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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史記列傳

史記 卷九一. 黥布列傳

by 柳川 2019. 6. 2.

黥布列傳



黥布者,六人也,姓英氏。秦時為布衣。少年,有客相之曰:「當刑而王。」及壯,坐法黥。布欣然笑曰;「人相我當刑而王,幾是乎?」人有聞者,共俳笑之。布已論輸麗山,麗山之徒數十萬人,布皆與其徒長豪桀交通,乃率其曹偶,亡之江中為群盜。

陳勝之起也,布乃見番君,與其眾叛秦,聚兵數千人。番君以其女妻之。章邯之滅陳勝,破呂臣軍,布乃引兵北擊秦左右校,破之清波,引兵而東。聞項梁定江東會稽,涉江而西。陳嬰以項氏世為楚將,乃以兵屬項梁,渡淮南,英布、蒲將軍亦以兵屬項梁。

項梁涉淮而西,擊景駒、秦嘉等,布常冠軍。項梁至薛,聞陳王定死,迺立楚懷王。項梁號為武信君,英布為當陽君。項梁敗死定陶,懷王徙都彭城,諸將英布亦皆保聚彭城。當是時,秦急圍趙,趙數使人請救。懷王使宋義為上將,范曾為末將,項籍為次將,英布、蒲將軍皆為將軍,悉屬宋義,北救趙。及項籍殺宋義於河上,懷王因立籍為上將軍,諸將皆屬項籍。項籍使布先渡河擊秦,布數有利,籍迺悉引兵涉河從之,遂破秦軍,降章邯等。楚兵常勝,功冠諸侯。諸侯兵皆以服屬楚者,以布數以少敗眾也。

項籍之引兵西至新安,又使布等夜擊阬章邯秦卒二十餘萬人。至關,不得入,又使布等先從閒道破關下軍,遂得入,至咸陽。布常為軍鋒。項王封諸將,立布為九江王,都六。

漢元年四月,諸侯皆罷戲下,各就國。項氏立懷王為義帝,徙都長沙,乃陰令九江王布等行擊之。其八月,布使將擊義帝,追殺之郴縣。

漢二年,齊王田榮畔楚,項王往擊齊,徵兵九江,九江王布稱病不往,遣將將數千人行。漢之敗楚彭城,布又稱病不佐楚。項王由此怨布,數使使者誚讓召布,布愈恐,不敢往。項王方北憂齊、趙,西患漢,所與者獨九江王,又多布材,欲親用之,以故未擊。

漢三年,漢王擊楚,大戰彭城,不利,出梁地,至虞,謂左右曰:「如彼等者,無足與計天下事。」謁者隨何進曰:「不審陛下所謂。」漢王曰:「孰能為我使淮南,令之發兵倍楚,留項王於齊數月,我之取天下可以百全。」隨何曰:「臣請使之。」乃與二十人俱,使淮南。至,因太宰主之,三日不得見。隨何因說太宰曰:「王之不見何,必以楚為彊,以漢為弱,此臣之所以為使。使何得見,言之而是邪,是大王所欲聞也;言之而非邪,使何等二十人伏斧質淮南市,以明王倍漢而與楚也。」太宰乃言之王,王見之。隨何曰:「漢王使臣敬進書大王御者,竊怪大王與楚何親也。」淮南王曰:「寡人北鄉而臣事之。」隨何曰:「大王與項王俱列為諸侯,北鄉而臣事之,必以楚為彊,可以讬國也。項王伐齊,身負板筑,以為士卒先,大王宜悉淮南之眾,身自將之,為楚軍前鋒,今乃發四千人以助楚。夫北面而臣事人者,固若是乎?夫漢王戰於彭城,項王未出齊也,大王宜騷淮南之兵渡淮,日夜會戰彭城下,大王撫萬人之眾,無一人渡淮者,垂拱而觀其孰勝。夫讬國於人者,固若是乎?大王提空名以鄉楚,而欲厚自讬,臣竊為大王不取也。然而大王不背楚者,以漢為弱也。夫楚兵雖彊,天下負之以不義之名,以其背盟約而殺義帝也。然而楚王恃戰勝自彊,漢王收諸侯,還守成皋、滎陽,下蜀、漢之粟,深溝壁壘,分卒守徼乘塞,楚人還兵,閒以梁地,深入敵國八九百里,欲戰則不得,攻城則力不能,老弱轉糧千里之外;楚兵至滎陽、成皋,漢堅守而不動,進則不得攻,退則不得解。故曰楚兵不足恃也。使楚勝漢,則諸侯自危懼而相救。夫楚之彊,適足以致天下之兵耳。故楚不如漢,其勢易見也。今大王不與萬全之漢而自讬於危亡之楚,臣竊為大王惑之。臣非以淮南之兵足以亡楚也。夫大王發兵而倍楚,項王必留;留數月,漢之取天下可以萬全。臣請與大王提劍而歸漢,漢王必裂地而封大王,又況淮南,淮南必大王有也。故漢王敬使使臣進愚計,願大王之留意也。」淮南王曰:「請奉命。」陰許畔楚與漢,未敢泄也。

楚使者在,方急責英布發兵,舍傳舍。隨何直入,坐楚使者上坐,曰:「九江王已歸漢,楚何以得發兵?」布愕然。楚使者起。何因說布曰:「事已搆,可遂殺楚使者,無使歸,而疾走漢并力。」布曰:「如使者教,因起兵而擊之耳。」於是殺使者,因起兵而攻楚。楚使項聲、龍且攻淮南,項王留而攻下邑。數月,龍且擊淮南,破布軍。布欲引兵走漢,恐楚王殺之,故閒行與何俱歸漢。

淮南王至,上方踞床洗,召布入見,布(甚)大怒,悔來,欲自殺。出就舍,帳御飲食從官如漢王居,布又大喜過望。於是乃使人入九江。楚已使項伯收九江兵,盡殺布妻子。布使者頗得故人幸臣,將眾數千人歸漢。漢益分布兵而與俱北,收兵至成皋。四年七月,立布為淮南王,與擊項籍。

漢五年,布使人入九江,得數縣。六年,布與劉賈入九江,誘大司馬周殷,周殷反楚,遂舉九江兵與漢擊楚,破之垓下。

項籍死,天下定,上置酒。上折隨何之功,謂何為腐儒,為天下安用腐儒。隨何跪曰:「夫陛下引兵攻彭城,楚王未去齊也,陛下發步卒五萬人,騎五千,能以取淮南乎?」上曰:「不能。」隨何曰:「陛下使何與二十人使淮南,至,如陛下之意,是何之功賢於步卒五萬人騎五千也。然而陛下謂何腐儒,為天下安用腐儒,何也?」上曰:「吾方圖子之功。」乃以隨何為護軍中尉。布遂剖符為淮南王,都六,九江、廬江、衡山、豫章郡皆屬布。

七年,朝陳。八年,朝雒陽。九年,朝長安。

十一年,高后誅淮陰侯,布因心恐。夏,漢誅梁王彭越,醢之,盛其醢遍賜諸侯。至淮南,淮南王方獵,見醢,因大恐,陰令人部聚兵,候伺旁郡警急。

布所幸姬疾,請就醫,醫家與中大夫賁赫對門,姬數如醫家,賁赫自以為侍中,乃厚餽遺,從姬飲醫家。姬侍王,從容語次,譽赫長者也。王怒曰:「汝安從知之?」具說狀。王疑其與亂。赫恐,稱病。王愈怒,欲捕赫。赫言變事,乘傳詣長安。布使人追,不及。赫至,上變,言布謀反有端,可先未發誅也。上讀其書,語蕭相國。相國曰:「布不宜有此,恐仇怨妄誣之。請擊赫,使人微驗淮南王。」淮南王布見赫以罪亡,上變,固已疑其言國陰事;漢使又來,頗有所驗,遂族赫家,發兵反。反書聞,上乃赦賁赫,以為將軍。

上召諸將問曰:「布反,為之柰何?」皆曰;「發兵擊之,阬豎子耳。何能為乎!」汝陰侯滕公召故楚令尹問之。令尹曰:「是故當反。」滕公曰:「上裂地而王之,疏爵而貴之,南面而立萬乘之主,其反何也?」令尹曰:「往年殺彭越,前年殺韓信,此三人者,同功一體之人也。自疑禍及身,故反耳。」滕公言之上曰:「臣客故楚令尹薛公者,其人有籌筴之計,可問。」上乃召見問薛公。薛公對曰:「布反不足怪也。使布出於上計,山東非漢之有也;出於中計,勝敗之數未可知也;出於下計,陛下安枕而臥矣。」上曰:「何謂上計?」令尹對曰:「東取吳,西取楚,并齊取魯,傳檄燕、趙,固守其所,山東非漢之有也。」「何謂中計?」「東取吳,西取楚,并韓取魏,據敖庾之粟,塞成皋之口,勝敗之數未可知也。」「何謂下計?」「東取吳,西取下蔡,歸重於越,身歸長沙,陛下安枕而臥,漢無事矣。」上曰:「是計將安出?」令尹對曰:「出下計。」上曰:「何謂廢上中計而出下計?」令尹曰:「布故麗山之徒也,自致萬乘之主,此皆為身,不顧後為百姓萬世慮者也,故曰出下計。」上曰:「善。」封薛公千戶。乃立皇子長為淮南王。上遂發兵自將東擊布。

布之初反,謂其將曰:「上老矣,厭兵,必不能來。使諸將,諸將獨患淮陰、彭越,今皆已死,餘不足畏也。」故遂反。果如薛公籌之,東擊荊,荊王劉賈走死富陵。盡劫其兵,渡淮擊楚。楚發兵與戰徐、僮閒,為三軍,欲以相救為奇。或說楚將曰:「布善用兵,民素畏之。且兵法,諸侯戰其地為散地。今別為三,彼敗吾一軍,餘皆走,安能相救!」不聽。布果破其一軍,其二軍散走。

遂西,與上兵遇蘄西,會甀。布兵精甚,上乃壁庸城,望布軍置陳如項籍軍,上惡之。與布相望見,遙謂布曰:「何苦而反?」布曰:「欲為帝耳。」上怒罵之,遂大戰。布軍敗走,渡淮,數止戰,不利,與百餘人走江南。布故與番君婚,以故長沙哀王使人紿布,偽與亡,誘走越,故信而隨之番陽。番陽人殺布茲鄉民田舍,遂滅黥布。

立皇子長為淮南王,封賁赫為期思侯,諸將率多以功封者。

評論[编辑]

太史公曰:英布者,其先豈春秋所見楚滅英、六,皋陶之後哉?身被刑法,何其拔興之暴也!項氏之所阬殺人以千萬數,而布常為首虐。功冠諸侯,用此得王,亦不免於身為世大僇。禍之興自愛姬殖,妒媢生患,竟以滅國!

【索隱述贊】九江初筮,當刑而王。既免徒中,聚盜江上。再雄楚卒,頻破秦將。病為羽疑,歸受漢杖。賁赫見毀,卒致無妄。




경포()는 육() 사람으로 성은 영씨()이고, 진() 때는 평민이었다. 젊었을 때 어떤 사람이 그의 상을 보고 “형벌을 받아야 되고 그 뒤에 왕이 되겠다.”라고 말했다.

장년이 되었을 때에 법에 연루되어 경형(, 죄인의 이마나 팔뚝 따위에 먹줄로 죄명을 써넣던 형벌, 즉 묵형)을 받게 되자 영포가 기쁘게 웃으며 “어떤 사람이 나의 상을 보고 ‘형벌을 받아야 되고 그 뒤에 왕이 되겠다.’라고 했는데, 아마도 이것이겠지?”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그를 놀리며 웃어댔다. 영포는 판결을 받고 여산()으로 보내졌다. 여산에는 죄수의 무리가 수십만 명이나 있었는데, 영포는 그 무리의 우두머리나 호걸들과 사귀며 내통했다. 그런 뒤에 그 무리를 이끌고 양자강() 부근으로 달아나서 떼도둑이 되었다.


진승()이 군사를 일으키자, 영포는 곧 파군()을 만나서, 그의 무리와 함께 진을 배반하고 수천 명의 군사를 모았다. 파군은 자기의 딸을 영포의 아내로 주었다.

장한()이 진승을 멸하고 여신()의 군사를 격파하자, 영포는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진의 좌우 교위()를 공격해 청파()에서 격파하고,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나아갔다. 항량(, 항우의 숙부)이 강동()의 회계()를 평정하고 양자강을 건너 서쪽으로 온다고 들었다. 진영()은 항씨() 집안이 대대로 초()의 장군이었음을 알고 군사를 항량에게 귀속시키고 회남()으로 건너갔다. 영포와 포장군() 또한 군사를 항량에게 귀속시켰다.

항량이 회수()를 건너 서쪽으로 가서 경구()·진가() 등을 공격했는데, 영포는 언제나 선봉에 있었다. 항량이 설()에 이르러 진왕()이 확실히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초회왕()을 세웠다. 그리고 항량의 호를 무신군()이라고 했고, 영포는 당양군()이라고 했다.

항량이 패해 정도()에서 죽자, 회왕은 도읍을 팽성()으로 옮겼다. 여러 장군들과 영포 또한 팽성에 모여 수비했다. 이때 진이 급히 조()를 포위하고 공격하니, 조는 몇 차례나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했다. 회왕은 송의()를 상장()으로 삼고, 범증()을 말장()으로, 항적()을 차장()으로 삼았다.

영포와 포장군도 모두 장군으로 삼아 송의에게 배속시키고, 북쪽으로 가서 조를 구하게 했다. 항적이 황하() 가에서 송의를 죽이자, 회왕이 항적을 세워 상장군으로 삼고 여러 장군들을 모두 항적에게 배속시켰다. 항적이 영포에게 먼저 황하를 건너 진을 공격하게 했다. 영포가 여러 번 승리하자 항적도 이에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영포를 뒤따라가 마침내 진의 군대를 격파하고, 장한 등을 항복시켰다. 초 군대는 항상 승리해 그 공이 제후들 가운데 으뜸이었다. 제후들의 군대가 모두 초에 복속하게 된 것은 영포가 여러 차례 적은 군사로써 많은 적군을 깨뜨렸기 때문이었다.


항적이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신안()에 이르러, 또 영포 등을 시켜 한밤중에 장한의 군대를 습격해 진 병사 20여 만 명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함곡관()에 이르러 들어갈 수 없게 되자, 또 영포에게 먼저 샛길로 쳐들어가서 함곡관 아래에 있는 진 군대를 깨뜨리게 하여 드디어 함곡관에 들어가 함양()에 이르렀다. 영포는 늘 군의 선봉이었다. 항왕(, 항우)이 여러 장수들을 봉하면서 영포를 구강왕()으로 세우고 육()에 도읍하게 했다.

한() 원년 4월에 제후들이 모두 항왕의 휘하에서 떠나 각자 자기의 봉국으로 갔다. 항씨는 회왕을 세워 의제()로 삼고, 도읍을 장사()로 옮기고 은밀히 구강왕 영포 등에게 명해 그를 치게 했다. 그해 8월에 영포가 장수를 시켜 의제를 치고 침현()까지 쫓아가 죽였다.


한 2년에 제왕() 전영()이 초를 배반하자, 항왕이 제를 치러 가면서 구강에서 군사를 징발했다. 구강왕 영포는 병을 핑계로 따라가지 않고, 장수를 시켜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게 했다. 한이 팽성에서 초를 격파했을 때에도 영포는 또 병을 핑계대면서 초를 돕지 않았다.

항왕이 이로 말미암아 영포를 원망하고,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책망하며 영포를 불렀다. 영포는 더욱 두려워하며 감히 가지 못했다. 항왕은 북쪽으로는 제와 조를 우려하고, 서쪽으로는 한을 근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단지 구강왕뿐이었다. 게다가 영포의 재능이 많았기 때문에, 그와 친근하게 기용하고 싶었기 때문에 영포를 치지 않았다.

(한 3년에) 한왕이 초를 공격해 팽성에서 크게 싸웠지만 불리해 양() 땅에서 퇴각해서 우()에 이르자 좌우의 신하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희 같은 자들과는 함께 천하의 일을 도모할 수가 없구나.”라고 하자, 알자(, 빈객을 주인에게 안내하는 사람) 수하()가 나와서 “폐하()께서 말씀하신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한왕이 말했다.

“누가 나를 위하여 회남()에 사자로 가서, 영포에게 군대를 일으켜 초를 배반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항왕을 몇 달 동안만 머무르게 한다면, 내가 천하를 얻는 것은 백의 하나 실수가 없을 것이다.”

수하가 “신이 그곳에 가도록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리하여 수하가 스무 명을 데리고 회남에 사신으로 갔다. 도착한 후 태재()의 집에 머물렀는데, 사흘이나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수하가 기회를 보아 태재에게 말했다.

“왕께서 저를 만나주시지 않는 것은 분명히 초가 강하고 한이 약하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사자로 왔습니다. 제게 왕을 뵙게 해주십시오. 제가 드리는 말씀이 옳다면 이는 대왕께서 듣고 싶어 하실 바이고, 제가 드리는 말씀이 그르다면 저희 스무 명을 회남의 저자에서 부질()의 형벌에 처하여 왕께서 한을 배반하고 초와 함께 한다는 것을 밝히십시오.”

태재가 그의 말을 왕께 아뢰자, 왕은 그를 만났다. 수하가 말하기를 “한왕께서 저에게 공경히 편지를 대왕의 측근에게 드리게 했습니다. 저는 대왕께서 초와 어떠한 친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라고 했다. 회남왕이 “과인은 북쪽을 향해 신하로서 섬기고 있소.”라고 말하니, 수하가 말했다.

“대왕께서는 항왕과 함께 제후의 항렬에 있으면서도, 북향해 신하로서 섬기는 것은 반드시 초가 강해 나라를 의탁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항왕이 제를 치면서 친히 성을 쌓기 위한 판자나 공이를 짊어지고 사졸들의 선봉이 되었습니다. 대왕께서도 마땅히 회남의 무리를 모두 동원해 몸소 그들을 이끌고 초 군대의 선봉이 되셨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겨우 사천 명을 보내 초를 돕고 있습니다. 무릇 북쪽을 향해 신하로서 남을 섬기는 사람이 이렇게 해야 되겠는지요?

또한 한왕이 팽성에서 싸울 때도 항왕이 제를 떠나기 전에 대왕께서는 마땅히 회남의 군사를 모두 동원해 회수를 건너가 밤낮으로 팽성 아래에서 한왕과 맞붙어 싸웠어야 하셨습니다. 그러나 대왕께서는 만여 대군을 거느리시고도 한사람도 회수를 건너게 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누가 이기는지를 바라보기만 하셨습니다. 무릇 나라를 남에게 의탁하셨다면서 진실로 이렇게 할 수 있으십니까?

대왕께서는 헛된 명분으로 초를 섬기면서 두텁게 자신을 맡기고자 하십니다. 저는 대왕께서 이를 취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왕께서 초를 배반하지 않는 것은 한이 약하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저 초 군대가 비록 강하지만 온 천하가 불의()의 오명을 씌우고 있습니다. 이는 초왕이 맹약을 저버리고 의제()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다 초왕은 전승을 믿고 스스로 강하다고 하지만, 한왕은 제후들을 거두어 돌아와서는 성고()와 형양()을 지키고 있으며, 촉()과 한()의 식량을 날라 오고 도랑을 깊이 파고 성벽을 굳게 하며, 군사를 나누어 변경을 지키고 요새를 방어하고 있습니다.

초 군대가 제에서 초로 돌아가려면 가운데 있는 양() 땅을 넘어서 적국을 8~9백 리나 깊이 들어가야 하니, 싸우고자 해도 싸울 수가 없고, 성을 공격하려 해도 힘이 모자라며, 노약자들이 천리 밖에서 식량을 날라 와야 합니다. 초 군대가 형양과 성고에 도착하더라도 한이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초 군대는 나아가 공격할 수도 없고 물러나 포위를 풀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초 군대는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초가 한을 이긴다면 제후들은 스스로 위기를 느끼고 두려워서 서로 구원할 것입니다. 무릇 초가 강대해지면 단지 천하의 군대를 불러들이게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초가 한만 못하다는 정세를 쉽게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모든 것이 안전한 한과 함께 하지 않고, 멸망의 위기에 처한 초에 스스로 의탁하려 하시니, 저는 대왕을 의혹스럽게 생각합니다. 제가 회남의 병력만으로 초를 멸망시키기에 넉넉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왕께서 출병하여 초를 배반하시면, 항왕은 반드시 제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항왕을 몇 달만이 머물게 한다면, 한이 천하를 취하는 것은 만의 하나의 실수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대왕과 함께 칼을 차고 한으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한왕은 반드시 땅을 떼어서 대왕을 봉하실 것이니, 하물며 회남 땅뿐이겠습니까? 회남 땅은 반드시 대왕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왕이 공경히 저를 사신으로 보내 어리석은 계책을 드리게 한 것이니, 대왕께서는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회남왕은 “말씀에 따르겠소.”라고 했다. 회남왕이 은밀히 초를 배반하고 한과 한편이 되겠다고 허락했지만, 감히 발설하지는 않았다.

초 사자가 회남왕에게 와 있으면서 급히 군대를 출동시키라고 영포에게 독촉하며 객사에 머물고 있었다. 수하는 곧바로 뛰어 들어가서 초 사자의 윗자리에 앉아 “구강왕이 이미 한에 귀속했는데, 초가 어떻게 병력을 동원할 수 있겠소?”라고 말하자, 영포는 깜짝 놀랐다.

초의 사자는 일어났다. 수하가 영포를 설득해 말하기를 “일은 이미 벌어졌으니, 초 사자를 죽여서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빨리 한으로 달려가서 힘을 합칩시다.”라고 하자, 영포는 “그대가 말한 대로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겠소.”라고 말했다.

이리하여 사자를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초를 공격했다. 초에서는 항성()과 용저()를 시켜 회남을 치게 하고, 항왕은 그대로 머물면서 하읍()을 쳤다. 몇 달 걸려 용저가 회남을 쳐서 영포의 군대를 깨뜨렸다. 영포는 군대를 이끌고 한으로 달아나려고 했으나, 초왕이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 샛길로 수하와 함께 한으로 돌아갔다.

회남왕이 이르렀을 때에 한왕이 마침 평상에 걸터앉아 발을 씻기고 있다가 영포를 불러들여 만났다. 이에 영포는 너무 화가 나서 한으로 온 것을 후회하고 자살하려고 했다.

물러나와 숙소로 나아가니 휘장과 의복, 음식이나 시종들이 한왕의 거처와 같았다. 영포는 바라던 것보다도 좋은 대우에 크게 기뻐했다. 이에 사람을 시켜서 구강에 들어가게 했더니, 초는 이미 항백()에게 구강의 군대를 몰수하고 영포의 아내와 자식을 모조리 죽이게 한 뒤였다.

영포의 사자는 오랜 친구들과 총신들을 꽤 많이 얻어 수천 명을 거느리고 한으로 돌아왔다. 한은 영포에게 더 많은 군대를 나누어 주고 함께 북쪽으로 가면서, 군대를 거두어 성고에 이르렀다. 한 4년 7월에 영포를 세워 회남왕으로 삼고, 함께 항우를 공격했다.

한 5년에 영포는 사람을 시켜 구강에 들어가 여러 고을을 획득했다. 6년에 영포가 유고(, 유방의 사촌형)와 함께 구강에 들어가 초 대사마() 주은()을 설득하니, 주은이 초를 배반하고 드디어 구강의 군대를 동원해 한과 함께 초를 공격해, 해하()에서 격파했다.

항우가 죽고 천하가 평정되자, 황상()이 술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황상이 수하의 공적을 깎아서 “수하는 썩은 선비이니, 천하를 다스리는 데 어찌 썩은 선비를 쓰겠는가?”라고 말했다. 수하가 꿇어앉아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군사를 이끌고 팽성을 치시고 초 왕이 아직 제를 떠나지 않았을 때, 보병 5만 명과 기병 5천 명으로 회남을 점령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하자, 황상은 “못했을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이에 수하가 말했다.

“폐하께서 저에게 스무 명과 함께 회남에 사자로 가게 하셨고, 저는 회남에 이르러 폐하의 뜻대로 했사옵니다. 이는 신의 공이 보병 5만 명과 기병 5천 명보다도 나은 것이옵니다.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수하는 썩은 선비이니, 천하를 다스리는 데 어찌 썩은 선비를 쓰겠는가?’라고 말씀하시니, 무슨 까닭이옵니까?”

한왕은 “내 장차 그대의 공을 생각하리라.”라고 말했다. 한왕이 이에 수하를 호군중위()로 임명했다. 영포는 드디어 부절()을 나누어 받고 회남왕이 되어 육()에 도읍하니, 구강()·여강()·형산()·예장() 등의 군()이 모두 영포에게 귀속되었다.

한 7년에 영포는 진()에서 조회를 드렸다. 8년에는 낙양()에서 조회를 드렸으며, 9년에는 장안()에서 조회를 드렸다.

한 11년에 고후()가 회음후()를 죽였다. 영포는 이로 인해 마음속으로 두려워했다. 여름에 한이 양왕() 팽월()을 죽여서 소금에 절이고, 소금에 절인 살덩이를 그릇에 담아 제후들에게 두루 하사했다. 그 살덩이가 회남에 도착했을 때에 회남왕은 마침 사냥 중이었는데, 소금에 절인 살덩이를 보고 몹시 두려워서 은밀히 사람을 시켜 병사를 모으고 이웃한 군의 동태를 살펴 위급한 사태를 경계하게 했다.

영포의 총희(,특별한 귀염과 사랑을 받는 여자)가 병들어 의사에게 치료를 받게 되었다. 의사의 집은 중대부() 비혁()의 집과 문을 마주 대하고 있었다. 총희가 자주 의사의 집에 갔다. 비혁은 자신이 전에 영포의 시중()이었기에 많은 선물을 주고, 총희를 따라 의사의 집에 가서 술을 마셨다.

총희가 회남왕을 모시고 한담을 나누다가, 비혁이 덕행이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회남왕이 노하여 “너는 어디서 그를 알게 되었느냐?”라고 묻자, 총희가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하지만 왕은 그들이 서로 사통()했다고 의심했다.

비혁이 두려워서 병이 들었다고 핑계를 댔다. 왕은 더욱 화가 나서 비혁을 잡아들이려고 했다. 비혁은 영포가 반란을 꾀한다고 고하려고 역마를 타고 장안으로 갔다.

영포가 사람을 시켜 쫓았지만 미치지 못했다. 비혁이 장안에 이르러 글을 올려 고하기를 “영포가 반란을 꾀하려는 단서가 있으니, 일이 터지기 전에 먼저 목을 베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황상이 그 글을 읽고는 소 상국()에게 말했다. 상국이 “영포는 그러한 일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아마도 무슨 원한이 있어 일부러 무고하는 것일 겁니다. 비혁을 붙잡아두고, 사람을 보내어 은밀히 회남왕을 살피게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회남왕 영포는 비혁이 죄를 짓고 달아난 데다 고조에게 변을 고했다는 사실을 알고 비혁이 자기 나라의 비밀을 말했을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이때 한의 사자가 와서 두루 증거를 찾아내자 마침내 비혁의 집안사람을 모두 죽이고 군대를 일으켜 한을 배반했다. 영포가 모반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황상은 곧 비혁을 풀어주고 장군으로 삼았다.

황상이 여러 장군들을 불러서 “영포가 배반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오?”라고 묻자, 모두들 “군대를 보내 쳐서 그놈을 구덩이에 묻어 죽일 뿐, 다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여음후() 등공()이 이전에 초 영윤()이었던 사람을 불러 물으니, 영윤은 “그가 배반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등공이 다시 “황상께서 땅을 떼 주어 그를 왕으로 봉하셨으며, 벼슬도 나눠 주어 귀하게 대해주셨는데, 남면해 만승()의 군주가 되고서도 배반하다니, 무슨 이유입니까?”라고 묻자, 영윤이 “황상께서 지난해에 팽월을 죽이고 그 전해에는 한신을 죽였습니다. 이 세 사람들은 같이 공을 세운 한 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화가 제 몸에 미칠 것을 의심해 모반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등공이 이 말을 황상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신의 식객 가운데 이전에 초의 영윤이었던 설공()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가 대단한 계략을 가지고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황상이 이에 설공을 불러 물어보니, 설공은 이렇게 대답했다.

“영포가 모반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만일 영포가 최상의 계책을 냈다면 산동()은 한의 소유가 아닐 것이며, 만일 중간의 계책을 썼다면 승패는 알 수 없을 것이고, 낮은 계책을 썼다면 폐하께서는 편안히 주무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황상이 “무엇을 최상의 계책이라고 하는가?”라고 묻자, 영윤이 대답해 말하기를 “영포가 동쪽으로는 오()를 취하고, 서쪽으로는 초()를 취하며, 제()를 병합하고 노()를 취한 뒤에, 격문()을 연()과 조()에 전하고 그곳을 굳게 지킨다면, 산동은 한()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라고 했다.

“무엇을 중간의 계책이라고 하는가?”

“동쪽으로 오를 취하고, 서쪽으로 초를 취하며, 한()을 병합하고 위()를 취한 후에, 오유()의 양곡을 점유해 성고의 어귀를 봉쇄한다면, 승패는 알 수 없습니다.”

“무엇을 낮은 계책이라고 하는가?”

“동쪽으로 오를 취하고, 서쪽으로 하채()를 취해 귀중한 물건은 월()에 두고 자신은 장사()로 돌아간다면, 폐하께서 편안히 주무셔도 한()은 별일이 없을 것입니다.”

황상이 “그가 장차 어느 계책을 쓸 것 같은가?”라고 묻자, 영윤은 “낮은 계책을 쓸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황상이 “어째서 최상의 계책과 중간의 계책을 버리고 낮은 계책을 쓸 것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으니, 영윤은 “영포는 본래 여산()의 무리로, 자기 힘으로 만승의 군주가 되었습니다. 이는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한 일이지 뒷날을 생각하고 백성 만대를 고려해서 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낮은 계책을 쓸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황상은 “좋구나!”라고 하고는 설공을 1천 호()에 봉했다. 그리고 황자() 장()을 세워 회남왕으로 삼았다. 황상은 마침내 군사를 동원해 직접 병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서 영포를 공격했다.



영포가 처음에 모반하면서 그 장수들에게 “황상은 늙어서 싸움을 싫어하니 반드시 올수 없을 것이다. 여러 장수들을 보내겠지만, 그 여러 장수들 가운데 오직 회음후와 팽월만이 걱정거리였는데, 이제 모두 이미 죽었으니, 나머지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라고 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과연 설공이 짐작했던 대로 영포는 동쪽으로는 형()을 쳤다. 형왕 유고()는 달아나다가 부릉()에서 죽었다. 영포는 그의 군대를 모두 빼앗아 거느리고 회수를 건너 초를 쳤다. 초가 군대를 동원해 서()와 동() 사이에서 싸웠는데,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서로 원조하는 기이한 계책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어떤 이가 초 장군에게 말했다.

“영포는 용병()에 뛰어나 백성들이 평소에 그를 두려워합니다. 또 병법에도 제후가 자기 나라 땅에서 싸우는 것을 산지()라고 했는데, 이제 군대를 나누어 셋으로 만들었는데, 저들이 우리의 한 군대를 깨뜨리면 나머지는 모두 달아날 터이니, 어지 서로 원조할 수 있겠습니까?”

초 장군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영포가 과연 그중의 한 군대를 격파하자, 나머지 두 군대는 흩어져 달아났다.

영포가 드디어 서쪽으로 나아가 황상의 군대와 기()의 서쪽 회추()에서 만났다. 영포의 군대는 매우 정예로웠다. 황상이 용성()에 성벽을 쌓고 영포의 군대를 바라보니 진을 친 것이 항우의 군대와 같았다. 황상은 그가 미워졌다. 영포와 서로 바라보다가 멀리서 영포에게 “무엇이 아쉬워서 모반했는가?”라고 하니, 영포는 “황제가 되고 싶었을 뿐이오.”라고 했다. 황상이 노여워하며 그를 꾸짖고, 드디어 크게 싸움을 벌였다. 영포의 군사가 패해 달아나 회수를 건너고, 여러 번 멈추어 싸웠으나 불리해지자 1백여 명과 함께 강남()으로 달아났다.

영포는 본래 파군()의 딸과 결혼했는데, 이 때문에 장사()의 애왕()이 사람을 영포에게 보내 거짓으로 함께 도망하여 월로 달아나자고 꾀니, 영포는 그 말을 믿고 파양()으로 따라갔다. 파양 사람이 영포를 자향()의 농가에서 죽이고 마침내 이어서 영포의 일족을 없앴다.

황상이 황자 장()을 세워 회남왕으로 삼고, 비혁을 기사후()로 봉했으며, 여러 장수들도 대부분 공에 따라 봉해졌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영포()는 그 조상이 어쩌면 『춘추()』에서 ‘초()가 영()·육()을 멸망시켰다.’라고 되어 있는 영씨일 것이니, 바로 고요()의 후예가 아닐까? 몸에 형벌을 받고서도 어떻게 빨리 일어났을까? 항씨(, 항우)가 구덩이에 묻어 죽인 사람은 천만 명이나 되는데, 영포는 언제나 그 포악한 일의 우두머리였다. 그의 공은 제후들 가운데 으뜸이었다. 이 때문에 왕이 되었지만 그의 몸 역시 세상의 치욕을 면하지 못했다. 재앙은 사랑하는 여자로부터 시작되었고 질투가 환란을 만들어 마침내 그 나라까지 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