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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史記列傳

史記 卷一O七. 魏其武安侯列傳

by 柳川 2019. 6. 3.

                                  魏

 

竇嬰

魏其侯竇嬰者,孝文后從兄子也。父世觀津人。喜賓客。孝文時,嬰為吳相,病免。孝景初即位,為詹事。

梁孝王者,孝景弟也,其母竇太后愛之。梁孝王朝,因昆弟燕飲。是時上未立太子,酒酣,從容言曰:「千秋之後傳梁王。」太后驩。竇嬰引卮酒進上,曰:「天下者,高祖天下,父子相傳,此漢之約也,上何以得擅傳梁王!」太后由此憎竇嬰。竇嬰亦薄其官,因病免。太后除竇嬰門籍,不得入朝請。

孝景三年,吳楚反,上察宗室諸竇毋如竇嬰賢,乃召嬰。嬰入見,固辭謝病不足任。太后亦慚。於是上曰:「天下方有急,王孫寧可以讓邪?」乃拜嬰為大將軍,賜金千斤。嬰乃言袁盎、欒布諸名將賢士在家者進之。所賜金,陳之廊廡下,軍吏過,輒令財取為用,金無入家者。竇嬰守滎陽,監齊趙兵。七國兵已盡破,封嬰為魏其侯。諸游士賓客爭歸魏其侯。孝景時每朝議大事,條侯、魏其侯,諸列侯莫敢與亢禮。

孝景四年,立栗太子,使魏其侯為太子傅。孝景七年,栗太子廢,魏其數爭不能得。魏其謝病,屏居藍田南山之下數月,諸賓客辯士說之,莫能來。梁人高遂乃說魏其曰:「能富貴將軍者,上也;能親將軍者,太后也。今將軍傅太子,太子廢而不能爭;爭不能得,又弗能死。自引謝病,擁趙女,屏閒處而不朝。相提而論,是自明揚主上之過。有如兩宮螫將軍,則妻子毋類矣。」魏其侯然之,乃遂起,朝請如故。

桃侯免相,竇太后數言魏其侯。孝景帝曰:「太后豈以為臣有愛,不相魏其?魏其者,沾沾自喜耳,多易。難以為相,持重。」遂不用,用建陵侯衛綰為丞相。

 

위기후() 두영()은 효문제() 황후()의 종형()의 아들이다. 선대로부터 관진() 사람이다. 그는 빈객을 좋아했다. 효문제 때 두영은 오()나라 승상()으로 임명되었었는데 병으로 사임했다. 효경제() 즉위 초에 첨사()로 임명되었다.

양 효왕()은 효경제의 아우인데, 어머니인 두태후()가 그를 매우 총애했다. 한번은 양 효왕이 입조했는데 황제와 형제의 사이였기 때문에 사사로운 주연이 베풀어졌다. 이때 황제가 아직 태자를 책립하지 않았었는데 주흥이 무르익자 황제가 편하게 양 효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짐이 죽은 뒤에 제위()를 양왕()에게 주겠노라.” 두태후는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이때 두영이 일어나 술잔을 들어 황제에게 술을 올리며 이렇게 아뢰었다. “천하는 고조 황제의 천하로 마땅히 부자간에 서로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나라의 제도규정입니다. 황제께서 무슨 근거로 마음대로 양왕에게 전하실 수 있습니까?”

두태후는 이 때문에 두영을 증오하게 되었다. 두영 역시 첨사의 관직을 가볍게 여기고 있었으므로 병을 핑계로 사임했다. 그런데 태후는 두영을 궁중을 출입할 수 있는 문적()에서 삭제시켜 매해 봄, 가을로 조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효경제 3년(서기전 154년), 오()와 초()나라 등 7국의 반란이 일어났다. 황제가 종실()과 두씨() 일족을 두루 고찰하였는데, 두영만큼 현명한 사람이 없었다. 이에 곧 두영을 불렀다.

두영이 입조하여 황제를 알현하고 병으로 인해 임무를 맡기가 부족하다고 굳이 사양했다. 두태후 역시 참회했다. 이에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천하는 바야흐로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는데, 왕손()은 어찌하여 사양만 하시오?” 이에 두영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황금 1천근을 하사했다. 두영은 원앙(), 난포() 등 여러 명장과 현사들 집에 머물고 이는 자들을 추천했다. 그리고 황제에게 하사받은 금은 모두 궁전의 행랑에 진열해두고 군리()가 지나갈 때마다 재량 것 가져가 쓰게 했고, 자신의 집으로 금을 가져가지 않았다. 두영은 형양()을 지키며 제(), 조() 지역의 한나라 군사를 감독했다. 칠국의 군대가 이미 다 격파되자 황제는 두영을 위기후()에 봉했다. 그러자 여러 유사()들과 빈객들이 다투어 위기후에게 의탁했다.

효경제 때 매번 조정에서 대사를 논의할 때면 여러 열후()들은 조후() 주아부, 위기후 두영을 감히 자신들과 대등한 예로 대하려 들지 않았다.

 

효경제 4년(서기전 153년)에 율태자()를 황태자로 책립하고, 위기후를 태자부()로 삼았다. 그 후 효경제 7년(서기전 150년)에 율태자가 폐출되자 위기후는 여러 차례 간하여 막으려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에 위기후는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남전()의 남산() 기슭에서 몇 달 간을 머물렀다. 여러 빈객들과 변사()들이 찾아가 그를 설득했으나 아무도 그를 돌아오게 하지 못했다. 양()나라 사람 고수()가 위기후에게 이렇게 유세했다.

“장군을 능히 부귀하게 할 수 있는 분은 황제이고, 장군을 능히 친하게 할 수 있는 분은 태후이십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태자의 스승으로, 태자가 폐위될 때에 능히 쟁론을 벌이지 못하고, 쟁론을 벌였는데도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또 죽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병을 핑계로 조나라 미인을 끼고 한가로운 곳으로 물러나와 조회에도 참가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서로 비교해 의론하고 있으니 이는 스스로 황제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약 황제와 태후의 두 궁궐에서 장군에게 분노하여 죄를 물으시면 장군의 처자식은 살아남는 자가 없게 될 것입니다."

위기후는 그 말이 옳다고 여겨 이에 마침내 몸을 일으켜 옛날과 같이 조회에 참석했다.

도후() 유사()가 승상에서 면직되었다. 두태후가 여러 차례 위기후를 천거하자 효경제가 두태후에게 말했다.

“태후께서는 어찌 제가 자리에 아까워하여 위기()를 승상에 쓰지 않는다고 여기십니까? 그는 교만하고 스스로 자만하며 경솔한 면이 많으므로 승상으로 써서 막중한 임무를 맡기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결국 위기후를 등용하지 않고 건릉후() 위관()을 승상으로 삼았다.

 

 

田蚡

武安侯田蚡者,孝景后同母弟也,生長陵。魏其已為大將軍後,方盛,蚡為諸郎,未貴,往來侍酒魏其,跪起如子姓。及孝景晚節,蚡益貴幸,為太中大夫。蚡辯有口,學槃盂諸書,王太后賢之。孝景崩,即日太子立,稱制,所鎮撫多有田蚡賓客計筴,蚡弟田勝,皆以太后弟,孝景後三年封蚡為武安侯,勝為周陽侯。

武安侯新欲用事為相,卑下賓客,進名士家居者貴之,欲以傾魏其諸將相。建元元年,丞相綰病免,上議置丞相、太尉。籍福說武安侯曰:「魏其貴久矣,天下士素歸之。今將軍初興,未如魏其,即上以將軍為丞相,必讓魏其。魏其為丞相,將軍必為太尉。太尉、丞相尊等耳,又有讓賢名。」武安侯乃微言太后風上,於是乃以魏其侯為丞相,武安侯為太尉。籍福賀魏其侯,因弔曰:「君侯資性喜善疾惡,方今善人譽君侯,故至丞相;然君侯且疾惡,惡人眾,亦且毀君侯。君侯能兼容,則幸久;不能,今以毀去矣。」魏其不聽。

魏其、武安俱好儒術,推轂趙綰為御史大夫,王臧為郎中令。迎魯申公,欲設明堂,令列侯就國,除關,以禮為服制,以興太平。舉適諸竇宗室毋節行者,除其屬籍。時諸外家為列侯,列侯多尚公主,皆不欲就國,以故毀日至竇太后。太后好黃老之言,而魏其、武安、趙綰、王臧等務隆推儒術,貶道家言,是以竇太后滋不說魏其等。及建元二年,御史大夫趙綰請無奏事東宮。竇太后大怒,乃罷逐趙綰、王臧等,而免丞相、太尉,以柏至侯許昌為丞相,武彊侯莊青翟為御史大夫。魏其、武安由此以侯家居。

武安侯雖不任職,以王太后故,親幸,數言事多效,天下吏士趨勢利者,皆去魏其歸武安,武安日益橫。建元六年,竇太后崩,丞相昌、御史大夫青翟坐喪事不辦,免。以武安侯蚡為丞相,以大司農韓安國為御史大夫。天下士郡諸侯愈益附武安。

武安者,貌侵,生貴甚。又以為諸侯王多長,上初即位,富於春秋,蚡以肺腑為京師相,非痛折節以禮詘之,天下不肅。當是時,丞相入奏事,坐語移日,所言皆聽。薦人或起家至二千石,權移主上。上乃曰:「君除吏已盡未?吾亦欲除吏。」嘗請考工地益宅,上怒曰:「君何不遂取武庫!」是後乃退。嘗召客飲,坐其兄蓋侯南鄉,自坐東鄉,以為漢相尊,不可以兄故私橈。武安由此滋驕,治宅甲諸第。田園極膏腴,而市買郡縣器物相屬於道。前堂羅鐘鼓,立曲旃;後房婦女以百數。諸侯奉金玉狗馬玩好,不可勝數。

魏其失竇太后,益疏不用,無勢,諸客稍稍自引而怠傲,唯灌將軍獨不失故。魏其日默默不得志,而獨厚遇灌將軍。

 

무안후() 전분()은 효경제 황후의 동모이부()의 동생으로 장릉()에서 태어났다. 위기후가 이미 대장군이 되고 난 후에 바야흐로 위세가 드높을 때 전분은 낭관에 불과했고, 존귀한 신분이 아니었다.

그가 위기후의 집에 왕래하며 위기를 모시고 술자리를 할 때에는 꿇어앉고 일어서는 예절이 마치 자식이나 손자과 같았다. 효경제 만년에 이르러 전분은 점차 존귀하게 되어 태중대부()가 되었다.

전분은 언변이 뛰어났고 『반우()』 등의 여러 도가 서적을 공부해 왕태후()는 그가 현명한 자라고 여겼다. 효경제가 붕어하자 당일로 태자()를 세우고 왕태후가 섭정했는데, 이때 전국을 진압하고 민심을 달래는 데 전분의 빈객들이 낸 계책을 많이 채용되었다.

전분과 전분의 아우 전승()은 모두 왕태후의 동생인 연고로 효경제 후원() 3년(서기전 141년)에 전분은 무안후(), 전승은 주양후()에 각각 봉해졌다.

무안후는 새로 정권을 잡아 승상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스스로 겸손하게 낮추어 빈객들을 대하고 한가하게 집에 머물러 있는 명사()를 추천해 그들을 존귀하게 함으로써 위기 등의 여러 장상()들을 뒤집으려고 했다.

건원() 원년(서기전 140년)에 승상 위관이 병으로 사임했다. 황제는 승상, 태위()의 임명을 조정에서 논의하게 했다. 적복()이 무안후에게 말했다.

“위기후는 존귀하게 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천하의 재능 있는 선비들이 평소부터 그에게 의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장군은 막 일어났기 때문에 위기후만 못합니다. 황제께서 장군을 승상으로 삼으려 하시면 반드시 위기후에게 양보하십시오. 위기후가 승상이 되면 장군은 반드시 태위가 되실 것입니다. 태위와 승상은 존귀하기가 대동합니다. 또 현자에게 승상의 자리를 양보했다는 명성을 얻는 것입니다.”

이에 무안후는 태후에게 완곡하게 황제에게 그 뜻을 전하도록 했다. 그 덕분에 위기후가 승상이 되고 무안후가 태위가 되었다. 적복이 위기후를 축하하고 가서 위문하면서 말했다.

“군후()의 천성은 선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십니다. 지금 착한 사람들이 군후를 칭송하기 때문에 승상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군후께서는 또 악한 것을 미워하고 계신데, 악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 역시 또 군후를 비방할 것입니다. 군후께서는 능히 악인도 겸해 포용하셔야 다행히 지위를 오래 보전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못하면 곧 비방에 의해 자리에서 물러나셔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위기후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위기후와 무안후는 모두 유학을 좋아했다. 조관()을 천거해 어사대부()로 삼고, 왕장()을 천거해 낭중령()으로 삼았으며, 노() 땅의 신공(: 신배)을 장안으로 맞아들여 명당()을 설립을 준비했다. 열후들을 자기들의 봉지로 돌아가게 했고, 관()을 폐지했으며 예법에 규정에 따라 길흉의 복식()과 제도를 정하게 하였다. 이로써 태평정치를 진작시키려 했다. 동시에 외척과 종실() 가운데서 행실이 좋지 못한 자를 들추어내어 견책하고 그들을 족적()에서 삭제했다.

이때 많은 외척들이 열후가 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열후들은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기에 모두 자신의 봉지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이 때문에 위기후 등을 비방하는 소리가 날마다 두태후의 귀에게 들어갔다.

두태후는 황로()학설의 좋아했는데 위기후, 무안후, 조관, 왕장 등은 유가()의 학설을 추숭하는데 노력하고, 도가()의 학설을 폄하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두태후는 더욱 위기후 등의 사람을 싫어하게 되었다.

건원() 2년(서기전 139년)에 어사대부 조관이 두황후가 머물었던 동궁에 대한 정무 보고하는 것을 폐지하자고 황제에게 청했다. 두태후는 대노하여 곧바로 조관, 왕장 등을 파면시키고 내쫓았다. 그리고 승상과 태위를 해임시키고, 백지후() 허창()을 승상으로 임명하고, 무강후() 장청책()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위기후와 무안후는 이로써 열후의 신분만 유지한 채 집에서 한가롭게 머물게 되었다.

무안후가 비록 직책을 못 가지고 있었지만 왕태후와의 연고로 여전히 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여러 차례 정사에 대해 의론하고 그의 주장이 많이 채택되어 성과를 보았다. 이 때문에 천하의 권세와 이익을 좇는 관리와 선비들이 위기후를 떠나 무안후에게 의탁했다. 이로 인해 무안후는 날로 더욱 교만 방자해졌다.

건원 6년(서기전 135년)에 두태후가 세상을 떠났다. 승상 허창과 어사대부 장청책은 두태후의 상사()를 잘 처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모두 해임되었다. 이에 무안후 전분을 승상으로 삼고, 대사농() 한안국()을 어사대부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천하의 선비와 군수와 제후왕들은 더욱 무안후를 따르게 되었다.

무안후는 키가 작고 못생겼으나 태어날 때부터 존귀해서 매우 거만했다. 또 당시 제후들과 왕들 중에 연장자가 많고, 황제는 막 즉위해 나이가 어렸다. 그래서 자기가 외척이자 경사의 승상으로 그들을 가차 없이 깎아내려 예로써 굴복시키지 않으면 천하가 복종하지 않을 것으로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승상 전분이 조정에 입조해 정무를 아뢸 때에는 왕왕 앉아서 반나절씩 이야기해도 황제가 모두 다 들어주었다. 그가 추천하는 사람은 때로는 집에 한가하게 머물러 있는 자를 단숨에 2천석()의 신분에 세우기도 해 황제의 권력이 그에게로 옮겨간 듯했다.

이에 황제가 말했다. “승상은 관리 임명이 끝나지 않았는가? 짐도 관리를 임명하고 싶도다!”

승상은 일찍이 자신의 집을 늘리려고 고공관서()의 땅을 요구하자 황제가 노하여 이렇게 말했다. “승상은 어째서 무기고를 가지겠다고 하지 않는가?”

이후부터 조금 행동거지를 삼가 하게 되었다. 한번은 일찍이 손님을 초대해 주연을 베풀고 있었는데, 그의 형 갑후()는 남향으로 앉게 하고 자신은 동향으로 앉았다. 그 이유는 한나라 승상은 존귀한 지위라 형이라고 해도 사사로이 자신을 굽힐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안후는 이로부터 더욱 교만해졌다. 자신의 저택을 수리하고 꾸몄는데, 그 규모는 호화롭기가 귀족 저택 중에서 으뜸이었다. 그의 전답과 장원은 매우 비옥했고, 그가 전국 군현()에 파견하여 각종 물건을 사오는 행렬이 길에 서로 이어져 끊이지 않았다. 저택의 앞채에는 종과 북을 벌여두고 곡전(: 깃발)을 세워두었고, 뒤채에는 부녀가 1백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제후들이 그에게 진상한 금은보옥과 개와 말, 완호물() 등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

위기후는 두태후를 잃고 나자 더욱 황제와 소원해져서 중용되지 않았다. 세력이 없어지자 여러 빈객들도 점차 멀어졌고, 심지어 그를 대하는 것이 태만하고 방자해졌다. 오직 관장군()만이 홀로 옛 정분을 잃지 않았다. 위기후가 매일 묵묵하게 뜻을 펴지 못하고 지내면서도 단지 관장군만을 후하게 대우했다.

 

 

灌夫

灌將軍夫者,潁陰人也。夫父張孟,嘗為潁陰侯嬰舍人,得幸,因進之至二千石,故蒙灌氏姓為灌孟。吳楚反時,潁陰侯灌何為將軍,屬太尉,請灌孟為校尉。夫以千人與父俱。灌孟年老,潁陰侯彊請之,郁郁不得意,故戰常陷堅,遂死吳軍中。軍法,父子俱從軍,有死事,得與喪歸。灌夫不肯隨喪歸,奮曰:「願取吳王若將軍頭,以報父之仇。」於是灌夫被甲持戟,募軍中壯士所善願從者數十人。及出壁門,莫敢前。獨二人及從奴十數騎馳入吳軍,至吳將麾下,所殺傷數十人。不得前,復馳還,走入漢壁,皆亡其奴,獨與一騎歸。夫身中大創十餘,適有萬金良藥,故得無死。夫創少瘳,又復請將軍曰:「吾益知吳壁中曲折,請復往。」將軍壯義之,恐亡夫,乃言太尉,太尉乃固止之。吳已破,灌夫以此名聞天下。

潁陰侯言之上,上以夫為中郎將。數月,坐法去。後家居長安,長安中諸公莫弗稱之。孝景時,至代相。孝景崩,今上初即位,以為淮陽天下交,勁兵處,故徙夫為淮陽太守。建元元年,入為太仆。二年,夫與長樂衛尉竇甫飲,輕重不得,夫醉,搏甫。甫,竇太后昆弟也。上恐太后誅夫,徙為燕相。數歲,坐法去官,家居長安。

灌夫為人剛直使酒,不好面諛。貴戚諸有勢在己之右,不欲加禮,必陵之;諸士在己之左,愈貧賤,尤益敬,與鈞。稠人廣眾,薦寵下輩。士亦以此多之。

夫不喜文學,好任俠,已然諾。諸所與交通,無非豪桀大猾。家累數千萬,食客日數十百人。陂池田園,宗族賓客為權利,橫於潁川。潁川兒乃歌之曰:「潁水清,灌氏寧;潁水濁,灌氏族。」

灌夫家居雖富,然失勢,卿相侍中賓客益衰。及魏其侯失勢,亦欲倚灌夫引繩批根生平慕之後棄之者。灌夫亦倚魏其而通列侯宗室為名高。兩人相為引重,其游如父子然。相得驩甚,無厭,恨相知晚也。

灌夫有服,過丞相。丞相從容曰:「吾欲與仲孺過魏其侯,會仲孺有服。」灌夫曰:「將軍乃肯幸臨況魏其侯,夫安敢以服為解!請語魏其侯帳具,將軍旦日蚤臨。」武安許諾。灌夫具語魏其侯如所謂武安侯。魏其與其夫人益市牛酒,夜灑埽,早帳具至旦。平明,令門下候伺。至日中,丞相不來。魏其謂灌夫曰:「丞相豈忘之哉?」灌夫不懌,曰:「夫以服請,宜往。」乃駕,自往迎丞相。丞相特前戲許灌夫,殊無意往。及夫至門,丞相尚臥。於是夫入見,曰:「將軍昨日幸許過魏其,魏其夫妻治具,自旦至今,未敢嘗食。」武安鄂謝曰:「吾昨日醉,忽忘與仲孺言。」乃駕往,又徐行,灌夫愈益怒。及飲酒酣,夫起舞屬丞相,丞相不起,夫從坐上語侵之。魏其乃扶灌夫去,謝丞相。丞相卒飲至夜,極驩而去。

丞相嘗使籍福請魏其城南田。魏其大望曰:「老僕雖棄,將軍雖貴,寧可以勢奪乎!」不許。灌夫聞,怒,罵籍福。籍福惡兩人有郤,乃謾自好謝丞相曰:「魏其老且死,易忍,且待之。」已而武安聞魏其、灌夫實怒不予田,亦怒曰:「魏其子嘗殺人,蚡活之。蚡事魏其無所不可,何愛數頃田?且灌夫何與也?吾不敢複求田。」武安由此大怨灌夫、魏其。

元光四年春,丞相言灌夫家在潁川,橫甚,民苦之。請案。上曰:「此丞相事,何請。」灌夫亦持丞相陰事,為奸利,受淮南王金與語言。賓客居間,遂止,俱解。

夏,丞相取燕王女為夫人,有太后詔,召列侯宗室皆往賀。魏其侯過灌夫,欲與俱。夫謝曰:「夫數以酒失得過丞相,丞相今者又與夫有郤。」魏其曰:「事已解。」彊與俱。飲酒酣,武安起為壽,坐皆避席伏。已魏其侯為壽,獨故人避席耳,餘半膝席。灌夫不悅。起行酒,至武安,武安膝席曰:「不能滿觴。」夫怒,因嘻笑曰:「將軍貴人也,屬之!」時武安不肯。行酒次至臨汝侯,臨汝侯方與程不識耳語,又不避席。夫無所發怒,乃罵臨汝侯曰:「生平毀程不識不直一錢,今日長者為壽,乃效女兒呫囁耳語!」武安謂灌夫曰:「程李俱東西宮衛尉,今眾辱程將軍,仲孺獨不為李將軍地乎?」灌夫曰:「今日斬頭陷匈,何知程李乎!」坐乃起更衣,稍稍去。魏其侯去,麾灌夫出。武安遂怒曰:「此吾驕灌夫罪。」乃令騎留灌夫。灌夫欲出不得。籍福起為謝,案灌夫項令謝。夫愈怒,不肯謝。武安乃麾騎縛夫置傳舍,召長史曰:「今日召宗室,有詔。」劾灌夫罵坐不敬,系居室。遂按其前事,遣吏分曹逐捕諸灌氏支屬,皆得棄市罪。魏其侯大媿,為資使賓客請,莫能解。武安吏皆為耳目,諸灌氏皆亡匿,夫系,遂不得告言武安陰事。

魏其銳身為救灌夫。夫人諫魏其曰:「灌將軍得罪丞相,與太后家忤,寧可救邪?」魏其侯曰:「侯自我得之,自我捐之,無所恨。且終不令灌仲孺獨死,嬰獨生。」乃匿其家,竊出上書。立召入,具言灌夫醉飽事,不足誅。上然之,賜魏其食,曰:「東朝廷辯之。」

魏其之東朝,盛推灌夫之善,言其醉飽得過,乃丞相以他事誣罪之。武安又盛毀灌夫所為橫恣,罪逆不道。魏其度不可奈何,因言丞相短。武安曰:「天下幸而安樂無事,蚡得為肺腑,所好音樂狗馬田宅。蚡所愛倡優巧匠之屬,不如魏其、灌夫日夜招聚天下豪桀壯士與論議,腹誹而心謗,不仰視天而俯畫地,辟倪兩宮間,幸天下有變,而欲有大功。臣乃不知魏其等所為。」於是上問朝臣:「兩人孰是?」御史大夫韓安國曰:「魏其言灌夫父死事,身荷戟馳入不測之吳軍,身被數十創,名冠三軍,此天下壯士,非有大惡,爭杯酒,不足引他過以誅也。魏其言是也。丞相亦言灌夫通奸猾,侵細民,家累巨萬,橫恣潁川,淩轢宗室,侵犯骨肉,此所謂『枝大於本,脛大於股,不折必披』,丞相言亦是。唯明主裁之。」主爵都尉汲黯是魏其。內史鄭當時是魏其,後不敢堅對。餘皆莫敢對。上怒內史曰:「公平生數言魏其、武安長短,今日廷論,局趣效轅下駒,吾並斬若屬矣。」即罷起入,上食太后。太后亦已使人候伺,具以告太后。太后怒,不食,曰:「今我在也,而人皆藉吾弟,令我百歲後,皆魚肉之矣。且帝甯能為石人邪!此特帝在,即錄錄,設百歲後,是屬寧有可信者乎?」上謝曰:「俱宗室外家,故廷辯之。不然,此一獄吏所決耳。」是時郎中令石建為上別言兩人事。

武安已罷朝,出止車門,召韓御史大夫載,怒曰:「與長孺共一老禿翁,何為首鼠兩端?」韓御史良久謂丞相曰:「君何不自喜?夫魏其毀君,君當免冠解印綬歸,曰『臣以肺腑幸得待罪,固非其任,魏其言皆是』。如此,上必多君有讓,不廢君。魏其必內愧,杜門齰舌自殺。今人毀君,君亦毀人,譬如賈豎女子爭言,何其無大體也!」武安謝罪曰:「爭時急,不知出此。」

於是上使御史簿責魏其所言灌夫,頗不讎,欺謾。劾系都司空。孝景時,魏其常受遺詔,曰「事有不便,以便宜論上」。及系,灌夫罪至族,事日急,諸公莫敢複明言於上。魏其乃使昆弟子上書言之,幸得複召見。書奏上,而案尚書大行無遺詔。詔書獨藏魏其家,家丞封。乃劾魏其矯先帝詔,罪當棄市。五年十月,悉論灌夫及家屬。魏其良久乃聞,聞即恚,病痱,不食欲死。或聞上無意殺魏其,魏其複食,治病,議定不死矣。乃有蜚語為惡言聞上,故以十二月晦論棄市渭城。

其春,武安侯病,專呼服謝罪。使巫視鬼者視之,見魏其、灌夫共守,欲殺之。竟死。子恬嗣。元朔三年,武安侯坐衣襜褕入宮,不敬。

淮南王安謀反覺,治。王前朝,武安侯為太尉,時迎王至霸上,謂王曰:「上未有太子,大王最賢,高祖孫,即宮車晏駕,非大王立當誰哉!」淮南王大喜,厚遺金財物。上自魏其時不直武安,特為太后故耳。及聞淮南王金事,上曰:「使武安侯在者,族矣。」

 

관장군() 관부()는 영음() 사람이다. 관부의 부친인 장맹()은 일찍이 영음후() 관영()의 가신()이었다. 장맹은 관영의 총애를 받았고 관영의 추천으로 2천석의 봉록을 받는 신분이 되었다.

그래서 관씨() 성을 따서 관맹()이 되었다. 오와 초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영음후 관하()가 장군이 되어 태위 주아부의 휘하에 속하게 되었는데, 그는 태위에게 관맹을 교위()로 천거하였다.

관부는 1천 명을 이끌고 부친과 함께 종군했다. 관맹은 이미 연로하였는데. 영음후가 강하게 그를 태부에게 추천했던 대해 그는 늘 답답하게 여겼다. 그래서 전투에서 항상 적의 견고한 진지를 공격하다가 그로 인해 오나라 군중에서 전사했다.

당시의 군법의 규정에는 부자가 함께 종군해 전투를 나섰다가 한 사람이 전사하면 남은 생존자는 유해와 함께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관부는 부친의 유해를 가지고 돌아가지 않고 격분하여 이렇게 말했다. “원컨대 오왕 혹은 오나라 장군의 목을 베어 부친의 원수를 갚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때 관부는 갑옷을 입고 창을 쥐고는 군영 중에서 평소 자기와 친하게 지내면서 따라나서기를 원하는 용사 수십 명을 모집했다. 그러나 군문을 나설 때까지 앞으로 나서는 자가 없었다.

단지 두 사람과 관부가 데리고 온 노비 십수 명만이 함께 말을 달려 오나라 군영 속으로 돌격했다. 오나라 장군의 깃발 아래에 이르러 적군 수십 명을 죽이거나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어서 다시 말을 달려 돌아왔는데 한나라 진영으로 들어왔을 때에는 관부의 노비들은 모두 죽고 단지 한 기병()뿐이었다.

관부 자신도 몸에 10여 군데의 큰 상처를 입었는데 마침 만금의 가치가 있는 양약이 있었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

관부는 상처가 조금 낫자 또다시 장군에게 청원했다. “저는 이제 오나라 군영의 곡절을 더욱 잘 알게 되었으니 청컨대 다시 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장군은 그가 용감하고 의협심이 있으나 관부를 잃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곧 태위에게 이 일을 보고했다. 태위도 한결 같이 그의 출격을 중지시켰다. 오나라를 격파하고 나자 관부는 이로 인해 천하에 명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영음후가 관부의 정황을 황제에게 보고하니, 황제는 관부를 중랑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몇 달 만에 범법행위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로 장안의 집에서 머물렀는데, 장안의 여러 공()들 중에 그를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효경제 때에는 관부는 대()나라의 승상 자리에 올랐다. 효경제가 붕어하고 지금의 황제가 막 즉위했을 때, 황제는 회양()이 천하 교통의 요충지로서 반드시 강대한 군대가 주둔하여 지켜야하는 지역이라고 여겼다. 이 때문에 관부를 옮겨 회양의 태수()로 삼았다.

건원() 원년(서기전 140년)에 관부는 조정에 들어가 태복()이 되었다. 건원 2년에 그는 장락위위() 두보()와 술을 마셨는데, 음주예절에서 벗어나 관부가 술에 취하여 두보를 때렸다. 두보는 두태후와 형제간이었다. 황제는 태후가 관부를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서 그를 연()나라 승상으로 옮기게 했다. 몇 년 뒤에 그는 또다시 범법행위로 관직에서 물러나 장안의 집에 한가롭게 머물렀다.

관부는 사람됨이 강직하고 주벽()이 있었으나, 면전에서 아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귀척을 비롯해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세력가에게는 좀처럼 예를 표하려 하지 않았고 반드시 그들을 업신여기고 모욕을 주었다. 그러나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선비들에 대해서 그들이 빈천할수록 특히 더욱 공경하며 평등하게 대우했다. 넓은 뜰에 군중이 모여 있으면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을 일으켜 천거하고 총애했다. 그래서 선비들도 또한 그를 중시하고 칭찬했다.

 

관부는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협객을 좋아했으며 남들과의 약속은 꼭 실천했다. 무릇 그와 더불어 교유하는 자는 호걸이나 크게 교활한 자가 아닌 자가 없었다. 그의 집안에는 수천만 금을 축적해 두었으며 식객이 매일 수십에서 1백여 명에 달했다. 전원 중에 저수지를 만들어 논밭에 관개가 가능하게 했다. 그의 종족과 빈객들이 권세를 확장하고 이익을 독점하며 영천()에서 횡행했기 때문에 영천의 아이들은 그를 이렇게 노래했다.

영수()가 맑으면 관씨()는 평안하네.

영수가 탁하면 관씨는 멸족당하리.

관부는 비록 재산은 많았지만 세력을 잃고 집에 한가롭게 머물렀기 때문에 경상(), 시중(), 빈객들이 점차 줄어들었다. 위기후도 세력을 잃은 뒤에는 관부를 의지로 삼았고, 평소 자기를 앙모하다가 권세를 잃자 자신을 저버리는 자들을 배척하고자 했다. 관부 역시 위기후에 의지해 열후나 종실과 교류하여 명성을 높이고자 했다.

두 사람은 서로 이끌고 존중하는 것이 마치 부자지간과도 같았다. 서로 의기가 투합해 매우 기뻐하며 싫증내지 않았고 서로 늦게 알게 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관부가 상중()에 승상을 방문한 적이 있다. 승상은 마음대로 편하게 말했다. “나는 중유(: 관부)와 더불어 위기후를 방문하고 싶었는데, 마침 중유가 상복을 입고 있어서 가지 못했네.”

관부가 말했다. “장군께서 영광스럽게도 위기후의 집에 행차하려는데, 제가 어찌 감히 거상을 핑계 삼아 마다하겠습니까? 원컨대 제가 위기후에게 연회준비를 하게 알리겠습니다. 장군께서는 내일 아침에 왕림해 주십시오.”

무안후가 승낙했다. 관부는 위기후에게 무안후의 방문약속을 그대로 전했다. 위기후와 그 부인은 술과 고기를 많이 사고 밤인데도 집안청소를 해고 장막과 기구를 마련하여 새벽 무렵까지 주연 준비를 마쳤다. 날이 밝아오자 사람을 시켜 영접하게 했다. 그러나 해가 중천에 이르도록 승상은 오지 않았다.

위기후가 관부에게 말했다. “승상이 설마 약속을 잊었단 말인가?” 관부도 기분이 나쁜 듯이 말했다. “관부가 상복을 입고도 청했는데, 승상은 마땅히 왔어야 합니다.”

이에 수레를 타고 자신이 친히 승상을 맞으러 갔다. 승상은 전날에 단지 농담 삼아 관부에게 승낙했던 것으로 실제 주연에 갈 생각은 없었다. 관부가 승상의 집문 앞에 이르렀을 때에도 승상은 아직 침상에서 누워 있었다.

이에 관부가 들어가서 승상을 알현하고 말했다.

“장군께서 어제 영광스럽게도 위기후를 방문하시겠다고 허락하셔서 위기후 부부는 술과 음식을 갖추어놓고 새벽부터 지금까지 감히 식사도 못하고 있습니다.”

무안후는 깜짝 놀라척하면서 사과하며 말했다. “내가 어제 취해 당신과 했던 약속을 잊었네.” 그리고 바로 수레를 타고 갔는데, 또 가는 것도 아주 느려 관부는 더더욱 부화가 치밀었다. 술자리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관부가 일어나 한바탕 춤을 추고 나서는 승상에게 권했다.

그러나 승상은 사양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자, 관부는 앉은 자리에서 승상을 비꼬는 말을 했다. 위기후는 바로 관부를 부축해 데리고 나가고, 승상에게 대신 사과했다. 승상은 마침내 날이 어두울 때까지 술을 마시고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갔다.

승상이 언젠가 한번은 적복()을 시켜 위기후에게 성 남쪽 전답을 요구했다. 위기후는 크게 원망하며 말했다.

“이 늙은 노비가 비록 버림받았고 장군이 비록 귀한 신분 되었지만 어떻게 권세로써 나의 전답을 빼앗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승상의 요구를 허락하지 않았다.

관부가 이 말을 들은 후에 노하여 적복을 욕했다. 적복은 무안후와 위기후의 사이에 틈이 벌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에 사실을 속이고 스스로 승상에게 좋은 말로 올렸다. “위기후는 나이가 많아서 곧 죽을 것입니다. 참기 어려운 것도 아니니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무안후는 위기후와 관부가 실제로는 분노하여 전답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매우 화를 내며 말했다.

“위기후의 아들이 일찍이 사람을 죽였을 때, 나 전분이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내가 위기후를 섬겨 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어찌 밭뙈기 몇 마지기를 아낀다는 말인가? 또 관부는 무슨 참견하는 것인가? 내 다시는 전답을 요구하지 않겠다.”

무안후는 이로부터 관부와 위기후를 크게 원망했다.

원광() 4년(서기전 131년) 봄, 승상은 황제에게 관부의 집이 영천에 있으면서 제멋대로 세도를 부려 백성들이 매우 고통을 받는다고 아뢰고 수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이에 황제가 말했다. “이런 사건은 승상의 책무인데, 무엇 때문에 청원을 하는가?” 하지만 관부 역시 승상의 비밀스러운 부정을 파악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승상이 불법적인 수단으로 이익을 구한 것이나 회남왕()의 황금을 받고 밀담을 나눈 것 등이다.

이 때 빈객들이 중간에서 나서서 조정해 마침내 쌍방이 공방을 멈추고 피차간 화해했다.

여름에 승상이 연왕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태후가 조서를 내려 열후와 종실에게 모두 가서 축하하라고 명을 내렸다.

위기후는 관부를 방문하여 더불어 가려고 했다. 이에 관부가 사양하면서 말했다. “제가 여러 차례 술에 취해 실수하여 승상에게 죄를 얻었습니다. 또 승상은 지금까지 저와 틈이 남아있습니다.” 위기후는 말했다. “그 일은 이미 해결되었네.” 그러고는 억지로 그를 데리고 갔다.

주연이 무르익자 무안후가 일어나서 축배를 들었다. 그러나 좌중이 모두 자리에서 벗어나 엎드려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조금 뒤에 위기후가 축배를 들자 단지 위기후와 친분이 있는 사람만 자리를 옮겨 엎드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좌석에 무릎을 붙이고 허리만 세울 뿐이었다.

이에 관부는 기분이 언짢았다. 그가 일어나 차례대로 술잔을 올렸는데, 그 차례가 서가 무안후에 이르렀을 때에 무안후는 제 자리에 앉아서 단지 무릎을 세우며 말했다.

“가득 잔을 채우면 마실 수 없는데.” 관부는 화가 났지만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장군은 귀인이시니 제가 이렇게 드리는 것입니다!”

무안후는 응대하지 않았다. 차례로 술잔을 올려 순서가 임여후() 관현에게 이르렀다. 이 때 임여후는 한창 정불식()과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리를 피해 예의를 차리지도 않았다. 관부는 계속 화를 참다가 임여후에게 폭발시키며 말했다.

“평소에는 정불식이 한 푼의 가치도 없다고 비방하더니 오늘은 어른이 축배를 권하는데도 계집애처럼 소곤댄단 말인가!”

무안후가 관부에게 말했다. “정불식과 이광()은 모두 동서 두 궁전의 위위()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 속에서 정장군을 모욕을 주는데, 관부는 어찌 이장군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는가?”

관부가 말했다. “오늘 머리를 자르고 가슴에 구멍을 낸다고 해도 나는 신경 쓰지 않겠소. 정장군이나 이장군을 어찌 염두해 두겠소!” 이에 좌중 있던 사람들은 일어나 측간에 가는 척하면서 하나 둘씩 떠나갔다. 위기후도 나가면서 관부에게 나오라고 손짓을 보냈다.

무안후는 마침내 분노하여 말했다. “이것은 내가 관부를 교만하게 만든 죄이다.” 곧바로 기병에게 명령을 내려 관부를 억류시켰다. 관부는 나갈 생각이었지만 나갈 수가 없었다. 적복이 일어나 관부를 위해 대신 사과하면서 더불어 관부의 목덜미를 누르며 사과하게 시켰다. 그러나 관부는 더욱 화를 내며 사죄하지 않았다. 무안후는 곧 기병들로 하여금 관부를 포박해 객방()에 두었다. 그리고 장사()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오늘 종실 빈객들이 연회에 참가한 것은 태후의 조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서 관부가 태후의 조칙에 의해서 모인 좌중을 모욕해 ‘불경죄()’를 범했다고 탄핵해 특별하게 감옥 안에 붙잡아두었다. 마침내 그의 이전 일까지 조사하고, 관리를 보내 조를 나누어 관씨 일족을 잡아들이게 했는데, 모두 기시()의 죄명이었다.

위기후는 크게 부끄러워하며 자금을 풀어 빈객들에게 전분에게 청원하게 했으나 관부를 석방시킬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무안후의 관리들이 모두 다 그의 눈과 귀가 되어 살피니 관씨들은 모두 도망가 숨어버렸다. 관부는 구금되어 있어 결국 무안후의 비밀스러운 일을 고발할 수 없었다.

위기후는 앞장서서 관부를 구하고자 애썼다. 그의 부인이 위기후에게 권했다.

“관장군은 승상에게 죄를 짓고, 태후의 집안의 사람을 건드렸습니다. 어떻게 구할 수 있겠습니까?”

위기후가 말했다. “후작의 신분은 내 스스로 쟁취한 것이니 지금 그것을 잃어도 유감이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종국에 관부를 홀로 죽게 하고, 나 홀로 살아남을 수는 없다.”

이에 집안사람들을 속이고 몰래 나가 황제에게 상서를 올렸다. 황제가 곧 그를 궁으로 불려 들어가게 되자 관부가 취중에 한 실언한 정황을 상세하게 말하고 그 일로서 관부를 사형에 처할 벌할 만한 일이 못 된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여겨 위기후에게 음식을 하사하고 이렇게 말했다. "동궁()에 가서 조정에서 공개적으로 그를 변론하라."

위기후는 동궁에 가서 관부의 장점을 크게 칭찬하여 알리고, 그가 취해서 단순한 불경죄를 지은 것뿐인데 승상이 다른 일로써 그에게 무고하게 죄를 씌운 것이라고 말했다. 무안후 또한 그동안 관부가 저지른 횡포와 방자했던 소행을 크게 비방한 다음 그는 대역무도한 죄를 지었다고 주장했다.

위기후은 아무리 생각해보니 별다른 도리가 없을 것 같아 승상의 단점과 허물을 거론하였다. 무안후가 말했다.

“천하가 다행히 태평무사합니다. 신은 황제의 심복되는 자리를 얻었는데, 좋아하는 것은 음악과 개와 말, 밭과 집뿐입니다. 신이 아끼는 것은 광대와 솜씨 좋은 공장()과 같은 무리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위기후나 관부 등처럼 천하의 호걸과 장사를 초청해 더불어 밤낮으로 의론하며 내심으로 조정에 불만을 품고 비방하거나 고개를 들고 하늘을 살피지 않으면 땅을 굽어보면서 동 서 두 궁궐 사이를 흘겨보며 요행이 천하에 변고가 나서 자신들이 큰 공을 세우기를 바라고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신은 위기후 등이 하는 일을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이에 황제는 조정의 대신들에게 물었다. “두 사람 중에 누구 주장이 옳은가?” 어사대부 한안국이 아뢰었다. “위기후가 ‘관부는 자신의 부친이 나라를 위해서 죽게 되자 몸에 창을 지니고 강대한 오나라 군영 속으로 달려 들어갔고, 몸에 수십 군데의 상처를 입어 그 명성이 삼군()에 알려졌으니 이는 천하의 장사가 분명합니다. 만약에 특별하게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단지 술자리에서 취하여 다툰 것으로서 다른 허물까지 끌어 사형에 처할 것은 못 된다.’라고 했는데, 이는 위기후의 말은 옳습니다.

승상은 또한 '관부는 교활한 무리들과 왕래하며 백성들을 압박하고 집에는 거만()의 재산을 쌓아두고 영천에서 세도를 부리며, 종실을 능욕하고 황실의 골육지친()을 욕보였습니다. 이는 이른바 나무 가지가 나무보다 크며 종아리가 넓적다리보다 크면 부러지지 않으면 반드시 갈라진다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승상의 말 또한 옳습니다. 오직 영명하신 황제께서만 이 사건을 판결하실 수 있습니다.”

주작도위() 급암()은 위기후가 옳다고 했다. 내사() 정당시()도 위기후가 옳다고 했다가 뒤에는 자신의 의견을 견지하지 못했다. 나머지는 모두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황제가 내사를 꾸짖으며 말했다. “그대는 평소에 여러 차례 위기후와 무안후의 장단점을 말하더니 오늘 조정의 변론에서는 어찌하여 마치 수레 끌채 아래의 망아지처럼 움츠러들어 있는가? 짐은 그대들과 같은 무리까지 처벌할 것이다!” 그리고는 조회를 마치고 일어나 궁내로 들어가서 태후에게 음식을 올렸다.

태후 역시 이미 사람을 보내어 조정에서 일을 알아보게 했는데, 그 사람이 조정에서 변론한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그 소식을 듣고 태후는 화가 나서 식사는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는데도 남들이 감히 나의 동생을 깔아뭉개니, 가령 내가 죽고 나면 모두 어육()같은 신세가 될 것이오. 또 황제께서는 어찌 석두처럼 자기 주장이 없단 말인가! 이들은 요행히 황제가 살아 계셔도 자기 의견이 없이 흔들리거늘 가령 황제가 돌아가신 뒤에는 이런 무리 중에 어찌 믿겠는가?"

황제가 사과해 말했다. "모두 종실의 외척이기 때문에 조정에서 그것을 논변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옥리가 해결했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이때 낭중령 석건()이 황제를 위해서 위기후와 무안후 두 사람의 사정을 진술하였다.

무안후는 조회가 마친 뒤에 지거문()을 나와서 어사대부 한안국을 불러 수레에 같이 타고 가면서 성내며 말했다.

“나는 장유(: 한안국의 자)와 함께 늙은 퇴물 관료를 대적하려 했는데, 어찌해하는 주저하며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단 말이오?”

한안국은 조금 있다가 뒤에 승상에게 말했다. “승상은 어찌 자중자애하지 않습니까? 저 위기후가 승상을 비방하면, 승상께서는 관을 벗고 승상의 인끈을 풀어 황상께 돌려드리며 ‘신은 외척인 덕으로 요행히 승상 직을 얻었습니다만 진실로 그 적임이 못 됩니다. 위기후의 말이 다 옳습니다.’라고 말씀하셨어야 합니다. 그렇게 했다면 황제께서는 반드시 승상이 겸양의 미덕을 칭찬하면 승상을 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위기후는 틀림없이 속으로 부끄러워 문을 닫아걸고 혀를 깨물어 자살했을 것입니다. 지금 남이 승상을 비방한다고 승상 또한 남을 비방하니 이런 것은 마치 장사치나 계집애들 말다툼 같은 것이 아닙니까? 어떻게 그리도 대체의 이치를 모르십니까?”

무안후는 사죄하며 말했다. “쟁론할 때에 마음이 급해 마땅히 이러한 큰 대책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황제가 어사()를 시켜 문서에 관부의 죄행을 조사하여 기록하고, 더불어 위기후가 관부에 대해서 한 말을 중에 상당 부분 부합되지 않아 기만죄에 해당했기에 위기후를 탄핵해 도사공()의 특별 감옥에 가두었다. 효경제 때 위기후는 일찍이 유조()를 받았는데, 유조에는 이렇게 써져 있었다. “만약에 너에게 불편한 사정이 생기면 너는 편의대로 황제에게 보고할 수 있다.”

위기후는 자기는 구금되고, 관부는 죄가 반드시 멸족에 이를 것 같은데, 이처럼 사태가 날로 다급해지는데, 여러 공()들 중에서 누구도 감히 황제에게 이 사건을 감히 다시 밝혀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위기후는 이에 조카를 시켜 황제에게 상서를 올려 유조에 관해 일을 말하게 해 다시 불려 들어가 황제를 알현할 기회를 가지기를 원했다. 상서가 황제에게 올라왔는데 상서()의 문서를 조사해보니, 경제가 임종 전에 남긴 유조가 없었다. 이 조서는 단지 위기후의 집에만 보관해 위기후의 가신이 그것을 봉인해두고 있었다.

이에 위기후는 경제의 유조를 위조했다고 탄핵되었는데, 그 죄는 마땅히 기시()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원광 5년(서기전 130년) 10월에 관부 및 그 일족은 모두 처형당했다. 위기후는 한참 뒤에야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소식을 듣자 분개하여 중풍까지 앓게 되었고 음식을 끊고 죽으려고 했다. 어떤 사람이 황제가 위기후를 죽일 뜻은 없다는 말을 듣고 위기후는 다시 음식을 들고 병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그를 죽이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를 헐뜯는 유언비어가 떠돌아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어 이로 인해서 12월 그믐에 위기후과 그 일족은 위성()에서 참수되었다.

그해 봄에 무안후는 병이 났는데, 큰 소리로 사죄한다는 말을 외쳤다. 귀신을 볼 수 있는 무당을 시켜 그를 몸 상태를 보게 하니 위기후와 관부가 함께 그를 지키고 서서 죽이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무안후는 죽고, 그의 아들 염()이 작위를 계승했다. 원삭() 3년(서기전 126년), 무안후 전염은 짧은 옷을 입고 입궁했다는 불경죄에 걸려 작위도 잃었다.

회남왕() 유안()이 모반을 꾀하다 발각되어 죄로 다스려졌다. 이전에 회남왕이 입조했을 때, 무안후는 태위로서 회남왕을 영접하러 패상()까지 가서 왕에게 말했다.

“황제께는 아직 태자가 없으신데 대왕께서 가장 현명하시고 또한 고제()의 손자이십니다. 그런즉 황제께서 붕어하시면 대왕이 즉위하지 않으면 누가 맡을 수 있겠습니까!”

회남왕은 크게 기뻐하며 황금과 재물을 후하게 주었다. 황제는 위기후의 일이 발생한 때부터 무안후가 정직하지 않다고 여겼지만 다만 왕태후와의 연고 때문에 그냥 덮어두고 있었다. 회남왕이 무안후에게 황금을 준 일을 듣자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가령 무안후가 살아 있었다면 마땅히 멸족 당했을 것이다.”

 

評論

太史公曰:魏其、武安皆以外戚重,灌夫用一時決筴而名顯。魏其之舉以吳楚,武安之貴在日月之際。然魏其誠不知時變,灌夫無術而不遜,兩人相翼,乃成禍亂。武安負貴而好權,杯酒責望,陷彼兩賢。嗚呼哀哉!遷怒及人,命亦不延。眾庶不載,竟被惡言。嗚呼哀哉!禍所從來矣!

【索隱述贊】竇嬰、田蚡,勢利相雄。咸倚外戚,或恃軍功。灌夫自喜,引重其中。意氣杯酒,辟睨兩宮。事竟不直,冤哉二公!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위기후()와 무안후()는 모두 외척으로서 존귀하게 되었고, 관부()는 한 번의 용맹심으로 명성을 드날리게 되었다. 위기후가 중용된 것은 오와 초의 반란 때문이었고, 무안후가 존귀하게 된 것은 한 무제()가 막 즉위해 왕태후()가 섭정할 때였다.

 

그러나 위기후는 참으로 시세 변화를 알지 못했고 관부는 학식이 없고 겸손하지도 못했으니, 두 사람은 서로 도와가며 이런 화란()을 빚었다. 무안후는 존귀한 신분을 등에 업고 권술을 좋아했으니 한 잔 술의 분노로 인해 꾸짖는 것으로 저 두 어진 사람을 모함을 당했다. 오호, 슬프도다! 관부는 분노를 옮기어 남에게 이르게 하며 자신의 수명 또한 연장하지 못했다. 뭇 사람들이 옹호하지 않으니 마침내 나쁜 말을 듣게 되었다. 오호, 슬프도다! 재앙은 반드시 그 유래가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