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長孺列傳
韓安國
御史大夫韓安國者,梁成安人也,後徙睢陽。嘗受韓子、雜家說於騶田生所。事梁孝王為中大夫。吳楚反時,孝王使安國及張羽為將,捍吳兵於東界。張羽力戰,安國持重,以故吳不能過梁。吳楚已破,安國、張羽名由此顯。
梁孝王,景帝母弟,竇太后愛之,令得自請置相、二千石,出入游戲,僭於天子。天子聞之,心弗善也。太后知帝不善,乃怒梁使者,弗見,案責王所為。韓安國為梁使,見大長公主而泣曰:「何梁王為人子之孝,為人臣之忠,太后曾弗省也?夫前日吳、楚、齊、趙七國反時,自關以東皆合從西鄉,惟梁最親為艱難。梁王念太后、帝在中,而諸侯擾亂,一言泣數行下,跪送臣等六人,將兵擊卻吳楚,吳楚以故兵不敢西,而卒破亡,梁王之力也。今太后以小睗苛禮責望梁王。梁王父兄皆帝王,所見者大,故出稱蹕,入言警,車旗皆帝所賜也,即欲以侘鄙縣,驅馳國中,以夸諸侯,令天下盡知太后、帝愛之也。今梁使來,輒案責之。梁王恐,日夜涕泣思慕,不知所為。何梁王之為子孝,為臣忠,而太后弗恤也?」大長公主具以告太后,太后喜曰:「為言之帝。」言之,帝心乃解,而免冠謝太后曰:「兄弟不能相教,乃為太后遺憂。」悉見梁使,厚賜之。其後梁王益親驩。太后、長公主更賜安國可直千餘金。名由此顯,結於漢。
其後安國坐法抵罪,蒙獄吏田甲辱安國。安國曰:「死灰獨不復然乎?」田甲曰:「然即溺之。」居無何,梁內史缺,漢使使者拜安國為梁內史,起徒中為二千石。田甲亡走。安國曰:「甲不就官,我滅而宗。」甲因肉袒謝。安國笑曰:「可溺矣!公等足與治乎?」卒善遇之。
梁內史之缺也,孝王新得齊人公孫詭,說之,欲請以為內史。竇太后聞,乃詔王以安國為內史。
公孫詭、羊勝說孝王求為帝太子及益地事,恐漢大臣不聽,乃陰使人刺漢用事謀臣。及殺故吳相袁盎,景帝遂聞詭、勝等計畫,乃遣使捕詭、勝,必得。漢使十輩至梁,相以下舉國大索,月餘不得。內史安國聞詭、勝匿孝王所,安國入見王而泣曰:「主辱臣死。大王無良臣,故事紛紛至此。今詭、勝不得,請辭賜死。」王曰:「何至此?」安國泣數行下,曰:「大王自度於皇帝,孰與太上皇之與高皇帝及皇帝之與臨江王親?」孝王曰:「弗如也。」安國曰:「夫太上、臨江親父子之閒,然而高帝曰『提三尺劍取天下者朕也』,故太上皇終不得制事,居于櫟陽。臨江王,適長太子也,以一言過,廢王臨江;用宮垣事,卒自殺中尉府。何者?治天下終不以私亂公。語曰:『雖有親父,安知其不為虎?雖有親兄,安知其不為狼?』今大王列在諸侯,悅一邪臣浮說,犯上禁,橈明法。天子以太后故,不忍致法於王。太后日夜涕泣,幸大王自改,而大王終不覺寤。有如太后宮車即晏駕,大王尚誰攀乎?」語未卒,孝王泣數行下,謝安國曰:「吾今出詭、勝。」詭、勝自殺。漢使還報,梁事皆得釋,安國之力也。於是景帝、太后益重安國。孝王卒,共王即位,安國坐法失官,居家。
建元中,武安侯田蚡為漢太尉,親貴用事,安國以五百金物遺蚡。蚡言安國太后,天子亦素聞其賢,即召以為北地都尉,遷為大司農。閩越、東越相攻,安國及大行王恢將。未至越,越殺其王降,漢兵亦罷。建元六年,武安侯為丞相,安國為御史大夫。
匈奴來請和親,天子下議。大行王恢,燕人也,數為邊吏,習知胡事。議曰:「漢與匈奴和親,率不過數歲即復倍約。不如勿許,興兵擊之。」安國曰:「千里而戰,兵不獲利。今匈奴負戎馬之足,懷禽獸之心,遷徙鳥舉,難得而制也。得其地不足以為廣,有其眾不足以為彊,自上古不屬為人。漢數千里爭利,則人馬罷,虜以全制其敝。且彊弩之極,矢不能穿魯縞;沖風之末,力不能漂鴻毛。非初不勁,末力衰也。擊之不便,不如和親。」群臣議者多附安國,於是上許和親。
其明年,則元光元年,雁門馬邑豪聶翁壹因大行王恢言上曰:「匈奴初和親,親信邊,可誘以利。」陰使聶翁壹為閒,亡入匈奴,謂單于曰:「吾能斬馬邑令丞吏,以城降,財物可盡得。」單于愛信之,以為然,許聶翁壹。聶翁壹乃還,詐斬死罪囚,縣其頭馬邑城,示單于使者為信。曰:「馬邑長吏已死,可急來。」於是單于穿塞將十餘萬騎,入武州塞。
當是時,漢伏兵車騎材官二十餘萬,匿馬邑旁谷中。衛尉李廣為驍騎將軍,太仆公孫賀為輕車將軍,大行王恢為將屯將軍,太中大夫李息為材官將軍。御史大夫韓安國為護軍將軍,諸將皆屬護軍。約單于入馬邑而漢兵縱發。王恢、李息、李廣別從代主擊其輜重。於是單于入漢長城武州塞。未至馬邑百餘里,行掠鹵,徒見畜牧於野,不見一人。單于怪之,攻烽燧,得武州尉史。欲刺問尉史。尉史曰:「漢兵數十萬伏馬邑下。」單于顧謂左右曰:「幾為漢所賣!」乃引兵還。出塞,曰:「吾得尉史,乃天也。」命尉史為「天王」。塞下傳言單于已引去。漢兵追至塞,度弗及,即罷。王恢等兵三萬,聞單于不與漢合,度往擊輜重,必與單于精兵戰,漢兵勢必敗,則以便宜罷兵,皆無功。
天子怒王恢不出擊單于輜重,擅引兵罷也。恢曰:「始約虜入馬邑城,兵與單于接,而臣擊其輜重,可得利。今單于聞,不至而還,臣以三萬人眾不敵,禔取辱耳。臣固知還而斬,然得完陛下士三萬人。」於是下恢廷尉。廷尉當恢逗橈,當斬。恢私行千金丞相蚡。蚡不敢言上,而言於太后曰:「王恢首造馬邑事,今不成而誅恢,是為匈奴報仇也。」上朝太后,太后以丞相言告上。上曰:「首為馬邑事者,恢也,故發天下兵數十萬,從其言,為此。且縱單于不可得,恢所部擊其輜重,猶頗可得,以慰士大夫心。今不誅恢,無以謝天下。」於是恢聞之,乃自殺。
安國為人多大略,智足以當世取合,而出於忠厚焉。貪嗜於財。所推舉皆廉士,賢於己者也。於梁舉壺遂、臧固、郅他,皆天下名士,士亦以此稱慕之,唯天子以為國器。安國為御史大夫四歲餘,丞相田蚡死,安國行丞相事,奉引墮車蹇。天子議置相,欲用安國,使使視之,蹇甚,乃更以平棘侯薛澤為丞相。安國病免數月,蹇愈,上復以安國為中尉。歲餘,徙為衛尉。
車騎將軍衛青擊匈奴,出上谷,破胡蘢城。將軍李廣為匈奴所得,復失之;公孫敖大亡卒:皆當斬,贖為庶人。明年,匈奴大入邊,殺遼西太守,及入鴈門,所殺略數千人。車騎將軍衛青擊之,出鴈門。衛尉安國為材官將軍,屯於漁陽。安國捕生虜,言匈奴遠去。即上書言方田作時,請且罷軍屯。罷軍屯月餘,匈奴大入上谷、漁陽。安國壁乃有七百餘人,出與戰,不勝,復入壁。匈奴虜略千餘人及畜產而去。天子聞之,怒,使使責讓安國。徒安國益東,屯右北平。是時匈奴虜言當入東方。
安國始為御史大夫及護軍,後稍斥疏,下遷;而新幸壯將軍衛青等有功,益貴。安國既疏遠,默默也;將屯又為匈奴所欺,失亡多,甚自愧。幸得罷歸,乃益東徙屯,意忽忽不樂。數月,病歐血死。安國以元朔二年中卒。
어사대부(御史大夫) 한안국(韓安國)은 양(梁)나라 성안현(成安縣) 사람인데, 뒤에 수양(睢陽)으로 이주했다. 일찍이 추현(騶縣)의 전생<(田生): 역학자인 전하(田何)>에게서 『한비자(韓非子)』와 잡가(雜家)의 학설을 배웠으며, 양효왕(梁孝王)을 섬겨 중대부(中大夫)가 되었다.
오(吳)나라, 초(楚)나라 등 7국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 양효왕은 한안국과 장우(張羽)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동쪽 국경에서 오나라 군대를 막아냈다. 장우는 전력을 다해 싸웠고, 한안국은 견고하게 방어했기 때문에 오나라 군대는 양나라를 지나갈 수 없었다. 오나라, 초나라 반란이 평정되자 한안국과 장우의 명성을 이로 말미암아 세상에 널리 드러내게 되었다.
양효왕은 경제(景帝)와 한 어머니에서 태어난 친동생으로 두태후(竇太后)는 그를 매우 총애했다. 양효왕은 스스로 나라의 승상(丞相)과 2천석(石)의 녹봉을 받는 관리를 임명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출입하고 유희할 때의 치장하는 것이 과분하여 천자로 의심될 정도였다.
천자는 이 소문을 듣고 마음속으로 언짢게 생각했다. 두태후도 경제가 언짢게 여기는 것을 알고, 바로 양나라에서 파견한 사신에게 화를 내며, 접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양왕의 행위를 따져 묻고 바로 보좌하지 못한 것에 대해 꾸짖었다.
당시 한안국은 양나라 사신이었는데, 바로 대장공주(大長公主: 황제의 누이)를 찾아가서 알현하고 흐느껴 울면서 이렇게 하소연했다. “어찌하여 태후께서는 양왕이 자식으로서 효심을 보이고, 신하로서 황제에게 충성하는 것을 몰라주십니까? 예전에 오(吳), 초(楚), 제(齊), 조(趙)나라 등, 7국(國)의 반란 때에 함곡관(函谷關) 동쪽의 제후들은 모두 연합하여 서쪽을 향해 진군했으나, 오직 양왕만은 황제와 가장 친한 아우였던 관계로 그들의 진군을 가로 막았습니다.
양왕은 항상 태후와 황제께서 관중(關中: 경성)에 계신 것을 염두 해두시고, 제후가 난을 일으킨 것을 걱정하면서 그 사태를 말할 때마다 쉼 없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무릎을 꿇고 신 등의 여섯 사람을 보내 군대를 이끌게 해 오나라, 초나라의 반군을 물리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오나라, 초나라의 군대는 이런 연고로 감히 서쪽으로 진군하지 못하고 결국에 패망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양왕의 힘쓴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대도 지금 태후께서 대수롭지 않는 절조와 번거롭고 까다로운 예법을 내세워서 양왕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양왕은 부친과 형이 모두 황제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본 것이 크게 황실의 위엄과 격식을 차리는 것들이었습니다. 고로 외출할 할 때에 길을 치우고 사람의 통행을 금지하였으며, 궁으로 돌아올 때에는 경비를 강화했던 것입니다. 양왕의 수레와 깃발은 모두 황제께서 하사하신 것입니다. 양왕은 바로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먼 변방의 작은 현(縣)에서도 자신을 돋보이고, 나라 안에서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호쾌하게 수레를 내몰아달려 제후들에게 자신을 과시하며,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태후와 황제께서 자신을 각별하게 총애하심을 모두에게 알리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양나라 사신이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책임을 따지고 책망하셨습니다. 이에 양왕은 두려워서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태후와 황제의 온정을 그리워하면서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지 안절부절못하고 계십니다. 양왕은 자식으로서 효도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 바치는데, 태후께서는 어찌 기특하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대장공주가 그의 말을 모두 태후에게 고하자, 태후는 기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을 황제에게도 아뢰어라.” 이에 공주가 다시 황제에게 고하자 황제는 그동안에 언짢아했던 마음이 풀렸다. 그리고 관(冠)을 벗고 태후에게 이렇게 사죄했다. “형제가 서로 잘 일깨워주지 못하여 태후께 근심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양나라 사신을 모두 접견하고, 후하게 상을 하사했다.
이 후부터 양왕은 더욱더 총애를 받게 되었다. 두태후와 대장공주가 다시 한안국에게 천여 금(金)의 가치가 있는 상을 하사했다. 이로 말미암아 한안국의 명성은 더욱 드러났고, 또한 한나라 조정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후 한안국은 법을 위반해 형벌을 받았는데, 몽현(蒙縣)의 옥리(獄吏)였던 전갑(田甲)이 그를 모욕했다. 이에 한안국이 말했다. “식은 재지만 다시 불씨가 살아날 수도 않겠는가?” 전갑이 그의 말을 무시하면서 이렇게 대구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가 오줌을 싸서 불씨를 꺼버리겠다.” 얼마 지나서 양나라의 내사(內史)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이에 한나라 조정에서 사자를 파견하여 한안국을 양나라의 내사로 임명하니, 그는 죄수의 신분에서 벗어나 졸지에 봉록 2천석을 받는 고관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놀란 전갑이 도망가자 한안국이 이렇게 말했다. “전갑이 돌아와서 복직하지 않으면 내가 너의 일족을 멸망시키겠다.” 그러자 전갑이 한쪽 어깨의 살을 드러내고 사죄를 청했다. 한안국은 웃으면서 말했다. “전갑아! 지금 오줌을 누려면 싸봐라! 자네 같은 자를 징벌할 가치가 있을까?” 그리고 관용을 베풀어서 결국에는 전갑을 잘 대해주었다.
양나라의 내사 자리가 공석이 되었을 때, 양효왕은 새로 제(齊)나라에서 초빙한 공손궤(公孫詭)란 인물을 좋아해서 조정에 내사로 삼고자 청했다. 두태후가 이 소식을 듣고, 곧바로 양효왕에게 명령을 내려 한안국을 내사로 삼도록 했다.
공손궤와 양승(羊勝)이 양효왕을 설득하여, 경제에게 양효왕을 황태자로 삼고, 봉지를 더 늘려줄 것을 종용하려고 했다. 그런데 조정 대신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두려워해서 암암리에 자객을 보내 조정에서 양효왕을 후계자로 삼는 것을 반대하는 신하들을 찔러 죽였다. 급기야 원래 오나라의 승상이었던 원앙(袁盎)도 살해당했다. 이에 경제는 이 모든 것이 공손궤와 양승 등이 배후에서 획책했다는 소문을 듣고 사자를 파견하여 반드시 이들을 체포하여 호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십여 무리의 사자(使者)가 양나라에 도착해, 양나라의 재상 이하 온 나라가 대대적으로 수색했으나 한 달 남짓 지났는데도 그들을 잡지 못했다.
내사 한안국은 공손궤와 양승이 양효왕의 왕궁에 숨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한안국은 왕궁에 들어가 양효왕을 알현하고 이렇게 읍소했다. “주군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 마땅합니다.
대왕께서 어진 신하가 없었기 때문에 일이 이 지경같이 문란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공손궤와 양승을 잡지 못해 그 책임을 묻지 못하고 있으니, 청컨대 신을 죽여 그 책임을 지게 해 주십시오.” 이에 양 효왕이 대답했다. “어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소?”
한안국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아뢰었다. “대왕께서는 스스로 황제와의 관계를 미루어 생각해보십시오. 대왕과 황제의 관계가 태상황<(太上皇): 유태공(劉太公)>과 고제(高帝), 그리고 황제와 임강왕(臨江王) 중에 어느 쪽이 더 친밀했습니까?”
이에 양효왕이 답변했다. “과인은 그분들 간의 친밀함을 따라갈 수가 없소.” 그러자 한안국이 아뢰었다. “그렇습니다. 태상황과 고제, 황제와 임강왕은 부자(父子) 사이입니다. 그러나 고제께서는 ‘짐이 석 자짜리 검을 쥐고 천하를 차지했으니, 이것이 천명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태상황은 끝까지 국정을 관여하지 못하시고 역양궁(櫟陽宮)에서 생을 마감하셨던 것입니다.
임강왕은 적장자인 태자였으나 단지 모친을 위한 말 한마디 잘못하여 폐출되어 임강왕으로 강등되었습니다. 또 궁실(宮室)을 세우다가 조상 사당 담장의 빈터를 침범했다는 일 때문에 끝내 중위부(中尉府)에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겠습니까? 천하를 다스림에는 사사로운 정(情)으로 공적인 일을 어지럽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비록 친아버지라도 어찌 사나운 호랑이로 돌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것이며, 비록 친형이라도 어찌 사나운 이리로 돌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겠습니까?”
지금 대왕께서는 제후의 반열에 계시면서 한낱 사악한 신하의 허황한 말에 현혹되어 황제의 금령(禁令)을 범하고 공명한 법을 어지럽히셨습니다. 황제께서는 태후 때문에 차마 대왕을 법으로 처벌하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태후께서는 밤낮으로 울며 대왕께서 스스로 잘못을 고치시길 기원하고 계신데, 대왕께서는 아직까지 자각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만약에 태후께서 돌연히 세상을 떠나신다면 대왕께서는 누구에게 의지하실 겁니까?”
한안국의 말이 다 마치기도 전에 양효왕은 쉼 없이 눈물을 흘리며 한안국에게 감사를 표한 뒤에 이렇게 말했다. “과인이 지금 공손궤와 양승을 내 보내겠소.” 이에 공손궤와 양승은 자살했다. 한나라에서 파견된 사자가 조정으로 돌아가 정황을 보고했다.
이로서 양나라의 사건은 모두 해결되었는데, 이것은 한안국이 애쓴 덕분이었다. 이에 경제와 태후는 더욱 더 한안국을 중시하게 되었다. 양효왕이 세상을 떠나자 공왕<(恭王): 양효왕의 장자 유실(劉實)>이 즉위했다. 이 무렵에 한안국은 다시 법을 위반하여 관직을 잃고 집에 머물고 있었다.
건원(建元) 연간(서기전 140년-서기전 135년)에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이 한나라 조정의 태위(太尉)가 되었는데, 그는 황제의 외척으로 총애를 받아 정권을 장악했다. 한안국은 전분에게 5백금의 가치가 있는 예물을 선물했다.
이에 전분이 왕태후(王太后: 경제의 두 번째 황후. 전분의 누이)에게 한안국을 천거했고, 황제 역시 평소부터 그가 어질고 재능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그를 불러 북지도위(北地都尉)로 삼았는데, 뒤에 와서 대사농(大司農)으로 승진시켰다.
민월(閩越)과 동월(東越)이 서로 공격하자 한나라 조정에서 한안국과 대행(大行) 왕회(王恢)으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출정하도록 했다. 그들이 아직 월(越) 땅에 도착하기도 전에 월나라 사람들이 자기 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투항했기에 한나라의 군대도 철수했다. 건원 6년(서기전 135년)에 무안후는 승상이 되고 한안국은 어사대부가 되었다.
흉노(匈奴)가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하기를 청하자, 황제는 조정의 군신들에게 이에 관해 의론토록 하였다. 대행(大行) 왕회는 연(燕)나라 사람으로 여러 차례 변방의 관리를 지냈기 때문에 흉노의 정황에 대해서 익숙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의론 중에 이렇게 말했다. “한나라와 흉노가 화친을 맺는다고 해도 아마 몇 년 지나지 않아 또다시 맹약을 저버릴 것입니다. 화친을 윤허하지 말고 군대를 파견하여 그들을 공격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에 한안국이 반박했다. “군대를 천 리 밖으로 보내 작전을 벌이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지금 흉노는 자신들의 군마(軍馬)가 넉넉함을 믿고 금수와 같은 마음을 품고 새 무리가 날라서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듯 하니, 그들을 제압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토지를 얻어도 국토를 개척했다고 하기에 부족하고, 그들의 백성을 받아들여도 국력이 강해지기에는 부족합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상고시대부터 중국의 백성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한나라 군대가 수 천 리 밖으로 가서 이권 다툼을 벌이면 바로 아군과 군마는 싸우기도 전에 모두 지쳐버릴 것이지만, 흉노는 가만히 앉아서 온전한 전력을 가지고 우리의 약점을 파고 들 것입니다. 하물며 강한 쇠뇌로 쏜 화살도 멀리 가서 힘이 다하면 노나라에서 나는 얇은 비단조차 뚫을 수 없고, 휘몰아치던 돌풍도 마지막에 가서는 가벼운 기러기 털도 흔들만한 힘조차 없어집니다. 처음부터 힘이 약했던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가서 힘이 쇠약해져 고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대를 발동하여 흉노를 공격하는 것은 대단히 불리합니다. 화친하는 것만 못합니다.”
의론에 참석한 군신 중에 한안국의 주장에 동조하는 자가 많았다. 이에 황제는 화친을 윤허했다.
그 다음해가 바로 원광(元光) 원년(서기전 134년)인데, 안문군(雁門郡) 마읍(馬邑)의 호족(豪族) 섭옹일(聶翁壹)이 대행 왕회를 통해 황상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흉노가 처음으로 한나라와 화친해서인지 변경 백성들을 친근하게 대하고 또 신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재물과 이익을 미끼로 그들을 유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섭옹일을 몰래 간첩으로 보냈는데, 그는 흉노로 가서 선우(單于)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마읍의 현령(縣令), 현승(縣丞) 등의 관리를 죽이고, 마읍성을 투항시켜서 그곳의 재물을 모조리 얻게 만들 수 있습니다.”
선우는 그의 말에 현혹되어 성공할 수 있다고 여겨서 섭옹일에게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다. 이에 섭옹일은 곧바로 마읍성으로 돌아와서 사형수들의 머리를 베어 성문 위에 매달아놓고, 선우의 사자에게 증거로 보여주어 믿게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마읍의 관리들을 이미 죽었으니, 속히 입성하시길 바랍니다.” 이에 선우가 10여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변방의 요새를 뚫고, 무주(武州)의 변경으로 진입했다.
당시 한나라에서는 전차병, 기병, 보병 등 30여 만 명을 마읍 성 부근의 산골짜기에 매복시켜두었다. 이들을 이끌 장군으로 위위(衛尉) 이광(李廣)은 효기장군(驍騎將軍), 태복(太僕) 공손하(公孫賀)은 경거장군(輕車將軍), 대행 왕회는 장둔장군(將屯將軍), 태중대부(太中大夫) 이식(李息)은 재관장군(材官將軍), 어사대부 한안국은 호군장군(護軍將軍)으로 삼았는데, 모든 장군들은 호군장군에게 예속하게 하였다. 그리고 서로 선우가 마읍 성에 진입하면 한나라 복병이 곧바로 출격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왕회, 이식, 이광은 별도로 대군(代郡)에서 흉노의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후방부대를 공격하기로 했다. 이때 선우는 한나라의 장성(長城) 무주(武州) 부근에까지 진입했었다. 이곳에서 마읍성까지 불과 1백여 리 정도가 남았는데, 머지않아 곧 약탈을 자행할 태세였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 들판에는 방목한 가축만 보이고,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선우는 괴이하게 여겨 봉화대를 공격하게 하여 무주의 위사(尉史)를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위사를 찔러 죽이겠다고 위협하며 그 까닭을 물었다. 위사가 대답했다. “한나라의 군대 수십만 명이 마읍성 아래에서 매복하고 있습니다.” 이에 선우는 돌아서 좌우의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칫하면 깜박 한나라에게 속아 넘어갈 뻔했다.”
이에 곧바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는데, 변방의 요새를 빠져나오자 선우가 안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무주의 위사를 잡은 것은 참으로 하늘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명령을 내려 위사를 ‘천왕(天王)’으로 일컫게 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요새 아래의 정찰병은 선우가 이미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갔다고 보고했다. 이에 한나라의 군대는 급히 변방의 요새까지 추격했으나 따라잡을 수 없다고 여겨서 그만두었다. 그리고 대군에서 흉노의 후방부대를 공격하기로 한 왕회 등의 부대 3만 명은 선우가 한나라 군대와 교전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만약에 약속대로 자신들이 선우의 후방부대를 공격하면 반드시 선우의 정예 병사들과 교전을 할 것이고, 그러면 자신들이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여겨서 임의로 부대를 철수시켰다. 그래서 한나라 군사들은 모두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황제는 왕회가 선우의 후방부대를 공격하지 않고 제멋대로 군사를 이끌고 철수한 것에 격노했다. 이에 왕회가 이렇게 아뢰었다. “애당초에 흉노가 마읍성에 침입하면 아군과 선우의 군대가 교전을 벌이면 저희가 흉노의 후방부대를 공격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면 순조롭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우가 사전에 계획을 알고, 마읍성으로 진입하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신은 3만 명의 부대로 흉노의 부대를 공격하면 중과부적하기 때문에 단지 패전의 치욕을 자초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신은 본디 돌아오면 참수 당할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 대신에 폐하의 군사 3만 명을 보전할 수는 있었습니다.”
이에 황제는 왕회를 정위(廷尉)에게 넘겨 그 죄를 다스리게 했다. 정위는 왕회에게 두요(逗橈: 적이 두려워 싸우기 전에 도망감)의 죄를 적용해 마땅히 참수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왕회는 몰래 승상 전분에게 1천금을 주면서 선처를 부탁했다. 전분이 감히 황제에게 사정을 말하지 못하고 왕태후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왕회가 먼저 마읍에서 적을 유인하는 계책을 꾸몄는데, 지금 성공하지 못해서 그를 죽인다면 이는 흉노를 위해서 원수를 갚아주는 것입니다.”
황제가 아침에 태후에게 문안인사를 드릴 때에 왕태후가 승상의 말을 황제에게 고했다. 이에 황제는 말했다. “먼저 마읍의 계책을 제의한 자가 왕회입니다. 고로 천하의 병사 수십만 명을 동원하여 그의 말에 따라 추진했던 것입니다. 백번 양보하여 설령 선우를 잡지 못해도 만약에 왕후의 부대가 흉노의 후방부대를 공격했으면 그래도 상당한 전과를 얻을 수 있어서 장병들의 마음을 다소나마 위로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왕회를 죽이지 않으면 천하에 사죄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왕회는 곧바로 자살했다.
한안국의 사람됨은 원대한 책략이 많았고, 그의 지혜로운 견해는 당시 세상에 적합했는데, 이는 모두 충후(忠厚)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비록 재물을 탐했으나 그가 천거한 자들은 모두 청렴결백한 인사들로서 자기보다 어질고 재능이 있는 자들이었다.
양나라에서 호수(壺遂), 장고(臧固), 질타(郅他) 등을 천거했는데, 모두 천하의 명사들이었다. 선비들도 이런 때문에 그를 칭송하고 앙모했고, 황제까지도 그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훌륭한 인재로 여겼다.
한안국은 어사대부를 4년 남짓 지냈는데, 승상 전분이 죽어서 그가 승상의 직무를 대행했다. 한번은 그가 황제의 수레를 인도하다가 수레에서 떨어져 절름발이가 되었다. 황제는 차기 승상으로 한안국을 임용하고자 사자를 보내 그를 상태를 보게 했더니, 절름거리는 정도가 매우 심했다. 이에 다시 평극후(平棘侯) 설택(薛澤)을 승상으로 삼았다.
한안국은 병으로 면직된 지 몇 달 뒤에 절름거리는 것이 치유되었다. 이에 황제는 또다시 한안국을 중위(中尉)로 삼았고, 일 년 남짓 뒤에는 위위(衛尉)로 전임시켰다.
거기장군(車騎將軍) 위청(衛靑)이 흉노를 공격했는데, 상곡군(上谷郡)에서 출정하여 농성(蘢城)에서 흉노를 크게 물리쳤다. 이 때에 장군 이광(李廣)은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가 다시 겨우 탈출했고, 공손오(公孫敖)는 많은 병사를 잃었다. 그들은 모두 마땅히 참수를 당하는 형벌을 받아야했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다음해 흉노가 대거로 변경을 침입하여 요서태수(遼西太守)를 죽이고, 바로 안문(雁門)으로 침입하여 수천 명의 백성들을 죽이고 겁탈해갔다. 이에 거기장군 위청은 그들을 추격하고자 안문에서 출정했다. 위위(衛尉) 한안국은 재관장군(材官將軍)이 되어 어양(漁陽)에서 주둔하고 방어토록 했다.
이곳에서 한안국은 포로를 잡았는데, 그 포로가 흉노는 이미 멀리 떠났다고 말했다. 이에 한안국은 즉시 황제에서 상서를 올려 때마침 농사철이니 잠시 군대의 주둔을 중지하고 병사들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짓게 해달라고 청했다. 그리하여 병사들을 주둔시키지 않은 지 한 달여 만에 흉노가 또다시 대거로 상곡과 어양 일대를 침입했다. 이 때에 한안국의 요새에는 겨우 7백여 명의 병사만 남아있는데, 바로 출병하여 흉노와 교전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다시 요새로 퇴각했다.
이에 흉노는 1천여 명의 백성과 가축, 재물 등을 약탈해 갔다. 황제는 이 소식을 듣고 격노하여 사자를 보내 한안국을 책망했다. 그리고 한안국을 동쪽으로 옮겨 우북평(右北平)에 주둔하게 하였다. 그 까닭은 당시의 흉노의 포로가 장차 흉노의 군대가 동쪽으로 침입할 것이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한안국은 처음에 어사대부와 호군장군으로 임명되었으나, 뒤에 점차 배척당하고 소원해져서 관직이 강등되었는데, 새로 총애를 받게 된 젊은 장군 위청 등은 군공을 세우고 더욱 존귀해졌다.
한안국은 이미 조정에서 소원해졌고, 실의에 빠져 묵묵하게 지내게 되었다. 더불어 병사를 이끌고 주둔군을 지키다가 또 흉노에게 속아 손실과 사상자가 많아지자, 내심 매우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는 황제의 총애를 얻어 다시 조정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갈망했지만 더욱더 동쪽 변방으로 옮겨가 주둔하게 되어 실의에 빠져서 울적하게 몇 개월을 보냈는데, 마침내 병이 들어 피를 토하고 죽었다. 한안국은 원삭(元朔) 2년(서기전 127년)에 세상을 떠났다.
評論
太史公曰:余與壺遂定律歷,觀韓長孺之義,壺遂之深中隱厚。世之言梁多長者,不虛哉!壺遂官至詹事,天子方倚以為漢相,會遂卒。不然,壺遂之內廉行修,斯鞠躬君子也。
【索隱述贊】安國忠厚,初為梁將。因事坐法,免徒起相。死灰更然,生虜失防。推賢見重,賄金貽謗。雪泣悟主,臣節可亮。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호수(壺遂)와 더불어 악율(樂律)과 역법(曆法)을 제정할 때에 한장유(韓長孺: 한안국)의 의로움과 호수의 마음속 깊이 숨겨진 충후함을 관찰할 수 있었다. 세인들은 모두 양(梁)나라에 장자(長者)가 많다고 말하는데, 이는 과연 헛된 소문이 아니도다! 호수의 관직이 첨사(詹事)가 되었을 때에 황제는 바야흐로 그에게 의지하여 한나라의 승상으로 삼으려고 했는데, 뜻밖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렇지 않았으면 호수는 청렴한 성품과 단정한 행동으로 존경받는 군자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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