺人,人不敢忤視。乃令秦舞陽為副。荊軻有所待,欲與俱;其人居遠未來,而為治行。頃之,未發,太子遲之,疑其改悔,乃復請曰:「日已盡矣,荊卿豈有意哉?丹請得先遣秦舞陽。」荊軻怒,叱太子曰:「何太子之遣?往而不返者,豎子也!且提一匕首入不測之彊秦,僕所以留者,待吾客與俱。今太子遲之,請辭決矣!」遂發。
太子及賓客知其事者,皆白衣冠以送之。至易水之上,既祖,取道,高漸離擊筑,荊軻和而歌,為變徵之聲,士皆垂淚涕泣。又前而為歌曰:「風蕭蕭兮易水寒,壯士一去兮不復還!」復為羽聲忼慨,士皆瞋目,髮盡上指冠。於是荊軻就車而去,終已不顧。
遂至秦,持千金之資幣物,厚遺秦王寵臣中庶子蒙嘉。嘉為先言於秦王曰:「燕王誠振怖大王之威,不敢舉兵以逆軍吏,願舉國為內臣,比諸侯之列,給貢職如郡縣,而得奉守先王之宗廟。恐懼不敢自陳,謹斬樊於期之頭,及獻燕督亢之地圖,函封,燕王拜送于庭,使使以聞大王,唯大王命之。」秦王聞之,大喜,乃朝服,設九賓,見燕使者咸陽宮。荊軻奉樊於期頭函,而秦舞陽奉地圖柙,以次進。至陛,秦舞陽色變振恐,羣臣怪之。荊軻顧笑舞陽,前謝曰:「北蕃蠻夷之鄙人,未嘗見天子,故振慴。願大王少假借之,使得畢使於前。」秦王謂軻曰:「取舞陽所持地圖。」軻既取圖奏之,秦王發圖,圖窮而匕首見。因左手把秦王之袖,而右手持匕首揕之。未至身,秦王驚,自引而起,袖絕。拔劍,劍長,操其室。時惶急,劍堅,故不可立拔。荊軻逐秦王,秦王環柱而走。羣臣皆愕,卒起不意,盡失其度。而秦法,羣臣侍殿上者不得持尺寸之兵;諸郎中執兵皆陳殿下,非有詔召不得上。方急時,不及召下兵,以故荊軻乃逐秦王。而卒惶急,無以擊軻,而以手共搏之。是時侍醫夏無且以其所奉藥囊提荊軻也。秦王方環柱走,卒惶急,不知所為,左右乃曰:「王負劍!」負劍,遂拔以擊荊軻,斷其左股。荊軻廢,乃引其匕首以擿秦王,不中,中桐柱。秦王復擊軻,軻被八創。軻自知事不就,倚柱而笑,箕踞以罵曰:「事所以不成者,以欲生劫之,必得約契以報太子也。」於是左右既前殺軻,秦王不怡者良久。已而論功,賞羣臣及當坐者各有差,而賜夏無且黃金二百溢,曰:「無且愛我,乃以藥囊提荊軻也。」
於是秦王大怒,益發兵詣趙,詔王翦軍以伐燕。十月而拔薊城。燕王喜、太子丹等盡率其精兵東保於遼東。秦將李信追擊燕王急,代王嘉乃遺燕王喜書曰:「秦所以尤追燕急者,以太子丹故也。今王誠殺丹獻之秦王,秦王必解,而社稷幸得血食。」其後李信追丹,丹匿衍水中,燕王乃使使斬太子丹,欲獻之秦。秦復進兵攻之。後五年,秦卒滅燕,虜燕王喜。
형가는 위(衛)나라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제나라 사람으로, (뒤에 형가가) 위나라로 옮겨가자, 위나라 사람들은 그를 경경(慶卿)이라고 불렀고, 연(燕)나라로 가자 연나라 사람들은 그를 형경(荊卿)이라고 불렀다.
형경은 독서와 검술을 좋아해, 그 솜씨로 위원군(衛元君)에게 유세했으나 위원군이 (그를) 쓰지 않았다. 그 후 진(秦)나라가 위(魏)나라를 쳐서 동군(東郡)을 설치하고 원군의 친족을 야왕(野王)으로 옮기게 했다.
형가는 일찍이 떠돌아다니다 유차(楡次)를 지나게 되었을 때 갑섭(蓋聶)과 검술에 대해서 논했는데, 갑섭이 성을 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형가가 나가버리자, 어떤 사람이 형경을 다시 부르라고 말했다.
갑섭이 말하기를 “얼마 전에 내가 그와 검술을 논하다 걸맞지 않은 것이 있어서 내가 그를 노려보았소. 시험 삼아 가보시오, 그는 떠나버렸을 것이오. 감히 머무르려고 하지 않을 것이오.”라고 했다. 사람을 시켜 (형가가 머물렀던) 주인에게 가보게 하니, 형경은 이미 수레를 타고 유차를 떠나고 없었다. 사자가 돌아와서 이를 아뢰자, 갑섭이 말했다. “당연히 떠났을 것이오. 내가 지난번에 그를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으니 말이오!”
형가가 한단(邯鄲)에서 떠돌아다닐 때, 노구천(魯句踐)이 형가와 장기를 두었는데, (장기판의) 길을 다투다가 노구천이 성내어 그를 꾸짖자, 형가는 아무 말없이 달아났고, 그리하여 다시 만나지 않았다.
형가는 연나라로 가서 연나라의 개백정과 ‘축(筑)’을 잘 타는 고점리(高漸離)를 좋아하게 되었다. 형가는 술을 즐겨 날마다 개백정, 고점리와 연나라의 저자 거리에서 술을 마셨다. 술이 얼큰해지면 고점리가 ‘축’을 타고 형가는 그 소리에 맞추어 저자 가운데서 노래를 부르며, 서로 즐기기도 하고 뒤 이어 서로 울기도 했는데, 마치 옆에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형가는 비록 술꾼들과 사귀었지만, 그의 사람됨은 침착하고 글 읽기를 좋아했다. 그가 제후들에게 떠돌면서 모두 현인이나 호걸 장자와 사귀었다. 그가 연으로 가자, 연의 은사(隱士) 전광(田光)선생 역시 그를 잘 대우했는데,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아서였다.
얼마 뒤에, 마침 연나라의 태자단(丹)이 진(秦)나라의 인질로 있다가 달아나 연나라로 돌아왔다. 연나라의 태자단은 일찍이 조(趙)나라의 인질이 되었는데, 진나라의 왕 정(政, 훗날 진시황)은 조나라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단과 사이가 좋았다.
정이 즉위해 진나라의 왕이 되자, 단은 진나라의 인질이 되었다. 진나라의 왕이 연나라의 태자단을 잘 대우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단은 원망하고 도망쳐 돌아왔다. 돌아와서 진나라의 왕에게 보복하려고 했으나, 나라가 작고 힘으로 할 수 없었다. 그 후 진나라는 날마다 산동(山東) 지역으로 출병해 제·초·삼진(三晉)을 치면서 제후국의 땅을 조금씩 잠식하면서 장차 연에 이르려고 하자 연나라의 왕과 신하가 모두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했다.
태자단이 그것을 걱정하고 그의 스승 국무(鞠武)에게 물었다. 국무가 대답해 말하기를 “진나라의 영토는 천하에 고루 미쳐 한·위·조나라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감천(甘泉)·곡구(谷口)의 견고함이 있고, 남쪽으로는 경하(涇河)·위하(渭河)의 비옥함이 있으며, 파(巴)·한중(漢中)의 풍요로움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농(隴)·촉(蜀)의 산이 있고, 왼쪽에는 관(關)·효(殽)의 험준함이 있습니다. 백성들은 수가 많고 병사들은 패기가 넘치며, 무기와 장비도 넉넉합니다. 진나라가 쳐들어올 뜻이 있다면, 장성(長城)의 남쪽과 역수(易水)의 북쪽은 안정될 수 없습니다. 어찌 능멸을 당했다는 원한으로 진나라 왕의 노여움을 사려고 하십니까?”라고 말했다.
단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소?”라고 하자, “깊이 도모해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얼마 뒤에, 진나라의 장군 번오기(樊於期)가 진나라의 왕에게 죄를 짓고 연나라로 망명하자, 태자는 그를 받아들여 살게 했다. 국무가 간하기를 “아니 됩니다. 저 포악한 진나라의 왕이 연나라에 대해 원한을 쌓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오싹해지기에 족합니다. 또 번장군이 연나라에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는 ‘고기를 굶주린 호랑이가 다니는 길목에 던져놓는 것’으로 화를 반드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관(管, 관중)·안(晏, 안자)이 살아 있다고 해도 대책을 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태자께서 빨리 번장군을 흉노(匈奴)한테 보내어 구실을 없애도록 해주십시오. 서쪽으로는 삼진(三晉)과 맹약을 맺고, 남쪽으로는 제·초나라와 연합하며, 북쪽으로는 흉노의 선우(單于)와 친교를 맺으십시오. 그런 뒤에 비로소 진나라에 대한 대책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태자가 말했다. “사부의 계책은 너무나 오랜 시간을 요합니다. 마음이 어지러워 잠시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단지 그뿐만이 아니라, 저 번장군은 천하에서 궁하고 어렵게 되어 나에게 몸을 의탁했습니다. 나는 강한 진나라의 협박 때문에 슬프고 가련하게 된 친구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흉노에게 보낸다면 그것은 진실로 저의 명이 끝날 때입니다. 스승께서 다시 고려해주십시오.”
국무가 말했다. “무릇 위태로운 일을 행하고 편안함을 구하려 하거나, 화를 만들면서 복을 구한다면, 계책은 얕아지고 원망은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명의 새 친구와 교제하기 위해서 국가의 커다란 피해를 돌보지 않는다면, 이는 이른바 ‘원한을 쌓아 화를 조장하는 것’이 됩니다. 기러기 털을 화로의 숯불 위에 그슬린다면, 당연히 한순간에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또한 독수리나 매처럼 사나운 진나라가, 원망이 가득해 흉포한 노여움을 터뜨린다면, 어찌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연나라에 전광(田光)선생이 계시는데, 그의 사람됨은 지혜가 심원하고 용감하고 침착하니, 함께 의논할 만합니다.”
(그러자) 태자가 말했다. “스승의 주선으로 전광선생과 사귀고 싶었는데, 그럴 수 있겠습니까?” 국무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국무가 나가서 전광선생을 만나보고 말하기를 “태자께서 선생께 나랏일을 의논하고 싶어 하십니다.”라고 했다. 전광이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마침내 태자를 만나러 갔다.
태자는 전광을 나아가 맞이하고 뒤로 물러서면서 전광에게 길을 인도하더니, 무릎을 꿇고 (전광이 앉을) 자리를 털었다. 전광이 자리에 앉자, 좌우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태자는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의견을 청했다. “연나라와 진나라는 양립할 수 없으니, 선생께서 유념해 주시기를 바라오.” (그러자) 전광이 말하기를 “신이 듣기로는, 준마가 기운이 왕성할 때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리나, 노쇠하면 둔한 말도 그것을 앞선다고 합니다. 지금 태자께서는 제가 왕성할 때의 일만 들으시고, 저의 정력이 이미 다 사라진 것은 모르십니다. 비록 제가 감히 나랏일을 도모하지는 못하지만, 저와 잘 지내는 형경(荊卿)이 쓸 만합니다.”라고 했다. 태자가 말했다. “선생을 통해서 형경과 교제를 맺고 싶은데, 가능하겠소?” 전광은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즉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태자가 문까지 배웅을 하며 경계의 말을 했다. “제가 말한 것이나 선생이 말한 것은 나라의 큰일이니, 선생께서 누설하지 말아주십시오!” 전광이 고개를 숙이고 웃으며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전광은) 몸을 굽히고 가서 형경을 만나서 말했다. “내가 당신과 친하게 지냄은 연나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소. 지금 태자가 내가 한창이던 시절의 일만을 들었을 뿐, 내 몸이 이미 미치지 않음을 모르고, 황송하게도 내게 하교해 ‘연나라와 진나라는 양립할 수 없으니, 선생께서 유념해 주시오.’라고 하셨소. 나는 마음속으로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지 않고, 당신을 태자께 추천했으니, 당신이 왕궁으로 가서 태자를 뵙기를 바라오.”
형경이 말했다.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이에) 전광이 “내가 듣기로, 덕행이 있는 자는 일을 행함에 남에게 의심을 품게 하지 않는다고 했소. 지금 태자께서 내게 ‘말한 것은 나라의 큰일이니, 선생께서 누설하지 마시오.’라고 했소. 이는 태자가 나를 의심한 것이오. 무릇 행할 때 남의 의심을 받는 것은, 절개 있고 의협심 있는 행동이 아니오.”라고 말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형경을 격려하려 한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그대가 어서 빨리 태자에게 가서 전광은 이미 죽었다고 말하여 일이 누설되지 않았음을 밝혀주시오.”라고 하고는 이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형가가 곧 태자를 뵙고 전광선생은 이미 죽었다고 말하며 전광의 말을 전했다. 태자는 두 번 절하고 무릎을 꿇고, 무릎걸음으로 나아가며 눈물을 흘리더니, 잠시 후에 말했다.
“내가 전광선생께 말하지 말라고 경계한 것은 큰일을 이루고자 했기 때문이었소. 지금 전광선생이 죽음으로써 누설하지 않음을 밝혔는데 (그것이) 어찌 나의 마음이었겠는가!”
형가가 자리에 앉자, 태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전광선생은 내가 어질지 못함을 모르고, 내게 그대를 만나 감히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니, 이것은 하늘이 연을 불쌍히 여겨 나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오. 지금 진나라는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 있어, 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소. 천하의 땅을 다 빼앗고 천하의 왕들을 신하로 삼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오. 이제 진나라는 이미 한(韓)나라의 왕을 사로잡고, 그 땅을 전부 거두었소. 또한 군사를 일으켜 남쪽으로는 초나라를 치고, 북쪽으로는 조나라까지 임박했소. 왕전(王翦)이 수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장(漳)과 업(鄴)으로 갔으며, 이신(李信)은 태원(太原)과 운중(雲中)으로 출병했소. 조나라는 진나라를 지탱할 수 없어 반드시 (진나라로) 들어가 신하가 될 것이고, (조나라가 진나라로) 들어가 신하가 되면 그 화가 연나라에 미치게 되오.
연나라는 작고 약해 여러 차례 전쟁으로 곤궁을 당했는데, 이제는 온 나라를 헤아려도 진나라를 감당할 수 없소. 제후들이 진나라에 복종하고, 감히 합종하려는 자가 없소. 나의 개인적인 계책으로는, 천하의 용사를 얻어 진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해, 커다란 이익을 미끼로 내세우는 것이 좋을 듯하오. 진나라의 왕이 탐욕스러우니 그 형세는 반드시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오. 만일 진나라의 왕을 위협해, 제후들에게서 빼앗은 땅을 모두 돌려주게 한다면, 이는 조말(曹沫)이 제환공에게 했던 바와 같이 가장 좋은 일이 될 것이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를 찔러 죽여야 하오. 저 진나라의 대장들은 밖에서 군사를 통솔하고 있어 내부에서 난이 발생한다면, 임금과 신하가 서로 의심을 하게 될 것이니, 그 사이에 제후들이 합종한다면, 반드시 진나라를 깨트릴 수 있소. 이것이 나의 가장 큰 바람이나, 이러한 사명을 맡길 만한 사람을 모르고 있으니, 오직 형경(荊卿)이 유념해주기 바라오.”
한참 후에, 형가가 말하기를 “이는 나라의 큰일입니다. 신은 어리석고 재주가 없어 그러한 사명을 맡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태자가 앞으로 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사양하지 않기를 굳게 청했고, 그런 뒤에 (형가는) 허락했다.
그리하여 형가를 높여 상경(上卿)으로 삼고, 상등 관사에 머물게 했다. 태자가 날마다 관사로 가서 태뢰(太牢, 소·양·돼지)가 갖추어진 음식을 접대하고, 진기한 물건들을 간간이 주었다. 또한 수레·말·아름다운 여인 등을 보내 형가가 하고자 하는 바를 마음대로 하게 하면서 그의 마음을 사려고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형가는 떠날 뜻이 없었다. 진나라의 장군 왕전이 조나라를 쳐부수어, 조나라의 왕을 사로잡고, 그 영토를 모두 거두어들인 뒤, 북쪽으로 진격해 땅을 빼앗으며 연나라의 남쪽 경계까지 이르렀다. 태자단이 두려워하며 비로소 형가를 청해 말하기를 “진나라의 군대가 조만간 역수를 건너오면, 비록 오래도록 선생을 모시고 싶더라도, 어찌 그럴 수 있겠소?”라고 했다.
형가가 말했다. “태자의 말씀이 없었더라도, 신이 알현하려고 했습니다. 지금 진나라로 가더라도 믿음이 없으면 진나라의 왕에게 가까이할 수가 없습니다. 저 번장군은 진나라의 왕이 황금 1천 근과 만 호의 식읍(食邑)을 내걸고 찾고 있습니다. 만일 번장군의 목과 연 독항(督亢)의 지도를 얻어 진나라의 왕에게 바친다면, 진나라의 왕이 기뻐하며 반드시 신을 만날 것입니다. 그때에 신이 비로소 (태자께) 은혜를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태자는 “번장군은 곤궁에 처해 나에게 귀의했는데, 내가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덕행이 있는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짓은 차마 하지 못하겠으니, 선생께서 다시 고려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형가는 태자가 차마 번장군의 목을 베지 못할 것을 알고, 마침내 개인적으로 번장군을 만나서 말했다. “진나라가 장군을 대우함은 참으로 잔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종족은 모두 죽거나 노비가 되었습니다. 지금 장군의 목에다 황금 1천 근과 만 호의 식읍을 내걸었다고 들었습니다. 장차 이를 어찌하시렵니까?”
(이에) 번오기는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매번 그것을 생각하면 언제나 골수에 사무치도록 괴롭습니다. 그러나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형가가 말하기를 “지금 한마디 말로 연의 근심을 없애고, 장군의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했다.
번오기가 앞으로 나가서 말했다.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형가가 말했다. “장군의 목을 얻어 진의 왕에게 바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진나라의 왕은 반드시 기뻐해 저를 만나볼 것입니다. (그때) 제가 왼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고, 오른손으로 그의 가슴을 찌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장군의 원수를 갚고 연나라가 당한 모욕도 씻을 수 있습니다. 장군께서는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번오기가 한쪽 옷소매를 걷어 붙여 어깨를 드러내고, 한손으로 팔을 움켜쥐고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이는 내가 밤낮으로 이를 갈며 속을 썩이던 것이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태자가 이 소식을 듣고 달려가서 시체에 엎드려 통곡하며 매우 슬퍼했으나, 이미 어쩔 수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번오기의 목을 상자에 넣어 봉했다.
당시 태자는 일찍이 천하에서 예리한 비수를 구하던 중 조(趙)나라의 사람 서부인(徐夫人)의 비수를 얻었는데, 황금 1백 근을 지불했다.
장인에게 칼날에 독약을 묻혀 사람에게 시험해보게 하니, 피를 한 방울만 흘려도 즉시 죽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짐을 챙겨 형가를 진나라에 보내려고 했다. 연에는 진무양(秦舞陽)이라는 용사가 있었는데, 13세에 살인을 했기에, 사람들은 감히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이에 태자는 진무양을 형가의 조수로 삼았다. 형가에게는 기다려 함께 가려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멀리 살았으므로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형가의 행장이 다 꾸려졌다. 한참이 지나도 형가가 출발하지 않자, 태자는 그가 시간을 끈다고 여기며, 형가가 마음이 바뀌어 후회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그래서 다시 청해 말하기를 “날이 이미 다했는데, 형경께서는 무슨 다른 뜻이 있소? 진무양을 먼저 보내게 해주시오.”라고 했다.
형가가 성을 내며 태자를 질책하며 “태자께서는 어찌 무양을 보내려고 하십니까? 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풋내기입니다. 하물며 비수 한 자루를 들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강한 진나라에 들어가는 와중에, 제가 머무르고 있는 까닭은 제 길벗을 기다려 함께 가고자 해서입니다. 지금 태자께서 시간을 끈다고 하시니, 그럼 하직하고 떠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마침내 출발했다.
태자와 이 일을 아는 빈객들이 모두 흰 의관(衣冠)을 하고 그를 배웅했다. 역수가에 이르자 도조신(道祖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형가는 길에 올랐다. 고점리가 축을 타고, 형가가 화답해 노래를 불렀는데, 변치(變徵)의 소리를 내자,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바람소리 쓸쓸하고, 역수는 차갑구나.
장사가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
다시 우성(羽聲)으로 노래하니 그 소리가 강개해, 사람들이 모두 눈을 부릅떴고 머리카락이 관(冠)으로 치솟았다. 그리하여 형가는 수레를 타고 떠났는데,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침내 진나라에 도착한 형가는 천금이나 되는 예물을 진왕의 총신(寵臣) 중서자(中庶子) 몽가(蒙嘉)에게 주었다. 몽가는 형가를 위해서 진나라의 왕에게 먼저 말했다. “연나라의 왕이 참으로 대왕의 위엄을 두려워해 감히 군사를 일으켜 우리 군대에 항거하지 못하고, 나라를 들어 진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각 제후국의 행렬에 동참해서, 진나라의 군현(郡縣)처럼 공물과 부세를 바치어, 선왕의 종묘(宗廟)를 받들어 지킬 수 있기만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두렵고 떨려 감히 대왕께 직접 아뢰지 못하고, 삼가 번오기의 목을 베어 연나라의 독항의 지도와 함께 바치려고 상자에 넣어 봉해 왔습니다. 연나라의 왕이 궁정에서 증정 의식을 거행하고, 사자를 보내어 대왕께 자초지종을 아뢰도록 했으니, 대왕께서 그에게 명령을 내리소서.”
진 왕이 이를 듣고 매우 기뻐해 조복(朝服)을 갖추고, 구빈(九賓, 임금이 예의를 갖추어 맞이해야할 점잖은 아홉 손님. 즉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고(孤), 경(卿), 대부(大夫), 사(士)를 말함)의 예를 베풀어, 연나라 사자를 함양궁(咸陽宮)에서 만나기로 했다. 형가가 번오기의 목이 든 함을 받들고, 진무양이 독항의 지도가 든 갑을 받들고 차례로 나아갔다. 어전의 계단 밑에 이르자 진무양이 안색이 변하며 겁에 질려 벌벌 떨자, 여러 신하들이 이를 괴이하게 여겼다.
형가가 진무양을 돌아보고 웃고는 앞으로 나아가 사과하며 말하기를 “북방 오랑캐 땅에 천하게 살던 사람인지라 아직까지 천자를 뵌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떨며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이 사람의 무례를 용서하시고, 어전에서 사신의 임무를 마치게 해 주소서.”라고 했다.
그러자 진 왕이 형가에게 말했다. “진무양이 가지고 있는 지도를 가져오라.” 형가가 지도를 받아들어 진 왕에게 바치니, 진 왕이 지도를 펼쳤다. 지도가 다 펼쳐지자 비수가 보였다. (그러자) 형가는 왼손으로 진 왕의 옷소매를 붙잡고, 오른손으로는 비수를 쥐고 진 왕을 찔렀다. 미처 비수가 몸에 닿지 못했는데, 진 왕이 놀라서 몸을 당겨 일어서자, 소매가 잘라졌다. 진 왕이 칼을 뽑으려고 했으나, 칼이 길어 뽑지 못하고 칼집만 잡았다. 너무나도 황급한 데에다 굳게 꽂혀 있었으므로 즉시에 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형가가 진 왕을 추격하자, 진 왕은 기둥을 돌며 달아났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놀랐는데, 졸지에 일어난 일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진나라의 법에 의하면, 전상(殿上)에서 왕을 모시는 신하들은 한자나 한 치의 조그만 무기라도 몸에 지닐 수 없었으며, 여러 낭중(郎中)이 무기를 가지고 전하(殿下)에 늘어서 있었으나, 왕이 부르지 않을 때에는 전상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너무도 다급해, 아래에 있는 병사들을 부를 틈이 없었으므로, 형가가 진 왕을 쫓아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신들은 황급했고,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맨손으로 모두 형가를 내리쳤다. 이때 시의(侍醫) 하무저(夏無且)는 받쳐 들고 있던 약주머니를 형가에게 던졌다. 진 왕이 기둥을 돌며 달아나기만 할 뿐 황급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자,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말하기를 “왕께서는 칼을 등에 지십시오!”라고 했다.
진 왕이 칼을 등에 지고, 마침내 칼을 뽑아 형가를 쳐서, 그의 왼쪽 다리를 끊었다. 형가는 쓰러진 채 비수를 당기어 진 왕에게 던졌으나, 적중시키지 못하고 구리 기둥에 맞혔다. 그러자 진 왕은 다시 형가를 쳐서 여덟 군데나 상처를 입혔다. 형가는 스스로 일이 실패했음을 알고 기둥에 기대어 웃으며, 양쪽 다리를 벌리고 앉아 꾸짖어 말했다. “일이 실패한 까닭은 진 왕을 사로잡아 협박해, 반드시 약속을 받아내어 태자에게 보답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때 좌우의 많은 신하들이 몰려가서 형가를 죽였다. 진 왕은 오래도록 불쾌해 했다. 그런 뒤에 공을 논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상벌을 내렸는데, 각기 차등을 두었다. 하무저에게 황금 2백일(溢)을 주며 말하기를 “무저가 나를 사랑해, 약주머니를 형가에게 던졌다.”라고 했다.
이로써 진 왕은 크게 노하여 더욱 많은 군사를 동원해서 조나라로 보내고, 왕전의 군대에 조서를 내려 연나라를 치게 했다. 열 달 만에 계성(薊城)이 함락되자 연 왕 희(喜), 태자단 등은 모두 정예 병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나 요동(遼東)을 지켰다. 진 장군 이신(李信)이 급히 연 왕을 추격하자, 대왕(代王) 가(嘉)는 연 왕 희에게 곧 서신을 보냈다.
진나라가 특별히 연 왕을 추격하는 까닭은 태자단 때문입니다. 지금 왕께서 단을 죽여 진 왕에게 바친다면, 진 왕은 반드시 노여움을 풀고 용서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연나라의 수명이 연장되고, 사직(社稷)은 다행히 계속 제사를 받들게 될 것입니다.
그 후에도 이신이 단을 추격하자, 단은 연수(衍水) 가운데 있는 섬에 몸을 숨기었고, 연 왕은 사자를 보내 태자단의 목을 베어 진에 바치고자 했다. 진나라는 다시 병사를 보내 연나라를 쳤다. 5년 뒤, 진나라는 마침내 연나라를 멸하고 연 왕 희를 사로잡았다.
高漸離
其明年,秦并天下,立號為皇帝。於是秦逐太子丹、荊軻之客,皆亡。高漸離變名姓為人庸保,匿作於宋子。久之,作苦,聞其家堂上客擊筑,傍偟不能去。每出言曰:「彼有善有不善。」從者以告其主,曰:「彼庸乃知音,竊言是非。」家丈人召使前擊筑,一坐稱善,賜酒。而高漸離念久隱畏約無窮時,乃退,出其裝匣中筑與其善衣,更容貌而前。舉坐客皆驚,下與抗禮,以為上客。使擊筑而歌,客無不流涕而去者。宋子傳客之,聞於秦始皇。秦始皇召見,人有識者,乃曰:「高漸離也。」秦皇帝惜其善擊筑,重赦之,乃矐其目。使擊筑,未嘗不稱善。稍益近之,高漸離乃以鉛置筑中,復進得近,舉筑朴秦皇帝,不中。於是遂誅高漸離,終身不復近諸侯之人。
魯句踐已聞荊軻之刺秦王,私曰:「嗟乎,惜哉其不講於刺劍之術也!甚矣吾不知人也!曩者吾叱之,彼乃以我為非人也!」
그 이듬해에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칭호를 황제(皇帝)라 했다. 그리하여 진나라에서 태자단과 형가가 거느리던 객들을 추궁하자 그들은 모두 달아났다.
고점리는 성명을 바꾸고 남의 머슴이 되어, 송자(宋子)라는 곳에서 일했다. 그는 오랫동안 괴롭게 지냈는데, 주인 집 마루 위에서 객이 축을 타는 소리를 들으면, 주변을 방황하며 떠나지 못했다. 매번 말하기를 “어떤 곳은 잘 탔는데, 어떤 곳은 잘 타지 못했군.”이라고 했다. 하인이 그 주인에게 말하기를 “저 머슴은 소리를 들을 줄 아는지, 남몰래 잘하느니 잘못하느니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집 주인이 고점리를 불러 자기 앞에서 축을 타게 했는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잘한다고 칭찬하며 술을 주었다. 이에 고점리는 오랫동안 이렇게 숨어서 두려움과 가난 속에 살아보아야 끝이 없겠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물러나 짐짝에서 축과 좋은 옷을 꺼내어, 용모를 바꾸고 다시 나타났다. 자리에 앉아있던 객들이 모두 놀라서, 자리에서 내려와 서로 대등한 예의로 대하고, 그를 상객으로 모셨다. 그가 다시 축을 타며 노래를 불렀는데,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지 않은 객이 한 사람도 없었다.
송자 고을에서는 그를 돌아가며 손님으로 삼았고, 그 소문이 진시황(秦始皇)에게까지 들리게 되었다. 진시황이 그를 불러 만나보자, 어떤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고점리입니다.”라고 했다. 진시황은 축을 잘 타는 그의 솜씨를 아깝게 여겨, 죽을죄를 용서하는 대신 그의 눈을 멀게 만들어 축을 타게 했는데, 연주할 때마다 칭찬하지 않는 적이 없었다. 진시황이 나날이 그를 가까이하자, 고점리는 납덩어리를 축 속에 감추어두고, 다시 진시황 곁에 가까이 갔을 때 축을 들어 진시황을 내리쳤으나 맞지 않았다. 진시황은 결국 고점리를 죽이고, 평생 동안 제후국의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노나라 구천(魯句踐)은 형가가 진 왕을 찌르려 했다는 것을 듣고, 혼자 말했다. “아! 애석하구나, 그는 칼을 찌르는 기술을 중시하지 않았구나! 내가 너무 사람을 몰랐구나! 지난날 내가 그를 꾸짖었을 때, 그는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太史公曰:世言荊軻,其稱太子丹之命,「天雨粟,馬生角」也,太過。又言荊軻傷秦王,皆非也。始公孫季功、董生與夏無且游,具知其事,為余道之如是。自曹沫至荊軻五人,此其義或成或不成,然其立意較然,不欺其志,名垂後世,豈妄也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형가(荊軻)에 관한 세상의 이야기 가운데 태자단(丹)의 운명을 일컬어 ‘하늘에서 곡식이 내리고, 말의 머리에 뿔이 돋아났다.’라고 하는데, 이는 너무 지나친 것이다. 또한 형가가 진 왕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하는 것도 모두 그릇된 것이다. 당시 공손계공(公孫季功)과 동중서(董仲舒)가 하무저(夏無且)와 교유했기에 이 사건을 자세히 알고 있었고, 나를 위해 말해준 것이 위와 같다. 조말(曹沫)부터 형가에 이르기까지 다섯 사람은, 그 의(義)가 어떤 것은 이루어지기도 했고 어떤 것은 이루어지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결심은 매우 분명했고, 자신들의 뜻을 속이지도 않았으니, 이름을 후세에 남기는 것이 어찌 망령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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