滑稽列傳
東郭先生
武帝時,大將軍衞青者,衞后兄也,封為長平侯。從軍擊匈奴,至余吾水上而還,斬首捕虜,有功來歸,
詔賜金千斤。將軍出宮門,齊人東郭先生以方士待詔公車,當道遮衞將軍車,拜謁曰:願白事。將軍止
車前,東郭先生旁車言曰:王夫人新得幸於上,家貧。今將軍得金千斤,誠以其半賜王夫人之親,人主
聞之必喜。此所謂奇策便計也。衞將軍謝之曰: 先生幸告之以便計,請奉教。於是 衞將軍乃以五百金
為王夫人之親壽。王夫人以聞武帝。帝曰: 大將軍不知為此。問之安所受計策,對曰: 受之待詔者東
郭先生。詔召東郭先生,拜以為郡都尉。
東郭先生久待詔公車,貧困飢寒, 衣敝,履不完。行雪中,履有上無下,足盡踐地。道中人笑之,東郭
先生應之曰: 誰能履行雪中,令人視之,其上履也,其履下處乃似人足者乎? 及其拜為二千石,佩青
緺出宮門,行謝主人。故所以同官待詔者,等比祖道於都門外。榮華道路,立名當世。此所謂衣褐懷寶
者也。
余吾水 : 지금의 몽고공화국 수도 울란바토르 서쪽으로 남북으로 흘렀던 강이름
祖道 : 祖道神 : 길의 신. 길제사를 지내다.
當其貧困時,人莫省視;至其貴也,乃爭附之。諺曰: 相馬失之瘦,相士失之貧。其此之謂邪? 王夫人
病甚,人主至自往問之曰: 子當為王,欲安所置之? 對曰:願居洛陽。
人主曰: 不可。洛陽有武庫、敖倉,當關口,天下咽喉。自先帝以來,傳不為置王。然關東國莫大於齊,
可以為齊王。王夫人以手擊頭,呼幸甚。王夫人死,號曰, 齊王太后薨。
相馬失之瘦,相士失之貧 : (諺語)指人看見馬外形太瘦就誤以為牠不是一匹千裡馬;看見人一時貧困就認為他沒有本領。勸誡世人不可
因貧賤而忽略他人真實的才能。史記˙卷一二六˙滑稽傳˙褚少孫補衛青傳:『當其貧困時,人莫省視,至其貴也,
乃争争。諺曰:「相馬失之瘦,相士失之貧。」其此之謂邪?』
[牠 : 뿔없는 소 타]
무제 때 대장군 위청(衛靑)은 위후(衛后)의 오라비로 장평후(長平侯)에 봉해졌다. 그는 군에 나가 흉노를 무찌르
고, 여오수(余吾水) 부근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흉노를 베고 포로도 잡는 공을 세웠다. 그가 돌아오니 황제는
조서를 내려 황금 1천 근을 하사했다. 장군이 대궐 문을 나설 때 제나라 사람 동곽(東郭) 선생이 방사(方士)로서
공거(公車)에서 조서를 기다리고 있다가 길 위로 나와 위 장군의 수레를 가로막고는 절하면서 “여쭐 말씀이 있습
니다”라고 했다. 장군이 수레를 멈추고 동곽 선생을 앞으로 나오게 했다.
동곽 선생이 수레 곁으로 가서 이렇게 말했다.
“왕 부인이 새로이 황제께 총애를 받고 있으나 집이 가난합니다. 지금 장군께서 황금 1천근을 얻으셨으니 그 절
반을 왕부인의 어버이에게 주시면 황제께서 이를 듣고 반드시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기발하고 편리
한 계책이라는 것입니다.”
위 장군이 사례하며 “선생께서 다행히 편리한 계책을 알려주셨습니다.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위 장군은 바로 황금 500근을 왕부인의 어버이에게 선물을 했다. 왕부인은 이 일을 무제에게 말했다.
무제는 “대장군은 그렇게 할 줄 모른다”라면서 불러서 누구에게 얻은 계책인지를 물었다. 위청은 “조서를 기다
리고 있던 동곽 선생에게서 받았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황제는 조서를 내려 동곽 선생을 불러군 군의 도위(都尉)에 임명했다. 동곽 선생은 오랫동안 공거에서 조서
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빈곤에 굶주림과 추위에 떨었으며, 옷은 해지고 신도 온전치 못했다. 눈 속을 가면 신
이 위는 있어도 바닥이 없어 발이 땅에 닿았다. 길 가던 사람들이 이를 보고 웃었다.
이에 동곽 선생은 “누가 신을 신고 눈 속을 가는데, 그것을 보는 사람이 위는 신발이고 아래는 사람의 발이라는
것을 어찌 알게 한단 말인가”
그는 2천 석 벼슬에 임명되어 푸른 도장줄을 매고 대궐 문을 나가서 하숙집 주인에게 작별을 고했다. 전에 같이
조서를 기다리던 자들이 모여 도성 문 밖에서 조도(祖道)에 제사 지내니, 길 위에 영화로운 이름이 세상에 세워
졌다. 그는 남루한 옷을 입고서 보배를 품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빈곤했을 때에는 거들떠보지 않던 사람들
이 그가 영예와 부귀를 얻자 바로 서로 다투어 달라 붙었다.
속담에 “말[馬]을 감정할 때는 여윈 것 때문에 실수하고, 선비를 평가할 때는 가난 때문에 실수한다‘고 했는데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왕 부인이 위독했다. 황제가 몸소 가서 문병하며 “그대의 아들이 왕이 될 것이다. 어디에 있길 원하는가”라고 하
자 “낙양에 있길 바라옵니다”라고 했다. 황제는 “그건 안 되오. 낙양에는 무기와 식량 창고가 있고 관문 입구라
천하의 목구멍과 같아 선제 때부터 왕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관동 나라들 중 제나라 만큰 큰 나라는 없
으니 제왕으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왕 부인은 손으로 머리를 두드리며 “정말 다행입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왕 부인이 죽지 “제나라 왕의 태후께서 돌아가셨다”라고 한 것이다.
淳于髡
昔者,齊王使淳于髡獻鵠於楚。出邑門,道飛其鵠,徒揭空籠,造詐成辭,往見楚王曰: 齊王使臣來獻
鵠,過於水上,不忍鵠之渴,出而飲之,去我飛亡。吾欲刺腹絞頸而死。恐人之議吾王以鳥獸之故, 令士
自傷殺也。鵠,毛物,多相類者,吾欲買而代之,是不信而欺吾王也。欲赴佗國奔亡,痛吾兩主使不通。
故來服過,叩頭受罪大王。
楚王曰: 善,齊王有信士若此哉!厚賜之,財倍鵠在也。
옛날 제나라 임금이 순우곤에게 고니를 초나라에 바치게 했다. 순우곤은 도성 문을 나서자 길 위에서 고니를 날려
보냈다. 그러고는 빈 새장만을 든 채 초왕을 뵙고 거짓말로 이렇게 말했다.
“제왕께서 신에게 고니를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물거를 지나는데 목말라하는 고니를 차마 볼 수 없어 꺼내 물을
마시게 했더니 저를 버리고 날아 가버렸습니다. 저는 배를 찌르고 목을 매어 죽을까 생각도 했으나 사람들이 변
변치 않을 새 때문에 선비로 하여금 자살하게 만들었다고 우리 왕에 대해 숙덕거릴까봐 겁이 났습니다. 고니는
털을 가진 사물로 비슷한 것들이 많아 제가 사서 대신할까 했으나 이는 신의없는 행동으로 우리 왕을 속이는 짓
입니다. 다른 나라로 도망갈까도 생각했으나 두 왕께서 앞으로 사신을 주고받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와서 잘못을 자백하고 머리를 두드려 대왕께 죄를 받고자 한 것입니다.”
초왕은 “훌륭하구나! 제왕에게 이같은 신의있는 선비가 있다니”라 하고는 후한 예물을 내리니 재물이 바치려고
한 고니보다 배는 많았다.
王先生
武帝時,徵北海太守詣行在所。有文學卒史王先生者,自請與太守俱,吾有益於君,君許之。
諸府掾功曹白云: 王先生嗜酒,多言少實,恐不可與俱。太守曰: 先生意欲行,不可逆。遂與俱。行至
宮下,待詔宮府門。
掾 인연 연/뛰어쫒을 전. 因緣. 衙前 [전]뛰어쫒다.
王先生徒懷錢沽酒,與衞卒僕射飲,日醉,不視其太守。太守入跪拜。王先生謂戶郎曰:幸為我呼 ! 吾
君至門內遙語。戶郎為呼太守。太守來,望見王先生。王先生曰:天子即問君, 何以治北海令無盜賊,君
對曰何哉? 對曰: 選擇賢材,各任之以其能,賞異等,罰不肖。王先生曰: 對如是,是自譽自伐功,
不可也。願君對言,非臣之力,盡陛下神靈威武所變化也。太守曰:諾。召入,至于殿下,有詔問之曰:
何於治北海,令盜賊不起? 叩頭對言: 非臣之力,盡陛下神靈威武之所變化也。武帝大笑曰: 於呼!
安得長者之語而稱之!安所受之? 對曰:受之文學卒史。
帝曰: 今安在? 對曰: 在宮府門外。有詔召拜王先生為水衡丞,以北海太守為水衡都尉。
傳曰: 美言可以市,尊行可以加人。君子相送以言,小人相送以財。
水衡 : 上林園에 관한 모든 일을 주관하는 관청.
무제 때 북해(北海) 태수를 불러 행차한 곳으로 오게 했다. 그때 문학졸사(文學卒史)로서 왕 선생이라는 자가 있
어 태수와 함께 가기를 자청하며 “제가 당신에게 이익이 될 수 있으니 허락하십시오”라고 했다.
여러 관부의 관리들이 “왕 선생은 술을 좋아하고 말만 많아 실속이 없어 함께 가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태수는 “선생이 갈 뜻이 분명하니 어쩔 수 없다”며 끝내 함께 갔다.
궁에 이르러 궁부 문밖에서 조서를 기다렸다. 왕 선생은 지니고 있던 돈으로 술을 사서 위졸복야(衛卒僕射)와 함
께 마시며 날마다 취하여 태수는 만나지도 않았다.
마침내 태수가 들어가 황제께 인사를 드리려 하는데 왕 선생이 호랑(戶郎)에게 “나 대신 우리 태수를 불러 문안
에서 말하게 해주시오”라고 했다. 호랑이 태수를 부르자 태수가 나와서 왕 선생은 만났다.
왕 선생은 “천자께서 곧 태수께 어떻게 도적이 없게 북해를 다스렸는가라고 물으실 것인데 태수께서는 무엇이라
대답하실 생각입니까”라고 했다. 태수는 “어진 인재를 가려 뽑아 그 능력에 따라 일을 맡겼으며, 상의 등급을 나
누어 착하지 못한 자들을 벌했습니다다라고 말하겠소”라고 했다.
왕 선생은 “그렇게 답하시면 자기를 칭찬하고 자랑하는 것이니 안 됩니다. 원컨대 태수께서는 ‘신의 힘이 아니라
모두 폐하의 신령과 위엄 덕분입니다’라고 답하십시오”라고 했다.
태수는 알았다 하고는 불려 들어가 어전에 이르니 황제는 “북해를 어떻게 다스렸길래 도적이 일어나지 못하게
했는가”라고 했다. 태수는 머리를 조아리며 “신의 힘이 아니라 폐하의 신령과 위엄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라고
했다. 무제가 크게 웃으며 “좋구나! 어디서 어떻게 이런 장자(長者)의 말을 얻어 들었길래 이렇게 말하는가”라고
물으니 태수는 “문학졸사에게서 얻은 말입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지금 어디 있는가”라 하니 태수는 “궁부 문밖
에 있습니다”라고 했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왕 선생을 불러 수형승(水衡丞) 벼슬을 내리고, 북해태수는 수형도위(水衡都尉)로 삼았다.
전해 오는 말에 “아름다운 말로 장사를 할 수 있으며, 높은 행실로 남에게 베풀 수 있다”고 했고, “군자는 좋은 말
을 주고 받고, 소인은 재물을 주고받는다”고 했다.
註]
美言可以市,尊行可以加人 [도덕경 上62-2]
西門豹
魏文侯時,西門豹為鄴令。豹往到鄴,會長老,問之民所疾苦。長老曰:苦為河伯娶婦,以故貧。豹問
其故,對曰: 鄴三老、廷掾常歲賦斂百姓,收取其錢得數百萬,用其二三十萬為河伯娶婦,與祝巫共分
其餘錢持歸。當其時,巫行視小家女好者,云是當為河伯婦,即娉取。洗沐之,為治新繒綺縠衣,閒居
齋戒;為治齋宮河上,張緹絳帷,女居其中。為具牛酒飯食,(行)十餘日。共粉飾之,如嫁女床席,令
女居其上,浮之河中。始浮,行數十里乃沒。其人家有好女者,恐大巫祝為河伯取之,以故多持女遠逃
亡。以故城中益空無人,又困貧,所從來久遠矣。民人俗語曰, '即不為河伯娶婦,水來漂沒,溺其人民.'
云。西門豹曰: 至為河伯娶婦時,願三老、巫祝、父老送女河上,幸來告語之,吾亦往送女。皆曰:諾。
三老 : 중국 고대 왕조의 제도로써 말단 지방행정기관에는 10리마다 亭을 두고 그 장을 亭長이라 했으며, 매 10정마다 鄕을 두고 그
장을 향장이라 했다. 매 향에는 삼로를 두어 그곳 백성들의 교화를 담당하게 했다.
繒 : 비단 증. 비단. 명주. 綺 : 비단 기.비단. 무늬좋은 비단. 무늬, 광택. 곱다. 아름답다. 縠 : 주름비단 곡. 주름비단. 명주.
齋 : 재계할 재/집 재/상복 자. 齋戒하다(몸과 마음을 깨끝이 하다) 정진하다. 공경하다. 시주하다. 집, 방, 식사. 명복을 비는 불공.
[자]상복. 윗옷.
緹 : 붉을 제. 붉다. 붉은 빛, 붉은 비단. 명주. 絳 : 진홍 강. 眞紅. 땅이름. 강이름. 깊게 붉다. 帷 : 휘장 유. 휘장. 덮다. 가리다.
粉飾 : 내용없이 거죽만을 발라 꾸미는 것. 실제보다 좋게 보이도록 거짓으로 꾸미는 것. 화장하다.
至其時,西門豹往會之河上。三老、官屬、豪長者、里父老皆會,以人民往觀之者三二千人。其巫,老
女子也,已年七十。從弟子女十人所,皆衣繒單衣,立大巫後。西門豹曰: 呼河伯婦來,視其好醜。即
將女出帷中,來至前。豹視之,顧謂三老、巫祝、父老曰: 是女子不好,煩大巫嫗為入報河伯,得更求
好女,後日送之。即使吏卒共抱大巫嫗投之河中。有頃,曰: 巫嫗何久也?弟子趣之!復以弟子一人投
河中。有頃,曰:弟子何久也?復使一人趣之!復投一弟子河中。凡投三弟子。西門豹曰: 巫嫗弟子是
女子也,不能白事,煩三老為入白之。復投三老河中。西門豹簪筆磬折,嚮河立待良久。長老、吏傍觀
者皆驚恐。西門豹顧曰: 巫嫗、三老不來還,柰之何? 欲復使廷掾與豪長者一人入趣之。皆叩頭,叩
頭且破,額血流地,色如死灰。西門豹曰: 諾,且留待之, 須臾。須臾,豹曰: 廷掾起矣。狀河伯留客
之久,若皆罷去歸矣。鄴吏民大驚恐,從是以後,不敢復言為河伯娶婦。
所 : 쯤, 정도. 巫祝 : 무당, 박수. 簪筆 : 붓을 휴대하는 것.
磬 : 경쇠 경. 경쇠(옥이나 돌로 만든 악기의 한가지). 磬石. 목매다. 죽다. 굽다. 굽히다. 절하다. 달리다. 비다. 다하다.
嚮 : 향할 향. 향하다. 나아가다. 길잡다. 바라보다. 대하다. 대접하다. 누리다. 권하다. 흠향하다 메아리치다. 제사지내다. 方向. 북향한 窓.
메아리. 지난 번.
西門豹即發民鑿十二渠,引河水灌民田,田皆溉。當其時,民治渠少煩苦,不欲也。豹曰: 民可以樂成,
不可與慮始。今父老子弟雖患苦我,然百歲後期令父老子孫思我言。至今皆得水利,民人以給足 富。十
二渠經絕馳道,到漢之立,而長吏以為十二渠橋絕馳道,相比近,不可。欲合渠水,且至馳道合三渠為
一橋。鄴民人父老不肯聽長吏,以為西門君所為也,賢君之法式不可更也。長吏終聽置之。故西門豹為
鄴令,名聞天下,澤流後世,無絕已時,幾可謂非賢大夫哉!
傳曰:「<子産>治<鄭>, 民不能欺;<子賤>治<單父>, 民不忍欺;<西門豹>治<鄴>, 民不敢欺.」
《說苑》雲,宓(其姓也)子賤治單父,身不下堂,唯彈琴而已。但單父卻治理得很好。巫馬期也曾治單父,並且有成效,
可他卻是“以星出,以星入”,即通過披星戴月地幹,才把單父治理好的。巫馬期問其故,子賤說:我是任人,你是任力;
而任力者勞,任人者逸。三子之才能誰最賢哉? 辨治者當能別之.
위(魏) 문후(文侯) 때 서문표(西門豹)가 업(鄴)의 현령이 되었다. 서문표가 업에 부임해서는 장로를 모아 백성들
이 힘든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장로가 “하백(河伯)에게 처자를 바치는 일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가난하기도 합니다”라고 했다. 서문표가 그 까닭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업의 삼로(三老)와 아전이 해마다 백성에게 돈을 수백만 전 거두어갑니다. 그 중에서 20~30만 전을 써서 하백
에게 처자를 바치게 하고는 그 나머지 돈은 무당과 함께 나누어 가지고 돌아갑니다. 그 시기가 되면 무당이 다니
면서 어려운 집안의 딸 중에서 아름다운 처자를 보면 ‘이 처자가 하백의 아내가 될 것이다’라 하고는 곧 폐백을
주고 데려갑니다. 먼저 씻기고 새로 비단옷들을 지어주어서 홀로 있게 합니다. 재궁(齋宮)을 물가에 만들고 붉은
장막을 둘러서 여자를 그 안에 둡니다. 쇠고기와 술과 밥을 갖추어 먹이고, 10여 일을 보냅니다. 그날이 되면 화
장을 시키고 시집가는 여자의 상석(床席)처럼 만들어, 여자를 그 위에 앉힌 뒤 물에 띄워 보냅니다.
처음에는 수십 리를 떠가지만 이네 물에 잠깁니다. 예쁜 처자가 있는 집들로 무당이 하백을 위해 처자를 데려갈
까 두려워 처자를 데리고 도망가는 집이 많아졌습니다. 이 때문에 성 안이 더욱 비게 되어 사람도 없고 더 가난
해진 것입니다. 이는 이미 오래 된 일입니다. 그리고는 ‘하백에게 처자를 바치지 않으면 물어 넘쳐 백성들을 빠져
죽게 할 것이다’는 말을 퍼뜨립니다.”
서문표는 “하백을 위해 처자를 바친다는데 삼로와 무당 그리고 부로(父老)들이 처자를 물에 띄우려 하거든 내게
알리기 바란다. 나도 처자를 보내러 갈 것이다”라고 하자 모두 알겠다고 했다.
서문표는 “무당과 그 제자들이 모두 여자라 말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삼로들이 수고스럽지만 들어가 하백에게
알려라”라 하고는 삼로를 물에 처넣었다. 서문표는 털 비녀를 관에 꽂고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면서 물을 향해 한
참을 기다렸다.
장로와 아전들, 그리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겁을 먹었다. 서문표는 이들을 돌아보면서 “ 무당과 삼로
들이 모두 돌아오지 않는다. 이를 어찌 한다는 말인가”라 하고는 다시 아전과 고을 유지에게 한 사람씩 들어가서
재촉하라고 했다. 그러자 모두 이마가 깨지도록 머리를 조아리는데 피가 땅위에 흐르고 얼굴이 재빛으로 변했다.
서문표는 “좋다. 잠깐 멈추어 기다려보거라”라 하고는 잠시 뒤 “아전들은 일어나라. 하백이 손님들을 오래 붙잡
고 있는 것 같다. 너희들은 돌아가도록 하라”라고 했다.
업의 아전과 백성들은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며 이후 감히 다시는 하백을 위해 처자를 바쳐야 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서문표는 곧 백성을 동원해 12개의 도랑을 파서 강의 물을 끌어서 백성들의 논에 대니 이로써 논에 모두 물이 대
어졌다. 당시 백성들은 도랑을 만드는 것이 번거롭고 힘들다고 여겨서 하려 들지 않았다.
서문표는 “백성들이란 이루어지고나면 즐거워하지 함께 일을 시작할 수는 없다. 이제 부로와 자제들이 나를 원망
하지만 100년 뒤에는 부로와 자손들이 틀림없이 내가 한 말을 생각할 것이다”라 했다.
지금까지도 이 수리(水利) 덕분에 백성들이 풍족하다. 12개의 도랑이 천자의 치도(馳道)를 가로지르고 있다. 漢나
라가 일어나자 지방의 수장과 관리들은 12개 도랑의 다리가 천자의 행차하는 길을 끊으며, 또한 그것이 서로 가까
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도랑의 물을 합치되 치도 부근의 세 도랑을 합쳐 하나의 다리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자 업의 부로들이 이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서문표가 해 놓은 일이니 어진 사람의 방식을 고쳐서는 안
된다고 여긴 것이다. 관리들도 결국 이 말을 받아들여 그대로 두었다. 그리하여 서문표는 업의 현령으로 이름을 천
하에 날리고, 그 은택은 후대에까지 흘러 끊어진 적이 없었으니 어찌 어진 대부라 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전하는 말에 ‘자산(子産)이 정(鄭) 나라를 다스리자 백성들이 그를 속일 수가 없었고, 자천(子賤)이 선보(單父)를
다스리자 백성들이 차마 그를 속이지 못했으며, 서문표가 업을 다스리자 백성들이 감히 그를 속이지 못했다’라고
했다. 세 사람의 재능 가운데 누가 가장 뛰어난 것인가? 다스리는 길을 아는 자는 마땅히 이를 분별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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