田叔列傳
田叔者,趙陘城人也。其先,齊田氏苗裔也。叔喜劍,學黃老術於樂巨公所。叔為人刻廉自喜,喜游諸公。趙人舉之趙相趙午,午言之趙王張敖所,趙王以為郎中。數歲,切直廉平,趙王賢之,未及遷。
會陳豨反代,漢七年,高祖往誅之,過趙,趙王張敖自持案進食,禮恭甚,高祖箕踞罵之。是時趙相趙午等數十人皆怒,謂張王曰:「王事上禮備矣,今遇王如是,臣等請為亂。」趙王齧指出血,曰:「先人失國,微陛下,臣等當蟲出。公等柰何言若是!毋復出口矣!」於是貫高等曰:「王長者,不倍德。」卒私相與謀弒上。會事發覺,漢下詔捕趙王及群臣反者。於是趙午等皆自殺,唯貫高就系。是時漢下詔書:「趙有敢隨王者罪三族。」唯孟舒、田叔等十餘人赭衣自髡鉗,稱王家奴,隨趙王敖至長安。貫高事明白,趙王敖得出,廢為宣平侯,乃進言田叔等十餘人。上盡召見,與語,漢廷臣毋能出其右者,上說,盡拜為郡守、諸侯相。叔為漢中守十餘年,會高后崩,諸呂作亂,大臣誅之,立孝文帝。
孝文帝既立,召田叔問之曰:「公知天下長者乎?」對曰:「臣何足以知之!」上曰:「公,長者也,宜知之。」叔頓首曰:「故雲中守孟舒,長者也。」是時孟舒坐虜大入塞盜劫,雲中尤甚,免。上曰:「先帝置孟舒雲中十餘年矣,虜曾一人,孟舒不能堅守,毋故士卒戰死者數百人。長者固殺人乎?公何以言孟舒為長者也?」叔叩頭對曰:「是乃孟舒所以為長者也。夫貫高等謀反,上下明詔,趙有敢隨張王,罪三族。然孟舒自髡鉗,隨張王敖之所在,欲以身死之,豈自知為雲中守哉!漢與楚相距,士卒罷敝。匈奴冒頓新服北夷,來為邊害,孟舒知士卒罷敝,不忍出言,士爭臨城死敵,如子為父,弟為兄,以故死者數百人。孟舒豈故驅戰之哉!是乃孟舒所以為長者也。」於是上曰:「賢哉孟舒!」復召孟舒以為雲中守。
後數歲,叔坐法失官。梁孝王使人殺故吳相袁盎,景帝召田叔案梁,具得其事,還報。景帝曰:「梁有之乎?」叔對曰:「死罪!有之。」上曰:「其事安在?」田叔曰:「上毋以梁事為也。」上曰:「何也?」曰:「今梁王不伏誅,是漢法不行也;如其伏法,而太后食不甘味,臥不安席,此憂在陛下也。」景帝大賢之,以為魯相。
魯相初到,民自言相,訟王取其財物百餘人。田叔取其渠率二十人,各笞五十,餘各搏二十,怒之曰:「王非若主邪?何自敢言若主!」魯王聞之大慚,發中府錢,使相償之。相曰:「王自奪之,使相償之,是王為惡而相為善也。相毋與償之。」於是王乃盡償之。
魯王好獵,相常從入苑中,王輒休相就館舍,相出,常暴坐待王苑外。王數使人請相休,終不休,曰:「我王暴露苑中,我獨何為就舍!」魯王以故不大出游。
數年,叔以官卒,魯以百金祠,少子仁不受也,曰:「不以百金傷先人名。」
전숙(田叔)은 조(趙)나라 형성(陘城)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제(齊)나라 전씨(田氏)의 후손이다. 전숙은 검술을 좋아했으며, 일찍이 악거공(樂巨公)이 머무는 곳에 가서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학술을 배웠다.
전숙은 사람됨이 엄정하고 결백했으며 스스로를 만족하고 즐거워했다. 또한 덕망이 높은 사람들과 교제하고 노니는 것을 즐겁게 여겼다. 조나라 사람들은 그를 승상(丞相) 조오(趙午)에게 천거했고, 조오는 조나라 왕 장오(張敖)에게 언급했으며, 이에 조나라 왕은 그를 낭중(郎中)으로 삼았다.
몇 년 동안 재직하면서 매사 진지하고 솔직했으며 청렴하고 공평하게 일처리를 했다. 그래서 조나라 왕은 그를 어질게 여겨 눈여겨보았지만 승진시키지는 않았다.
때마침 진희(陳豨)가 대(代)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한(漢)나라 7년(서기전 200년)에 고조(高祖)가 그를 토벌하러 갈 때, 조나라를 경유하게 되었다. 조나라 왕 장오는 친히 소반을 받들고 음식을 바치었는데, 그 예절이 더할 나위 없이 공경스러웠다. 그럼에도 고조는 오만하게 다리를 짝 벌리고 앉아서 면상에서 그를 욕했다.
이때 조나라 승상 조오 등 수십 명의 신하들이 모두 분노하여 조왕 장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께서는 예절을 갖추셔서 정성껏 황제를 모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황제께서 이와 같이 왕을 푸대접한다면 신 등이 반정을 일으키겠습니다.”
조왕은 자기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친이 나라를 잃었을 때 폐하가 아니었으면 우리들은 죽은 후에 시체에 구더기가 생겨도 거두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것이오. 공들은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 다시는 입 밖에도 내지 말라.”
이에 관고(貫高) 등은 논의하여 말했다. “조왕께서는 덕망이 깊은 장자이시니, 황제의 은덕에 배반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는 마침내 비밀리에 서로 황제를 암살할 계획을 짰다. 그러나 거사 전에 발각되었고, 한나라에서는 조왕과 모반을 꾀한 군신들을 모두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자 조오 등은 모두 자살하였고, 오직 관고만이 수감되었다.
이때 한나라에서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조나라에서 감히 조왕을 따라 장안에까지 오는 자가 있으면, 그자의 삼족(三族)을 멸하겠다.” 그런데 유독 맹서(孟舒), 전숙(田叔) 등 10여 명이 검붉은 흙색의 죄수복을 걸치고, 자발적으로 머리를 깎고 목에 쇠칼을 채워서 조왕의 집 노비라고 일컫고 조왕 장오를 따라서 장안(長安)에 이르렀다.
관고 등의 모반사건이 조왕과는 무관한 것이 명백해지자 조왕 장오는 석방되어 감옥에서 나왔으나 왕에서 폐위당하고 선평후(宣平侯)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곧 전숙 등 10여 명의 충신들에 관한 이야기를 황제에게 아뢰었다.
황제는 그들을 가상하여 여겨 모두 불러 접견하고 그들과 담화를 나누고, 조정 신하들로 그들보다 뛰어난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황제는 매우 기뻐하여 그들을 모두 군수(郡守)나 혹은 제후왕(諸侯王)의 승상으로 임명했다.
전숙이 한중(漢中) 군수가 된 지 10여 년이 되었는데, 때마침 고후<(高后): 한고조의 황후였던 여치(吕雉)>가 죽자 여러 여씨(呂氏)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조정의 대신들이 힘을 합쳐 그들을 토벌한 후에 효문제(孝文帝)를 옹립했다.
효문제는 즉위한 직후에 전숙을 불러 물었다. “공은 천하에 누가 덕망이 깊은 장자(長者)라고 알고 있는가?” 전숙이 대답해 아뢰었다. "소신이 어떻게 덕망 있는 장자를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황상이 말했다. “공이 바로 덕망 있는 장자이니 마땅히 안다고 생각하오.”
전숙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예전에 운중(雲中) 군수를 지냈던 맹서(孟舒)가 장자라고 사료됩니다.”
이 무렵 흉노(匈奴)가 대거로 변경을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는데, 그 중에서 운중군은 약탈당한 정도가 너무 엄중했다. 그로 말미암아 맹서는 견책을 당하여 면직당한 상태였다.
문제가 말했다. “선제께서 맹서를 운중 군수로 배치한 것이 10여 년이나 되었소. 흉노가 일거에 침입했을 때에 맹서는 굳게 지키지 못했고, 무고하게 장졸들만 몇 백 명이나 전사했는데, 장자라는 맹서가 어째서 그들을 희생시켰단 말인가? 공은 어찌해서 맹서가 장자라고 말하는가?”
전숙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이것은 바로 맹서가 장자라고 사료되는 까닭입니다. 관고 등의 모반이 발각될 때에 황제는 조나라에서 감히 조왕을 따르는 자들은 삼족을 멸하겠는 조서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맹서는 자진해서 삭발을 하고 목에 쇠칼을 차고 조왕 장오가 가는 곳마다 따랐고, 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한 목숨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자신이 어찌 운중 군수가 될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또 그 무렵에 한나라와 초나라가 서로 장기간 대치하여 병졸들은 매우 피곤하고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때마침 흉노의 묵돌(冒頓)이 새로 북쪽 오랑캐의 무리를 복속시키고, 우리의 변경으로 침략하여 위해를 가했습니다. 맹서는 장졸들이 피로하고 고통스러워한 것을 알고 차마 그들에게 다시 나가서 싸우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병졸들은 다투어 성에 올라가서 적과 사투를 벌렸는데, 이는 마치 전쟁터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구하고, 동생이 형을 구하는 것과 같이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때문에 전사한 병졸이 수백 명이나 속출했던 것입니다. 맹서가 어찌해서 고의로 병졸들을 사지로 내몰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맹서가 장자라고 사료되는 까닭입니다.”
이에 황제가 말했다. "맹서는 참으로 어질었도다!" 그리하여 다시 맹서를 불러서 운중 군수로 임명했다.
몇 년 뒤, 전숙은 법을 어겨서 한중 군수에서 면직되었다. 양효왕<(梁孝王): 경제의 동생인 유무(刘武)>이 자객을 보내 예전의 오(吳)나라의 승상이었던 원앙(袁盎)을 살해했기 때문에 경제(景帝)는 전숙을 불러들여 양(梁)나라로 가서 그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하게 했다. 전숙은 그 사건의 모든 내막을 조사하여 돌아와서 보고했다.
경제가 말했다. “양왕이 자객을 보내 원앙을 암살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전숙이 대답했다. “신이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니, 실제 그러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황상이 말했다. “그 사건의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전숙이 말했다. “네. 그러나 황제께서는 양왕의 일에 간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경제가 말했다. “어째서 그런가?”
전숙이 말했다. “지금 양왕을 법대로 사형에 처하지 않으면 한나라의 형법이 실행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를 사형에 처하면 태후<(太后): 문제의 황후였던 두의방(窦猗房). 경제와 양왕의 친모>께서 식사를 하셔도 맛을 못 느끼실 것이고, 잠자리에 들어도 편히 주무시지 못하실 것입니다. 이렇다면 폐하에게도 크게 근심하실 것입니다.”
경제는 그를 매우 어질게 여겨서 노(魯)나라의 승상으로 삼았다.
전숙이 노나라의 승상으로 금방 부임했는데, 100여명의 백성들이 자진해서 승상에게 찾아가서 노나라 왕이 자신들의 재물을 탈취했다고 호소했다. 전숙은 그들 중에 주동자 20여 명을 붙잡아 각기 태형(笞刑) 50대씩의 벌을 내렸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손바닥을 20대씩 때렸다. 그리곤 그들에게 성을 내서 이렇게 말했다. “노나라 왕은 그대들의 군주가 아니던가? 어찌해서 감히 그대들의 군주를 헐뜯을 수 있단 말인가!”
노나라 왕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수치심을 느껴서 관청의 재물창고에서 돈을 꺼내어 승상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상환하도록 했다. 그러자 승상이 말했다. “왕께서 스스로 재물을 탈취하시고 저에게 그것을 상환하도록 하면 이는 군왕께서는 악행을 저지르시고, 저는 선행을 베푼 것이 됩니다. 저는 재물을 상환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에 공감한 노나라 왕은 곧바로 백성들에게 재물을 상환했다.
노나라 왕(노공왕; 경제의 아들)은 사냥을 좋아했다. 이 때마다 전숙은 한결같이 왕을 시종하여 사냥터에 갔는데, 노나라 왕은 언제나 그에게 관사(館舍)에 가서 쉬라고 권유했다. 전숙은 사냥터에서 나와 햇볕이 내리쬐는 곳에 앉아서 노나라 왕을 기다렸다.
이에 걱정이 된 노나라 왕은 여러 차례 사람을 파견하여 그에게 가서 쉬도록 권유했으나 그는 언제나 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왕께서 햇볕이 내리쬐는 사냥터 안에 계시는데, 내만 어떻게 홀로 관사 안에 가서 쉴 수 있겠는가!”
노나라 왕은 이 때문에 자주 사냥을 하는 것을 삼가게 되었다.
몇 년 후, 전숙은 노나라 국상으로 재임 중에 사망했는데, 노나라 왕은 1백 근의 황금을 하사하여 장례비용에 보태게 했다. 막내아들인 전인(田仁)은 이를 사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1백 근의 황금 때문에 선친의 명예를 손상시킬 수 없습니다.”
田仁
仁以壯健為衛將軍舍人,數從擊匈奴。衛將軍進言仁,仁為郎中。數歲,為二千石丞相長史,失官。其後使刺舉三河。上東巡,仁奏事有辭,上說,拜為京輔都尉。月餘,上遷拜為司直。數歲,坐太子事。時左相自將兵,令司直田仁主閉守城門,坐縱太子,下吏誅死。仁發兵,長陵令車千秋上變仁,仁族死。陘城今在中山國。
전인은 건장하고 기개가 높았기 때문에 위청(衛靑)장군의 문객이 되었으며, 여러 차례 그를 따라서 흉노를 공격하는데 참가했다. 위청장군은 황제에게 전인을 추천하여 칭찬했으며, 그 덕분에 전인은 낭중(郎中)으로 임명되었다. 몇 년 후 그는 2천석 급(二千石級) 봉록을 받는 승상인 장사(長史)가 되었다가 얼마 뒤에 직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 뒤 황제는 그에게 하남(河南), 하동(河東), 하내(河內) 등 삼군(三郡)을 암행 조사하여 죄상을 알아보도록 했다. 황제가 동쪽을 순찰할 때에 전인은 그동안 조사한 사건에 대해 상세하게 진술하자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만족하여 그를 경보도위(京輔都尉)로 임명했다.
한 달 남짓 뒤에 황상은 또 그를 사직(司直)으로 승진시켰다. 몇 년이 지나서 그는 태자의 모반사건에 연좌되었다. 이 때에 좌승상(左丞相)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와서 태자와 대치하고 있었는데, 좌승상은 사직 전인에게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라고 명령을 했다. 그러나 전인은 태자를 탈출시켜주는 동조했기 때문에 그는 법관에 넘겨져 심리 끝에 사형을 당했다.
일설에는 전인이 병사를 이끌고 장릉(長陵)에 도달했는데, 이를 목도한 장릉령(長陵令) 차천추(車千秋)는 전인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상부에 보고하여 전인과 그 가족들은 사형되고 멸족되었다. 형성(陘城)은 지금의 중산국(中山國)에 있었다.
太史公曰:孔子稱曰「居是國必聞其政」,田叔之謂乎!義不忘賢,明主之美以救過。仁與余善,余故并論之。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공자를 칭찬하면서 말하길 ‘선생님께서 그 나라에 도착하시면 반드시 그곳의 정사에 대해 들으셨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러한 말은 바로 전숙(田叔) 같은 인재를 두고 한 말이다! 그는 절의가 있어 현인(賢人)을 추천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밝은 군주(君主)의 아름다운 덕을 널리 드러나 발양하였고, 잘못이 있으면 규정했다. 전인(田仁)과 나는 친한 관계였기 때문에 더불어 그를 논한 것이다.”
任安
褚先生曰:臣為郎時,聞之曰田仁故與任安相善。任安,滎陽人也。少孤貧困,為人將車之長安,留,求事為小吏,未有因緣也,因占著名數。武功,扶風西界小邑也,谷口蜀道近山。安以為武功小邑,無豪,易高也,安留,代人為求盜亭父。後為亭長。邑中人民俱出獵,任安常為人分麋鹿雉兔,部署老小當壯劇易處,眾人皆喜,曰:「無傷也,任少卿分別平,有智略。」明日復合會,會者數百人。任少卿曰:「某子甲何為不來乎?」諸人皆怪其見之疾也。其後除為三老,舉為親民,出為三百石長,治民。坐上行出游共帳不辦,斥免。
乃為衛將軍舍人,與田仁會,俱為舍人,居門下,同心相愛。此二人家貧,無錢用以事將軍家監,家監使養惡齧馬。兩人同床臥,仁竊言曰:「不知人哉家監也!」任安曰:「將軍尚不知人,何乃家監也!」衛將軍從此兩人過平陽主,主家令兩人與騎奴同席而食,此二子拔刀列斷席別坐。主家皆怪而惡之,莫敢呵。
其後有詔募擇衛將軍舍人以為郎,將軍取舍人中富給者,令具鞌馬絳衣玉具劍,欲入奏之。會賢大夫少府趙禹來過衛將軍,將軍呼所舉舍人以示趙禹。趙禹以次問之,十餘人無一人習事有智略者。趙禹曰:「吾聞之,將門之下必有將類。傳曰『不知其君視其所使,不知其子視其所友』。今有詔舉將軍舍人者,欲以觀將軍而能得賢者文武之士也。今徒取盎人子上之,又無智略,如木偶人衣之綺繡耳,將柰之何?」於是趙禹悉召衛將軍舍人百餘人,以次問之,得田仁、任安,曰:「獨此兩人可耳,餘無可用者。」衛將軍見此兩人貧,意不平。趙禹去,謂兩人曰:「各自具樾象絳衣。」兩人對曰:「家貧無用具也。」將軍怒曰:「今兩君家自為貧,何為出此言?鞅鞅如有移德於我者,何也?」將軍不得已,上籍以聞。有詔召見衛將軍舍人,此二人前見,詔問能略相推第也。田仁對曰;「提桴鼓立軍門,使士大夫樂死戰鬬,仁不及任安。」任安對曰:「夫決嫌疑,定是非,辯治官,使百姓無怨心,安不及仁也。」武帝大笑曰:「善。」使任安護北軍,使田仁護邊田穀於河上。此兩人立名天下。
其後用任安為益州刺史,以田仁為丞相長史。
田仁上書言:「天下郡太守多為姦利,三河尤甚,臣請先刺舉三河。三河太守皆內倚中貴人,與三公有親屬,無所畏憚,宜先正三河以警天下姦吏。」是時河南、河內太守皆御史大夫杜父兄子弟也,河東太守石丞相子孫也。是時石氏九人為二千石,方盛貴。田仁數上書言之。杜大夫及石氏使人謝,謂田少卿曰:「吾非敢有語言也,願少卿無相誣汙也。」仁已刺三河,三河太守皆下吏誅死。仁還奏事,武帝說,以仁為能不畏彊御,拜仁為丞相司直,威振天下。
其後逢太子有兵事,丞相自將兵,使司直主城門。司直以為太子骨肉之親,父子之閒不甚欲近,去之諸陵過。是時武帝在甘泉,使御史大夫暴君下責丞相「何為縱太子」,丞相對言「使司直部守城門而開太子」。上書以聞,請捕系司直。司直下吏,誅死。
是時任安為北軍使者護軍,太子立車北軍南門外,召任安,與節令發兵。安拜受節,入,閉門不出。武帝聞之,以為任安為詳邪,不傅事,何也?任安笞辱北軍錢官小吏,小吏上書言之,以為受太子節,言「幸與我其鮮好者」。書上聞,武帝曰:「是老吏也,見兵事起,欲坐觀成敗,見勝者欲合從之,有兩心。安有當死之罪甚眾,吾常活之,今懷詐,有不忠之心。」下安吏,誅死。夫月滿則虧,物盛則衰,天地之常也。知進而不知退,久乘富貴,禍積為祟。故范蠡之去越,辭不受官位,名傳後世,萬歲不忘,豈可及哉!後進者慎戒之。
【索隱述贊】田叔長者,重義輕生。張王既雪,漢中是榮。孟舒見廢,抗說相明。按梁以禮,相魯得情。子仁坐事,刺舉有聲。
저선생(褚先生)은 말했다.
“내가 낭(郎)이 되었을 때 들기로 전인(田仁)은 예전부터 임안(任安)과의 관계가 좋았다고 했다. 임안은 형양(滎陽) 사람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가난하고 생활이 곤란했으며, 남을 위해서 수레를 몰다가 장안(長安)에까지 이르렀다. 한동안 장안에 머물면서 일을 구해 하급 관리라도 되려고 했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다. 당시는 사람마다 기록된 호적에 근거에 따라 살아야했기 때문 그는 무공(武功)으로 옮겨 가 살게 되었다.
무공은 부풍(扶風) 서쪽 변두리 있는 작은 현으로 산골짜기 입구에는 촉지(蜀地: 지금의 사천)으로 가는 잔도(棧道: 다니기 힘든 험한 벼랑 같은 곳에 선반을 매듯이 하여 만든 길)가 이어져 있다.
임안은 무공이 작은 읍(邑)이므로 호족이나 세력이 있는 가문들이 없기에 쉽게 지위가 높아질 수 있다고 여겨 바로 그곳에 머물렀다. 그는 남들을 위해서 구도(求盜: 정장의 부하로 도적을 잡는 역할)가 되고 정보(亭父: 정장의 부하로 문을 여닫고 청소하는 역할)가 되었다. 뒤에는 정장(亭長)까지 되었다.
읍의 백성들은 자주 나와서 사냥을 했는데, 임안은 항상 사람들을 위해 잡은 사슴, 꿩, 토끼 등을 공평하게 분배하였는데, 노인네 아이와 정장들 혹은 어렵고 혹은 쉬운 곳에 따라 합리적으로 안배했기에 대중들이 모두 다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 관계도 없는데, 임소경(任少卿: 임안)이 분배하는 것이 공평하며, 지략이 있다.” 다음날 다시 사냥대회를 여니 모인 자가 수백 명에 달했다.
이 때에 임소경이 물었다. “아무개의 아들인 갑(甲)은 어째서 오지 않았습니까?” 모인 사람들은 전부 그가 촌민의 이름을 빨리 기억하는 것에 놀랐다. 이후 그는 삼로(三老)가 임명되었고, 친민관(親民官)으로 천거되어 3백석의 봉록을 받는 현장(縣長)이 되어 백성을 다스렸다. 그러던 중에 황제가 행차할 때에 장막과 휘장 등을 준비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문책을 받고 면직되었다.
이후에 위청 장군의 문객이 되었고, 이 때에 전인과 만나게 되어 더불어 문객으로 장군의 문하에 머물면서 한마음으로 서로를 아꼈다. 이 두 사람은 집이 가난해 장군의 집사에게 자신들을 잘 돌봐달라는 돈을 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집사는 그들을 걸핏하면 말발굽으로 사람을 치는 사나운 말을 기르게 했다.
두 사람이 함께 침상에서 누어있었다가 전인이 임안에게 살며시 말했다. “집사가 인재를 너무 알아주지 못하네!” 그러자 임안이 대답했다. “장군조차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집사 따위가 알아 볼 수 있겠는가!”
한번은 위청 장군이 이 두 사람을 거느리고 평양공주(平陽公主)의 집을 방문했는데, 공주 집의 집사가 두 사람을 말 모는 노예들과 같은 돗자리에서 밥을 먹게 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칼을 뽑아 돗자리를 자르고, 말 모는 노예들과 따로 자리를 앉았다. 공주 집의 사람들은 모두 놀라면서 그들을 혐오했으나 감히 질책하지 못했다.
그 후에 황제는 위청 장군의 문객 중에서 자신의 시종할 수 있는 낭관(郎官)을 선발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장군은 문객들 중에서 부유한 자를 선택하여 그들로 하여금 좋은 말을 타고, 붉은 옷과 옥으로 장식한 검을 갖추게 해서 궁으로 들어가 선보이려고 했다. 이때 마침 현명한 대부(大夫)로 알려진 소부(少府) 조우(趙禹)가 위청 장군의 집을 방문했다. 장군은 천거할 문객들을 불러서 먼저 조우에게 보이고 그의 견해를 들어보기로 했다.
조우가 차례로 그들을 만나서 시험 삼아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는데, 십여 명 중에서 사리에 통달하고 지모가 있는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에 조우가 장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장군의 문하에 반드시 장군과 유사한 인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만약 그 임금을 모르면 그 신하를 보고, 그 사람을 모르면 사귀는 친구를 보라!’고 했습니다. 지금 황제께서 장군의 문객을 천거하라는 조서를 내린 까닭은 그들을 통해서 장군이 능히 현명하고 문무에 뛰어난 인재를 얻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장군은 지금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만을 선택하여 황제에게 천거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지모도 없고, 마치 나무 인형에게 비단옷을 걸친 것과 같습니다. 장군은 장차 어찌 하실 생각입니까?”
이어 조우는 위청 장군의 문객 1백여 명을 모두 불러 모아 다시 차례로 만나서 그들의 식견을 물어본 끝에 전인과 임안을 발견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 두 사람만 괜찮을 뿐, 그 나머지는 쓸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위청 장군은 이 두 사람이 빈한한 출신인 것을 알고 내심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고 못마땅했다.
조우가 떠나자 위청장군은 두 사람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각자 탈 말과 새 붉은 옷을 마련해 두시오.” 두 사람이 대답했다. “집안이 가난하여 갖추기가 어렵습니다.”
그러자 위청 장군은 노하여 말했다. “지금 두 사람은 자기 집안이 가난하다고 자랑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는가? 내가 당신들을 황제에게 천거하는 은덕을 베풀었는데도 불만족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니,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위청 장군은 어찌 할 도리가 없자 단지 명부에 써서 황제에게 보고했다. 황제가 위청 장군의 문객을 접견한다는 조서가 내리자 두 사람은 궁전으로 들어가서 황제를 알현했다. 황제는 그들의 재능과 책략을 알아보기 위해서 그들의 견해를 물어보았더니, 두 사람은 서로를 추대했다.
먼저 전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북채를 잡고 군문에 서서 사대부들로 하여금 기꺼이 전투에서 죽게 만드는 것은 저는 임안을 따라 잡을 수 없습니다.”
이에 임안은 이렇게 대답했다. “무릇 의심쩍은 사건을 해결하고 시비를 판정하며 부하관원들의 능력을 분별하여 관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원망하는 마음을 없게 만드는 것은, 제가 전인을 따라 잡을 수 없습니다.”
무제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좋다.” 그리고 임안으로 하여금 북군(北軍)을 감독하고 지키게 했고, 전인은 황하(黃河) 위쪽에 있는 변방 요새의 둔전(屯田)과 곡물을 감독하고 돌보게 했다. 이리하자 두 사람은 금방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 후에 임안은 익주자사(益州刺史)로 임용되었고, 전인은 승상의 장사(長史)가 되었다.
전인은 일찍이 황제에서 상서를 올리며 이렇게 아뢰었다. “천하에 각 군(郡) 태수(太守) 중에서 불법을 자행하여 사적인 이익을 취하는 자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중 삼하<(三河): 하서(河西), 하동(河東), 하내(河內)>가 더욱 엄중하니, 신이 먼저 삼하 지역을 비밀리에 정찰할 수 있도록 윤허해주시길 청합니다. 삼하 지구의 태수는 모두 경성 안에 귀한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있고, 승상, 태위, 어사대부 등의 삼공(三公)과 친족 관계이므로 누구도 두려워하거나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응당 먼저 삼하 지구의 태수들을 바로잡아야 천하에 불법을 자행하는 관리들에게 경종을 줄 수 있습니다.”
이때 하남군(河南郡), 하내군(河內君)의 태수는 모두 어사대부 두주(杜周) 부형(父兄)의 자제들이었고, 하동군(河東郡)의 태수는 승상 석경(石慶)의 자손이었다. 이때 석씨(石氏) 가문에서는 아홉 명이나 봉록 2천석을 받는 고관이 되어 바야흐로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고 존귀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전인은 수차례 상서를 올려서 이 일에 대해 보고했다.
이에 어사대부 두주와 승상 석경은 다급하게 하인을 보내 전인에게 사과하면서 이렇게 변명했다. “우리가 감히 이러쿵저러쿵 불평을 토로할 수는 없지만, 청컨대 소경(少卿: 전인의 자)께서 공연하게 무고하여 저희들에게 모욕을 주지 마십시오.”
그러나 전인은 이미 삼하 지역을 정찰한 후에 삼하 태수를 모두 법관에게 넘겨 심문한 후에 사형에 처했다. 전인이 조정으로 돌아와서 그 사실을 보고하자 무제는 매우 기뻐했다. 더불어 무제는 전인이 유능하고,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리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여겨서 그를 승상 사직(司直)에 임명하니 그의 위세가 천하에 진동했다.
그 후에 태자가 무력으로 모반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승상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는데, 이 때에 사직 전인에게 성문을 단단히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인은 태자가 황제는 골육지친으로 부자지간이기 때문에 잘못 개입하면 도리어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으로 생각하여 태자 일행이 제릉(諸陵)을 지나가도록 성문을 열었다. 이때 무제는 마침 감천궁(甘泉宮)에 있었는데, 어사대부 포승(暴勝)을 승상에게 보내 이렇게 질책했다. “무엇 때문에 태자를 놓아주었는가?”
이에 승상이 이렇게 변명했다. “신은 사직인 전인에게 성문을 굳게 지키라고 명령을 냈는데, 그가 성문을 열고 태자를 놓아주었습니다.” 어사대부가 그의 말을 황제에게 보고하고, 전인을 체포하는 것을 청했다. 결국 전인은 법관에게 압송되어 심문을 받은 뒤에 사형을 당했다.
이때에 임안은 경성을 방위하는 북군(北軍)을 감독하는 호군(護軍)의 직위에 있었다. 태자는 북군의 남문 밖에서 수레를 세우고 임안을 불러 그에게 부절(符節)을 주고 북군을 동원할 것을 명령했다. 임안은 예를 갖추어 절을 하며 부절을 받은 뒤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다시 나오지 않았다.
무제는 이 소식을 듣고 임안이 부절을 받고도 태자의 명령을 바로 따르지 않는 까닭을 궁금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일찍이 임안은 북군의 자금을 관리하는 하급 관리를 때려 모욕을 준 적이 있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하급 관리는 상서를 올려 임안이 태자에게 부절을 받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모함했다. “다행히 저에게 훌륭한 군대가 있으니, 적당할 때에 명령만 내려 주시길 바랍니다.”
무제는 이 상서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는 노련한 관리의 처세술이다. 태자가 군사를 일으킨 것을 보고, 앉아서 승패를 관망하다가 승자에게 부합하여 따르려고 하는 두 가지 마음을 지녔다. 그동안 임안은 사형을 당할 만한 죄를 많이 지었지만 짐은 항상 그를 살려주었다. 지금 그는 사특하게 불충한 마음을 품고 있다.”
그리고 임안을 판관에게 넘겨 죽였다.
대개 달은 차면 기울고 사물은 성하면 바로 쇠하는 것이 천지의 변함없는 법칙이다. 앞으로 나가기만 하고 물러설 줄 모르며, 오래도록 부귀를 누리려고만 하면 재앙이 쌓여서 도리어 흉한 결과를 초래한다.
고로 범려(范蠡)는 월(越)나라를 떠났으며, 관직과 작위를 받지 않고 사양하여 후세까지 명성이 전해져 만세(萬世)토록 잊혀 지지 않았으니, 어찌 그를 본받을 수 있는가! 뒤에 매진하는 자는 삼가 전인과 임안을 경계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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