佞幸列傳
諺曰「力田不如逢年, 善仕不如遇合」, 固無虛言. 非獨女以色媚, 而士宦亦有之.
昔以色幸者多矣. 至漢興, 高祖至暴抗也, 然籍孺以佞幸;孝恵時有閎孺. 此両人非有材能, 徒以婉佞貴幸, 與上臥起, 公卿皆因関説. 故孝恵時郎侍中皆冠鵔鸃, 貝帯, 傅脂粉, 化閎、籍之屬也. 両人徙家安陵.
속담에 “힘써 농사짓는 것이 풍년을 만나는 것만 못하고, 착하게 벼슬을 사는 것이 (군주에게) 잘 보이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는데 정말이지 헛말이 아니다. 여자만 색으로 잘 보이려 것이 아니라 벼슬살이에도 그런 것이 있다.
옛날에 색으로 사랑을 받은 자는 많았다. 한이 일어났을 때 고조는 매우 사나웠지만 적(籍)이라는 유자(孺子)가 아첨으로 사랑을 받았다. 효혜제(孝惠帝) 때에는 굉(閎)이라는 유자가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은 재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순종하고 아첨하는 것으로써 귀염을 받으며 주상과 함께 자고 일어나니 공경들이 모두 이들을 통해 말을 넣었다. 그래서 효혜제 때의 낭(郎)과 시중(侍中)들은 모두 준의(鵔鸃)라는 새 깃털로 꾸민 관을 쓰고, 조개로 장식한 띠를 매고, 지분(脂粉)을 바르며 적과 굉을 따랐다. 두 사람은 집을 안릉(安陵)으로 옮겼다.
孝文時中寵臣, 士人則鄧通, 宦者則趙同、北宮伯子. 北宮伯子以愛人長者;而趙同以星気幸, 常為文帝參乗;鄧通無伎能. 鄧通,蜀郡南安人也, 以濯船為黃頭郎. 孝文帝夢欲上天, 不能, 有一黃頭郎従後推之上天, 顧見其衣裻帯後穿. 覚而之漸台, 以夢中陰目求推者郎, 即見鄧通, 其衣後穿, 夢中所見也. 召問其名姓, 姓鄧氏, 名通, 文帝説焉, 尊幸之日異. 通亦願謹, 不好外交, 雖賜洗沐, 不欲出. 於是文帝賞賜通巨萬以十數, 官至上大夫. 文帝時時如鄧通家遊戯. 然鄧通無他能, 不能有所薦士, 獨自謹其身以媚上而已. 上使善相者相通, 曰「當貧餓死」. 文帝曰:「能富通者在我也. 何謂貧乎?」於是賜鄧通蜀厳道銅山, 得自鋳銭, 「鄧氏銭」布天下. 其富如此.
文帝嘗病癰, 鄧通常為帝唶吮之. 文帝不樂, 従容問通曰:「天下誰最愛我者乎?」通曰:「宜莫如太子.」太子入問病, 文帝使唶癰, 唶癰而色難之. 已而聞鄧通常為帝唶吮之, 心慚, 由此怨通矣. 及文帝崩, 景帝立, 鄧通免, 家居. 居無何, 人有告鄧通盜出徼外鋳銭. 下吏験問, 頗有之, 遂竟案, 盡沒入鄧通家, 尚負責數巨萬. 長公主賜鄧通, 吏輒隨沒入之, 一簪不得著身. 於是長公主乃令仮衣食. 竟不得名一銭, 寄死人家.
효문제(孝文帝) 때 총애를 받은 신하로는 사인(士人) 등통(鄧通)이 있었고, 환관 조동(趙同)과 북궁백자(北宮伯子)가 있었다. 북궁백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장자로서, 조동은 점성술로 총애를 받아 늘 효문제와 함께 수레를 탔다. 등통에게는 별다른 재주가 없었다.
등통은 촉군(蜀郡)의 남안(南安) 사람이다. 노로 배를 잘 저었기 때문에 황두랑(黃頭郎)이 되었다. 효문제 꿈에서 하늘에 오르려다 오르지 못하고 있는데 한 황두랑이 뒤를 밀어 하늘에 올랐다. 뒤를 보니 등 뒤로 따를 맨 그의 옷솔기가 터져 있었다.
잠을 깬 뒤 점대(漸臺)로 가서 꿈속에서 밀어 올려준 황두랑을 은밀히 찾다가 등통을 보니 그의 옷이 등 뒤가 터진 것이 꿈에서 본 것과 같았다. 그 성과 이름을 물었더니 성은 등(鄧), 이름은 통(通)이었다. 문제는 기뻐했고, 하루가 다르게 그를 총애했다. 등통 역시 근신했는데 밖에 나가 사람 사귀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고 휴가를 주어도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이에 문제가 억만 전을 내리길 십 여 차례였고, 벼슬은 상대부(上大夫)에 이르렀다. 문제는 수시로 등통의 집에 가서 놀았다. 그러나 등통에게는 별다른 재능은 없었고 인재를 추천할 수도 없었다. 오로지 자기 한 몸 근신하며 주상의 비위를 맞출 뿐이었다.
주상이 관상 잘 보는 사람에게 등통의 관상을 보게 했더니 “가난을 맞이 하여 굶어죽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문제는 “등통을 부유하게 할 수 있는 내가 있거늘 어찌 가난하다 하는가”라하고는 등통에게 촉군 엄도(嚴道)의 동 광산을 주어 자기 돈을 주조할 수 있게 하니 ‘등씨전’이 천하에 퍼졌다. 그 부가 이 정도였다.
문제가 일찍이 종기를 앓은 적이 있는데 등통은 늘 황제를 위해서 종기의 고름을 빨아냈다. 문제는 마음이 편치 않아 조용히 등통에게 “천하에 누가 나를 가장 사랑하느냐”라고 물었다. 등통은 “당연히 태자를 따를 수 없지요”라고 대답했다. 태자가 문병을 오자 문제는 태자에게 종기를 빨라고 시켰다. 태자는 종기를 빨기는 했으나 난처해 했다.
얼마 뒤 (태자는) 등통이 늘 황제를 위해서 고름을 빨아낸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했고, 이로써 등통을 원망했다. 문제가 죽고 경제(景帝)가 즉위하자 등통은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게 되었다. 누군가 등통이 몰래 국경 밖으로 그가 주조한 돈을 실어내고 있다고 고발했다. 관리에게 넘겨 조사를 하게 했는데 그런 일이 많았다. 마침내 결국 죄를 물어 등통의 집 재산을 모조리 몰수하고 수만 금의 빚을 지게 만들었다.
장공주(長公主)가 등통에게 재물을 내렸으나 관리가 재빨리 그것을 몰수했기 때문에 등통은 비녀 하나조차 몸에 지닐 수 없었다. 이에 장공주는 빌려준다는 명목으로 등통에게 입을 것과 먹을 것을 보내주었다. 등통은 끝내 단 한 푼의 돈도 없이 남의 집에 빌붙어 살다가 죽었다.
孝景帝時, 中無寵臣, 然獨郎中令周文仁, 仁寵最過庸, 乃不甚篤.
今天子中寵臣, 士人則韓王孫嫣, 宦者則李延年. 嫣者, 弓高侯孽孫也. 今上為膠東王時, 嫣與上學書相愛. 及上為太子, 愈益親嫣. 嫣善騎射, 善佞. 上即位, 欲事伐匈奴, 而嫣先習胡兵, 以故益尊貴, 官至上大夫, 賞賜擬於鄧通. 時嫣常與上臥起. 江都王入朝, 有詔得従入猟上林中. 天子車駕蹕道未行, 而先使嫣乗副車, 従數十百騎, 騖馳視獣. 江都王望見, 以為天子, 辟従者, 伏謁道傍. 嫣駆不見. 既過, 江都王怒, 為皇太後泣曰:「請得帰國入宿衛, 比韓嫣.」太後由此嗛嫣. 嫣侍上, 出入永巷不禁, 以姦聞皇太後. 皇太後怒, 使使賜嫣死. 上為謝, 終不能得, 嫣遂死. 而案道侯韓説, 其弟也, 亦佞幸.
李延年, 中山人也. 父母及身兄弟及女, 皆故倡也. 延年坐法腐, 給事狗中. 而平陽公主言延年女弟善舞, 上見, 心説之, 及入永巷, 而召貴延年. 延年善歌, 為変新聲, 而上方興天地祠, 欲造樂詩歌弦之. 延年善承意, 弦次初詩. 其女弟亦幸, 有子男. 延年佩二千石印, 號協聲律. 與上臥起, 甚貴幸, 埒如韓嫣也. 久之, 寖與中人亂, 出入驕恣. 及其女弟李夫人卒後, 愛弛, 則禽誅延年昆弟也.
自是之後, 內寵嬖臣大底外戚之家, 然不足數也. 衛青、霍去病亦以外戚貴幸, 然頗用材能自進.
효경제(孝景帝) 때에는 궁중에 총신은 없었다. 그러나 낭중령(郎中令)인 주문인(周文仁)이 있었는데 주문인이 받은 총애는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두텁지는 않았다.
지금 천자(天子, 무제)가 궁중에서 총애하는 신하로는 한왕(韓王)의 손자인 사인(士人) 언(嫣)이 있고, 환관 이연년(李延年)이 있다.
언은 궁고후(弓高侯)의 서손(庶孫)이다. 지금 주상이 교동왕(膠東王)이었을 때 한언은 주상과 함께 글을 배우고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주상이 태자가 되자 더욱 더 언을 가까이 했다. 언은 말을 타며 활쏘기를 잘 했고 아부도 잘 했다. 주상이 즉위하여 흉노를 정벌하고자 했는데 언이 전부터 흉노 군대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더욱 존귀해졌고 벼슬이 상대부에 이르렀다. 내리는 상은 등통에 버금갔다. 이 무렵 언은 늘 주상과 함께 자고 일어났다. 강도왕(江都王)이 입조하니 (주상을) 따라서 상림(上林)에서 사냥을 하라는 조서가 있었다. 천자가 행차하기에 앞서 먼저 언에게 뒤따르는 수레를 타고 수행원 수백 기를 거느리고 가서 사냥할 짐승들을 살피게 했다. 강도왕이 멀리서 보고는 천자인 줄 알고 시종들을 물리치고 길 옆에 엎드려 인사를 드렸다. 언이 빠르게 지나가면서 쳐다보지도 않았다. 강도왕이 화가 나서 황태후에게 눈물을 흘리며 “나라를 되돌리고 한언처럼 (주상을) 지키길 청합니다”라고 했다. 태후가 이 일로 언을 미워하게 되었다. 언은 주상을 모시고 금지되어 있는 영항(永巷)을 출입하며 간통을 일삼는 일이 황태후 귀에 들어갔다. 황태후가 노하여 언에게 죽음을 내렸다. 주상이 사죄했지만 끝내 말리지 못했고, 언이 마침내 죽었다. 그리고 안도후(案道侯) 한열(韓說) 역시 아첨으로 사랑을 받았다.
이연년은 중산(中山) 사람이다. 부모와 그 자신, 그리고 형제자매들은 모두가 가수였다. 연년이 법에 연루되어 부형(腐刑, 궁형)을 받고는 구중(狗中)에서 일을 했다. 그런데 평양공주(平陽公主)가 이연년의 누이동생이 춤을 잘 춘다는 말을 했다. 주상이 그녀를 보고는 기뻐하며 영항(永巷)으로 들이고 연년을 불러 귀여워 했다. 연년은 노래를 잘 했고 새로운 소리를 만들기도 했다. 주상이 당시 천지에 대한 제사를 일으키고 악시(樂詩)를 지어 음악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게 하려고 했다. 연년이 그 뜻을 잘 받들어 음악에 맞추어 악시를 연주했다. 그의 누이동생도 총애를 받아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연년은 2천석 벼슬의 도장을 찼고, 협성률(協聲律)로 불렸다. 주상과 함께 자고 일어나며 크게 총애를 받으니 한언에 버금갔다.
한 참 뒤 동생이 궁녀와 난잡한 짓을 일삼고 교만방자하게 드나들었다. 그 누이동생인 이부인이 죽은 뒤 총애도 시들자 연년이 형제는 붙잡혀 죽었다.
이 후로 궁궐 안에서 총애를 받은 신하들은 대개 외척 집안이었나 셀 정도는 아니다.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도 외척으로서 사랑을 받았으나 저들은 재능으로 스스로 승진했다.
太史公曰:甚哉愛憎之時! 彌子瑕之行, 足以観後人佞幸矣. 雖百世可知也.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심하구나, 사랑하고 미워하는 감정이 때에 따라 변함이! 미자하(彌子瑕)의 행적은 후세 사람에게 영행(佞幸)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 것으로, 이로써 백 세 뒤의 일도 알 수 있는 것이다.”
'中國歷史와文學 > 史記列傳' 카테고리의 다른 글
史記 卷一二六. 滑稽列傳[東郭先生] (0) | 2019.06.04 |
---|---|
史記 卷一二六. 滑稽列傳. (0) | 2019.06.04 |
史記 卷一二四. 游俠列傳 (0) | 2019.06.03 |
史記 卷一二三. 大宛列傳 (0) | 2019.06.03 |
史記 卷一二二. 酷吏列傳 (0) | 2019.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