吳王濞列傳
吳王濞者,高帝兄劉仲之子也。高帝已定天下七年,立劉仲為代王。而匈奴攻代,劉仲不能堅守,棄國亡,閒行走雒陽,自歸天子。天子為骨肉故,不忍致法,廢以為郃陽侯。高帝十一年秋,淮南王英布反,東并荊地,劫其國兵,西度淮,擊楚,高帝自將往誅之。劉仲子沛侯濞年二十,有氣力,以騎將從破布軍蘄西,會甀,布走。荊王劉賈為布所殺,無後。上患吳、會稽輕悍,無壯王以填之,諸子少,乃立濞於沛為吳王,王三郡五十三城。已拜受印,高帝召濞相之,謂曰:「若狀有反相。」心獨悔,業已拜,因拊其背,告曰:「漢後五十年東南有亂者,豈若邪?然天下同姓為一家也,慎無反!」濞頓首曰:「不敢。」
會孝惠、高后時,天下初定,郡國諸侯各務自拊循其民。吳有豫章郡銅山,濞則招致天下亡命者(益)[盜]鑄錢,煮海水為鹽,以故無賦,國用富饒。
孝文時,吳太子入見,得侍皇太子飲博。吳太子師傅皆楚人,輕悍,又素驕,博,爭道,不恭,皇太子引博局提吳太子,殺之。於是遣其喪歸葬。至吳,吳王慍曰:「天下同宗,死長安即葬長安,何必來葬為!」復遣喪之長安葬。吳王由此稍失藩臣之禮,稱病不朝。京師知其以子故稱病不朝,驗問實不病,諸吳使來,輒系責治之。吳王恐,為謀滋甚。及後使人為秋請,上復責問吳使者,使者對曰:「王實不病,漢系治使者數輩,以故遂稱病。且夫『察見淵中魚,不祥』。今王始詐病,及覺,見責急,愈益閉,恐上誅之,計乃無聊。唯上棄之而與更始。」於是天子乃赦吳使者歸之,而賜吳王几杖,老,不朝。吳得釋其罪,謀亦益解。然其居國以銅鹽故,百姓無賦。卒踐更,輒與平賈。歲時存問茂材,賞賜閭里。佗郡國吏欲來捕亡人者,訟共禁弗予。如此者四十餘年,以故能使其眾。
晁錯為太子家令,得幸太子,數從容言吳過可削。數上書說孝文帝,文帝寬,不忍罰,以此吳日益橫。及孝景帝即位,錯為御史大夫,說上曰:「昔高帝初定天下,昆弟少,諸子弱,大封同姓,故王孽子悼惠王王齊七十餘城,庶弟元王王楚四十餘城,兄子濞王吳五十餘城:封三庶孽,分天下半。今吳王前有太子之郄,詐稱病不朝,於古法當誅,文帝弗忍,因賜几杖。德至厚,當改過自新。乃益驕溢,即山鑄錢,煮海水為鹽,誘天下亡人,謀作亂。今削之亦反,不削之亦反。削之,其反亟,禍小;不削,反遲,禍大。」三年冬,楚王朝,晁錯因言楚王戊往年為薄太后服,私姦服舍,請誅之。詔赦,罰削東海郡。因削吳之豫章郡、會稽郡。及前二年趙王有罪,削其河閒郡。膠西王卬以賣爵有姦,削其六縣。
漢廷臣方議削吳。吳王濞恐削地無已,因以此發謀,欲舉事。念諸侯無足與計謀者,聞膠西王勇,好氣,喜兵,諸齊皆憚畏,於是乃使中大夫應高誂膠西王。無文書,口報曰:「吳王不肖,有宿夕之憂,不敢自外,使喻其驩心。」王曰:「何以教之?」高曰:「今者主上興於姦,飾於邪臣,好小善,聽讒賊,擅變更律令,侵奪諸侯之地,徵求滋多,誅罰良善,日以益甚。里語有之,『舐糠及米』。吳與膠西,知名諸侯也,一時見察,恐不得安肆矣。吳王身有內病,不能朝請二十餘年,嘗患見疑,無以自白,今脅肩累足,猶懼不見釋。竊聞大王以爵事有適,所聞諸侯削地,罪不至此,此恐不得削地而已。」王曰:「然,有之。子將柰何?」高曰:「同惡相助,同好相留,同情相成,同欲相趨,同利相死。今吳王自以為與大王同憂,願因時循理,棄軀以除患害於天下,億亦可乎?」王瞿然駭曰:「寡人何敢如是?今主上雖急,固有死耳,安得不戴?」高曰:「御史大夫晁錯,熒惑天子,侵奪諸侯,蔽忠塞賢,朝廷疾怨,諸侯皆有倍畔之意,人事極矣。彗星出,蝗蟲數起,此萬世一時,而愁勞聖人之所以起也。故吳王欲內以晁錯為討,外隨大王後車,彷徉天下,所鄉者降,所指者下,天下莫敢不服。大王誠幸而許之一言,則吳王率楚王略函谷關,守滎陽敖倉之粟,距漢兵。治次舍,須大王。大王有幸而臨之,則天下可并,兩主分割,不亦可乎?」王曰:「善。」高歸報吳王,吳王猶恐其不與,乃身自為使,使於膠西,面結之。
膠西群臣或聞王謀,諫曰:「承一帝,至樂也。今大王與吳西鄉,弟令事成,兩主分爭,患乃始結。諸侯之地不足為漢郡什二,而為畔逆以憂太后,非長策也。」王弗聽。遂發使約齊、菑川、膠東、濟南、濟北,皆許諾,而曰「城陽景王有義,攻諸呂,勿與,事定分之耳」。
諸侯既新削罰,振恐,多怨晁錯。及削吳會稽、豫章郡書至,則吳王先起兵,膠西正月丙午誅漢吏二千石以下,膠東、菑川、濟南、楚、趙亦然,遂發兵西。齊王後悔,飲藥自殺,畔約。濟北王城壞未完,其郎中令劫守其王,不得發兵。膠西為渠率,膠東、菑川、濟南共攻圍臨菑。趙王遂亦反,陰使匈奴與連兵。
七國之發也,吳王悉其士卒,下令國中曰:「寡人年六十二,身自將。少子年十四,亦為士卒先。諸年上與寡人比,下與少子等者,皆發。」發二十餘萬人。南使閩越、東越,東越亦發兵從。
孝景帝三年正月甲子,初起兵於廣陵。西涉淮,因并楚兵。發使遺諸侯書曰:「吳王劉濞敬問膠西王、膠東王、菑川王、濟南王、趙王、楚王、淮南王、衡山王、廬江王、故長沙王子:幸教寡人!以漢有賊臣,無功天下,侵奪諸侯地,使吏劾系訊治,以僇辱之為故,不以諸侯人君禮遇劉氏骨肉,絕先帝功臣,進任姦宄,詿亂天下,欲危社稷。陛下多病志失,不能省察。欲舉兵誅之,謹聞教。敝國雖狹,地方三千里;人雖少,精兵可具五十萬。寡人素事南越三十餘年,其王君皆不辭分其卒以隨寡人,又可得三十餘萬。寡人雖不肖,願以身從諸王。越直長沙者,因王子定長沙以北,西走蜀、漢中。告越、楚王、淮南三王,與寡人西面;齊諸王與趙王定河閒、河內,或入臨晉關,或與寡人會雒陽;燕王、趙王固與胡王有約,燕王北定代、雲中,摶胡眾入蕭關,走長安,匡正天子,以安高廟。願王勉之。楚元王子、淮南三王或不沐洗十餘年,怨入骨髓,欲一有所出之久矣,寡人未得諸王之意,未敢聽。今諸王茍能存亡繼絕,振弱伐暴,以安劉氏,社稷之所願也。敝國雖貧,寡人節衣食之用,積金錢,彊兵革,聚穀食,夜以繼日,三十餘年矣。凡為此,願諸王勉用之。能斬捕大將者,賜金五千斤,封萬戶;列將,三千斤,封五千戶;裨將,二千斤,封二千戶;二千石,千斤,封千戶;千石,五百斤,封五百戶:皆為列侯。其以軍若城邑降者,卒萬人,邑萬戶,如得大將;人戶五千,如得列將;人戶三千,如得裨將;人戶千,如得二千石;其小吏皆以差次受爵金。佗封賜皆倍軍法。其有故爵邑者,更益勿因。願諸王明以令士大夫,弗敢欺也。寡人金錢在天下者往往而有,非必取於吳,諸王日夜用之弗能盡。有當賜者告寡人,寡人且往遺之。敬以聞。」
七國反書聞天子,天子乃遣太尉條侯周亞夫將三十六將軍,往擊吳楚;遣曲周侯酈寄擊趙;將軍欒布擊齊;大將軍竇嬰屯滎陽,監齊趙兵。
吳楚反書聞,兵未發,竇嬰未行,言故吳相袁盎。盎時家居,詔召入見。上方與晁錯調兵笇軍食,上問袁盎曰:「君嘗為吳相,知吳臣田祿伯為人乎?今吳楚反,於公何如?」對曰:「不足憂也,今破矣。」上曰:「吳王即山鑄錢,煮海水為鹽,誘天下豪桀,白頭舉事。若此,其計不百全,豈發乎?何以言其無能為也?」袁盎對曰:「吳有銅鹽利則有之,安得豪桀而誘之!誠令吳得豪桀,亦且輔王為義,不反矣。吳所誘皆無賴子弟,亡命鑄錢姦人,故相率以反。」晁錯曰:「袁盎策之善。」上問曰:「計安出?」盎對曰:「願屏左右。」上屏人,獨錯在。盎曰:「臣所言,人臣不得知也。」乃屏錯。錯趨避東廂,恨甚。上卒問盎,盎對曰:「吳楚相遺書,曰『高帝王子弟各有分地,今賊臣晁錯擅適過諸侯,削奪之地』。故以反為名,西共誅晁錯,復故地而罷。方今計獨斬晁錯,發使赦吳楚七國,復其故削地,則兵可無血刃而俱罷。」於是上嘿然良久,曰:「顧誠何如,吾不愛一人以謝天下。」盎曰:「臣愚計無出此,願上孰計之。」乃拜盎為太常,吳王弟子德侯為宗正。盎裝治行。後十餘日,上使中尉召錯,紿載行東市。錯衣朝衣斬東市。則遣袁盎奉宗廟,宗正輔親戚,使告吳如盎策。至吳,吳楚兵已攻梁壁矣。宗正以親故,先入見,諭吳王使拜受詔。吳王聞袁盎來,亦知其欲說己,笑而應曰:「我已為東帝,尚何誰拜?」不肯見盎而留之軍中,欲劫使將。盎不肯,使人圍守,且殺之,盎得夜出,步亡去,走梁軍,遂歸報。
條侯將乘六乘傳,會兵滎陽。至雒陽,見劇孟,喜曰:「七國反,吾乘傳至此,不自意全。又以為諸侯已得劇孟,劇孟今無動。吾據滎陽,以東無足憂者。」至淮陽,問父絳侯故客鄧都尉曰:「策安出?」客曰:「吳兵銳甚,難與爭鋒。楚兵輕,不能久。方今為將軍計,莫若引兵東北壁昌邑,以梁委吳,吳必盡銳攻之。將軍深溝高壘,使輕兵絕淮泗口,塞吳馕道。彼吳梁相敝而糧食竭,乃以全彊制其罷極,破吳必矣。」條侯曰:「善。」從其策,遂堅壁昌邑南,輕兵絕吳馕道。
吳王之初發也,吳臣田祿伯為大將軍。田祿伯曰:「兵屯聚而西,無佗奇道,難以就功。臣願得五萬人,別循江淮而上,收淮南、長沙,入武關,與大王會,此亦一奇也。」吳王太子諫曰:「王以反為名,此兵難以藉人,藉人亦且反王,柰何?且擅兵而別,多佗利害,未可知也,徒自損耳。」吳王即不許田祿伯。
吳少將桓將軍說王曰:「吳多步兵,步兵利險;漢多車騎,車騎利平地。願大王所過城邑不下,直棄去,疾西據雒陽武庫,食敖倉粟,阻山河之險以令諸侯,雖毋入關,天下固已定矣。即大王徐行,留下城邑,漢軍車騎至,馳入梁楚之郊,事敗矣。」吳王問諸老將,老將曰:「此少年推鋒之計可耳,安知大慮乎!」於是王不用桓將軍計。
吳王專并將其兵,未度淮,諸賓客皆得為將、校尉、候、司馬,獨周丘不得用。周丘者,下邳人,亡命吳,酤酒無行,吳王濞薄之,弗任。周丘上謁,說王曰:「臣以無能,不得待罪行閒。臣非敢求有所將,願得王一漢節,必有以報王。」王乃予之。周丘得節,夜馳入下邳。下邳時聞吳反,皆城守。至傳舍,召令。令入戶,使從者以罪斬令。遂召昆弟所善豪吏告曰:「吳反兵且至,至,屠下邳不過食頃。今先下,家室必完,能者封侯矣。」出乃相告,下邳皆下。周丘一夜得三萬人,使人報吳王,遂將其兵北略城邑。比至城陽,兵十餘萬,破城陽中尉軍。聞吳王敗走,自度無與共成功,即引兵歸下邳。未至,疽發背死。
二月中,吳王兵既破,敗走,於是天子制詔將軍曰:「蓋聞為善者天報之以福;為非者天報之以殃。高皇帝親表功德,建立諸侯,幽王、悼惠王絕無後,孝文皇帝哀憐加惠,王幽王子遂、悼惠王子卬等,令奉其先王宗廟,為漢藩國,德配天地,明并日月。吳王濞倍德反義,誘受天下亡命罪人,亂天下幣,稱病不朝二十餘年,有司數請濞罪,孝文皇帝寬之,欲其改行為善。今乃與楚王戊、趙王遂、膠西王卬、濟南王辟光、菑川王賢、膠東王雄渠約從反,為逆無道,起兵以危宗廟,賊殺大臣及漢使者,迫劫萬民,夭殺無罪,燒殘民家,掘其丘冢,甚為暴虐。今卬等又重逆無道,燒宗廟,鹵御物,朕甚痛之。朕素服避正殿,將軍其勸士大夫擊反虜。擊反虜者,深入多殺為功,斬首捕虜比三百石以上者皆殺之,無有所置。敢有議詔及不如詔者,皆要斬。」
初,吳王之度淮,與楚王遂西敗棘壁,乘勝前,銳甚。梁孝王恐,遣六將軍擊吳,又敗梁兩將,士卒皆還走梁。梁數使使報條侯求救,條侯不許。又使使惡條侯於上,上使人告條侯救梁,復守便宜不行。梁使韓安國及楚死事相弟張羽為將軍,乃得頗敗吳兵。吳兵欲西,梁城守堅,不敢西,即走條侯軍,會下邑。欲戰,條侯壁,不肯戰。吳糧絕,卒饑,數挑戰,遂夜奔條侯壁,驚東南。條侯使備西北,果從西北入。吳大敗,士卒多饑死,乃畔散。於是吳王乃與其麾下壯士數千人夜亡去,度江走丹徒,保東越。東越兵可萬餘人,乃使人收聚亡卒。漢使人以利啗東越,東越即紿吳王,吳王出勞軍,即使人鏦殺吳王,盛其頭,馳傳以聞。吳王子子華、子駒亡走閩越。吳王之棄其軍亡也,軍遂潰,往往稍降太尉、梁軍。楚王戊軍敗,自殺。
三王之圍齊臨菑也,三月不能下。漢兵至,膠西、膠東、菑川王各引兵歸。膠西王乃袒跣,席槁,飲水,謝太后。王太子德曰:「漢兵遠,臣觀之已罷,可襲,願收大王餘兵擊之,擊之不勝,乃逃入海,未晚也。」王曰:「吾士卒皆已壞,不可發用。」弗聽。漢將弓高侯穨當遺王書曰:「奉詔誅不義,降者赦其罪,復故;不降者滅之。王何處,須以從事。」王肉袒叩頭漢軍壁,謁曰:「臣卬奉法不謹,驚駭百姓,乃苦將軍遠道至于窮國,敢請菹醢之罪。」弓高侯執金鼓見之,曰:「王苦軍事,願聞王發兵狀。」王頓首膝行對曰:「今者,晁錯天子用事臣,變更高皇帝法令,侵奪諸侯地。卬等以為不義,恐其敗亂天下,七國發兵,且以誅錯。今聞錯已誅,卬等謹以罷兵歸。」將軍曰:「王茍以錯不善,何不以聞?(及)[乃]未有詔虎符,擅發兵擊義國。以此觀之,意非欲誅錯也。」乃出詔書為王讀之。讀之訖,曰:「王其自圖。」王曰:「如卬等死有餘罪。」遂自殺。太后、太子皆死。膠東、菑川、濟南王皆死,國除,納于漢。酈將軍圍趙十月而下之,趙王自殺。濟北王以劫故,得不誅,徙王菑川。
初,吳王首反,并將楚兵,連齊趙。正月起兵,三月皆破,獨趙後下。復置元王少子平陸侯禮為楚王,續元王後。徙汝南王非王吳故地,為江都王。
오왕(吳王) 유비(劉濞)는 한 고제(漢高帝)의 형인 유중(劉仲)의 아들이다. 고제가 천하를 평정하고 7년째 되던 해에 유중을 대왕(代王)에 봉했다. 그런데 흉노(匈奴)가 대(代)나라를 공격하자 유중은 굳게 지켜내지 못하고 나라를 버리고 샛길로 도망쳐 낙양(雒陽)으로 들어가 천자에게 자수했다.
고제는 그와 형제간인지라 차마 법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왕위를 폐하고 합양후(郃陽侯)로 강등시켰다.
고제 11년(서기전 196년) 가을, 회남왕(淮南王) 영포(英布)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형(荊)의 땅을 병합하고 그 나라의 군사를 빼앗은 후에 서쪽으로 회수(淮水)를 건너 초(楚)나라를 공격했다. 고제는 친히 군사를 통솔해 그를 토벌하러 갔다. 이 때 유중의 아들 패후(沛侯) 유비(劉濞)는 나이가 불과 스무 살의 나이였는데, 기력이 있어 기장(騎將)으로 종군하여 영포의 군대를 기현(蘄縣)의 서쪽 회추(會甀)에서 격파했다. 패전한 영포는 도망갔다.
이 때에 형왕(荊王) 유고(劉賈)가 영포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그는 후사가 없었다. 고제는 민첩하고 사나운 오(吳)와 회계(會稽) 지역은 사람들이 걱정했으나 이들을 제압할 만한 힘이 있는 왕이 없음을 근심했다. 고제의 여러 아들들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유비를 패후(沛侯)에 세우고 오왕으로 삼아 삼군(三郡) 53성을 다스리게 했다. 고제가 유비에게 이미 왕의 인장을 수여하고 난 뒤에 그를 불러 관상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너의 얼굴에 모반의 상이 있구나.” 그리고는 내심으로 후회했으나 이미 왕으로 봉한 뒤라서 그의 등을 토닥거리며 이렇게 경계의 말을 해주었다.
“한나라에서 앞으로 50년 후에 동남쪽에서 난을 일으키는 자가 있다면 아마도 너일 것이다. 그러나 천하는 이미 유씨 성(姓)의 집안이니, 모반하지 않도록 삼가라!” 비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
한 혜제(漢惠帝), 고후(高后) 때에 이르자 천하가 비로소 안정되었다. 군국(郡國)의 제후들은 각기 자기 백성들을 어루만지는데 힘썼다.
오나라는 예장군(豫章郡)에 구리 광산이 있는데, 유비는 천하의 도망자들을 불러 모아 몰래 돈을 주조했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었다. 그래서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걷지 않아도 나라의 재정은 풍부했다.
효문제(孝文帝) 때였다. 오나라 태자(太子)가 조정에 들어와 천자를 알현하고는 황태자를 모시고 술을 마시며 쌍륙(雙六)놀이를 하였다. 오나라 태자의 스승들은 모두 초나라 출신으로 경박하고 사나웠으며, 오나라 태자 자신도 천성이 교만했다. 쌍륙을 노는 데 길을 다투는 것이 오만불손해 황태자가 쌍륙판을 오나라 태자에게 집어던져 그를 죽여 버렸다.
그리하여 한나라 조정에서는 오나라 태자의 시신을 돌려보내어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그의 시신이 오나라에 당도하자, 오왕은 격분하며 이렇게 말했다. “천하는 모두 같은 유씨(劉氏)의 집안이다. 장안(長安)에서 죽었으면 장안에서 장례를 지내야지 무엇 때문에 꼭 이 먼 곳까지 보내 장례를 치르게 한다는 말인가!”
그러고는 태자의 시신을 다시 장안으로 보내어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이후로 오왕은 그 일로 인해 점차 번신(藩臣)의 예를 지키지 않게 되었고, 걸핏하면 병을 핑계 삼아 입조(入朝)도 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그가 자식의 일 때문에 병을 핑계로 입조하지 않는 것으로 의심하고 조사해보니 사실 병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나라에서 사자들이 오면 자주 붙잡아 문책했다.
오왕은 두려운 마음에 더욱 심하게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후에 가을 정기 입조에 다른 사람을 보내오자 황상은 다시 오나라 사자를 문책했다. 오나라 사자가 대답해 말했다.
“오왕은 실제로 병이 든 것이 아닙니다. 조정에서 오나라의 여러 사신들을 붙잡아두고 문책하므로 두려워서 병이라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무릇 ‘깊은 연못 속의 고기를 살피는 것은 상스럽지 못하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왕이 처음에는 거짓으로 병이라고 했는데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심하게 문책을 받자 더욱 움츠리고 숨어들면서, 황상께서 죽이지 않을까 두려워 부득이 꾀를 낸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황상께서는 옛일은 잊으시고 오왕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천자는 곧 오나라 사자들을 사면해 그들을 돌려보내고 오왕에게는 궤장(几杖)을 하사하며 연로했으니 입조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오왕은 죄를 사면 받게 되어 모반할 생각도 점차 그만 두게 두었다.
그러나 그는 구리와 소금에서 나오는 이득으로써 나라를 다스린 까닭에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걷지 않았고, 사병(士兵)으로 병역에 복무한 자에게 그때마다 대역금(代役金)을 지불했다.
매년 철따라 나라 안의 어진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고 일반 백성들에게도 상품을 하사했다. 다른 군국에서 관리가 와서 도망자를 체포하고자 해도 그들을 비호하며 넘겨주지 않았다.
40여 년 동안 이와 같이 하자 그는 능히 그 무리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무렵에 조조(晁錯)가 태자가령(太子家令)이 되어, 황태자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는 자주 오나라의 국세가 커지고 지은 죄가 있어서 영토를 삭감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또 자주 문제(文帝)에게도 글을 올려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천성이 관대했기에 차마 오나라에 벌을 내리지 못했다. 이에 오나라는 날이 갈수록 제멋대로 굴었다. 경제(景帝)가 즉위하게 되자 조조가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임명되었다.
그는 천자에게 이렇게 상주했다.
“옛날에 고조께서 처음 천하를 평정하셨을 때 형제들은 적고 여러 자제들은 아직 어렸습니다. 그래서 같은 유씨 성을 많이 제후왕으로 봉했습니다. 서자(庶子)인 도혜왕(悼惠王) 유비(劉肥)을 제(齊)나라 70여 성의 왕이 되었고, 서동생인 원왕(元王) 유교(劉交)는 초나라 40여 성의 왕이 되었으며, 형의 아들인 유비를 오나라 50여 성의 왕이 되게 했습니다. 이렇게 세 서얼(庶孽)을 왕에 봉해 천하의 반을 나누어주셨던 것입니다.
지금 오왕은 황제께서 예전에 태자로 있을 때에 생긴 일로 해 틈이 생겨 거짓으로 병을 칭하고는 입조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옛 법에 의하면 당연히 사형에 처해야 할 것인데, 문제께서 차마 처벌하지 못하시고 도리어 궤장을 하사하셨던 것입니다. 은덕이 이토록 두터우니 그는 마땅히 잘못을 고치고 스스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오왕은 더욱 오만방자하게 되어 산의 광산에서는 돈을 주조하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며 천하의 도망자들을 이끌어 모아 반란을 획책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 영토를 삭감해도 모반할 것이며 삭감하지 않아도 모반할 것입니다. 영토를 삭감하면 그 반란의 시기는 빨라지겠지만 화는 작을 것입니다. 삭감하지 않으면 반란의 시기는 느려지겠지만 그 화는 더욱 클 것입니다.”
효경제 3년(서기전 154년) 겨울, 초왕(楚王)이 입조했다. 이에 맞추어 조조는 초왕 유무(劉戊)가 지난날 박태후(薄太后)의 상중(喪中)에 궁중에서 궁녀와 몰래 간음을 저질렀다고 말하며 그에게 죽음을 내리기를 청원했다.
효경제는 조서(詔書)를 내려 죽음의 죄는 사해주었으나, 벌로써 동해군(東海郡)을 삭감했다. 이러한 여세에 맞추어 오나라의 예장군, 회계군을 삭감했다. 또 2년 전에 조왕(趙王) 유수(劉遂)가 지은 죄가 있다고 해 조나라의 하간군(河間郡)을 삭감했다. 교서왕(膠西王) 유앙(劉卬)이 작위를 팔아먹는 비리를 저질렀다 해 그의 여섯 개의 현(縣)을 삭감했다.
한나라 조정의 신하들은 드디어 오나라의 영토를 삭감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오왕 유비는 자기 영토를 삭감당하는 것이 계속될 것을 두려워하다가 이 일을 계기로 계획을 세워 모반할 것을 결심했다.
또한 제후들 중에 족히 더불어 일을 도모할 만한 사람을 생각하던 중에 교서왕 유앙은 용기가 있고 기개를 중시하며 용병을 좋아해 제나라 지역의 여러 제후들이 두려워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중대부(中大夫) 응고(應高)를 사자로 보내어 교서왕을 회유하려했다.
그는 서신을 쓰지 않고 구두(口頭)로 교서왕에게 오왕의 뜻을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왕은 불초하며 조만간 닥쳐올 우환을 걱정하여 감히 남에게 말하지 않고 저를 보내어 그의 호의를 전하게 했습니다.”
교서왕이 말했다. “과인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신다는 것이오?”
응고가 말했다.
“지금 황제께서는 간신에게 현혹을 당하고 사악한 신하에게 가려져 위선을 좋아하시며 참소하는 일삼는 적신(賊臣)의 말을 듣고 계십니다. 이 사악한 신하들은 제멋대로 법령을 고치고 제후의 땅을 침탈하며, 요구해 거두어들이는 바가 점점 많아지고, 선량한 사람을 죽이고 벌하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쌀겨를 핥다 보면 쌀알까지 먹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오와 교서는 모두 이름난 제후국입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조정의 사찰을 당하면 아마 안녕과 자유는 누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오왕은 몸에 속병이 있어 입조하지 못한 지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의심을 받으면서도 스스로 명백하게 증명하지 못함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지금 어깨를 움츠리고 두 발을 오그리며 조심하고 있지만 오히려 용서받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듣건대 대왕께서는 작위에 관한 일로 해 문책 받아 영토를 삭감 당할 것이라는 말이 제후들 사이에서 들리고 있습니다. 이 죄는 영토를 삭감당할 정도는 아니나 오히려 이 일은 영토를 삭감당하는 데서 그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교서왕이 말했다. “그렇소. 그런 일이 있었소. 그대는 과인이 장차 어떻게 처신하면 좋겠소?”
응고가 대답했다.
“미움을 같이하는 자는 서로 돕고, 기호가 같은 자는 서로 붙들어 머무르며, 뜻을 같이하는 자는 함께 이루며, 하고자 하는 일이 같은 자는 서로 같이 달려가며, 이익을 같이하는 자는 서로 생사를 같이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오왕은 스스로 대왕과 근심을 같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시세의 순리를 좇아 몸을 던져 천하에서 근심거리를 제거해주십시오. 생각하면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닙니까?”
교서왕은 깜짝 놀라며 두려운 기색을 띠고 말했다. “과인이 어찌 감히 그런 일을 도모할 수 있겠소? 지금 황상께서 비록 급하게 과인을 압박해도 진실로 죽임을 당할 뿐이지 어찌 따르지 받들지 않을 수 있소!”
응고가 말했다.
“어사대부 조조가 천자를 미혹하고 제후를 봉지를 침탈하며 충신을 덮어 가리고 현사(賢士)의 앞길을 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그에 대한 증오와 원망이 가득하고, 제후들은 모두 배반의 뜻을 품고 있습니다. 이로써 세상의 일이 극한에 이른 것입니다. 하늘에는 혜성이 출몰하고, 땅에는 황충(蝗蟲)이 들끓고 있습니다. 이는 만세(萬世)에 한 번 있는 일로서 만백성이 고생하고 근심하는 지금이야말로 바로 성인(聖人)이 출현할 시기인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오왕은 대내적으로 조조의 토벌을 명분으로 삼고, 대외적으로 대왕의 병거를 따르며 천하를 뛰어다니고자 하는 것입니다. 대왕의 병거가 향하는 곳마다 모두 항복할 것이며 가리키는 곳마다 무두 함락시켜 천하에 감히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대왕께서 다행히 한마디 승낙만 하신다면 오왕은 초왕을 이끌고 함곡관(函谷關)을 공략하고 형양(滎陽) 오창(敖倉)의 양곡을 지켜 한나라 군사를 막으며 군영을 설치하여 대왕을 기다릴 것입니다.
대왕께서 다행히 군영에 왕림해 주신다면 곧 천하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니, 두 대왕께서 천하를 나누어 가지시는 것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교서왕은 “좋소”하고 대답했다. 응고가 돌아가서 오왕에게 보고했다.
오왕은 그래도 교서왕이 그와 행동을 더불어 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자신이 직접 사자가 되어 교서로 가서 교서왕과 대면하고 맹약을 맺었다.
교서의 여러 신하들 중에서 한 사람이 왕이 모의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간했다.
“한 사람의 황제를 섬기는 것은 지극히 편한 일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오나라와 함께 서쪽을 진격하여 설령 대업이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두 군주께서 갈라져 다툴 것이니 근심거리는 여기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제후들의 영토는 한나라 직할 군(郡)의 10분의 2도 안 됩니다. 그럼에도 모반 하시면 왕 태후(太后)마마께 근심하실 것이니 좋은 계획이 아니라고 사료됩니다.”
그러나 교서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제(齊), 치천(菑川), 교동(膠東), 제남(濟南), 제북(濟北) 등에 사신을 보내어 거사에 참여하기로 약속하게 하니 모두 이를 허락했다.
그러면서 이렇게들 말했다. “성양(城陽)의 경왕(景王)은 의리가 있는 사람인지라 일찍이 여씨(呂氏)들을 공격했다. 그를 거사에 참여시키지 말고 일이 성사된 후에 그에게 나누어주면 될 것이다.”
제후들은 이미 조정에서 징벌로써 새로이 영토를 삭감 당했기 때문에 몹시 두려워하면서 조조를 매우 원망했다. 오나라에 회계군과 예장군을 삭감한다는 문서가 도착하자 오왕이 제일 먼저 군사를 일으켰다. 교서왕은 정월(正月) 병오일(丙午日)에 한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2천석(二千石) 이하의 관리들을 모두 죽였다.
이에 교서, 교동, 치천, 제남, 초, 조 역시 그렇게 하고는 드디어 병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진격해 나아갔다. 그러나 제왕 유장려(劉將閭)는 후회하고 약을 마시고 자살해 약속을 어겼다.
제북왕은 성이 무너져 완전하지 못했는데, 그 나라 낭중령(郎中令)이 왕을 협박하며 지켰으므로 병사를 일으키지 못했다.
교서왕이 우두머리가 되어 교동왕, 치천왕, 제남왕은 함께 임치(臨菑)를 포위해 공격했다. 조왕도 마침내 반란에 참가하여 몰래 사자를 흉노(匈奴)로 보내어 그 군대와 연합하려고 했다.
칠국이 군사를 일으키자 오왕은 자신의 병사들을 모두 소집해 온 나라 안에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
“과인은 나이가 62세인데 몸소 장수가 되었다. 과인의 자식은 14세인데 역시 병졸이 되어 선봉에 섰다. 무릇 위로는 과인과 같은 나이에서부터 아래로는 과인의 자식과 같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전투에 나서도록 하라.” 그렇게 하여 20여 만 명을 동원시켰다. 남쪽으로 민월(閩越)과 동월(東越)에 사자를 보냈는데, 이들도 역시 병사를 일으켜 오왕을 뒤따랐다.
효경제 3년(서기전 154년) 정월 갑자일(甲子日)에 오나라가 가장 먼저 광릉(廣陵)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서쪽으로 회수(淮水)를 건너 초나라 군사와 합쳤다. 그리고 제후들에게 사신을 파견해 다음과 같은 격문을 전했다.
“오왕 유비는 교서왕, 교동왕, 치천왕, 제남왕, 조왕, 초왕, 회남왕(淮南王), 형산왕(衡山王), 여강왕(廬江王), 고(故) 장사왕(長沙王)의 왕자께 삼가 여쭙겠습니다. 과인에게 가르침을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한나라 조정에 적신(賊臣)이 있어 천하에 아무런 공로도 없으면서 제후의 영토를 침탈하고 관리를 시켜 탄핵과 구속과 심문과 처벌을 자행하며 제후들을 능멸하고 있습니다. 봉토를 받은 군주에 대한 예로써 유씨의 골육으로 예우하지 않고, 선제(先帝)의 공신의 자손을 끊고 간교한 무리들을 천거하고 임용해 천하를 어지럽히며 사직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병이 많으셔서 올바른 정신을 잃어 능히 잘 살펴보실 수가 없습니다. 이제 군사를 일으켜 저 간악한 무리들을 주살하고자 하니 삼가 가르침을 듣겠습니다.
저희 오나라가 비록 협소하지만 땅이 사방 3천리는 되고 백성이 비록 적기는 하지만 가히 정예 병사 50만 명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과인이 평소 남월(南越)과 사귀기를 30여 년, 그 군왕과 지방 수령들은 모두 군사를 나누어 과인의 뒤를 따르는 것을 거절하지 않으니 또 30여만 명을 더 얻을 수 있습니다. 과인이 비록 불초하지만 이 한 몸 바쳐 여러 왕들을 따르고자 합니다.
남월과 장사의 접경 지역은 장사왕의 왕자께서 장사 이북의 땅을 평정하시고 서쪽으로 촉(蜀), 한중(漢中)으로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남월에 통보해주십시오.
초왕과 회남의 삼왕(三王)께서는 과인과 더불어 서쪽으로 진격하시고 제남왕과 조왕은 하간(河間), 하내(河內)를 평정하시고 임진관(臨晉關)으로 들어가시든지 낙양에서 과인과 합류해주십시오.
연왕(燕王), 조왕은 본래 흉노의 왕과 약속이 있었습니다. 연왕께서는 북쪽에서 대(代), 운중(雲中)을 평정하시고 흉노의 군대를 통솔해 소관(蕭關)으로 들어가십시오. 우리들은 모두 장안으로 진격해 천자를 바로잡아 황실과 조정을 안정시킬 것입니다.
왕들께서는 이것에 힘써주시길 바랍니다. 초 원왕(楚元王)의 왕자와 회남의 3왕들께서는 10여 년 동안 머리 감고 발 씻는 것조차 잊으며 골수에 사무친 원한을 한번 풀고자 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과인이 여러 왕들의 뜻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감히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여러 왕들께서 능히 망하여 후사가 끊어진 나라를 이어지게 하고, 약자를 구제하고 난포한 자를 벌 주셔서 우리 유씨를 안정시킬 수 있다면, 이는 사직이 바라는 바입니다.
저희 오나라가 비록 가난하지만 과인이 입고 먹는 비용을 절약해 돈을 저축하고 무기를 갖추며 식량을 모으는 일을 밤낮으로 하기를 30여 년 동안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번 거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원컨대 여러 왕들께서는 힘써 이를 이용해주십시오.
능히 대장을 베어 죽이거나 사로잡는 사람에게는 황금 5천근을 하사하고 만호(萬戶侯)에 봉할 것입니다. 그것이 일반 장수일 경우에는 황금 3천근과 5천호의 땅을 봉하겠습니다. 비장(裨將)인 경우에는 황금 2천근과 땅 2천 호를 봉하겠으며 2천석의 관리인 경우에는 황금 1천근과 1천호의 땅에 봉하겠습니다. 1천석(千石)의 관리인 경우에는 왕금 5백 근과 5백호의 땅에 봉하고 모두 열후(列侯)로 삼겠습니다. 군대나 혹은 성읍을 이끌고 투항하는 자로서 군졸이 만 명, 읍이 만 호인 경우에는 대장(大將)을 참하거나 포로로 잡는 경우와 같이 대우할 것입니다.
군사가 5천 명이고 읍호(邑戶)가 5천호인 경우에는 일반 장수를 얻은 경우와 같이 대우할 것입니다. 군사가 3천 명이고, 읍이 3천호인 경우에는 부장을 얻은 경우와 같이 대우할 것입니다. 군사가 1천 명이고, 읍이 1천호인 경우에는 2천석의 관리를 얻은 경우와 같이 대우할 것이며, 그 아래 하급 관리들이 투항해오면 모두 등급에 따라 작위와 상금을 줄 것입니다.
그밖에 모든 봉작(封爵)과 상금 지불은 현 한나라 군법에 정한 것보다 두 배로 하겠습니다. 원래 작위와 식읍이 있는 자는 그냥 그대로 두지 않고 다시 새롭게 더 보태어줄 것입니다.
원컨대 여러 왕들께서는 명백하게 사대부들에게 명령을 전해 주십시오. 과인은 감히 속이지 않을 것입니다. 과인의 돈은 천하의 사방에 있으니, 반드시 오나라에서 가져올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 왕들께서 밤낮으로 그것을 써도 다 쓸 수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상금을 지급할 사람이 있으면 과인에게 알려주십시오. 과인이 장차 달려가서 그에게 하사하겠습니다. 삼가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오와 초나라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서가 올라왔지만 아직 한나라에서 군사가 출동하기 전이었다. 두영은 떠나기 전에 오나라 승상을 지냈던 원앙(袁盎)을 천자에게 천거했다. 이때 원앙은 집에 있었는데 천자의 부름을 받고 입조했다.
이때 마침 황제는 조조와 더불어 군대와 군량의 조달에 대해 상의하고 있었다. 황제가 원앙을 보고 물었다. “과거 그대는 오나라의 승상을 지냈는데, 오나라의 대장군 전록백(田祿伯)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소? 그리고 지금 오와 초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에 원앙이 대답했다. “전록백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격파할 수 있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오왕은 산에서 돈을 주조하고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들며 천하의 호걸을 불러 모아 백발이 다 되어 난을 일으켰소. 일이 이와 같은데, 그의 계책이 완벽하지 않다면 어찌 난을 일으켰겠는가? 어찌해 그들이 무능하다고 판단하는가?”
원앙이 대답해 말했다. “오나라가 구리와 소금으로 이익을 보았지만 어찌 천하의 호걸을 불러 모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진실로 오나라가 천하의 호걸을 얻었다고 하면 역시 곧 왕을 보좌해 의를 행할 뿐이지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나라가 불러 모은 것은 모두 무뢰배들로서 도망 다니며 사전(私錢)이나 주조하는 간교한 무리일 뿐입니다. 따라서 서로 이끌어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조조가 말했다. “원앙의 말이 옳습니다.” 황제가 물었다. “무슨 좋은 대책이 있소?”
원앙이 대답해 말했다. “원컨대 좌우의 사람들을 물리쳐주십시오.” 황제가 사람들을 내보냈는데 조조만 혼자 남아 있었다. 원앙이 다시 말했다. “신이 드릴 말씀은 남의 신하된 자가 알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에 황제는 조조까지 물러가게 했다. 조조는 빠른 걸음으로 동상(東廂)으로 물러나면서 속으로 몹시 원망했다. 황제가 마침내 원앙에게 물었다. 원앙은 이렇게 대답했다.
“오와 초나라가 서로 주고받은 글에는 ‘고제(高帝)께서 자제들과 친척을 왕으로 삼아 각각 영토를 나누어주었다. 지금 적신(賊臣) 조조는 제 멋대로 제후들을 처벌해 그 땅을 삭탈하고 있다’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즉 이것으로 반란의 명분을 삼고 서쪽으로 진군하여 더불어 조조를 베어 죽이고 자신들의 옛 땅을 회복하는 것으로 거사는 끝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대책으로는 조조 한 사람을 처형하고 사신을 보내어 오와 초나라 등 칠국을 사면하며 그들이 삭감당한 옛 땅을 회복시켜주면 곧 병사들이 가히 칼날에 피를 물들이는 일없이 모두 해산시킬 수 있습니다.”
황제는 한동안 침묵했다가 마지못해 말했다. “참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짐이 한 사람의 목숨을 아끼지 말고 천하에 사죄해야 한다는 말인가?"
원앙이 말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이것보다 나은 대책은 없습니다. 황제께서는 심사숙고하시길 바랍니다.”
이에 황제는 원앙을 태상(太常)에 임명하고 오왕 동생의 아들 덕후(德侯)를 종정(宗正)으로 삼았다. 원앙은 행장을 갖추어 사자로 길 떠날 준비를 했다. 10여 일이 지나서 황제는 중위(中尉)를 시켜 조조를 불렀다. 중위는 조조를 속여 수레에 태워 동시(東市)로 순행(巡行)했다. 조조는 관복(官服) 차림으로 동시에서 참형을 당했다.
그리고 황제는 곧바로 원앙은 종묘를 받들고, 종정은 황족들을 바르게 보좌한다는 명분으로 이들을 파견해 원앙의 계책대로 오나라에 고하게 했다. 이윽고 그들이 오나라에 당도하자 오와 초나라의 군사들이 이미 양(梁)나라의 병영을 공격하고 있었다. 종정이 오왕의 친척인 까닭으로 먼저 들어가서 오왕을 접견하고 오왕에게 절을 올리고 조서를 받으라고 말했다.
오왕은 원앙이 더불어 왔다는 말을 듣자 또한 그 역시 자신을 설득하려는 것임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으므로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이미 동제(東帝)가 되었는데, 누구에게 절하고 조서를 받으라 하오?” 그리고 원앙을 바로 만나지 않고 단지 그를 군중(軍中)에 머무르게 한 다음 위협을 가하여 자신의 장수로 기용하려고 했다.
원앙이 이를 거절하자 오왕은 사람을 시켜 둘러싸고 지키게 하며 장차 그를 죽이려고 했다. 원앙은 야밤을 틈타 진영을 탈출하여 걸어서 양나라 군영으로 도망쳤다가 마침내 장안으로 돌아가 황제에게 보고했다.
조후(條侯) 주아부가 여섯 마리 말이 이끄는 느린 수레를 타고는 출전하여 형양에 주둔하고 군사들과 합류하려 했다. 그가 낙양에 이르렀을 때 유명한 협객인 극맹(劇孟)을 만나자 기뻐하며 말했다.
“칠국이 반란을 일으켜 내가 육전승(六傳乘)을 타고 이곳에 이르렀는데, 무사하게 당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소. 또 제후들이 이미 당신을 데려갔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당신은 아직까지 움직이지 않았구려. 내가 형양에 주둔해도 형양 동쪽으로는 족히 근심할 만한 인물이 없을 것 같소.”
이윽고 회양(淮陽)에 당도한 조후는 자신의 부친인 강후(絳侯)의 옛날 문객(門客)이었던 등도위(鄧都尉)에게 물었다. “어떤 계책이 있겠습니까?”
문객이 답했다.
“오나라 군사는 대단한 정예 부대이므로 더불어 싸워 승부를 가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초나라 병사는 경무장하여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장군을 위한 계책으로는 군사를 이끌고 동북쪽으로 가서 창읍(昌邑)에서 누벽(壘壁)을 높게 쌓고 방비를 튼튼히 하고 양나라는 오나라에게 내맡겨버리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오나라는 반드시 정예 부대를 총동원해 그를 공격할 것입니다. 장군은 도랑을 깊게 파고 날랜 병사들을 보내어 회사구(淮泗口)를 막아 오나라의 군량 보급로를 차단하십시오. 오나라와 양나라는 서로를 전투에 지치게 하면 오나라는 군량마저 바닥이 날 것입니다. 그 때에 온전하고 강한 군대로 저 극도로 지친 군대를 제압하게 되면 오나라 군대를 반드시 격파할 것입니다.”
조후가 “옳습니다.”라고 했다. 조후는 등도위의 계책을 따라 드디어 창읍 남쪽에 견고한 방벽을 세우고 경무장한 날랜 병사를 보내어 오나라의 군량 보급로를 차단했다.
오왕이 막 출병하려 할 때에 오나라 신하 전록백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이때에 전록백이 아뢰었다. “대군이 모두 한데 모여서 서쪽으로 진격하는데, 특이한 계책이 없으면 공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신은 5만 명의 군사를 얻어 따로 장강(長江), 회수(淮水)를 따라 북상하면서 회남(淮南)과 장사(長沙)를 점령하고 무관(武關)에 입성하여 대왕의 본대와 합류하고자 합니다. 이 또한 하나의 특이한 계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왕의 태자가 반대하며 말했다. “무왕께서는 반란을 명분으로 하고 군사를 일으켰으니, 이 군사들을 남에게 맡기기가 어렵습니다. 이 사람 역시 장차 왕을 배반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또 일단의 군대를 전권을 가지고 통솔하며 단독으로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 이해관계가 많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니, 그것은 단지 명백한 손해일 뿐입니다!”
이에 오왕은 전록백의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오나라의 젊은 장수인 환장군(桓將軍)이 오왕에게 이렇게 유세했다. “오나라는 보병이 많은데, 보병은 험난한 지형이 이점이 됩니다. 한나라는 수레와 기병(騎兵)이 많은데, 수레와 기병은 평지에서는 이롭습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지나치는 성읍들이 함락되지 않으면 곧장 내버려두고 나가시어, 신속하게 서진해 낙양의 무기고를 점거하고 오창의 양식을 군량으로 삼은 뒤에 산하의 험난함을 의지해 제후들에게 호령한다면 비록 함곡관에 들어서지 않으시더라도 천하는 이미 진실로 평정된 것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대왕께서 천천히 진군하시고 성읍을 공략하는데 지체하게 되면 그사이에 한나라 군대의 수레와 기병이 이르러 양나라와 초나라의 들판에 달려가게 되면 일은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오왕은 주위의 연로한 장군들에게 물었더니,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는 어린애가 이 손에 무기를 잡고 적의 예봉으로 돌격할 때나 쓸 만할 작전입니다. 어찌 원대한 계책을 알겠습니까!" 그래서 오왕은 환장군의 계책도 사용하지 않았다.
오왕은 홀로 전권을 가지며 그 군사를 모두 모아서 거느리고 있었다. 오나라의 군대가 아직 회수를 건너기 전이었다. 여러 빈객(賓客)이 모두 장군, 교위(校尉), 척후(斥候), 사마(司馬) 등의 임명했으나 단지 주구(周丘)만이 홀로 임용되지 못했다. 주구는 본래 하비(下邳) 사람으로 오나라로 도망 와서 술장사를 했는데, 품행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나서 오왕이 그를 업신여겨 임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주구가 나아가 왕을 찾아가 왕에게 이렇게 유세했다. “신은 무능해 이번 군중에 있으면서도 어떤 임무도 맡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감히 신이 장수의 직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컨대 대왕에게 한나라의 부절(符節) 하나만 얻기를 원하는 바입니다. 반드시 대왕께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이에 오왕이 주구에게 부절 하나를 구해 주었다. 주구는 부절을 얻어 밤을 틈타 하비로 달려갔다. 이때 하비에서는 오나라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성을 지키고 있었다. 주구는 전사(傳舍)에 도달하자 현령(縣令)을 불러들였다. 현령이 문 안으로 들어오자 주구는 따라온 사람들을 시켜 죄명을 대고는 현령을 참수했다. 이어서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영향력 있는 관리들을 불러 일러 말했다.
“오나라 반군이 곧 여기에 당도할 것이다. 그들이 이곳에 오면 하비는 밥 한 끼 먹는 시간도 안 걸려 도륙 당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앞장서서 항복한다면 집안과 식솔들은 모두 온전하게 보전하고 능력 있는 자는 열후에 봉해질 것이다.”
이에 그들이 나가서 이런 소식을 서로 알리고 다니니 하비 사람들은 모두 항복했다. 이리하여 주구는 하룻밤에 3만 명의 군사를 얻었다. 주구는 사람을 시켜 이러한 사실을 오왕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그 병사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성읍을 공략했다.
성양(城陽)에 이르렀을 때 병사가 10여 만 명으로 불어났다. 주구는 성양 중위군(中尉軍)을 격파했다. 그러나 이때 오왕이 패주했다는 소식이 듣고 더불어 거사에 성공할 사람이 없어 곧 병사들을 이끌고 하비로 돌아갔다. 그러나 하비에 도달하기 전에 그만 등에 종기가 나서 죽고 말았다.
2월중에 오왕의 군대는 이미 격파되어 패주했다. 이때 천자는 장군들에게 제조(制詔)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릇 듣건대 착한 일을 행하는 자는 하늘이 복으로써 그에게 갚아주며, 그릇된 일을 행하는 자는 하늘이 재앙으로써 그에게 갚아준다고 했다. 고조 황제께서 친히 공덕을 표창하여 제후들을 세우셨는데, 유왕(幽王), 도혜왕(悼惠王)은 왕위가 끊어져 뒤를 잇지 못했다. 문제께서는 이를 가엽게 여기시고 은혜를 베풀어 유왕의 아들 수(遂), 도혜왕의 아들 앙(卬) 등을 제후왕으로 세워 그 선왕의 종묘를 받들게 하고 한나라의 번국(藩國)으로 삼으셨다. 그 덕은 천지에 어울리고 밝기는 일월(日月)과 나란한 것 같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오왕 유비는 은덕을 배반하고 의리를 등지고는 천하에 도망 다니는 죄인들을 불러 모아 사전을 주조하여 천하의 화폐의 질서를 어지럽혔다. 또 거짓으로 병들었다고 칭하고 20여 년 동안 입조하지 않았다. 이에 유관 관리들이 여러 차례 유비의 죄를 거론하여 징벌하길 청했다. 그러나 효문 황제께서는 그를 관대한 마음으로 용서하고 그가 스스로 잘못을 고쳐 올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지금 결국에는 초왕 무(戊), 조왕 수(遂), 교서왕 앙(卬), 제남왕 벽광(辟光), 치천왕 현(賢), 교동왕 웅거(雄渠) 등과 연합해 모반을 하여 대역무도하게도 짓을 행하고 군사를 일으켜 종묘를 위험에 빠뜨리고, 조정에서 파견한 대신 및 사자를 학살했으며 죄 없는 많은 백성을 겁주어 무고한 사람을 일찍 죽게 만들었다. 또한 민가를 불태우고 분묘를 파헤치는 등 매우 포악한 행위를 저질렀다.
지금 앙 등은 또 더욱 대역무도하게도 짓을 거듭 행하고, 종묘를 불태우고 종묘의 기물을 노략질했으니 짐은 이를 심히 애통하고 있다. 이에 정전(正殿)에 감히 머무를 수 없어 흰 옷을 입고 피해 있으니, 장군들은 마땅히 사대부들을 독려해 반역의 적도(賊徒)를 쳐 무찌르게 하라. 반역의 무리를 공격하는 자는 깊숙이 들어가 많이 죽이는 것을 공으로 한다. 반역도의 목을 베고, 사로잡은 사람으로 3백석 이상의 신분을 가진 자는 모두 죽여 놓아 주지마라!. 감히 이 조서에 대해서 왈가왈부 의론하거나 이 조서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허리를 베는 형벌로 다스릴 것이다.”
처음에 오왕이 회수를 건너 초왕 유수와 서쪽으로 진격해 극벽(棘壁)을 깨뜨리고 승세를 타고 전진할 때는 그 기세가 심히 날카로웠다.
양 효왕(梁孝王)은 두려운 마음에 여섯 명의 장군을 보내어 오나라 군사를 맞이하여 전투를 했으나, 오나라가 양나라의 두 장군을 또 격파했기에 사졸들은 모두 다시 양나라로 도망쳐 왔다. 양나라는 여러 차례 조후(條侯)에게 사자를 보내어 조후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조후는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양왕은 황제에게 사자를 보내 조후에 대해 비난했다. 황제가 사람을 보내어 조후에게 양나라를 구하라고 했으나, 조후는 여전히 자신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여 뜻하는 바를 고수하며 구원하러 가지 않았다. 양나라는 한안국(韓安國)과 초왕이 반란을 일으킬 때 간하다가 죽임을 당한 초나라 승상의 동생 장우(張羽)를 장군으로 삼아 간신히 오나라 군대를 당분간 꺾을 수 있었다.
오나라 군대가 서쪽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양나라 성의 수비가 견고해 감히 서진할 수가 없었다. 그런즉 조후의 군대 쪽으로 출격하여 하읍(下邑)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다.
오나라 군대는 싸우려고 했으나 조후는 영채(營寨)만 굳게 지키며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이윽고 오나라는 군량이 다 떨어져 병사들이 굶주리게 되자 더욱 자주 싸움을 걸다가, 마침내 야음(夜陰)을 틈타 조후의 영채를 습격했다. 오나라 군대는 성동격서의 전법을 채용하여 먼저 조후 영채 동남쪽에서 소란을 떨었으나 조후는 서북쪽을 수비하게 했다. 얼마 후 과연 오나라 군대는 서북쪽에서 침입해왔다.
마침내 오나라 군대는 크게 패하고 많은 수가 굶어 죽게 되자, 대부분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이에 오왕은 곧 그 휘하의 장사 수천 명과 함께 야밤을 틈타 도망쳐 장강을 건너 단도(丹徒)로 달아나 동월(東越)에 몸을 의탁했다.
동월에서 병사는 가히 만여 명은 되었으므로 사람을 시켜 도망중인 병사들을 더 불러 모으게 했다. 이 때에 한나라에서 사자를 보내어 이익으로써 동월을 꾀었다.
그러자 동월왕은 곧 오왕을 속여, 오왕이 나가서 군사를 위로할 때 사람을 시켜 창으로 오왕을 찔러 죽이고 그 머리를 그릇에 담아 속도가 빠른 역마 편에 실어 한나라 조정에 올렸다. 오나라의 왕자 자화(子華)와 자구(子駒)는 민월(閩越)로 도망쳤다. 오왕이 그의 군대를 버리고 도망가자 군대는 마침내 무너져 속속 태위(太尉)나 양나라 군대에 투항했다. 초왕 유무는 군대가 패하자 자살했다.
교서, 교동, 치천 등 세 왕이 제나라의 임치를 포위했으나 세 달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한나라 군사가 도착하자 교서, 교동, 치천의 왕은 각자 군대를 이끌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교서왕은 이에 위통을 벗어 어깨를 드러내고 맨발로 짚 위에 앉아 물을 마시며 왕태후에게 사죄했다. 태자 유덕(劉德)이 말했다.
“한나라의 군사는 먼 길을 왔습니다. 제가 그들을 살펴보니 이미 지쳐 있어 습격해볼 만합니다. 원컨대 대왕의 남은 병사를 거두어 그를 치십시오. 그를 쳐서 이기지 못하면 그제야 바다로 도망쳐 들어가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교서왕은 대답했다. “나의 병사들은 모두 이미 피폐해져 다시 일으켜 쓸 수가 없다.” 그리고 태자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한나라 장수 궁고후(弓高侯) 퇴당(頹當)이 교서왕에게 서신을 보내어 말했다.
“나는 황제의 조칙을 받들어 불의한 자들을 주벌하고 항복하는 자는 그 죄를 용서해주고 옛 지위를 회복시켜줄 것이다. 항복하지 않는 자는 그를 멸할 것입니다. 왕은 어느 쪽으로 처신할 것입니까? 회답을 기다려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교서왕은 웃통을 드러내고 한나라 영채에 머리를 조아리며 이렇게 아뢰었다.
“신 유앙은 법을 받들기를 삼가지 못해 백성들을 놀라게 하고 이에 수고롭게도 장군을 궁벽한 저희 나라까지 먼 길을 오시게 했으니 감히 저를 죽여 육젓을 담그는 형벌을 내려주시길 청합니다.”
궁고후는 군대를 지휘할 때에 사용하는 금고(金鼓)를 잡고 교서왕에게 말했다. “왕은 이번 거사로 고통을 받고 있는데 왕이 거사하게 된 자초지종 듣고 싶습니다.” 교서왕은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으로 기어가서 대답해 말했다.
“근자에 조조는 천자께서 정권을 맡긴 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조는 고조 황제의 법령을 제멋대로 변경하고 제후의 영지를 침탈했습니다. 이에 유앙 등은 그것이 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해 그가 천하를 어지럽힐까 두려워해 칠국이 병사를 일으켜 조조를 주벌하려고 했습니다. 지금 들으니 이미 조조가 징벌을 받아 처형되었다고 해서 유앙 등은 삼가 이미 용병을 그치고 돌아왔습니다.”
장군이 말했다. “왕이 참으로 조조가 옳지 못하다고 여겼다면 어찌해서 그 일을 황제께 말씀드리지 않으셨습니까? 황제께서 조서와 호부(虎符)를 내리지도 않으셨는데 마음대로 병사를 동원하여 의로운 나라를 공격했습니까? 이로써 보건대 참으로 왕이 뜻하는 바는 단순히 조조를 주벌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그러고는 황제의 조서를 꺼내어 교서왕에게 읽어주었다. 궁고후는 그것을 다 읽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왕은 마땅히 스스로 잘 생각하여 처신하시오."
교서왕이 말했다. “신 유앙과 같은 자는 죽어도 남은 죄가 있습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태후와 태자도 모두 그 뒤를 따라 죽었다. 교동왕, 치천왕, 제남왕도 모두 죽고, 나라는 폐지되어 한나라의 직할령에 편입되었다. 장군 역기가 조나라의 도성를 포위한 지 10달 만에 함락시켜 조왕도 자살했다. 제북왕은 협박받았다고 인정되어 목숨은 건지고 옮겨져 치천의 왕이 되었다.
처음에 오왕이 먼저 반란을 일으켜 초나라 병사를 아울러 통솔하고 제, 조나라와 연합했다. 정월에 병사를 일으켜 3월에 모두 패하고, 조나라만이 좀 더 뒤에 함락되었다. 다시 초나라 원왕(元王)의 막내 아들 평륙후(平陸侯) 유평(劉平)을 초나라 왕으로 삼아 원왕의 뒤를 잇게 했다. 여남왕(汝南王) 유비(劉非)를 옮겨 오나라의 옛 땅에 왕으로 삼아 강도왕(江都王)이라 했다
評論
太史公曰:吳王之王,由父省也。能薄賦斂,使其眾,以擅山海利。逆亂之萌,自其子興。爭技發難,卒亡其本;親越謀宗,竟以夷隕。晁錯為國遠慮,禍反近身。袁盎權說,初寵後辱。故古者諸侯地不過百里,山海不以封。「毋親夷狄,以疏其屬」,蓋謂吳邪?「毋為權首,反受其咎」,豈盎、錯邪?
【索隱述贊】吳楚輕悍,王濞倍德。富因采山,釁成提局。憍矜貳志,連結七國。嬰命始監,錯誅未塞。天之悔禍,卒取奔北。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오왕(吳王) 유비(劉濞)가 왕으로 봉해진 것은 그의 부친이 강등되어 유배되었기 때문이다. 오왕이 부세의 징수를 가볍게 하고 그 무리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은 산의 광산과 바다의 소금으로부터 이익을 제멋대로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란의 싹은 그의 아들로 인해 일어났다.
태자와 장기를 두다가 다투는 데서 재앙이 발생하여 마침내는 그 근본을 망하게 했고, 월인(越人)을 가까이하며 종실(宗室)을 도모하다가 결국 이로 해 멸망당하게 된 것이다. 조조(晁錯)는 국가를 위해 원대한 계획을 주도면밀하게 생각했으나 재앙은 도리어 자기 몸에 다가왔다.
원앙(袁盎)은 권모술수에 능하고 유세를 잘해 처음에는 총애를 받았으나 최후에는 치욕을 당했다. 그래서 옛날에 제후의 땅은 백리를 넘지 않고 산과 바다가 있는 곳은 제후에게 봉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랑캐를 가까이해 친족을 소원하게 하지 말라’는 말은 아마 오왕 같은 경우를 가리키는 것일까? ‘권모술수에 먼저 내세우지 마라, 도리어 징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한 것은 원앙이나 조조와 같은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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