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敬叔孫通列傳
劉敬
劉敬者,齊人也。漢五年,戍隴西,過洛陽,高帝在焉。婁敬脫輓輅,衣其羊裘,見齊人虞將軍曰:「臣願見上言便事。」虞將軍欲與之鮮衣,婁敬曰:「臣衣帛,衣帛見;衣褐,衣褐見:終不敢易衣。」於是虞將軍入言上。上召入見,賜食。
已而問婁敬,婁敬說曰:「陛下都洛陽,豈欲與周室比隆哉?」上曰:「然。」婁敬曰:「陛下取天下與周室異。周之先自后稷,堯封之邰,積德累善十有餘世。公劉避桀居豳。太王以狄伐故,去豳,杖馬箠居岐,國人爭隨之。及文王為西伯,斷虞芮之訟,始受命,呂望、伯夷自海濱來歸之。武王伐紂,不期而會孟津之上八百諸侯,皆曰紂可伐矣,遂滅殷。成王即位,周公之屬傅相焉,乃營成周洛邑,以此為天下之中也,諸侯四方納貢職,道裏均矣,有德則易以王,無德則易以亡。凡居此者,欲令周務以德致人,不欲依阻險,令後世驕奢以虐民也。及周之盛時,天下和洽,四夷鄉風,慕義懷德,附離而并事天子,不屯一卒,不戰一士,八夷大國之民莫不賓服,效其貢職。及周之衰也,分而為兩,天下莫朝,周不能制也。非其德薄也,而形勢弱也。今陛下起豐沛,收卒三千人,以之徑往而卷蜀漢,定三秦,與項羽戰滎陽,爭成皋之口,大戰七十,小戰四十,使天下之民肝腦涂地,父子暴骨中野,不可勝數,哭泣之聲未絕,傷痍者未起,而欲比隆於成康之時,臣竊以為不侔也。且夫秦地被山帶河,四塞以為固,卒然有急,百萬之眾可具也。因秦之故,資甚美膏腴之地,此所謂天府者也。陛下入關而都之,山東雖亂,秦之故地可全而有也。夫與人鬬,不搤其亢,拊其背,未能全其勝也。今陛下入關而都,案秦之故地,此亦搤天下之亢而拊其背也。」
高帝問群臣,群臣皆山東人,爭言周王數百年,秦二世即亡,不如都周。上疑未能決。及留侯明言入關便,即日車駕西都關中。
於是上曰:「本言都秦地者婁敬,『婁』者乃『劉』也。」賜姓劉氏,拜為郎中,號為奉春君。
漢七年,韓王信反,高帝自往擊之。至晉陽,聞信與匈奴欲共擊漢,上大怒,使人使匈奴。匈奴匿其壯士肥牛馬,但見老弱及羸畜。使者十輩來,皆言匈奴可擊。上使劉敬復往使匈奴,還報曰:「兩國相擊,此宜夸矜見所長。今臣往,徒見羸瘠老弱,此必欲見短,伏奇兵以爭利。愚以為匈奴不可擊也。」是時漢兵已踰句注,二十餘萬兵已業行。上怒,罵劉敬曰:「齊虜!以口舌得官,今乃妄言沮吾軍。」械系敬廣武。遂往,至平城,匈奴果出奇兵圍高帝白登,七日然後得解。高帝至廣武,赦敬,曰:「吾不用公言,以困平城。吾皆已斬前使十輩言可擊者矣。」乃封敬二千戶,為關內侯,號為建信侯。
高帝罷平城歸,韓王信亡入胡。當是時,冒頓為單于,兵彊,控弦三十萬,數苦北邊。上患之,問劉敬。劉敬曰:「天下初定,士卒罷於兵,未可以武服也。冒頓殺父代立,妻群母,以力為威,未可以仁義說也。獨可以計久遠子孫為臣耳,然恐陛下不能為。」上曰:「誠可,何為不能!顧為柰何?」劉敬對曰:「陛下誠能以適長公主妻之,厚奉遺之,彼知漢適女送厚,蠻夷必慕以為閼氏,生子必為太子。代單于。何者?貪漢重幣。陛下以歲時漢所餘彼所鮮數問遺,因使辯士風諭以禮節。冒頓在,固為子婿;死,則外孫為單于。豈嘗聞外孫敢與大父抗禮者哉?兵可無戰以漸臣也。若陛下不能遣長公主,而令宗室及後宮詐稱公主,彼亦知,不肯貴近,無益也。」高帝曰:「善。」欲遣長公主。呂后日夜泣,曰:「妾唯太子、一女,柰何棄之匈奴!」上竟不能遣長公主,而取家人子名為長公主,妻單于。使劉敬往結和親約。
劉敬從匈奴來,因言「匈奴河南白羊、樓煩王,去長安近者七百里,輕騎一日一夜可以至秦中。秦中新破,少民,地肥饒,可益實。夫諸侯初起時,非齊諸田,楚昭、屈、景莫能興。今陛下雖都關中,實少人。北近胡寇,東有六國之族,宗彊,一日有變,陛下亦未得高枕而臥也。臣願陛下徙齊諸田,楚昭、屈、景,燕、趙、韓、魏後,及豪桀名家居關中。無事,可以備胡;諸侯有變,亦足率以東伐。此彊本弱末之術也」。上曰:「善。」乃使劉敬徙所言關中十餘萬口。
유경(劉敬)은 제(齊) 사람이다. 한(漢) 5년에 농서(隴西)에 수자리하러 가면서 낙양(洛陽)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때 고제(高帝)가 낙양에 머물고 있었다.
누경(婁敬)은 수레의 앞에서 끄는 가로막대를 내려놓고 양털 갖옷을 입은 채 제 출신인 우장군(虞將軍)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제가 폐하를 뵙고 국가에 이로운 일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장군이 그에게 새 옷을 주려고 하자 누경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비단옷을 입고 있으면 비단옷을 입은 채 뵐 것이고, 베옷을 입고 있으면 베옷을 입은 채로 뵐 것입니다. 절대 옷을 바꿔 입지 않겠습니다.”
이에 우장군이 안으로 들어가 황상께 아뢰었다. 황상이 불러서 알현하게 하고 음식을 하사했다.
얼마 후에 황제가 누경에게 만나고자 한 이유를 물으니 누경이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낙양에 도읍을 하셨는데, 주(周) 왕실과 융성함을 견주려고 하신 것입니까?”
황제가 말했다.
“그렇소.”
누경이 말했다.
“폐하께서 천하를 얻으신 것은 주 왕실과 다릅니다. 주의 선조는 후직(后稷)인데, 요(堯)임금이 그를 태(邰)에 봉해 그곳에서 덕을 쌓고 선정을 베푼 지 10여 대가 지났습니다. 공류(公劉)는 하(夏)의 걸왕(桀王)을 피해 빈(豳)에서 살았습니다. 태왕(太王)은 오랑캐의 침략으로 빈을 떠나 말채찍을 잡고 기(岐)에서 살게 되었는데 빈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그를 따랐습니다.
문왕(文王)이 서백(西伯)이 되어 우(虞)와 예(芮)의 송사를 해결해주고 비로소 천명을 받자, 여망(呂望, 강태공)과 백이(伯夷)가 바닷가에서 찾아와 문왕에게 귀의했습니다. 무왕(武王)이 은 주왕(殷紂王)을 칠 때 기약을 하지 않았는데도 천하의 제후들이 맹진(孟津)의 해안가에 회합하니 그 수가 8백 명이나 되었고, 모두 ‘주왕을 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은을 멸망시켰습니다.
성왕(成王)이 즉위하자 주공(周公)의 무리들이 성왕을 보좌해 낙읍(洛邑)에 성주(成周)를 세웠는데, 이곳은 천하의 중심으로 제후들이 조공을 바치기에 도로의 거리가 비슷했고, 덕이 있으면 왕 노릇 하기 쉬웠고, 덕이 없으면 쉽게 망했습니다. 무릇 이 낙읍에 도읍을 정한 것은 주가 덕으로써 천하 백성을 감화시키려고 한 것이고, 험준한 지형을 믿고 후손들이 교만과 사치로 백성을 학대하는 것을 바라지 않아서입니다.
주가 흥성할 때에는 천하가 화합했고, 사방의 오랑캐들이 교화되어 의를 사모하고 덕을 흠모하며 다 같이 천자를 섬겼습니다. 한사람의 병사도 주둔시키지 않고, 한사람의 병사도 싸우지 않고서도 팔방 대국의 민족들 가운데 복종하고 공물을 바치지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주가 쇠퇴해지자 서주(西周)와 동주(東周)로 분열되었고, 천하에서 입조하는 제후들도 없었으며, 주도 그들을 제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덕이 박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형세가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풍현(豊縣)의 패읍(沛邑)에서 일어나 3천 명의 군사를 모아 진격해 촉(蜀)과 한(漢)을 석권하시고, 삼진(三秦)을 평정하시고, 항우(項羽)와 더불어 형양(滎陽)에서 교전하시고, 성고(成皐)의 요충지를 장악하시기 위해 70차례의 큰 전투를 하시고 40차례의 작은 전투를 치르셔서, 천하의 백성들의 간과 골을 대지에 뒹굴게 하시고, 아버지와 자식의 뼈가 함께 들판에 뒹굴게 하신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지경입니다. 통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부상을 당한 사람들이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주의 성왕(成王)과 강왕(康王) 때와 융성함을 비교하려 하시니, 소인은 아직은 서로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진의 땅은 산으로 에워싸이고 하수(河水)를 끼고 있어 사면이 요새로 견고하기에 비록 갑자기 위급한 사태가 있더라도 1백만의 무리를 동원해 배치할 수 있었습니다.
진의 옛 터전을 차지해 더없이 비옥한 땅을 소유한다면 이것은 이른바 천연의 곳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가셔서 그곳에 도읍하신다면 산동(山東)이 비록 어지러워도 진의 옛 땅을 온전하게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저 다른 사람과 싸우면서 목을 조르고 등을 치지 않으면 완전하게 이길 수 수 없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함곡관에 들어가셔서 도읍하시고 진의 옛 땅을 차지하시는 것이 바로 천하의 목을 조르고 그 등을 치는 것이옵니다.”
고조가 여러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으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산동 사람들인지라 앞을 다투어 주는 수백 년 동안 왕 노릇을 했으나, 진은 2대 만에 멸망했으니 주의 낙양에 도읍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고조는 주저하며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유후(留侯) 장량(張良)이 함곡관으로 들어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분명히 말하자, 그날로 수레를 서쪽으로 몰아 관중(關中)에 도읍했다.
이에 고조가 말했다. “본래 진땅에 도읍하자고 말한 것은 바로 누경이다. ‘누(婁)’가바로 ‘유(劉)’이다.” 누경에게 유씨(劉氏) 성을 하사하고 낭중(郎中)에 제수하여 봉춘군(奉春君)이라고 불렀다.
한 7년에 한왕(韓王) 신(信)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는 몸소 군대를 이끌고 정벌하러 나갔다. 진양(晉陽)에 이르러 한왕 신이 흉노(匈奴)와 함께 한을 치려한다는 소문을 듣고, 고조는 크게 노하여 흉노에 사신을 보냈다.
흉노는 그들의 장사와 살찐 소와 말을 숨기고 노약자와 야윈 가축만을 보여주었다. 사신들이 10명이나 흉노에 다녀와 모두 흉노를 정벌할 만 하다고 말했다. 고조가 다시 유경을 사신으로 흉노에 보냈다.
유경은 돌아와서 이렇게 보고했다. “두 나라가 싸우려 할 때는 장점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은 흉노에 가서 단지 여위고 지쳐 보이는 노약자만을 보았으니, 이는 반드시 단점을 드러내고 정예병을 숨겨두었다가 승리를 얻으려는 것입니다. 신의 흉노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옵니다.”
이 때 한의 군대는 이미 구주산(句注山)을 넘어 20만여 명의 군사가 진격하고 있었다. 고조는 노하여 유경을 꾸짖으며 말했다. “제의 포로 놈아! 주둥이를 놀려 벼슬을 얻더니 이제는 망령된 말로 나의 군대를 가로막는구나.” 유경을 형틀에 채워서 광무(廣武)에 가두었다. 마침내 계속 진군해 평성(平城)에 이르렀다.
흉노는 과연 정예병을 내보내 백등산(白登山)에서 고조를 포위했는데, 7일이 지난 뒤에야 포위를 풀었다. 고조는 광무로 가서 유경을 용서하고 이렇게 말했다. “짐이 그대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평성에서 곤경을 당했소. 짐이 이미 전에 흉노를 공격해도 좋다고 말한 10여 명의 사신을 모두 참수했소.” 이에 유경에게 2천 호에 봉하고 관내후(關內侯)로 삼고 건신후(建信侯)라고 불렀다.
고조는 평성에서 군대를 거두어 돌아왔고 한왕 신은 흉노로 도망쳤다. 이때에 묵돌(冒頓)이 선우(單于)가 되었는데, 군사가 강해 활 잘 쏘는 군사 30만 명을 거느리고 자주 북방 변경을 괴롭혔다.
고조는 이 일을 근심하며 유경에게 물었다. 유경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천하가 이제 막 평정된지라 군사들이 전투에 지쳐 있으므로 무력으로는 흉노를 복종시킬 수 없습니다. 묵돌은 자기 아비를 죽이고 선우가 되어 아비의 많은 첩을 아내로 삼았고 무력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으니, 인의로는 설득시킬 수 없습니다. 다만 그의 자손을 영원히 한의 신하로 만드는 계책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고조가 말했다. “만일 가능하다면 무엇을 할 수 없겠소? 어떻게 해야 하오?”
유경이 대답했다. “폐하께서 만일 본처 소생의 맏공주를 묵돌에게 시집을 보내시고 후한 예물을 내려주신다면, 그는 한이 본처 소생의 공주를 시집보내고 예물이 후한 것을 알고, 비록 오랑캐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공주를 존경해 연지(閼氏)로 삼을 것이고, 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태자로 삼아 선우를 잇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의 많은 예물을 탐내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는 철마다 한에서는 남아돌지만 그들에게는 드문 물건으로 자주 위문하시고, 그 때마다 변사를 보내 예절을 가르치신다면, 묵돌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폐하의 사위가 되고, 죽을 경우에는 외손이 선우가 되는 것입니다.
외손이 감히 외할아버지와 대등한 예를 주장했다는 말을 들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군대로 싸우지 않고도 점차 신하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맏공주를 보내실 수 없어 종실과 후궁의 딸을 공주라고 속여 보내신다면 그도 눈치를 채고서 귀하게 여기고 가까이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익이 없습니다.”
고조는 ‘좋다’고 말하고 맏공주를 시집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여태후(呂太后)가 밤낮으로 울면서 말했다. “첩에게는 태자와 딸 하나밖에 없는데, 어찌해 흉노에 버리시려 하십니까?” 고조는 결국 맏공주를 보내지 못하고, 가인(家人) 중에 한 사람을 뽑아 맏공주라고 하며 선우에게 시집을 보냈다. 유경을 사신으로 보내 화친을 맺게 했다.
유경은 흉노에서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흉노 하남(河南)의 백양왕(白羊王)과 누번왕(樓煩王)은 장안(長安)에서 가깝게는 7백여 리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루 밤낮을 달리면 진중(秦中)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진중은 최근 파괴되어 백성들이 적지만 토지가 비옥해 백성들을 더 채울 수 있습니다.
대저 제후들이 처음 일어났을 때, 제의 전씨(田氏)·초의 소씨(昭氏)·굴씨(屈氏)·경씨(景氏)가 아니었다면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비록 관중에 도읍을 하셨으나 사실 사람이 적고, 북쪽으로는 흉노와 가까이 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6국의 종족이 있습니다. 그들 종족이 강해 변란이라도 있는 날에는 폐하라고 하실지라도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하게 누워 있을 수 없으실 것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폐하께서 제의 전씨· 초의 소씨·굴씨·경씨, 그리고 연·조·한·위의 왕족들의 후손 및 호걸과 명문가의 사람들을 관중으로 이주시켜 살게 해주십시오. 아무 일도 없을 때는 흉노를 대비할 수 있고, 제후의 변란이 일어나도 그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정벌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근본을 튼튼히 하고 말단을 약화시키는 방법입니다.”
고조는 좋다고 말하고 이에 유경을 보내어 그가 말한 대로 10만여 명을 관중에 이주해 살게 했다.
叔孫通
叔孫通者,薛人也。秦時以文學徵,待詔博士。數歲,陳勝起山東,使者以聞,二世召博士諸儒生問曰:「楚戍卒攻蘄入陳,於公如何?」博士諸生三十餘人前曰:「人臣無將,將即反,罪死無赦。願陛下急發兵擊之。」二世怒,作色。叔孫通前曰:「諸生言皆非也。夫天下合為一家,毀郡縣城,鑠其兵,示天下不復用。且明主在其上,法令具於下,使人人奉職,四方輻輳,安敢有反者!此特群盜鼠竊狗盜耳,何足置之齒牙閒。郡守尉今捕論,何足憂。」二世喜曰:「善。」盡問諸生,諸生或言反,或言盜。於是二世令御史案諸生言反者下吏,非所宜言。諸言盜者皆罷之。乃賜叔孫通帛二十匹,衣一襲,拜為博士。叔孫通已出宮,反舍,諸生曰:「先生何言之諛也?」通曰:「公不知也,我幾不脫於虎口!」乃亡去,之薛,薛已降楚矣。及項梁之薛,叔孫通從之。敗於定陶,從懷王。懷王為義帝,徙長沙,叔孫通留事項王。漢二年,漢王從五諸侯入彭城,叔孫通降漢王。漢王敗而西,因竟從漢。
叔孫通儒服,漢王憎之;乃變其服,服短衣,楚製,漢王喜。
叔孫通之降漢,從儒生弟子百餘人,然通無所言進,專言諸故群盜壯士進之。弟子皆竊罵曰:「事先生數歲,幸得從降漢,今不能進臣等,專言大猾,何也?」叔孫通聞之,乃謂曰:「漢王方蒙矢石爭天下,諸生寧能鬬乎?故先言斬將搴旗之士。諸生且待我,我不忘矣。」漢王拜叔孫通為博士,號稷嗣君。
漢五年,已并天下,諸侯共尊漢王為皇帝於定陶,叔孫通就其儀號。高帝悉去秦苛儀法,為簡易。群臣飲酒爭功,醉或妄呼,拔劍擊柱,高帝患之。叔孫通知上益厭之也,說上曰:「夫儒者難與進取,可與守成。臣願徵魯諸生,與臣弟子共起朝儀。」高帝曰:「得無難乎?」叔孫通曰:「五帝異樂,三王不同禮。禮者,因時世人情為之節文者也。故夏、殷、周之禮所因損益可知者,謂不相復也。臣願頗采古禮與秦儀雜就之。」上曰:「可試為之,令易知,度吾所能行為之。」
於是叔孫通使徵魯諸生三十餘人。魯有兩生不肯行,曰:「公所事者且十主,皆面諛以得親貴。今天下初定,死者未葬,傷者未起,又欲起禮樂。禮樂所由起,積德百年而後可興也。吾不忍為公所為。公所為不合古,吾不行。公往矣,無汙我!」叔孫通笑曰:「若真鄙儒也,不知時變。」
遂與所徵三十人西,及上左右為學者與其弟子百餘人為綿蕞野外。習之月餘,叔孫通曰:「上可試觀。」上既觀,使行禮,曰:「吾能為此。」乃令群臣習肄,會十月。
漢七年,長樂宮成,諸侯群臣皆朝十月。儀:先平明,謁者治禮,引以次入殿門,廷中陳車騎步卒衛宮,設兵張旗志。傳言「趨」。殿下郎中俠陛,陛數百人。功臣列侯諸將軍軍吏以次陳西方,東鄉;文官丞相以下陳東方,西鄉。大行設九賓,臚傳。於是皇帝輦出房,百官執職傳警,引諸侯王以下至吏六百石以次奉賀。自諸侯王以下莫不振恐肅敬。至禮畢,復置法酒。諸侍坐殿上皆伏抑首,以尊卑次起上壽。觴九行,謁者言「罷酒」。御史執法舉不如儀者輒引去。竟朝置酒,無敢讙譁失禮者。於是高帝曰:「吾乃今日知為皇帝之貴也。」乃拜叔孫通為太常,賜金五百斤。
叔孫通因進曰:「諸弟子儒生隨臣久矣,與臣共為儀,願陛下官之。」高帝悉以為郎。叔孫通出,皆以五百斤金賜諸生。諸生乃皆喜曰:「叔孫生誠聖人也,知當世之要務。」
漢九年,高帝徙叔孫通為太子太傅。漢十二年,高祖欲以趙王如意易太子,叔孫通諫上曰:「昔者晉獻公以驪姬之故廢太子,立奚齊,晉國亂者數十年,為天下笑。秦以不蚤定扶蘇,令趙高得以詐立胡亥,自使滅祀,此陛下所親見。今太子仁孝,天下皆聞之;呂后與陛下攻苦食啖,其可背哉!陛下必欲廢適而立少,臣願先伏誅,以頸血汙地。」高帝曰:「公罷矣,吾直戲耳。」叔孫通曰:「太子天下本,本一搖天下振動,柰何以天下為戲!」高帝曰:「吾聽公言。」及上置酒,見留侯所招客從太子入見,上乃遂無易太子志矣。
高帝崩,孝惠即位,乃謂叔孫生曰:「先帝園陵寢廟,群臣莫(能)習。」徙為太常,定宗廟儀法。及稍定漢諸儀法,皆叔孫生為太常所論箸也。
孝惠帝為東朝長樂宮,及閒往,數蹕煩人,乃作複道,方筑武庫南。叔孫生奏事,因請閒曰:「陛下何自筑複道高寢,衣冠月出游高廟?高廟,漢太祖,柰何令後世子孫乘宗廟道上行哉?」孝惠帝大懼,曰:「急壞之。」叔孫生曰:「人主無過舉。今已作,百姓皆知之,今壞此,則示有過舉。願陛下原廟渭北,衣冠月出游之,益廣多宗廟,大孝之本也。」上乃詔有司立原廟。原廟起,以複道故。
孝惠帝曾春出游離宮,叔孫生曰:「古者有春嘗果,方今櫻桃孰,可獻,願陛下出,因取櫻桃獻宗廟。」上乃許之。諸果獻由此興。
숙손통(叔孫通)은 설(薛) 땅 사람이다. 진(秦)에 있을 때는 학문이 뛰어나 부름을 받고 박사(博士)에 제수한다는 조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년 뒤에 진승(陳勝)이 산동에서 일어나자 사자가 그 소식을 전했다. 2세(二世) 황제는 박사와 여러 유생(儒生)들을 불러 물었다. “초에서 수자리 서던 병사들이 기(蘄)를 공격하고 진(陳)에까지 이르렀다 하니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박사와 유생 30여 명이 앞에 나서서 이렇게 말했다. “남의 신하된 자는 사사로이 병사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사사로이 병사를 소유한다면 그것이 바로 반역이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급히 군대를 내어 그들을 치시기 바랍니다.
2세 황제는 이 말을 듣고 노하며 안색이 변했다. 숙손통이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여러 유생들의 말이 모두 틀린 것이옵니다. 천하가 통일되어 한집이 되니, 각 군과 현의 성을 허물었으며, 무기를 녹여 다시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천하에 보였습니다. 또한 위로는 밝은 군주가 계시고, 아래로는 법령이 갖추어져 있어 사람들은 각자 직업에 충실하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는데, 어찌 감히 반란을 일으키는 자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단지 떼도둑들로서 쥐나 개가 물건을 훔쳐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어찌 이야기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현재 군수(郡守)들과 군위(郡尉)들이 그들을 잡아들여 죄를 다스리고 있으니 조금도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2세 황제는 기뻐하며 “좋소.”라고 말했다.
여러 유생들에게도 물어보니 어떤 유생은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 하고, 어떤 유생은 도적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에 2세 황제는 어사(御史)에게 명해 유생들 중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고 말한 사람을 형리에게 넘겨 조사하게 했으니 마땅히 말할 바가 아니었다. 유생들 가운데 도적이라고 말한 사람은 모두 그대로 두었다.
한편 2세 황제는 숙손통에게 비단 20필과 옷 한 벌을 하사하고 박사에 제수했다. 숙손통이 궁전을 나와 숙사로 돌아오자 유생들이 말했다. “선생은 어찌해 그렇게 아첨하는 말을 하셨습니까?”
숙손통이 이렇게 말했다. “공들은 모르오. 나는 거의 호랑이의 입에서 벗어나지 못할 뻔했소.” 그러고는 도망을 쳐서 설(薛)로 갔다. 그러나 설은 이미 초에 항복한 뒤였다. 항량(項梁)이 설에 이르자 숙손통은 그를 따랐다. (항량이) 정도(定陶)에서 패하자 회왕(懷王)을 따랐다. 회왕이 의제(義帝)가 되어 장사(長沙)로 옮기자 숙손통은 남아서 항우를 섬겼다.
한 2년, 한왕이 다섯 제후들을 이끌고 팽성(彭城)에 들어오자 숙손통은 한왕에게 항복했다. 한왕이 패해 서쪽으로 물러하자 끝까지 한을 따랐다.
숙손통이 유생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한왕이 몹시 싫어했다. 이에 짧은 옷으로 갈아입었는데, 초의 복식이라 한왕이 기뻐했다.
숙손통이 한에게 항복했을 때 선비들과 제자 1백여 명이 그를 따랐다. 그러나 숙손통은 그들을 추천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오로지 과거의 도적이나 장사만을 천거했다. 제자들은 모두 몰래 숙손통을 욕하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을 여러 해 동안 섬겼는데 다행히도 선생을 따라 한에 항복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희들을 천거하지 않고 오로지 매우 교활한 자만을 천거하니 무슨 까닭인가?”
숙손통은 이 말을 듣고서 이렇게 말했다. “한왕은 지금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천하를 다투고 있는데, 여러분들이 어찌 싸울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선 적장을 베고 적기를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을 천거한 것이오. 여러분들은 잠시 기다리고 계십시오. 내가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한왕은 숙손통을 박사에 제수하고 직사군(稷嗣君)이라고 불렀다.
한 5년, 천하가 통일된 뒤 제후들은 정도(定陶)에서 한왕을 황제로 추대했는데, 숙손통이 의식과 호칭을 제정했다. 고조는 지나치게 번잡한 진의 의례를 모두 없애고 간편하고 쉽게 했다.
뭇 신하들은 술을 마시면 공을 다투었고 취하면 함부로 큰 소리를 지르고, 칼을 뽑아들고 기둥을 치기도 했다. 고조는 이를 걱정했다.
숙손통은 황제가 이러한 것을 매우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저 선비는 함께 나아가 천하를 얻기는 어렵지만, 함께 얻어진 천하를 지키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노(魯)의 여러 선비들을 불러 신의 제자들과 함께 조정의 의례를 정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고조가 말했다. “어렵지 않겠소?”
숙손통이 말했다. “오제(五帝)는 음악을 달리했고, 삼왕(三王)은 예법을 달리했습니다. 예법은 시대와 인정에 따라 제정하는 예절 규범입니다. (공자가) 하(夏)·은(殷)·주(周)의 예는 이전의 예를 따르면서 줄이거나 더했음을 알 수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중복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대의 예와 진의 의례를 결합해 만들도록 해주십시오.”
고조가 말했다. “시험 삼아 만들어보시오. 사람들이 알기 쉽고, 짐이 실행할 수 있도록 헤아려서 만드시오.”
이에 숙손통이 노에 가서 선비 30여 명을 모집했다. 노의 선비 두 명이 가고 싶지 않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섬긴 사람이 모두 열 사람인데 모두 앞에서 아첨해 가깝게 되었고 귀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막 평정되어 죽은 사람은 아직 장례도 치르지 않았고, 부상당한 사람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또 예악(禮樂)을 일으키려고 하십니다. 예악은 1백 년 동안 덕을 쌓은 뒤에야 흥기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차마 당신이 하려고 하는 바를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하려고 하는 일은 옛 예법에 부합된 것이 아니니, 우리들은 갈 수가 없으니, 당신은 돌아가십시오. 우리를 더럽히지 마십시오!”
숙손통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참으로 고루한 선비들이구려. 시대의 변화를 모르고 있구려.”
마침내 숙손통은 모집한 30명의 선비들과 함께 서쪽으로 돌아왔다. 황제의 좌우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들과 숙손통의 제자 1백여 명이 함께 교외에 새끼줄을 치고 풀로 사람을 만들어 한 달여 동안 예식을 강습했다.
숙손통이 말했다. “폐하께서 시험 삼아 한번 살펴보십시오.” 고조가 나가서 보고는 예식을 행하게 하고 말했다. “짐도 이것은 할 수 있소.” 이에 뭇 신하들에게 명을 내려 예식을 익혀 10월에 모이기로 했다.
한 7년, 장락궁(長樂宮)이 완성되자 제후들과 뭇 신하들이 모두 10월 조회에 참가했다. 예식은 다음과 같았다. 날이 밝기 전에 알자(謁者)가 예를 맡고 조회하는 사람들을 인도해 순서에 따라 대궐의 문에 들어오게 했다. 뜰 가운데에는 전차·기병·보병과 위병(衛兵)을 배열해 무기를 갖추고서 깃발을 세웠다.
그런 뒤 “뛰어 가”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궁전 아래에는 계단을 끼고 낭중(郎中)들을 양 옆에 도열시켰는데 각 계단마다 수백 명이 되었다. 공신·열후(列侯)·장군·군리(軍吏)들은 서열에 따라 서쪽에 열을 지어 동쪽을 향하고, 문관인 승상(丞相) 이하는 동쪽에 열을 지어 서쪽을 향했다.
대행(大行)은 아홉 명의 빈상(賓相)을 두어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게 했다. 이때 황제가 봉련(鳳輦)을 타고 나타나면 모든 관리들이 깃발을 들어 정숙하게 하고, 제후왕 이하 봉록이 6백석인 관리까지 인도되어 차례대로 황제께 하례를 올렸다. 이렇게 하면 제후왕 이하 두려워 떨며 엄숙하고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의식이 끝나고 법주(法酒)를 거행한다. 궁전 위에 모시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가 서열에 따라 일어나서 황제에게 축수했다. 술잔이 아홉 순배가 돌자 알자가 “술잔을 거두시오!”라고 말했다.
어사는 법을 집행해 의식을 준수하지 않은 사람을 즉시 데리고 나갔다. 그래서 의식을 끝내고 다시 주연을 베푸는 동안 어느 누구도 감히 시끄럽게 예를 위반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제야 고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황제의 고귀함을 알았소.” 그러고는 숙손통을 태상(太常)에 제수하고 황금 5백 근을 하사했다.
숙손통은 이 기회를 틈타 진언했다. “신의 여러 제자인 선비들이 신을 따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신과 함께 의법을 만들었으니 폐하께서 관직을 내려주시기 바라옵니다.”
그러자 고조는 그들을 모두 낭관(郎官)으로 삼았다. 숙손통은 궁을 나와서 5백 근의 황금을 모두 여러 선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여러 선비들이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숙손 선생님은 참으로 성인이시다. 당대의 중요한 일을 다 알고 계신다.”
한 9년, 고조는 숙손통을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았다. 한 12년, 고조가 태자를 조왕(趙王) 여의(如意)로 바꾸려 하자 숙손통은 황제에게 이렇게 간언했다. “옛날에 진 헌공(晉獻公)은 총애하던 여희(驪姬) 때문에 태자를 폐하고 해제(奚齊)를 태자로 세웠습니다. 이 때문에 진(晉)은 수십 년 동안 혼란스러웠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진(秦)은 부소(扶蘇)를 일찍이 태자로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고(趙高)가 황제의 명을 사칭해 호해(胡亥)를 태자로 세워 스스로 조상의 제사를 끊어지게 했습니다. 이것은 폐하께서 친히 보신 일입니다.
지금 태자께서 어질고 효성스러운 것을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후께서는 폐하와 함께 보잘것없는 음식을 드시면서 고생을 하셨는데 어찌 여후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만약 폐하께서 굳이 적자를 폐하고 어린 여의를 세우시려 하신다면 먼저 신을 죽여 저의 목에서 나오는 피로 이 땅을 더럽히십시오.”
고조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경은 그만하시오! 짐이 단지 농담을 했을 뿐이오.” 그러자 숙손통은 말했다. “태자는 천하의 근본으로, 근본이 한번 흔들리면 천하가 진동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천하를 가지고 농담을 하실 수 있으십니까?” 고조가 말했다. “짐은 공의 말을 따르겠소.” 황제가 주연을 베풀 때 유후 장량이 초대한 빈객들이 태자를 따라와 만나는 것을 보고 마침내 태를 바꾸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조가 죽고 효혜제(孝惠帝)가 즉위하자 숙손통에게 말했다. “선제의 원릉(園陵)과 침묘(寢廟)의 예절에 대해 뭇 신하들이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에 숙손통을 다시 태상의 자리로 옮겨 종묘의 의법을 제정하게 했다. 이후 한의 여러 의법이 점차 갖추어지니, 이는 모두 숙손통이 태상으로 있으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효혜제가 동쪽에 있는 장락궁에 조회를 가거나 가끔 들를 때 자주 통행을 금지해 백성들을 번거롭게 했다. 그래서 따로 복도(複道)를 만들기로 했는데 무기고(武器庫)의 남쪽에 만들었다.
숙손통이 정사에 대해 보고하면서, 틈을 타서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어찌해 복도를 축조하십니까? 고제(高帝)의 사당에 간직되어 있는 의관은 한 달에 한 번 고묘(高廟)로 옮기게 되어 있습니다. 고묘는 한의 시조묘인데, 어찌해 후손들에게 종묘의 위로 다니게 할 수 있습니까?” 효혜제가 매우 두려워하며 말했다. “급히 그것을 헐어버리시오.”
그러자 숙손통이 말했다. “군주는 잘못된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복도를 이미 만들었다는 것을 백성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것을 헐어버린다면 황제께서 잘못한 일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위수(渭水)의 북쪽에 따로 사당을 만들고, 고제의 의관을 매월 그리로 옮기도록 해주십시오. 종묘를 더 넓히고 많이 짓는 것은 대효(大孝)의 근본입니다.
효혜제는 이에 관리에게 조서를 내려 사당을 세우도록 했다. 고제의 사당을 또 하나 세우게 된 것은 복도 때문이었다.
효혜제가 일찍이 봄에 이궁(離宮)으로 놀러 나갔을 때 숙손통이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는 봄이 되면 햇과일을 종묘에 바쳤습니다. 지금 앵두가 익어 바칠 만합니다. 폐하께서 놀러 나오셨으니 앵두를 가져다 종묘에 바치시기 바랍니다.”
황제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온갖 과일들을 종묘에 바치는 일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評論
太史公曰:語曰「千金之裘,非一狐之腋也;臺榭之榱,非一木之枝也;三代之際,非一士之智也。」信哉!夫高祖起微細,定海內,謀計用兵,可謂盡之矣。然而劉敬脫輓輅一說,建萬世之安,智豈可專邪!叔孫通希世度務,制禮進退,與時變化,卒為漢家儒宗。「大直若詘,道固委蛇」,蓋謂是乎?
【索隱述贊】廈藉眾幹,裘非一狐。委輅獻說,釂蕝陳書。皇帝始貴,車駕西都。既安太子,又和匈奴。奉春、稷嗣,其功可圖。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속언에 ‘천금의 갖옷은 여우 한 마리의 겨드랑이 털로 만든 것이 아니고, 높은 누정의 서까래는 한 그루의 나뭇가지로 만든 것이 아니며, 하·은·주 삼대의 시기도 한 사람의 지혜로써 이룬 것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무릇 고조(高祖)는 미천한 신분에서 일어나 천하를 평정하였으니 계책과 용병술이 지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경(劉敬)은 수레를 끄는 막대를 내던지고 한 번 유세하여 만세의 안정을 이루었으니, 지혜를 어찌 한 사람이 전유할 수 있겠는가? 숙손통(叔孫通)은 세상에 쓰이기를 바라고 의례를 제정에 힘쓰고, 또한 시세의 변화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나 마침내 한 유학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매우 곧은 것은 굽어보이고, 길이란 원래 꾸불꾸불한 것이다.’라고 했는데 아마도 이를 말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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