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津侯主父列傳
公孫弘
丞相公孫弘者,齊菑川國薛縣人也,字季。少時為薛獄吏,有罪,免。家貧,牧豕海上。年四十餘,乃學春秋雜說。養後母孝謹。
建元元年,天子初即位,招賢良文學之士。是時弘年六十,徵以賢良為博士。使匈奴,還報,不合上意,上怒,以為不能,弘乃病免歸。
元光五年,有詔徵文學,菑川國復推上公孫弘。弘讓謝國人曰:「臣已嘗西應命,以不能罷歸,願更推選。」國人固推弘,弘至太常。太常令所徵儒士各對策,百餘人,弘第居下。策奏,天子擢弘對為第一。召入見,狀貌甚麗,拜為博士。是時通西南夷道,置郡,巴蜀民苦之,詔使弘視之。還奏事,盛毀西南夷無所用,上不聽。
弘為人恢奇多聞,常稱以為人主病不廣大,人臣病不儉節。弘為布被,食不重肉。后母死,服喪三年。每朝會議,開陳其端,令人主自擇,不肯面折庭爭。於是天子察其行敦厚,辯論有餘,習文法吏事,而又緣飾以儒術,上大說之。二歲中,至左內史。弘奏事,有不可,不庭辯之。嘗與主爵都尉汲黯請閒,汲黯先發之,弘推其後,天子常說,所言皆聽,以此日益親貴。嘗與公卿約議,至上前,皆倍其約以順上旨。汲黯庭詰弘曰:「齊人多詐而無情實,始與臣等建此議,今皆倍之,不忠。」上問弘。弘謝曰:「夫知臣者以臣為忠,不知臣者以臣為不忠。」上然弘言。左右幸臣每毀弘,上益厚遇之。
元朔三年,張歐免,以弘為御史大夫。是時通西南夷,東置滄海,北筑朔方之郡。弘數諫,以為罷敝中國以奉無用之地,願罷之。於是天子乃使朱買臣等難弘置朔方之便。發十策,弘不得一。弘乃謝曰:「山東鄙人,不知其便若是,願罷西南夷、滄海而專奉朔方。」上乃許之。
汲黯曰:「弘位在三公,奉祿甚多。然為布被,此詐也。」上問弘。弘謝曰:「有之。夫九卿與臣善者無過黯,然今日庭詰弘,誠中弘之病。夫以三公為布被,誠飾詐欲以釣名。且臣聞管仲相齊,有三歸,侈擬於君,桓公以霸,亦上僭於君。晏嬰相景公,食不重肉,妾不衣絲,齊國亦治,此下比於民。今臣弘位為御史大夫,而為布被,自九卿以下至於小吏,無差,誠如汲黯言。且無汲黯忠,陛下安得聞此言。」天子以為謙讓,愈益厚之。卒以弘為丞相,封平津侯。
승상(丞相) 공손홍(公孫弘)은 제(齊) 지방의 치천국(菑川國) 설현(薛縣) 출신으로 자(字)는 계(季)이다. 젊은 시절, 설현의 옥리(獄吏)가 되었으나 죄를 지어 면직되었다. 집안이 가난해 해변에서 돼지를 키우며 살았다. 나이 사십이 넘어 『춘추(春秋)』와 여러 학설을 공부했다. 집안에선 계모를 효성스럽게 봉양했다.
건원(建元) 원년(서기전 140년), 천자가 새로 즉위하여 천하에 현량(賢良)과 문학(文學)으로 이름난 선비들을 초빙했다. 이때 공손홍은 나이 60세로 현량으로 초치되어 박사(博士)가 되었다. 그런데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복명한 것이 천자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자가 노하며 그를 무능하다고 꾸짖었다. 이에 공손홍은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원광(元光) 5년(서기전 130년), 황제가 조서(詔書)를 내려 천하에 문학에 뛰어난 선비를 초빙하려 하자, 치천국에서는 다시 공손홍을 천거했다. 공손홍은 치천국의 관리에게 이렇게 사양했다. “저는 이미 경사(京師)에 가서 천자의 명에 응했다가 무능하다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원컨대 다른 사람을 천거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치천국의 사람들은 굳이 공손홍을 천거했기에 공손홍은 마침내 태상을 만나게 되었다. 태상은 초치한 유생들에게 대책문(對策文)을 지어 바치게 했다. 공손홍의 성적은 1백여 명 중에 하위를 차지했다. 대책문이 황제에게 상주되자, 황제는 공손홍의 대책을 1등으로 뽑았다. 황제는 공손홍을 불러들여 만나보니 그의 용모가 무척 뛰어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공손홍은 박사에 임용되었다. 당시 서남이(西南夷)로 통하는 길을 내고 군(郡)을 설치했는데, 파촉(巴蜀)의 백성들이 부역으로 고통스럽게 여겼다. 이에 천자는 조서를 내려 공손홍에게 현지의 사정을 순찰하고 오게 했다. 공손홍은 돌아와서 황제에게 현지의 사정을 그대로 아뢰면서, 서남이는 쓸모가 없다는 땅이라고 매우 폄하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공손홍은 사람됨이 비범하고도 견문이 넓었다. 그는 남의 주인이 된 자는 광대하지 못한 것을 병통으로 여기고, 남의 신하된 자는 검소하지 못한 것을 병통으로 삼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공손홍은 평소에 베로 이불잇을 만들고, 식사 때에는 두 가지 육류를 겹쳐 먹지 않았다. 계모가 죽자 3년 상을 치렀다. 매반 조회 때에 그는 어떤 사건의 실마리만을 진술하고 황제가 스스로 결정하게 했다. 그리고 조정에서 다른 신하들과 얼굴을 맞대고 논쟁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황제는 그가 품행이 돈후하고, 언변이 조리가 있으며 문서와 법령 그리고 관리들의 공무에 익숙할 뿐 아니라 유학으로 잘 수양된 것을 보고, 매우 좋아했다. 2년 째 되는 해에 공손홍은 좌내사(左內史)에 올랐다.
공손홍은 자기가 상주한 일이 윤허되지 않더라도 조정에서 그것을 따지지 않았다. 그는 늘 주작도위(主爵都尉) 급암(汲黯)과 함께 천자의 한가한 때에 알현하기를 청했다. 그 때에 급암이 먼저 거론하면 그가 그 뒤를 덧붙여서 조리 있게 설명했는데, 황제는 늘 기뻐하면서 두 사람의 말을 모두 들어주었다. 이 때문에 공손홍은 갈수록 황제를 더욱 친해졌고 귀한 신분이 되었다.
그는 일찍이 공경대신들과 어떤 사항을 건의하기로 약속해놓고는 황제 앞에서 그 약속을 완전히 저버리고 황제의 뜻에 따랐다. 그러자 급암이 조정에서 그를 이렇게 비난했다.
“제(齊) 지방 사람은 거짓이 많고 정직하지 못합니다. 당초 그는 신 등과 어떤 사항을 더불어 건의를 하기로 해놓고 이제 와서 그 약속을 저버리니, 그는 불충한 자입니다.”
황제가 급암의 말을 듣고 공손홍에게 그 까닭을 묻자, 이렇게 사죄했다. “신을 아는 자는 저를 충성스럽다 하고, 신을 모르는 자는 저를 불충하다고 봅니다.” 황제는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 황제 주변에 총애 받는 신하들이 공손홍을 헐뜯을 때마다 황제는 더욱 그를 후하게 대했다.
원삭(元朔) 3년(서기전 126년), 어사대부(御史大夫) 장구(張歐)가 면직되고 공손홍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때 서남이와 서로 교통하고 동쪽으로는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했으며, 북쪽에는 삭방군(朔方郡)에 성을 쌓았다.
공손홍이 황제에게 여러 차례 간언을 올려 중국을 피폐하게 하면서까지 쓸모없는 땅을 경영하는 일은 중지하길 청했다. 이에 황제는 주매신(朱買臣) 등에게 삭방군을 설치하는 것이 어떠한 이점이 있는가를 가지고서 공손홍에게 말하게 했다.
이에 주매신 등은 열 가지 이점을 제시했는데, 공손홍은 한 가지도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공손홍은 사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산동(山東) 비루한 사람이라 그런 이점에 대해 몰랐습니다. 서남이와 창해 쪽의 일을 중지하고 삭방에만 힘쓰시기 바랍니다.” 이에 황제가 허락했다.
급암이 공손홍을 비난하며 말했다. “공손홍은 고귀한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으면서 봉록도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포의를 입고 다니는 것은 거짓된 행동입니다.”
황제가 공손홍에게 그 사실여부를 물으니, 그는 사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기실 구경(九卿) 가운데 급암은 신과 사이가 좋은 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가 조정에서 신을 비난했는데, 그는 신의 큰 결점을 정확히 짚어낸 것입니다. 무릇 삼공의 지위에 있으면서 포의를 입고 다니는 행위는 확실히 거짓으로 꾸며서, 명성을 얻고자 하는 짓입니다. 그러나 신이 듣기로 관중(管仲)은 제나라의 정승이 되어서 세 명의 정실을 거느리고, 사치함이 군주와 같았다고 합니다. 그의 보필로 환공(桓公)은 패자(覇者)를 칭했는데, 이는 천자의 권위를 엿보는 참람한 짓이었습니다. 안영(晏嬰)은 재상이 되어 경공(景公)을 보필하면서 두 가지 고기반찬을 겹쳐 먹지 않았고, 시첩들은 비단옷도 입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제나라는 역시 잘 다스려졌습니다.
지금 신은 어사대부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포의를 입고 다녀 구경으로부터 말단 관리에 이르기까지 귀천 고하의 차등을 없앴으니, 확실히 급암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 만일 급암의 충성된 말이 없었더라면 폐하께서 어떻게 이런 사실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황제는 공손홍이 겸양의 미덕을 갖추었다고 여기고 더욱 그를 후하게 대우했다. 마침내 공손홍을 승상으로 삼고 평진후(平津侯)에 봉했다.
弘為人意忌,外寬內深。諸嘗與弘有卻者,雖詳與善,陰報其禍。殺主父偃,徙董仲舒於膠西,皆弘之力也。食一肉脫粟之飯。故人所善賓客,仰衣食,弘奉祿皆以給之,家無所餘。士亦以此賢之。
淮南、衡山謀反,治黨與方急。弘病甚,自以為無功而封,位至丞相,宜佐明主填撫國家,使人由臣子之道。今諸侯有畔逆之計,此皆宰相奉職不稱,恐竊病死,無以塞責。乃上書曰:「臣聞天下之通道五,所以行之者三。曰君臣,父子,兄弟,夫婦,長幼之序,此五者天下之通道也。智,仁,勇,此三者天下之通德,所以行之者也。故曰『力行近乎仁,好問近乎智,知恥近乎勇』。知此三者,則知所以自治;知所以自治,然後知所以治人。天下未有不能自治而能治人者也,此百世不易之道也。今陛下躬行大孝,鑒三王,建周道,兼文武,厲賢予祿,量能授官。今臣弘罷駑之質,無汗馬之勞,陛下過意擢臣弘卒伍之中,封為列侯,致位三公。臣弘行能不足以稱,素有負薪之病,恐先狗馬填溝壑,終無以報德塞責。願歸侯印,乞骸骨,避賢者路。」天子報曰:「古者賞有功,襃德,守成尚文,遭遇右武,未有易此者也。朕宿昔庶幾獲承尊位,懼不能寧,惟所與共為治者,君宜知之。蓋君子善善惡惡,(君宜知之)君若謹行,常在朕躬。君不幸罹霜露之病,何恙不已,乃上書歸侯,乞骸骨,是章朕之不德也。今事少閒,君其省思慮,一精神,輔以醫藥。」因賜告牛酒雜帛。居數月,病有瘳,視事。
元狩二年,弘病,竟以丞相終。子度嗣為平津侯。度為山陽太守十餘歲,坐法失侯。
공손홍은 사람됨이 남을 시기하고 의심하기를 잘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관대한 척하면서 그 속마음은 알 수 없게 하였다. 그는 자신과 틈이 있는 자들과 비록 겉으로는 사이가 좋은 것처럼 꾸며댔지만, 남몰래 보복을 가하고는 했다. 주보언(主父偃)이 살해되고 동중서(董仲舒)를 교서(膠西)로 좌천된 것은 모두 그가 막후에서 꾸민 것이다.
그는 고기반찬 한 가지에 거친 밥을 먹으면서도 절친한 친구들이나 빈객이 와서 의식(衣食)을 청하면 자신의 봉록을 몽땅 다 주어버리고 자기 집에는 남는 것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이 때문에 사대부들마저도 공손홍을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회남왕(淮南王)과 형산왕(衡山王)이 모반사건으로 이들과 결탁된 자들을 색출하느라 여념이 없을 때, 공손홍은 심각하게 병을 앓았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생각했다.
“공도 없이 후작(侯爵)으로 봉해지고 숭상의 지위에까지 이르렀구나. 마땅히 현명한 군주를 잘 보필하여 국가를 안정시키고 사람들이 신하된 도리를 지키게 해야 한다. 지금 제후가 반역의 음모를 꾀하는 것은 모두가 재상이 자기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탓이다. 이대로 병들어 죽는다면 그야말로 무책임한 것이다.”
이에 글을 올려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이 들으니 천하에는 다섯 가지의 도가 있고, 이것을 실행하는 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군신, 부자, 형제 ,부부, 장유(長幼)의 질서가 천하에 통행되는 도이며, 지(智), 인(仁), 용(勇), 이 세 가지는 천하에 통행되는 덕으로 도를 실행하게 하는 수단인 것이다. 이 때문에 ‘힘써서 실천하는 것은 인에 가깝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은 지에 가까우며,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에 가깝다’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를 안다면 스스로를 수양할 방법을 알게 됩니다. 스스로를 수양하는 방법을 터득하면 남을 다스리는 방법도 알게 됩니다.
천하에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서 남을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이제껏 없었습니다. 이는 백세가 되어도 불변하는 도입니다. 이제 폐하께서는 몸소 큰 효를 행하시고, 삼왕(三王)을 본보기로 삼아 주(周)나라의 도를 일으켜 세우시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같은 덕과 재능을 겸비하셨습니다. 현능한 선비를 격려하고 봉록을 하사하고 능력에 따라 벼슬을 내립니다. 지금 신 공손홍은 보잘것없는 자질로 전쟁터에서 세운 공조차 없는데도 폐하께서는 파격적으로 신을 졸개들 가운데서 발탁하시어 열후(列侯)에 봉하시고 삼공의 지위에 오르게 했습니다. 참으로 신의 행실과 능력은 언급할 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평소 가난할 때에 얻은 병이 있어서 주군에게 충성을 다하기도 전에 쓰러져 폐하로부터 입은 은덕에 보답하고 소임을 다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이에 제후의 인장의 반납하고 사임할 것이니, 현능한 자에게 길을 터주시길 바랍니다.”
황제에 이렇게 답했다.
“옛날에는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내리고, 덕이 있는 자에게 표창한다고 했소. 또 태평할 때에는 문(文)을 숭상하고, 변란을 만났을 때에는 무(武)를 존중했으니, 이를 불변하는 도리이다. 짐은 지난날 요행히 보위에 오른 이래로, 나라를 안녕하게 만들지 못할 것 걱정하여 오로지 여러 대신들과 더불어 나라를 다스릴 것만을 생각했음을 공도 잘 알 것이오. 군자는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오. 공은 언행을 삼갈 뿐, 상벌과 진퇴는 모두 짐에게 달려 있소. 그대가 불행히도 상로지병(霜露之病)에 걸렸으나 어찌 낫지 않는다고 하겠소? 그런데 상소를 올려 서 작위를 반납하고 사직하겠다고 하니, 이는 짐의 부덕함의 소치이다. 이제 조정의 일이 조금 한가해졌으니 공은 근심을 덜고 정성을 모아 의약으로 몸을 잘 보전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황제는 그에게 휴가를 주고, 쇠고기와 술 그리고 비단을 하사했다. 몇 달 지나 공손홍의 병이 좀 낫자 다시 업무를 보았다.
원수(元狩) 2년(서기전 121년), 공손홍은 병이 들어 결국 승상의 직에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공손도(公孫度)가 자리를 이어받아 평진후가 되었다. 공손도는 산양(山陽)의 태수(太守)로 10여 년 간 재직하다 법에 저촉하여 제후의 작위를 잃었다.
主父偃
主父偃者,齊臨菑人也。學長短縱橫之術,晚乃學易、春秋、百家言。游齊諸生閒,莫能厚遇也。齊諸儒生相與排擯,不容於齊。家貧,假貸無所得,乃北游燕、趙、中山,皆莫能厚遇,為客甚困。孝武元光元年中,以為諸侯莫足游者,乃西入關見衛將軍。衛將軍數言上,上不召。資用乏,留久,諸公賓客多厭之,乃上書闕下。朝奏,暮召入見。所言九事,其八事為律令,一事諫伐匈奴。其辭曰:
臣聞明主不惡切諫以博觀,忠臣不敢避重誅以直諫,是故事無遺策而功流萬世。今臣不敢隱忠避死以效愚計,願陛下幸赦而少察之。
주보언(主父偃)은 제(齊)나라 땅 임치(臨菑) 사람이다. 합종과 연횡에 관한 유세술을 배웠으며, 만년에는 『역경(易經)』, 『춘추』 그리고 제자백가의 학설을 공부했다. 그런 뒤에 제나라의 여러 유생들을 찾아다니며 유세를 했으나, 아무도 그를 후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게다가 제나라의 여러 유생들은 합심하여 그를 따돌렸기 때문에 그는 제나라에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집안이 매우 가난한데, 남에게 돈을 차용할 곳조차 없었다.
그래서 북쪽으로 연(燕), 조(趙), 중산(中山) 지방을 떠돌았으나 역시 그를 후하게 대해 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정처 없이 떠도는 처량한 나그네의 신세가 되었다. 효무제(孝武帝) 원광(元光) 원년(서기전 134년), 주보언은 제후들 중에는 유세할만한 자가 없다고 여기고, 이에 서쪽으로 함곡관(函谷關)을 들어가 위장군(衛將軍)을 찾아갔다.
위청이 여러 차례 그를 황제에게 천거했지만, 황제는 좀처럼 그를 불러들이지 않았다. 주보언은 가진 돈도 떨어지고 머무른 지 오래되자 여러 공들과 빈객들은 대부분 그를 싫어했다. 이에 다급한 그는 조정에 상소문을 올렸는데, 아침에 상소를 올리자 저녁에 들어가서 황제를 알현하게 되었다. 상소문에서 언급한 아홉 가지 일 가운데 여덟 가지가 율령에 관한 것이었고, 그 밖의 한 가지는 흉노 정벌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는 상소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이 들으니 현명한 황제는 간절한 간언을 꺼리지 않고 널리 살피며, 충신은 무거운 형벌을 피하지 않고 사실대로 직간을 올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계책을 남겨 그 공적과 명성은 만세에 길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신은 충심을 품고서 감히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어리석은 계책을 올립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신의 죄를 용서하시고 조금이라도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司馬法》曰:「國雖大,好戰必亡;天下雖平,忘戰必危。」天下既平,天子大凱,春蒐秋狝,諸侯春振旅,秋治兵,所以不忘戰也。且夫怒者逆德也,兵者凶器也,爭者末節也。古之人君一怒必伏尸流血,故聖王重行之。夫務戰勝窮武事者,未有不悔者也。昔秦皇帝任戰勝之威,蠶食天下,并吞戰國,海內為一,功齊三代。務勝不休,欲攻匈奴,李斯諫曰:「不可。夫匈奴無城郭之居,委積之守,遷徙鳥舉,難得而制也。輕兵深入,糧食必絕;踵糧以行,重不及事。得其地不足以為利也,遇其民不可役而守也。勝必殺之,非民父母也。靡獘中國,快心匈奴,非長策也。」秦皇帝不聽,遂使蒙恬將兵攻胡,辟地千里,以河為境。地固澤(咸)鹵,不生五穀。然後發天下丁男以守北河。暴兵露師十有餘年,死者不可勝數,終不能踰河而北。是豈人眾不足,兵革不備哉?其勢不可也。又使天下蜚芻芻粟,起於黃、腄、瑯邪負海之郡,轉輸北河,率三十鐘而致一石。男子疾耕不足於糧馕,女子紡績不足於帷幕。百姓靡敝,孤寡老弱不能相養,道路死者相望,蓋天下始畔秦也。
及至高皇帝定天下,略地於邊,聞匈奴聚於代谷之外而欲擊之。御史成進諫曰:「不可。夫匈奴之性,獸聚而鳥散,從之如搏影。今以陛下盛德攻匈奴,臣竊危之。」高帝不聽,遂北至於代谷,果有平城之圍。高皇帝蓋悔之甚,乃使劉敬往結和親之約,然後天下忘干戈之事。故兵法曰「興師十萬,日費千金」。夫秦常積眾暴兵數十萬人,雖有覆軍殺將系虜單于之功,亦適足以結怨深讎,不足以償天下之費。夫上虛府庫,下敝百姓,甘心於外國,非完事也。夫匈奴難得而制,非一世也。行盜侵驅,所以為業也,天性固然。上及虞夏殷周,固弗程督,禽獸畜之,不屬為人。夫上不觀虞夏殷周之統,而下(修)[循]近世之失,此臣之所大憂,百姓之所疾苦也。且夫兵久則變生,事苦則慮易。乃使邊境之民獘靡愁苦而有離心,將吏相疑而外市,故尉佗、章邯得以成其私也。夫秦政之所以不行者,權分乎二子,此得失之效也。故《周書》曰「安危在出令,存亡在所用」。願陛下詳察之,少加意而熟慮焉。
是時趙人徐樂、齊人嚴安俱上書言世務,各一事。徐樂曰:
臣聞天下之患在於土崩,不在於瓦解,古今一也。何謂土崩?秦之末世是也。陳涉無千乘之尊,尺土之地,身非王公大人名族之后,無鄉曲之譽,非有孔、墨、曾子之賢,陶朱、猗頓之富也,然起窮巷,奮棘矜,偏袒大呼而天下從風,此其故何也?由民困而主不恤,下怨而上不知(也),俗已亂而政不修,此三者陳涉之所以為資也。是之謂土崩。故曰天下之患在於土崩。何謂瓦解?吳、楚、齊、趙之兵是也。七國謀為大逆,號皆稱萬乘之君,帶甲數十萬,威足以嚴其境內,財足以勸其士民,然不能西攘尺寸之地而身為禽於中原者,此其故何也?非權輕於匹夫而兵弱於陳涉也,當是之時,先帝之德澤未衰而安土樂俗之民眾,故諸侯無境外之助。此之謂瓦解,故曰天下之患不在瓦解。由是觀之,天下誠有土崩之勢,雖布衣窮處之士或首惡而危海內,陳涉是也。況三晉之君或存乎!天下雖未有大治也,誠能無土崩之勢,雖有彊國勁兵不得旋踵而身為禽矣,吳、楚、齊、趙是也。況群臣百姓能為亂乎哉!此二體者,安危之明要也,賢主所留意而深察也。
閒者關東五穀不登,年歲未復,民多窮困,重之以邊境之事,推數循理而觀之,則民且有不安其處者矣。不安故易動。易動者,土崩之勢也。故賢主獨觀萬化之原,明於安危之機,修之廟堂之上,而銷未形之患。其要,期使天下無土崩之勢而已矣。故雖有彊國勁兵,陛下逐走獸,射蜚鳥,弘游燕之囿,淫縱恣之觀,極馳騁之樂,自若也。金石絲竹之聲不絕於耳,帷帳之私俳優侏儒之笑不乏於前,而天下無宿憂。名何必湯武,俗何必成康!雖然,臣竊以為陛下天然之聖,寬仁之資,而誠以天下為務,則湯武之名不難侔,而成康之俗可復興也。此二體者立,然後處尊安之實,揚名廣譽於當世,親天下而服四夷,餘恩遺德為數世隆,南面負扆攝袂而揖王公,此陛下之所服也。臣聞圖王不成,其敝足以安。安則陛下何求而不得,何為而不成,何征而不服乎哉!嚴安上書曰:
臣聞周有天下,其治三百餘歲,成康其隆也,刑錯四十餘年而不用。及其衰也,亦三百餘歲,故五伯更起。五伯者,常佐天子興利除害,誅暴禁邪,匡正海內,以尊天子。五伯既沒,賢聖莫續,天子孤弱,號令不行。諸侯恣行,彊陵弱,眾暴寡,田常篡齊,六卿分晉,并為戰國,此民之始苦也。於是彊國務攻,弱國備守,合從連橫,馳車擊轂,介胄生蟣蝨,民無所告愬。
及至秦王,蠶食天下,并吞戰國,稱號曰皇帝,主海內之政,壞諸侯之城,銷其兵,鑄以為鐘虡,示不復用。元元黎民得免於戰國,逢明天子,人人自以為更生。向使秦緩其刑罰,薄賦斂,省繇役,貴仁義,賤權利,上篤厚,下智巧,變風易俗,化於海內,則世世必安矣。秦不行是風而修其故俗,為智巧權利者進,篤厚忠信者退;法嚴政峻,諂諛者眾,日聞其美,意廣心軼。欲肆威海外,乃使蒙恬將兵以北攻胡,辟地進境,戍於北河,蜚芻芻粟以隨其后。又使尉[佗]屠睢將樓船之士南攻百越,使監祿鑿渠運糧,深入越,越人遁逃。曠日持久,糧食絕乏,越人擊之,秦兵大敗。秦乃使尉佗將卒以戍越。當是時,秦禍北構於胡,南掛於越,宿兵無用之地,進而不得退。行十餘年,丁男被甲,丁女轉輸,苦不聊生,自經於道樹,死者相望。及秦皇帝崩,天下大叛。陳勝、吳廣舉陳,武臣、張耳舉趙,項梁舉吳,田儋舉齊,景駒舉郢,周市舉魏,韓廣舉燕,窮山通谷豪士并起,不可勝載也。然皆非公侯之后,非長官之吏也。無尺寸之勢,起閭巷,杖棘矜,應時而皆動,不謀而俱起,不約而同會,壤長地進,至于霸王,時教使然也。秦貴為天子,富有天下,滅世絕祀者,窮兵之禍也。故周失之弱,秦失之彊,不變之患也。
今欲招南夷,朝夜郎,降羌僰,略濊州,建城邑,深入匈奴,燔其蘢城,議者美之。此人臣之利也,非天下之長策也。今中國無狗吠之驚,而外累於遠方之備,靡敝國家,非所以子民也。行無窮之欲,甘心快意,結怨於匈奴,非所以安邊也。禍結而不解,兵休而復起,近者愁苦,遠者驚駭,非所以持久也。今天下鍛甲砥劍,橋箭累弦,轉輸運糧,未見休時,此天下之所共憂也。夫兵久而變起,事煩而慮生。今外郡之地或幾千里,列城數十,形束壤制,旁脅諸侯,非公室之利也。上觀齊晉之所以亡者,公室卑削,六卿大盛也;下觀秦之所以滅者,嚴法刻深,欲大無窮也。今郡守之權,非特六卿之重也;地幾千里,非特閭巷之資也;甲兵器械,非特棘矜之用也:以遭萬世之變,則不可稱諱也。
書奏天子,天子召見三人,謂曰:「公等皆安在?何相見之晚也!」於是上乃拜主父偃、徐樂、嚴安為郎中。偃數見,上疏言事,詔拜偃為謁者,遷為中大夫。一歲中四遷偃。
偃說上曰:「古者諸侯不過百里,彊弱之形易制。今諸侯或連城數十,地方千里,緩則驕奢易為淫亂,急則阻其彊而合從以逆京師。今以法割削之,則逆節萌起,前日晁錯是也。今諸侯子弟或十數,而適嗣代立,餘雖骨肉,無尺寸地封,則仁孝之道不宣。願陛下令諸侯得推恩分子弟,以地侯之。彼人人喜得所願,上以德施,實分其國,不削而稍弱矣。」於是上從其計。又說上曰:「茂陵初立,天下豪桀并兼之家,亂眾之民,皆可徙茂陵,內實京師,外銷姦猾,此所謂不誅而害除。」上又從其計。
尊立衛皇后,及發燕王定國陰事,蓋偃有功焉。大臣皆畏其口,賂遺累千金。人或說偃曰:「太橫矣。」主父曰:「臣結發游學四十餘年,身不得遂,親不以為子,昆弟不收,賓客棄我,我阸日久矣。且丈夫生不五鼎食,死即五鼎烹耳。吾日暮途遠,故倒行暴施之。」
偃盛言朔方地肥饒,外阻河,蒙恬城之以逐匈奴,內省轉輸戍漕,廣中國,滅胡之本也。上覽其說,下公卿議,皆言不便。公孫弘曰:「秦時常發三十萬眾筑北河,終不可就,已而棄之。」主父偃盛言其便,上竟用主父計,立朔方郡。
元朔二年,主父言齊王內淫佚行僻,上拜主父為齊相。至齊,遍召昆弟賓客,散五百金予之,數之曰:「始吾貧時,昆弟不我衣食,賓客不我內門;今吾相齊,諸君迎我或千里。吾與諸君絕矣,毋復入偃之門!」乃使人以王與姊姦事動王,王以為終不得脫罪,恐效燕王論死,乃自殺。有司以聞。
主父始為布衣時,嘗游燕、趙,及其貴,發燕事。趙王恐其為國患,欲上書言其陰事,為偃居中,不敢發。及為齊相,出關,即使人上書,告言主父偃受諸侯金,以故諸侯子弟多以得封者。及齊王自殺,上聞大怒,以為主父劫其王令自殺,乃徵下吏治。主父服受諸侯金,實不劫王令自殺。上欲勿誅,是時公孫弘為御史大夫,乃言曰:「齊王自殺無後,國除為郡,入漢,主父偃本首惡,陛下不誅主父偃,無以謝天下。」乃遂族主父偃。
主父方貴幸時,賓客以千數,及其族死,無一人收者,唯獨洨孔車收葬之。天子后聞之,以為孔車長者也。
『사마법(司馬法)』에 ‘나라가 비록 강대해도 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하고, 천하가 비록 태평하더라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롭게 된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천하가 이미 평정된 후에 천자는 ‘대개(大凱)’를 연주하고, 봄에는 수(蒐)라는 사냥을 하고 가을에는 선(獮)이라는 사냥을 합니다. 제후 또한 봄에는 군대를 정비하고 가을에는 군대를 연마합니다. 이는 모두 전쟁을 잊지 않기 위한 행사입니다.
그러나 무릇 성내는 것은 덕을 거스르는 것이요, 병기는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며, 싸움은 말단의 일입니다. 옛날 천자는 한 번 성내면 반드시 사람을 죽여 피를 보았습니다. 때문에 성왕(聖王)은 그런 일을 신중하게 행했습니다.
대개 싸워서 이기는 것에 힘을 쏟고 무력을 다하는 자로서 후회하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옛날 진시황(秦始皇)은 전투해서 승리한 위세를 몰아 천하를 잠식하기 시작하여 전국(戰國)을 병탄하고 천하를 통일했으니, 그 무공(武功)이 삼대(三代)와 같았습니다. 또 진시황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흉노를 치려고 했습니다.
그때에 이사(李斯)가 이렇게 간언했습니다. ‘불가합니다. 흉노는 성곽을 쌓고 일정한 곳이 살지 않으며, 창고에 쌓아놓고 지킬 것이 없습니다. 마치 새떼가 모였다가 흩어지듯 이리저리 날라 다니는 것 같아 제압하기 어렵습니다. 경무장한 병사로 깊이 쳐들어가면 필시 군량이 끊어질 것입니다. 군량을 보급하면서 행군하려면 너무 부담이 커서 일을 도모할 수 없습니다. 설사 그들의 땅을 얻더라도 이로울 것이 없고, 그 백성들을 다스릴 때에 그들을 부리고 지키게 할 수는 없습니다. 승리하고 나서 반드시 그들을 죽여야 하는데, 그것은 만백성의 부모 된 자의 도리가 아닙니다. 중국을 피폐하게 하면서 흉노를 치는 것을 통쾌하게 여긴다면, 이는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진시황이 이사의 간언을 무시하고 결국 몽염(蒙恬)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흉노를 공격하여 천리의 땅을 개척하고 하수(河水)로 경계를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 땅은 본래 염분이 많은 늪지대로 오곡이 제대로 자라지도 못합니다. 그럼에도 천하의 장정들을 보내 북하(北河)를 지키게 했습니다. 이곳에 10여 년 동안 군사를 주둔시켜놓은 폭염과 풍찬노숙으로 죽은 자가 이루 셀 수가 없을 지경이었지만, 결국 하수의 북쪽으로 진출하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군사가 부족하거나 무기가 제대로 충분하게 잦추어지지 못했기 때문이었겠습니까? 그 당시의 형세가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진나라 조정에서 천하의 백성들로 하여금 말먹이와 군량을 운송하게 하면서 황현(黃縣), 수현(腄縣), 낭야(琅邪) 등과 같은 바다에 인접한 군에서부터 북하까지 전하고 전해 운송시켰습니다. 그러나 현지 당도한 것은 처음의 30종(鍾)이었던 것이 겨우 1석(石)만이 남아 전해질 뿐이었습니다.
남자들은 죽도록 농사를 지어도 군량의 수요에는 부족했고, 아녀자들이 아무리 길쌈을 해도 군막(軍幕)을 만들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생활이 피폐되어 쓰러졌고, 과부와 노약자는 서로 부양할 수 없어 길바닥에는 죽은 시체가 잇따르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천하가 진나라를 배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에 고조(高祖) 황제께서 천하를 평정하고 변방을 공략하고 있었습니다. 흉노가 대곡(代谷) 밖에 모여든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을 공격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어사(御史) 성(成)이 나아가 이렇게 간언했습니다. “불가합니다. 저 흉노의 속성은 짐승처럼 모였다가 새떼처럼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을 뒤쫓는 것은 그림자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폐하의 성덕으로 흉노를 공격한다고 해도 신은 그것을 위험한 일이라고 여깁니다.”
고조 황제가 그의 간언을 듣지 않고 마침내 북쪽으로 진격하여 대곡에 이르렀다가, 결국 평성(平城)에서 포위당하셨습니다. 고조 황제께서는 이를 심히 후회하고, 결국 유경(劉敬)을 보내 화친의 조약을 맺게 하셨습니다. 그런 뒤에 천하는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고로 『손자병법(孫子兵法)』에 ‘군대 10만을 동원하면, 날마다 천금을 쓰게 된다.’고 기술해 둔 것입니다. 진나라는 당시 수십만의 군대를 늘 변방에 주둔시켜놓고서 적군을 무찌르고 장수를 베어 죽이며 선우(單于)를 사로잡은 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그것 또한 흉노로 하여금 적개심을 높이고 복수심을 불타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을 막기 위해서 천하의 비용을 다 써도 역부족이었습니다.
위로는 나라의 창고를 텅 비게 만들고, 아래로는 백성을 고달프게 하면서 나라 밖에 위엄을 떨치는 것으로 만족스럽게 여기는 것은 불미스런 일입니다. 흉노를 통제하기 어려웠던 것이 어느 한 시대에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도둑질을 감행하고 침입하여 재물과 백성들을 잡아가는 것은 밥 먹듯 행하는 것은 그들의 천성이 본래 그렇기 때문입니다. 위로 멀리 우(虞), 하(夏), 은(殷), 주(周)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그들을 규정에 따라 세를 거두지 않고 그 잘못을 징벌하지 않고, 마치 금수처럼 여기고 사람처럼 대하지 않았습니다.
멀리 옛 왕조였던 우, 하, 은, 주나라의 전통을 살피지 않고, 가까운 시대의 과실을 따라 백성들이 괴롭게 만드는 것은 신이 매우 우려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오래되면 변란이 생기고, 그들이 하는 일이 고통스러우면 딴 마음을 먹게 마련입니다. 이는 또한 변경의 백성들을 고달프고 시름에 잠기게 해 역심(逆心)을 품게 만듭니다.
장수와 관리들은 서로 의심하면서 외세와 결탁해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예전에 위타(尉佗), 장한(章邯)처럼 그들의 야심을 이룰 수 만들게 합니다. 진나라의 정령(政令)이 시행되지 않았던 까닭은 권력이 위타와 장한에게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득실의 관한 구체적인 사례입니다.
고로 『주서(周書)』에는 ‘국가의 안위는 황제의 정령에 달려 있고, 국가의 존망은 인사에 달려 있다.’라고 했습니다. 청컨대 폐하께서는 이를 상세히 살피시고 깊이 심사숙고하시길 바랍니다.”
이때, 조(趙)나라 사람 서악(徐樂)과 제나라 사람 엄안(嚴安)이 각각 상소해 시정에 대해 말했다. 서악은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렸다.
“신이 듣건대 천하의 근심은 흙이 무너지는 형세인 ‘토붕(土崩)’에 있는 것이지 기와가 깨지는 형세인 ‘와해(瓦解)’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토붕’의 형세라고 하면, 진(秦)나라의 말세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당시 사람인 진승(陳勝)은 천승(千乘)의 높은 신분도 아니며, 한 치의 땅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출신성분이 왕공(王公), 대인(大人)이나 명망 있는 가문의 후예와 같은 신분도 아니었으며, 시골에서도 명성이 없었습니다.
또한 공자(孔子), 묵적(墨翟), 증삼(曾參)과 같은 현능함을 갖추지도 못했고, 도주공(陶朱公)나 의돈(猗頓)과 같이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빈민가에서 창 자루를 들고 일어나 팔을 걷어붙이고 앞장서서 소리치니 천하 사람들이 마치 바람처럼 몰려와 그를 따랐습니다. 이것은 무슨 연고에서 비롯된 것인가? 백성이 고달픈데도 황제가 이를 안타깝게 여기지 않고, 아랫사람이 원망하는데도 윗사람이 이를 알지 못하며, 시속이 어지러워지고 정치를 바르게 펼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진승이 밑천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토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천하의 근심거리는 토붕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와해’의 형세라고 하는가? 오(吳), 초(楚), 제(齊), 조(趙)나라 등 칠국의 반란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칠국이 모의해 대역을 범하고 모두가 만승(萬乘)의 천자라고 일컬었습니다. 병력이 수 십 만이었고, 그 위세는 나라 안을 위협하기에 충분했고, 재물은 그 백성과 군사들을 유혹하기에 넉넉했습니다. 그러나 서쪽으로 한 치의 땅도 빼앗지 못하고 자신의 몸은 중원으로 사로잡혀 갔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었겠습니까? 자신의 권위가 필부보다 가볍고 병력이 진승보다 약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당시의 형세가 선제의 은택이 아직 쇠퇴하지 않아서, 편안히 정착해 풍속을 즐기는 백성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제후를 국경 밖에서 도와주는 세력이 없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와해’의 형세라고 합니다.
따라서 천하의 근심은 결코 와해의 형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를 통해서 볼 때 천하가 진실로 토붕의 형세에 놓이면 설령 포의의 궁핍한 선비라고 하더라도 더러 앞장서서 악행을 제창하여 온 세상을 위태롭게 할 수 있습니다. 진섭(陳涉)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하물며 삼진(三晉)의 군주와 같은 강자가 혹 존재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천하가 비록 잘 다스려지지 않았더라도 진실로 토붕의 형세가 없다면, 비록 강대국의 날카로운 군대가 모반하더라도 발 돌릴 틈도 없이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오, 초, 제, 조 등 칠국의 반란이 그 실례입니다. 하물며 신하들이나 백성들이 난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이 두 가지 실례는 국가 안위에 명백한 요건이 되는 것으로 현명한 군주는 여기에 관심을 두고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요즈음 관동(關東)에는 오곡이 잘 여물지 않아 수확이 예전처럼 회복되지 않아서 백성들이 무척 곤궁하게 되었고 변경의 전쟁까지 겹쳤습니다. 이것을 사리에 따라 따져본다면, 앞으로 이런 형국을 불안하게 여기는 백성들이 생길 것입니다. 불안하면 쉽게 동요합니다. 쉽게 동요하는 것은 토붕의 형세입니다.
이 때문에 현명한 군주는 만물 변화의 근원을 살펴서 안위의 기틀을 분명히 하고, 조정에 앉아서 정무에 열중하며 화란의 형체가 드러나기 전에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요점은 천하에 토붕의 형세가 없도록 미리 조치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강대국의 정예군대가 모반하더라도 폐하께서는 짐승을 쫓고 나는 새들을 잡으며, 잔치를 벌이는 장소를 더욱 넓혀서 마음껏 즐기며, 사냥을 즐기시더라도, 아무 일 없는 듯 평온할 것입니다.
금석사죽(金石絲竹)의 음악 소리가 폐하의 귀에 끊이지 않고, 장막 안에서 미녀들과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고 배우, 광대의 웃음소리가 폐하의 면전에 끊이지 않더라도, 천하에는 근심해야 할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굳이 명성이 탕왕(湯王), 무왕(武王)과 같고, 풍속이 성왕(成王), 강왕(康王) 때와 같기를 바라겠습니까!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데, 폐하께서는 타고난 성군(聖君)으로서 관대하고 인자한 자질을 지니고 계십니다. 진실로 천하를 다스리는 것에 힘쓰신다면, 탕왕이나 무왕과 같은 명성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고, 성왕과 탕왕 때의 풍속을 부흥시킬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 토붕과 와해의 형세를 피하는 이 두 가지 근본을 확립한 다음, 존귀하고 편안한 현실 속에서 당세에 명예를 드날리어, 천하 사람들을 아끼고 사방 오랑캐를 심복시키며, 남은 은덕이 여러 대에 걸쳐 융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폐하가 하실 일은 천자의 자리에서 앉아서 병풍을 등지고 소매를 거두고 왕공과 대인들로 하여금 읍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이 들으니 왕자(王者)가 되기를 기도하면 비록 그것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천하를 안정시키기에는 충분하다고 합니다. 천하가 편안해지면, 폐하께서 무엇을 찾든 못 얻을 것이 없고, 무엇을 행한들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으며, 어디를 정벌한들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엄안은 이런 상서문을 올렸다.
“신이 들으니 주나라가 천하를 소유했던 3백여 년 동안에 성왕과 강왕 시절이 가장 융성했는데, 이때에는 40여 년 동안이나 형벌을 버려둔 채 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3백년 뒤에 주나라가 쇠퇴해가는 과정에서 오패(五覇)가 번갈아 나왔던 것입니다.
오패는 늘 천자를 보위해 이로운 것을 일으키고 해를 제거했으며, 사나운 자를 주벌하고 간사한 것을 금해 천하를 바로잡아 천자를 높였습니다.
오패가 사라지자 현인과 성군이 뒤를 이어 나오지 않으니, 천자는 고립되고 쇠약해졌습니다. 그 때 천자의 명령은 시행되지 않고, 제후들은 제멋대로 행동하여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고, 다수는 소수에게 포악하게 굴었습니다.
전상(田常)이 제나라를 찬탈하고 육경(六卿)이 진(晉)나라를 나누어가지자 이때부터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전개되었고 백성들의 고통의 시작 되었습니다.
강대국은 이웃 약소국의 침공에 힘쓰고, 약소국은 방비에 여념이 없게 되어서 나라 간에 합종(合縱)과 연횡(連橫)이 반복되어 사자들이 분주히 말을 달려 오가게 되었습니다. 군사들의 갑옷과 투구에는 서캐와 이가 가득하건만, 백성들은 그 고통을 호소할 곳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진나라 왕은 천하를 점차 잠식하여 전국(戰國)을 병탄하고 황제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는 천하의 정치를 장악하고 제후들의 성을 파괴하였고, 그들의 무기를 녹여서 종과 악기를 주조해 다시는 무기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백성들은 그제야 비로소 현명한 천자를 얻어서 전란의 재앙을 면할 수 있었고 모두들 다시 새로운 세상에 태어났다고 여겼습니다.
그때 진나라가 만일 형벌과 세금을 줄이고 요역을 덜어주며, 인의를 숭상하고 권세와 이익을 천시하고, 후박한 것을 숭상하고 약삭빠른 기교를 나쁘게 여겨, 풍속을 바꿔서 천하를 교화했다면, 아마도 대대로 편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나라는 이러한 풍속을 교화하지 않고 옛 관습에 따라 약삭빠른 기교와 권세, 이익을 추구하는 자는 등용하고 미덥고 충성스러운 자는 물리쳤습니다. 법을 엄중하게 하고 정치는 더욱 준엄하게 시행했습니다. 아첨하는 자가 많아서 황제는 날마다 칭송하는 말만 들으니, 야심은 커지고 마음은 더욱 교만해졌습니다. 그 결과 자기의 위세를 나라 밖까지 떨치고 싶어졌습니다. 마침내 몽염(蒙恬)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오랑캐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국토를 개척하여 북하의 땅을 지키며, 백성들에게 군량을 지고 그 뒤를 따르게 했습니다. 또다시 위관(尉官)인 도수(屠睢)에게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백월(百越)을 치게 하고, 감어사(監御史) 록(監祿)에게 운하를 파고 군량을 옮겨 월(越)나라에 깊숙이 들어가게 하니, 월나라 군사들은 달아나버렸습니다. 부질없이 날을 보내며 버티다가 진나라 병사는 군량이 부족해졌습니다. 이에 월나라 군사가 공격하니 진나라의 군대는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진나라는 이에 조타에게 병졸을 거느리고 월나라를 지키도록 했습니다.
당시 진나라의 전선은 북쪽의 흉노에서부터 남쪽으로는 월나라까지 걸쳐있었기 때문에 군대를 쓸모없는 땅에 주둔시켜놓은 채, 진퇴양난에 빠져들었습니다. 장정들은 10여 년을 계속해 갑옷을 입고 젊은 부녀자들은 군수물자를 실었다. 그 고달픔에 삶을 마다하고 길가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하는 사람들이 줄을 지었습니다.
진나라의 황제가 죽자 천하에는 대란 일어났습니다. 진승과 오광(吳廣)은 진(陳) 땅에서 봉기하고, 무신(武臣)과 장이(張耳)는 조(趙) 땅에서 일어났으며, 항량(項梁)은 오(吳) 땅에서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계속하여 전담(田儋)은 제(齊) 땅에서 군대를 일으켰고, 경구(景駒)는 영(郢) 땅에서 일어났으며, 주불(周市)은 위(魏) 땅에서 봉기했고, 한광(韓廣)은 연(燕) 땅에서 거병했습니다. 심산유곡에서까지도 호걸스러운 인물들이 사방에서 봉기하니, 그 숫자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공후(公侯)의 자손이나 장관의 벼슬아치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권세도 없이 보잘것없는 시골 거리에서 봉기해 창 자루를 들고 시세에 따라 움직였던 것입니다. 서로 의론하지는 않았어도 함께 봉기했으며, 약속하지는 않았어도 한데 모여들었습니다. 점거한 지역이 넓어져서 마침내는 패왕이 되기에 이르니, 그것은 모두 시세의 가르침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진나라가 천자의 귀한 신분으로 천하를 소유했으면서도, 결국 대를 잇지 못하고 제사가 끊기게 된 것은 지나치게 전쟁을 벌인 화 때문입니다. 결국 주나라는 약했기 때문에 나라를 잃었고, 진나라는 강했기 때문에 나라를 잃었던 것입니다. 이는 시세의 변화에 따르지 못한 데서 기인한 화난(禍難)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남이(南夷)를 부르고, 야랑(夜郎)을 입조시키며, 강(羌)과 북(僰)을 투항시키고, 예주(濊州)를 공략해 성읍(城邑)을 건설하며 흉노의 땅 깊숙이 들어가 그들의 용성(蘢城)을 불태우고 합니다. 이런 일를 논하는 자는 그런 전략이 모두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남의 신하된 자의 이익이 될 수 있으나 천하를 위한 좋은 계책은 아닙니다. 지금 중국에는 개 짖는 소리에 놀랄 일도 없을 정도로 아주 태평한데, 나라 밖으로 먼 곳의 수비에 얽매어 국가를 피폐하게 하는 것은 백성을 자식처럼 생각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끝없는 욕망을 좇아 만족을 추구함으로써 흉노와 원한을 맺는 것은 변경을 편안하게 하는 길이 아닙니다. 일단 화가 맺히면 풀어지지 않으므로 싸움은 그쳤다가 다시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가까이 있는 자는 근심에 휩싸일 것이요, 멀리 있는 자는 두려움에 떨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천하를 오래도록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천하는 갑옷을 수리하고 칼을 갈며, 화살을 바로잡고 시위를 점검하며 군량을 수송하느라고 잠시도 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천하 사람들이 함께 근심하는 바입니다.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오래되면 변란이 일어나고, 일이 복잡해지면 회의가 생기는 법입니다. 지금 나라 밖으로 개척한 땅은 천리나 되고 이곳에 줄지은 성들이 수십 개입니다. 산천의 형세와 토지에 근거해 그곳의 백성들을 통제하고 인근 제후들을 위협하니, 이 또한 공실(公室)의 이익이 아닙니다. 예전에 제나라와 진(晉)나라가 무너진 까닭을 살펴보면, 공실의 지위가 쇠약해지고 육경의 세력이 성대해졌기 때문입니다.
또 근자에 진(秦)나라가 멸망한 까닭을 살펴보면, 형벌이 지나치게 혹독하고 욕심이 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군수(郡守)의 권력의 중함은 육경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군수들은 관할하는 땅은 천리 가까이 되어 진승 등이 근거지로 삼았던 몇 몇 작은 골목에 비할 수 없이 광활합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갑옷, 병기 그리고 각종 장비는 진승 등이 사용했던 창 자루 정도가 아닙니다. 이런 형세 하에 천하의 변란을 만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는 자명합니다.”
이 상서들이 천자에게 올라가자, 천자는 세 사람들을 불러 말했다. “그대들은 모두들 어디에 있었는가? 어째서 이제야 만났단 말인가!” 그리고는, 주보언, 서악, 엄안을 낭중(郎中)으로 임명했다. 주보언이 거듭 천자를 배알하고 국사에 대해 진언을 올리자 그를 알자(謁者)로 임용했다가 다시 중대부(中大夫)로 옮기도록 했다. 그는 일 년에 네 차례나 전임되었다. 주보언이 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상서를 올렸다.
“옛날의 제후들은 그 영지가 사방 1백리를 넘지 않았기 때문에 국력이 강하건 약하건 통제하기 수월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제후들은 수십 개의 성을 잇 따라 차지하고 있는가 하면, 영지가 사방 천리나 됩니다. 평소에는 교만, 사치해 음란하게 생활하다가 위급해지면 자신들의 강대함을 근거로 서로 연합해 조정에 반기를 들려고 합니다.
이제 법으로 그들의 영지를 삭탈한다면 반역의 마음이 싹트게 될 것입니다. 지난날 조조(晁錯)가 바로 그러한 경우였습니다.
지금 제후의 자제들은 더러 수십 명이나 되지만 적장자(適長子)만이 오직 자신의 계승하고 나머지 자제들에게는 골육임에도 불구하고 손바닥 만한 땅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부모로써의 인과 자식으로써의 효의 도가 널리 선양되지 않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제후들에게 명령해 자제들에게 고루 봉지를 나누어주어, 그 자제들이 영지를 근거로 제후에 봉하십시오. 그러면 제후로 봉해진 자들은 모두 원하던 것을 얻게 되어 좋아할 것입니다. 또한 폐하께서 은덕을 베푸시는 것이나 기실 그들의 나라를 나누게 되는 것이니, 그들의 영지를 삭탈하지 않아도 저들은 점차 약화될 것입니다.”
그러자 황제는 그의 계책을 따랐다. 주보언은 다시 상서를 올려 황제를 설득했다. “무릉(茂陵)에 새로운 현을 설치되었습니다. 그곳에 천하의 호걸, 부호 그리고 난동을 부린 백성들을 모두 무릉으로 이주시키십시오. 그러면 안으로 경사(京師)를 충실하게 만들고, 밖으로 간교한 무리를 없앨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이지 않고도 해를 제거한다고 하는 일입니다.” 황제는 또 그의 계책을 따랐다.
주보언은 위자부를 높여 황후(皇后)로 내세우고, 연왕(燕王) 유정국(劉定國)의 음탕한 행위를 적발하는 데에 공이 있었다. 대신들 중에 주보언의 입을 두려워해 바친 뇌물이 수천 금이나 되었다. 어떤 사람이 주보언에게 말했다. “전횡이 너무 지나칩니다.” 이에 주보언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젊은 시절부터 40여 년 동안이나 유세하며 천하를 떠돌아다녔지만 뜻한 바를 얻지 못했습니다. 친부모는 저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고, 형제는 거두어주지 않았으며, 빈객들은 나를 버렸습니다. 나는 오랜 세월 어렵게 생활했습니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살아생전 오정식(五鼎食)을 먹을 수 없다면 오정에 삶아져 죽을 뿐입니다. 이제 내 인생의 날은 저물어 가고 갈 길은 멉니다. 그 때문에 순서를 뒤바꾸어 서두른 겁니다.”
주보언은 또 황제에게 삭방과 흉노의 연관성을 다음과 같이 주청했다. “삭방(朔方)은 땅이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며, 밖으로 하수(河水)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몽염은 거기에 성을 쌓아 흉노를 쫓아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국내적으로는 운송과 국경수비, 조운(漕運) 등의 수고로움을 덜고, 또한 중국이 넓어졌습니다. 이것이 흉노를 망시키는 근본될 수 있습니다.” 천자는 그 상소문을 보고 조정에서 공경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했다. 모두들 그 일 타당하지 않다고 반대했다. 공손홍이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진(秦)나라 때에 30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북하(北河)에 성을 쌓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지금은 이미 버려진 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보언이 다시 완강하게 삭방에 성을 쌓을 경우의 이점을 역설하니, 황제가 주보언의 계책을 받아들여 그곳에 삭방군을 설치했다.
원삭 2년(서기전 127년), 주보언이 제려왕(齊厲王) 유차경(劉次景)은 궁안에서 음란한 짓을 벌이고 행동이 편벽되다고 아뢰자, 황제는 주보언을 제왕의 승상으로 임명했다. 주보언은 제나라에 도착하자 형제와 빈객들을 불러놓고 5백금을 나누어주면서, 이렇게 꾸짖었다.
“옛날 내가 곤궁할 때에 형제는 나에게 의식도 주지 않았고, 빈객들은 우리 집을 찾아오지 않았소, 이제 내가 제나라의 상국이 되니, 여러분들 중에 나를 맞이하러 천리 먼 길을 달려온 자도 있었소, 내 당신들과는 영원히 절교할 것이오. 다시는 우리 집에 출입하지 마시오!”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서 제려왕이 그 맏누이와 간통한 일을 가지고 그를 핍박했다. 제려왕은 죄를 사면 받지 못하고 예전의 연왕(燕王)처럼 사형 당하는 것을 두려워해,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담당 관리가 이 사실을 천자에게 보고했다.
주보언이 지난날 평민으로 불운하게 지낼 때, 연나라와 조나라 사이를 다니며 유세한 적이 있었다. 뒤에 그가 귀한 신분이 된 뒤에 연나라의 비리를 들추어내자 조왕 유팽조(劉彭祖)는 주보언이 자신의 나라에도 화근이 될 수 있다고 걱정했다. 그리하여 황제에게 글을 올려 주보언의 불미스런 일을 폭로하고자 했으나, 주보언이 항상 황제 곁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발설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보언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함곡관 밖으로 나가게 되자, 즉시 사람을 시켜 황제에게 이렇게 고발했다. “주보언은 제후들에게 뇌물을 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제후의 자제로 봉후(封侯)된 자들이 많습니다.” 이 때 황제는 제려왕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고 진노했고 주언보가 제려왕을 협박해 자살하게 만들었다고 여겼다. 그래서 형리에게 주보언의 죄를 심문하게 했다.
주보언은 제후들의 뇌물을 받은 것은 인정했으나, 제려왕을 위협해 자살하게 만들지는 않았다고 자백했다. 천자는 주보언을 죽이지 싶지 않았으나 당시 어사대부였던 공손홍이 이렇게 말했다.
“제려왕은 자살하고 후손이 없는지라 제나라는 군(郡)으로 편입되어 한나라에 귀속되었습니다. 주보언은 본래 악의 우두머리입니다. 폐하께서 주보언을 죽이지 않으신다면, 천하의 백성들에게 사과할 방법이 없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주보언과 그 일족은 처형되었다.
주보언 황제의 총애를 받아 귀한 신분이 되었을 때에 그를 찾아오는 빈객들이 수천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가 멸족 당하자 아무도 그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없었다. 그런데 효현(洨縣)의 공거(孔車)만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주었다. 천자는 뒤에 그 말을 전해 듣고 공거를 장자(長者)로 여겼다.
太史公曰:公孫弘行義雖修,然亦遇時。漢興八十餘年矣,上方鄉文學,招俊乂,以廣儒墨,弘為舉首。主父偃當路,諸公皆譽之,及名敗身誅,士爭言其惡。悲夫!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공손홍(公孫弘)은 행의(行義)가 뛰어났지만 시기도 잘 만났다. 한나라가 흥기한 지 80여 년이 지나 황제께서 바야흐로 문학을 숭상해 뛰어난 인재들을 불러 모아 유학(儒學)과 묵학(墨學)을 선양할 무렵에 공손홍은 두각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주보언(主父偃)이 요직에 있을 때, 사람들은 모두들 사귀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고 그를 칭송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이 실추되어 사형을 당하자 모두 다투어 그의 악행을 비난했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太皇太后詔大司徒大司空:「蓋聞治國之道,富民為始;富民之要,在於節儉。《孝經》曰『安上治民,莫善於禮』。『禮,與奢也寧儉』。昔者管仲相齊桓,霸諸侯,有九合一匡之功,而仲尼謂之不知禮,以其奢泰侈擬於君故也。夏禹卑宮室,惡衣服,后聖不循。由此言之,治之盛也,德優矣,莫高於儉。儉化俗民,則尊卑之序得,而骨肉之恩親,爭訟之原息。斯乃家給人足,刑錯之本也歟?可不務哉!夫三公者,百寮之率,萬民之表也。未有樹直表而得曲影者也。孔子不云乎,『子率而正,孰敢不正』。『舉善而教不能則勸』。維漢興以來,股肱宰臣身行儉約,輕財重義,較然著明,未有若故丞相平津侯公孫弘者也。位在丞相而為布被,脫粟之飯,不過一肉。故人所善賓客皆分奉祿以給之,無有所餘。誠內自克約而外從制。汲黯詰之,乃聞于朝,此可謂減於制度而可施行者也。德優則行,否則止,與內奢泰而外為詭服以釣虛譽者殊科。以病乞骸骨,孝武皇帝即制曰『賞有功,褒有德,善善惡惡,君宜知之。其省思慮,存精神,輔以醫藥』。賜告治病,牛酒雜帛。居數月,有瘳,視事。至元狩二年,竟以善終于相位。夫知臣莫若君,此其效也。弘子度嗣爵,后為山陽太守,坐法失侯。夫表德章義,所以率俗厲化,聖王之制,不易之道也。其賜弘後子孫之次當為後者爵關內侯,食邑三百戶,徵詣公車,上名尚書,朕親臨拜焉。」
태황태후(太皇太后)가 대사도(大司徒), 대사공(大司公)에게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데에서 시작되고,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요체는 절약하고 검소하는 데에 달려있다고 했다.
『효경(孝經)』에는 “윗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리는 도로 예(禮)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라고 하였고, 또 “예는 사치스러운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한 편이 낫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옛날 관중은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제 환공을 보필해 제후의 패자가 되게 했으며, 제후들을 아홉 번이나 규합해 천하를 바로잡은 공이 있었다. 그러나 공자(孔子)께서는 관중은 예를 모른다고 하셨다. 그것은 관중의 호사스러움이 천자에게 비길 정도로 과도했기 때문이다. 하(夏)나라 우(禹)임금은 누추한 궁실에 살면서 남루한 의복을 입고도 후세의 성인들도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고 했다. 이것을 통해 살펴본다면, 훌륭하게 다스렸다는 것은 덕망 있는 정사를 펼쳤다는 것이다.
덕은 검소한 것이 으뜸으로 삼는다. 검소한 것으로 풍속과 백성을 교화시킨다면, 신분의 질서가 제자리를 찾게 되고 골육 간에는 서로 아끼게 되어 서로 다투는 것이 근본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백성들을 풍족하게 만들어 형벌을 쓰지 않아도 다스려지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어찌하여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릇 삼공(三公)은 모든 관료들의 통솔자요, 만민의 본보기이다. 이제껏 곧은 표지를 세워놓고 굽은 그림자를 얻은 자는 없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그대가 바르게 되다면, 누구라서 감히 바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선한 이를 들어서 쓰고 그렇지 못한 자를 교화한다면 서로 선을 권장하게 될 것이다.”
한나라가 흥기한 이래, 수족과 같은 신하들과 재상들은 몸소 근검절약을 실천하면서 재물을 경시하고 의를 중시했지만, 그중에서도 죽은 승상 평진후 공손홍처럼 눈에 띄는 사람은 없었다. 승상의 지위이면서도 베 이불을 사용하고, 거친 밥에 고기반찬은 한 가지 이상을 먹지 않았다. 평진후는 친구를 비롯해 사이좋은 빈객들에게 자신의 봉록을 나누어주고 자신을 위해 집에 남기지 않았다. 진실로 마음속으로 스스로 검약할 줄 알았고, 밖으로는 제도를 따랐다.
급암이 그의 위선적인 행위를 힐책함으로써 그의 사정이 마침내 조정에 알려졌다. 이는 그의 행위가 정해진 제도의 본뜻을 손상시킨 면도 있지만 시행할 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덕이란 넉넉하면 밖으로 드러나 행해지고 그렇지 못하면 그치는 것이다. 그것은 속으로는 사치하면서도 겉으로는 허위의 옷을 걸치고 헛된 명예를 낚시질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기를 청하자, 효무제(孝武帝)께서는 “공이 있는 자를 상 주고 덕이 있는 자를 표창하며,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그대가 잘 알 것이오. 근심을 덜고 정신을 모아 의약으로 몸을 돌보라.”고 하셨다.
그러고는 휴가를 주어 병을 치료하게 하고, 쇠고기와 술, 그리고 비단을 하사하셨다. 몇 달이 지나자 그는 병이 치유되어 다시 승상의 업무를 볼 수 있었다.
원수(元狩) 2년(서기전 121년), 그는 마침내 승상으로 재직 중에 생을 마감했다.
무릇 황제만큼 자신의 신하를 잘 아는 자는 없다고 했는데, 무제와 공손홍의 사이가 바로 그 증거이다. 공손홍의 작위는 아들 공손도가 물려받았고, 후에 산양의 태수가 되었다. 그러나 법을 위반하여 제후의 작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덕을 표창하고 의를 드러내는 것은 풍속을 인도해 교화에 힘쓰는 것은 성왕(聖王)의 법도이다. 공손홍의 후손으로 서열상으로 그의 뒤를 이어야 할 자에게 관내후(關內侯)의 작위와 식읍 3백호를 하사하노라. 불러서 공거(公車)에 나가게 해 상서(尙書)에 이름을 올리도록 하라. 내가 친히 나아가 임명하리라!
贊
班固稱曰:公孫弘、卜式、兒寬皆以鴻漸之翼困於燕雀,遠跡羊豕之閒,非遇其時,焉能致此位乎?是時漢興六十餘載,海內乂安,府庫充實,而四夷未賓,制度多闕,上方欲用文武,求之如弗及。始以蒲輪迎枚生,見主父而嘆息。群臣慕向,異人并出。卜式試於芻牧,弘羊擢於賈豎,衛青奮於奴仆,日磾出於降虜,斯亦曩時版筑飯牛之朋矣。漢之得人,於茲為盛。儒雅則公孫弘、董仲舒、兒寬,篤行則石建、石慶,質直則汲黯、卜式,推賢則韓安國、鄭當時,定令則趙禹、張湯,文章則司馬遷、相如,滑稽則東方朔、枚皋,應對則嚴助、朱買臣,歷數則唐都、落下閎,協律則李延年,運籌則桑弘羊,奉使則張騫、蘇武,將帥則衛青、霍去病,受遺則霍光、金日磾。其餘不可勝紀。是以興造功業,制度遺文,後世莫及。孝宣承統,纂修洪業,亦講論六藝,招選茂異,而蕭望之、梁丘賀、夏侯勝、韋玄成、嚴彭祖、尹更始以儒術進,劉向、王褒以文章顯。將相則張安世、趙充國、魏相、邴吉、于定國、杜延年,治民則黃霸、王成、龔遂、鄭弘、邵信臣、韓延壽、尹翁歸、趙廣漢之屬,皆有功跡見述於後。累其名臣,亦其次也。
【索隱述贊】平津巨儒,晚年始遇。外示寬儉,內懷嫉妒。寵備榮爵,身受肺腑。主父推恩,觀時設度。生食五鼎,死非時蠹。
반고(班固)는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공손홍(公孫弘)과 복식(卜式), 예관(兒寬)은 모두 큰 기러기의 날개를 지니고서도 제비나 참새와 같은 무리에게 곤욕을 당하고, 멀리 양과 돼지를 치는 시골에 자취를 감추고 살았다. 그들이 때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찌 그러한 지위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당시는 한나라가 흥기한 지 60여 년, 온 천하는 안정되었고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했다.
그러나 사방 오랑캐는 여전히 복종하지 않았으며, 제도에는 미비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황제께서는 문(文), 무(武)를 지닌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애타게 찾았고 인재를 놓칠까 매우 염려하셨다.
그리하여 부들로 바퀴를 두른 수레를 보내 매승(枚乘)을 맞아들이고, 주보언을 보고는 늦게 만난 것을 탄식했다. 이에 많은 인재들이 흠모하여 다투어 몰려왔는데, 특출한 자들이 잇달아 나오게 되었다.
복식은 양을 치다가 등용되었고, 상홍양(桑弘羊)은 장사치로서 발탁되었다. 위청(衛靑)은 노복의 신분에서 몸을 일으켰고, 김일제(金日磾)는 투항한 흉노 속에서 나왔다. 이것은 옛날에 판축(版築)일을 하던 부열(傅說)이나, 소에게 꼴을 먹이던 영척(寧戚)과 같은 인재를 등용한 것과 같은 경우이다. 한나라가 인재를 얻음이 이때에 이르러 가장 성대했다.
유학에 뛰어난 인사로는 공손홍, 동중서, 예관이 있었고, 행실이 돈실하고 후덕한 인물로는 석건(石建), 석경(石慶)이 있었으며, 질박하고 정직한 인사로는 급암, 복식이 있었다. 현인을 잘 천거한 인사로 한안국(韓安國), 정당시(鄭當時)가 있었으며, 법령을 제정하는 데에는 조우(趙禹), 장탕(張湯)이 있었다. 문장에 특출한 인물로는 사마천(司馬遷),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있었으며, 골계(滑稽)에 뛰어난 사람으로는 동방삭(東方朔), 매고(枚皐)가 있었다. 응대(應對)에는 엄조(嚴助), 주매신(朱買臣)이 있었고, 역법과 천문에는 당도(唐都), 낙하굉(落下閎)이 있었으며, 음악과 음률에는 이연년(李延年)이 있었고, 산수와 회계에는 상홍양(桑弘羊)이 있었다. 외국에 간 사신으로는 장건(張騫), 소무(蘇武)가 있었고, 장수로는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이 있었으며, 유조(遺詔)를 받아 어린 천자를 보필하는 데에는 곽광(霍光), 김일제(金日磾)가 있었다. 그 나머지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이들로 공업(功業)을 세우고 여러 가지 제도와 문물을 남기니, 후세에는 아무도 이에 미치지 못했다. 선제(宣帝)께서는 적통을 계승하여 대업을 새로이 하고 육예(六藝)를 강론하고, 뛰어난 인재를 불러 모았다. 그리하여 소망지(蕭望之), 양구하(梁丘賀), 하후승(夏侯勝), 위현성(韋玄成), 엄팽조(嚴彭祖), 윤갱시(尹更始) 등은 유학으로 등용되었고, 유향(劉向), 왕포(王褒)는 문장으로 이름을 드러냈다. 장상(將相)에는 장안세(張安世), 조충국(趙充國), 위상(魏相), 병길(邴吉), 우정국(于定國), 두연년(杜延年)이 있었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는 황패(黃霸), 왕성(王成), 공수(龔遂), 정홍(鄭弘), 소신신(邵信臣), 한연수(韓延壽), 윤옹귀(尹翁歸), 조광한(趙廣漢) 등이 있었다. 그들이 남긴 공적이 모두 후세에 칭송되었다. 명신(名臣)이 많기로는 이 시대가 무제(武帝) 때의 다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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