匈奴列傳
匈奴,其先祖夏后氏之苗裔也,曰淳維。唐虞以上有山戎、獫狁、葷粥,居于北蠻,隨畜牧而轉移。其畜之所多則馬、牛、羊,其奇畜則橐駞、驢、驘、駃騠、騊駼、騨騱。逐水草遷徙,毋城郭常處耕田之業,然亦各有分地。毋文書,以言語爲約束。兒能騎羊,引弓射鳥鼠;少長則射狐兔:用爲食。士力能毋弓,盡爲甲騎。其俗,寬則隨畜,因射獵禽獸爲生業,急則人習戰攻以侵伐,其天性也。其長兵則弓矢,短兵則刀鋋。利則進,不利則退,不羞遁走。茍利所在,不知禮義。自君王以下,咸食畜肉,衣其皮革,被旃裘。壯者食肥美,老者食其餘。貴壯健,賤老弱。父死,妻其後母;兄弟死,皆取其妻妻之。其俗有名不諱,而無姓字。
흉노(匈奴)의 선조는 하후씨(夏后氏)의 후예로 순유(淳維)라고 한다. 당요(唐堯)와 우순(虞舜) 이전에는 산융(山戎), 험윤(獫狁), 훈육(葷粥) 등으로 불리며 북쪽의 미개척지에서 유목생활을 했다. 그들의 가축은 주로 말, 소, 양이었는데 진기한 가축으로 낙타, 나귀, 노새, 버새 도도(騊駼: 털빛이 푸른 말), 애생마 등이 있었다.
물과 풀을 따라 옮겨 살았기 때문에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도 없고 농사를 짓지 않았으나 각자의 세력범위만은 경계가 분명했다. 글이나 서적이 없었으므로 말로써 서로 약속을 했다. 어린 애들도 양을 타고 돌아다니며 활로 새나 쥐를 쏘고, 조금 더 자라면 여우나 토끼 사냥을 해서 양식을 먹는다. 장정들은 자유자재로 활을 다룰 수 있어 전원이 무장 기병이 된다.
그들의 풍속은 평상시에는 목축에 종사하며 새나 짐승을 사냥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긴급한 상황일 때에는 전원이 군사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이것은 그들의 타고난 천성이었다. 그들이 먼 거리에 쓰는 무기는 활과 화살이고, 단병전에서 쓰는 무기는 칼과 창이었다. 싸움이 유리할 때에는 진격하고 불리할 경우에는 퇴각하는데, 도주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오로지 이익을 위해서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
군왕(君王)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이 가축의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이나 털로는 옷을 해 입거나 침구로 썼다. 장정들은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노약자들은 그 나머지를 먹었다. 건장한 사람을 중히 여기고, 노약자들은 경시했던 것이다. 부친이 죽으면 아들이 그 후처를 아내로 삼고, 형제가 죽으면 남아 있는 형이나 아우가 그 아내를 취해 아내로 삼았다. 그들은 서로 이름을 부르는 것을 꺼리지 않았고, 성(姓)이나 자(字) 같은 것은 없었다.
夏道衰,而公劉失其稷官,變于西戎,邑于豳。其後三百有餘歳,戎狄攻大王亶父,亶父亡走岐下,而豳人悉從亶父而邑焉,作周。其後百有餘歳,周西伯昌伐畎夷氏。後十有餘年,武王伐紂而營雒邑,復居于酆鄗,放逐戎夷涇、洛之北,以時入貢,命曰「荒服」。其後二百有餘年,周道衰,而穆王伐犬戎,得四白狼四白鹿以歸。自是之後,荒服不至。於是周遂作甫刑之辟。穆王之後二百有餘年,周幽王用寵姬褒姒之故,與申侯有卻。申侯怒而與犬戎共攻殺周幽王于驪山之下,遂取周之焦穫,而居于涇渭之閒,侵暴中國。秦襄公救周,於是周平王去酆鄗而東徙雒邑。當是之時,秦襄公伐戎至岐,始列爲諸侯。是後六十有五年,而山戎越燕而伐齊,齊釐公與戰于齊郊。其後四十四年,而山戎伐燕。燕告急于齊,齊桓公北伐山戎,山戎走。其後二十有餘年,而戎狄至洛邑,伐周襄王,襄王奔于鄭之氾邑。初,周襄王欲伐鄭,故娶戎狄女爲后,與戎狄兵共伐鄭。已而黜狄后,狄后怨,而襄王後母曰惠后,有子子帶,欲立之,於是惠后與狄后、子帶爲內應,開戎狄,戎狄以故得入,破逐周襄王,而立子帶爲天子。於是戎狄或居于陸渾,東至於衛,侵盜暴虐中國。中國疾之,故詩人歌之曰「戎狄是應」,「薄伐獫狁,至於大原」,「出輿彭彭,城彼朔方」。周襄王既居外四年,乃使使告急于晉。晉文公初立,欲修霸業,乃興師伐逐戎翟,誅子帶,迎內周襄王,居于雒邑。
當是之時,秦晉爲彊國。晉文公攘戎翟,居于河西圁、洛之閒,號曰赤翟、白翟。秦穆公得由余,西戎八國服於秦,故自隴以西有綿諸、緄戎、翟、獂之戎,岐、梁山、涇、漆之北有義渠、大荔、烏氏、朐衍之戎。而晉北有林胡、樓煩之戎,燕北有東胡、山戎。各分散居谿谷,自有君長,往往而聚者百有餘戎,然莫能相一。
自是之後百有餘年,晉悼公使魏絳和戎翟,戎翟朝晉。後百有餘年,趙襄子踰句注而破并代以臨胡貉。其後既與韓魏共滅智伯,分晉地而有之,則趙有代、句注之北,魏有河西、上郡,以與戎界邊。其後義渠之戎築城郭以自守,而秦稍蠶食,至於惠王,遂拔義渠二十五城。惠王擊魏,魏盡入西河及上郡于秦。秦昭王時,義渠戎王與宣太后亂,有二子。宣太后詐而殺義渠戎王於甘泉,遂起兵伐殘義渠。於是秦有隴西、北地、上郡,築長城以拒胡。而趙武靈王亦變俗胡服,習騎射,北破林胡、樓煩。築長城,自代并陰山下,至高闕爲塞。而置雲中、鴈門、代郡。其後燕有賢將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當是之時,冠帶戰國七,而三國邊於匈奴。其後趙將李牧時,匈奴不敢入趙邊。後秦滅六國,而始皇帝使蒙恬將十萬之眾北擊胡,悉收河南地。因河爲塞,築四十四縣城臨河,徙適戍以充之。而通直道,自九原至雲陽,因邊山險塹谿谷可繕者治之,起臨洮至遼東萬餘里。又度河據陽山北假中。
當是之時,東胡彊而月氏盛。匈奴單于曰頭曼,頭曼不勝秦,北徙。十餘年而蒙恬死,諸侯畔秦,中國擾亂,諸秦所徙適戍邊者皆復去,於是匈奴得寬,復稍度河南與中國界於故塞。
單于有太子名冒頓。後有所愛閼氏,生少子,而單于欲廢冒頓而立少子,乃使冒頓質於月氏。冒頓既質於月氏,而頭曼急擊月氏。月氏欲殺冒頓,冒頓盜其善馬,騎之亡歸。頭曼以爲壯,令將萬騎。冒頓乃作爲鳴鏑,習勒其騎射,令曰:「鳴鏑所射而不悉射者,斬之。」行獵鳥獸,有不射鳴鏑所射者,輒斬之。已而冒頓以鳴鏑自射其善馬,左右或不敢射者,冒頓立斬不射善馬者。居頃之,復以鳴鏑自射其愛妻,左右或頗恐,不敢射,冒頓又復斬之。居頃之,冒頓出獵,以鳴鏑射單于善馬,左右皆射之。於是冒頓知其左右皆可用。從其父單于頭曼獵,以鳴鏑射頭曼,其左右亦皆隨鳴鏑而射殺單于頭曼,遂盡誅其後母與弟及大臣不聽從者。冒頓自立爲單于。
冒頓既立,是時東胡彊盛,聞冒頓殺父自立,乃使使謂冒頓,欲得頭曼時有千里馬。冒頓問群臣,群臣皆曰:「千里馬,匈奴寶馬也,勿與。」冒頓曰:「柰何與人鄰國而愛一馬乎?」遂與之千里馬。居頃之,東胡以爲冒頓畏之,乃使使謂冒頓,欲得單于一閼氏。冒頓復問左右,左右皆怒曰:「東胡無道,乃求閼氏!請擊之。」冒頓曰:「柰何與人鄰國愛一女子乎?」遂取所愛閼氏予東胡。東胡王愈益驕,西侵。與匈奴閒,中有棄地,莫居,千餘里,各居其邊爲甌脫。東胡使使謂冒頓曰:「匈奴所與我界甌脫外棄地,匈奴非能至也,吾欲有之。」冒頓問群臣,群臣或曰:「此棄地,予之亦可,勿予亦可。」於是冒頓大怒曰:「地者,國之本也,柰何予之!」諸言予之者,皆斬之。冒頓上馬,令國中有後者斬,遂東襲擊東胡。東胡初輕冒頓,不爲備。及冒頓以兵至,擊,大破滅東胡王,而虜其民人及畜產。既歸,西擊走月氏,南并樓煩、白羊河南王。[侵燕代]悉復收秦所使蒙恬所奪匈奴地者,與漢關故河南塞,至朝那、膚施,遂侵燕、代。是時漢兵與項羽相距,中國罷於兵革,以故冒頓得自彊,控弦之士三十餘萬。
自淳維以至頭曼千有餘歳,時大時小,別散分離,尚矣,其世傳不可得而次云。然至冒頓而匈奴最彊大,盡服從北夷,而南與中國爲敵國,其世傳國官號乃可得而記云。
하(夏)나라의 국운이 쇠하자 공류(公劉)가 대대로 농사일을 관장하는 벼슬인 직관(稷官)의 지위를 잃고 서융(西戎) 지역을 개척해 빈(豳)에다 도읍을 정하고 살았다. 그 뒤 3백여 년이 지나 융적(戎狄)이 고공단보(古公亶父)를 공격했다. 고공단보는 기산(岐山) 기슭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빈 사람들은 고공단보를 따라 옮겨와서 그곳에 도읍을 세우고 주(周)나라를 일으켰다. 그 뒤 1백여 년이 지나 주나라 서백창(西伯昌)이 견이씨(畎夷氏)를 정벌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에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하고 낙읍(雒邑)을 도읍으로 정한 다음에 풍호(酆鄗)에 살며 융이(戎夷)들을 경수(涇水)와 낙수(洛水) 이북으로 내쫓았다. 융이는 철따라 조공을 바쳤고 그들이 사는 지역을 ‘황복(荒服)’이라고 불렀다.
그 뒤 2백여 년이 지나자 주나라의 국운도 쇠해졌다. 주나라의 목왕(穆王)이 견융(犬戎)을 정벌하여 네 마리의 흰 늑대와 네 마리의 흰 사슴을 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이때부터 황복 땅의 오랑캐들은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당시 주나라는 보형(甫刑: 주나라의 형법)이라는 법을 만들었다. 주나라의 말기에 이르러 유왕(幽王)은 포사(褒姒)라는 미인에 빠져 왕비를 내치자, 왕비의 친정아버지였던 신후(申侯)와 틈이 생기게 되었다. 신후는 노하여 견융과 함께 쳐들어와 유왕을 여산(驪山) 아래에서 죽였다. 그리하여 견융은 주나라의 초호(焦穫)를 점령하고 경수와 위수(渭水) 사이에 머물러 살면서 중국을 침범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한편 진나라 양공(襄公)이 주나라를 구원하여 주나라 평왕(平王)은 풍호를 떠나 동쪽 낙읍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때 진나라 양공은 견융을 정벌하기 위해 기산에까지 이르자 비로소 제후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로부터 65년 뒤(기원전 706년)에 산융이 연(燕)나라를 넘어와서 제(齊)나라를 침범하여 제나라 희공(釐公)이 제나라 교외에서 산융과 싸웠다. 그로부터 44년 후(기원전 664년)에 산융이 다시 연나라를 침공했다. 연나라는 곧 위급함을 제나라에 알렸다. 제나라 환공(桓公)은 북쪽으로 가서 산융을 공격해 그들을 패주시켰다.
그로부터 20여 년 후(기원전 636년)에 융적이 낙읍으로 침범하여 주나라 양왕(襄王)을 공격했다. 이에 양왕은 정(鄭)나라의 범읍(氾邑)으로 도피했다.
본래 주나라 양왕은 정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융적의 부족장의 딸을 왕후로 맞이하여 융적의 지원병과 더불어 정나라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양왕은 융적 출신의 왕후를 내쫓으니, 융적의 군주가 왕에게 원한을 품었다.
그 때에 양왕의 계모 혜후(惠后)에게는 자대(子帶)라는 아들이 있었다. 혜후는 자대를 왕으로 앉히려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혜후는 적후(狄后), 자대와 함께 몰래 융적과 내통한 뒤에 그들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 융적은 이로 인해서 도성으로 쳐들어올 수 있었고 결국 주나라 양왕을 내쫓고 자대를 천자로 내세웠다. 이때부터 어떤 융적은 육혼(陸渾)에서 살고 혹은 동쪽으로 위(衛)나라의 변경에까지 진출하여 중원의 제후국을 침략하여 약탈했기 때문에 중원의 제후국에서는 그들을 꺼려했다.
그래서 옛 시인은 그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융적을 응징하도다,” “험윤 오랑캐를 쳐부수어 태원(大原)에 당도했다.”, “숱한 수레를 내어, 저 삭방의 땅에 성을 쌓았다”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주나라 양왕은 도성 밖에서 4년 동안 살면서 사신을 진(晉)나라로 보내 위급함을 고했다. 그 때 진나라 문공(文公)은 막 군주의 자리에 올라 패업을 이룰 생각에 군사를 일으켜 융적(戎翟)을 토벌하여 내쫓고 자대를 죽인 다음에 주나라 양왕을 영립하여 낙읍에서 살게 했다.
그 당시에 진(秦)과 진(晉) 나라가 강국이었다. 진(晉)나라 문공은 융적을 하서(河西)의 은수(圁水)와 낙수(洛水) 사이로 내쫓고 그들을 적적(赤翟)과 백적(白翟)으로 나누어 불렀다. 또한 진(秦)나라 목공(穆公)은 유여(由余)를 신하로 받아들여 서융의 여덟 나라를 복속시켰다.
그 나라들은 농(隴) 지방의 서쪽에 있었던 면저(綿諸), 곤융(緄戎), 적(翟), 원 등이었고, 기산(岐山), 양산(梁山)과 경수(涇水), 칠수(漆水)의 북쪽으로 의거(義渠), 대려(大荔), 오지(烏氏), 구연(胊衍) 등의 융족이었다. 그리고 진(晉)나라 북쪽에는 임호(林胡), 누번(樓煩) 등의 융족이 있었고, 연나라 북쪽에는 동호(東胡), 산융(山戎) 등의 융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각기 산의 골짜기에 거주하면서 제각기 군장이 있었다. 가끔 1백여 개의 융족들이 합치는 경우는 있었지만 하나로 통일되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1백여 년 뒤에 진(晉)나라 도공(悼公)이 위강(魏絳)을 융적에 사신으로 보내 화친을 맺음으로써 융적들은 진(晉)나라에 조회하게 되었다.
또 그로부터 1백여 년 뒤에 조양자(趙襄子)가 구주산(句注山)을 넘어 대(代)를 공격하여 그 땅을 병합하고 호(胡), 맥(貉)에까지 이르렀다. 그 후에 진나라의 한(韓), 위(魏)씨가 함께 지백(智伯)을 없애고 진나라 영토를 나누어 가졌다. 즉 조(趙)나라는 대(代)와 구주산 북쪽을 차지하고, 위나라는 하서(河西)와 상군(上郡)을 차지해 융과 경계를 맞대었다. 그 후에 의거(義渠)의 융족들은 스스로 성곽을 쌓고 지키고 있었으나 진(秦)나라가 그들의 땅을 잠식해 들어가 진나라 혜왕(惠王) 때에 이르러 마침내 의거의 25성을 차지했다. 또 혜왕은 위(魏)나라를 침공하여 위나라의 서하(西河)와 상군을 전부 점령했다.
진(秦)나라 소왕(昭王) 때 의거의 융왕이 소왕의 어머니 선태후(宣太后)와 사통해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선태후는 의거의 융왕을 속여 감천궁(甘泉宮)으로 유인하여 그를 죽이고, 이어 군사를 일으켜 의거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그래서 진나라는 농서(隴西), 북지(北地), 상군을 차지하고 거기에 장성을 쌓아 융적의 침입을 막았다.
한편 조(趙)나라의 무령왕(武靈王)은 조나라의 풍속을 개혁해 군사들에게 호복을 입고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가르쳐 북쪽으로 임호와 누번을 무찌르고 그곳에 장성을 쌓고 대(代)에서부터 음산(陰山)산맥 기슭을 따라 고궐(高闕)에 이르는 지역을 요새지로 만들었다. 조나라는 그 땅에 운중(雲中), 안문(雁門), 대(代) 등 군을 설치했다.
그 후에 연나라의 명장 진개(秦開)가 흉노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그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연나라로 돌아온 후, 군대를 이끌고 동호를 습격해 패주시켰다. 이때 동호는 1천여 리나 물러갔다. 형가(荊軻)와 함께 진시왕을 암살하려던 진무양(秦舞陽)은 진개의 손자다. 연나라 역시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르는 지역에 장성을 쌓고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 등에 군을 설치하여 북방 오랑캐를 방어했다.
당시 중국에는 경제와 문화가 발달한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있었는데 그중 세 나라가 흉노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그 후에 조나라 장군 이목(李牧)이 있는 동안은 흉노가 감히 조나라 국경을 침범하지 못했다. 뒤에 진(秦)나라가 6국을 멸망시키고 시황제(始皇帝)는 몽염(蒙恬)에게 10만 명의 군사를 주어 북쪽의 흉노를 공격하여 하투(河套) 이남 땅을 모두 진나라의 영토로 만들었다.
또 황하를 이용해 요새를 만드는 한편, 황하의 강변을 따라 44곳에 현성(縣城)을 축조하고, 죄수들로 이루어진 병사를 옮겨다가 이를 지키게 했다. 그리고 직도(直道)를 만들어 구원(九原)에서 운양(雲陽)에까지 개통시켰다. 또한 험준한 산맥, 구릉, 계곡을 따라 참호로 삼아 보충해야 할 곳은 손을 더 보아서 임조(臨洮)를 기점으로 요동에 이르기까지 만여 리에 달하는 장성을 쌓았다. 또 황하를 건너가 양산(陽山)에 거점을 마련하고 북가(北假) 사이를 점령했다.
당시는 동호의 세력이 강하고 월지(月氏)도 번창했다. 그 때에 흉노의 선우(單于)는 두만(頭曼)이었다. 두만은 진(秦)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여 북쪽으로 옮겨 살았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에 몽염이 죽고 과거 육국의 귀족들은 진나라에 반기를 들자 중국은 온통 혼란상태가 되고 진나라가 변경을 지키기 위해서 보냈던 수비병들은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흉노는 마음 놓고 다시 점차 황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 옛날의 요새를 경계로 삼아 중국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두만 선우에게는 묵돌(冒頓)이란 태자가 있었다. 그러나 뒤에 총애하는 연지(閼氏)에게서 다시 작은아들을 낳은 선우는 묵돌을 폐하고 작은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그래서 선우는 묵돌을 월지에 인질로 보냈다. 묵돌이 월지에 인질로 가 있을 때, 두만은 갑자기 월지를 공격했다. 월지는 선우의 예상대로 묵돌을 죽이려고 했으나 묵돌은 준마를 훔쳐 타고 본국으로 도망쳐 왔다.
두만은 의도했던 계획에서 벗어났지만 묵돌의 용기를 장하게 여겨 묵돌에게 만 명의 기병을 주고 이끌게 했다. 그러자 묵돌은 명적(鳴鏑: 발사하면 소리 나는 화살)을 만들어서 부하들에게 나누어주고 그것으로 말 타고 활 쏘는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 “내가 명적을 쏘거든 다 같이 그 곳을 활을 쏘아라. 명령에 따르지 자는 모두 죽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냥을 나갔을 때 묵돌은 자신이 명적을 쏘아댄 곳에 쏘지 않는 자는 가차 없이 잡아 죽였다. 그 뒤 묵돌은 명적을 자기가 타건 애마에게 날렸다. 그러자 좌우에서 차마 쏘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묵돌은 당장에 그들을 잡아 죽였다. 그리고 다시 얼마 후에 그는 또 명적을 자기의 사랑하는 처에게 날렸다. 좌우기병 중에 겁이 난 나머지 감히 쏘지 못하는 자가 있자 묵돌은 그들 역시 사정없이 죽여 버렸다.
또다시 얼마 뒤에 묵돌은 사냥에 참가해서 명적을 선우가 타고 있는 말에 날렸다. 그러자 부하들은 모두 일제히 거기에 쏘아댔다. 이제야 비로소 묵돌은 부하 기병들 전원이 자신의 명령에 따른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그 다음 자신의 아비인 두만 선우를 따라 사냥에 나갔을 때에 그는 명적을 아비 두만에게 날렸다. 그의 좌우 부하들은 일제히 명적이 향하는 곳에 화살을 쏘아 두만 선우를 죽였다. 묵돌은 잇달아 그의 계모와 이복동생 및 자신을 따르지 않는 대신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 스스로 선우의 자리에 올랐다.
묵돌이 선우가 되었을 때에 동호의 세력이 강성했다. 묵돌이 자기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것을 들은 동호는 묵돌에게 사자를 보내 두만이 가지고 있던 천리마를 얻고 싶다고 청했다. 이에 묵돌이 신하들의 의견을 묻자, 신하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천리마는 흉노의 보배입니다. 그들에게 주지 마십시오.” 그러나 묵돌은 이렇게 말했다. “서로 이웃 나라인데, 어떻게 말 한 마리를 아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결국 천리마를 동호에 보내주었다.
얼마 뒤에는 동호는 묵돌이 자신들을 무서워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다시 사자를 보내 선우의 연지 중에 한 사람을 달라고 청했다. 묵돌이 또 좌우 신하들에 물었다.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성을 내며 말했다. “동호는 매우 무례합니다. 감히 선우의 연지를 요구하다니, 즉시 출병해서 그들을 공격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도 묵돌은 이렇게 말했다. “남과 나라와 이웃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여자 하나를 아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드디어 총애하던 연지 한 사람을 골라 동호에게 보내주었다. 동호는 더욱 교만해져서 서쪽으로 흉노의 변경을 침범해 왔다. 당시 동호와 흉노 사이에는 1천여 리에 걸쳐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황무지가 버려져 있었다. 쌍방은 각각 자기들의 변경의 지형에 따라서 그곳에 수비초소를 세워놓고 있었다.
동호는 또다시 사자를 보내 묵돌에게 이렇게 전했다. “흉노와 우리가 경계하고 있는 수비초소 이외의 황무지는 흉노로서는 어차피 소용없는 땅이니, 우리가 갖도록 하겠소!” 묵돌은 이 문제에 대해 좌우의 대신들에게 또다시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몇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그 땅은 어차피 버려진 황무지입니다. 주어도 좋고 안 주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묵돌은 대노하여 이렇게 말했다.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 어떻게 그들에게 넘겨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는 주어도 좋다고 한 자들을 모조리 참수했다.
묵돌은 그 즉시 말에 올라 나라 안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이번 출전에서 도망가는 자는 그 자리에 즉시 죽이겠다.” 그리고 마침내 동쪽으로 동호를 습격했다. 동호는 처음부터 묵돌을 얕잡아보고 있어서 흉노에 대한 방비를 거의 하지 않았다. 묵돌이 군사를 이끌고 습격해 순식간에 동호의 군사를 격파하고 그 왕을 잡아 죽였으며 백성들과 가축을 빼앗았다. 그리고 본국으로 개선한 묵돌은 이번에는 서쪽의 월지국을 공격하여 격파시키고, 남쪽으로 누번왕, 백양하남왕(白羊河南王) 등의 영토를 병탄했다.
또 연과 대를 공격해 일찍이 진나라의 몽염에게 빼앗겼던 흉노 땅을 모조리 되찾았다. 본래 흉노는 하남의 요새를 기점으로 한나라와 경계를 삼았는데, 그곳에 관문을 설치해서 조나(朝那), 부시(膚施)에까지 이르렀고, 더 나아가서는 연과 대에까지 침범하게 되었다. 당시 한나라 군대는 항우(項羽)와 서로 대치하느라 중원 천하는 전쟁으로 피폐해 있었다. 이 때문에 묵돌은 손쉽게 흉노의 세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당시 흉노에게는 활쏘기에 능한 군사만 해도 30만 명이나 되었다.
흉노의 선우는 순유(淳維)에서 두만(頭曼)에 이르기까지 천여 년 동안 혹은 강성하고 혹은 약소해지기를 반복했으며 이합집산 또한 무상했다. 그래서 흉노 선우의 계보를 차례대로 기록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묵돌의 대에 들어와 흉노는 가장 강성해져서 북방 오랑캐들을 모두 복종시키고 남쪽으로는 중국과 대적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대대로 전해오는 관직 명칭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置左右賢王,左右谷蠡王,左右大將,左右大都尉,左右大當戶,左右骨都侯。匈奴謂賢曰「屠耆」,故常以太子爲左屠耆王。自如左右賢王以下至當戶,大者萬騎,小者數千,凡二十四長,立號曰「萬騎」。諸大臣皆世官。呼衍氏,蘭氏,其後有須卜氏,此三姓其貴種也。諸左方王將居東方,直上谷以往者,東接穢貉、朝鮮;右方王將居西方,直上郡以西,接月氏、氐、羌;而單于之庭直代、雲中:各有分地,逐水草移徙。而左右賢王、左右谷蠡王最爲大(國),左右骨都侯輔政。諸二十四長亦各自置千長、百長、什長、裨小王、相、封都尉、當戶、且渠之屬。
歳正月,諸長小會單于庭,祠。五月,大會蘢城,祭其先、天地、鬼神。秋,馬肥,大會蹛林,課校人畜計。其法,拔刃尺者死,坐盜者沒入其家;有罪小者軋,大者死。獄久者不過十日,一國之囚不過數人。而單于朝出營,拜日之始生,夕拜月。其坐,長左而北鄉。日上戊己。其送死,有棺槨金銀衣裘,而無封樹喪服;近幸臣妾從死者,多至數千百人。舉事而候星月,月盛壯則攻戰,月虧則退兵。其攻戰,斬首虜賜一卮酒,而所得鹵獲因以予之,得人以爲奴婢。故其戰,人人自爲趣利,善爲誘兵以冒敵。故其見敵則逐利,如鳥之集;其困敗,則瓦解雲散矣。戰而扶輿死者,盡得死者家財。
後北服渾庾、屈射、丁零、鬲昆、薪犁之國。於是匈奴貴人大臣皆服,以冒頓單于爲賢。
是時漢初定中國,徙韓王信於代,都馬邑。匈奴大攻圍馬邑,韓王信降匈奴。匈奴得信,因引兵南踰句注,攻太原,至晉陽下。高帝自將兵往擊之。會冬大寒雨雪,卒之墮指者十二三,於是冒頓詳敗走,誘漢兵。漢兵逐擊冒頓,冒頓匿其精兵,見其羸弱,於是漢悉兵,多步兵,三十二萬,北逐之。高帝先至平城,步兵未盡到,冒頓縱精兵四十萬騎圍高帝於白登,七日,漢兵中外不得相救餉。匈奴騎,其西方盡白馬,東方盡青駹馬,北方盡烏驪馬,南方盡騂馬。高帝乃使使閒厚遺閼氏,閼氏乃謂冒頓曰:「兩主不相困。今得漢地,而單于終非能居之也。且漢王亦有神,單于察之。」冒頓與韓王信之將王黃、趙利期,而黃、利兵又不來,疑其與漢有謀,亦取閼氏之言,乃解圍之一角。於是高帝令士皆持滿傅矢外鄉,從解角直出,竟與大軍合,而冒頓遂引兵而去。漢亦引兵而罷,使劉敬結和親之約。
是後韓王信爲匈奴將,及趙利、王黃等數倍約,侵盜代、雲中。居無幾何,陳豨反,又與韓信合謀擊代。漢使樊噲往擊之,復拔代、鴈門、雲中郡縣,不出塞。是時匈奴以漢將眾往降,故冒頓常往來侵盜代地。於是漢患之,高帝乃使劉敬奉宗室女公主爲單于閼氏,歳奉匈奴絮繒酒米食物各有數,約爲昆弟以和親,冒頓乃少止。後燕王盧綰反,率其黨數千人降匈奴,往來苦上谷以東。
高祖崩,孝惠、呂太后時,漢初定,故匈奴以驕。冒頓乃爲書遺高后,妄言。高后欲擊之,諸將曰:「以高帝賢武,然尚困於平城。」於是高后乃止,復與匈奴和親。
至孝文帝初立,復修和親之事。其三年五月,匈奴右賢王入居河南地,侵盜上郡葆塞蠻夷,殺略人民。於是孝文帝詔丞相灌嬰發車騎八萬五千,詣高奴,擊右賢王。右賢王走出塞。文帝幸太原。是時濟北王反,文帝歸,罷丞相擊胡之兵。
其明年,單于遺漢書曰:「天所立匈奴大單于敬問皇帝無恙。前時皇帝言和親事,稱書意,合歡。漢邊吏侵侮右賢王,右賢王不請,聽後義盧侯難氏等計,與漢吏相距,絕二主之約,離兄弟之親。皇帝讓書再至,發使以書報,不來,漢使不至,漢以其故不和,鄰國不附。今以小吏之敗約故,罰右賢王,使之西求月氏擊之。以天之福,吏卒良,馬彊力,以夷滅月氏,盡斬殺降下之。定樓蘭、烏孫、呼揭及其旁二十六國,皆以爲匈奴。諸引弓之民,并爲一家。北州已定,願寢兵休士卒養馬,除前事,復故約,以安邊民,以應始古,使少者得成其長,老者安其處,世世平樂。未得皇帝之志也,故使郎中系雩淺奉書請,獻橐他一匹,騎馬二匹,駕二駟。皇帝即不欲匈奴近塞,則且詔吏民遠舍。使者至,即遣之。」以六月中來至薪望之地。書至,漢議擊與和親孰便。公卿皆曰:「單于新破月氏,乘勝,不可擊。且得匈奴地,澤鹵,非可居也。和親甚便。」漢許之。
孝文皇帝前六年,漢遺匈奴書曰:「皇帝敬問匈奴大單于無恙。使郎中系雩淺遺朕書曰:『右賢王不請,聽後義盧侯難氏等計,絕二主之約,離兄弟之親,漢以故不和,鄰國不附。今以小吏敗約,故罰右賢王使西擊月氏,盡定之。願寢兵休士卒養馬,除前事,復故約,以安邊民,使少者得成其長,老者安其處,世世平樂。』朕甚嘉之,此古聖主之意也。漢與匈奴約爲兄弟,所以遺單于甚厚。倍約離兄弟之親者,常在匈奴。然右賢王事已在赦前,單于勿深誅。單于若稱書意,明告諸吏,使無負約,有信,敬如單于書。使者言單于自將伐國有功,甚苦兵事。服繡袷綺衣、繡袷長襦、錦袷袍各一,比余一,黃金飾具帶一,黃金胥紕一,繡十匹,錦三十匹,赤綈、綠繒各四十匹,使中大夫意、謁者令肩遺單于。」
後頃之,冒頓死,子稽粥立,號曰老上單于。
老上稽粥單于初立,孝文皇帝復遣宗室女公主爲單于閼氏,使宦者燕人中行說傅公主。說不欲行,漢彊使之。說曰:「必我行也,爲漢患者。」中行說既至,因降單于,單于甚親幸之。
初,匈奴好漢繒絮食物,中行說曰:「匈奴人眾不能當漢之一郡,然所以彊者,以衣食異,無仰於漢也。今單于變俗好漢物,漢物不過什二,則匈奴盡歸於漢矣。其得漢繒絮,以馳草棘中,衣袴皆裂敝,以示不如旃裘之完善也。得漢食物皆去之,以示不如湩酪之便美也。」於是說教單于左右疏記,以計課其人眾畜物。
漢遺單于書,牘以尺一寸,辭曰「皇帝敬問匈奴大單于無恙」,所遺物及言語云云。中行說令單于遺漢書以尺二寸牘,及印封皆令廣大長,倨傲其辭曰「天地所生日月所置匈奴大單于敬問漢皇帝無恙」,所以遺物言語亦云云。
漢使或言曰:「匈奴俗賤老。」中行說窮漢使曰:「而漢俗屯戍從軍當發者,其老親豈有不自脫溫厚肥美以齎送飲食行戍乎?」漢使曰:「然。」中行說曰:「匈奴明以戰攻爲事,其老弱不能鬬,故以其肥美飲食壯健者,蓋以自爲守衛,如此父子各得久相保,何以言匈奴輕老也?」漢使曰:「匈奴父子乃同穹廬而臥。父死,妻其後母;兄弟死,盡取其妻妻之。無冠帶之飾,闕庭之禮。」中行說曰:「匈奴之俗,人食畜肉,飲其汁,衣其皮;畜食草飲水,隨時轉移。故其急則人習騎射,寬則人樂無事,其約束輕,易行也。君臣簡易,一國之政猶一身也。父子兄弟死,取其妻妻之,惡種姓之失也。故匈奴雖亂,必立宗種。今中國雖詳不取其父兄之妻,親屬益疏則相殺,至乃易姓,皆從此類。且禮義之敝,上下交怨望,而室屋之極,生力必屈。夫力耕桑以求衣食,築城郭以自備,故其民急則不習戰功,緩則罷於作業。嗟土室之人,顧無多辭,令喋喋而佔佔,冠固何當?」
自是之後,漢使欲辯論者,中行說輒曰:「漢使無多言,顧漢所輸匈奴繒絮米糱,令其量中,必善美而己矣,何以爲言乎?且所給備善則已;不備,苦惡,則候秋孰,以騎馳蹂而稼穡耳。」日夜教單于候利害處。
漢孝文皇帝十四年,匈奴單于十四萬騎入朝那、蕭關,殺北地都尉卬,虜人民畜產甚多,遂至彭陽。使奇兵入燒回中宮,候騎至雍甘泉。於是文帝以中尉周舍、郎中令張武爲將軍,發車千乘,騎十萬,軍長安旁以備胡寇。而拜昌侯盧卿爲上郡將軍,甯侯魏遬爲北地將軍,隆慮侯周灶爲隴西將軍,東陽侯張相如爲大將軍,成侯董赤爲前將軍,大發車騎往擊胡。單于留塞內月餘乃去,漢逐出塞即還,不能有所殺。匈奴日已驕,歳入邊,殺略人民畜產甚多,雲中、遼東最甚,至代郡萬餘人。漢患之,乃使使遺匈奴書。單于亦使當戶報謝,復言和親事。
孝文帝後二年,使使遺匈奴書曰:「皇帝敬問匈奴大單于無恙。使當戶且居雕渠難、郎中韓遼遺朕馬二匹,已至,敬受。先帝制:長城以北,引弓之國,受命單于;長城以內,冠帶之室,朕亦制之。使萬民耕織射獵衣食,父子無離,臣主相安,俱無暴逆。今聞渫惡民貪降其進取之利,倍義絕約,忘萬民之命,離兩主之驩,然其事已在前矣。書曰:『二國已和親,兩主驩說,寢兵休卒養馬,世世昌樂,闟然更始。』朕甚嘉之。聖人者日新,改作更始,使老者得息,幼者得長,各保其首領而終其天年。朕與單于俱由此道,順天恤民,世世相傳,施之無窮,天下莫不咸便。漢與匈奴鄰國之敵,匈奴處北地,寒,殺氣早降,故詔吏遺單于秫糱金帛絲絮佗物歳有數。今天下大安,萬民熙熙,朕與單于爲之父母。朕追念前事,薄物細故,謀臣計失,皆不足以離兄弟之驩。朕聞天不頗覆,地不偏載。朕與單于皆捐往細故,俱蹈大道,墮壞前惡,以圖長久,使兩國之民若一家子。元元萬民,下及魚鱉,上及飛鳥,跂行喙息蠕動之類,莫不就安利而辟危殆。故來者不止,天之道也。俱去前事:朕釋逃虜民,單于無言章尼等。朕聞古之帝王,約分明而無食言。單于留志,天下大安,和親之後,漢過不先。單于其察之。」
單于既約和親,於是制詔御史曰:「匈奴大單于遺朕書,言和親已定,亡人不足以益眾廣地,匈奴無入塞,漢無出塞,犯(令)[今]約者殺之,可以久親,后無咎,俱便。朕已許之。其布告天下,使明知之。」
後四歳,老上稽粥單于死,子軍臣立爲單于。既立,孝文皇帝復與匈奴和親。而中行說復事之。
軍臣單于立四歳,匈奴復絕和親,大入上郡、雲中各三萬騎,所殺略甚眾而去。於是漢使三將軍軍屯北地,代屯句注,趙屯飛狐口,緣邊亦各堅守以備胡寇。又置三將軍,軍長安西細柳、渭北棘門、霸上以備胡。胡騎入代句注邊,烽火通於甘泉、長安。數月,漢兵至邊,匈奴亦去遠塞,漢兵亦罷。後歳餘,孝文帝崩,孝景帝立,而趙王遂乃陰使人於匈奴。吳楚反,欲與趙合謀入邊。漢圍破趙,匈奴亦止。自是之後,孝景帝復與匈奴和親,通關市,給遺匈奴,遣公主,如故約。終孝景時,時小入盜邊,無大寇。
今帝即位,明和親約束,厚遇,通關市,饒給之。匈奴自單于以下皆親漢,往來長城下。
漢使馬邑下人聶翁壹奸蘭出物與匈奴交,詳爲賣馬邑城以誘單于。單于信之,而貪馬邑財物,乃以十萬騎入武州塞。漢伏兵三十餘萬馬邑旁,御史大夫韓安國爲護軍,護四將軍以伏單于。單于既入漢塞,未至馬邑百餘里,見畜布野而無人牧者,怪之,乃攻亭。是時鴈門尉史行徼,見寇,葆此亭,知漢兵謀,單于得,欲殺之,尉史乃告單于漢兵所居。單于大驚曰:「吾固疑之。」乃引兵還。出曰:「吾得尉史,天也,天使若言。」以尉史爲「天王」。漢兵約單于入馬邑而縱,單于不至,以故漢兵無所得。漢將軍王恢部出代擊胡輜重,聞單于還,兵多,不敢出。漢以恢本造兵謀而不進,斬恢。自是之後,匈奴絕和親,攻當路塞,往往入盜於漢邊,不可勝數。然匈奴貪,尚樂關市,嗜漢財物,漢亦尚關市不絕以中之。
自馬邑軍後五年之秋,漢使四將軍各萬騎擊胡關市下。將軍衛青出上谷,至蘢城,得胡首虜七百人。公孫賀出雲中,無所得。公孫敖出代郡,爲胡所敗七千餘人。李廣出鴈門,爲胡所敗,而匈奴生得廣,廣後得亡歸。漢囚敖、廣,敖、廣贖爲庶人。其冬,匈奴數入盜邊,漁陽尤甚。漢使將軍韓安國屯漁陽備胡。其明年秋,匈奴二萬騎入漢,殺遼西太守,略二千餘人。胡又入敗漁陽太守軍千餘人,圍漢將軍安國,安國時千餘騎亦且盡,會燕救至,匈奴乃去。匈奴又入鴈門,殺略千餘人。於是漢使將軍衛青將三萬騎出鴈門,李息出代郡,擊胡。得首虜數千人。其明年,衛青復出雲中以西至隴西,擊胡之樓煩、白羊王於河南,得胡首虜數千,牛羊百餘萬。於是漢遂取河南地,築朔方,復繕故秦時蒙恬所爲塞,因河爲固。漢亦棄上谷之什辟縣造陽地以予胡。是歳,漢之元朔二年也。
其後冬,匈奴軍臣單于死。軍臣單于弟左谷蠡王伊稚斜自立爲單于,攻破軍臣單于太子於單。於單亡降漢,漢封於單爲涉安侯,數月而死。
伊稚斜單于既立,其夏,匈奴數萬騎入殺代郡太守恭友,略千餘人。其秋,匈奴又入鴈門,殺略千餘人。其明年,匈奴又復復入代郡、定襄、上郡,各三萬騎,殺略數千人。匈奴右賢王怨漢奪之河南地而築朔方,數爲寇,盜邊,及入河南,侵擾朔方,殺略吏民其眾。
其明年春,漢以衛青爲大將軍,將六將軍,十餘萬人,出朔方、高闕擊胡。右賢王以爲漢兵不能至,飲酒醉,漢兵出塞六七百里,夜圍右賢王。右賢王大驚,脫身逃走,諸精騎往往隨後去。漢得右賢王眾男女萬五千人,裨小王十餘人。其秋,匈奴萬騎入殺代郡都尉朱英,略千餘人。
其明年春,漢復遣大將軍衛青將六將軍,兵十餘萬騎,乃再出定襄數百里擊匈奴,得首虜前後凡萬九千餘級,而漢亦亡兩將軍,軍三千餘騎。右將軍建得以身脫,而前將軍翕侯趙信兵不利,降匈奴。趙信者,故胡小王,降漢,漢封爲翕侯,以前將軍與右將軍并軍分行,獨遇單于兵,故盡沒。單于既得翕侯,以爲自次王,用其姊妻之,與謀漢。信教單于益北絕幕,以誘罷漢兵,徼極而取之,無近塞。單于從其計。其明年,胡騎萬人入上谷,殺數百人。
其明年春,漢使驃騎將軍去病將萬騎出隴西,過焉支山千餘里,擊匈奴,得胡首虜(騎)萬八千餘級,破得休屠王祭天金人。其夏,驃騎將軍復與合騎侯數萬騎出隴西、北地二千里,擊匈奴。過居延,攻祁連山,得胡首虜三萬餘人,裨小王以下七十餘人。是時匈奴亦來入代郡、鴈門,殺略數百人。漢使博望侯及李將軍廣出右北平,擊匈奴左賢王。左賢王圍李將軍,卒可四千人,且盡,殺虜亦過當。會博望侯軍救至,李將軍得脫。漢失亡數千人,合騎侯後驃騎將軍期,及與博望侯皆當死,贖爲庶人。
其秋,單于怒渾邪王、休屠王居西方爲漢所殺虜數萬人,欲召誅之。渾邪王與休屠王恐,謀降漢,漢使驃騎將軍往迎之。渾邪王殺休屠王,并將其眾降漢。凡四萬餘人,號十萬。於是漢已得渾邪王,則隴西、北地、河西益少胡寇,徙關東貧民處所奪匈奴河南、新秦中以實之,而減北地以西戍卒半。其明年,匈奴入右北平、定襄各數萬騎,殺略千餘人而去。
其明年春,漢謀曰「翕侯信爲單于計,居幕北,以爲漢兵不能至」。乃粟馬發十萬騎,(負)私[負]從馬凡十四萬匹,糧重不與焉。令大將軍青、驃騎將軍去病中分軍,大將軍出定襄,驃騎將軍出代,咸約絕幕擊匈奴。單于聞之,遠其輜重,以精兵待於幕北。與漢大將軍接戰一日,會暮,大風起,漢兵縱左右翼圍單于。單于自度戰不能如漢兵,單于遂獨身與壯騎數百潰漢圍西北遁走。漢兵夜追不得。行斬捕匈奴首虜萬九千級,北至闐顏山趙信城而還。
單于之遁走,其兵往往與漢兵相亂而隨單于。單于久不與其大眾相得,其右谷蠡王以爲單于死,乃自立爲單于。真單于復得其眾,而右谷蠡王乃去其單于號,復爲右谷蠡王。
漢驃騎將軍之出代二千餘里,與左賢王接戰,漢兵得胡首虜凡七萬餘級,左賢王將皆遁走。驃騎封於狼居胥山,禪姑衍,臨翰海而還。
是後匈奴遠遁,而幕南無王庭。漢度河自朔方以西至令居,往往通渠置田,官吏卒五六萬人,稍蠶食,地接匈奴以北。
初,漢兩將軍大出圍單于,所殺虜八九萬,而漢士卒物故亦數萬,漢馬死者十餘萬。匈奴雖病,遠去,而漢亦馬少,無以復往。匈奴用趙信之計,遣使於漢,好辭請和親。天子下其議,或言和親,或言遂臣之。丞相長史任敞曰:「匈奴新破,困,宜可使爲外臣,朝請於邊。」漢使任敞於單于。單于聞敞計,大怒,留之不遣。先是漢亦有所降匈奴使者,單于亦輒留漢使相當。漢方復收士馬,會驃騎將軍去病死,於是漢久不北擊胡。
數歳,伊稚斜單于立十三年死,子烏維立爲單于。是歳,漢元鼎三年也。烏維單于立,而漢天子始出巡郡縣。其後漢方南誅兩越,不擊匈奴,匈奴亦不侵入邊。
烏維單于立三年,漢已滅南越,遣故太仆賀將萬五千騎出九原二千餘里,至浮苴井而還,不見匈奴一人。漢又遣故從驃侯趙破奴萬餘騎出令居數千里,至匈河水而還,亦不見匈奴一人。
是時天子巡邊,至朔方,勒兵十八萬騎以見武節,而使郭吉風告單于。郭吉既至匈奴,匈奴主客問所使,郭吉禮卑言好,曰:「吾見單于而口言。」單于見吉,吉曰:「南越王頭已懸於漢北闕。今單于(能)即[能]前與漢戰,天子自將兵待邊;單于即不能,即南面而臣於漢。何徒遠走,亡匿於幕北寒苦無水草之地,毋爲也。」語卒而單于大怒,立斬主客見者,而留郭吉不歸,遷之北海上。而單于終不肯爲寇於漢邊,休養息士馬,習射獵,數使使於漢,好辭甘言求請和親。
漢使王烏等窺匈奴。匈奴法,漢使非去節而以墨黥其面者不得入穹廬。王烏,北地人,習胡俗,去其節,黥面,得入穹廬。單于愛之,詳許甘言,爲遣其太子入漢爲質,以求和親。
漢使楊信於匈奴。是時漢東拔穢貉、朝鮮以爲郡,而西置酒泉郡以鬲絕胡與羌通之路。漢又西通月氏、大夏,又以公主妻烏孫王,以分匈奴西方之援國。又北益廣田至胘雷爲塞,而匈奴終不敢以爲言。是歳,翕侯信死,漢用事者以匈奴爲已弱,可臣從也。楊信爲人剛直屈彊,素非貴臣,單于不親。單于欲召入,不肯去節,單于乃坐穹廬外見楊信。楊信既見單于,說曰:「即欲和親,以單于太子爲質於漢。」單于曰:「非故約。故約,漢常遣翁主,給繒絮食物有品,以和親,而匈奴亦不擾邊。今乃欲反古,令吾太子爲質,無幾矣。」匈奴俗,見漢使非中貴人,其儒先,以爲欲說,折其辯;其少年,以爲欲刺,折其氣。每漢使入匈奴,匈奴輒報償。漢留匈奴使,匈奴亦留漢使,必得當乃肯止。
楊信既歸,漢使王烏,而單于復肴甘言,欲多得漢財物,紿謂王烏曰:「吾欲入漢見天子,面相約爲兄弟。」王烏歸報漢,漢爲單于築邸于長安。匈奴曰:「非得漢貴人使,吾不與誠語。」匈奴使其貴人至漢,病,漢予藥,欲愈之,不幸而死。而漢使路充國佩二千石印綬往使,因送其喪,厚葬直數千金,曰「此漢貴人也」。單于以爲漢殺吾貴使者,乃留路充國不歸。諸所言者,單于特空紿王烏,殊無意入漢及遣太子來質。於是匈奴數使奇兵侵犯邊。漢乃拜郭昌爲拔胡將軍,及浞野侯屯朔方以東,備胡。路充國留匈奴三歳,單于死。
烏維單于立十歳而死,子烏師廬立爲單于。年少,號爲兒單于。是歳元封六年也。自此之後,單于益西北,左方兵直雲中,右方直酒泉、燉煌郡。
兒單于立,漢使兩使者,一弔單于,一弔右賢王,欲以乖其國。使者入匈奴,匈奴悉將致單于。單于怒而盡留漢使。漢使留匈奴者前後十餘輩,而匈奴使來,漢亦輒留相當。
是歳,漢使貳師將軍廣利西伐大宛,而令因杅將軍敖築受降城。其冬,匈奴大雨雪,畜多饑寒死。兒單于年少,好殺伐,國人多不安。左大都尉欲殺單于,使人閒告漢曰:「我欲殺單于降漢,漢遠,即兵來迎我,我即發。」初,漢聞此言,故築受降城,猶以爲遠。
其明年春,漢使浞野侯破奴將二萬餘騎出朔方西北二千餘里,期至浚稽山而還。浞野侯既至期而還,左大都尉欲發而覺,單于誅之,發左方兵擊浞野。浞野侯行捕首虜得數千人。還,未至受降城四百里,匈奴兵八萬騎圍之。浞野侯夜自出求水,匈奴閒捕,生得浞野侯,因急擊其軍。軍中郭縱爲護,維王爲渠,相與謀曰:「及諸校尉畏亡將軍而誅之,莫相勸歸。」軍遂沒於匈奴。匈奴兒單于大喜,遂遣奇兵攻受降城。不能下,乃寇入邊而去。其明年,單于欲自攻受降城,未至,病死。
兒單于立三歳而死。子年少,匈奴乃立其季父烏維單于弟右賢王呴犁湖爲單于。是歳太初三年也。
呴犁湖單于立,漢使光祿徐自爲出五原塞數百里,遠者千餘里,築城鄣列亭至廬朐,而使游擊將軍韓說、長平侯衛伉屯其旁,使彊弩都尉路博德築居延澤上。
其秋,匈奴大入定襄、雲中,殺略數千人,敗數二千石而去,行破壞光祿所築城列亭鄣。又使右賢王入酒泉、張掖,略數千人。會任文擊救,盡復失所得而去。是歳,貳師將軍破大宛,斬其王而還。匈奴欲遮之,不能至。其冬,欲攻受降城,會單于病死。
呴犁湖單于立一歳死。匈奴乃立其弟左大都尉且鞮侯爲單于。
漢既誅大宛,威震外國。天子意欲遂困胡,乃下詔曰:「高皇帝遺朕平城之憂,高后時單于書絕悖逆。昔齊襄公復九世之讎,春秋大之。」是歳太初四年也。
且鞮侯單于既立,盡歸漢使之不降者。路充國等得歸。單于初立,恐漢襲之,乃自謂「我兒子,安敢望漢天子!漢天子,我丈人行也」。漢遣中郎將蘇武厚幣賂遺單于。單于益驕,禮甚倨,非漢所望也。其明年,浞野侯破奴得亡歸漢。
其明年,漢使貳師將軍廣利以三萬騎出酒泉,擊右賢王於天山,得胡首虜萬餘級而還。匈奴大圍貳師將軍,幾不脫。漢兵物故什六七。漢復使因杅將軍敖出西河,與彊弩都尉會涿涂山,毋所得。又使騎都尉李陵將步騎五千人,出居延北千餘里,與單于會,合戰,陵所殺傷萬餘人,兵及食盡,欲解歸,匈奴圍陵,陵降匈奴,其兵遂沒,得還者四百人。單于乃貴陵,以其女妻之。
後二歳,復使貳師將軍將六萬騎,步兵十萬,出朔方。彊弩都尉路博德將萬餘人,與貳師會。游擊將軍說將步騎三萬人,出五原。因杅將軍敖將萬騎步兵三萬人,出鴈門。匈奴聞,悉遠其累重於余吾水北,而單于以十萬騎待水南,與貳師將軍接戰。貳師乃解而引歸,與單于連戰十餘日。貳師聞其家以巫蠱族滅,因并眾降匈奴,得來還千人一兩人耳。游擊說無所得。因杅敖與左賢王戰,不利,引歸。是歳漢兵之出擊匈奴者不得言功多少,功不得御。有詔捕太醫令隨但,言貳師將軍家室族滅,使廣利得降匈奴。
좌우현왕(左右賢王), 좌우녹려왕(左右谷蠡王), 좌우대장(左右大將), 좌우대도위(左右大都尉), 좌우대당호(左右大當戶), 좌우골도후(左右骨都侯) 등의 관직을 두었다.
흉노에서는 현명한 자를 ‘도기(屠耆)’라고 했기 때문에 언제나 태자가 좌도기왕(左屠耆王)이 되었다. 좌우의 현왕 이하 당호에 이르기까지 크게는 만 명에서 적게는 몇 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는 24장(長)이 있었다. 이들을 통상 ‘만기(萬騎)’라고 불렀다. 여러 대신들의 관직은 세습했다. 그중에서 호연씨(呼衍氏), 난씨(蘭氏), 뒤의 수복씨(須卜氏)까지의 세 성이 흉노의 전통적인 귀족가문이었다.
모든 좌방(左方)의 왕들과 장수들은 동쪽에 거주하고 상곡군(上谷郡)에서부터 동쪽으로 예맥(穢貉)과 조선(朝鮮)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우방(右方)의 왕들과 장수들은 서쪽에 거주하고, 상군에서부터 월지와 저(氐), 강(羌) 등의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또 선우의 왕정(王庭)은 대군(代郡), 운중군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일정한 영역이 있었고 물과 풀을 따라 옮겨 살았다. 그 중에서 좌우현왕과 좌우녹려왕의 영역이 가장 크고, 좌우골도후는 선우의 정치를 보좌했다.
24장(長)들은 또 각기 천장(千長), 백장(百長), 십장(什長), 비소왕(裨小王), 상봉(相封), 도위(都尉), 당호(當戶), 저거(且渠) 등의 속관을 두었다.
매년 정월에는 선우가 머물렀던 왕정에서 모든 장(長)들이 소집회를 열고 제사를 지냈다. 5월에는 용성(蘢城)에서 대집회를 열고 자신들의 선조와 천지신명과 귀신들에게 제사 지냈다. 가을에 말이 살찔 때에는 대림(蹛林)에서 대회를 열어 백성과 가축의 수효를 헤아렸다. 그들의 법은 칼로 일척(一尺) 이상의 상처를 낸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도둑질한 사람은 그의 가족과 재산을 몰수한다. 작은 죄를 경범죄를 범한 사람은 알형(軋刑: 죄인을 수레바퀴 밑에 깔아 뼈를 부수던 형벌의 일종)에 처하고, 중범죄를 범한 사람은 사형에 처했다. 죄인을 감옥에 가두어두는 것은 길어도 열흘 이내이며 감옥에 갇힌 사람은 나라 전체를 통틀어 몇 명에 불과했다.
선우는 아침에 막사에서 나와 떠오르는 해를 보고 절을 하고, 저녁에는 또 달을 보고 절을 했다. 그들이 자리를 앉을 때의 법도는 장자가 왼쪽을 차지하고 북쪽을 향해서 앉았다. 무일(戊日)과 기일(己日)을 길일로 여겼다. 그들의 장례 풍속은 관곽(棺槨)에 시신을 넣고, 그 속에 금은과 가죽옷들을 넣었는데, 무덤에 봉분을 하거나 나무를 심지 않았고 상복도 입지 않았다. 선우가 죽으면 총애했던 신하나 애첩들을 순장했는데, 많을 때에는 몇 십 명에서 백여 명에 이른 적도 있었다.
횽노에서 전쟁을 일으킬 때에는 항상 별과 달의 모양을 관찰하고 결정했다. 달이 커져서 둥글게 되면 공격을 하고 이지러지면 물러났다. 전투에서 적의 목을 베어거나 포로를 잡은 사람에게는 한 잔 술을 하사하고, 노획품은 본인에게 주는데, 적을 생포했을 경우에는 잡은 사람의 노비로 삼았다. 이 때문에 전투 중에 저마다 이득을 얻으려고 교묘히 적을 유인해 일시에 공격한 것에 능하다. 그래서 적을 발견하면 이득을 얻으려고 새떼처럼 모여들지만 일단 전투가 불리해져 패색이 짙어지면 구름이 흩어지듯 사라져버린다. 또한 전투에서 자기 편 전사자를 거두어준 자에게그 전사자의 재산을 모두 주었다.
그 당시 묵돌은 북쪽으로 혼유(渾庾), 굴역(屈射), 정령(丁零), 격곤(鬲昆), 신려(薪犂) 등의 나라를 복속시켰다. 이 때문에 횽노의 귀족과 대신들은 모두 묵돌 선우에게 탄복하고 그를 현명하다고 여겼다.
이때 한(漢)나라가 중국 천하를 평정하고 한왕(韓王) 한신(韓信)을 대(代)의 땅으로 옮겨 마읍(馬邑)에 도읍을 정하게 하고 횽노를 막게 했다. 그러나 얼마 뒤에 흉노의 기습을 받아 마읍이 포위되자 한왕 한신은 흉노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흉노는 한신을 손아귀에 넣자 그 기세를 타서 군사를 이끌고 남하해 구주산을 넘어 태원(太原)까지 공격했고 마침내 진양성(晉陽城)까지 진격했다.
이에 고제(高帝)는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하여 횽노를 공격했으나 때마침 겨울이라 추위가 심하고 큰 눈이 내렸기 때문에 병사들 중에 동상자가 10분의 2~3이나 되었다. 그러자 묵돌은 거짓으로 도망치는 것처럼 가장해 한나라 군대를 유인했다. 한나라 군대는 묵돌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묵돌은 그들의 정예 부대를 숨겨두었는데, 노새와 노약자로 가장한 군대를 맞서게 했다. 한나라는 이들을 보고 업신여긴 나머지 보병인 32만 명이 추격에 가담했다.
고제가 선봉대를 이끌고 먼저 평성(平城)에 입성했을 때였다. 이 때는 한나라의 본진이 도착하기도 전이었다. 묵돌의 정예 부대 40만 기병으로 하여금 고제를 백등산(白登山)으로 몰아넣고 포위했다. 한나라 선봉대는 7일 동안이나 본진과 단절되어 식량을 보급 받지 못했다.
당시 백등산을 포위한 흉노의 기병은 서쪽에는 백마(白馬), 동쪽에는 청색말, 북쪽에 흑색 말, 남쪽에는 붉은 말을 탄 기마대를 배치했다. 이에 큰 위협을 느낀 고제는 몰래 사자를 연지에게 보내 후한 선물을 보냈다. 그러자 연지는 묵돌에게 말했다.
“두 나라 임금이란 서로 곤궁한 처지로 몰아넣으면 안 됩니다. 지금 흉노가 한나라 땅을 얻는다고 해도 선우께서 결국 그곳에 살 수도 없습니다. 또한 한왕(漢王)은 하늘의 보우를 받는다고 합니다. 선우께서는 부디 심사숙고하시길 바랍니다.”
그때 마침 묵돌은 합류하기로 되어 있던 한왕(韓王) 한신의 장군 왕황(王黃), 조리(趙利) 등이 기일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묵돌은 그들이 혹시 한나라와 몰래 내통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했다. 그래서 잠시 연지의 말을 받아들여 포위망의 일부를 풀어주었다. 그리하자 고제는 군사들에게 활을 흉노 쪽으로 겨누게 하며 포위망이 풀린 쪽으로 빠져 나와 뒤따라오던 본진과 합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묵돌은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한나라 역시 군사를 이끌고 철수했으며, 유경(劉敬)을 사신으로 보내 묵돌과 화친의 조약을 맺도록 했다.
그 뒤 한왕 한신은 흉노의 장군이 되어 화친의 조약을 무시하고 조리, 왕황 등과 함께 대군(代郡)과 운중군에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진희(陳豨)가 반역을 도모하면서 한왕 한신과 내통해 대(代)의 땅을 공격했다.
한나라에서 번쾌(樊噲)를 파견해 진회를 토벌하게 했다. 번쾌는 대군, 안문, 운중의 여러 군현을 함락시켜 수복했으나 장성 밖으로는 나가지는 않았다. 그 때에 변경에 주둔했던 한나라의 장군 중에 흉노에 투항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묵돌은 자주 대의 땅를 침범하여 노략질했다.
이를 걱정한 고제는 유경을 시켜 종실의 딸을 자신의 공주라고 속여 선우의 연지로 보내주고, 매해마다 흉노에게 무명, 비단, 누룩, 곡식 등을 보내주기로 하고 형제의로써 화친을 맺게 하였다. 그러자 묵돌도 잠시 한나라 땅에서 노략질을 중지했다. 뒤에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나라를 배반해 그의 일당 수천 명을 거느리고 흉노에게 투항하자 묵돌은 상곡군(上谷郡) 동쪽 지역에 출동하여 그곳의 백성들을 괴롭혔다.
고제가 붕어하고 효혜제(孝惠帝)가 즉위하고, 여태후(呂太后)가 섭정했을 때에 한나라는 중국 천하를 평정한 지 얼마 되지 않음을 틈타 흉노는 여전히 거만을 부렸다. 한 번은 묵돌은 고후(高后)에게 같이 살면 어떻겠냐는 망언의 편지를 보냈다.
격노한 고후는 묵돌을 정벌하려고 했으나 여러 장군들이 이렇게 만류했다.
“현명하시고 무예가 출중했던 고제께서도 과거 평성에서 포위당해 곤욕을 치렀습니다.” 그래서 고후는 흉노를 정벌할 생각을 포기하고 다시 그들과 화친했다.
한나라의 문제(文帝)가 즉위하자 화친의 약속을 다시 확인했다. 그런데 문제 3년(서기전 177년) 5월에 흉노의 우현왕(右賢王)이 하투(河套)의 남쪽 땅으로 침입하여 주둔하고 상군의 요새를 공격하여 그곳을 지키고 있던 한나라 쪽의 만이(蠻夷)들을 살해하고 약탈했다. 그래서 문제는 승상 관영(灌嬰)에게 명해 전차와 기병 8만 5천 명을 동원하여 고노(高奴)에 주둔 중인 우현왕을 공격하게 했다.
우현왕은 패하여 요새 밖으로 물러갔다. 그런데 문제가 태원(太原)으로 순행을 나간 틈을 타서 제북왕(濟北王) 유흥거(劉興居)이 반란을 일으켜서 문제는 서둘러 장안으로 되돌아왔다. 더불어 승상의 흉노 공격도 중지되고 말았다.
그 다음해 선우는 한나라에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하늘이 세우신 흉노 대선우가 삼가 황제에게 문안인사를 드립니다. 그간 무양(無恙)하셨습니까? 지난 번 황제께서 화친에 관한 말씀하신 취지는 제 마음에도 합당했습니다. 그런데 한나라 변경의 관리들이 우리 우현왕의 영지를 침범하여 모욕을 가하여 우현왕 또한 선우에게 상의함이 없이 휘하의 후의(後義), 노후(盧侯), 난지(難氏) 등의 계책을 받아들여 한나라 관리들과 서로 다투어 두 나라 임금의 약속을 깨트리고 형제로서의 우애를 이간시켰습니다.
황제로부터의 책망의 편지가 두 번이나 도착한지라 우리측에서도 사신을 보내 황제께 글로써 회답을 했는데 그 사신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한나라의 사신 또한 오지 않았소. 이런 이유로 한나라도 우리와 화친을 도모하지 않으면 우리도 한나라와 더 이상 친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한나라도 우리와 화친을 도모하지 않으면 우리도 한나라와 더 이상 친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흉노의 작은 관리가 두 나라의 화친 맹약을 깨트렸기 때문에 그 죄를 물어 우현왕에게 그 벌로써 서쪽으로 월지를 정벌하도록 했습니다. 다행히 하늘의 돕고 관리와 정예 병사와 강건한 말로써 월지국을 멸하고 항복한 적을 죽였습니다. 누란(樓蘭), 오손(烏孫), 호게(呼揭) 및 그 인접 26개국을 모두 평정해 이들을 모두 흉노에 병합했습니다. 이리하여 각 유목민족은 모두 한집안이 되었고, 북쪽 지방은 이미 안정을 찾았습니다.
원컨대 선우는 전쟁을 그치고 병사들을 쉬게 하며 말을 길러 앞서의 오해를 잊고 본래의 조약을 회복하여 이로써 변경의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당초의 친선관계로 되돌아가 어린 아이들이 탈 없이 자라고 늙은이들이 안정된 생활을 보낼 수 있게 해 대대로 태평세상을 칭송하게 만들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황제의 의향이 어떤지 알지 못하므로 낭중(郎中) 계우천(係雩淺)을 사신으로 보내 이 글을 받들어 올리는 바입니다. 더불어 낙타 한 마리와 기마 두 필, 수레를 끄는 말 두 사(駟)를 바치는 바입니다. 황제께서 만일 한나라 변방 요새 지대에 흉노가 접근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면 관리와 백성들에게 영을 내려 변방에서 멀리 떨어져 살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 사신이 도착하면 곧바로 무사히 돌려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흉노의 사신은 6월 중순에 신망(薪望)의 땅으로 왔다. 이어 서한이 조정에 보내지자, 한나라에서는 화친과 전쟁 중 어느 것을 택하느냐를 놓고 의논을 거듭했다. 그 결과 대신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선우는 지금 월지국을 격파하여 승세를 타고 있으니, 공격을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흉노의 땅은 차지해보아야 늪과 소금기가 많은 황무지뿐으로 그곳에 한나라 백성들이 살 수는 없습니다. 화친하는 편이 훨씬 유리합니다.” 이렇게 해 한나라는 선우의 요청을 허락했다.
문제 전원(前元) 6년(서기전 174년)에 한나라는 흉노 선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황제는 삼가 흉노의 대선우에게 안부를 묻으니 무양하십니까?. 그런데 낭중인 계우천을 통해서 짐에게 보내 온 글에 이르기를 ‘우현왕이 선우에게 상의함이 없이 휘하의 후의(後義), 노후(盧侯), 난지(難氏) 등의 계책을 받아들여 한나라 관리들과 서로 다투어 두 나라 임금의 약속을 깨트리고 형제로서의 우애를 이간시켰다고 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한나라가 흉노와 불화한다면 흉노도 한나라와 친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흉노의 작은 관리가 두 나라의 화친 맹약을 깨트렸기 때문에 그 죄를 물어 우현왕에게 그 벌로써 서쪽으로 월지를 정벌하여 모조리 평정시켰다고 하였습니다. 선우께서는 전쟁을 그치고 병사들을 쉬게 하며 말을 길러 앞서의 오해를 잊고 본래의 조약을 회복하여 이로써 변경의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당초의 친선관계로 되돌아가 어린 아이들이 탈 없이 자라고 늙은이들이 안정된 생활을 보낼 수 있게 해 대대로 태평세상을 칭송하게 만들었으면 싶다.’라고 했는데 짐은 심히 이를 가상히 여기는 바입니다. 이는 옛 성왕들의 뜻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한나라는 흉노와 형제가 되기로 약속했기에 선우에게 매우 후한 선물을 보내주고 있었으나 약조를 배반하고 형제로서의 친애하는 정을 떼어놓는 쪽은 언제나 흉노 쪽이었습니다. 그러나 우현왕의 일은 이미 이번 대사면령이 내리기 이전의 일이었으니 선우는 그를 너무 심하게 벌하지 말아주십시오. 만약 선우가 이쪽 서신의 뜻에 찬동해 귀국의 모든 관원들에게 분명히 고하여 약속을 저버리는 일이 없게 신용을 지키다면 짐 또한 삼가 선우의 서신에서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흉노 사신의 말에 의하면 선우께서는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여러 나라를 정벌하여 공을 세우고 군사의 일로 수고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짐이 특별히 대례복(大禮服)인 수겁기의(繡袷綺衣), 수겁장유(繡袷長襦), 금겁포(錦袷袍) 각각 한 벌, 비여(比余) 1개, 황금 식구대(飾具帶)와 서비(胥紕) 1개, 수놓은 비단 10필, 비단 30필, 붉은 비단과 푸른 비단 각각 40필을 중대부(中大夫) 의(意)와 알자령(謁者令) 견(肩)을 통해 선우에게 보내는 바입니다.”
그 뒤 얼마 후에 묵돌 선우가 죽자, 그의 아들 계육(稽粥)이 뒤를 이었다. 그는 스스로 노상선우(老上單于)라고 칭했다. 노상 선우가 즉위하자, 문제는 다시 종실의 딸을 공주라고 속여 흉노에게 보내 선우의 연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연나라 사람인 환관 중항열(中行說)로 하여금 공주를 보좌하게 했다. 중항열은 흉노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조정에서 강압적으로 그를 보내자, 중항열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면 반드시 한나라의 우환을 안겨 줄 것이다.” 중항열은 흉노 땅에 도착하자마자 선우에게 투항하자 곧 선우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흉노 사람들이 한나라의 비단, 무명, 음식 등 따위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중항열이 말했다.
“흉노의 인구는 한나라의 한 개의 군(郡)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흉노가 강한 것은 입고 먹는 것이 한나라와 다르고, 의존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선우께서 한나라의 풍습과 물자를 좋아하게 되면 그들의 물자의 10분의 2도 소비시키기도 전에 흉노는 모두 한나라에 귀속되고 말 것입니다.
한나라의 비단과 무명을 손에 넣으시게 되거든 그것을 입으시고 초원과 가시밭 사이를 달려보십시오. 옷과 바지가 모두 찢어져 못 쓰게 될 것입니다. 비단과 무명이 털로 짠 옷이나 가죽옷만큼 튼튼하고 좋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또 한나라의 음식을 얻게 되시거든 이를 모두 버리십시오. 그리하여 한나라의 음식보다 흉노의 젖과 유제품이 편리하고 맛있는 것을 따를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십시오.”
또 그는 선우의 좌우에 있는 신하들에게 기록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인구와 가축의 헤아려 기록하게 시켰다.
종래 한나라가 선우에게 편지를 보내올 때에 나무쪽은 한 자 한 치의 크기의 독(牘)에 첫머리의 형식을 이렇게 썼다.
“황제는 삼가 묻노니 흉노의 대선우는 무양하십니까? 그리고 보내주는 물건은……용건은……”과 같은 식이었다.
이에 중항열은 선우가 한나라에 글을 보낼 때에는 한 자 두 치의 크기의 나무쪽에 쓰게 하고, 도장과 봉투를 세로나 가로가 다 크게 하며, 글투도 거만스럽게 이렇게 썼다. “천지가 낳으시고 일월이 세우신 흉노의 대선우는 삼가 한나라 황제에게 문안하노니 무양하신가? 그리고 보내주는 물건은……용건은……”이라고 쓰게 했다.
어떤 한나라 사신이 말했다. “흉노의 노인을 천대하는 풍속이 있다.” 그러자 중항열은 그 한나라 사신에게 모질게 따져 물었다. “당신네 한나라 풍속에도 군역을 위해 수자리를 나가는 이들에게 그 늙은 부모가 스스로 자기들의 두껍고 따뜻한 옷을 벗어주고 살찌고 맛있는 음식을 군역에 가는 사람에게 주지 않는가?” 한나라 사신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중항열이 말했다.
“흉노는 전쟁에 나가서 전투하는 일을 가장 큰 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늙고 약한 사람은 전투에 나갈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건장한 사람들에게 먹이는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아야 부자가 각기 오랫동안 몸을 보존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흉노가 노인을 경시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한나라 사신이 또 이렇게 비난했다. “흉노는 부자(父子)가 같은 천막 속에 살며 아비가 죽으면 자식이 그 계모를 아내로 삼고, 형제가 죽으면 남아 있는 형이나 동생이 그의 아내를 맞아 자기 아내로 삼는다. 옷, 관, 허리띠도 없고, 조정에서의 의식과 예절도 없다.”
중항열이 또 이렇게 대답했다.
“흉노의 풍습에서는 사람은 가축의 고기를 먹고 그 젖을 마시며, 그 털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다. 가축은 풀을 먹고 물을 마시며 철에 따라 이동을 한다. 그러므로 급박할 때에는 사람들이 말 타고 활 쏘는 법을 익히고 평상시에는 일 없는 것을 즐긴다. 그들의 약속은 간편해 실행하기가 쉽다. 군신의 관계도 복잡하지 않고 쉬워서, 나라의 정치는 흡사 한 집안의 일같이 처리하고 있다. 부자형제가 죽으면 남은 사람이 그의 아내를 맞아 자기 아내로 하는 것은 대가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흉노는 결혼풍습은 비록 어지럽게 보이지만 본래의 종족을 그대로 유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은 비록 겉으로 아비나 형의 처를 취하지 않으나 친족관계가 거리가 멀어지게 되면 서로 죽이기까지 한다. 또한 역성혁명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는 모두 친족 간에 거리가 멀어져서 비롯된 것이다. 더욱이 예의의 폐단으로 충성이나 믿음의 마음도 없이 예의를 강요하기 때문에 위아래가 서로 원한으로 맺어져 있다. 또한 궁실과 가옥을 짓는데 지나치게 미적 감각을 추구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힘을 낭비하고 있다.
대개 힘써 밭갈이하고 누에를 길러 먹고 입는 것을 구하고, 성을 쌓아 방비를 하기 때문에 한나라 백성들은 전시에는 싸움을 익히지 못하고 평상시에는 생업에 지치고 만다. 슬프도다, 흙과 돌집에 살고 있는 한나라 사람이여 ! 겉만 화려하고 실속은 없는데, 관을 써보았자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 뒤로 한나라 사신이 와서 변론을 하려고 하면, 그때마다 중항열은 이렇게 말했다. “한나라 사신은 여러 말이 필요가 없다. 단지 한나라에서 흉노로 보내주기로 한 비단, 무명, 쌀, 누룩이 정확하고 품질이 좋으면 그만이다. 그밖에 다른 말은 할 필요가 있는가? 만일 보내주기로 한 물품이 제대로 수량이 맞고 질이 좋은 것이면 그만이지만, 수량도 맞지 않고 질도 나쁠 경우에는 곡식이 익는 가을을 기다렸다가 흉노의 기마부대가 농작물을 짓밟아버릴 것이다.”
그러고 중항열은 밤낮으로 선우에게 한나라로 쳐들어가는 데 편리한 시기와 지점에 대해 가르쳤다.
효문제 14년(서기전 166년), 흉노의 선우가 14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조나(朝那), 소관(蕭關)으로 침입하여 북지군(北地郡)의 도위(都尉) 손앙(孫卬)을 죽이고, 다수의 백성과 가축들을 노략질해 갔다. 그리고 드디어 팽양(彭陽)까지 진출해서 돌격부대를 풀어 회중궁(回中宮)을 불태우고, 척후(斥候)로 보낸 기병대는 옹(雍)에 있는 감천궁(甘泉宮)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효문제는 중위(中尉) 주사(周舍)와 낭중령(郎中令) 장무(張武)를 장군으로 해 전차 천승과 기병 10만 명을 동원하여 장안성(長安城) 주변에 진을 치고 흉노의 침입에 대비했다. 그리고 다시 창후(昌侯) 노경(盧卿)을 상군장군(上郡將軍), 영후(寧侯) 위속(魏遫)을 북지장군(北地將軍), 융려후(隆慮侯) 주조(周竈)를 농서장군(隴西將軍), 동양후(東陽侯) 장상여(張相如)를 대장군(大將軍), 성후(成侯) 동적(董赤)을 전장군(前將軍)에 각각 임명하고 대대적으로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선우는 장성 안의 요새에서 한 달 남짓 머물다가 물러갔다. 한나라 군사들은 그들을 뒤쫓아 요새 밖으로 나가기는 했으나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흉노는 날이 갈수록 교만해져서 해마다 국경을 침범하여 무수한 백성과 가축들을 살상하고 약탈했다. 특히 운중군(雲中郡)과 요동군(遼東郡)의 지역의 피해가 가장 심했고, 각 군의 희생자를 모두 합하면 만여 명에 달했다.
한나라는 이 사태를 심히 우려하여 사신을 보내 흉노에게 글을 전하고, 선우도 당호(當戶)에게 사자로 보내 사과를 하여 다시 화친에 대해서 의론했다.
그래서 효문제 후원(後元) 2년(서기전 162년)에 사신을 보내 흉노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한나라의 황제는 삼가 흉노의 대선우에게 문안하노니 그간 무양하셨습니까? 당호 겸 저거(且居) 조거난(雕渠難)과 낭중 한료(韓遼)를 사자로 삼아 짐에게 말 두필을 보내주었는데, 이미 도착해 삼가 잘 받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선제(先帝)의 조칙에는 ‘장성 이북의 활쏘기에 능한 나라에서는 백성들은 선우의 명을 받고, 장성 안의 의관속대(衣冠束帶)를 행하는 백성들은 짐이 다스린다. 천하 만백성에게 밭갈이와 베 짜기, 사냥에 의해 입고 먹게 하며 부자가 떨어지는 일이 없고 군주와 신하가 서로 편안히 해 함께 포악한 일을 하는 일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리는 바에 의하면 사악한 무리들이 탐욕스럽게도 이익에 눈이 멀어 의리를 배반하고 약조를 어기어 만민들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두 나라 임금의 우의를 갈라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이미 지나간 일이오. 선우가 보낸 글에 말하길 ‘두 나라는 이미 화친해 두 임금이 함께 즐기며, 전쟁을 멈추고 군사를 쉬게 하고 말을 길러 대대로의 번영과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 새 출발을 하고 싶다.’라고 했는데 짐은 심히 이를 가상히 여기는 바입니다.
짐과 선우가 성인의 도를 따라 날마다 새로워지고 허물을 고치면 늙은이를 편안히 지낼 수 있게 하고, 어린아이를 무사히 자라게 하며 백성들은 각기 생명을 보전해 천수를 누리게 할 수 있습니다.
짐과 선우가 함께 이 성인의 도를 따라 하늘에 순응하고 백성을 돌보며 대대로 서로 전해 이를 끝없이 베풀게 되면 천하의 만백성들이 그 이익을 누리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한나라와 흉노는 서로 이웃한 대등한 나라요. 흉노는 북쪽에 위치해 땅이 차고, 무서운 냉기가 일찍 옵니다. 그래서 짐은 관리에게 명해 선우에게 해마다 일정한 수량의 차조, 누룩, 금, 비단, 무명 그 밖의 물건들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지금 천하는 아주 평안하고 만백성은 삶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짐과 선우는 그들 만백성의 부모입니다.
짐이 지난 일을 돌이켜보건대 하찮은 작은 일들이었고, 모두 신하들의 잘못된 계책 때문에 벌어진 사태였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형제로서의 친목을 벌어지게 할 정도의 것은 아닙니다. 짐이 듣건대 하늘은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덮는 일이 없고, 땅은 고르지 못하게 치우쳐져 있지 않다 했습니다. 짐은 선우와 더불어 지난 작은 오해를 버리고 천지의 대도를 따라 과거의 잘못을 잊고, 장구한 계책을 세워 양국의 백성들을 한집안 자식처럼 살 수 있게 만들고 싶습니다.
선량한 만백성들로부터 아래로는 물고기와 자라, 위로는 날짐승에 이르기까지 발로 걸어 다니는 것, 입으로 숨을 쉬는 것,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 등까지도 모두 편안하게 살면서 이익을 찾아 위험으로부터 몸을 피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고로 찾아오는 것을 막지 않는 것은 하늘의 도리이니, 다 같이 지나간 일을 모두 잊어버립시다.
짐은 과거에 흉노로 도피한 한나라 사람들을 모두 용서하겠소. 선우도 장니(章尼)와 같은 자에 대해서 허물로 삼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짐이 듣건대 옛 제왕들은 약조는 극히 분명하게 하고 식언(食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선우가 화친에 뜻이 있다면 천하는 크게 안정되고 화친이 성사된 후에는 한나라가 먼저 약조를 어기는 잘못을 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우는 이 점을 잘 헤아려주시길 바랍니다.”
이에 선우도 화친을 약속했다. 그래서 문제는 어사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흉노의 대선우가 짐에게 글을 보내어 화친이 성사되었다고 알려왔다. 지금까지 흉노에서 한나라로 도망해온 사람들은 한나라의 인구를 늘리는데도 영토를 넓혀주는데도 도움이 될 수 없다. 흉노가 장성 안의 요새로 들어오지 않으면 한나라도 장성 밖으로 나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 규정을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이와 같이 하면 오래 화친이 유지될 것이고, 뒷날까지 문제가 생기지 않아서 두 나라가 다 이로울 것이다. 짐은 이미 선우의 화친에 응했으니, 바로 천하에 포고해 이를 모두에게 명확히 알리도록 하라!”
문제(文帝) 후원(後元) 4년(서기전 160년), 노상선우 계육이 죽고 그의 아들 군신(軍臣)이 뒤를 이어 선우가 되었다. 그래서 문제는 흉노와의 화친을 다시 맺었다.
그러나 중항열은 그대로 새 선우를 섬겼고, 마침내 군신선우 4년 만에 흉노가 또다시 화친을 끊고 상군(上郡)과 운중군에 각각 3만 명의 기병이 대거 침입해 와서 무수한 백성들을 죽이고 붙잡아갔다.
그래서 한나라는 장무(張武), 소의(蕭意), 영면(令勉) 세 장군을 보내 군사를 각기 북지(北地), 대(代)에서는 구주산(句注山), 조(趙)에서는 비호구(飛狐口)에 주둔시켰다. 또 변경 일대도 각각 군사를 파견하여 흉노의 침입에 대비하여 굳게 지키게 했다.
또 이것과는 별도로 주아부(周亞父), 서려(徐厲), 유례(劉禮) 세 장군들을 배치시켜, 장안 서쪽의 세류(細柳)와 위수(渭水) 북쪽의 극문(棘門), 패상(霸上)에 진을 치고 흉노에 침입에 대비하게 했다. 흉노의 기병이 다시 대의 구주산으로 침입해 변경의 봉화불이 감천(甘泉), 장안에 사이에 쉬지 않고 위급을 알려 한나라 군사가 변경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흉노는 이미 변방 요새로부터 멀리 떠나가 버린 뒤였다. 그래서 한나라 군사 역시 철수하고 말았다.
그리고 1년 남짓 뒤에 문제가 죽고 경제(景帝)가 즉위했다. 이 무렵 조왕(趙王) 유수(劉遂)가 몰래 사신을 흉노로 보내 내통했다. 그래서 오(吳), 초(楚) 등 칠국(七國)의 난이 일어났을 때, 흉노는 조나라와 짜고 한나라 변경으로 침입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나라가 조나라를 포위해서 함락시키자 흉노 역시 계획을 중지했다. 그 뒤 경제는 다시 흉노와의 화친을 재확인하고 본래의 약속대로 관문에서 교역시장을 열어 흉노에게 물자를 보급하고 공주를 시집보내 옛날처럼 약조를 잘 지켰다.
이로 인해서 경제 시대가 끝날 때까지 흉노는 때때로 소규모로 침입해 변경에서 노략질을 한 일은 있었으나 크게 침략한 일은 없었다.
금상 황제인 무제서 즉위하자, 다시 화친의 약조를 명확히 밝히고 흉노를 후하게 대우하고 관문을 통해 무역을 하고 많은 물자를 보급했다. 흉노는 선우 이하 모두가 한나라와 친근하게 여겨 장성 밑까지 자주 내왕했다. 이때 한나라는 마읍(馬邑) 성 밑에 사는 섭옹일(聶翁壹)로 하여금, 고의로 금령을 어기고 몰래 국경선을 넘어 흉노와 교역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섭옹일으로 하여금 거짓으로 마읍성을 흉노에게 팔아넘기는 척하며 선우를 유인도록 했다.
선우는 그의 말을 믿고 마읍의 재물을 탐해 10만 기병을 이끌고 무주(武州)의 요새로 침입했다. 이때 한나라에서는 마읍의 부근에 30여 만 명의 군사를 매복시켜 두었다. 어사대부 한안국(韓安國)이 호군(護軍)장군이 되어 네 장군을 통솔해 선우에 대비하고 있었다. 선우가 이미 한나라 요새를 넘어 들어왔으나 마읍까지 1백여 리밖에 안 되는 지점에서 온 들판에 가축이 떼 지어 있는데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방향을 돌려 초소인 정(亭)을 공격했다.
이때 안문(雁門)의 위사(尉史)가 순찰하다가 선우의 부대를 보고 그 정에 들어가 지키고 있었다. 선우가 그를 생포하여 심문하자 그는 한나라 군사의 계획을 토로하게 되었다.
선우는 크게 놀라며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즉시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 요새를 빠져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위사를 잡게 된 것은 천명이다. 하늘이 그 위사를 시켜 알려 준 것이다.” 그러고 그 위사를 ‘천왕(天王)’이라고 불렀다.
그때 한나라 군사들은 선우가 마읍성에 들어오면 군사를 출격시켜 선우를 공격하기로 약속을 정해두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선우가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런 전과가 없었다. 또한 한나라 장군 왕회(王恢)의 부대는 대군(代郡)에서 출격하여 흉노의 보급부대를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선우가 철수할 때에 군사가 많다는 것을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한나라에서는 원래 왕회가 원래 이번 작전의 입안자인데도 진격을 하지 않았다 해 그의 죄를 물어 참수형에 처했다.
그 후로 흉노는 한나라의 화친을 끊고 닥치는 대로 한나라 변방 요새를 공격해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나 탐욕스런 흉노는 여전히 관문에서의 교역을 유지하며 한나라 재물들을 탐익했다. 한나라에서도 관문에서의 교역만은 그대로 계속하게 유지함으로써 흉노를 달래려고 했다.
마읍 사건이 있은 지 5년이 지난 그해 가을, 한나라는 각각 만 명의 기병을 거느린 장군 4명에게 관문 교역장 주변의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장군 위청(衛靑)은 상곡군에서 출격해 용성(蘢城)에까지 진격하여 흉노의 수급과 포로 7백 명을 얻었다. 공손하(公孫賀)는 운중군에서 출격했으나 아무런 전과가 없었다. 공손오(公孫敖)는 대군(代郡)에서 출격했는데 흉노에게 패해서 7천여 명의 군사를 잃었고, 이광(李廣)은 안문에서 출격했다가 흉노에게 역시 패하여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돌아왔다. 한나라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공손오와 이광을 심판했는데, 그들은 속죄금을 물고 서민이 되었다.
그해 겨울, 흉노는 자주 변경으로 쳐들어와 약탈을 했는데 그중 어양군(漁陽郡)의 피해가 가장 컸다. 그래서 한나라는 장군 한안국을 어양에 주둔시켜 흉노의 침입에 대비했다. 그 이듬해 가을, 흉노의 기병 2만 명의 한나라에 침입해서 요서 태수(太守)를 죽이고 약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또한 흉노는 어양을 공격해 어양 태수의 군사 1천여 명을 격파하고 한나라 장군 한안국을 포위했다. 한안국의 군사는 그때 1천여 명밖에 되지 않았고, 그것마저 전멸 당하기 직전 상태에 놓여 있었는데, 때마침 연(燕)나라로부터의 구원병이 도착하여 흉노가 철수함으로써 위기를 면했다.
흉노는 또다시 안문에도 침입해 1천여 명의 백성들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그래서 한나라는 장군 위청에게 3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안문에서 출격해 흉노를 토벌하게 하고, 이식(李息)에게는 대군에서 출격해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그 결과 한나라 군대는 수천 명의 적의 머리를 베고, 포로를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그 다음해 위청은 또 운중에서 출격해 서쪽으로 나아가 농서(隴西)에까지 진격하여 하투(河套)이남 땅에 주둔한 흉노의 누번왕(樓煩王)과 백양왕(白羊王)을 공격하고, 수천 명의 적의 머리를 베고, 포로 수천 명, 그리고 소와 양 1백여 만 마리를 얻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하여 한나라는 드디어 하남 지역을 탈취하여 그곳에 삭방군(朔方郡)을 설치하고 옛날 진(秦)나라 때 몽염(蒙恬)이 만들었던 요새를 수복하고 황하를 따라 방비를 굳혔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나라는 상곡과 북쪽의 흉노 땅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조양(造陽) 땅을 흉노에게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해는 한나라 원삭(元朔) 2년(서기전 127년)이었다.
그 다음해 겨울, 흉노의 군신선우가 죽고 그의 아우였던 좌곡려왕(左谷蠡王) 이치타(伊稚斜)가 군신선우의 태자인 오단(於單)을 물리치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 오단은 도망쳐 한나라에 투항했는데, 한나라에서는 그를 섭안후(涉安侯)로 봉했지만 그는 몇 달 뒤에 죽고 말았다.
이지타선우(伊稚斜單于)가 즉위하자, 그해 여름에 흉노가 수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침입해서 대군 태수 공우(恭友)를 죽이고 1천여 명을 잡아갔다. 그해 가을, 흉노는 또다시 안문에 침입해서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그 다음해 흉노는 다시 또 대군, 정양군(定襄郡), 상군에 각각 3만 명의 기병이 침입해서 수천 명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흉노의 우현왕은 한나라가 자신의 하남 땅을 빼앗은 다음 삭방군을 설치한 것에 원한을 품고 자주 변경과 하남 일대를 침입하여 삭방군을 휩쓸고 다니며 수많은 관리들과 백성들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그 다음해 봄, 한나라는 위청을 대장군에 임명하고 그 휘하에 유격장군(游擊將軍) 소건(蘇建), 강노장군(彊弩將軍) 이저(李沮), 기장군(騎將軍) 공손하(公孫賀), 경거장군(輕車將軍) 이채(李蔡) 등 장군 6명과 10여 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삭방, 고궐(高闕)에서 출격해 흉노를 토벌하게 했다. 이때 우현왕은 한나라 군사가 자신이 있는 곳까지 쳐들어올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술을 마시고 취해 있었다. 한나라 군대가 요새에서 6백~7백리나 진격하여 밤에 갑자기 우현왕의 진영을 포위했다. 이에 크게 놀란 우현왕은 단신으로 도망쳐 달아났고, 정예기병들도 그 뒤를 따라 서둘러 달아났다.
한나라 군은 이 작전에서 우현왕에 휘하의 남녀 1만 5천 명과 비소왕(裨小王) 10여 명을 사로잡았다. 그해 가을, 흉노의 기병 만 명이 대군에 침입해서 도위 주영(朱英)을 죽이고 1천여 명을 잡아갔다. 그 다음해 봄, 한나라는 또다시 대장군 위청은 중장군(中將軍) 공손오, 좌장군 공손하, 전장군 조신(趙信), 우장군 소건(蘇建), 후장군 이광(李廣), 강노장군(强弩將軍) 이저(李沮) 등 장군 6명과 기병 10여 만 명을 거느리고 흉노를 토벌하게 했다. 위청은 다시 정양(定襄)에서 수백 리나 진출해서 흉노를 공격했는데, 전후를 통해서 적의 수급, 포로 모두 약 만 9천여 명을 얻었다.
그러나 한나라 군대도 장군 2명이 전사하고 3천여 명의 군사를 잃었다. 우장군(右將軍) 소건(蘇建)은 단신으로 간신히 탈출했고, 전장군(前將軍)인 흡후(翕侯) 조신(趙信)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흉노에게 투항했다. 조신은 원래 흉노의 소왕(小王)출신으로 한나라에 항복해 와서 한나라가 흡후로 봉해진 사람이었다. 그때 조신은 한나라의 전장군이 되어 우장군의 군사를 합쳐 주력부대와 떨어져 진군하다가 단독으로 선우의 대부대와 마주치게 되어 전멸되고 혼자 선우에게 투항했던 것이다.
선우는 흡후를 사로잡자, 자차왕(自次王)에 임명하고, 자신의 누이를 그에게 주어 부인으로 삼게 했다.
그리고 선우와 더불어 한나라에 대한 전략을 짰다. 조신은 선우에게 사막 북쪽으로 물러나 한나라 군사를 유인하여 피로하게 만든 다음 극도로 지쳐 있을 때에 공격을 하고, 요새에 가까이 접근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선우는 그의 계책을 따랐다. 그 다음해, 흉노의 기병 만 명이 상곡군에 침입해서 수백 명을 죽였다.
그 다음해 봄, 한나라는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에게 만 명을 거느리고 농서로부터 출격하게 했다. 곽거병은 언지산(焉支山)에서 1천여 리나 진격하여 흉노를 공격하여 흉노의 수급과 포로만 8천여 명을 얻었다. 그런 다음에 휴도왕(休屠王)을 무찌르고 휴도왕이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쓰는 황금상을 노획했다.
그해 여름, 표기장군은 또다시 합기후(合騎侯) 공손오와 함께 수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농서, 북지에서 출격하여 2천여 리나 진격해서 흉노를 공격했다. 그는 거연(居延)을 지나 기련산(祁連山)을 공격해서 흉노의 수급과 포로 3만여 명과 비소왕 이하 72여 명을 얻었다. 이때 흉노도 대군, 안문군으로 습격해 와서 수백 명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이에 한나라는 박망후(博望侯)와 장군 이광으로 하여금 우북평(右北平)에서 출격해 흉노의 좌현왕을 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이광 장군의 부대는 좌현왕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이광 장군의 군사는 4천 명 정도로 전멸할 지경이었으나 더 많은 수의 적을 죽였다. 때마침 박망후의 군사가 당도하여 구원했기 때문에 이광 장군은 겨우 위기를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 군사의 손실은 수천 명에 달했다. 이 때문에 표기장군과 약속 기일을 지켜오지 못한 합기후 공손오와 박망후 장건은 사형을 당할 처지였으나 두 사람 다 속죄금을 물고 서민이 되었다.
그해 가을, 선우는 흉노의 서쪽 지방을 지키던 혼야왕(渾邪王)과 휴도왕이 한나라 군사들에게 그의 병사 수만 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게 한 것을 분노하여 그들을 소환하여 죽이려고 했다. 이에 혼야왕과 휴도왕은 두려워서 한나라에 투항하려 하자 한나라에서는 표기장군을 시켜 이들을 맞이하도록 했다. 혼야왕은 휴도왕을 죽여 그의 군사와 종족들을 합쳐 거느리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그 수는 약 4만여 명이었는데 10만 명이라 통칭했다.
한나라에서는 혼야왕을 받아들이자 농서, 북지, 하서(河西)의 지역에서는 흉노의 침입이 훨씬 줄어들었다. 그래서 함곡관 동쪽의 땅에 살고 있는 가난한 백성들을 흉노에게 빼앗아 들인 하남과 신진중(新秦中)으로 옮겨 살게 해 그 지역을 충실히 하는 한편, 북지군 서쪽에 있는 수비병의 수를 절반으로 감축했다. 그 다음해, 흉노의 기병 수만 명이 우북평(右北平), 정양(定襄)을 침범하여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그 다음해 봄, 한나라 조정에 전략을 세우고 이렇게 말했다.
“흡후 조신이 선우를 위해서 계책을 세웠기 때문에 선우는 사막 북쪽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나라 군사가 그곳까지는 쳐들어올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나라에서 말에게 먹이를 충분히 먹인 후에 10만 명의 기병을 출동시켰다. 이 때에 식량과 보급을 위한 말은 제외하고 개인의 소지품을 싣고 따라가는 말이 약 14만 마리나 되었다. 그리고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군사를 반으로 나누어 거느리게 했다. 대장군은 정양에서 출격하고 표기장군은 대군에서 출격해 함께 사막을 건너 흉노를 토벌하기로 약속했다. 선우는 이 소식을 듣자, 그들 보급품을 먼 곳으로 대피시킨 다음 정예 부대를 이끌고 사막 북쪽에서 기다렸다.
드디어 흉노와 한나라 대장군 위청이 막북에서 교전을 벌였다. 하루 종일 전투를 벌였는데 저녁 무렵에 갑자기 어두워지고 큰 바람이 일었으므로 한나라 군사는 그 틈을 타고 좌우로 군사를 풀어 선우를 포위했다. 선우는 전투에서는 한나라 군사를 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마침내 홀몸으로 겨우 수백 명의 기병들만을 데리고 한나라 포위를 뚫고 서북방으로 달아났다. 한나라 군사는 밤을 세워 선우를 추격했으나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왕좌왕하며 달아나 흉노 군사들의 머리를 베고 포로로 잡은 수가 만 9천이나 되었다.
한나라 군대는 북쪽 전안산(闐顔山)에 있는 조신성(趙信城)까지 진격했다가 되돌아왔다. 선우가 도망칠 때, 그들 군사는 가끔 한나라 군사와 서로 혼전을 벌이며 선우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선우는 오랫동안 자기의 본대와 합류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우녹려왕(右谷蠡王)은 선우가 죽은 줄로 알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에 선우가 살아서 돌아와 다시 군권을 장악하게 되자 그는 선우의 칭호를 버리고 다시 우녹려왕으로 돌아갔다.
한편 한나라의 표기장군은 대군을 거느리고 출격하여 좌현왕과 접전을 벌인 끝에 흉노의 수급과 포로 약 7만여 명을 얻었다. 그러나 좌현왕과 그의 장군들은 모두 놓치고 말았다. 이에 표기장군은 낭거서산(狼居胥山)에서 봉제(封祭)를 올리고, 고연산(姑衍山)에서 선제(禪祭)를 드린 다음, 한해(翰海)까지 거쳐 되돌아왔다.
그때 흉노는 멀리 달아나 사막 남쪽에는 선우의 왕정(王庭)이 없었다. 한나라는 황하를 건너가 삭방에서 서쪽의 영거(令居)에 이르기까지의 사이 곳곳에 도랑을 파서 농지를 개간하고 관리와 병졸 5~6만 명을 주둔시켜 차츰 흉노의 땅을 잠식해 흉노의 접경지역을 북쪽으로 옮겼다.
이에 앞서 한나라의 두 장군이 대규모로 출격해서 선우를 포위 공격했을 때, 흉노의 병사를 죽이고 포로로 한 것이 8~9만 명이나 되었지만, 한나라의 병졸도 역시 수만 명에 죽었고 전투말도 10여 만 필을 잃었다.
흉노는 전투에 지쳐서 멀리 달아났지만 한나라도 전투말이 줄어들어 그 이상 출격할 수 없었다. 그 뒤 흉노는 조신의 건의에 따라서 사신을 한나라로 보내어 좋은 말로 화친을 청했다. 황제가 흉노와의 화친여부를 조정 대신들과 의논하게 했다. 대신들은 혹은 화친을 주장하고 혹은 어디까지나 흉노를 항복시켜 외신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승상부의 장사(長史)인 임창(任敞)은 이렇게 말했다.
“흉노는 새로 피폐해져 곤란한 처지에 놓여있어 마땅히 귀순한 속국으로서 변경에서 매년 한나라에 조회를 드리도록 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나라는 임창을 선우에게 사신으로 보냈다. 선우는 임창의 주장을 듣자 크게 노하여 그를 감금시킨 다음 돌려보내주지 않았다. 그 전에 흉노의 사신이 한나라에 구금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선우도 한나라 사신을 감금해 이에 상응한 행동을 한 것이다. 이에 한나라는 다시 병졸과 군마를 징발하여 흉노를 정벌하려고 했는데, 때마침 표기장군 곽거병이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중지했다. 이로부터 한나라는 오랫동안 횽노를 정벌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격하지 못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자 이치사 선우는 재위 13년 만에 죽고, 그의 아들인 오유(烏維)가 뒤를 이어 선우가 되었다. 이해는 한나라 원정(元鼎) 3년(서기전 113년)이었다. 이 때 한나라 황제가 처음으로 도성에서 나와 군현을 순행하기 시작했다. 그 후에 한나라는 남쪽으로 양월(兩越)을 정벌해야 했기 때문에 흉노를 공격하지 않았다. 흉노 역시 한나라의 변경을 침입하지 않았다.
오유선우가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해에 한나라는 이미 남월을 정벌하여 태복(太僕)을 지냈던 공손하를 북쪽으로 출격하여 흉노를 공격하게 하였다. 공손하는 기병 만 5천 명을 거느리고 구원(九原)에서 2천여 리나 진격하여 부저정(浮苴井)까지 갔다가 돌아왔으나 그 사이에 흉노인을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한나라는 또 전 종표후(從驃侯) 조파노(趙破奴)에게 만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영거에서 수천 리나 진격하여 흉하수(匈河水)까지 갔다가 돌아왔으나 역시 흉노인을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이 때에 황제는 변경을 순행하여 삭방에 이르러 18만 명의 기병을 사열하며 그 위세와 절도를 과시하고 곽길(郭吉)을 사신으로 선우에게 보내 은근히 일깨우게 하였다. 곽길이 흉노에 당도하자 흉노의 주객(主客)이 사자로 온 뜻을 물었다. 곽길은 예의를 갖추어 정중히 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제가 선우를 뵌 다음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선우를 만나게 된 곽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월왕의 머리는 이미 한나라 황궁 북문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선우께서는 자신이 있으면 나아가 한나라와 싸워주십시오. 한나라 천자는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변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항복하고 한나라의 신하가 되셔야 합니다. 어찌하여 공연히 멀리 달아나 사막 북쪽의 춥고 고통스러움을 참고 물도 풀도 없는 땅에 숨어서 계십니까?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곽길이 말이 마치자 대노한 선우는 그 자리를 주선한 주객의 머릴 베고 곽길을 붙잡아 돌려보내지 않고 북해 군처로 옮겼다. 그러나 선우는 다시 한나라 변경을 침범하지 않았고, 병졸과 군마를 충분히 쉬게 하고 사냥을 활쏘기를 익히게 했다. 그리고 자주 사신을 한나라로 보내 감언이설로 화친을 청했다.
한나라는 이에 왕오(王烏) 등을 시켜 흉노의 동정을 살펴보게 했다. 그런데 흉노의 법에 의하면 한나라 사신이라도 부절(符節)을 버리고 얼굴에 먹물을 넣은 사람이 아니면 선우의 천막 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왕오는 북지 사람으로 흉노의 풍습에 익숙해 있었으므로 그가 가진 절(節)을 버리고 얼굴에 먹물을 넣은 다음 선우의 천막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선우는 왕오를 마음에 들어하며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이고, 감언이설로 자신의 태자를 한나라에 보내 볼모롤 삼게 하고 화친을 청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한나라는 다시 양신(楊信)을 흉노에 사신으로 보냈다. 당시 한나라는 동쪽으로는 예맥(穢貉), 조선(朝鮮)을 함락하여 그 땅에 몇 개의 군을 설치했고, 서쪽으로는 주천군(酒泉郡)을 두어 흉노와 강(羌)과의 통로를 끊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서쪽의 월지(月氏), 대하(大夏) 등과 국교를 맺으며 공주를 오손왕(烏孫王)의 아내로 주는 등 회유책을 써서 흉노를 지원하던 서역의 여러 나라들과 흉노와의 사이를 단절시켜 놓았다. 또 북쪽으로는 더욱더 농지를 확장시켜 현뢰(胘雷)에까지 요새를 만들었으나 흉노는 감히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이해에 흉노롤 투항한 자차왕 조신이 죽었기 때문에 한나라 집정자들은 흉노가 이미 쇠약해져 충분이 복종시켜 신하로 만들 수 있다고 여겼다. 양신은 본래 강직해 굴복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선우는 그의 지위가 별로 높지 않은 것을 알자 친절히 대하지 않았다. 또 선우가 천막 안으로 불러들이려 해도 양신은 끝내 절부절을 버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우가 장막에서 나와서 양신을 만났다.
양신은 선우를 보자 이렇게 권고했다. “만일 화친을 원하신다면 선우의 태자를 한나라에 볼모로 보내주시오.”
그러자 선우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옛날 한나라와 우리가 했던 약조와 다르오. 본래의 약조는 한나라가 항상 옹주(翁主)를 흉노로 보내 연지로 삼고, 비단, 무명, 먹을 것 등 많은 물건들을 주어 화친을 맺으면 그 보답으로 흉노도 한나라 변경을 어지럽히지 않겠다는 것이었소. 그런데 본래의 규정과는 달리 이번에는 우리 태자를 볼모로 보내달라고 하니 이와 같은 화친을 맺을 수 없소.”
흉노의 관습에는 한나라 사신이 황제가 총애하는 귀인이 아니고, 그 사람이 유생출신이면 자기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온 것인 줄 알고 그의 변설을 꺾으려 했다. 또 그 사신이 젊은이이면 자객으로 온 것인 줄 알고 그의 용기를 꺾으려 했다. 그리고 한나라 사신이 흉노로 들어오면 흉노는 그때마다 답례로 사신을 보내고, 한나라가 흉노의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흉노도 또 한나라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는 등 반드시 대등한 수단을 취하고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양신이 그냥 돌아온 다음 한나라는 다시 왕오를 흉노로 사신으로 보냈다. 그러자 선우는 달콤한 말로 왕오를 달래며 한나라 재물을 많이 얻을 욕심에 거짓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나라로 가서 직접 황제를 뵙고 마주앉아 면전에서 형제의 의를 맺고 싶소.”
흉노에 돌아온 왕오가 그런 내용을 한나라에 보고하자, 한나라에서는 선우를 위해서 장안에다 관저를 지었다. 흉노는 또 이렇게 말했다. “한나라에서 황제가 총애하는 고관을 사신으로 보내주지 않으면 진실한 이야기를 논할 수 없다.” 그리고 흉노의 고관 한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왔는데, 그는 한나라에 도착하자마자 병이 났다. 한나라에서는 약을 주어 그를 치료하고자 했으나 불행히도 죽고 말았다.
그래서 한나라에서는 노충국(路充國)에게 2천석(二千石)의 고관이 차는 인수(印綬)를 주어 사신으로 삼고 흉노 귀족의 유해를 호송해 정중한 장례식을 치르게 했는데 그 비용만 해도 수천 금에 달했다. 그러나 노국충이 스스로 한나라의 고관이라고 말하자, 한나라가 흉노의 고관 사신을 죽였다고 생각한 선우는 그 보복으로 노국충을 붙들고 돌려보내주지 않았다.
이때까지 흉노의 선우가 한 말들은 단지 왕오 등을 속이기 위한 것으로 선우는 한나라에 갈 생각도 전연 없었고, 태자를 인질로 보낼 생각도 전연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흉노는 다시 기병들을 보내 한나라 변경을 자주 침범했다. 그러자 한나라는 곽창(郭昌)을 발호장군(拔胡將軍)에 임명하고 또 착야후(浞野侯) 조파노를 삭방 동쪽에 주둔시켜 흉노에 공격에 대비했다. 노국충이 흉노에 붙들린 지 3년이 지났을 때, 오유선우가 죽었다.
오유선우가 재위 10여년 만에 죽자 그의 아들 오사려(烏師廬)가 뒤를 이어 선우가 되었다. 당시 오사려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아선우(兒單于)라고 불렸다. 이해는 원봉(元封) 6년(서기전 105년)이었다. 이 후로 선우는 더욱 서북쪽으로 이동하고 좌방(左方)의 군대는 운중군에 맞서고 우방(右方)의 군대는 주천군과 돈황군(燉煌郡)들과 마주 보게 했다.
한나라에서 아선우의 계승 소식을 듣자 두 사람의 사신을 보내 한 사람에게는 선우를 위문하게 하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우현왕을 위문하여 흉노를 이간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흉노 땅에 들어간 두 사신은 모두 선우에게 끌려갔다. 이에 선우는 분노한 나머지 그들을 모두 붙들어두었다. 이로써 한나라 사신으로 흉노에 붙들려 있는 사람은 전후 10여 명에 이르렀다. 한나라 역시 흉노의 사신이 오는 대로 그들을 붙들어두어 흉노와 똑같이 대응했다.
이해, 한나라에서는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를 시켜 서쪽으로 대원(大宛)을 치게 하고, 인우장군(因杅將軍) 공손오를 시켜 수항성(受降城)을 쌓게 했다. 그해 겨울, 흉노 땅에는 큰 눈이 내려 많은 가축이 굶주리고 얼어 죽은 데다 어린 선우가 잔인하게 살육과 전쟁을 좋아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흉노사람들이 불안해 했다. 그래서 흉노의 좌대도위(左大都尉)가 선우를 죽일 생각으로 은밀히 사람을 한나라에 보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선우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하고 싶소. 그러나 한나라는 너무 멀니다. 만일 한나라가 군사를 보내 나를 맞이하러 와주기만 한다면 곧 반란을 일으키겠소.”
당시 한나라는 이 이야기를 듣고 흉노의 투항자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수항성을 축조하고 있었는데, 황제는 그래도 여전히 흉노와는 너무 멀다고 여겼다.
그 다음해 봄, 한나라에서 착야후 조파노를 시켜 2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삭방에서 출격하여 서북쪽 2천여 리까지 진출하여 준계산(浚稽山)까지 가서 좌대도위를 맞이해서 되돌아온다는 약정했었다. 착야후 조파노가 약정한 지점에 도착했으나 좌대도위가 나오지 않아서 그냥 되돌아왔다.
이때 흉노의 좌대도위는 약속대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고 살해당하고 말았다.
선우는 좌대도위를 처치한 다음 좌방의 군사를 보내어 착야후를 공격하게 했다. 착야후는 후퇴하면서 그들과 전투를 벌여 적의 수급과 포로 수천 명을 얻었다. 그러나 수항성에서 4백리 되는 지점에서 그만 8만 명에 달하는 흉노기병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착야후는 밤중에 몸소 물을 구하러 나갔다가 잠복해 있던 흉노에게 생포되었다. 흉노는 이를 계기로 한나라 군사를 급습하게 했다.
그때 한나라 군중에서는 호군(護軍) 곽종(郭縱)과 거수(渠帥) 유왕(維王)이 서로 상의를 했으나, 교위(校尉)들까지도 “장군을 잃고 도망쳐 돌아온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라는 군법을 두려워한 나머지 한사람도 돌아가자고 권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전군이 흉노에게 투항하자 아선우가 크게 기뻐하고 드디어 기병을 보내 수항성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항복시키지 못하고 변경으로 쳐들어왔다가 물러갔다.
그 다음해, 선우는 친히 수항성을 공격하려 했으나 수항성에 도착하기 전에 병이 나서 죽었다. 그때 아선우는 선우가 된 지 겨우 3년만 죽은 것이다. 그의 아들 역시 어렸기 때문에, 아선우의 막내 숙부인 오유선우의 아우 우현왕 구리호(呴犁湖)가 선우 자리에 올랐다. 이해는 태초(太初) 3년(서기전 102년)이었다.
구리호가 흉노의 선우가 즉위하자, 한나라는 광록훈(光祿勳) 서자위(徐自爲)를 장군으로 삼아 오원(五原)에서 수백 리, 멀게는 천여 리까지 진출해서 성채와 망루를 쌓고 여구산(廬胊山)까지 연결시켰다. 그리고 유격장군(遊擊將軍) 한열(韓說)과 장평후(長平侯) 위항(衛伉)을 그 주변에 주둔시키고 강노도위(彊弩都尉) 노박덕(路博德)으로 하여금 거연택(居延澤) 근처에 성을 쌓게 했다.
그해 가을, 흉노는 크게 정양군, 운중군에 침입해 수천 명을 죽이거나 잡아가는 한편, 2천석의 고관 몇 사람을 공격하고, 돌아가는 길에 광록훈이 쌓은 성채와 망루마저 파괴했다.
또 우현왕에게 주천군, 장액군(張掖郡)에 침입해서 수천 명을 살상, 약탈하게 했으나 마침 임문(任文) 장군이 공격하여 구원했기 때문에 흉노는 얻은 것을 모두 다 버린 채 퇴각했다.
이해에 이사장군 이광리은 대원을 공격하고 그 왕의 목을 베어 돌아왔다. 흉노는 그의 귀로를 차단하여 돌아올 수가 없었다. 그해 겨울, 흉노는 수항성을 습격하려 했으나 때마침 선우가 병으로 죽었다. 구리호 선우는 선우가 된 지 1년 만에 죽었다. 그래서 흉노는 그의 아우인 좌대도위 저제후(且鞮侯)를 선우로 세웠다.
한나라가 대원국을 정벌한 뒤로는 한나라의 위세가 주변 나라까지 떨쳐졌다. 그러나 황제는 더욱 흉노를 더욱 궁지로 몰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렸다.
“고황제(高皇帝)께서는 짐에게 평성(平城)에서 당하신 원한을 남기셨다. 또 고후(高后) 때 선우의 편지 내용은 너무나 무례했다. 옛날 제나라의 양공(襄公)은 9세(九世)나 묵은 원수를 갚은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야 말로 춘추(春秋)의 대의라고 할 수 있다.” 이해가 태초 4년(서기전 101년)이었다.
저제후 선우가 즉위하자, 한나라 사신들 중 흉노에 귀순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귀환시켰다. 이에 노충국 등도 돌아올 수 있었다. 저제후가 선우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는 한나라의 공격을 두려워 선우가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한나라 황제와 나를 비유하면 나는 어린아이다. 도저히 한나라 황제와 대등하게 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한나라 황제는 나에게 연장자인 장인의 항렬에 속한다.”
한나라는 중랑장(中郎將) 소무(蘇武)를 시켜 많은 패물을 선우에게 보내어 달래려고 했다. 그런데 선우는 오히려 차츰 교만해져서 대하는 것이 매우 무례했다. 이것은 한나라가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 이듬해, 착야후 조파노는 한나라로 도망쳐 돌아왔다. 그 다음해 한나라는 이사장군 이광리에게 명해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주천군을 출격하여 우현왕을 천산(天山)에서 공격하게 했다. 이사장군은 흉노의 수급과 포로 만여 명을 얻어 돌아오던 도중, 흉노에게 포위를 당해 거의 벗어날 수 없는 곤궁한 처지에 빠졌다. 이 때에 한나라 군은 열에 예닐곱 명의 전사했다.
한나라는 또다시 인우장군 공손오에게 명하여 서하군(西河郡)에서 출격하여 강노도위 노박덕와 탁도산(涿涂山)에서 합류하게 했으나 아무런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또 기도위(騎都尉) 이릉(李陵)에게 보병과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거연 북쪽 1천여 리까지 출격하여 공격하게 했다.
이릉은 천여 리를 행군하다가 선우와 마주쳐 치열한 교전 끝에 만여 명의 적을 살상했으나 한나라 군사와 식량이 거의 다 떨어졌으므로 전투를 멈추고 퇴각하려 했다.
그러나 흉노에 이릉을 포위하여 마침내 이릉은 흉노에 투항했고, 그의 군사는 거의 전멸되어 한나라로 살아 돌아온 자는 겨우 4백여 명 뿐이었다. 선우는 이릉을 귀하게 대우해 그의 딸을 이릉의 아내로 주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한나라는 또다시 이사 장군에게 기병 6만 명과 보병 10만 명을 거느리고 삭방에서 출격하게 했고, 강노도위 노박덕은 만여 명을 거느리고 이사장군과 합류하도록 했다. 유격장군 한열은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오원(五原)에서 출격했고, 인우장군 공손오는 기병 만 명과 보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안문에서 출격했다. 흉노는 그 소식을 접하고 가족과 재산을 멀리 여오수(余吾水) 북쪽에 숨겨두고 선우가 직접 10만 기병을 거느리고 여오수 남쪽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사 장군과 접전을 벌였다.
이사장군은 선우와 10여 일을 전투 끝에 군사를 풀어 퇴각했는데, 도중에 가족들이 무고(巫蠱)의 난에 연루되어 멸족의 화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이사 장군은 자신의 군사들과 더불어 흉노에게 투항했다. 이 때에 한나라로 살아 돌아온 자는 1천 명 중에 겨우 한두 사람에 불과했다. 유격장군 한열은 아무런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인우장군 공손오도 좌현왕과 전투를 벌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귀환했다. 이해에 한나라 군사로서 흉노로 출격한 사람들 중에 공을 논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한편 황제는 조칙을 내려, 태의령(太醫令) 수단(隨但)을 체포했다. 그는 이사장군의 가족이 몰살당한 소식을 누설해 이사장군 이광리로 하여금 흉노에 투항하게 만든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太史公曰:孔氏著春秋,隱桓之閒則章,至定哀之際則微,爲其切當世之文而罔褒,忌諱之辭也。世俗之言匈奴者,患其徼一時之權,而務莖讇納其說,以便偏指,不參彼己;將率席中國廣大,氣奮,人主因以決策,是以建功不深。堯雖賢,興事業不成,得禹而九州寧。且欲興聖統,唯在擇任將相哉!唯在擇任將相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공자(孔子)가 『춘추』를 저술하면서 옛날 노나라의 은공(隱公)과 환공(桓公) 사이는 일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자기와 같은 시대에 재위했던 정공(定公)과 애공(哀公)의 일은 애매하게 기록했다. 그것은 당세의 일을 기록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포폄(褒貶)을 행하지 못하고 꺼렸던 탓이다.
지금 세상에서 흉노(匈奴)의 문제에 대해서 논하는 사람들은 한때의 권세를 얻기 위해 방편에 맞추어 황제에게 자기의 주장이 채택되게 아첨하고, 편견에 사로잡혀 흉노와 한나라의 실제적인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 나는 걱정된다.
장수들은 중국의 광대한 것만 믿고 기고만장하고, 황제는 또한 그것은 믿고 방침을 결정했다. 그 때문에 큰 공을 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요(堯)임금은 비록 성현이었지만 혼자 힘으로 일을 일으켜서 성공하지 못하다가 우(禹)의 보좌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구주(九州)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거룩한 성왕의 뜻을 이어받아 공업을 일으키려면 오로지 현능한 장군과 대신을 잘 가려 쓰는 수 밖에 없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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