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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史記列傳

史記 卷一O三. 萬石張叔列傳

by 柳川 2019. 6. 3.

                                   萬石張叔列傳 




萬石君

萬石君名奮,其父趙人也,姓石氏。趙亡,徙居溫。高祖東擊項籍,過河內,時奮年十五,為小吏,侍高祖。高祖與語,愛其恭敬,問曰:「若何有?」對曰:「奮獨有母,不幸失明。家貧。有姊,能鼓琴。」高祖曰:「若能從我乎?」曰:「願盡力。」於是高祖召其姊為美人,以奮為中涓,受書謁,徙其家長安中戚裏,以姊為美人故也。其官至孝文時,積功勞至大中大夫。無文學,恭謹無與比。

文帝時,東陽侯張相如為太子太傅,免。選可為傅者,皆推奮,奮為太子太傅。及孝景即位,以為九卿;迫近,憚之,徙奮為諸侯相。奮長子建,次子甲,次子乙,次子慶,皆以馴行孝謹,官皆至二千石。於是景帝曰:「石君及四子皆二千石,人臣尊寵乃集其門。」號奮為萬石君。

孝景帝季年,萬石君以上大夫祿歸老于家,以歲時為朝臣。過宮門闕,萬石君必下車趨,見路馬必式焉。子孫為小吏,來歸謁,萬石君必朝服見之,不名。子孫有過失,不譙讓,為便坐,對案不食。然後諸子相責,因長老肉袒固謝罪,改之,乃許。子孫勝冠者在側,雖燕居必冠,申申如也。僮仆訢訢如也,唯謹。上時賜食於家,必稽首俯伏而食之,如在上前。其執喪,哀戚甚悼。子孫遵教,亦如之。萬石君家以孝謹聞乎郡國,雖齊魯諸儒質行,皆自以為不及也。

建元二年,郎中令王臧以文學獲罪。皇太后以為儒者文多質少,今萬石君家不言而躬行,乃以長子建為郎中令,少子慶為內史。

建老白首,萬石君尚無恙。建為郎中令,每五日洗沐歸謁親,入子舍,竊問侍者,取親中帬廁牏,身自浣滌,復與侍者,不敢令萬石君知,以為常。建為郎中令,事有可言,屏人恣言,極切;至廷見,如不能言者。是以上乃親尊禮之。

萬石君徙居陵裏。內史慶醉歸,入外門不下車。萬石君聞之,不食。慶恐,肉袒請罪,不許。舉宗及兄建肉袒,萬石君讓曰:「內史貴人,入閭里,里中長老皆走匿,而內史坐車中自如,固當!」乃謝罷慶。慶及諸子弟入里門,趨至家。




만석군()의 이름은 분()이다. 그의 부친은 조()나라 사람으로 성은 석씨()였다. 조나라가 멸망하자 온현()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한고조()가 동쪽으로 항적(: 항우)을 공격하기 위해서 하내군()를 경유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에 석분의 나이는 겨우 15세로 하급 관리가 되어 고조를 정성껏 섬겼다.

한번은 고조가 그와 담화 중에 그의 공손하고 신중한 태도를 좋아하여 이렇게 물었다. “너희 집안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 석분이 대답했다. “소신의 집안에는 단지 모친이 계시는데, 불행하게도 실명하셨습니다. 집안이 아주 가난하고 또 누이가 한 분 계신데 거문고에 능합니다.”

고조가 말했다. “너는 나를 따를 수 있느냐?”

“원컨대 있는 힘을 다하여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이에 고조는 그의 누이를 궁전으로 불러 미인()으로 삼았고, 석분()을 중연(: 시종관)에 임명하여 대신들의 문서를 전달하고 알현을 주선하는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집을 장안성() 안의 척리()로 옮기도록 했는데, 이것은 그의 누이가 미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관직은 효문제()에 이르러 공로가 쌓여서 태중대부()로 승진하였다. 그에게 학문을 익히지 못했지만 공손하고 신중한 태도는 남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문제() 때에 동양후() 장상여()는 태자태부()가 되었는데, 뒤에 면직 당했다. 문제가 태부가 될 만한 사람을 선발하려 하자 모두가 석분()을 천거했으며, 이에 석분이 태자태부가 되었다.

경제()는 즉위한 후 석분의 관직은 구경()의 반열에 올랐는데, 그가 너무 공손하고 신중하게 경제를 섬겼기 때문에 도리어 그를 꺼리어 제후의 승상으로 전근 보냈다.

석분의 장남은 석건()이고, 그 밑으로 석갑(), 석을(), 석경()이 있었는데, 모두 행실이 착하고 효성스러우며 삼가 신중하여 모두 관직이 2천석()의 지위에 올랐다. 이에 경제는 말했다. “석군(: 석분)과 네 아들들은 모두 2천석의 지위에 올랐으니, 신하로서 존귀와 총애가 그 가문에 다 모였구나.” 그리고 바로 석분을 ‘만석군()’으로 호칭했다.

경제 말년에 만석군은 상대부()의 봉록을 받았지만 늙음을 구실로 관직에서 물러나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세시() 때에는 대신()의 자격으로 참가했다.

궁궐 문을 지날 때에 만석군은 반드시 수레에서 내려 서둘러 걸어 들어갔는데, 대로에서 황제의 어가를 보게 되면 반드시 예를 갖추어 경의를 표했다.

만석군의 자손들 중에 비록 하급 관리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 만석군에게 인사를 드릴 때면 반드시 조복()을 입고 접견했으며, 함부로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자손들 중에 과실이 있으면 직접 꾸짖지 않고 한쪽 방에 조용히 앉아 밥상을 대해도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이렇게 한 후에 여러 아들들이 과실을 저지른 자를 서로 꾸짖고, 다시 가족 중에 연장자가 옷을 벗어 어깨를 드러내어 굳이 사죄하고 잘못을 고치면 비로소 용서하고 받아들였다.

이미 성년이 된 자손이 만석군의 주변에 있을 때에는 비록 편히 쉬고 있을 지라도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단정하면서도 화순한 태도를 보였다. 하인들에게는 온화하고 즐거운 모습으로 대하면서도 특별히 신중히 행동했다.

황제가 때때로 음식을 그의 집에 하사하면 반드시 머리를 조아리며 몸을 굽혀서 먹었는데, 그 공손한 태도가 마치 황제 면전에서 있는 것과 같았다. 그가 장례식에서 상제노릇을 할 때에는 매우 슬프게 애도했다. 자손들도 그의 가르침을 따라 역시 같이 했다. 만석군 일가는 효도하고 근신함으로 각 군현()과 제후국에 명성을 떨쳤다. 설령 제(), 노()나라의 여러 유학자들도 만석군의 질박한 행실에 모두 스스로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건원() 2년(서기전 141년), 낭중령() 왕장()은 문학(: 유가의 학문을 숭배하고, 도가의 학문을 배척)으로 죄를 얻었다. 황태후()는 유학자들은 겉으로 드러낸 가식이 많고, 속으로 본바탕의 질박함이 적다고 여겼고, 지금 만석군의 일가는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몸소 실천하는 실상이 있다고 두둔하면서 마침내 석분의 장남인 석건을 낭중령으로 삼았으며, 막내아들인 석경을 내사()로 임명했다.

석건이 늙어서 백발이 되었지만 만석군은 여전히 탈이 없이 잘 지냈다. 석건은 낭중령이 되었지만 닷새마다 하루의 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와 목욕하고 부친의 안부를 살폈다.

친히 부친이 쉬고 있는 침실 곁의 작은 방으로 들어가 몰래 시종에게 물어 부친의 속옷과 요강을 꺼내어 몸소 깨끗하게 씻고 닦은 뒤에 다시 시종에 건네주면서 감히 만석군에게 알리지 못하게 했으며, 항상 이와 같이 했다.

석건은 낭중령이 되어서 황제에게 간언을 올릴 일이 있으면 남들을 물리치고 바로 하고 싶은 말을 다했는데 매우 간절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황제를 알현할 때면 말을 못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이 때문에 황제가 더욱 존경하여 예우해 주었다.

만석군은 능리()로 거처를 옮겼다. 하루는 내사()로 재직했던 석경이 술에 취한 후 돌아왔는데, 마을 외문()을 들어와서도 수레에서 내리지 않았다. 만석군은 그 소식을 들은 후부터 식사를 하지 않았다.

석경은 두려워서 웃옷을 벗어 어깨를 드러낸 채 죄를 청했으나(고대 중국에서 죄인이 사죄할 때에는 한쪽 어깨를 벗고 사죄함), 만석군은 여전히 용서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온 식구와 맏형인 석건이 대신 옷을 벗고 어깨를 드러내어 죄를 청하니, 그제야 비로소 만석군이 꾸짖어 이렇게 말했다.

“내사는 존귀한 사람이니 마을로 들어오면 마을 안의 어른과 노인들도 모두 황급하게 달아나거나 회피한다. 그런데 내사가 수레 안에 앉아서 태연자약한 것이 참으로 마땅한 것인가!”

그리고 석경에게 사죄를 마치고 돌려보냈다. 이후에 석경과 석씨 형제들은 마을 안으로 들어올 때면 모두 수레에서 내려 총총 걸음으로 귀가했다.



石建石慶

萬石君以元朔五年中卒。長子郎中令建哭泣哀思,扶杖乃能行。歲餘,建亦死。諸子孫咸孝,然建最甚,甚於萬石君。

建為郎中令,書奏事,事下,建讀之,曰:「誤書!『馬』者與尾當五,今乃四,不足一。上譴死矣!」甚惶恐。其為謹慎,雖他皆如是。

萬石君少子慶為太仆,御出,上問車中幾馬,慶以策數馬畢,舉手曰:「六馬。」慶於諸子中最為簡易矣,然猶如此。為齊相,舉齊國皆慕其家行,不言而齊國大治,為立石相祠。

元狩元年,上立太子,選群臣可為傅者,慶自沛守為太子太傅,七歲遷為御史大夫。

元鼎五年秋,丞相有罪,罷。制詔御史:「萬石君先帝尊之,子孫孝,其以御史大夫慶為丞相,封為牧丘侯。」是時漢方南誅兩越,東擊朝鮮,北逐匈奴,西伐大宛,中國多事。天子巡狩海內,修上古神祠,封禪,興禮樂。公家用少,桑弘羊等致利,王溫舒之屬峻法,兒寬等推文學至九卿,更進用事,事不關決於丞相,丞相醇謹而已。在位九歲,無能有所匡言。嘗欲請治上近臣所忠、九卿咸宣罪,不能服,反受其過,贖罪。

元封四年中,關東流民二百萬口,無名數者四十萬,公卿議欲請徙流民於邊以適之。上以為丞相老謹,不能與其議,乃賜丞相告歸,而案御史大夫以下議為請者。丞相慚不任職,乃上書曰:「慶幸得待罪丞相,罷駑無以輔治,城郭倉庫空虛,民多流亡,罪當伏斧質,上不忍致法。願歸丞相侯印,乞骸骨歸,避賢者路。」天子曰:「倉廩既空,民貧流亡,而君欲請徙之,搖蕩不安,動危之,而辭位,君欲安歸難乎?」以書讓慶,慶甚慚,遂復視事。

慶文深審謹,然無他大略,為百姓言。後三歲餘,太初二年中,丞相慶卒,謚為恬侯。慶中子德,慶愛用之,上以德為嗣,代侯。後為太常,坐法當死,贖免為庶人。慶方為丞相,諸子孫為吏更至二千石者十三人。及慶死後,稍以罪去,孝謹益衰矣。



만석군은 원삭() 5년(서기전 124년)에 서거했다. 이에 장남인 낭중령 석건은 통곡하면서 매우 애달프게 울었고, 손에 지팡이를 의지해서 겨우 걸을 수 있었다. 일 년 남짓 뒤에 석건 또한 세상을 떠났다. 자손들은 모두 효성이 지극했지만 그 중에 석건이 가장 효성이 깊었으며, 심지어 만석군보다 더했다.

석건은 낭중령으로 있을 때에 한번은 황제에게 상주문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그 일에 대한 황제의 회답이 내려왔다. 석건은 그것을 다시 읽다가 말하길 “잘못 썼구나! ‘마()’ 자()는 꼬리에 반드시 5획으로 썼어야 했는데, 지금은 단지 네 획만 있고 한 획이 부족하다. 폐하께서 이를 문제 삼아 견책하면 나는 죽어 마땅하다!”고 하면서 매우 황공하게 여겼다. 그가 근신하는 것은 비록 다른 일이라고 해도 모두 이와 같았다.

만석군의 막내아들인 석경은 태복(: 궁중의 수레와 말을 관장하는 관리)으로 있었는데, 황제의 수레를 몰고 외출할 때 황제가 수레를 모는 말이 몇 마리냐고 물었다. 석경은 말채찍으로 하나하나 그 수를 헤아린 후 손을 들고 말했다. “여섯 필입니다.”

석경은 만석군의 여러 아들 중에 가장 단순하고 상대하기 쉬운 상대였으나 역시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주의 깊고 신중했다. 석경은 제()나라의 승상이 되었는데, 모든 제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집안의 행실을 흠모했다. 그래서 정령을 반포하지 않았는데도 제나라는 매우 안정되었으며, 제나라 사람들은 그를 위해서 ‘석상사()’를 세울 정도였다.

무제 원수() 원년(: 서기전 122년), 황제는 황태자를 책립했다. 군신들 중에서 태자의 스승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선발했는데, 석경이 패군() 태수()에서 태자태부가 되었으며, 7년 후에는 어사대부()로 승진되었다.

무제 원정() 5년(서기전 112년) 가을, 승상 조주()가 죄를 지어 파면되었다. 황제는 어사대부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선제께서는 만석군을 존경하였고, 그의 자손들도 모두 효성스럽다. 어사대부 석경을 승상으로 승진시키고, 목구후()에 봉한다.”

이때 한나라는 마침 남쪽으로 남월()과 동월()을 토벌했고, 동쪽으로 조선()을 공격했으며, 북쪽으로 흉노()를 내쫓고, 서쪽으로 대원()을 정벌하는 등 국가에 여러 가지 일이 많았다.

더욱이 황제는 전국 각지를 순찰하면서 상고() 시대의 신사()를 수리해 복원했고, 태산에 가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올렸으며, 크게 예악()을 일으켰다. 국가의 재정이 적어지자 황제는 상홍양() 등으로 하여금 이윤을 도모하게 하고, 왕온서() 등의 무리로 하여금 준엄하게 법을 집행하게 하였으며 예관() 등으로 하여금 유학을 진작시켜 그들의 관직이 모두 구경()에 이르게 했다. 그들은 교대로 정권을 장악했으며, 조정의 일은 굳이 승상의 결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승상은 한결 같이 온후하고 신중하게 처신할 뿐이었다.

석경은 9년 동안 승상으로 재직하는 중에 잘못된 시국을 바로 잡을 만한 언행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황상의 가까운 신하였던 소충()과 구경의 지위에 있었던 함선()의 죄행을 올려 처벌할 것을 청했지만 그들의 죄를 입증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징계를 받아 속죄했다.

무제 원봉() 4년(서기전 107년), 관동()에 유민이 2백만 명이 살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는데, 그중에 호적이 없는 사람이 40만 명이나 되었다. 이에 공경대신들은 상의 끝에 유민들을 변경의 적당한 곳으로 이주시킬 것을 주청하기로 했다.

황제는 승상이 연로하고 각별히 신중하므로 이 논의에 참여할 수 없음을 알고 바로 승상에게 휴가를 주어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리고 이 안건을 어사대부 이하의 신하들을 의론에 참여시켜 주청한 것에 대해 조사하도록 했다.

승상은 스스로 직무를 다할 수 없음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곧바로 황제에서 상서를 올려 이렇게 말했다. “신 석경은 다행히 총애를 얻어 승상의 직책을 수행하고 있으나, 쓸모없는 둔한 말처럼 재능이 부족해 폐하께서 나라를 다스림에 제대로 보좌하지 못했습니다. 성곽 창고는 비었고, 유랑하는 백성들이 많아졌으니, 그 죄는 마땅히 엎드려 도끼와 그 받침대를 가지고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폐하께서는 차마 저를 법대로 처벌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라옵건대 승상()과 후작의 인()을 돌려 드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현명하고 유능한 사람에게 승상의 직위를 양보하고 싶습니다.”

이에 황제는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양식 창고는 이미 텅 비었고, 백성은 곤궁해져서 정처 없이 유랑하고 있어서 승상은 그들을 변경의 적당한 곳으로 이주시키기를 청했소. 사회는 뒤숭숭하고 인심은 불안하여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 이러한 시기에 승상이 직위에서 물러나 사임한다면 승상은 그 책임과 난국을 누구에게 맡겨 수습하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이처럼 조서로 석경을 책망하자 그는 심히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곧 조정으로 돌아가 정사를 처리했다.

석경은 법조문에 조예가 깊고 신중하게 일처리를 했지만 어떤 원대한 책략을 세워 백성들을 위해서 발언하지는 못했다.

이로부터 3년 남짓이 지난 뒤인 태초() 2년에 승상 석경은 세상을 떠나자 ‘염후()’라는 시호가 하사되었다.

석경의 차남은 석덕()이었는데, 석경은 그를 매우 좋아하고 신임했다. 이에 황제는 석덕을 석경의 후사로 삼아 후작()을 대신 계승하도록 했다. 그 후 석덕은 태상()이 되었으나, 법을 어겨서 사형당할 처지가 되었는데, 속죄금을 받치고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석경이 승상이 되었을 때에 그의 여러 자손들은 관리가 되어 2천석의 직위에 오른 자가 13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석경이 죽은 후에 자손들은 점차 각종 죄를 범해 관직에서 물러났고, 효성스럽고 신중하던 석경의 가풍은 더욱 쇠퇴해졌다.


建陵侯衛綰者,代大陵人也。綰以戲車為郎,事文帝,功次遷為中郎將,醇謹無他。孝景為太子時,召上左右飲,而綰稱病不行。文帝且崩時,屬孝景曰:「綰長者,善遇之。」及文帝崩,景帝立,歲餘不噍呵綰,綰日以謹力。

景帝幸上林,詔中郎將參乘,還而問曰:「君知所以得參乘乎?」綰曰:「臣從車士幸得以功次遷為中郎將,不自知也。」上問曰:「吾為太子時召君,君不肯來,何也?」對曰:「死罪,實病!」上賜之劍。綰曰:「先帝賜臣劍凡六,劍不敢奉詔。」上曰:「劍,人之所施易,獨至今乎?」綰曰:「具在。」上使取六劍,劍尚盛,未嘗服也。郎官有譴,常蒙其罪,不與他將爭;有功,常讓他將。上以為廉,忠實無他腸,乃拜綰為河閒王太傅。吳楚反,詔綰為將,將河閒兵擊吳楚有功,拜為中尉。三歲,以軍功,孝景前六年中封綰為建陵侯。

其明年,上廢太子,誅栗卿之屬。上以為綰長者,不忍,乃賜綰告歸,而使郅都治捕栗氏。既已,上立膠東王為太子,召綰,拜為太子太傅。久之,遷為御史大夫。五歲,代桃侯舍為丞相,朝奏事如職所奏。然自初官以至丞相,終無可言。天子以為敦厚,可相少主,尊寵之,賞賜甚多。

為丞相三歲,景帝崩,武帝立。建元年中,丞相以景帝疾時諸官囚多坐不辜者,而君不任職,免之。其後綰卒,子信代。坐酎金失侯。



건릉후() 위관()은 대군()의 대릉() 사람이다. 위관은 수레 위에서 곡예를 연출하여 낭관()이 되었으며, 문제를 섬기었다. 부단히 공을 세워 중랑장()으로 승진했는데, 성품이 온후하고 신중했지만 특별난 다른 장점은 없었다.

효경제()가 태자가 되었을 때 황제의 신변의 가까운 신하들을 불러 주연을 베풀었는데, 위관은 병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문제가 임종할 때에 경제에게 당부하면서 말했다. “위관은 고령이고 명망 있는 사람이니, 잘 대우해 주거라.” 문제가 붕어하자 경제가 즉위했다. 경제는 한 해 남짓 위관에 대해 어떤 일로 책망하여 꾸짖지 않았고, 위관은 단지 날마다 신중을 기하여 책무를 다했다.

한번은 경제가 어가를 몰고 상림원()에 행차하는데, 중랑장 위관에게 동승하길 명했다. 돌아올 때에 경제가 위관에게 물었다. “당신은 짐과 동승시켰던 이유를 아는가?”

이에 위관이 아뢰었다. “신은 수레 위에서 곡예를 부려 총애를 얻고, 공을 쌓아서 순차적으로 중랑장으로 승진되었을 뿐입니다. 폐하께서 신을 무슨 연고로 동승시켰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황상은 다시 물었다. “짐이 태자였을 때 당신을 주연에 초대했지만 당신은 오지 않았는데 무슨 사연이 있었던가?”

위관이 송구하여 이렇게 아뢰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 때에 공교롭게 병이 났었습니다.” 황상이 그에게 한 자루의 보검을 하사했다.

위관은 아뢰었다. “선제께서 일찍이 신에게 하사하신 보검이 모두 여섯 자루가 있는데, 또다시 폐하에게 감히 검을 하사받을 수는 없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보검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선물도 할 수 있고 다른 물건과 교환도 할 수 있는데 설마 지금까지 남아있는 보검이 있소?”

위관이 아뢰었다. “모두 남아 있습니다.” 황상은 그 여섯 자루의 보검을 가져오도록 하니, 보검은 완전한 상태로 칼집에 있었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채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위관은 부하 낭관들이 견책 받을 일이 생기면 항상 그들의 죄책을 자기에 잘못으로 돌렸고, 다른 중랑장과 다툼을 벌이지 않았다. 또 공로가 있으면 항상 남들에게 양보했다.

황제는 그가 청렴결백하고 충실하며 다른 마음이 없는 것을 알고 드디어 위관을 하간왕()의 태부()를 삼았다. 오, 초나라 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황제는 위관을 불러 장군으로 삼아 하간왕()의 병사들을 이끌고 오와 초를 공격하게 했는데, 위관이 공로를 세우자 중위()로 승진시켰다.

3년이 지난 경제() 전원() 6년(서기전 151년)에 위관은 그간의 군공으로 건릉후()로 봉해졌다.

그 다음해 황제는 태자() 유영(: 경제의 둘째 아들. 무제의 형)를 폐위시키고, 태자의 장인이었던 율경()의 무리를 주살했다. 황제는 위관이 장자로 덕이 있는 사람이고 이 사건을 차마 매정하게 처결하지 못할 것을 알고 바로 그에게 휴가를 주어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고, 질도()의 율씨() 일족을 모두 체포하여 엄정하게 처벌하게 했다. 이 사건의 처리한 후에 황제는 교동왕() 유철(: 후일의 한무제)을 태자로 세웠으며, 위관을 불러들여 태자태부로 삼았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위관은 어사대부로 승진했다.

5년 지난 뒤, 위관은 도후() 유사()를 대신하여 승상이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단지 자기 직분 내에서 처리할 수 있는 일만을 보고했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 관리가 되어 승상의 반열에 오를 때까지 이렇다할만한 제안을 올리거나 책임질만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 이에 황제는 그가 돈후하여 어린 군주를 잘 보좌할 수 있다고 여겨 그를 특별하게 존중하고 총애했으며, 상으로 하사한 물건이 많았다.

위관은 승상이 된 지 3년 후, 경제가 세상을 떠났고, 무제()가 즉위했다. 건원() 연간에 경제가 병이 났을 때 여러 관서의 죄인들이 무고하게 연좌된 자가 많았다는 때문에 위관은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여겨서 면직되었다. 그 후 위관은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인 위신()이 대신 건릉후의 작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뒤에 위신은 주금(: 한나라 때에 제후들이 돈을 모아 술을 빚어 종묘에 바침)의 규정을 어겨서 작위를 잃었다.



直不疑

塞侯直不疑者,南陽人也。為郎,事文帝。其同舍有告歸,誤持同舍郎金去,已而金主覺,妄意不疑,不疑謝有之,買金償。而告歸者來而歸金,而前郎亡金者大慚,以此稱為長者。文帝稱舉,稍遷至太中大夫。朝廷見,人或毀曰:「不疑狀貌甚美,然獨無柰其善盜嫂何也!」不疑聞,曰:「我乃無兄。」然終不自明也。

吳楚反時,不疑以二千石將兵擊之。景帝後元年,拜為御史大夫。天子修吳楚時功,乃封不疑為塞侯。武帝建元年中,與丞相綰俱以過免。

不疑學老子言。其所臨,為官如故,唯恐人知其為吏跡也。不好立名稱,稱為長者。不疑卒,子相如代。孫望,坐酎金失侯。


새후() 직불의()는 남양() 사람이다. 그는 낭관()이 되어 문제를 섬겼다. 일찍이 한 방을 쓰던 사람이 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갔는데, 같은 방을 쓰던 다른 낭관이 자기 것을 착각하고 남의 황금을 가지고 갔다. 뒤이어 금 주인이 금을 분실된 것을 알아채고 엉뚱하게 직불의가 훔쳐간 것으로 의심했다. 그러자 직불의는 분실한 금에 책임이 있다고 사과하고 황금을 사서 보상해 주었다.

그 후에 휴가를 얻어 집에 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금을 가지고 뒤돌려주자 금 주인이었던 낭관은 크게 부끄러워했다. 이 일을 기화로 직불위는 덕이 있는 ‘장자()’로 일컬어졌다. 문제도 그의 인품을 칭찬하고 발탁했는데, 점차 승진하여 태중대부()에 이르렀다.

한번은 조정에서 황제를 알현할 때 어떤 사람이 그를 헐뜯어 이렇게 비방했다. “직불의는 용모가 매우 그럴싸하게 훌륭하지만 그러나 유독 형수와 사통을 했으니,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말을 들은 후에 직불의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형이 없다.” 그러나 끝까지 직접 나서서 변명하지 않았다.

오, 초나라의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직불의는 2천석에 지위를 지닌 관리의 신분으로 병사를 이끌고 반군을 공격했다.

경제 후원() 원년(: 서기전 143년), 직불의는 어사대부로 임명되었다. 황제는 오, 초나라의 반란을 평정한 사람들의 공로를 표창할 때에 직불의를 새후()에 봉해졌다. 무제() 건원() 연간에는 승상 위관과 더불어 과실로 인해 면직 당했다.

직불의는 노자()의 학설을 익혔다. 그는 매번 지방을 감독할 때에 담당 관리들로 하여금 모두 앞서서 임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단지 그는 남들이 자신이 관리로써 남긴 치적을 알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명성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장자()라고 칭송했다.

직불의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직상여()가 작위를 계승했다. 손자 직망() 때에 와서 주금()의 규정을 어겨서 작위를 잃어버렸다.


周文

郎中令周文者,名仁,其先故任城人也。以醫見。景帝為太子時,拜為舍人,積功稍遷,孝文帝時至太中大夫。景帝初即位,拜仁為郎中令。

仁為人陰重不泄,常衣敝補衣溺袴,期為不絜清,以是得幸。景帝入臥內,於後宮祕戲,仁常在旁。至景帝崩,仁尚為郎中令,終無所言。上時問人,仁曰:「上自察之。」然亦無所毀。以此景帝再自幸其家。家徙陽陵。上所賜甚多,然常讓,不敢受也。諸侯群臣賂遺,終無所受。

武帝立,以為先帝臣,重之。仁乃病免,以二千石祿歸老,子孫咸至大官矣。



낭중령() 주문()의 이름은 인()이고, 그의 선조는 본디 임성() 사람이었다. 의술로 뛰어나 이를 계기로 황제를 알현했다.

경제가 태자였을 때 그는 사인()이 되었으며, 차츰 공로를 쌓아 승진하여 문제() 때에는 태중대부에 이르렀다. 경제 즉위 초기에 주인()을 낭중령으로 임명했다.

주인()은 인품이 주의 깊고 세심하며 중후하여 남들의 말을 누설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낡아서 기운 옷이나 오줌으로 찌든 속옷을 입었는데, 고의로 불결하게 처신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후궁들이 그에게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의 총애를 받았다. 경제가 침실에 들어가 후궁에서 은밀하게 희롱을 걸 때 주인은 항상 그 곁을 지키고 있었다. 경제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주인은 낭중령을 지냈으나 시종일관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비밀을 유지했다.

황제가 때때로 남들에 대해 물으면 주인은 언제나 말하길 “폐하께서 친히 그를 관찰하시길 바랍니다.”고 하며, 함부로 남들을 헐뜯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경제는 일찍이 두 번이나 친히 그의 집으로 행차했다. 뒤에 주인은 양릉()으로 집을 옮겼다.

황제가 하사한 선물이 매우 많았으나 늘 사양하며 감히 덥석 받지 않았다. 여러 제후와 백관들이 뇌물을 주면 끝까지 받지 않았다.

무제는 즉위한 후에 주인이 선제의 대신임을 감안하여 그를 각별하게 존중했다. 주인은 병으로 인해 조정에서 물러나왔을 때에 2천석의 봉록으로 고향에 돌아가 노후를 지내게 하였다. 그의 자손들은 모두 대관()이 되었다.


張叔

御史大夫張叔者,名歐,安丘侯說之庶子也。孝文時以治刑名言事太子。然歐雖治刑名家,其人長者。景帝時尊重,常為九卿。至武帝元朔四年,韓安國免,詔拜歐為御史大夫。自歐為吏,未嘗言案人,專以誠長者處官。官屬以為長者,亦不敢大欺。上具獄事,有可卻,卻之;不可者,不得已,為涕泣面對而封之。其愛人如此。

老病甐,請免。於是天子亦策罷,以上大夫祿歸老于家。家於陽陵。子孫咸至大官矣。


어사대부() 장숙()의 이름은 구()이고, 안구후() 장열()의 서자()였다. 효문제 때에 법가의 학설인 형명학()을 연구했고 태자를 섬겼다. 그가 비록 형명학에 조예가 깊었지만 그의 인품은 도리어 덕이 있는 장자()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경제 때에 그를 각별하게 존중하여 항상 구경()의 지위에 있었다.

무제 원삭() 4년(서기전 125년)에 이르러 한안국()을 면직시키고, 황제는 조서를 내려서 장구를 어사대부로 임명했다. 장구는 어사대부가 된 뒤로부터 함부로 남들을 징벌하자는 언행을 삼갔고, 오로지 성실하고 덕망이 있는 장자()다운 태도로서 벼슬살이를 했다.

그의 부하 관리들도 모두 그를 덕망이 깊은 장자로 섬겼고 또한 감히 그를 크게 속이지 않았다. 황제가 중대한 범죄 사건을 그에게 처결하라고 지시하면 다시 심리할 만한 것이 있으면 되돌려 보내고, 되돌려 보낼 수 없으면 부득이 처리했는데, 이때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사건의 문서를 바라보면서 친히 밀봉했다. 그가 남들을 아끼는 것이 이와 같았다.

뒤에 그가 늙고 병이 위독해지자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했다. 그래서 천자 또한 조서를 내려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상대부()의 봉록으로 집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게 하였다. 그의 집은 양릉()에 있었고, 자손들은 모두 대관()이 되었다.


評論

太史公曰:仲尼有言曰「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其萬石、建陵、張叔之謂邪?是以其教不肅而成,不嚴而治。塞侯微巧,而周文處讇君子譏之,為其近於佞也。然斯可謂篤行君子矣!

【索隱述贊】萬石孝謹,自家形國。郎中數馬,內史匍匐。綰無他腸,塞有陰德。刑名張歐,垂涕恤獄。敏行訥言,俱嗣芳躅。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공자()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군자()는 말을 유창하게 못해도 실천하는 것은 민첩하고자 한다.” 이것은 만석군(), 건릉후(), 장숙()과 같은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이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은 엄숙하지 않아도 이루어졌고, 엄격하지 않아도 잘 다스려졌다.

새후() 직불의는 공은 적고 교묘하게 행동했으며, 주문()은 자신을 낮추어 공손하게 아부하는데 급급했다. 그래서 군자는 그들을 비난하는데, 그들의 언행이 간교하고 아첨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독실하게 행동했던 군자라고 말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