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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史記列傳

史記 卷一二四. 游俠列傳

by 柳川 2019. 6. 3.

                                     游俠列傳




魯朱家者,與高祖同時。魯人皆以儒教,而朱家用俠聞。所藏活豪士以百數,其餘庸人不可勝言。然終不伐其能,歆其德,諸所嘗施,唯恐見之。振人不贍,先從貧賤始。家無餘財,衣不完采,食不重味,乘不過軥牛。專趨人之急,甚己之私。既陰脫季布將軍之阸,及布尊貴,終身不見也。自關以東,莫不延頸願交焉。



노()나라의 주가()는 한 고조와 같은 시대 사람이다. 노나라 사람들이 모두 유가를 배울 때 주가는 협객으로 이름을 냈으니 숨겨준 호걸들이 100여 명이었고 그 나머지 보통 사람들은 말로 할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의 능력을 떠벌리지 않았고 자신의 덕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베푼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꺼려 했다. 넉넉지 못한 사람을 구제할 때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부터 시작했다. 집에 남아도는 재물은 없었고, 옷은 무늬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며, 음식은 두 가지 이상을 먹지 않았고, 타는 것도 소달구지가 전부였다.

오로지 남이 급할 때 달려가는데 자기 일보다 더 심각하게 여겼다. 일찍이 곤경에 빠진 계포() 장군을 몰래 구해주었는데, 계포가 나중에 귀하신 몸이 되었지만 죽을 때까지 계포를 만나지 않았다. 함곡관 동쪽 사람들로서 그와 사귀려고 목을 길게 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楚田仲以俠聞,喜劍,父事朱家,自以為行弗及。田仲已死,而雒陽有劇孟。周人以商賈為資,而劇孟以任俠顯諸侯。吳楚反時,條侯為太尉,乘傳車將至河南,得劇孟,喜曰:「吳楚舉大事而不求孟,吾知其無能為已矣。」天下騷動,宰相得之若得一敵國云。劇孟行大類朱家,而好博,多少年之戲。然劇孟母死,自遠方送喪蓋千乘。及劇孟死,家無餘十金之財。而符離人王孟亦以俠稱江淮之間。


是時濟南瞷氏、陳周庸亦以豪聞,景帝聞之,使使盡誅此屬。其後代諸白、梁韓無辟、陽翟薛兄、陜韓孺紛紛復出焉。


초()나라에서는 전중()이 유협으로 이름이 났는데 검을 좋아하고 주가를 아버지처럼 모시면서 스스로 (주가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전중이 죽은 뒤로 낙양()에 극맹()이 있었다. 주()나라 사람들은 장사하는 자질이 있었지만 극맹은 제후들 사이에서 유협을 자처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오(), 초()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후() 주아부()는 태위()로서 마차를 타고가다가 하남()에 이르러 극맹을 만나 크게 기뻐하며 “오, 초가 대사를 일으키면서 극맹을 찾지 않다니 그들의 무능함을 내가 알겠다”라고 했다. 천하가 소란할 때 재상이 극맹을 얻는 것은 적국 하나를 얻는 것과 같았다. 극맹의 행동은 주가와 대체로 비슷했다. 도박을 좋아 했는데 대부분 젊은이들 놀이였다. 극맹의 어머니가 죽자 먼 지방에서 문상하로 온 수레가 천 대에 이르렀다. 극맹이 죽은 뒤 집에는 10금도 안 되는 재산 밖에 없었다.

부리() 사람 왕맹() 역시 유협으로 장강과 회수 사이에 이름을 알렸다.

이 무렵 제남()의 간씨()와 진()의 주용() 또한 호걸로 이름이 났는데, 경제()가 이를 듣고는 사람을 보내 이 무리들을 죽였다. 그 뒤 대군()의 백씨() 일족, 양()의 한무벽(), 양책()의 설황(), 섬()의 한유() 등이 잇따라 나타났다.



郭解,軹人也,字翁伯,善相人者許負外孫也。解父以任俠,孝文時誅死。解為人短小精悍,不飲酒。少時陰賊,慨不快意,身所殺甚眾。以軀借交報仇,藏命作姦剽攻,不休及鑄錢掘冢,固不可勝數。適有天幸,窘急常得脫,若遇赦。及解年長,更折節為儉,以德報怨,厚施而薄望。然其自喜為俠益甚。既已振人之命,不矜其功,其陰賊著於心,卒發於睚眦如故云。而少年慕其行,亦輒為報仇,不使知也。解姊子負解之勢,與人飲,使之嚼。非其任,彊必灌之。人怒,拔刀刺殺解姊子,亡去。解姊怒曰:「以翁伯之義,人殺吾子,賊不得。」棄其尸於道,弗葬,欲以辱解。解使人微知賊處。賊窘自歸,具以實告解。解曰:「公殺之固當,吾兒不直。」遂去其賊,罪其姊子,乃收而葬之。諸公聞之,皆多解之義,益附焉。

解出入,人皆避之。有一人獨箕倨視之,解遣人問其名姓。客欲殺之。解曰:「居邑屋至不見敬,是吾德不脩也,彼何罪!」乃陰屬尉史曰:「是人,吾所急也,至踐更時脫之。」每至踐更,數過,吏弗求。怪之,問其故,乃解使脫之。箕踞者乃肉袒謝罪。少年聞之,愈益慕解之行。

雒陽人有相仇者,邑中賢豪居間者以十數,終不聽。客乃見郭解。解夜見仇家,仇家曲聽解。解乃謂仇家曰:「吾聞雒陽諸公在此間,多不聽者。今子幸而聽解,解奈何乃從他縣奪人邑中賢大夫權乎!」乃夜去,不使人知,曰:「且無用,待我去,令雒陽豪居其間,乃聽之。」

解執恭敬,不敢乘車入其縣廷。之旁郡國,為人請求事,事可出,出之;不可者,各厭其意,然後乃敢嘗酒食。諸公以故嚴重之,爭為用。邑中少年及旁近縣賢豪,夜半過門常十餘車,請得解客舍養之。

及徙豪富茂陵也,解家貧,不中訾,吏恐,不敢不徙。衛將軍為言:「郭解家貧不中徙。」上曰:「布衣權至使將軍為言,此其家不貧。」解家遂徙。諸公送者出千餘萬。軹人楊季主子為縣掾,舉徙解。解兄子斷楊掾頭。由此楊氏與郭氏為仇。

解入關,關中賢豪知與不知,聞其聲,爭交驩解。解為人短小,不飲酒,出未嘗有騎。已又殺楊季主。楊季主家上書,人又殺之闕下。上聞,乃下吏捕解。解亡,置其母家室夏陽,身至臨晉。臨晉籍少公素不知解,解冒,因求出關。籍少公已出解,解轉入太原,所過輒告主人家。吏逐之,跡至籍少公。少公自殺,口絕。久之,乃得解。窮治所犯,為解所殺,皆在赦前。軹有儒生侍使者坐,客譽郭解,生曰:「郭解專以姦犯公法,何謂賢!」解客聞,殺此生,斷其舌。吏以此責解,解實不知殺者。殺者亦竟絕,莫知為誰。吏奏解無罪。御史大夫公孫弘議曰:「解布衣為任俠行權,以睚眥殺人,解雖弗知,此罪甚於解殺之。當大逆無道。」遂族郭解翁伯。


곽해()는 지() 사람으로 자를 옹백()이라 했다. 사람의 관상을 잘 보는 허부()의 외손자였다. 곽해의 아버지는 유협으로서 효문제 때 죽임을 당했다. 곽해는 몸집은 작았지만 매우 사나왔고 술은 마시지 않았다. 젊었을 때는 몰래 나쁜 짓을 많이 했고 기분이 나쁘면 직접 사람을 죽이는 일도 많았다. 목숨을 걸고 친구를 위해서 복수했고, 도망친 사람들을 감추어 주었으며 간악한 짓과 강도 짓도서슴지 않았다. 가짜 돈을 주조하고 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다행히 천운이 좋아 급한 궁지에서도 늘 빠져 나왔고 때로는 사면을 받기도 했다. 장년이 되면서 절제하면서 검소하게 사는 쪽으로 바꾸었다. 덕으로 원한을 갚고 후하게 베풀면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스스로 유협적인 행동을 즐겨 한 것은 더 심해졌다. 남의 목숨을 구해주고도 그 공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잔혹함은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어 갑자기 폭발하면 눈을 부릅뜨고 째려보았다. 젊은이들은 그의 행동을 사모하여 그를 위해 복수하고도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곽해의 누나의 아들이 곽해의 위세를 등에 업고 누군가와 술을 마시다가 그에게 잔을 비우게 했다. 그가 더는 버티지 못했지만 억지로 술을 따라 주었다. 그 사람이 화가 나서 칼을 뽑아 곽해의 조카를 찔러 죽이고 도망쳤다. 곽해의 누이가 화를 내며 “누군가 내 아들을 죽였는데 옹백과 같은 의협심을 가지고도 범인을 잡지 못하는구나”라며 아들의 시체를 길에 버리고는 장례를 치르지 않았는데, 곽해를 모욕주려는 것이었다.

곽해는 사람을 시켜 범인의 거처를 알아내게 했다. 범인은 궁지에 몰리자 스스로 돌아와 사실대로 모든 것을 곽해에게 알렸다. 곽해는 “그대가 조카를 죽인 것이 당연했군. 내 조카가 옳지 못했어”라며 그 범인을 보냈다. 조카에게 죄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자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 사람들이 이를 듣고는 많은 사람들이 곽해의 의협심을 칭찬하면서 더욱 그를 따르게 되었다.

곽해가 오가면 사람들은 모두 그를 피했다. 유독 한 사람이 양다리를 벌리고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곽해는 사람을 보내 그의 이름을 물어보게 했다. 객()이 그를 죽이려 하자 곽해는 “마을에 살면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은 나의 덕이 모자라서 그렇지 그가 무슨 죄가 있겠소”라 하고는 바로 몰래 위사()에게 “이 사람은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인데 수자리를 교체할 때 빼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매번 수자리가 바뀔 때 몇 번 차례가 왔지만 관리는 그를 찾지 않았다. (그 사람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었더니 곽해가 그를 빼주었다는 것이었다.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었던 자는 웃통을 벗고 사죄했다. 젊은이들이 이를 듣고는 더 많이 곽해의 행동을 사모했다.

낙양 사람 중에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두 집안이 있었다. 성 안의 현자와 호걸들이 이들을 화해시키려고 열 명 이상 중재에 나섰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곽해의 빈객이 곽해를 만나 그들의 화해 중재를 권유했다. 이에 곽해는 밤중에 원수 사이인 두 집을 방문했다. 그들은 곽해의 완곡한 말을 듣고는 화해를 받아들였다.

이때 곽해는 “제가 듣기로 낙양의 여러 인사들이 나서서 당신들을 화해시키고자 했으나 듣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이제 나의 말을 듣고 화해하시겠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저 곽해는 다른 고을에서 온 자로서 어찌 이 고을 현사들의 권위를 뺏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고, 그날 밤 몰래 그곳을 떠났다. 또 그들에게 “당분간 제가 말한 대로 하지 마시고 제가 떠난 다음 낙양 인사들에게 중재에 나서게 하여 그들의 말을 따랐다고 하십시오”라고 했다.

곽해는 겸손하여 함부로 수레를 타고 현의 관청에 가는 일이 없었다. 가까운 군국()에 가서 남을 위해 일을 꾀할 때도 할 수 있는 일은 틀림없이 잘 해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은 청탁한 사람이 만족할 만큼 잘 설득하고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마을의 젊은이와 이웃 현의 현자, 호걸들이 밤이면 그를 찾아왔는데 수레가 열 대가 넘었다. 곽해의 문객을 자기들 집으로 모시기 위해서였다.

[무제()가] 호족들과 부호들을 무릉()으로 이주시킬 무렵이었다. 곽해의 집은 가난해서 등급에 해당하지 않았지만 관리는 겁을 먹고 감히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위장군 위청() 장군이 “곽해의 집은 가난하여 이주시키기에는 적절치 않습니다”라고 했다. 주상은 “평민인데 장군이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그 집안이 가난하지 않은 것이오”라 하니 곽해의 집은 마침내 이주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곽해를) 환송하기 위해서 내 놓은 돈이 천만 전이 넘었다. 지() 사람인 양계주()의 아들이 현의 연()이란 하급 관리로서 곽해의 이주를 거론한 자였다. 곽해의 형의 아들이 이 양가의 목을 잘랐다. 이로써 양씨와 곽씨는 원수가 되었다.


곽해가 관중()에 오자 현자, 호걸들은 그를 알든 모르든 그의 명성을 듣고 다투어 곽해와 사귀려 했다. 곽해는 체구가 왜소했고 술을 마시지 않았으며, 외출할 때에 말을 탄 적이 없었다.

얼마 뒤 양계주마저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양계주 집안에서 글을 올리자 누군가 궁궐에서 (글을 올린) 그 사람을 죽였다. 주상이 이를 듣고는 관리를 시켜 곽해를 체포하게 했다. 곽해는 도망을 쳐서 어머니와 집안 식구들을 하양()에 두고 자신은 임진()으로 갔다.

임진의 적소공()은 본래 곽해를 알지 못했지만 곽해가 가명을 대며 임진관을 나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적소공은 곽해를 내보내주었고, 곽해는 방향을 돌려 태원()으로 들어갔는데 지나는 곳의 집 주인을 알렸다. 관리들이 그를 추적하여 적소공에게 이르렀다. 적소공은 자살로 입을 막았다.

오래 지나 곽해는 체포되었다. 저지른 일에 대해 끝까지 추궁했으나 곽해의 살인이 모두 사면 이전이었다. 지 땅의 한 유생이 관리와 함께 앉아 있다가 (곽해의) 객이 곽해를 칭찬하자 유생은 “곽해는 그저 국법을 어긴 자이거늘 어찌 현명하다는 것이오”라 했다. 곽해의 객이 이 말을 듣고는 이 유생을 죽이고 혀를 잘랐다. 관리는 이 것으로 곽해를 문책했으나 곽해는 정말 살인자를 알지 못했다. 살인자 역시 종적을 감추었고 결국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관리는 곽해의 무죄를 보고했다. 공손홍()은 “곽해는 평민으로 유협을 자처하며 권력을 휘두르고 노려보기만 해도 사람을 죽입니다. 곽해가 (살인자를) 모른다고 하지만 이 죄는 곽해가 사람을 죽인 것보다 더 심하니 대역무도입니다”라고 하여 마침내 곽해 옹백의 일족을 없앴다.



自是之後,為俠者極眾,敖而無足數者。然關中長安樊仲子,槐裏趙王孫,長陵高公子,西河郭公仲,太原鹵公孺,臨淮兒長卿,東陽田君孺,雖為俠而逡逡有退讓君子之風。至若北道姚氏,西道諸杜,南道仇景,東道趙他、羽公子,南陽趙調之徒,此盜跖居民間者耳,曷足道哉!此乃鄉者朱家之羞也。



이후로도 유협을 자처하는 자들이 아주 많았으나 오만하여 유협이라 꼽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장안()의 번중자(), 괴리()의 조왕손(), 장릉()의 고공자(), 서하(西)의 곽공중(), 태원()의 노공유(), 임회()의 예장경(), 동양()의 전군유()가 유협 노릇을 했지만 신중하고 겸손한 군자의 덕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에 장안 북쪽의 요씨(), 서쪽 지방의 두씨(), 남쪽 지방의 구경(), 동쪽의 조타(), 우공자(), 남양()의 조조(調)의 무리들은 도적으로써 민간에 섞여 살았을 뿐이니 어찌 거론할 수 있겠는가! 이들은 옛날 주가가 부끄럽게 여기던 자들이었다.


太史公曰:吾視郭解,狀貌不及中人,言語不足採者。然天下無賢與不肖,知與不知,皆慕其聲,言俠者皆引以為名。諺曰:「人貌榮名,豈有既乎!」於戲,惜哉!

【索隱述贊】游俠豪倨,藉藉有聲。權行州裏,力折公卿。朱家脫季,劇孟定傾。急人之難,免讎於更。偉哉翁伯,人貌榮名。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곽해()를 보았는데 모습은 보통 사람에 미치지 못했고, 말솜씨도 본받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천하에 어질거나 불초하거나, 알거나 모르거나 모두 그 명성을 흠모했고, 협의를 말하는 자는 모두 그의 이름을 끌어들였다. 속담에 ‘사람들이 흠모하는 빛나는 명성이 어찌 다하는 때가 있으랴’라 했거늘 오호라 애석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