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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史記列傳

史記 卷一二五. 佞幸列傳

by 柳川 2019. 6. 3.

                                     佞幸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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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담에 “힘써 농사짓는 것이 풍년을 만나는 것만 못하고, 착하게 벼슬을 사는 것이 (군주에게) 잘 보이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는데 정말이지 헛말이 아니다. 여자만 색으로 잘 보이려 것이 아니라 벼슬살이에도 그런 것이 있다.


옛날에 색으로 사랑을 받은 자는 많았다. 한이 일어났을 때 고조는 매우 사나웠지만 적()이라는 유자()가 아첨으로 사랑을 받았다. 효혜제() 때에는 굉()이라는 유자가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은 재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순종하고 아첨하는 것으로써 귀염을 받으며 주상과 함께 자고 일어나니 공경들이 모두 이들을 통해 말을 넣었다. 그래서 효혜제 때의 낭()과 시중()들은 모두 준의()라는 새 깃털로 꾸민 관을 쓰고, 조개로 장식한 띠를 매고, 지분()을 바르며 적과 굉을 따랐다. 두 사람은 집을 안릉()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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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문제() 때 총애를 받은 신하로는 사인() 등통()이 있었고, 환관 조동()과 북궁백자()가 있었다. 북궁백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장자로서, 조동은 점성술로 총애를 받아 늘 효문제와 함께 수레를 탔다. 등통에게는 별다른 재주가 없었다.

등통은 촉군()의 남안() 사람이다. 노로 배를 잘 저었기 때문에 황두랑()이 되었다. 효문제 꿈에서 하늘에 오르려다 오르지 못하고 있는데 한 황두랑이 뒤를 밀어 하늘에 올랐다. 뒤를 보니 등 뒤로 따를 맨 그의 옷솔기가 터져 있었다.

잠을 깬 뒤 점대()로 가서 꿈속에서 밀어 올려준 황두랑을 은밀히 찾다가 등통을 보니 그의 옷이 등 뒤가 터진 것이 꿈에서 본 것과 같았다. 그 성과 이름을 물었더니 성은 등(), 이름은 통()이었다. 문제는 기뻐했고, 하루가 다르게 그를 총애했다. 등통 역시 근신했는데 밖에 나가 사람 사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휴가를 주어도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이에 문제가 억만 전을 내리길 십 여 차례였고, 벼슬은 상대부()에 이르렀다. 문제는 수시로 등통의 집에 가서 놀았다. 그러나 등통에게는 별다른 재능은 없었고 인재를 추천할 수도 없었다. 오로지 자기 한 몸 근신하며 주상의 비위를 맞출 뿐이었다.

주상이 관상 잘 보는 사람에게 등통의 관상을 보게 했더니 “가난을 맞이 하여 굶어죽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문제는 “등통을 부유하게 할 수 있는 내가 있거늘 어찌 가난하다 하는가”라하고는 등통에게 촉군 엄도()의 동 광산을 주어 자기 돈을 주조할 수 있게 하니 ‘등씨전’이 천하에 퍼졌다. 그 부가 이 정도였다.

문제가 일찍이 종기를 앓은 적이 있는데 등통은 늘 황제를 위해서 종기의 고름을 빨아냈다. 문제는 마음이 편치 않아 조용히 등통에게 “천하에 누가 나를 가장 사랑하느냐”라고 물었다. 등통은 “당연히 태자를 따를 수 없지요”라고 대답했다. 태자가 문병을 오자 문제는 태자에게 종기를 빨라고 시켰다. 태자는 종기를 빨기는 했으나 난처해 했다.

얼마 뒤 (태자는) 등통이 늘 황제를 위해서 고름을 빨아낸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했고, 이로써 등통을 원망했다. 문제가 죽고 경제()가 즉위하자 등통은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게 되었다. 누군가 등통이 몰래 국경 밖으로 그가 주조한 돈을 실어내고 있다고 고발했다. 관리에게 넘겨 조사를 하게 했는데 그런 일이 많았다. 마침내 결국 죄를 물어 등통의 집 재산을 모조리 몰수하고 수만 금의 빚을 지게 만들었다.

장공주()가 등통에게 재물을 내렸으나 관리가 재빨리 그것을 몰수했기 때문에 등통은 비녀 하나조차 몸에 지닐 수 없었다. 이에 장공주는 빌려준다는 명목으로 등통에게 입을 것과 먹을 것을 보내주었다. 등통은 끝내 단 한 푼의 돈도 없이 남의 집에 빌붙어 살다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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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제() 때에는 궁중에 총신은 없었다. 그러나 낭중령()인 주문인()이 있었는데 주문인이 받은 총애는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두텁지는 않았다.

지금 천자(, 무제)가 궁중에서 총애하는 신하로는 한왕()의 손자인 사인() 언()이 있고, 환관 이연년()이 있다.

언은 궁고후()의 서손()이다. 지금 주상이 교동왕()이었을 때 한언은 주상과 함께 글을 배우고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주상이 태자가 되자 더욱 더 언을 가까이 했다. 언은 말을 타며 활쏘기를 잘 했고 아부도 잘 했다. 주상이 즉위하여 흉노를 정벌하고자 했는데 언이 전부터 흉노 군대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더욱 존귀해졌고 벼슬이 상대부에 이르렀다. 내리는 상은 등통에 버금갔다. 이 무렵 언은 늘 주상과 함께 자고 일어났다. 강도왕()이 입조하니 (주상을) 따라서 상림()에서 사냥을 하라는 조서가 있었다. 천자가 행차하기에 앞서 먼저 언에게 뒤따르는 수레를 타고 수행원 수백 기를 거느리고 가서 사냥할 짐승들을 살피게 했다. 강도왕이 멀리서 보고는 천자인 줄 알고 시종들을 물리치고 길 옆에 엎드려 인사를 드렸다. 언이 빠르게 지나가면서 쳐다보지도 않았다. 강도왕이 화가 나서 황태후에게 눈물을 흘리며 “나라를 되돌리고 한언처럼 (주상을) 지키길 청합니다”라고 했다. 태후가 이 일로 언을 미워하게 되었다. 언은 주상을 모시고 금지되어 있는 영항()을 출입하며 간통을 일삼는 일이 황태후 귀에 들어갔다. 황태후가 노하여 언에게 죽음을 내렸다. 주상이 사죄했지만 끝내 말리지 못했고, 언이 마침내 죽었다. 그리고 안도후() 한열() 역시 아첨으로 사랑을 받았다.

이연년은 중산() 사람이다. 부모와 그 자신, 그리고 형제자매들은 모두가 가수였다. 연년이 법에 연루되어 부형(, 궁형)을 받고는 구중()에서 일을 했다. 그런데 평양공주()가 이연년의 누이동생이 춤을 잘 춘다는 말을 했다. 주상이 그녀를 보고는 기뻐하며 영항()으로 들이고 연년을 불러 귀여워 했다. 연년은 노래를 잘 했고 새로운 소리를 만들기도 했다. 주상이 당시 천지에 대한 제사를 일으키고 악시()를 지어 음악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게 하려고 했다. 연년이 그 뜻을 잘 받들어 음악에 맞추어 악시를 연주했다. 그의 누이동생도 총애를 받아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연년은 2천석 벼슬의 도장을 찼고, 협성률()로 불렸다. 주상과 함께 자고 일어나며 크게 총애를 받으니 한언에 버금갔다.

한 참 뒤 동생이 궁녀와 난잡한 짓을 일삼고 교만방자하게 드나들었다. 그 누이동생인 이부인이 죽은 뒤 총애도 시들자 연년이 형제는 붙잡혀 죽었다.

이 후로 궁궐 안에서 총애를 받은 신하들은 대개 외척 집안이었나 셀 정도는 아니다. 위청()과 곽거병()도 외척으로서 사랑을 받았으나 저들은 재능으로 스스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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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심하구나,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정이 때에 따라 변함이! 미자하()의 행적은 후세 사람에게 영행()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 것으로, 이로써 백 세 뒤의 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