袁盎鼂錯列傳
袁盎
袁盎者,楚人也,字絲。父故為群盜,徙處安陵。高后時,盎嘗為呂祿舍人。及孝文帝即位,盎兄噲任盎為中郎。
絳侯為丞相,朝罷趨出,意得甚。上禮之恭,常自送之。袁盎進曰:「陛下以丞相何如人?」上曰:「社稷臣。」盎曰:「絳侯所謂功臣,非社稷臣,社稷臣主在與在,主亡與亡。方呂后時,諸呂用事,擅相王,劉氏不絕如帶。是時絳侯為太尉,主兵柄,弗能正。呂后崩,大臣相與共畔諸呂,太尉主兵,適會其成功,所謂功臣,非社稷臣。丞相如有驕主色。陛下謙讓,臣主失禮,竊為陛下不取也。」後朝,上益莊,丞相益畏。已而絳侯望袁盎曰:「吾與而兄善,今兒廷毀我!」盎遂不謝。
及絳侯免相之國,國人上書告以為反,徵系清室,宗室諸公莫敢為言,唯袁盎明絳侯無罪。絳侯得釋,盎頗有力。絳侯乃大與盎結交。
淮南厲王朝,殺辟陽侯,居處驕甚。袁盎諫曰:「諸侯大驕必生患,可適削地。」上弗用。淮南王益橫。及棘蒲侯柴武太子謀反事覺,治,連淮南王,淮南王徵,上因遷之蜀,轞車傳送。袁盎時為中郎將,乃諫曰:「陛下素驕淮南王,弗稍禁,以至此,今又暴摧折之。淮南王為人剛,如有遇霧露行道死,陛下竟為以天下之大弗能容,有殺弟之名,柰何?」上弗聽,遂行之。
淮南王至雍,病死,聞,上輟食,哭甚哀。盎入,頓首請罪。上曰:「以不用公言至此。」盎曰:「上自寬,此往事,豈可悔哉!且陛下有高世之行者三,此不足以毀名。」上曰:「吾高世行三者何事?」盎曰:「陛下居代時,太后嘗病,三年,陛下不交睫,不解衣,湯藥非陛下口所嘗弗進。夫曾參以布衣猶難之,今陛下親以王者修之,過曾參孝遠矣。夫諸呂用事,大臣專制,然陛下從代乘六傳馳不測之淵,雖賁育之勇不及陛下。陛下至代邸,西向讓天子位者再,南面讓天子位者三。夫許由一讓,而陛下五以天下讓,過許由四矣。且陛下遷淮南王,欲以苦其志,使改過,有司衛不謹,故病死。」於是上乃解,曰:「將柰何?」盎曰:「淮南王有三子,唯在陛下耳。」於是文帝立其三子皆為王。盎由此名重朝廷。
袁盎常引大體慨。宦者趙同以數幸,常害袁盎,袁盎患之。盎兄子種為常侍騎,持節夾乘,說盎曰:「君與鬬,廷辱之,使其毀不用。」孝文帝出,趙同參乘,袁盎伏車前曰:「臣聞天子所與共六尺輿者,皆天下豪英。今漢雖乏人,陛下獨奈何與刀鋸餘人載!」於是上笑,下趙同。趙同泣下車。
文帝從霸陵上,欲西馳下峻阪。袁盎騎,并車擥轡。上曰:「將軍怯邪?」盎曰:「臣聞千金之子坐不垂堂,百金之子不騎衡,聖主不乘危而徼幸。今陛下騁六騑,馳下峻山,如有馬驚車敗,陛下縱自輕,柰高廟、太后何?」上乃止。
上幸上林,皇后、慎夫人從。其在禁中,常同席坐。及坐,郎署長布席,袁盎引卻慎夫人坐。慎夫人怒,不肯坐。上亦怒,起,入禁中。盎因前說曰:「臣聞尊卑有序則上下和。今陛下既已立后,慎夫人乃妾,妾主豈可與同坐哉!適所以失尊卑矣。且陛下幸之,即厚賜之。陛下所以為慎夫人,適所以禍之。陛下獨不見『人彘』乎?」於是上乃說,召語慎夫人。慎夫人賜盎金五十斤。
然袁盎亦以數直諫,不得久居中,調為隴西都尉。仁愛士卒,士卒皆爭為死。遷為齊相。徙為吳相,辭行,種謂盎曰:「吳王驕日久,國多姦。今茍欲劾治,彼不上書告君,即利劍刺君矣。南方卑溼,君能日飲,毋何,時說王曰毋反而已。如此幸得脫。」盎用種之計,吳王厚遇盎。
盎告歸,道逢丞相申屠嘉,下車拜謁,丞相從車上謝袁盎。袁盎還,愧其吏,乃之丞相舍上謁,求見丞相。丞相良久而見之。盎因跪曰:「願請閒。」丞相曰:「使君所言公事,之曹與長史掾議,吾且奏之;即私邪,吾不受私語。」袁盎即跪說曰:「君為丞相,自度孰與陳平、絳侯?」丞相曰:「吾不如。」袁盎曰:「善,君即自謂不如。夫陳平、絳侯輔翼高帝,定天下,為將相,而誅諸呂,存劉氏;君乃為材官蹶張,遷為隊率,積功至淮陽守,非有奇計攻城野戰之功。且陛下從代來,每朝,郎官上書疏,未嘗不止輦受其言,言不可用置之,言可受採之,未嘗不稱善。何也?則欲以致天下賢士大夫。上日聞所不聞,明所不知,日益聖智;君今自閉鉗天下之口而日益愚。夫以聖主責愚相,君受禍不久矣。」丞相乃再拜曰:「嘉鄙野人,乃不知,將軍幸教。」引入與坐,為上客。
盎素不好鼂錯,鼂錯所居坐,盎去;盎坐,錯亦去:兩人未嘗同堂語。及孝文帝崩,孝景帝即位,鼂錯為御史大夫,使吏案袁盎受吳王財物,抵罪,詔赦以為庶人。
吳楚反,聞,鼂錯謂丞史曰:「夫袁盎多受吳王金錢,專為蔽匿,言不反。今果反,欲請治盎宜知計謀。」丞史曰:「事未發,治之有絕。今兵西鄉,治之何益!且袁盎不宜有謀。」鼂錯猶與未決。人有告袁盎者,袁盎恐,夜見竇嬰,為言吳所以反者,願至上前口對狀。竇嬰入言上,上乃召袁盎入見。鼂錯在前,及盎請辟人賜閒,錯去,固恨甚。袁盎具言吳所以反狀,以錯故,獨急斬錯以謝吳,吳兵乃可罷。其語具在吳事中。使袁盎為太常,竇嬰為大將軍。兩人素相與善。逮吳反。諸陵長者長安中賢大夫爭附兩人,車隨者日數百乘。
及鼂錯已誅,袁盎以太常使吳。吳王欲使將,不肯。欲殺之,使一都尉以五百人圍守盎軍中。袁盎自其為吳相時,(嘗)有從史嘗盜愛盎侍兒,盎知之,弗泄,遇之如故。人有告從史,言「君知爾與侍者通」,乃亡歸。袁盎驅自追之,遂以侍者賜之,復為從史。及袁盎使吳見守,從史適為守盎校尉司馬,乃悉以其裝齎置二石醇醪,會天寒,士卒饑渴,飲酒醉,西南陬卒皆臥,司馬夜引袁盎起,曰:「君可以去矣,吳王期旦日斬君。」盎弗信,曰:「公何為者?」司馬曰:「臣故為從史盜君侍兒者。」盎乃驚謝曰;「公幸有親,吾不足以累公。」司馬曰:「君弟去,臣亦且亡,辟吾親,君何患!」乃以刀決張,道從醉卒(直)隧[直]出。司馬與分背,袁盎解節毛懷之,杖,步行七八里,明,見梁騎,騎馳去,遂歸報。
吳楚已破,上更以元王子平陸侯禮為楚王,袁盎為楚相。嘗上書有所言,不用。袁盎病免居家,與閭里浮沈,相隨行,鬬雞走狗。雒陽劇孟嘗過袁盎,盎善待之。安陵富人有謂盎曰:「吾聞劇孟博徒,將軍何自通之?」盎曰:「劇孟雖博徒,然母死,客送葬車千餘乘,此亦有過人者。且緩急人所有。夫一旦有急叩門,不以親為解,不以存亡為辭,天下所望者,獨季心、劇孟耳。今公常從數騎,一旦有緩急,寧足恃乎!」罵富人,弗與通。諸公聞之,皆多袁盎。
袁盎雖家居,景帝時時使人問籌策。梁王欲求為嗣,袁盎進說,其後語塞。梁王以此怨盎,曾使人刺盎。刺者至關中,問袁盎,諸君譽之皆不容口。乃見袁盎曰:「臣受梁王金來刺君,君長者,不忍刺君。然後刺君者十餘曹,備之!」袁盎心不樂,家又多怪,乃之棓生所問占。還,梁刺客後曹輩果遮刺殺盎安陵郭門外。
원앙(袁盎)은 초(楚) 지방 사람으로 자는 사(絲)이다. 그의 부친은 이전에 도둑의 일원으로 활동했는데, 뒤에 안릉(安陵)으로 옮겨와서 살았다.
여태후(呂太后: 한 고조의 황후인 여치(呂雉)) 시대에 원앙은 여태후의 조카인 여록(呂祿)의 가신(家臣)으로 지낸 적이 있었다. 효문제(孝文帝)가 즉위하자 원앙의 형 쾌(噲)가 원앙을 추천해 중랑(中郎)이 되었다.
당시에 강후(絳侯) 주발(周勃)이 승상(丞相)으로 있었는데, 조회를 마친 후에 급히 물러 나오는 모습이 매우 으시대며 만족해 있었다. 황제도 그를 공경하게 예우해 주며 항상 그를 친히 전송해 주곤 하였다.
원앙이 황제 앞에 나가 아뢰었다. "폐하께서는 승상 강후를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황제가 말했다. "그는 사직(社稷)의 중신이라고 생각하오."
원앙이 말했다. "강후는 이른바 통상적인 공신일 뿐이지 사직의 중신은 아닙니다. 사직의 중신이란 군주와 생사를 함께 해야 합니다. 여태후가 정권을 장악했던 시기에 여씨(呂氏) 일족이 권력을 쥐고 제멋대로 서로 왕이 되어 유씨(劉氏)의 천하는 한낱 끊어지지 않은 실낱같아서 거의 단절될 뻔했습니다. 이런 때에 강후는 태위(太尉)로서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면서도 이를 바로잡고 구하지 못했습니다. 여태후가 서거하자 대신들이 서로 힘을 합해 여씨 일족에게 반기를 들 때 태위는 마침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연히 성공할 기회를 얻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른바 통상적인 공신이나 사직의 중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승상은 폐하에 대해 교만한 기색을 보이고, 폐하께서는 도리어 겸허하게 양보하시니 이는 신하와 군주가 모두 예를 잃은 것입니다. 제 생각에 이는 폐하께서 취하실 태도가 아닙니다."
그 후 조회가 있을 때부터 황제는 점차 위엄을 되찾게 되었고, 승상도 점차 황제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후는 원앙을 원망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형과 친한 사이인데, 지금 당신이 조정에서 감히 나를 비방하다니!” 하지만 원앙은 끝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강후가 승상에서 면직되어 자기의 봉국(封國)으로 돌아갔는데, 그곳의 사람들에 상서를 올려 강후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밀고했다. 이에 강후는 경성으로 소환되어 감옥에 구금되었는데, 종실과 대신들 중에 아무도 강후를 위해 변호하지 않았다.
오직 원앙만이 강후가 죄가 없다고 증명하였다. 강후가 석방될 수 있었던 것은 원앙의 힘썼기 때문이었다. 그 후 강후과 원앙은 크게 친교를 맺었다.
회남여왕(淮南厲王) 유장(劉長: 효문제의 이복동생)이 입조하였을 때에 여태후의 정부였던 벽양후(辟陽侯) 심이기(審食其)를 살해하는 등 행동거지가 매우 교만했다.
이에 원앙은 황상에게 이렇게 간언을 올렸다. "제후가 지나치게 교만하면 반드시 재난이 생기니, 적당히 봉지를 삭감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황제는 원앙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자 회남여왕은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극포후(棘蒲侯) 시무(柴武)의 태자(太子) 시기(柴奇)의 모반을 준비한 사건이 발각되어 그의 죄를 추적조사를 하다니 회남왕도 연루가 되어 소환조사를 받고 징계하게 되었다. 황제는 회안왕을 촉(蜀)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기로 하고 죄수를 호송하는 마차에 실어 보내도록 했다.
원앙은 당시에 중랑장(中郎將)을 맡고 있었는데 바로 황제에게 이렇게 간언했다. "폐하께서는 평소에 회남왕이 교만방자해도 조금도 금하지 않으셨기에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강경하게 그의 기를 꺾어버리려 하십니다. 회남왕은 자신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난폭한 사람인데, 만일 험한 귀양 도중에 풍한(風寒)에 걸려 죽어 버리면 폐하께서는 결국 천하의 대권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우 한 사람을 포용하지 못해 아우를 죽였다는 오명을 듣게 되실 것인데, 그럴 때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황제는 원앙의 간언을 듣지 않고 마침내 회남왕을 촉으로 귀양 보냈다.
회남왕은 옹(雍) 지방에 이르러 병사했다. 그 소식을 듣고 황제는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면서 매우 슬퍼했다.
원앙이 입조해 머리를 조아려 절을 올리며 자신의 죄를 청했다. 황제가 말했다. “공의 간언(諫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지경에 이르렀소.” 원앙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마음을 넓게 가지십시오! 이번 일은 이미 지난 일이니 설사 후회하신들 어떻게 되돌릴 것입니까? 또한 폐하께서는 세상에서 고결한 세 가지의 행적이 갖추고 계시니, 이번 사건으로 폐하의 명성을 훼손시키진 못할 것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짐이 세상에서 고결한 세 가지 행적을 갖추고 있다니,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원앙이 말했다. "폐하께서 대(代)나라에 계실 때 태후(太后)께서 이미 3년 동안 병을 앓고 계셨습니다. 그때 폐하께서는 제대로 눈을 붙이지 않으셨고 옷도 벗지 아니하고 대기하고 계셨으며, 탕약도 폐하께서 친히 입으로 맛본 것이 아니면 태후께 올리지 않으셨습니다. 대저 증삼(曾參)은 평민의 신분으로도 오히려 그렇게 하기 어려워했는데, 지금의 폐하께서는 친히 왕자의 몸으로도 실행하셨으니 증삼의 효도를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여씨 일족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대신들이 독단으로 정치를 통제하고 있을 때 폐하께서는 대나라에서 여섯 대의 수레를 타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위험한 장안을 비유함)으로 과감하게 뛰어 들었습니다. 설령 맹분(孟賁)과 하육(夏育) 같은 용사라고 할지라도 폐하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폐하께서는 경성에 있는 대왕(代王)의 객관(客館)에 이르시어 서쪽을 향해 천자(天子)의 자리를 사양하신 것이 두 번이었고, 남면하여 천자의 자리를 양보하신 것이 세 번이나 되었습니다.
허유(許由)가 천하를 양보한 것은 단지 한 번뿐인데, 폐하께서는 다섯 번이나 천하를 사양했으니, 허유보다 네 번이나 더 많은 것입니다. 또한 폐하께서 회남왕을 귀양 보낸 것은 그가 마음속의 고통을 감내하여 스스로의 잘못을 고치려고 하신 것이었는데, 그만 호송하는 관리들이 그를 신중하지 못하게 보살폈기 때문에 병사한 것입니다."
이에 황제는 곧 마음을 놓고 말했다. "장차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원앙이 말했다. "회남왕에게 아들 셋이 있는데, 오직 폐하께서 그들을 어떻게 위문해 주시는 것에 달렸습니다." 이에 효문제는 그 세 아들을 모두 왕으로 봉했다. 원앙은 이 일로 말미암아 조정에서 명성을 크게 떨쳤다.
원앙은 항상 대국적인 도리를 인용하여 의분에 차서 강개 있게 말했다. 환관 조동(趙同: 조담(趙談))은 자주 황제의 총애를 받았는데, 항상 암중으로 원앙을 해치려고 했기 때문에 원앙은 그것을 우려했다.
원앙의 조카 원종(袁種)은 상시기(常侍騎)로서 부절(符節)을 들고 황제의 곁에서 시종했는데 그가 원앙에게 이렇게 권고했다.
"숙부님께서 조동과 암투를 벌이고 있는데, 조정에서 그에게 모욕을 주어 그의 중상모략이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한 번은 효문제가 나갈 때 조동이 황제를 수행하며 수레에 동승했다. 그때 원앙이 수레 앞에 엎드리며 말했다. "신은 천자께서 육척의 수레에 함께 태우고 가는 사람들은 모두 천하의 호걸과 영웅이라고 들었습니다. 지금 비록 한나라에 인재가 모자란다고 하나 폐하께서 어찌하여 거세한 환관 나부랭이를 함께 수레를 태우십니까?"
이에 황제는 웃으면서 조동을 내리게 했다. 조동은 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수레에서 내렸다.
효문제가 패릉(霸陵) 위에서 서쪽 변두리의 가파른 산비탈을 따라 수레를 몰고 내려가려고 했다. 이 때 원앙은 말을 타고서 황제의 수레에 재빨리 접근하여 수레를 끄는 말의 고삐를 잡았다.
이에 황제가 말했다. "장군은 겁이 나오?"
원앙이 말했다. “신은 천금을 가진 집의 아들은 혹시 처마 끝의 기왓장이 떨어져 다칠지도 모르니 마루 끝에 앉지 아니하고, 백금을 가진 집의 아들은 난간에 걸터앉지 않으며, 성군은 위험한 것은 타지 않고 요행을 바라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몰아 험준한 산비탈을 내달려 내려가려고 하시는데, 만일 말이 놀라 수레가 넘어지게 되면 폐하 자신의 몸이야 하찮게 보신 것을 차지하더라도 고조(高祖)의 사당과 태후(太后)를 장차 어찌 대하시겠습니까?”
이에 황제는 그만두게 하였다.
황제가 상림원(上林苑)에 행차했을 때 두황후(竇皇后)와 신부인(愼夫人)도 따라갔다. 그녀들은 궁중에 있을 때에 항상 동석에 앉았다. 이번에 상림원에서 좌석을 마련할 때도 낭서장(郎署長)이 동석의 자리를 만들자 원앙이 일부러 신부인의 좌석을 뒤로 밀어놓았다. 신부인이 노하여 좌석에 앉지 않았고, 황제 또한 노하여 일어나 궁중으로 뒤돌아가 버렸다.
원앙은 이 때문에 황제 앞으로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신은 존귀함과 비천함에 질서가 있으면 위와 아래가 화목해진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이미 황후를 책봉하신 후에 신부인은 바로 첩의 신분에 불과합니다. 첩과 정처(正妻)가 어찌 동석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다만 존귀함과 비천함의 분별을 잃은 길이 될 것입니다. 폐하께서 신부인을 총애하신다면 그녀에게 후하게 상을 하사하십시오. 폐하께서 방금 하신 행동은 바로 신부인을 위한 것이었지만 기실 그녀에게 화근이 되는 일입니다. 폐하께서는 설마 한고조께서 총애했던 척부인을 여태후가 ‘인체(人彘: 사람 돼지)’로 만든 사건을 알지 못하신 것은 아니시겠지요!"
이 말을 들은 황제는 비로소 기뻐하며 신부인을 불러 원앙의 말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이에 신부인은 원앙에게 황금 50근을 하사했다.
그러나 원앙은 자주 직간(直諫)을 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조정에 머물지 못하고 농서(隴西) 도위(都尉)로 좌천되어갔다. 그는 사졸을 어질고 자애롭게 보살폈기 때문에 사졸들은 모두 그를 위한 일이라면 앞을 다투어 목숨을 돌보지 않을 정도였다. 뒤에 그는 제(齊)나라의 재상으로 승진하였고, 다시 오(吳)나라의 재상으로 이동 배치하게 되었다.
그가 작별인사하고 오나라로 떠나려 할 때 조카인 원종(袁種)이 원앙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왕(吳王)은 교만에 빠진지 오래되었고, 그 나라 안에는 간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만약 숙부님이 그들을 죄행을 들추어내 다스리려 한다면 그들은 반대로 폐하께 상서를 올려 숙부님을 고발하거나 날카로운 검으로 숙부님의 목숨을 노릴 것입니다. 남방은 지대가 낮고 습한 곳이니 숙부님께서는 그냥 날마다 술이나 드시고, 다른 일은 일절 거론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가끔 왕에게 조정을 배반하지 말라고 권고만 하시면 됩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다행히 화를 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원앙이 원종의 책략을 받아들여 그대로 따르니, 오왕이 그를 후하게 대접했다.
원앙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승상 신도가(申屠嘉)를 만나 바로 수레에서 내려 배알했지만 승상은 단지 수레 위에서 형식적으로 그에게 답례했다. 원앙은 집으로 돌아와서 생각하니 자기의 부하 관리들 앞에게 부끄러웠다. 이에 그는 승상의 관저로 가서 직접 뵙기를 청했다. 승상은 한참 지나서야 그를 접견했다. 원앙은 바로 무릎을 꿇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을 물리쳐주십시오. 단독으로 뵙고 싶습니다.”
그러나 승상이 말했다. "만일 공이 하고자 하는 말이 공적인 일이거든 관청에 가서 장사(長史)나 아전들과 상의하게 하시오. 그러면 내가 황제께 보고하겠소. 그러나 만일 사적인 일이라면 나는 이야기하지 않겠소."
원앙은 곧바로 무릎을 꿇은 채 이렇게 말했다. "공께서는 승상으로 계시면서 스스로 헤아려서 진평(陳平), 강후(絳侯)와 견주면 어떨 것 같습니까?" 승상이 말했다. "나는 그들만 못합니다."
원앙이 말했다. "좋습니다. 승상께서는 스스로 그들보다 못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저 진평과 강후는 고조를 보필하여 천하를 평정했고 승상이 되어서 여씨 일족을 토벌하여 유씨의 왕조를 보전시켰습니다. 그런데 승상께서는 무관출신으로 쇠노를 잘 쏘아서 대장으로 승진하셨고, 공을 쌓아 회양(淮陽)의 군수가 되었지 기이한 계책을 낸 것도 아니며 성을 공략하고 야전에서 큰 전공을 세운 것도 아닙니다.
또한 폐하께서는 대(代)나라에서 오신 이래로 매번 조회를 할 때마다 낭관(郎官)들이 상주문을 올리면 폐하께서는 타시던 가마를 멈추게 하시고 그들의 의견을 취하지 않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 의견 중에서 채용할 만한 것이 아니면 한 곁에 남겨두고 채용할 만한 의견이면 채택하시고, ‘좋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무엇 때문인지 알고 계십니까? 이것은 바로 이런 방법으로 천하의 현명한 사대부를 초치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폐하께서는 날마다 아직 듣지 못하신 사정을 들으시고, 그동안 몰랐던 사실을 명확하게 아시게 되어 날이 갈수록 성스럽고 지혜로워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승상께서는 스스로 천하 사람들의 입을 가로막고 다물게 하여 날로 더욱 우매해지고 있습니다. 대개 성군이 우매한 재상을 질책할 때가 되면 당신께서 고스란히 그 화를 받을 때가 멀지 않았습니다.”
이에 승상은 원앙에게 정중하게 두 번 절하고 말했다. “저는 비루하고 촌스런 사람인지라 아는 것이 없으니 장군께서 가르침을 주시면 다행입니다.” 그리고 원앙을 이끌고 내실로 들어가 자리를 같이하고 상객으로 대우했다.
원앙은 본래부터 조조(晁錯)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조가 있는 자리에서는 원앙이 떠나고, 원앙이 있는 자리에서는 조조 역시 떠났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한 번도 같은 자리에서 더불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효문제가 붕어하고 효경제(孝景帝)가 즉위하자 조조는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그는 수하의 관리를 보내 원앙이 오왕(吳王) 유비(劉濞)의 재물을 수납한 일을 조사하여 그 범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황제는 조칙을 내려 원앙의 죄를 사면하고 서민으로 강등시키는 선에서 그쳤다.
오(吳)나라와 초(楚)나라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도성에 전해지자 조조가 부하 관리인 승(丞)과 사(史)에게 말했다. “대저 원앙은 오왕에게 많은 뇌물을 받고 제멋대로 오왕의 죄를 숨기고 반란을 꾀하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지금 오왕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사실로 들어났다. 나는 황제께 원앙을 처벌하게 청하려고 한다. 그는 반드시 사전에 모반의 음모를 알았을 것이다.”
승과 사가 말했다. "사건이 발발하지 않았을 때 그를 처벌했으면 반란의 음모를 중단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반란군이 서쪽으로 진격하고 있는데 그를 처벌한들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또한 원앙은 부당하게 음모에 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조는 망설이며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이러한 사실을 원앙에게 알려주었다. 원앙은 두려워서 야밤에 두영(竇嬰: 두황후(竇皇后)의 조카)을 찾아가서 그에게 오나라가 모반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고 황제 면전에서 친히 대질하여 진상을 아뢰고 싶다고 했다. 두영이 궁전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원앙의 사연을 보고하자 황제는 곧 원앙을 궁전으로 불러 만나보았다. 이 때에 조조는 황제의 면전에 있었는데 원앙이 다른 사람을 회피하게 하고 단독으로 접견하길 청하자 조조는 물러나면서 대단히 원통하게 생각했다.
원앙은 오나라가 반란을 일으키게 된 진상을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그 원인은 조조 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오로지 서둘러 조조를 참수하여 오나라에게 사과한다면 오나라의 군대는 곧 물러날 것이라고 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에 황제는 원앙을 태상(太常)으로, 두영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았다. 이 두 사람은 평소 사이가 좋았다. 오나라가 반란을 일으키자 제릉(諸陵)에 거주하고 있은 덕망이 있는 사람들과 장안(長安)에 현명한 대부들이 모두 다투어 그 두 사람에게 의탁했는데, 그들의 뒤를 따르는 수레가 매일 수백 대가 되었다.
조조를 이미 죽인 후에 원앙은 태상의 신분으로 오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왕은 원앙을 장군으로 임명하고자 했으나 그가 승낙하지 하지 않자 살해하려고 했다. 그리고 한 도위(都尉)에게 5백 명을 거느리고 군대 안에서 원앙을 겹겹이 감시하게 했다. 예전에 원앙이 오나라의 재상으로 재직 시에 그 부하 관리 중의 한 사람이 원앙의 시녀를 좋아하여 몰래 사랑을 나누었는데, 원앙은 이를 알아채고도 누설하지 않고 전과 마찬가지로 대했다.
어떤 사람이 그 부하 관리에게 “재상께서 당신과 시녀가 정을 통한 사실을 알고 있다.”라고 알리자 그는 문책될 것이 두려워서 고향의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에 원앙은 친히 말을 몰아서 그를 쫓아가서 만류하고, 마침내 시녀를 그에게 보내주고 다시 부하 관리로 일하게 했다
원앙이 오나라에 사신으로 나왔다가 붙잡혀 감시를 당하고 있었을 때, 마침 그 부하 관리가 원앙을 감시하는 교위사마(校尉司馬)로 있었다. 그는 원앙을 구원하기 위해서 휴대하고 있던 재물을 모두 팔아서 독한 술 두 섬(이십 말)을 구입했다. 그때 마침 날씨는 몹시 추웠고 원앙을 감시하던 병사들은 굶주리고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교위사마는 그들에게 수고한다고 술을 마시게 하여 모두 취하게 만들었는데, 그 중에서 서남쪽을 지키는 병사들은 모두 만취하여 쓰러져 있다.
그 교위사마는 밤에 원앙을 찾아가서 그를 일으켜서 이렇게 말했다. “공께서는 지금 도피하십시오. 오왕은 내일 아침에 공을 죽이려고 결정했습니다.” 원앙은 믿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오.” 사마가 말했다. “소신은 예전에 공의 수하로 일하던 관리로 공의 시녀와 몰래 사통했던 사람입니다.”
그제야 원앙은 놀라 사양하면서 말했다. “당신은 운 좋게 양친이 생존해 계시니, 나 때문에 당신까지 연루시킬 생각이 없소.” 이에 사마교위가 말했다. “공께서는 단지 도피하시면 됩니다. 저도 또한 도망가서 저의 양친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겠습니다. 공께서는 조금도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칼로 군영의 장막을 갈라서 원앙을 만취해 쓰러져 병사들 사이로 인도하여 도피시켰다.
원앙은 사마교위와 사람들의 통행이 적은 길을 택하여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도피했다. 원앙은 절모(節毛: 임금이 사신에게 주는 기)를 해체하여 가슴 속에 품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7, 8리를 걸어서 갔다. 다음날 새벽녘에 그는 양(梁)나라 기병을 만나서 그들의 말을 얻어 타고 마침내 도성으로 돌아와서 오나라의 정황을 황제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오나라와 초나라의 반군을 이미 격파시킨 후에 황제는 다시 초원왕(楚元王)의 아들인 평륙후(平陸侯) 유례(劉禮)를 초왕(楚王)으로 삼고, 원앙을 초나라 재상에 임명했다. 원앙은 일찍이 상서를 올려 진언을 드렸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앙은 병을 핑계 삼아 벼슬에서 물러나와 집에서 한가하게 지냈다.
그는 고을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며 서로 따라다니면서 닭싸움이나 개 경주 등과 같은 유희를 즐겼다. 낙양(洛陽)의 극맹(劇孟: 노름꾼)이 일찍이 원앙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원앙은 그를 잘 대접했다.
안릉(安陵)의 어떤 부자가 원앙에게 일러서 말했다. “나는 극맹이 노름꾼으로 들었는데, 장군께서는 어찌해서 그와 같은 사람과 왕래하며 지내십니까?" 원앙이 말했다. "극맹은 비록 노름꾼이지만 그의 모친이 서거할 때에 장례식에 참석한 손님의 수레가 천여 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그가 범인보다 뛰어난 측면이 있기 때문이오. 또 급하고 어려운 사정은 사람마다 모두 생기게 마련이오. 만약 어떤 사람이 급한 일을 당해서 문을 두드리면 양친을 구실 삼아 양해를 구하거나 집에 있으면서도 없다고 핑계를 대지 않으니, 천하의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은 단지 계심(季心: 계포(季布)의 동생)과 극맹일 따름이오. 지금 당신은 늘 몇 명의 말 탄 시종을 거느리고 다니지만 일단 위급한 일이 생기면 정녕 그들을 믿을 수 있겠소!" 원앙은 그 부자를 매섭게 욕한 후에 다시 그와 왕래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모두 원앙을 칭송했다.
원앙은 비록 집에 한가하게 거처하고 있었지만 경제는 자주 사람을 보내어 국정에 관한 책략을 자문하곤 했다. 양왕(梁王: 한경제의 동생)은 두태후의 후원을 업고 경제의 후사가 될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원앙이 반대하는 진언한 후 그 논의는 중단되고 말았다. 양왕은 이 일로 원앙을 원한을 가지고 있다가 자객을 보내 원앙을 암살하려고 했다. 자객이 관중(關中)에 와서 원앙에 대해 물어보니 많은 사람들이 모두 원앙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했다.
그 자객은 바로 원앙을 찾아뵙고 말했다. “소신은 양왕의 금전을 받고서 당신을 암살하려고 왔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덕망을 갖춘 분인지라 차마 암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당신을 암살하려는 10여 명의 무리가 대기하고 중이니, 잘 대비하시길 바랍니다.”
그의 말을 듣고 원앙은 마음속이 편치 못했다. 또 집안에서 괴기한 일이 많이 발생해 곧바로 배(棓)씨 성을 지닌 점쟁이가 있는 곳에 가서 길흉을 묻고 점을 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양왕이 보낸 자객들이 안릉의 성문 밖에서 그를 가로막고 암살했다.
鼂錯
鼂錯者,潁川人也。學申商刑名於軹張恢先所,與雒陽宋孟及劉禮同師。以文學為太常掌故。
錯為人陗直刻深。孝文帝時,天下無治尚書者,獨聞濟南伏生故秦博士,治尚書,年九十餘,老不可徵,乃詔太常使人往受之。太常遣錯受尚書伏生所。還,因上便宜事,以書稱說。詔以為太子舍人、門大夫、家令。以其辯得幸太子,太子家號曰「智囊」。數上書孝文時,言削諸侯事,及法令可更定者。書數十上,孝文不聽,然奇其材,遷為中大夫。當是時,太子善錯計策,袁盎諸大功臣多不好錯。
景帝即位,以錯為內史。錯常數請閒言事,輒聽,寵幸傾九卿,法令多所更定。丞相申屠嘉心弗便,力未有以傷。內史府居太上廟壖中,門東出,不便,錯乃穿兩門南出,鑿廟壖垣。丞相嘉聞,大怒,欲因此過為奏請誅錯。錯聞之,即夜請閒,具為上言之。丞相奏事,因言錯擅鑿廟垣為門,請下廷尉誅。上曰:「此非廟垣,乃壖中垣,不致於法。」丞相謝。罷朝,怒謂長史曰:「吾當先斬以聞,乃先請,為兒所賣,固誤。」丞相遂發病死。錯以此愈貴。
遷為御史大夫,請諸侯之罪過,削其地,收其枝郡。奏上,上令公卿列侯宗室集議,莫敢難,獨竇嬰爭之,由此與錯有卻。錯所更令三十章,諸侯皆諠譁疾鼂錯。錯父聞之,從潁川來,謂錯曰:「上初即位,公為政用事,侵削諸侯,別疏人骨肉,人口議多怨公者,何也?」鼂錯曰:「固也。不如此,天子不尊,宗廟不安。」錯父曰:「劉氏安矣,而鼂氏危矣,吾去公歸矣!」遂飲藥死,曰:「吾不忍見禍及吾身。」死十餘日,吳楚七國果反,以誅錯為名。及竇嬰、袁盎進說,上令鼂錯衣朝衣斬東市。
鼂錯已死,謁者仆射鄧公為校尉,擊吳楚軍為將。還,上書言軍事,謁見上。上問曰:「道軍所來,聞鼂錯死,吳楚罷不?」鄧公曰:「吳王為反數十年矣,發怒削地,以誅錯為名,其意非在錯也。且臣恐天下之士噤口,不敢復言也!」上曰:「何哉?」鄧公曰:「夫鼂錯患諸侯彊大不可制,故請削地以尊京師,萬世之利也。計畫始行,卒受大戮,內杜忠臣之口,外為諸侯報仇,臣竊為陛下不取也。」於是景帝默然良久,曰:「公言善,吾亦恨之。」乃拜鄧公為城陽中尉。
鄧公,成固人也,多奇計。建元中,上招賢良,公卿言鄧公,時鄧公免,起家為九卿。一年,復謝病免歸。其子章以修黃老言顯於諸公閒。
조조(晁錯)는 영천(潁川: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县)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지현(軹縣)의 장회(張恢) 선생에게 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鞅)의 형명학설(刑名學說: 법가의 일파)을 배웠다. 낙양의 송맹(宋孟), 유례(劉禮)와 더불어 같은 스승을 섬겼다. 그는 문학에 뛰어나 태상(太常)의 장고(掌故: 옛 사실과 관례, 고사를 맡은 벼슬아치)가 되었다.
조조의 사람됨이 엄하고, 강직하며 가혹할 정도로 사나웠다. 효문제 때에는 천하에 『상서(尙書)』를 연구한 사람이 드물었다. 오직 제남(濟南)의 복생(伏生)이 지난 날 진(秦)나라의 박사(博士) 출신으로 『상서』에 조예가 깊었으나 그의 나이가 90여 세로 너무 연로하여 조정으로 초빙할 수가 없었다.
이에 황제는 태상에게 조서를 내려 적당한 사람을 복생에게 보내 그의 학문을 전수받도록 했다. 태상에서는 조조를 파견하여 복생에게 『상서』를 전수받게 하였다.
복생에게 학문을 전수받고 돌아온 조조는 나라와 백성에 유익한 일을 상주하고, 그 때마다 『상서』를 인증하여 해설했다. 황제는 조칙을 내려 그를 태자의 사인(舍人), 문대부(門大夫), 가령(家令)으로 임명했다.
그는 뛰어난 언변으로 태자의 총애를 얻었으며 태자의 궁 안에서 그를 지낭(智囊: 지혜 주머니)라고 일컬어졌다. 그는 효문제 때에 자주 상서를 올려 제후들의 봉토를 삭감하고 법령을 더욱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효문제는 채납하지 않았고, 단지 그의 재능이 기이하다고 여겨 중대부(中大夫)로 승진시켰다. 당시 태자는 조조의 계책에 좋다고 여겼으나 원앙을 비롯한 여러 공신들은 대부분 조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경제가 즉위한 후에 조조는 내사(內史)로 임명되었다. 조조는 황제에게 자주 주변사람을 물리치고 단독으로 더불어 정사에 관해 담론했는데, 경제는 매번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에 대한 황제의 총애는 구경(九卿)을 초과할 정도였고, 그에 의해서 개정된 법령이 많았다.
승상 신도가(申屠嘉)는 마음속으로 언짢게 여겼으나 힘으로서 그에게 상해를 끼칠 수 가 없었다. 내사부(內史府)는 태상황(太上皇)의 사당 바깥담 안쪽 공터가 있었는데, 문이 동쪽으로 나 있어서 출입하기가 불편했다. 조조는 이에 남쪽으로 두개의 문을 내어 출입을 편하게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태상황 사당의 바깥담을 뚫었다.
승상 신도가는 이 소식을 듣고서 크게 노하여 이번 일을 계기로 조조의 과실을 상주문으로 작성하여 그를 죽일 것을 주청하려고 했다. 조조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당일 밤에 단독으로 황제를 찾아뵙고 그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 상세하게 해명했다. 승상은 정사에 관한 일을 상주하면서 기회를 틈타 조조가 제멋대로 태상황 사당의 담을 뚫어 문을 냈으니, 그를 마땅히 정위(廷尉: 형옥刑獄을 관장하는 관리)에게 맡겨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이에 황제가 말했다. “조조가 뚫은 담은 태상황 사당의 담이 아니고, 사당바깥에 있는 공터의 담이니 법령에 저촉되지 않습니다.” 이에 승상은 사죄를 했다. 조회가 끝난 후에 승상은 노기가 치밀어서 장사(長史)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땅히 먼저 조조를 참수한 후에 황제께 보고해야 했다. 먼저 조조를 처형할 것을 주청했기 때문에 그 애송이에게 치욕을 당했으니 진실로 내 잘못이 크다.” 승상은 이 일로 마침내 병사하고, 조조는 이로 인해 더욱 존중받게 되었다.
조조는 어사대부로 승진한 후에 제후들의 죄과에 상응하는 봉지를 삭감하고, 제후국의 변경에 있는 일부 군(郡)까지 몰수하자고 주청했다. 상주문이 올라가자 황제는 공경(公卿), 열후(列侯), 종실들을 불러 모아 토론하게 했는데 아무도 감히 조조의 건의안을 비난하지 못했다.
단지 두영(竇嬰)만이 조조와 논쟁을 벌였는데, 이로 인해 두영은 조조와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 조조가 수정한 법령은 30장(章)에 달했는데, 제후들은 모두 마구 지껄여 시끄럽게 반대했고, 조조를 몹시 원망하게 되었다.
조조의 부친이 이 소식을 듣고 영천으로부터 올라와 조조에게 타일러 말했다. “폐하께서 막 즉위하자마자 네가 정권을 장악하여 제후들의 역량을 약화시키기 위해 봉지를 삭감하고, 남들의 혈육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어 사람들이 들끓듯이 너를 원망하는데, 무엇 때문에 그리 행동하느냐?”
조조가 말했다. “사정이 본래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천자는 존귀해질 수 없고, 종묘는 불안하게 됩니다.” 조조의 부친이 또다시 말했다.
“정녕 그렇게 한다면 유씨의 천하는 편안해지지만 우리 조씨는 큰 위험에 처하게 된다. 나는 너와의 인연을 끊고 먼저 세상을 떠나가야겠다.”
그리고 마침내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면서 말했다. “나는 재앙이 내 몸에게까지 미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다.”
조조의 부친이 자살한 지 십여 일 만에 오초(吳楚) 등 7개국이 과연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나라들은 조조를 처벌하여 죽이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다. 그때 두영과 원앙이 황제에게 조조를 처벌하여 난리를 조기에 수습해야 한다고 주청을 올리자 황제는 명을 내려 조조에게 조복(朝服)을 갖추게 입게 한 후에 동쪽 저잣거리에서 참수시켰다.
조조가 죽은 뒤에 알자복야(謁者僕射) 등공(鄧公)을 교위(校尉)로 임명하고, 오초의 반란군을 진압하는 선봉장으로 삼았다. 등공이 전쟁터에서 돌아와서 군사 정황에 관한 글을 보고하고, 황제를 알현했을 때 황제가 그에게 물어 보았다. “오초의 반란군들이 조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과연 퇴각하던가?"
등공이 말했다. “오왕이 반란을 도모한 것은 수십 년째 된 것으로, 그들은 단지 봉지를 삭감한 데에 분개하여 조조를 주벌하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을 뿐입니다. 그들의 본의는 조조에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신이 걱정하는 바는 이 일을 계기로 천하의 선비들이 입을 다물고, 다시는 감히 황제께 진언을 올리지 않는 겁니다!”
이에 황제가 말했다. “무엇 때문이오?”
등공이 대답했다. "대저 조조는 제후들이 강대해져서 제어할 수 없을 것을 걱정했기 때문에 그들의 봉지를 삭감하길 청한 것인데, 이는 조정의 존엄을 높이고 실제적으로 만세(萬世)에 이익이 되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런 조조의 계획이 겨우 시행되자마자 뜻밖에 살육을 당했으니, 이는 안으로는 충신의 입을 막고 밖으로는 도리어 제후를 위해 원수를 갚아 준 결과가 되었습니다. 신은 사적으로 폐하께서 취하실 바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경제는 묵묵하게 한참을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공의 말이 옳다. 나도 한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바로 등공을 성양(城陽)의 중위(中尉)로 삼았다.
등공은 성고(成固: 지금의 섬서성 한중시(汉中市) 성고현(城固县)) 사람으로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기묘한 계책에 많이 내놓았다. 건원(建元) 연간(서기전 140-서기전 145)에 황제가 현량(賢良: 한문제 때부터 시작된 과거 제도로, 책문을 통해 직언과 간언에 능한 인사)을 초빙할 때에 공경대신들이 등공을 추천했다. 그때 등공은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하게 집안에 있다가 다시 기용되어 구경(九卿)이 되었다. 1년 뒤에 그는 다시 병을 핑계 삼아 벼슬에서 물러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아들인 등장(鄧章)은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학문을 닦아서 대신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다.
評論
太史公曰:袁盎雖不好學,亦善傅會,仁心為質,引義慨。遭孝文初立,資適逢世。時以變易,及吳楚一說,說雖行哉,然復不遂。好聲矜賢,竟以名敗。鼂錯為家令時,數言事不用;後擅權,多所變更。諸侯發難,不急匡救,欲報私讎,反以亡軀。語曰「變古亂常,不死則亡」,豈錯等謂邪!
【索隱述贊】袁絲公直,亦多附會。攬轡見重,卻席翳賴。朝錯建策,屢陳利害。尊主卑臣,家危國泰。悲彼二子,名立身敗!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원앙(袁盎)은 비록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견강부회하는 데에 능했다. 그는 어진 마음을 바탕으로 삼고 자주 대의를 이용하여 격앙된 어조로 자기 의견을 표출했다. 효문제 즉위 초기에 그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시대를 맞이했다. 시국은 끊임없이 변화하여 오, 초나라가 반란을 일으킬 무렵에 비록 그의 제의가 황제에게 받아들여져 시행되었으나 그 후에는 다시는 조정에서 쓰이지 못했다. 그는 명성을 좋아하고 자신의 현명함을 자랑했으나 마침내 명성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조조(晁錯)가 태자가령(太子家令)이 되었을 때 여러 차례 진언을 올렸으나 채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뒤에 대권을 장악하자 나라의 법령을 많이 고쳤다. 그는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는 이를 바로잡아 구제하는 것에 급하지 않고, 사적인 원한을 갚으려다 도리어 자신의 몸을 죽이는 불행을 초래하고 말았다. 속담에 말하길 ‘옛 법을 바꾸고 정상적인 규범을 어지럽히면 반드시 죽지 않으면 멸망하게 된다.’라고 했는데, 어찌 조조와 같은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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