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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史記列傳

史記 卷一一一. 衛將軍驃騎列傳

by 柳川 2019. 6. 3.

                                  衛將軍驃騎列傳




大將軍衛青者,平陽人也。其父鄭季,為吏,給事平陽侯家,與侯妾衛媼通,生青。青同母兄衛長子,而姊衛子夫自平陽公主家得幸天子,故冒姓為衛氏。字仲卿。長子更字長君。長君母號為衛媼。媼長女衛孺,次女少兒,次女即子夫。後子夫男弟步、廣皆冒衛氏。


대장군() 위청()은 평양(: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 서남일대) 사람이다. 그의 부친 정계()는 관리의 신분으로 평양후() 조수의 집안을 돌보다가 조수의 첩 위오()와 사통해 아들 청()을 낳았다.

청의 동복형제로는 형인 위장자()와 누이 위자부()가 있었다. 위자부가 평양공주()를 모시다가 가무()로 천자의 총애를 얻었기 때문에 청도 위()를 성으로 삼았다. 청의 자()는 중경()이고, 위장자의 자는 장군()이다. 장군의 모친 위오라고 했는데 위오의 장녀는 위유(), 차녀는 소아()였으며, 삼녀가 바로 자부()였다. 후일 자부의 남동생 보()와 광()도 모두 위를 성으로 삼았다.



青為侯家人,少時歸其父,其父使牧羊。先母之子皆奴畜之,不以為兄弟數。青嘗從入至甘泉居室,有一鉗徒相青曰:「貴人也,官至封侯。」青笑曰:「人奴之生,得毋笞罵即足矣,安得封侯事乎!」

青壯,為侯家騎,從平陽主。建元二年春,青姊子夫得入宮幸上。皇后,堂邑大長公主女也,無子,妒。大長公主聞衛子夫幸,有身,妒之,乃使人捕青。青時給事建章,未知名。大長公主執囚青,欲殺之。其友騎郎公孫敖與壯士往篡取之,以故得不死。上聞,乃召青為建章監,侍中,及同母昆弟貴,賞賜數日閒累千金。孺為太僕公孫賀妻。少兒故與陳掌通,上召貴掌。公孫敖由此益貴。子夫為夫人。青為大中大夫。


위청은 처음 평양후의 집에서 지내다 소년이 되어서야 부친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부친은 위청에게 양을 치게 했고, 본처의 자식들은 모두 그를 머슴으로 취급하며 형제로 쳐주지 않았다. 위청은 일찍이 어떤 사람를 따라 감천궁()에 있는 감옥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목에 칼을 쓴 죄인 한 사람이 위청의 관상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귀인이 될 상으로 관직은 제후가 될 것이다.” 그러자 청은 웃으며 말했다. “남의 집 머슴 신세로 매나 맞지 않고 욕지거리나 안 들으면 그것으로 다행스런 일인데, 어찌 제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위청은 장성하여 평양후 집안의 기사()가 되어 평양공주를 섬겼다. 건원() 2년(서기전 139년) 봄, 위청의 누이인 위자부가 입궁해 황제(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당시 황후는 당읍대장공주()의 딸인 진아교()였다. 그런데 그녀는 아들을 낳지 못하여 후궁에 대한 질투가 심했다. 위자부가 황제의 총애를 받아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대장공주는 질투가 나서 위청을 붙잡아오게 했다.

그때 위청은 건장궁()에서 근무했는데, 아직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대장공주는 위청을 잡아 가두고 그를 죽이려고 했다.

이 때에 위청의 친구인 기랑() 공손오()가 장사()들과 함께 건장궁의 감옥으로 쳐들어가서 위청을 구해주어 죽음을 면할 수가 있었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위청을 불러 건장궁의 궁감() 겸 시중()으로 임명하고 그의 동복형제들도 모두 고귀한 지위에 올랐다. 황제가 며칠 동안 이들에게 내린 하사금이 천금에 이르렀다. 위청의 여동생인 위유는 태복() 공손하()의 처가 되었고, 위소아는 원래 진장()과 사통하고 있었는데, 황제가 진장을 불러 관직에 오르게 하여 귀한 신분이 되었다. 공손오는 위청을 구해준 일로 더욱 높은 지위에 올랐으며, 위자부는 부인()이 되었고, 위청은 태중대부()로 임명되었다.



元光五年,青為車騎將軍,擊匈奴,出上谷;太僕公孫賀為輕車將軍,出雲中;大中大夫公孫敖為騎將軍,出代郡;衛尉李廣為驍騎將軍,出雁門:軍各萬騎。青至蘢城,斬首虜數百。騎將軍敖亡七千騎;衛尉李廣為虜所得,得脫歸:皆當斬,贖為庶人。賀亦無功。

元朔元年春,衛夫人有男,立為皇后。其秋,青為車騎將軍,出雁門,三萬騎擊匈奴,斬首虜數千人。明年,匈奴入殺遼西太守,虜略漁陽二千餘人,敗韓將軍軍。漢令將軍李息擊之,出代;令車騎將軍青出雲中以西至高闕。遂略河南地,至于隴西,捕首虜數千,畜數十萬,走白羊、樓煩王。遂以河南地為朔方郡。以三千八百戶封青為長平侯。青校尉蘇建有功,以千一百戶封建為平陵侯。使建筑朔方城。青校尉張次公有功,封為岸頭侯。天子曰:「匈奴逆天理,亂人倫,暴長虐老,以盜竊為務,行詐諸蠻夷,造謀藉兵,數為邊害,故興師遣將,以征厥罪。詩不云乎:『薄伐玁狁,至于太原』,『出車彭彭,城彼朔方』。今車騎將軍青度西河至高闕,獲首虜二千三百級,車輜畜產畢收為鹵,已封為列侯,遂西定河南地,按榆谿舊塞,絕梓領,梁北河,討蒲泥,破符離,斬輕銳之卒,捕伏聽者三千七十一級,執訊獲醜,驅馬牛羊百有餘萬,全甲兵而還,益封青三千戶。」其明年,匈奴入殺代郡太守友,入略鴈門千餘人。其明年,匈奴大入代、定襄、上郡,殺略漢數千人。

其明年,元朔之五年春,漢令車騎將軍青將三萬騎,出高闕;衛尉蘇建為游擊將軍,左內史李沮為彊弩將軍,太僕公孫賀為騎將軍,代相李蔡為輕車將軍,皆領屬車騎將軍,俱出朔方;大行李息、岸頭侯張次公為將軍,出右北平:咸擊匈奴。匈奴右賢王當衛青等兵,以為漢兵不能至此,飲醉。漢兵夜至,圍右賢王,右賢王驚,夜逃,獨與其愛妾一人壯騎數百馳,潰圍北去。漢輕騎校尉郭成等逐數百里,不及,得右賢裨王十餘人,眾男女萬五千餘人,畜數千百萬,於是引兵而還。至塞,天子使使者持大將軍印,即軍中拜車騎將軍青為大將軍,諸將皆以兵屬大將軍,大將軍立號而歸。天子曰:「大將軍青躬率戎士,師大捷,獲匈奴王十有餘人,益封青六千戶。」而封青子伉為宜春侯,青子不疑為陰安侯,青子登為發干侯。青固謝曰:「臣幸得待罪行閒,賴陛下神靈,軍大捷,皆諸校尉力戰之功也。陛下幸已益封臣青。臣青子在繦緥中,未有勤勞,上幸列地封為三侯,非臣待罪行閒所以勸士力戰之意也。伉等三人何敢受封!」天子曰:「我非忘諸校尉功也,今固且圖之。」乃詔御史曰:「護軍都尉公孫敖三從大將軍擊匈奴,常護軍,傅校獲王,以千五百戶封敖為合騎侯。都尉韓說從大將軍出窳渾,至匈奴右賢王庭,為麾下搏戰獲王,以千三百戶封說為龍頟侯。騎將軍公孫賀從大將軍獲王,以千三百戶封賀為南窌侯。輕車將軍李蔡再從大將軍獲王,以千六百戶封蔡為樂安侯。校尉李朔,校尉趙不虞,校尉公孫戎奴,各三從大將軍獲王,以千三百戶封朔為涉軹侯,以千三百戶封不虞為隨成侯,以千三百戶封戎奴為從平侯。將軍李沮、李息及校尉豆如意有功,賜爵關內侯,食邑各三百戶。」其秋,匈奴入代,殺都尉朱英。

其明年春,大將軍青出定襄,合騎侯敖為中將軍,太僕賀為左將軍,翕侯趙信為前將軍,衛尉蘇建為右將軍,郎中令李廣為後將軍,右內史李沮為彊弩將軍,咸屬大將軍,斬首數千級而還。月餘,悉復出定襄擊匈奴,斬首虜萬餘人。右將軍建、前將軍信并軍三千餘騎,獨逢單于兵,與戰一日餘,漢兵且盡。前將軍故胡人,降為翕侯,見急,匈奴誘之,遂將其餘騎可八百,奔降單于。右將軍蘇建盡亡其軍,獨以身得亡去,自歸大將軍。大將軍問其罪正閎、長史安、議郎周霸等:「建當云何?」霸曰:「自大將軍出,未嘗斬裨將。今建棄軍,可斬以明將軍之威。」閎、安曰:「不然。兵法『小敵之堅,大敵之禽也』。今建以數千當單于數萬,力戰一日餘,士盡,不敢有二心,自歸。自歸而斬之,是示後無反意也。不當斬。」大將軍曰:「青幸得以肺腑待罪行閒,不患無威,而霸說我以明威,甚失臣意。且使臣職雖當斬將,以臣之尊寵而不敢自擅專誅於境外,而具歸天子,天子自裁之,於是以見為人臣不敢專權,不亦可乎?」軍吏皆曰「善」。遂囚建詣行在所。入塞罷兵。



원광() 5년(서기전 130), 위청은 거기장군()이 되어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상곡()에서 출병하고, 태복 공손하는 경거장군()이 되어 운중()에서 출병하고, 태중대부 공손오는 기장군()이 되어 대군()에서 출병하고, 위위() 이광()은 효기장군()이 되어 안문()에서 출병했는데, 각 군대는 기병 만 명으로 편성되었다.

위청은 용성()에 진격해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은 자가 수백 명에 달했다. 기장군 공손오는 기병 7천 명을 잃고, 위위 이광은 적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탈출해 돌아왔다. 이 두 사람의 죄는 모두 참수형에 해당했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공손하는 전공이 없었다.

원삭() 원년(서기전 128년) 봄, 위부인()이 사내아이를 출산해 황후가 되었다. 그해 가을, 위청은 거기장군이 되어 3만 기병을 이끌고 안문에서 출격하여 흉노를 공격해 수천 명을 참수하고 포로로 잡았다. 다음해, 흉노가 침입해 요서(西) 태수를 살해하고 어양() 백성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으며, 장군 한안국()의 군사를 격파시켰다. 이에 한나라에서는 장군 이식()에게 대군()에서 출병해 진격하게 하고, 거기장군 위청에게는 운중에서 출병해 서쪽으로 고궐()까지 진격하게 했다.

위청의 군대는 마침내 하남() 지역을 공략하고 농서(西)에 이르러서는 수천 명을 참수하고 생포했으며 가축 수십만 마리를 노획하고 백양왕()과 누번왕()을 쫓아냈다. 그리하여 한나라에서는 마침내 하남 지역에 삭방군()을 설치했으며, 위청에게 3천 8백호를 식읍지로 하사하고 장평후()로 봉했다.

위청의 부하인 교위() 소건()에게도 공이 있어 1천1백호를 식읍지로 주며 평릉후()로 봉했고, 그에게 삭방성()을 축조하게 했다. 또 위청의 교위 장차공()도 공이 있어 안두후()로 봉했다. 천자는 이렇게 말했다.

흉노는 천리()를 거역하고 인륜을 문란케 했다. 윗사람을 능멸하고 노인들을 학대하며 도적질을 일삼고 여러 만이족()을 속이고 모략을 꾸며 그들의 병력을 빌려서 자주 변경 지방을 침략했다. 그러므로 군사를 일으키고 장수를 파견해 그의 죄를 응징했던 것이다. 『시경()』에서도 “험윤()을 정벌해 태원()에 이르렀다네.”라고 했고, “전차 출행소리 성대하고, 저 삭방에 성을 쌓네.”라고 했다. 지금 거기장군 위청이 서하(西)를 건너 고궐()까지 진격하여 흉노 2천 3백명을 참수하거나 생포했고 전차와 군수품 수레 및 가축을 무수하기 노획했다.

이에 위청을 열후()에 봉하고 서쪽으로 하남 지역을 평정하게 했다. 위청은 유계(谿)의 옛 요새지를 순찰했으며, 재령()을 넘어 북하()에 다리를 놓고, 포니()를 토벌하고 부리()를 격파했다. 흉노의 정예 병사들을 참수하거나 사로잡은 정탐병이 3,071명이었고, 포로를 심문해 적군을 잡아들이고 1백여 만 마리의 말, 소, 양을 노획하여 아군을 손실 없이 이끌어 귀환했다. 이에 위청에게 3천호의 식읍을 다시 봉해주노라.

다음해, 흉노가 침입해 대군()의 태수 공우()를 살해하고, 안문을 침입해 1천여 명의 백성들을 잡아갔다. 그 다음해, 흉노는 다시 대군, 정양(), 상군()을 침입해 한나라 백성 수천 명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그 다음해인 원삭 5년(서기전 124년) 봄, 한나라 조정에서는 거기장군 위청에게 3만 기를 이끌고 고궐에서 출병하게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그리고 위위 소건을 유격장군(), 좌내사() 이저()를 강노장군(), 태복 공손하를 기장군(), 대()나라의 재상 이채()를 경거장군으로 삼아 모두 거기장군위청에게 배속시키고 일제히 삭방에서 출격하여 위청의 부대와 합류하게 했다. 또 대행() 이식()과 안두후 장차공을 장군으로 삼아 우북평()에서 출병해 흉노를 협공하도록 했다.


이때 흉노의 우현왕()은 위청 등의 군사를 기다리면서 한나라 병사들이 자신이 머무는 곳까지 올 수 없으리라 생각해 술에 취해 있었다. 한나라 군사들이 한밤중에 진격해 우현왕을 포위했다. 깜짝 놀란 우현왕은 야음을 타고 도망쳤는데, 애첩 한 사람과 수백명의 기병만 데리고 말을 달려 포위를 뚫고 북쪽으로 줄행랑 쳤다.

한나라의 경기교위() 곽성() 등이 수백 리를 추격했으나 우현왕을 따라잡지 못했다. 이 전투에서 한나라는 우현왕 밑의 비왕() 10여 명과 남녀 만 5천여 명, 가축 백만 마리를 노획하고 철수했다. 위청의 군대가 요새에 도착하자, 천자는 사자에게 대장군의 인수()를 가지고 가게 해 군중에서 거기장군 위청을 대장군()에 봉했다. 그리하여 모든 장수들은 자신의 병사들과 함께 대장군에게 귀속되었으며, 대장군 위청은 대장군의 관호()를 세우고 경사()로 돌아왔다.

이 때에 천자가 위청에게 말했다. “대장군 위청은 몸소 군사들을 이끌고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흉노왕 10여 명을 사로잡는 공을 세웠으니 위청에게 다시 6천호를 봉해주노라”고 하고는 위청의 아들들인 위항()을 의춘후()에, 위불의()를 음안후()에, 위등()을 발간후()에 각각 봉했다. 그러자 위청은 한사코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은 요행히 종군 도중에 장군으로 임명되었으며 폐하의 신령()하심에 힘입어 흉노와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다 모든 교위들이 힘껏 싸운 공로였습니다. 폐하께서는 황공하게 이미 신에게 식읍지를 늘려주셨고, 아직 강보에 싸여 아무런 공로도 세우지 못한 신의 자식들에게도 땅을 나누어 주고 각각 열후에 봉해주셨습니다. 이는 신이 대장으로 임명되어 병사들을 독려하여 힘껏 싸우게 한 본의가 아니옵니다. 위항을 비롯한 세 아들들이 어찌 감히 후()로 봉해지는 것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천자가 말했다. “짐이 여러 교위들의 공로를 잊은 것이 아니오. 이제 그들의 공로에 대한 상을 내리려고 하오.” 그러고는 어사()에게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렸다.

“호군도위() 공손오는 대장군을 따라 세 차례 흉노를 공격함에 항상 군대를 호위하고 교위들을 단결시키어 흉노의 비왕을 사로잡았다. 이에 식읍지 1천5백호를 하사하고 합기후()에 봉한다. 도위 한열()은 대장군을 따라 유혼()에서 출격하여 우현왕의 본진()까지 진격하고 대장군의 지휘 아래 용감히 싸워 흉노의 비왕들을 사로잡았다. 이에 식읍지 1천3백호를 하사하고 용액후()에 봉한다. 기장군 공손하는 대장군을 따라 흉노의 비왕을 사로잡았다. 이에 식읍지 1천3백호를 하사하고 남교후()에 봉한다. 경거장군 이채는 대장군을 따라 두 차례 전투를 벌여 흉노의 비왕을 사로잡았다. 이에 식읍지 1천6백호를 하사하고 낙안후()에 봉한다. 교위 이삭(), 교위 조불우(), 교위 공손융노()는 각각 세 차례나 대장군을 따라 흉노의 비왕을 사로잡았으니, 이삭에게 1천3백호를 하사하고 섭지후()에 봉한다. 조불우에게 1천3백호를 하사하고 수성후()에 봉한다. 공손융노에게 1천3백호를 하사하고 종평후()에 봉한다. 장군 이저(), 이식 및 교위 두여의()에게도 공로가 있으니 관내후()의 작위를 하사하고 식읍으로 각각 3백호를 하사한다.”

그해 가을, 흉노가 대군()에 침입해 도위 주영()을 살해했다.

그 이듬해 봄, 대장군 위청이 정양에서 출병했는데, 합기후 공손오는 중장군(), 태복 공손하는 좌장군(), 흡후() 조신()은 전장군(), 위위 소건은 우장군(), 낭중령() 이광은 후장군(), 좌내사 이저는 강노장군으로 삼아 모두 대장군의 휘하에게 소속되어 수천 명을 참수하고 돌아왔다. 한 달 남짓 후에 위청은 다시 정양에서 출병하여 흉노 만여 명을 참수하거나 사로잡았다.

우장군 소건과 전장군 조신은 3천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진격하다가 선우의 군대와 마주쳐 하루 남짓 교전을 벌였다. 그 결과 한나라 군사들은 거의 전멸하기에 이르렀다. 전장군 조신은 원래 흉노 사람으로 한나라에 투항해 흡후가 된 자였다. 그는 상황이 위급되자 흉노의 투항 권유를 받고 마침내 휘하의 8백 기병을 거느리고 선우에게 투항했다. 우장군 소건은 자신의 병사들을 다 잃고 단신으로 도망쳐 대장군에게로 돌아와 고했다.

대장군은 군정() 굉(), 장사() 안(), 의랑() 주패() 등에게 물었다. “소건은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그러자 주패가 말했다. “대장군이 출전한 이래 아직까지 부장을 참수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소건이 군사를 버렸으니 마땅히 참수해 장군의 권위를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그러나 굉과 안은 이렇게 말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병법에도 ‘적은 병력의 군대가 아무리 용감히 싸워도 결국에는 대군을 만나면 반드시 사로잡히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이번에 소건은 수천 명의 불과한 병사로 선우의 수만 군사를 대적해 하루를 넘게 힘껏 싸우다가 병사들이 다 전멸했습니다. 그러나 감히 투항할 마음을 품지 않고 돌아와 보고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를 참수하는 것은 이후의 전투에서 지면 돌아오지 말라는 뜻을 의미하는 것이니, 그를 참수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대장군 위청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황공하게도 폐하와 인척으로 대장군에 임명되었으니, 권위가 없음을 걱정하지는 않는다. 주패가 나에게 권위를 분명히 해두라고 권했으나 이는 신하된 자의 본분에 어긋나는 것이다. 비록 나의 직권으로 장수를 참수할 수는 있다고 해도, 폐하의 총애를 받는 신하로서 감히 국경 밖에서 자기 부하를 제멋대로 죽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사실을 천자께 상세히 보고하여 천자께서 직접 결정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하된 자가 감히 권력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역시 좋지 않겠는가?”

그러자 군관들은 모두 찬성했다. 이에 소건을 가두어 행재소()로 보내고 요새로 들어와 잠시 전투를 멈추고 쉬게 했다.


霍去病

是歲也,大將軍姊子霍去病年十八,幸,為天子侍中。善騎射,再從大將軍,受詔與壯士,為剽姚校尉,與輕勇騎八百直棄大軍數百里赴利,斬捕首虜過當。於是天子曰:「剽姚校尉去病斬首虜二千二十八級,及相國、當戶,斬單于大父行籍若侯產,生捕季父羅姑比,再冠軍,以千六百戶封去病為冠軍侯。上谷太守郝賢四從大將軍,捕斬首虜二千餘人,以千一百戶封賢為眾利侯。」是歲,失兩將軍軍,亡翕侯,軍功不多,故大將軍不益封。右將軍建至,天子不誅,赦其罪,贖為庶人。

大將軍既還,賜千金。是時王夫人方幸於上,甯乘說大將軍曰:「將軍所以功未甚多,身食萬戶,三子皆為侯者,徒以皇后故也。今王夫人幸而宗族未富貴,願將軍奉所賜千金為王夫人親壽。」大將軍乃以五百金為壽。天子聞之,問大將軍,大將軍以實言,上乃拜甯乘為東海都尉。

張騫從大將軍,以嘗使大夏,留匈奴中久,導軍,知善水草處,軍得以無饑渴,因前使絕國功,封騫博望侯。


冠軍侯去病既侯三歲,元狩二年春,以冠軍侯去病為驃騎將軍,將萬騎出隴西,有功。天子曰:「驃騎將軍率戎士踰烏盭,討遬濮,涉狐奴,歷五王國,輜重人眾懾慴者弗取,冀獲單于子。轉戰六日,過焉支山千有餘里,合短兵,殺折蘭王,斬盧胡王,誅全甲,執渾邪王子及相國、都尉,首虜八千餘級,收休屠祭天金人,益封去病二千戶。」


이해, 대장군 위청의 누이의 아들인 곽거병()은 나이가 18세로서, 황제의 총애를 얻어 시중()이 되었다. 곽거병은 말 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나 두 차례나 대장군을 따라 출정했다. 대장군은 황제의 조칙을 받들어 그에게 장사()를 주고 표요교위()로 삼았다. 곽거병은 날쌔고 용감한 기병 8백명과 함께 곧장 본대에서 수백 리나 떨어진 곳까지 진격하여 전공을 세웠는데, 참수하거나 사로잡은 적이 상당히 많았다. 이에 천자는 이렇게 말했다.

“표요교위 곽거병이 참수 혹은 사로잡은 적은 2,028명인데, 그중에는 흉노의 상국(), 당호()가 포함되어 있으며, 선우의 조부인 대부항()인 적약후() 산()을 참수하고 선우의 숙부인 나고비()를 생포했으니, 그의 전공은 두 차례에 걸쳐 전군에서 으뜸이다. 그래서 1천6백호의 식읍을 하사하고 관군후()에 봉한다. 상곡() 태수 학현()은 네 차례나 대장군을 따라 출정해 참수하거나 사로잡은 적이 2천여 명이니, 1천1백호의 식읍을 하사하고 중리후()에 봉한다.”

이해에 대장군은 두 장군의 군사를 잃었고 흡후가 흉노로 도망쳤으며 전공이 많지 않음에 식읍을 더 늘려 받지 못했다. 우장군 소건이 압송되어 왔으나 천자는 그를 주벌하지 않고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게 했다.

대장군이 개선하여 돌아오자 황제는 1천금을 하사했다. 당시는 왕부인()이 때마침 천자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영승()이 대장군에게 이렇게 권유했다.

“장군께서 공로가 아주 많지도 않은데 만 호의 식읍을 하사받고 세 아들들이 모두 후()에 봉해진 까닭은 모두 황후와의 관계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왕부인이 총애를 받고 있으나 그의 일족들은 아직 부귀를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천자께서 하사하신 1천금을 바치어 왕부인의 부모님을 위한 축수()에 드리십시오.”

이에 대장군은 5백금을 왕부인의 부모님 축수를 위해 바쳤다. 천자가 이 소식을 듣고 대장군에게 그 의도를 물었다. 대장군이 사실대로 말하자, 천자는 영승을 동해() 도위에 임명했다.

장건()이 대장군을 따라 출병했을 때, 일찍이 대하()에 사신으로 가다가 오랫동안 흉노에게 억류되었던 경험으로 군대를 인도했다. 그는 물과 초원이 풍부한 곳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들은 기갈을 면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앞서 먼 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공로를 인정받아 박망후()에 봉해졌다.

관군후 곽거병이 후()에 봉해진 지 3년이 되던 원수() 2년(서기전 121년) 봄, 그는 표기장군()이 되었다. 그가 기병 만 명을 이끌고 농서(西)에서 출격하여 전공을 세우자 천자는 이렇게 말했다.

“표기장군은 병사들을 이끌고 오려()를 넘어 속복() 부족을 토벌하고, 호노수()를 건너 다섯 나라를 통과하며 두려워 복종하는 나라의 백성들이나 군수물품은 약탈하지 않고 선우의 아들을 사로잡기만을 갈망했다. 그러면서 6일 동안 전투하여 언지산() 1천여 리를 넘어 적과 직접 맞부딪쳐 싸워서 절난왕()과 노호왕()을 참수했고 그들 군사를 주멸시켰다. 혼야왕()의 아들과 상국, 도위를 비롯하여 8천여 명의 적을 참수하거나 사로잡았다. 더불어 휴도왕()의 하늘에 제사지낼 때에 사용하는 금인()을 노획하여 왔으니, 곽거병에게 2천호의 식읍을 더 늘려주도록 한다.”



其夏,驃騎將軍與合騎侯敖俱出北地,異道;博望侯張騫、郎中令李廣俱出右北平,異道:皆擊匈奴。郎中令將四千騎先至,博望侯將萬騎在後至。匈奴左賢王將數萬騎圍郎中令,郎中令與戰二日,死者過半,所殺亦過當。博望侯至,匈奴兵引去。博望侯坐行留,當斬,贖為庶人。而驃騎將軍出北地,已遂深入,與合騎侯失道,不相得,驃騎將軍踰居延至祁連山,捕首虜甚多。天子曰:「驃騎將軍踰居延,遂過小月氏,攻祁連山,得酋涂王,以眾降者二千五百人,斬首虜三萬二百級,獲五王,五王母,單于閼氏、王子五十九人,相國、將軍、當戶、都尉六十三人,師大率減什三,益封去病五千戶。賜校尉從至小月氏爵左庶長。鷹擊司馬破奴再從驃騎將軍斬遬濮王,捕稽沮王,千騎將得王、王母各一人,王子以下四十一人,捕虜三千三百三十人,前行捕虜千四百人,以千五百戶封破奴為從驃侯。校尉句王高不識,從驃騎將軍捕呼于屠王王子以下十一人,捕虜千七百六十八人,以千一百戶封不識為宜冠侯。校尉僕多有功,封為煇渠侯。」合騎侯敖坐行留不與驃騎會,當斬,贖為庶人。諸宿將所將士馬兵亦不如驃騎,驃騎所將常選,然亦敢深入,常與壯騎先其大(將)軍,軍亦有天幸,未嘗困絕也。然而諸宿將常坐留落不遇。由此驃騎日以親貴,比大將軍。

其秋,單于怒渾邪王居西方數為漢所破,亡數萬人,以驃騎之兵也。單于怒,欲召誅渾邪王。渾邪王與休屠王等謀欲降漢,使人先要邊。是時大行李息將城河上,得渾邪王使,即馳傳以聞。天子聞之,於是恐其以詐降而襲邊,乃令驃騎將軍將兵往迎之。驃騎既渡河,與渾邪王眾相望。渾邪王裨將見漢軍而多欲不降者,頗遁去。驃騎乃馳入與渾邪王相見,斬其欲亡者八千人,遂獨遣渾邪王乘傳先詣行在所,盡將其眾渡河,降者數萬,號稱十萬。既至長安,天子所以賞賜者數十巨萬。封渾邪王萬戶,為漯陰侯。封其裨王呼毒尼為下摩侯,鷹庇為煇渠侯,禽為河綦侯,大當戶銅離為常樂侯。於是天子嘉驃騎之功曰:「驃騎將軍去病率師攻匈奴西域王渾邪,王及厥眾萌咸相奔,率以軍糧接食,并將控弦萬有餘人,誅獟駻,獲首虜八千餘級,降異國之王三十二人,戰士不離傷,十萬之眾咸懷集服,仍與之勞,爰及河塞,庶幾無患,幸既永綏矣。以千七百戶益封驃騎將軍。」減隴西、北地、上郡戍卒之半,以寬天下之繇。

居頃之,乃分徙降者邊五郡故塞外,而皆在河南,因其故俗,為屬國。其明年,匈奴入右北平、定襄,殺略漢千餘人。

其明年,天子與諸將議曰:「翕侯趙信為單于畫計,常以為漢兵不能度幕輕留,今大發士卒,其勢必得所欲。」是歲元狩四年也。

元狩四年春,上令大將軍青、驃騎將軍去病將各五萬騎,步兵轉者踵軍數十萬,而敢力戰深入之士皆屬驃騎。驃騎始為出定襄,當單于。捕虜言單于東,乃更令驃騎出代郡,令大將軍出定襄。郎中令為前將軍,太僕為左將軍,主爵趙食其為右將軍,平陽侯襄為後將軍,皆屬大將軍。兵即度幕,人馬凡五萬騎,與驃騎等咸擊匈奴單于。趙信為單于謀曰:「漢兵既度幕,人馬罷,匈奴可坐收虜耳。」乃悉遠北其輜重,皆以精兵待幕北。而適值大將軍軍出塞千餘里,見單于兵陳而待,於是大將軍令武剛車自環為營,而縱五千騎往當匈奴。匈奴亦縱可萬騎。會日且入,大風起,沙礫擊面,兩軍不相見,漢益縱左右翼繞單于。單于視漢兵多,而士馬尚彊,戰而匈奴不利,薄莫,單于遂乘六驘,壯騎可數百,直冒漢圍西北馳去。時已昏,漢匈奴相紛挐,殺傷大當。漢軍左校捕虜言單于未昏而去,漢軍因發輕騎夜追之,大將軍軍因隨其後。匈奴兵亦散走。遲明,行二百餘里,不得單于,頗捕斬首虜萬餘級,遂至窴顏山趙信城,得匈奴積粟食軍。軍留一日而還,悉燒其城餘粟以歸。

大將軍之與單于會也,而前將軍廣、右將軍食其軍別從東道,或失道,後擊單于。大將軍引還過幕南,乃得前將軍、右將軍。大將軍欲使使歸報,令長史簿責前將軍廣,廣自殺。右將軍至,下吏,贖為庶人。大將軍軍入塞,凡斬捕首虜萬九千級。

是時匈奴眾失單于十餘日,右谷蠡王聞之,自立為單于。單于後得其眾,右王乃去單于之號。

驃騎將軍亦將五萬騎,車重與大將軍軍等,而無裨將。悉以李敢等為大校,當裨將,出代、右北平千餘里,直左方兵,所斬捕功已多大將軍。軍既還,天子曰:「驃騎將軍去病率師,躬將所獲葷粥之士,約輕齎,絕大幕,涉獲章渠,以誅比車耆,轉擊左大將,斬獲旗鼓,歷涉離侯。濟弓閭,獲屯頭王、韓王等三人,將軍、相國、當戶、都尉八十三人,封狼居胥山,禪於姑衍,登臨翰海。執鹵獲丑七萬有四百四十三級,師率減什三,取食於敵,閒行殊遠而糧不絕,以五千八百戶益封驃騎將軍。」右北平太守路博德屬驃騎將軍,會與城,不失期,從至梼余山,斬首捕虜二千七百級,以千六百戶封博德為符離侯。北地都尉邢山從驃騎將軍獲王,以千二百戶封山為義陽侯。故歸義因淳王復陸支、樓專王伊即靬皆從驃騎將軍有功,以千三百戶封復陸支為壯侯,以千八百戶封伊即靬為眾利侯。從驃侯破奴、昌武侯安稽從驃騎有功,益封各三百戶。校尉敢得旗鼓,為關內侯,食邑二百戶。校尉自為爵大庶長。軍吏卒為官,賞賜甚多。而大將軍不得益封,軍吏卒皆無封侯者。

兩軍之出塞,塞閱官及私馬凡十四萬匹,而復入塞者不滿三萬匹。乃益置大司馬位,大將軍、驃騎將軍皆為大司馬。定令,令驃騎將軍秩祿與大將軍等。自是之後,大將軍青日退,而驃騎日益貴。舉大將軍故人門下多去事驃騎,輒得官爵,唯任安不肯。

驃騎將軍為人少言不泄,有氣敢任。天子嘗欲教之孫吳兵法,對曰:「顧方略何如耳,不至學古兵法。」天子為治第,令驃騎視之,對曰:「匈奴未滅,無以家為也。」由此上益重愛之。然少而侍中,貴,不省士。其從軍,天子為遣太官齎數十乘,既還,重車餘棄粱肉,而士有饑者。其在塞外,卒乏糧,或不能自振,而驃騎尚穿域蹋鞠。事多此類。大將軍為人仁善退讓,以和柔自媚於上,然天下未有稱也。

驃騎將軍自四年軍後三年,元狩六年而卒。天子悼之,發屬國玄甲軍,陳自長安至茂陵,為冢象祁連山。謚之,并武與廣地曰景桓侯。子嬗代侯。嬗少,字子侯,上愛之,幸其壯而將之。居六歲,元封元年,嬗卒,謚哀侯。無子,絕,國除。


그해 여름, 표기장군은 합기후 공손오와 함께 북지()에서 출병하고, 박망후 장건, 낭중령 이광은 우북평에서 출병하여 두 갈래로 군사를 나누어 일제히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낭중령 이광이 기병 4천 명을 이끌고 먼저 진격하고 박망후는 기병 만 명을 거느리고 뒤따랐다. 흉노의 좌현왕()이 기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낭중령 이광의 부대를 포위했다. 이광은 그들과 이틀 동안 치열한 접전을 벌여 전사자가 반을 넘었으나 사살한 적군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박망후의 부대가 당도하자 흉노의 군사들은 퇴각했다. 박망후는 진격을 늦게 했기에 그 죄가 참수에 해당했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그러나 북지에서 출격한 표기장군의 군사들은 이미 깊숙이 적지에 침투했는데, 합기후 공손오가 길을 잃었으므로 합류하지 못했다. 표기장군은 거연택()을 지나 기련산()까지 진격하면서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은 자가 대단히 많았다. 이에 천자가 이렇게 말했다.

“표기장군은 거연을 넘어 소월지국()을 통과하고, 기련산의 횽노를 공격해 추도왕()을 사로잡았다. 또 이때에 투항한 적이 2천5백명, 참수하거나 사로잡은 자가 3만 2백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다섯 왕과 그들의 어미, 선우의 연지()와 왕자 59명, 상국, 장군, 당호, 도위 63명을 사로잡았는데, 아군의 손실은 대략 10분의 3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곽거병에게 5천호의 식읍을 더 늘려준다.

그리고 곽거병을 따라 소월지국까지 진격했던 교위에게는 좌서장()의 작위를 하사한다. 응격사마() 조파노()는 두 차례에 걸쳐 표기장군을 따라 속복왕()을 참수하고 계저왕()을 생포했다. 그의 천기장()은 왕과 왕의 어미 각각 1명, 왕자 이하 41명을 잡아 포로가 3,330명이고 그의 선봉부대가 1,400명을 사로잡았으니, 1천5백호의 식읍을 조파노에게 하사해 종표후()에 봉한다. 흉노의 구왕()이었던 교위 고불식()은 표기장군을 따라 호우저왕()과 왕자 이하 11명을 잡고 1,768명을 포로로 잡았으니, 1천1백호의 식읍을 하사해 의관후()에 봉하며, 교위 복다()에게도 전공이 있으니 휘거후()에 봉한다.”

합기후 공손오는 행군을 지체시켜 표기장군과 약속한 시간을 지키지 못한 죄는 참수해 마땅하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한나라의 여타 노련한 장수들이 거느리는 병마()들도 표기장군만은 못했다. 표기장군은 항상 엄선한 정예 병사만을 선발하여 통솔했는데, 그 자신도 앞장서서 적진 깊숙이 진격했다. 그는 항상 용맹한 기병들과 함께 본대의 선봉에 섰고 그의 부대 역시 천운이 있어 한 번도 곤경에 빠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여러 노련한 장수들은 자주 진격속도가 늦어 전공을 세울 기회를 놓쳤다. 그래서 표기장군은 더욱 천자의 총애를 받아 귀한 신분이 되었고, 대장군과 나란히 그 위세를 떨쳤다.

그해 가을, 선우는 혼야왕이 서쪽에 머물면서 자주 한나라 군사에게 패해 수만 명을 잃은 것에 격분했다. 화가 난 선우는 혼야왕을 소환해 죽이려고 했다.

이에 혼야왕은 휴도왕 등과 함께 한나라에 투항하기로 결심하고 사신을 변경으로 보내 이 사실을 통보했다. 그 당시 대행() 이식이 황하 가에 성을 축조하고 있었는데, 혼야왕의 사신을 만나고는 그 즉시 파발마를 보내 조정에 보고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천자는 그들이 거짓으로 투항하여 변경을 습격하려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여 표기장군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직접 혼야왕의 일행을 맞아들이도록 했다.

표기장군은 황하를 건넌 후, 혼야왕의 무리들과 마주쳤다. 혼야왕의 부장()들은 한나라 군사를 보자 대부분 투항하지 않으려고 해 뿔뿔이 도망가는 자가 많았다. 그러자 표기장군을 말을 달려 흉노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 혼야왕을 만나보고는 도망치려는 자 8천 명을 참수했다. 그리고 혼야왕을 파발마에 태워 먼저 행재소로 보내고, 혼야왕을 따라왔던 자들을 다 인솔해 황하를 건넜다. 그 무리는 어림잡아 수만 명이었으나 대충 10만 명이라 했다.

이윽고 혼야왕의 무리가 장안()에 도착하자 천자가 수 십 만의 거금을 상금으로 하사했다. 혼야왕에게 만 호의 식읍을 하사하고 탑음후()로 봉했고, 그의 부왕()인 호독니()를 하마후(), 응비()를 휘거후(), 금리()를 하기후(), 대당호() 동리()를 상락후()에 봉했다. 그리고 천자는 표기장군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이렇게 말했다.

“표기장군 곽거병이 군사를 거느리고 흉노의 서부 지역 왕인 혼야왕을 공격하여 혼야왕과 그 휘하의 소왕을 비롯하여 그 백성들을 모두 투항시켰다. 표기장군은 그들을 모두 군량을 주고 인솔하고 더불어 궁수() 만여 명을 이끌고 투항을 거부하는 거칠고 사나운 흉노의 군사 8천여 명을 주살하였다.

또한 다른 오랑캐 나라 왕 33명 항복시켰는데, 아군을 손상시키지 않고서 10만의 흉노 무리를 모두 귀순시켰다. 표기장군의 빈번한 출병한 노고로 말미암아 황하 유역과 변경 지방은 화근이 사라져 오래도록 안정과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에 표기장군에게 1천7백호의 식읍을 더 늘려준다.”

또 황제는 농서, 북지, 상군의 수비병 수를 반으로 줄이고, 천하 백성들의 요역부담을 줄여 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투항한 흉노 무리를 변경 지방의 다섯 군(), 즉 예전의 새외() 지역에 나누어 이주시켰다. 그들은 모두 하남 일대에 살면서 자신들의 풍습을 유지한 채로 한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이듬해, 흉노가 우북평과 정양을 침입해 한나라 백성 1천여 명을 살해하거나 포로로 잡아갔다.

다음해 천자는 여러 장수들과 의논하고 이렇게 말했다. “흡후 조신이 선우를 위해서 계책을 세우고 있는데, 그는 한나라 병사들이 사막을 넘어 오래 머물기가 손쉽지 않을 것이라 항상 생각하고 있소. 그러니 지금 우리의 대군을 출병시키면 틀림없이 바라는 바를 얻을 수 있다.” 이해가 바로 원수 4년(서기전 119년)이었다.

무제 원수 4년 봄, 천자는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각기 기병 5만 명을 인솔하게 하고 수십 만 명의 보병과 군수품 운반병들이 그 뒤를 따르게 했다. 그중 적진에 깊숙이 진격해 힘껏 싸울 자는 모두 표기장군 휘하로 소속시켰다.

표기장군은 처음에 정양에서 출격하여 선우와 싸울 작정이었다. 그러나 포로의 말이 선우는 동쪽으로 갔다고 하여 천자는 다시 명령을 내려 표기장군을 대군()에서 출격하게 하고 대장군을 정양에서 출격하게 했다. 이 때에 낭중령 이광은 전장군, 태복 공손하는 좌장군, 주작도위() 조이기()는 우장군, 평양후 조양()은 후장군으로 삼아 모두 대장군에 소속시켰다.

마침내 표기장군 등과 5만 기병은 사막을 건너 일제히 흉노의 선우를 공격했다. 이 때에 조신은 선우와 다음과 같이 논의했다.

“한나라 군사들이 사막을 건너고 나면 사람과 말들이 모두 지칠 것이니, 우리는 앉아서 그들을 포로를 잡으면 됩니다.”

그리하여 선우는 자신들의 군수물자를 멀리 사막 북쪽으로 옮겨 놓고 자신들의 정예 병사들을 데리고 한나라 군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대장군이 거느린 군사들이 요새에서부터 출격하여 천여 리를 넘게 행군하니, 선우의 병사들이 포진한 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대장군은 무강거()를 원형으로 배치해 진영을 만들고, 기병 5천 명을 동원하여 흉노와 대적하게 했다. 흉노도 맞대응하여 기병 만 명을 내보냈다. 그때는 마침 해가 저물 무렵이었고 큰 바람이 불자 사막의 모래가 얼굴에 부딪쳐 양쪽 군사들은 상대방을 볼 수가 없었다. 대장군은 그 사이에 좌우 양 날개의 군사를 더욱 풀어 선우를 겹겹이 포위했다.

선우는 한나라 병사가 많은 데다 그들의 기병이 여전히 막강하여 힘써 싸워도 흉노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해 질 무렵, 선우는 마침내 6마리의 노새가 끄는 수레를 타고 수백 명 가량의 건장한 기병만을 거느린 채, 한나라 군대의 포위망을 뚫고 곧장 서북쪽으로 쏜살같이 달아났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한나라와 흉노 군사들이 서로 엉켜 혼전을 벌이니 쌍방 간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나라 좌익부대에서 잡은 포로를 심문하니, 선우는 날이 저물기도 전에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에 한나라 군에서는 날쌘 기병을 풀어 한밤중에 선우를 추격했고 대장군은 본대를 이끌고 그 뒤를 따라갔다. 흉노 병사들은 그 틈을 타고 흩어져 달아났다. 한나라 군대는 새벽까지 2백여 리를 추격했으나 결국 선우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 흉노 만여 명을 참수하거나 사로잡았으며, 마침내 전안산()의 조신성()에 이르러 흉노가 숨겨둔 양식을 획득해 군사들에게 먹일 수 있었다. 한나라 군대는 그곳에서 하루를 더 머문 후에 그 성에 남아 있던 식량을 모조리 불사르고 돌아왔다.

대장군이 선우와 한창 교전할 때에, 전장군 이광과 우장군 조이기의 군사는 따로 동쪽으로 진격했는데 길을 잃고 헤매는 바람에 선우를 공격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대장군이 사막 남쪽으로 철수할 때에야 전장군과 우장군을 만났다. 대장군은 사자를 보내 전투결과를 천자에게 보고하고, 장사()로 하여금 군법에 따라 전장군 이광을 심문하게 하자, 비분강개한 이광은 자살하고 말았다. 우장군은 장안으로 돌아온 후, 형리에게 넘겨져 형을 확정 받았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대장군이 요새에 귀환하여 전공을 살펴보니, 참수되거나 사로잡힌 흉노의 군사가 만 9천 명이나 되었다.

이때 흉노의 선우가 10여 일 동안 실종되자 흉노의 우녹려왕()은 스스로 선우의 자리에 올랐는데, 뒤에 원래의 선우가 되돌아오자 우녹려왕은 선우의 칭호를 버렸다.

표기장군이 거느린 기병 5만 명과 군수품 수송대의 규모는 대장군의 군대와 대등할 정도였다. 그러나 부장이 없어서 이감() 등을 대교()로 임명해 부장의 역할을 하게 했다. 표기장군의 군대는 대군()과 우북평에서 출병하여 1천여 리나 진격해 흉노의 좌익부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이 때에 흉노의 군사를 참수하거나 사로잡은 숫자는 대장군보다 많았다. 표기장군이 돌아오자 천자는 이렇게 말했다.

“표기장군 곽거병은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여 사로잡은 훈육()의 병사들을 친히 이끌고 소량의 군수품을 휴대한 채 드넓은 사막을 횡단하고 획장거()를 건너 흉노의 비거기()를 주살했다. 또한 다시 방향을 되돌아 좌대장()을 공격해 흉노 군사들을 무찔르고 그의 군기와 전고()를 탈취했다. 그리고 이후산()을 넘고 궁려()를 건너 둔두왕(), 한왕() 등 3명, 장군, 상국, 당호, 도위 등 83명을 사로잡았다. 또한 낭거서산()에서 제단을 쌓아 천신()에게 제사 지내고 고연산()에서 지신()에게 제사 지내고는 한해() 부근의 산에 올랐다. 사로잡은 흉노의 포로가 7만 443명이 되었으나, 한나라 병력의 손실은 대략 10분의 3정도가 줄었을 뿐이다. 가는 곳마다 적군에게서 식량을 탈취해 먼 곳까지 행군하면서도 군량이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이에 표기장군에게 5천8백호의 식읍을 더 늘려준다.

우북평() 태수 노박덕()은 표기장군에게 소속되어 여성()에서 합류했다. 그런 다음 시기를 놓치지 않고 종군하여 도도산()까지 진격하여 2,700명을 참수하거나 사로잡았으니 1천6백호의 식읍을 하사하고 부리후()에 봉한다. 북지()의 도위 형산()은 표기장군을 따라 흉노의 왕을 사로잡았으니 1천2백호의 식읍을 하사하고 의양후()에 봉한다. 원래 흉노 사람으로 한나라에 귀의한 인순왕() 복육지()와 누전왕() 이즉간()은 모두 표기장군을 따라 종군하여 전공을 세워 복육지에게 1천3백호의 식읍을 하사하고 장후()로, 이즉간에게 1천8백호의 식읍을 하사하고 중리후()에 봉한다. 종표후 조파노와 창무후() 안계()도 표기장군을 따라 종군하여 전공을 세웠으니 각기 3백호씩의 식읍을 더주고, 교위 이감은 적군의 군기와 전고를 탈취했으니 관내후로 봉하고 2백호의 식읍을 하사하며, 교위 서자위()에게는 대서장()의 작위를 하사한다.”

이밖에도 표기장군의 배속된 군관과 병졸들 중 관위()를 받고 포상 받은 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나, 대장군에게는 식을 더 늘려주지 않았고, 그의 휘하 군관과 병사들 중에서도 후작으로 봉해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대장군 위청, 표기장군 곽거병의 두 부대가 요새를 나설 때에 관마() 및 사마()를 점검해보니 14만 필이었는데, 다시 요새로 돌아온 말은 3만 필에 불과했다. 이에 대사마()의 관직을 만들어서 대장군과 표기장군을 모두 임명했다. 그리고 칙령을 내려 표기장군의 품계와 봉록을 대장군과 대등하게 했다.

이후로 대장군 위청의 권세는 날로 갈수록 쇠퇴하고 표기장군은 날이 갈수록 존귀해졌다. 대장군의 옛 친구들과 문하 사람들 중에 대장군을 떠나 표기장군을 섬겨 관작을 얻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오직 임안()만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표기장군의 사람됨은 과묵하고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개가 있어 과감하게 행동했다. 천자가 일찍이 그에게 손오병법()을 가르치려고 하자 표기장군은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어떤 전략을 쓸 것인가 생각하면 됩니다. 굳이 고대의 병법까지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또 천자가 그를 위해 저택을 짓고 그에게 가보라고 하자 이렇게 답변했다. “흉노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기에 저택을 꾸미고 살 필요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천자는 그를 더욱 총애하고 중히 여겼다.

그러나 표기장군은 젊어서 시중()을 지낸 데다 갈수록 신분이 존귀해지자 사병들을 아낄 줄 몰랐다. 그가 출정할 때에 천자가 그를 위해서 태관()을 시켜 수십 대 수레분의 음식물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돌아온 후 물품 수레에는 버려지고 남은 양식과 고기가 있는데도 사병들 중에는 굶주린 자가 있었다. 그가 변경의 요새 밖에 있을 때, 식량이 떨어져 어떤 병사는 허기로 일어나 움직일 수 없는 지경임에도 표기장군은 구역을 표시해두고 공차기에 몰두했다. 그에게는 이와 같은 일이 다반사였다. 그와 반면에 대장군의 사람됨은 인자하고 선량하고 겸허했으며 유화한 자세로 황제의 환심을 받았으나, 세상 사람들은 그를 칭송하지 않았다.

표기장군은 원수 4년에 출정하기 시작하여 3년 뒤인 원수 6년에 죽었다. 천자가 그와 죽음을 애도하여 속국의 현갑군()을 동원해 장안에서 무릉()까지 도열시켜 장례행렬을 보냈고, 그를 위해 기련산을 본뜬 분묘를 만들도록 했다.

그리고 천자는 표기장군에게 무용()을 뜻하는 ‘경()’자와 영토를 넓혔다는 뜻의 ‘환()’자를 합쳐 경환후()라고 하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아들 곽선()이 표기장군의 작위를 계승하도록 했다. 이때에 곽선은 나이가 아직 어렸고 자를 자후()라고 불렀는데, 천자가 좋아해 장성하면 그를 장군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런데 표기장국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만에 곽선도 죽자 애후()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어 후대가 끊겼으며 봉국도 취소되고 말았다.


自驃騎將軍死後,大將軍長子宜春侯伉坐法失侯。後五歲,伉弟二人,陰安侯不疑及發干侯登皆坐酎金失侯。失侯後二歲,冠軍侯國除。其後四年,大將軍青卒,謚為烈侯。子伉代為長平侯。

自大將軍圍單于之後,十四年而卒。竟不復擊匈奴者,以漢馬少,而方南誅兩越,東伐朝鮮,擊羌、西南夷,以故久不伐胡。

大將軍以其得尚平陽長公主故,長平侯伉代侯。六歲,坐法失侯。


표기장군 사후에 대장군의 장남 의춘후 위항()이 법에 저촉되어 작위를 잃었다. 그로부터 5년 뒤, 위항의 두 아우인 음안후() 위불의()와 발간후() 위등()가 모두 주금()의 법에 저촉되어 작위를 상실했다. 그로부터 2년 후, 표기장군의 봉국도 취소되었다. 다시 4년 후, 대장군 위청이 세상을 떠나자 열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장남 위항이 대장군을 대신해 장평후()가 되었다.

대장군 위청은 14년 동안 선우를 포위하고 토벌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 후에 흉노를 다시 공격하지 않은 것은 한나라의 군마()가 적은 데다, 때마침 남쪽으로는 동월()과 남월(), 동쪽으로는 조선(), 서쪽으로 강족() 및 서남 지역의 오랑캐를 정벌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로 오랫동안 흉노를 정벌하지 않았다.

대장군이 평양공주를 아내로 맞이했기에 장평후 위항이 대신 그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6년 뒤에 위항은 법에 저촉되어 작위를 상실하고 그의 봉국은 취소되었다.

左方兩大將軍及諸裨將名

左方兩大將軍及諸裨將名:

最大將軍青,凡七出擊匈奴,斬捕首虜五萬餘級。一與單于戰,收河南地,遂置朔方郡,再益封,凡萬一千八百戶。封三子為侯,侯千三百戶。并之,萬五千七百戶。其校尉裨將以從大將軍侯者九人。其裨將及校尉已為將者十四人。為裨將者曰李廣,自有傳。無傳者曰:


다음은 두 장군과 그 여러 부장들의 이름과 공적을 기술한 것이다.

대장군 위청은 도합 7번 출정하여 흉노와 싸워 5만여 명의 적병을 참수하거나 사로잡았다. 선우와 한 차례 교전을 통해 하남의 쌍 지역을 탈취하고 삭방군을 설치했다. 그 공로로 대장군은 두 차례 식읍을 더 받았는데, 모두 만 천 8백호였다. 그의 세 아들들도 후작에 봉해져 각 후마다 1,300호를 받았다. 이들 부자의 식읍을 합하면 모두 만 5천7백호였다. 대장군을 따라 종군한 교위와 부장들 중에서 후작에 봉해진 자가 모두 9명이었고, 그의 부장이나 교위들로서 장군이 된 자는 14명이었다. 부장으로 이광()이 있었는데 그에 대해서는 별도로 전기()가 있으며, 전기가 없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公孫賀

將軍公孫賀。賀,義渠人,其先胡種。賀父渾邪,景帝時為平曲侯,坐法失侯。賀,武帝為太子時舍人。武帝立八歲,以太僕為輕車將軍,軍馬邑。後四歲,以輕車將軍出雲中。後五歲,以騎將軍從大將軍有功,封為南窌侯。後一歲,以左將軍再從大將軍出定襄,無功。後四歲,以坐酎金失侯。後八歲,以浮沮將軍出五原二千餘里,無功。後八歲,以太僕為丞相,封葛繹侯。賀七為將軍,出擊匈奴無大功,而再侯,為丞相。坐子敬聲與陽石公主姦,為巫蠱,族滅,無後。


장군 공손하()는 의거() 사람으로 그의 선조는 호족()이었다. 공손하의 부친 혼야()는 경제() 때 평곡후()가 봉해졌으나 법에 저촉되어 작위를 상실했다. 공손하는 무제가 태자이던 시절에 사인()이었다. 무제가 즉위한 지 8년째 되던 해(서기전 133년), 태복()의 신분으로 경거장군이 되어 마읍()에 주둔했다. 그리고 4년 후, 경거장군으로서 운중()에서 출격하여 흉노를 공격했다. 다시 5년 후에 기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종군하여 전공을 세워 남교후()로 봉해졌다. 1년 후, 좌장군으로 두 차례 대장군을 따라 정양에서 출병했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다. 4년 후, 주금()을 위반해 작위를 상실했다. 8년 후, 부저장군()이 되어 오원()에서 2천여 리나 진격했지만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8년 후, 태복에서 승상으로 승진해 갈역후()에 봉해졌다. 공손하는 일곱 차례 장군이 되어 출격하여 흉노와 전투를 벌였지만 큰 공이 없었다. 그러나 두 차례 열후에 봉해졌고 또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아들 공손경성()이 양석공주()와 사통하고 무고지화에 연루되어 멸족 당하여 후대가 끊겼다.


李息

將軍李息,郁郅人。事景帝。至武帝立八歲,為材官將軍,軍馬邑;後六歲,為將軍,出代;後三歲,為將軍,從大將軍出朔方:皆無功。凡三為將軍,其後常為大行。


장군 이식()은 욱질() 사람이다. 경제를 섬겼다가 무제가 즉위한 지 8년째 되던 해(서기전 133년)에, 그는 재관장군()이 되어 마읍에 주둔했다. 6년 후, 장군이 되어 대군()에서 출전했다. 3년 후에는 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삭방에서 출격했으나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그는 모두 세 차례 장군이 되었고, 그 후에는 대행()의 관직을 맡았다.


公孫敖

將軍公孫敖,義渠人。以郎事武帝。武帝立十二歲,為(驃)騎將軍,出代,亡卒七千人,當斬,贖為庶人。後五歲,以校尉從大將軍有功,封為合騎侯。後一歲,以中將軍從大將軍,再出定襄,無功。後二歲,以將軍出北地,後驃騎期,當斬,贖為庶人。後二歲,以校尉從大將軍,無功。後十四歲,以因杅將軍筑受降城。七歲,復以因杅將軍再出擊匈奴,至余吾,亡士卒多,下吏,當斬,詐死,亡居民閒五六歲。後發覺,復系。坐妻為巫蠱,族。凡四為將軍,出擊匈奴,一侯。


장군 공손오()는 의거 사람이다. 낭관()의 신분으로 무제를 섬겼다. 무제가 즉위한 지 12년째 되던 해(129년)에 기장군이 되어 대군()에서 출전했는데, 부하 7천 명을 잃었다. 그 죄가 참수형에 해당했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5년 후, 다시 교위의 신분으로 대장군을 따라 출정하여 공을 세워 합기후()로 봉해졌다. 1년 후, 중장군으로 대장군을 따라 두 차례 정양에서 출전했지만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2년 후, 장군으로서 북지()에서 출전했으나 표기장군과 약정한 기일을 어겨 그 죄가 참수형에 해당했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2년 후, 교위가 되어 대장군을 따라 출정했으나 전공을 세우지 못했다. 14년 후, 인우장군()으로서 수항성()을 축조했다. 7년 후, 다시 인우장군으로서 두 차례 출전하여 흉노를 공격하여 여오수()까지 진격했다가 많은 사졸들을 잃었다. 그래서 형리에게 넘겨져 참수형의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옥중에서 거짓으로 죽은 척하다 도망쳐서 민간에서 5~6년 동안 숨어 지냈다. 그 뒤 발각되어 다시 구금되었다. 그의 처가 무고지화에 연루되어 일족이 멸족 당했다. 공손오는 모두 네 차례 장군이 되어 흉노와 전투를 벌여 한 차례 공을 세워 열후에 봉해졌다.

李沮

將軍李沮,雲中人。事景帝。武帝立十七歲,以左內史為彊弩將軍。後一歲,復為彊弩將軍。


장군 이저()는 운중 사람으로 경제를 섬겼다. 무제가 즉위한 지 17년째 되던 해(서기전 124년)에 좌내사()의 신분으로서 강노장군()이 되었다. 1년 후, 다시 강노장군이 되었다.


李蔡

將軍李蔡,成紀人也。事孝文帝、景帝、武帝。以輕車將軍從大將軍有功,封為樂安侯。已為丞相,坐法死。


장군 이채()는 성기() 사람이다. 그는 문제(), 경제, 무제를 섬겼다. 경거장군으로 대장군을 따라 출전하여 공로를 세워 낙안후에 봉해졌다. 그 후 승상까지 올랐으나 법에 저촉되어 처형당했다.


張次公

將軍張次公,河東人。以校尉從衛將軍青有功,封為岸頭侯。其後太后崩,為將軍,軍北軍。後一歲,為將軍,從大將軍,再為將軍,坐法失侯。次公父隆,輕車武射也。以善射,景帝幸近之也。


장군 장차공()은 하동() 사람이다. 교위의 신분으로 대장군 위청을 따라 출진해 전공을 세워 안두후()로 봉해졌다. 그 후 왕태후()가 서거하자 장군이 되어 북군()에 주둔했다. 1년 후, 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출정했다. 그는 두 차례 장군이 되었으나 법에 저촉되어 작위를 상실했다. 장차공의 부친 장륭()은 경거() 부대의 사수()였는데 활을 잘 쏘아 경제가 그를 총애하고 측근으로 두었다.


蘇建

將軍蘇建,杜陵人。以校尉從衛將軍青,有功,為平陵侯,以將軍筑朔方。後四歲,為游擊將軍,從大將軍出朔方。後一歲,以右將軍再從大將軍出定襄,亡翕侯,失軍,當斬,贖為庶人。其後為代郡太守,卒,冢在大猶鄉。


장군 소건()은 두릉() 사람이다. 교위의 신분으로 대장군 위청을 따라 출전해 전공을 세우자 평릉후()에 봉해졌다. 장군으로서 삭방에 성을 축조했다. 4년 후, 유격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삭방에서 출전했다. 1년 후, 우장군이 되어 두 차례 대장군을 따라 정양에서 출전했다 그러나 흉노의 대군을 만나 흡후()조신이 도망치고 휘하의 군사를 잃어 그 죄가 참수형에 해당했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그 후 대군() 태수가 되었다가 죽었다. 그의 무덤은 대유향()에 있다.


趙信

將軍趙信,以匈奴相國降,為翕侯。武帝立十七歲,為前將軍,與單于戰,敗,降匈奴。


장군 조신()은 흉노의 상국 출신으로 한나라로 투항해 흡후로 봉해졌다. 무제가 즉위한 지 17년째 되던 해(서기전 124년)에 전장군이 되어 선우와 싸우다가 패해 다시 흉노에 투항했다.


張騫

將軍張騫,以使通大夏,還,為校尉。從大將軍有功,封為博望侯。後三歲,為將軍,出右北平,失期,當斬,贖為庶人。其後使通烏孫,為大行而卒,冢在漢中。


장군 장건()은 한나라의 사신으로 대하()를 방문하여 국교를 맺었다. 귀국하여 교위가 되었다. 대장군을 따라 출전해 전공을 세워 박망후()로 봉해졌다. 3년 후, 장군이 되어 우북평에서 출전했으나 대장군과 약속한 기일을 어겨 그 죄는 참수형에 해당했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그 후 사신이 되어 오손()과 국교를 열었으며, 대행()의 관직을 맡고 있다가 죽었다. 그의 무덤은 한중()에 있다.


趙食其

將軍趙食其,祋祤人也。武帝立二十二歲,以主爵為右將軍,從大將軍出定襄,迷失道,當斬,贖為庶人。


장군 조이기()는 대우() 사람이다. 무제가 즉위한 지 22년(서기전 119년) 뒤에 주작도위()의 신분으로 우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정양에서 출전했다. 그러나 도중에 방향을 잃어버려 그 죄는 참수형에 해당했으나 속죄금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曹襄

將軍曹襄,以平陽侯為後將軍,從大將軍出定襄。襄,曹參孫也。


장군 조양()은 평양후의 신분으로 후장군이 되어 대장군을 따라 정양에서 출병했다. 조양은 상국 조참()의 손자이다.

韓說

將軍韓說,弓高侯庶孫也。以校尉從大將軍有功,為龍頟侯,坐酎金失侯。元鼎六年,以待詔為橫海將軍,擊東越有功,為按道侯。以太初三年為游擊將軍,屯於五原外列城。為光祿勳,掘蠱太子宮,衛太子殺之。


장군 한열()은 궁고후() 한퇴당()의 서손이다. 교위의 신분으로 대장군을 따라 출전해 공을 세웠으므로 용액후()가 되었다. 그 후 주금법에 걸려 작위를 잃어버렸다. 원정() 6년(서기전 111년), 대조()의 신분으로 횡해장군()이 되었으며 동월()을 공격해 전공을 세웠으므로 안도후()에 봉해졌다. 태초() 3년(서기전 102년)에 유격장군이 되어 오원()의 변경 지역의 여러 성곽지대에 주둔했다. 그 후 광록훈(祿)이 되었으며, 태자궁에서 나무 인형을 파냈다가 위태자()에게 살해 당했다.


郭昌

將軍郭昌,雲中人也。以校尉從大將軍。元封四年,以太中大夫為拔胡將軍,屯朔方。還擊昆明,毋功,奪印。


장군 곽창()은 운중 사람이다. 교위의 신분으로 대장군을 따라 출정했다. 원봉() 4년(서기전 107년), 태중대부의 신분으로 발호장군()이 되어 삭방에 주둔했다. 그 후 돌아와 곤명()을 공격했으나 공로가 없어 장군의 직위를 잃었다.


荀彘

將軍荀彘,太原廣武人。以御見,侍中,為校尉,數從大將軍。以元封三年為左將軍擊朝鮮,毋功。以捕樓船將軍坐法死。

最驃騎將軍去病,凡六出擊匈奴,其四出以將軍,斬捕首虜十一萬餘級。及渾邪王以眾降數萬,遂開河西酒泉之地,西方益少胡寇。四益封,凡萬五千一百戶。其校吏有功為侯者凡六人,而後為將軍二人。


장군 순체()는 태원() 광무() 사람이다. 그는 마차를 잘 모는 것으로써 황제의 인정을 받아 시중()이 되었다. 뒤에 교위의 신분으로 여러 차례 대장군을 따라 출정했다. 원봉 3년(서기전 108년), 좌장군이 되어 조선()을 공격했으나 공을 세우지 못하고 누선장군() 양복()을 무단으로 체포한 죄로 법에 저촉되어 사형을 당했다.


路博德

將軍路博德,平州人。以右北平太守從驃騎將軍有功,為符離侯。驃騎死後,博德以衛尉為伏波將軍,伐破南越,益封。其後坐法失侯。為彊弩都尉,屯居延,卒。


장군 노박덕()은 평주() 사람이다. 그는 우북평 태수의 신분으로 표기장군을 따라 출전하여 공을 세워 부리후()로 봉해졌다. 표기장군이 죽은 후, 노박덕은 위위()로서 복파장군()이 되어 남월()을 격파하고 식읍이 더 늘었다. 그 후 법에 저촉되어 작위를 상실했다. 강노도위()로 복직되어 거연에 주둔하고 중에 죽었다.


趙破奴

將軍趙破奴,故九原人。嘗亡入匈奴,已而歸漢,為驃騎將軍司馬。出北地時有功,封為從驃侯。坐酎金失侯。後一歲,為匈河將軍,攻胡至匈河水,無功。後二歲,擊虜樓蘭王,復封為浞野侯。後六歲,為浚稽將軍,將二萬騎擊匈奴左賢王,左賢王與戰,兵八萬騎圍破奴,破奴生為虜所得,遂沒其軍。居匈奴中十歲,復與其太子安國亡入漢。後坐巫蠱,族。

自衛氏興,大將軍青首封,其後枝屬為五侯。凡二十四歲而五侯盡奪,衛氏無為侯者。


장군 조파노()는 원래 구원() 사람이다. 예전에 흉노로 도망쳤다가 다시 한나라에 귀순하여 표기장군의 사마()가 되었다. 북지에서 출전할 때에 공로를 세워 종표후()로 봉해졌다, 뒤에 주금법에 저촉되어 작위를 상실했다. 1년 후, 흉하장군()이 되어 흉노로 출정하여 흉하수()까지 진격했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다. 2년 후, 누란왕을 공격해 사로잡자 다시 착야후()로 봉해졌다. 6년 후, 준계장군()이 되어 2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흉노의 좌현왕()을 공격했다. 좌현왕이 8만 명의 군사로 조파노의 군대를 포위하여 마침내 그의 군사는 전멸시키고, 사로잡혔다. 그는 흉노에게 10년 동안 억류당하다가 다시 흉노의 태자 안국()이 망망할 때에 함께 도망쳐 한나라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무고()의 죄에 연루되어 일족이 몰살당했다.

위씨 일족이 흥기하면서 대장군 위청이 처음으로 열후로 봉해졌고, 그의 후손과 친족 중에서 다섯 명이 열후로 봉해졌다. 그러나 24년 동안에 다섯 명의 열후들은 모두 작위를 박탈당하고 위씨 일족 중에는 더 이상 열후에 봉해진 사람이 없게 되었다.

評論

太史公曰:蘇建語余曰:「吾嘗責大將軍至尊重,而天下之賢大夫毋稱焉,願將軍觀古名將所招選擇賢者,勉之哉。大將軍謝曰:『自魏其、武安之厚賓客,天子常切齒。彼親附士大夫,招賢絀不肖者,人主之柄也。人臣奉法遵職而已,何與招士!』」驃騎亦放此意,其為將如此。

【索隱述贊】君子豹變,貴賤何常。青本奴虜,忽升戎行。姊配皇極,身尚平陽。寵榮斯僭,取亂彝章。嫖姚繼踵,再靜邊方。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소건()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찍이 대장군()에게 지극히 존귀한 지위에 있지만 천하의 현능한 대부들 중에서는 대장군을 칭송하는 자가 없습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옛날의 명장들처럼 현능한 사람을 골라 초빙한 일을 본받아 그렇게 하기를 힘쓰시오’라고 간언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대장군께서는 이를 사절하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전에 위기후() 두영과 무안후() 전분이 빈객들을 모아 후대하니, 천자가 항상 그것을 대해 절치부심하며 원한을 품으셨소. 사대부들을 가까이하고 현능한 이들을 초빙하며 불초한 자들을 물리치는 것은 군주의 권한이오. 남의 신하란 국법을 받들고 직책에 충실하면 그만이지 무엇 때문에 현능한 선비들을 초빙하려 하는가!’라고 했습니다. 표기장군() 곽거병()도 이러한 대장군의 뜻을 본받았다. 장군으로서의 그들의 마음가짐은 이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