酈生陸賈列傳
酈食其
酈生食其者,陳留高陽人也。好讀書,家貧落魄,無以為衣食業,為里監門吏。然縣中賢豪不敢役,縣中皆謂之狂生。
及陳勝、項梁等起,諸將徇地過高陽者數十人,酈生聞其將皆握齱好苛禮自用,不能聽大度之言,酈生乃深自藏匿。後聞沛公將兵略地陳留郊,沛公麾下騎士適酈生裏中子也,沛公時時問邑中賢士豪俊。騎士歸,酈生見謂之曰:「吾聞沛公慢而易人,多大略,此真吾所願從游,莫為我先。若見沛公,謂曰『臣里中有酈生,年六十餘,長八尺,人皆謂之狂生,生自謂我非狂生』。」騎士曰:「沛公不好儒,諸客冠儒冠來者,沛公輒解其冠,溲溺其中。與人言,常大罵。未可以儒生說也。」酈生曰:「弟言之。」騎士從容言如酈生所誡者。
沛公至高陽傳舍,使人召酈生。酈生至,入謁,沛公方倨床使兩女子洗足,而見酈生。酈生入,則長揖不拜,曰:「足下欲助秦攻諸侯乎?且欲率諸侯破秦也?」沛公罵曰:「豎儒!夫天下同苦秦久矣,故諸侯相率而攻秦,何謂助秦攻諸侯乎?」酈生曰:「必聚徒合義兵誅無道秦,不宜倨見長者。」於是沛公輟洗,起攝衣,延酈生上坐,謝之。酈生因言六國從橫時。沛公喜,賜酈生食,問曰:「計將安出?」酈生曰:「足下起糾合之眾,收散亂之兵,不滿萬人,欲以徑入彊秦,此所謂探虎口者也。夫陳留,天下之衝,四通五達之郊也,今其城又多積粟。臣善其令,請得使之,令下足下。即不聽,足下舉兵攻之,臣為內應。」於是遣酈生行,沛公引兵隨之,遂下陳留。號酈食其為廣野君。
酈生言其弟酈商,使將數千人從沛公西南略地。酈生常為說客,馳使諸侯。
漢三年秋,項羽擊漢,拔滎陽,漢兵遁保鞏、洛。楚人聞淮陰侯破趙,彭越數反梁地,則分兵救之。淮陰方東擊齊,漢王數困滎陽、成皋,計欲捐成皋以東,屯鞏、洛以拒楚。酈生因曰:「臣聞知天之天者,王事可成;不知天之天者,王事不可成。王者以民人為天,而民人以食為天。夫敖倉,天下轉輸久矣,臣聞其下乃有藏粟甚多。楚人拔滎陽,不堅守敖倉,乃引而東,令適卒分守成皋,此乃天所以資漢也。方今楚易取而漢反卻,自奪其便,臣竊以為過矣。且兩雄不俱立,楚漢久相持不決,百姓騷動,海內搖蕩,農夫釋耒,工女下機,天下之心未有所定也。願足下急復進兵,收取滎陽,據敖倉之粟,塞成皋之險,杜大行之道,距蜚狐之口,守白馬之津,以示諸侯效實形制之勢,則天下知所歸矣。方今燕、趙已定,唯齊未下。今田廣據千里之齊,田閒將二十萬之眾,軍於歷城,諸田宗彊,負海阻河濟,南近楚,人多變詐,足下雖遣數十萬師,未可以歲月破也。臣請得奉明詔說齊王,使為漢而稱東藩。」上曰:「善。」
乃從其畫,復守敖倉,而使酈生說齊王曰:「王知天下之所歸乎?」王曰:「不知也。」曰:「王知天下之所歸,則齊國可得而有也;若不知天下之所歸,即齊國未可得保也。」齊王曰:「天下何所歸?」曰:「歸漢。」曰:「先生何以言之?」曰:「漢王與項王力西面擊秦,約先入咸陽者王之。漢王先入咸陽,項王負約不與而王之漢中。項王遷殺義帝,漢王聞之,起蜀漢之兵擊三秦,出關而責義帝之處,收天下之兵,立諸侯之後。降城即以侯其將,得賂即以分其士,與天下同其利,豪英賢才皆樂為之用。諸侯之兵四面而至,蜀漢之粟方船而下。項王有倍約之名,殺義帝之負;於人之功無所記,於人之罪無所忘;戰勝而不得其賞,拔城而不得其封;非項氏莫得用事;為人刻印,刓而不能授;攻城得賂,積而不能賞:天下畔之,賢才怨之,而莫為之用。故天下之士歸於漢王,可坐而策也。夫漢王發蜀漢,定三秦;涉西河之外,援上黨之兵;下井陘,誅成安君;破北魏,舉三十二城:此蚩尤之兵也,非人之力也,天之福也。今已據敖倉之粟,塞成皋之險,守白馬之津,杜大行之阪,距蜚狐之口,天下後服者先亡矣。王疾先下漢王,齊國社稷可得而保也;不下漢王,危亡可立而待也。」田廣以為然,乃聽酈生,罷歷下兵守戰備,與酈生日縱酒。
淮陰侯聞酈生伏軾下齊七十餘城,乃夜度兵平原襲齊。齊王田廣聞漢兵至,以為酈生賣己,乃曰:「汝能止漢軍,我活汝;不然,我將亨汝!」酈生曰:「舉大事不細謹,盛德不辭讓。而公不為若更言!」齊王遂亨酈生,引兵東走。
漢十二年,曲周侯酈商以丞相將兵擊黥布有功。高祖舉列侯功臣,思酈食其。酈食其子疥數將兵,功未當侯,上以其父故,封疥為高梁侯。後更食武遂,嗣三世。元狩元年中,武遂侯平坐詐詔衡山王取百斤金,當棄市,病死,國除也。
역생(酈生) 이기(食其)는 진류(陳留) 고양(高陽) 사람이다. 그는 글 읽기를 좋아했으나 집안이 가난해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의식을 해결할 일이 없자 마을의 문을 관리하는 작은 관리가 되었다.
그러나 현 안의 현인이나 호걸들은 그를 쓰지 않았고, 현 안에서 모두 그를 미치광이 선생이라고 불렀다.
진승(陳勝)과 항량(項梁) 등이 군사를 일으키자 여러 장수들이 각지를 공략하했는데, 고양을 지나간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되었다. 역생은 그들 장수들이 모두 도량이 작고 까다로운 예절을 좋아하며 자기만 옳다고 여길 뿐, 도량이 큰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듣고 자신의 계략을 깊이 감추고 있었다.
뒤에 역생은 패공(沛公)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류의 교외를 공략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패공 휘하의 한 기병(騎兵)이 마침 역생과 같은 마을사람이었는데, 패공은 가끔 그 기병에게 읍 사람들 가운데 언진 선비와 호걸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그 기병이 마을로 돌아오자, 역생은 그를 보고 말했다. “나는 패공이 거만하고 남을 업신여기지만 원대한 뜻을 가졌다고 들었네. 그분이 바로 내가 따르고 싶은 사람이지만, 나를 소개해주는 사람이 없었네. 만일 패공을 보거든 ‘제 고향에 역생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이는 60살 남짓이고, 키는 8척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미치광이라고 부르지만, 본인 스스로는 미치광이가 아니라고 합니다.’라고 말해주시게!”
기병이 말했다. “패공은 선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빈객 중에 관을 쓰고 오는 사람이 있으면 패공은 언제나 그 빈객의 관을 빼앗아 그 안에 오줌을 싸버립니다. 사람과 이야기할 때 늘 큰 소리로 욕하곤 하니, 선비로서 유세한다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역생이 말했다. “어쨌든 말을 전해주시게.” 기사는 역생이 부탁한 말을 침착하게 패공에게 아뢰었다.
패공은 고양의 객사에 이르자 사람을 보내 역생을 불렀다. 역생이 이르러 알현하러 들어가니 그때 패공은 막 침상에 걸터앉은 채 두 여자에게 발을 씻기고 있었는데 그 자세 그대로 역생을 만났다. 역생은 들어가서 길게 읍을 할 뿐 절하지 않고 말했다.
“공께서는 진(秦)을 도와 제후들을 치려하십니까? 아니면 제후들을 이끌고 진을 치려하십니까?” 그러자 패공은 역생을 꾸짖으며 말했다. “이 선비 놈아! 천하가 진에게 고초를 당한 지가 오래되었다. 그래서 제후들이 서로 협력해 진을 치려고 하는데, 네놈이 어찌 진을 도와 제후들을 친다고 말하느냐?”
역생이 말했다. “공께서 반드시 무리를 모으고 의병을 합쳐서 무도한 진을 없애고자 하신다면 걸터앉아서 나이든 사람을 만나서는 안 됩니다.” 이에 패공은 발 씻기를 멈추고 일어나서 옷을 단정히 하고 역생을 안내해 윗자리에 앉힌 뒤 사과했다.
이에 역생이 6국이 합종연횡(合縱連橫)한 형세에 대해 말했다. 패공이 기뻐서 역생에게 음식을 대접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장차 어떤 계책을 써야겠소?” 역생이 말했다. “공께서는 규합한 무리에서 일어나서 뿔뿔이 흩어진 병사를 모으셨지만 그 수 또한 만 명을 넘지 않는데도 강한 진을 치려하시는 것은 호랑이의 입을 더듬는 격입니다. 진류는 천하의 요충지이고 사방으로 통하는 길목이며, 지금 성 안에는 많은 식량을 쌓여져 있습니다. 제가 진류의 현령과 친분이 있으니 사신으로서 보내주시면 공께 항복하게 만들겠습니다. 만일 그가 제 말을 듣지 않는다면 공께서 군대를 일으켜 공격하십시오. 제가 성 안에서 대응하겠습니다.”
이에 패공은 역생을 사신으로 보내고, 군대를 이끌고 그의 뒤를 따라가서 마침내 진류를 항복시켰다. 이에 패공은 역이기를 광야군(廣野君)에 봉했다.
역생은 자기의 동생 역상(酈商)에게 수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패공을 따라 서남쪽 지방을 공격하게 했다. 역생은 언제나 유세객이 되어 제후들의 나라를 사신으로 왕래했다.
한(漢) 3년 가을에 항우(項羽)가 한을 공격해 형양(滎陽)을 함락시키니, 한은 공(鞏)과 낙양(洛陽) 일대로 퇴각해 주둔했다. 그 무렵 초(楚)는 회음후(淮陰侯)가 조(趙)를 공격하고, 팽월(彭越)이 여러 차례 양(梁) 땅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파견해 조와 양을 구원했다.
회음후가 동쪽으로 제(齊)를 공격하고 있을 때, 한왕은 여러 차례 형양과 성고(成皐)에서 곤란을 당해서 성고 동쪽을 포기하고 공과 낙양 사이에 군대를 주둔시켜 초에 대항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역생이 말했다. “신은 ‘하늘이 하늘이 된 까닭을 아는 사람은 왕업을 이룰 수 있고, 하늘이 하늘이 된 까닭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왕업을 이룰 수가 없으며, 왕은 백성을 하늘로 알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고 들었습니다. 저 오창(敖倉)에 천하의 곡식을 실어다 놓은 지 오래되었고, 신은 거기에 쌓아놓은 식량이 매우 많다고 들었습니다.
초 군대가 형양을 함락시킨 뒤에 오창을 그렇게 견고하게 수비하지 않고,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동진하고 죄를 지어 변방으로 쫓겨나 병사가 된 자들에게 성고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있으니 이것은 하늘이 한을 돕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초의 군대를 공격해 쉽게 취할 수 있는 때인데, 한은 오히려 퇴각하는 것은 스스로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신은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두 영웅이 함께 설 수는 없습니다. 초와 한이 오랫동안 대치하기만 하고 승패가 결정되지 않는다면, 백성들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천하가 불안해하며 농민들은 쟁기를 버리고 베 짜는 여인들은 베틀에서 내려올 것이니 천하의 민심이 안정되지 못할 것입니다.
왕께서는 즉시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형양을 회복하고 오창의 식량을 차지한 뒤, 성고의 요새를 막고 대행(大行)으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며, 비호(蜚狐)의 입구를 가로막고, 백마(白馬)의 나루터를 지켜 제후들에게 실제를 중시하고 유리한 지형을 점거해 적을 누르고 있다는 형세를 보여주신다면 천하는 돌아갈 곳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 연(燕)과 조는 이미 평정되었으나 오직 제만이 항복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전광(田廣)은 넓은 제를 차지하고 있고, 전간(田間)은 2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역하(歷城)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전씨 일족의 세력은 강하고, 바다를 등지고 황하와 제수(濟水)로 앞이 가로막혀 있고, 남쪽으로는 초에 가깝고, 사람들은 권모술수에 능합니다. 왕께서 비록 수십만 명의 군사를 파견해 공격한다 하더라도 짧은 시간 안에 격파하실 수 없습니다. 신이 조칙을 받들어 제 왕을 설득해 그들이 한에 귀속해 동쪽의 속국이 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에 한왕은 좋다고 말했다.
한왕은 역생의 계획에 따라 다시 오창을 지키고, 아울러 역생을 제에 사신으로 보내 제 왕을 설득하게 했다.
역생이 제 왕에게 말했다. “왕께서는 천하의 민심이 어디로 돌아갈 것인지 알고 계십니까?” 제 왕이 말했다. “모르오.” 역생이 말했다. “왕께서 만일에 천하의 민심이 어디로 돌아갈지 아신다면 제를 보전하실 수 있겠지만, 만약 천하의 민심이 어디로 돌아갈지를 모르신다면 제를 보전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제 왕이 물었다. 민심이 어디로 돌아갈 것 같소?” 역생이 말했다. “한왕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제 왕이 말했다. “그대는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오?”
역생이 말했다. “한왕과 항왕(項王)은 힘을 합쳐 진을 공격해 함양(咸陽)에 먼저 들어서는 자가 왕이 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한왕이 먼저 함양에 입성하자 항왕은 약속을 저버리고 한왕에게 함양을 주지 아니하고, 한중(漢中)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항왕은 의제(義帝)를 내쫒아 죽였습니다. 한왕이 이 소식을 듣고서 즉시 촉한(蜀漢)의 군대를 동원해 삼진(三秦)을 공격하고, 함곡관(函谷關)을 나와서 의제를 살해한 죄를 따졌습니다. 그리고 천하의 병사를 수습하고, 각 제후의 후예를 세웠습니다. 성을 빼앗으면 바로 그 장수를 후(侯)로 봉하고, 재물을 얻으면 바로 그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어, 천하와 더불어 그 이익을 함께 해 영웅·호걸·현인·재사 등은 모두 한왕에게 기꺼이 기용되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제후들의 군대가 사방에서 왔으며, 촉한의 곡식이 지금 배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항왕에게는 약속을 배반했다는 악명과 의제를 살해했다는 큰 죄가 있으며, 또한 다른 사람의 공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지 않고, 싸워서 이겨도 상을 내린 적이 없으며, 성을 함락시켜도 봉토를 내린 적이 없습니다. 또한 항씨의 일족이 아니면 권력을 잡을 수가 없으며, 사람을 봉하기 위해서 후인(侯印)을 새겨두고 아까워서 달아 없어질 때까지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을 공격해 재물을 얻어도 쌓아둘 뿐 상으로 주지 않습니다.
이런 까닭에 천하의 사람들은 그에게 반기를 들고 현인과 재사들은 그를 원망하며 그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선비들이 한왕께 돌아간다는 것은 앉아서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한왕께서는 촉한에서 군대를 일으켜서 삼진을 평정하셨고, 서하(西河)를 건너 상당(上黨)의 군대를 모아 정형(井陘)을 점령해 성안군(成安君)을 죽였으며, 북위(北魏)를 격파해 32개의 성을 함락시키셨습니다. 이것은 치우(蚩尤)의 군대와 같은 것으로 사람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려준 복입니다.
지금 한왕께서는 이미 오창의 곡식을 차지하시고, 성고의 요새를 막으시고, 백마진을 지키고 태행산으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시고, 비호의 입구를 장악하셨으니, 만일 천하에서 뒤에 항복하는 먼저 멸망할 것입니다. 왕께서 서둘러 한왕에게 항복하신다면 제나라의 사직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왕에게 항복하지 않으신다면 멸망을 선 채로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전광은 그렇다고 여기고 역생의 말을 따라 역하(歷下)의 병사를 거둬들인 뒤 역생과 날마다 마음껏 술을 마셨다.
회음후는 역생이 수레 위에 앉은 채로 제의 70여 성을 항복시켰다는 것을 들고, 밤을 틈타 군대를 평원(平原)에서 황하를 건너게 해 제를 급습했다. 제 왕 전광은 한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역생이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네가 만일 한 군대를 멈추게 한다면 너를 살려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를 삶아 죽이겠다!”
그러자 역생이 말했다. “큰 일을 하는 사람은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않으며, 덕이 높은 사람은 남의 비난을 신경 쓰지 않는다. 내 너를 위해서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제 왕은 결국 역생을 삶아 죽이고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한 12년에 곡주후(曲周侯) 역상은 승상으로서 군대를 거느리고 경포(黥布)를 공격해 공을 세웠다. 고조는 열후(列侯)와 공신들에게 봉토를 나누어줄 때 역이기를 생각했다.
역이기의 아들 개(疥)는 일찍이 여러 차례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했으나 전공(戰功)이 후에 봉해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고조는 그 아버지 역이기 때문에 개를 고량후(高梁侯)에 봉했다. 그 뒤에 다시 무수(武遂)를 식읍으로 주었고 3대까지 계승했다. 원수(元狩, 한무제의 연호) 원년에 무수후(武遂侯) 평(平)이 조칙을 위조해 형산왕(衡山王)에게 황금 100근(斤)을 사취하는 죄를 지어 마땅히 기시(棄市, 저자거리에서 처형되어 길거리에 버려지는 형벌)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병으로 죽어 그의 봉국은 없어졌다.
역생(酈生) 이기(食其)는 진류(陳留) 고양(高陽) 사람이다. 그는 글 읽기를 좋아했으나 집안이 가난해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의식을 해결할 일이 없자 마을의 문을 관리하는 작은 관리가 되었다.
陸賈
陸賈者,楚人也。以客從高祖定天下,名為有口辯士,居左右,常使諸侯。
及高祖時,中國初定,尉他平南越,因王之。高祖使陸賈賜尉他印為南越王。陸生至,尉他魋結箕倨見陸生。陸生因進說他曰:「足下中國人,親戚昆弟墳在真定。今足下反天性,棄冠帶,欲以區區之越與天子抗衡為敵國,禍且及身矣。且夫秦失其政,諸侯豪桀并起,唯漢王先入關,據咸陽。項羽倍約,自立為西楚霸王,諸侯皆屬,可謂至彊。然漢王起巴蜀,鞭笞天下,劫略諸侯,遂誅項羽滅之。五年之閒,海內平定,此非人力,天之所建也。天子聞君王王南越,不助天下誅暴逆,將相欲移兵而誅王,天子憐百姓新勞苦,故且休之,遣臣授君王印,剖符通使。君王宜郊迎,北面稱臣,乃欲以新造未集之越,屈彊於此。漢誠聞之,掘燒王先人冢,夷滅宗族,使一偏將將十萬眾臨越,則越殺王降漢,如反覆手耳。」
於是尉他乃蹶然起坐,謝陸生曰:「居蠻夷中久,殊失禮義。」因問陸生曰:「我孰與蕭何、曹參、韓信賢?」陸生曰:「王似賢。」復曰:「我孰與皇帝賢?」陸生曰:「皇帝起豐沛,討暴秦,誅彊楚,為天下興利除害,繼五帝三王之業,統理中國。中國之人以億計,地方萬里,居天下之膏腴,人眾車轝,萬物殷富,政由一家,自天地剖泮未始有也。今王眾不過數十萬,皆蠻夷,崎嶇山海閒,譬若漢一郡,王何乃比於漢!」尉他大笑曰:「吾不起中國,故王此。使我居中國,何渠不若漢?」乃大說陸生,留與飲數月。曰:「越中無足與語,至生來,令我日聞所不聞。」賜陸生橐中裝直千金,他送亦千金。陸生卒拜尉他為南越王,令稱臣奉漢約。歸報,高祖大悅,拜賈為太中大夫。
陸生時時前說稱詩書。高帝罵之曰:「乃公居馬上而得之,安事詩書!」陸生曰;「居馬上得之,寧可以馬上治之乎?且湯武逆取而以順守之,文武并用,長久之術也。昔者吳王夫差、智伯極武而亡;秦任刑法不變,卒滅趙氏。鄉使秦已并天下,行仁義,法先聖,陛下安得而有之?」高帝不懌而有慚色,乃謂陸生曰:「試為我著秦所以失天下,吾所以得之者何,及古成敗之國。」陸生乃粗述存亡之徵,凡著十二篇。每奏一篇,高帝未嘗不稱善,左右呼萬歲,號其書曰「新語」。
孝惠帝時,呂太后用事,欲王諸呂,畏大臣有口者,陸生自度不能爭之,乃病免家居。以好畤田地善,可以家焉。有五男,乃出所使越得橐中裝賣千金,分其子,子二百金,令為生產。陸生常安車駟馬,從歌舞鼓琴瑟侍者十人,寶劍直百金,謂其子曰:「與汝約:過汝,汝給吾人馬酒食,極欲,十日而更。所死家,得寶劍車騎侍從者。一歲中往來過他客,率不過再三過,數見不鮮,無久慁公為也。」
呂太后時,王諸呂,諸呂擅權,欲劫少主,危劉氏。右丞相陳平患之,力不能爭,恐禍及己,常燕居深念。陸生往請,直入坐,而陳丞相方深念,不時見陸生。陸生曰:「何念之深也?」陳平曰:「生揣我何念?」陸生曰:「足下位為上相,食三萬戶侯,可謂極富貴無欲矣。然有憂念,不過患諸呂、少主耳。」陳平曰:「然。為之柰何?」陸生曰:「天下安,注意相;天下危,注意將。將相和調,則士務附;士務附,天下雖有變,即權不分。為社稷計,在兩君掌握耳。臣常欲謂太尉絳侯,絳侯與我戲,易吾言。君何不交驩太尉,深相結?」為陳平畫呂氏數事。陳平用其計,乃以五百金為絳侯壽,厚具樂飲;太尉亦報如之。此兩人深相結,則呂氏謀益衰。陳平乃以奴婢百人,車馬五十乘,錢五百萬,遺陸生為飲食費。陸生以此游漢廷公卿閒,名聲藉甚。
及誅諸呂,立孝文帝,陸生頗有力焉。孝文帝即位,欲使人之南越。陳丞相等乃言陸生為太中大夫,往使尉他,令尉他去黃屋稱制,令比諸侯,皆如意旨。語在南越語中。陸生竟以壽終。
平原君朱建者,楚人也。故嘗為淮南王黥布相,有罪去,後復事黥布。布欲反時,問平原君,平原君非之,布不聽而聽梁父侯,遂反。漢已誅布,聞平原君諫不與謀,得不誅。語在黥布語中。
平原君為人辯有口,刻廉剛直,家於長安。行不茍合,義不取容。辟陽侯行不正,得幸呂太后。時辟陽侯欲知平原君,平原君不肯見。及平原君母死,陸生素與平原君善,過之。平原君家貧,未有以發喪,方假貸服具,陸生令平原君發喪。陸生往見辟陽侯,賀曰:「平原君母死。」辟陽侯曰:「平原君母死,何乃賀我乎?」陸賈曰:「前日君侯欲知平原君,平原君義不知君,以其母故。今其母死,君誠厚送喪,則彼為君死矣。」辟陽侯乃奉百金往稅。列侯貴人以辟陽侯故,往稅凡五百金。
辟陽侯幸呂太后,人或毀辟陽侯於孝惠帝,孝惠帝大怒,下吏,欲誅之。呂太后慚,不可以言。大臣多害辟陽侯行,欲遂誅之。辟陽侯急,因使人欲見平原君。平原君辭曰:「獄急,不敢見君。」乃求見孝惠幸臣閎籍孺,說之曰:「君所以得幸帝,天下莫不聞。今辟陽侯幸太后而下吏,道路皆言君讒,欲殺之。今日辟陽侯誅,旦日太后含怒,亦誅君。何不肉袒為辟陽侯言於帝?帝聽君出辟陽侯,太后大驩。兩主共幸君,君貴富益倍矣。」於是閎籍孺大恐,從其計,言帝,果出辟陽侯。辟陽侯之囚,欲見平原君,平原君不見辟陽侯,辟陽侯以為倍己,大怒。及其成功出之,乃大驚。
呂太后崩,大臣誅諸呂,辟陽侯於諸呂至深,而卒不誅。計畫所以全者,皆陸生、平原君之力也。
孝文帝時,淮南厲王殺辟陽侯,以諸呂故。文帝聞其客平原君為計策,使吏捕欲治。聞吏至門,平原君欲自殺。諸子及吏皆曰:「事未可知,何早自殺為?」平原君曰:「我死禍絕,不及而身矣。」遂自剄。孝文帝聞而惜之,曰:「吾無意殺之。」乃召其子,拜為中大夫。使匈奴,單于無禮,乃罵單于,遂死匈奴中。
初,沛公引兵過陳留,酈生踵軍門上謁曰:「高陽賤民酈食其,竊聞沛公暴露,將兵助楚討不義,敬勞從者,願得望見,口畫天下便事。」使者入通,沛公方洗,問使者曰:「何如人也?」使者對曰:「狀貌類大儒,衣儒衣,冠側注。」沛公曰:「為我謝之,言我方以天下為事,未暇見儒人也。」使者出謝曰:「沛公敬謝先生,方以天下為事,未暇見儒人也。」酈生瞋目案劍叱使者曰:「走!復入言沛公,吾高陽酒徒也,非儒人也。」使者懼而失謁,跪拾謁,還走,復入報曰:「客,天下壯士也,叱臣,臣恐,至失謁。曰『走!復入言,而公高陽酒徒也』。」沛公遽雪足杖矛曰:「延客入!」
酈生入,揖沛公曰:「足下甚苦,暴衣露冠,將兵助楚討不義,足下何不自喜也?臣願以事見,而曰『吾方以天下為事,未暇見儒人也』。夫足下欲興天下之大事而成天下之大功,而以目皮相,恐失天下之能士。且吾度足下之智不如吾,勇又不如吾。若欲就天下而不相見,竊為足下失之。」沛公謝曰:「鄉者聞先生之容,今見先生之意矣。」乃延而坐之,問所以取天下者。酈生曰:「夫足下欲成大功,不如止陳留。陳留者,天下之據衝也,兵之會地也,積粟數千萬石,城守甚堅。臣素善其令,願為足下說之。不聽臣,臣請為足下殺之,而下陳留。足下將陳留之眾,據陳留之城,而食其積粟,招天下之從兵;從兵已成,足下橫行天下,莫能有害足下者矣。」沛公曰:「敬聞命矣。」
於是酈生乃夜見陳留令,說之曰:「夫秦為無道而天下畔之,今足下與天下從則可以成大功。今獨為亡秦嬰城而堅守,臣竊為足下危之。」陳留令曰:「秦法至重也,不可以妄言,妄言者無類,吾不可以應。先生所以教臣者,非臣之意也,願勿復道。」酈生留宿臥,夜半時斬陳留令首,踰城而下報沛公。沛公引兵攻城,縣令首於長竿以示城上人,曰:「趣下,而令頭已斷矣!今後下者必先斬之!」於是陳留人見令已死,遂相率而下沛公。沛公舍陳留南城門上,因其庫兵,食積粟,留出入三月,從兵以萬數,遂入破秦。
육고(陸賈)는 초(楚) 사람이다. 빈객으로 고조를 따라 천하를 평정했다. 그는 말재주가 좋은 유세객으로 이름이 나 언제나 고조 곁에 있으면서 늘 제후들에게 사신으로 갔다.
고조 때에 이르러 중국이 막 평정되었는데, 위타(尉他)가 남월(南越)을 평정해 그곳에서 왕이 되었다.
고조는 육고를 보내 위타에게 인(印)을 주고 남월왕으로 삼았다. 육고가 도착하자 위타는 상투를 방망이 모양으로 틀고 두 다리를 벌리고 앉은 채 육고를 만났다.
육고는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귀하께서는 중국 사람으로 친척과 형제의 무덤이 진정(眞定)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귀하께서는 천성(天性)을 위반하고 관과 속대를 팽개치고 보잘것없는 월(越)로 천자와 대항해 적국이 되려고 하니, 재앙이 장차 몸에 미칠 것입니다. 또한 진(秦)은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에 제후들과 호걸들이 나란히 일어났고, 오직 한왕께서 먼저 함곡관에 들어가 함양을 점거하셨습니다. 항우가 약속을 저버리고 스스로 서초(西楚)의 패왕이 되자 제후들이 모두 귀속했으니, 매우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왕께서 파(巴)·촉(蜀)에서 일어나 천하를 채찍질하고 제후들을 정복해 마침내는 항우를 죽이고 멸망시켰습니다.
그리하여 5년 만에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이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늘이 세워준 것입니다. 천자께서는 당신이 남월의 왕이 된 뒤 천하를 도와 폭도와 반역자를 죽이지 않았기에 한의 장군과 재상들이 군대를 움직여 당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들으시고, 천자께서는 백성들이 또다시 고달파지는 것을 가엽게 여기시어 잠시 그들을 쉬게 하시고, 신에게 왕인(王印)을 주고 부절(符節)을 나누어 사신으로 오가게 하신 것입니다. 당신은 마땅히 교외에 나와서 사신을 맞이하고 북면(北面)해 신하라고 칭해야 할 텐데 새로 세워져 아직 안정되지도 않은 월로 강경하게 대했습니다.
한에서 만일 이것을 안다면 당신의 선조의 무덤을 파헤쳐 불태우고 종족을 모두 죽일 것이며, 부장 한 사람에게 10만의 군대를 이끌게 해 월을 공격하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월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고 한에 항복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입니다.”
그러자 위타는 깜짝 놀라 일어나서 육고에게 사과하며 말했다. “오랑캐의 땅에 오래 살다 보니 거의 예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육고에게 질문했다. “나를 소하(蕭何)·조참(曹參)·한신(韓信)과 비교한다면 누가 더 현명합니까?”
육고가 말했다. “귀하께서 조금 현명한 듯합니다.” 위타가 다시 물었다. “나를 황제와 비교한다면 누가 더 현명합니까?” 육고가 대답했다. “황제께서는 패현(沛縣) 풍읍(豐邑)에서 일어나시어 포악한 진을 토벌하고 강한 초를 무찌르고, 천하를 위해 이로운 것을 일으키시고 해로운 것을 없앴으며, 오제(五帝)와 삼왕(三王)의 대업을계승해 중국을 통일해 다스리고 계십니다. 중국의 인구는 매우 많고, 영토는 만 리에 이르며 천하의 기름진 땅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도 많고 수레도 많으며 물산이 풍부하며, 정치는 황제의 집안에서 하니,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지금 당신은 인구가 수십만 명에 불과하며, 그나마 모두 오랑캐들입니다. 그리고 영토는 험한 산과 바다 사이에 끼어 있어 한의 하나의 군(郡)에 불과한데 어찌 당신을 어찌 한에 비교하겠습니까?”
위타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중국에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왕 노릇을 하는 것일 뿐이오. 만일 내가 중국에 산다면 어찌 한의 황제만 못하겠소?” 위타는 육고가 아주 마음에 들어서 그를 만류해 몇 달 동안 함께 술을 마셨다. 위타가 말했다. “월에는 함께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람이 없었소. 당신이 이곳에 오신 뒤로 나에게 매일 듣지 못했던 것을 들려주었소.”
그리고는 육고에게 천금이나 나가는 보물을 자루에 넣어주고 따로 천금을 주었다. 육고는 마침내 위타를 남월왕에 제수하고, 신이라 칭하면서 한과의 약속을 지키게 했다. 육고가 한으로 돌아와 보고하자 고조는 매우 기뻐하며 육고를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제수했다.
육고는 항상 황제 앞에 나아가 진언할 때마다 『시경(詩經)』과 『상서(尙書)』를 인용했다. 고조는 육고를 꾸짖으며 말했다. “짐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소. 어찌 『시경』과 『상서』따위를 쓰겠소!”
그러자 육고가 말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으셨지만 어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옛날 은 탕왕(殷湯王)과 주 무왕(周武王)은 도를 거스르며 천하를 얻었지만 민심에 순응해 나라를 지키셨습니다. 문무(文武)를 아울러 쓰는 것이 나라를 길이 보존하는 방법입니다.
옛날에 오왕(吳王) 부차(夫差)와 진(晉)의 지백(智伯)은 무력을 지나치게 사용해 멸망했으며, 진(秦)은 형법만을 쓰고 바꾸지 않아서 결국 조씨(趙氏)가 멸망했습니다. 당시에 진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 인의(仁義)를 행하고 옛 성인을 본받았다면 폐하께서 어떻게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고조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이며 곧 육고에게 말했다. “시험 삼아 짐을 위해 ‘진이 천하를 잃은 까닭과 짐이 천하를 얻은 까닭이 무엇인지, 그리고 옛날에 성공하고 실패한 나라’에 대해 저술해주시오.”
육고는 이에 국가의 존망의 징후에 대해 약술해 모두 12편을 지었다. 그가 매 편을 상주할 때마다 고조는 좋다고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좌우의 사람들도 모두 만세를 외쳤는데, 그 책을 『신어(新語)』라고 했다.
효혜제(孝惠帝) 때 여태후(呂太后)가 정권을 잡고 여러 여씨들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으나 대신들이 간언을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육고는 스스로 여태후와는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하고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었다. 호치(好峙)에 있는 전답이 비옥했기에 그곳에서 살기로 하였다.
그에게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그가 월에 사신으로 갔을 때 얻었던 자루 속의 보물을 팔아 천금을 만들어 아들들에게 2백금씩 나누어주고 생업을 마련하게 했다. 육고는 늘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안거(安車)를 타고 거문고를 타는 시종 10명을 거느리고, 1백금의 값이 나가는 보검을 차고 다녔다.
그는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과 약속을 하겠다. 너희들 집에 들르면 내가 데리고 온 사람과 말에게 술과 먹을 것을 주거라 실컷 놀다가 열흘이 되면 다음 집으로 옮길 것이다. 내가 죽는 집에서 보검과 수레와 말, 그리고 시종들을 갖도록 해라. 1년 중에 다른 집에 손님이 되어 오가는 일도 있으니, 대략 두세 번 너희들 집에 들를 것이다. 자주 보게 되면 반갑지 않을 테니, 오래 묵어서 너희들을 귀찮게 하지 않겠다.”
여태후 때 여러 여씨들을 왕으로 세우니 여씨 일족은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어린 황제를 협박해 유씨를 위태롭게 했다.
우승상(右丞相) 진평(陳平)은 이 일을 근심했으나 대항할 힘이 없고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서 늘 한가로이 지내면서 깊은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한번은 육고가 문안을 드리러 갔다가 곧바로 들어가 그의 곁에 앉았지만 진승상은 마침 깊은 생각에 잠겨 있어 육고를 바로 발견하지 못했다.
육고가 말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고 계십니까?” 진평이 말했다. “선생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맞춰보시오?” 육고가 대답했다. “그대의 지위는 우승상이고 식읍이 3만 호인 열후이시니, 부귀는 극에 달해 욕망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근심거리가 있다면 여씨와 어린 군주의 일을 근심하고 있을 것입니다.”
진평이 말했다. “그렇소. 이 일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육고가 말했다. “천하가 안정되어 있을 때에는 재상을 주시하고, 천하가 위태로울 때에는 장군을 주시합니다. 장군과 재상이 화목하고 협력한다면 모든 선비들 힘써 따를 것이며, 선비들이 힘써 따르게 되면, 천하에 변란이 있더라도 권력은 흩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사직을 위한 계책은 두 분이 손을 잡는 데 있을 뿐입니다.
신은 항상 태위(太尉) 강후(絳侯)에게 이런 말하고자 했으나 강후와 저는 농담을 잘하는 사이라 저의 말을 가볍게 받아들입니다. 그대는 어찌해 태위와 친교를 맺어 서로 단결하지 않으십니까?” 육고는 진평을 위해 여씨 일족에게 대처하는 몇 가지 계책을 일러주었다. 진평은 육고의 계책에 따라 5백 금으로 강후의 장수를 축하하고, 음악과 음식을 성대하게 준비하니 태위 역시 이와 같이 답례했다.
이 두 사람이 서로 밀접하게 결속되자, 여씨들의 음모는 점차 움츠러들었다. 진평은 이에 노비 1백 명과 수레와 말 50승, 5백만 전(錢)을 음식비용으로 육고에게 주었다. 육고는 이것으로써 한 조정의 공경(公卿)들과 교유하여 명성이 매우 자자해졌다.
여씨 일족들을 죽이고 효문제(孝文帝)를 세우는 일에 육고는 상당한 공을 세웠다. 효문제가 즉위하자 남월(南越)에 사신을 보내려고 했다. 우승상 진평 등이 추천해 육고를 태중대부로 삼아 위타에게 사신으로 가게 했다. 그는 위타에게 황색 비단으로 수레 덮개를 사용하고 제(制, 황제의 명령)를 칭하는 것을 못하게 해, 제후와 동등하게 함으로써 황제의 마음에 들게 했다.
이 이야기는 「남월열전(南越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육고는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평원군(平原君) 주건(朱建)은 초 사람이다. 일찍이 그는 회남왕(淮南王) 경포(黥布)의 재상을 지낸 적이 있었는데 죄를 지어 떠났다가 뒤에 다시 경포를 섬겼다. 경포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할 때 평원군에게 물었으나 평원군은 그것에 반대했다. 경포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양보후(梁父侯)의 말을 듣고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한은 경포를 죽이고 난 다음, 평원군이 경포에게 간언하고 모반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듣고서 그를 죽이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경포열전(黥布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평원군, 벽양후 심이기[ 平原君, 辟陽侯 審食其 ]
평원군은 사람됨이 말재주가 좋고 준엄하고 청렴하며 강직했고 장안(長安)에 살았다. 그는 구차하게 남의 비위를 맞추거나 의리에 벗어나는 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벽양후(辟陽侯) 심이기(審食其)는 행실이 바르지 않았지만 여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그 무렵 벽양후는 평원군과 사귀고 싶어 했으나 평원군은 그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평원군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육고는 평소에 평원군과 사이가 좋았으므로 문상을 하러 갔다.
평원군은 집이 가난해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마침 상복과 장례도구를 빌리려던 참이었다. 육고는 평원군에게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그리고 난 다음 육고는 벽양후를 찾아가서 만나고 축하하며 말했다. “평원군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소.” 그러자 벽양후가 말했다. “평원군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어찌해 나에게 축하를 하시오?” 육고가 말했다. “예전에 그대는 평원군과 사귀려했지만 평원군이 의리를 지키느라 그대와 사귀려하지 않았던 것은 그의 어머니 때문이었소. 지금 그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그대가 진실로 후하게 조문한다면 그는 당신을 위해 죽을 것이오.”
이에 벽양후는 조문을 가서 1백금의 조의금을 냈다. 열후와 귀인들이 벽양후의 일로 인해 평원군을 찾아가 조의금을 내니 모두 5백금에 달했다.
벽양후가 여태후의 총애를 받자 사람들이 간혹 효혜제 앞에서 벽양후를 뜯었다. 그러자 효혜제가 크게 노하여 형리에게 넘겨 그를 죽이려했다. 그러나 여태후는 부끄러워 말을 할 수 없었다.
대신들은 대부분 벽양후의 행실을 매우 미워했기 때문에 정말로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벽양후는 다급해 사람을 보내 평원군을 만나려고 했다. 평원군은 사양하며 말했다. “재판이 임박해 있어 감히 그대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고는 평원군은 효혜제의 총신 굉적유(閎籍襦)를 찾아가 그를 설득하며 말했다.
“당신이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을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소. 그런데 지금 벽양후가 태후에게 총애를 받았다고 해서 형리에게 넘겨졌고, 사람들은 모두 당신이 중상해서 그를 죽이려 한다고 말하고 있소. 지금 벽양후가 죽임을 당한다면 여태후께서 분노를 감추고 계셨다가 다음에 역시 당신을 죽일 것이오. 그런데 어찌해 당신은 옷을 벗어 어깨를 드러내놓고 벽양후를 위해 황제께 용서를 부탁하지 않는 것이오? 만일 황제께서 당신의 청을 듣고 벽양후를 풀어준다면 태후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이오. 그렇게 된다면 황제와 태후 두 분께서 모두 당신을 총애할 것이고, 당신은 부귀가 더욱 배가될 것이오.”
이에 굉적유가 크게 두려워서 그의 계획에 따라 황제에게 진언하니 과연 벽양후를 풀어주었다. 벽양후는 자기가 감옥에 끌려갈 때 평원군을 만나려 했으나 평원군이 만나주지 않자, 평원군이 자기를 배반했다고 여기고 크게 노했다. 그러나 평원군이 계획을 성공시켜 구해주자 크게 놀랐다.
여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대신들이 여씨 일족을 죽였다. 벽양후는 여씨 일족과 관계가 매우 밀접했지만 끝내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계획을 세워 그를 살아남게 한 것은 바로 육고와 평원군의 힘이었다.
효문제 때 회남(淮南)의 여왕(厲王)은 벽양후를 죽였는데 이는 여씨 일족과 관련되었기 때문이었다. 효문제는 벽양후의 식객인 평원군이 계책을 세웠다는 것을 듣고 형리(刑吏)에게 평원군을 체포하게 하여 그 죄를 다스리려고 했다. 형리가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평원군은 자살하려고 했다.
그러자 여러 아들들과 형리들이 모두 말했다. “일을 아직 알 수 없는데 어찌해서 일찍 자살하려 하십니까?” 이에 평원군이 말했다. “내가 죽으면 재앙이 끊어져 화가너희에게까지 미치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목을 베고 자살했다.
효문제가 소식을 듣고 애석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짐은 그를 죽일 뜻이 없었다.” 이에 그의 아들을 불러서 중대부(中大夫)에 제수했다. 그는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선우(單于)가 무례하게 대하자 선우를 나무랐다가 결국 흉노 땅에서 죽었다.
역이기와 고조 유방
“고양(高陽)의 천민 역이기는 패공께서 뜨거운 햇살과 찬 이슬을 무릅쓰고 군대를 이끌고 초를 도와 불의한 진을 토벌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삼가 따르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패공을 만나 뵙고서 천하 대업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자가 들어가서 고했는데 그때 패공은 마침 다리를 씻고 있다가 사자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냐?” 사자가 대답했다. “용모로 보아서 뛰어난 선비로 선비의 옷을 입고 측주관(側注冠)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자 패공이 말했다. “나 대신 그에게 사과하고, ‘내가 지금 천하의 대업 때문에 선비를 만날 겨를이 없다.’고 전해라.” 사자가 밖으로 나와 사죄하며 말했다.
“패공께서 선생께 공경히 사죄하시며, ‘지금은 천하의 대업으로 바쁘기 때문에 선비를 만날 겨를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역생은 눈을 부릅뜨고 검을 잡고 사자를 꾸짖었다. “들어가 보시오! 다시 들어가서 패공께 나는 고양의 술꾼이지 선비가 아니라고 전해주시오.” 사자는 두려워 명함을 떨어뜨렸다가 허리를 굽혀 명함을 주워서 다시 들어가 아뢰었다.
“손님은 천하의 장사이옵니다. 저를 꾸짖었는데 저는 두려워서 명함을 떨어뜨렸습니다. 그는 ‘들어가 봐라! 다시 들어가서 고양의 술꾼이라고 전하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패공은 즉시 맨발로 창을 잡고서 말했다. “손님을 들어오게 하라!”
역생은 들어와서 패공에게 읍하고 이렇게 말했다. “공께서는 몹시 고생을 하시며, 옷은 햇빛에 쏘이고 관은 비에 젖은 채 군대를 이끌고 초를 도와 불의한 진을 정벌하고 계시는데 공께서는 어찌 절로 기뻐하시지 않으십니까? 저는 천하의 일 때문에 공을 뵙기를 원했으나 ‘내가 지금 천하의 일로 바쁘기 때문에 선비를 만날 겨를이 없다.’고 말씀하시는지요? 공께서는 천하의 큰 일을 일으켜 천하의 큰 공을 세우려 하시면서 사람의 겉모습만 보시니, 좋은 인재들을 놓쳐버리실 것입니다. 게다가 공의 지혜가 저보다 못하고 공의 용맹함 또한 저보다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공께서 천하의 대업을 이루고자 하시면서 저를 만나 주지지 않으니, 공께서는 실수를 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패공은 사과하며 말했다. “아까는 선생의 용모에 대해 들었을 뿐인데, 지금은 선생의 뜻을 알았소.” 그리고 역생을 이끌어 자리에 앉히고 천하를 취할 방법에 대해 물었다.
역생이 말했다. “대저 공께서 큰 공을 이루고자 하신다면 진류에 머무는 석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고 성의 수비가 대단히 견고합니다. 저는 평소에 그곳의 현령과 잘 아는 사이이니 공을 위해 그를 설득해보겠습니다. 제 말을 듣지 않는다면 제가 공을 위해 그를 죽여 진류를 항복시키겠습니다. 공께서는 진류의 무리를 거느리고 진류성을 점거하고 그곳에 쌓아놓은 식량을 먹으면서 공을 따를 천하의 군사를 모집하십시오. 군사를 다 모집하신 후에 공께서 천하를 횡행하시면 아무도 공을 방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패공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삼가 가르침에 따르겠소.”
이에 역생은 그날 밤 진류 현령을 만나 그를 설득하며 말했다. “무릇 진은 무도해 천하가 진에 반기를 들고 있소. 지금 그대가 천하와 더불어 따른다면 큰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 만약 혼자서 망해가는 진을 위해 성을 굳게 지킨다면, 나는 그대가 위태로울 것이라고 생각하오.”
그러자 진류 현령이 이렇게 말했다. “진의 법은 매우 엄해 망언을 해서는 안 되오. 망언을 하는 사람은 멸족당할 것이니, 나는 그대의 말에 따를 수 없소. 그대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니 다시는 말하지 마시오.”
역생은 그곳에 머물러 자다가 한밤중에 진류 현령의 머리를 베고 성을 넘어와서 패공에게 보고했다. 이에 패공은 군사를 이끌고 성을 공격하고, 진류 현령의 머리를 장대에 매달아 성 위에 있는 사람에게 보여주면서 말했다. “빨리 항복하라! 현령의 머리는 이미 베어졌다. 지금부터 뒤늦게 항복하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베겠다!” 이에 진류현 사람들은 현령이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드디어 서로 앞을 다투어 패공에게 항복했다. 패공은 진류 남쪽 성문 위에 주둔하면서 그곳의 병기와 저장해 놓은 식량으로 3개월 동안 머물면서 따르는 군사가 수만 명에 달했고, 마침내 진을 격파했다.
太史公曰:世之傳酈生書,多曰漢王已拔三秦,東擊項籍而引軍於鞏洛之閒,酈生被儒衣往說漢王。乃非也。自沛公未入關,與項羽別而至高陽,得酈生兄弟。余讀陸生新語書十二篇,固當世之辯士。至平原君子與余善,是以得具論之。
【索隱述贊】廣野大度,始冠側注。踵門長揖,深器重遇。說齊曆下,趣鼎何懼。陸賈使越,尉佗懾怖,相說國安,書成主悟。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전하는 역생(酈生)에 관한 책에는 대부분 한왕(漢王)이 이미 삼진(三秦)을 함락시킨 뒤 동쪽으로 항우를 공격하고 군대를 이끌고 공(鞏)과 낙양(洛陽) 사이에 물러나 있을 때, 역생이 선비의 옷을 입고 한왕에게 가서 유세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그때 패공은 함곡관에 들어가지 않았고, 항우와 이별하고 고양(高陽)에 이르렀을 때 역생 형제를 얻었다. 내가 역생의 『신어(新語)』12편을 읽어보니 과연 역생은 당시의 구변이 뛰어난 유세객이었다. 평원군(平原君)의 아들과 나는 친교가 있었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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