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四三. 趙世家[趙武]
及趙武冠, 為成人, 程嬰乃辞諸大夫, 謂趙武曰:「昔下宮之難, 皆能死. 我非不能死, 我思立趙氏之後. 今趙武既立, 為成人, 复故位, 我将下報趙宣孟與公孫杵臼.」 趙武啼泣頓首固請, 曰:「武願苦筋骨以報子至死, 而子忍去我死乎!」 程嬰曰:「不可. 彼以我為能成事, 故先我死;今我不報, 是以我事為不成.」遂自殺. 趙武服斉衰三年, 為之祭邑, 春秋祠之, 世世勿絶.1)
조무가 20세가 되어 관례를 행하고 성인이 되자, 정영이 여러 대부들에게 하직하며 조무에게 “그 전 하궁의 난 때 사람들은 모두 순사(殉死)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죽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저는 조씨의 후예를 부양해 가업을 잇게 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당신께서 가업을 잇고 성인이 되었으며 원래의 작위를 되찾았으니 저는 장차 지하에 가서 조선맹과 공손저구에게 보고하고자 합니다.”라 했다.
조무가 흐느끼며 머리를 조아려 한사코 “제가 모든 힘을 다해 그대가 죽을 때까지 보답하고자 하는데, 그대가 차마 저를 버리고 죽을 수가 있습니까?”라고 하며 말렸다. 정영은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 공손저구는 제가 대사를 성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보다 먼저 죽은 것입니다. 이제 제가 가서 보고하지 않으면 그는 제가 맡은 일을 완수하지 못한 것으로 알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결국 자살했다.
조무는 3년 동안 재최(齊衰)를 입었으며 그를 위해서 제읍(祭邑)을 마련해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내고 대대로 끊이지 않게 했다.
趙氏复位十一年, 而晉厲公殺其大夫三郤. 欒書畏及, 乃遂弑其君厲公, 更立襄公曾孫周,2) 是為悼公. 晉由此大夫稍彊.
조씨가 복위한 지 11년 만에 진 여공(晉厲公)은 극씨(郤氏) 대부 3명을 죽였다. 난서(欒書)는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해 급기야는 군주 여공을 시해하고 양공의 증손 주(周)를 바꾸어 세우니 그가 바로 도공(悼公)이다. 진나라는 이로부터 대부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졌다.
趙武続趙宗二十七年, 晉平公立. 平公十二年, 而趙武為正卿. 十三年, 呉延陵季子使於晉, 曰:「晉国之政卒帰於趙武子、韓宣子、魏献子之後矣.」趙武死, 謚為文子.
조무가 조씨 종족을 유지한 지 27년 만에 진 평공(晉平公)이 즉위했다. 평공 12년에 조무는 정경(正卿)이 되었다. 13년에 오(吳)나라의 연릉계자(延陵季子)가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와서는 “진나라의 정권이 마침내는 조무자(趙武子), 한선자(韓宣子), 위헌자(魏獻子)의 후손에게 돌아가겠구나!”라 했다. 조무가 죽으니 시호를 문자(文子)라 했다.
文子生景叔.3) 景叔之時, 斉景公使晏嬰於晉,4) 晏嬰與晉叔向語. 嬰曰:「斉之政後卒帰田氏.」叔向亦曰:「晉国之政将帰六卿. 六卿侈矣, 而吾君不能恤也.」
문자는 경숙(景叔)을 낳았다. 경숙 때에 제 경공(齊景公)이 안영(晏嬰)을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니 안영과 숙향(叔向)이 서로 이야기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안영이 “앞으로 제나라의 정권은 결국 전씨(田氏)에게로 돌아가게 될 것이오.”라고 말했다. 숙향도 “진(晉)나라의 정권은 장차 육경(六卿)에게로 돌아갈 것이오. 육경이 오만방자하거늘 우리 군왕은 걱정할 줄도 모른다오.”라 했다.
趙景叔卒, 生趙鞅, 是為簡子.
조경숙이 죽자 그가 낳은 아들 조앙(趙鞅)이 즉위했다. 그가 바로 간자(簡子)이다.
각주
1 集解新序曰:「程嬰、公孫杵臼可謂信友厚士矣. 嬰之自殺下報, 亦過矣.」 正義今河東趙氏祠先人, 猶別舒一座祭二士矣.
2 集解徐広曰:「年表云襄公孫也.」 索隠晉系家襄公少子, 名周.
3 索隠系本云:「景叔名成.」
4 集解徐広曰:「平公之十九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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