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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史記世家

史記 卷四三. 趙世家[趙衰 ~ 趙朔]

by 柳川 2019. 6. 23.

卷四三. 趙世家[趙衰 ~ 趙朔]

 

 

 

趙衰卜事晉献公及諸公子, 莫吉;卜事公子重耳, 吉, 即事重耳. 重耳以驪姫之亂亡奔翟, 趙衰従. 翟伐廧咎如, 得二女, 翟以其少女妻重耳, 長女妻趙衰而生盾. 初, 重耳在晉時, 趙衰妻亦生趙同、趙括、趙嬰斉. 趙衰従重耳出亡, 凡十九年, 得反国. 重耳為晉文公, 趙衰為原大夫, 居原, 任国政.1) 文公所以反国及霸, 多趙衰計策, 語在晉事中.

 

조최는 진 헌공과 여러 공자 중 누구를 섬기면 좋을지 점을 쳐서 결정하려 했으나 점괘가 모두 길하지 않았다. 다만, 공자 중이(重耳)를 섬기면 길하다는 점괘가 나왔으므로 바로 그를 섬기었다. 중이는 여희(驪姬)의 난으로 인해 적(翟) 땅으로 도망가자 조최가 그를 따랐다. 적인(翟人)이 장고여(嗇咎如)를 침략해 두 여자를 잡아 젊은 여자는 중이에게 시집을 보내고, 나이 든 여자는 조최에게 시집을 보냈다. 조최는 조순(趙盾)을 낳았다.

 

당초 중이가 진(晉)나라에 있을 때, 조최와 본부인 사이에는 이미 조동(趙同), 조괄(趙括), 조영제(趙嬰齊)가 있었다. 조최는 중이를 따라 망명생활을 했는데 19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진(晉)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중이가 진 문공으로 즉위하자, 조최는 원(原)의 대부(大夫)가 되어 원에 거주하면서 국정을 돌보았다. 문공이 귀국하고 또한 패자(覇者)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까닭은 대부분 조최의 계책에 의한 것이었다. 이에 관한 사적은 「진세가(晉世家)」에 기록되어 있다.

 

趙衰既反晉, 晉之妻固要迎翟妻, 而以其子盾為適嗣, 晉妻三子皆下事之. 晉襄公之六年, 而趙衰卒, 謚為成季.

 

 

조최가 진나라로 돌아오자 진나라에 있던 본부인이 적(翟) 땅에서 얻은 부인을 데려오라고 한사코 권하며, 또 그녀의 소생인 조순을 적자(嫡子)로 삼으니 진나라 본부인의 세 아들은 모두 아래 자리에서 조순을 받들게 되었다. 진 양공(晉襄公) 6년에 조최가 죽자 시호(諡號)를 성계(成季)라 했다.

 

 

각주

1 索隠系本云:「成季徙原.」宋忠云:「今鴈門原平県也.」 正義括地志云:「原平故城, 漢原平県也, 在代州崞県南三十五里.」崞音郭. 按:宋忠説非也. 括地志云:「故原城在懐州済原県西北二里. 左傳云襄王以原賜晉文公, 原不服, 文公伐原以示信, 原降, 以趙衰為原大夫, 即此也. 原本周畿内邑也.」

 

 

권43. 조세가(趙世家) 조순(趙盾), 영공(霊公)

 

趙盾代成季任国政二年而晉襄公卒, 太子夷皐年少. 盾為国多難, 欲立襄公弟雍. 雍時在秦, 使使迎之. 太子母1)日夜啼泣, 頓首謂趙盾曰:「先君何罪, 釈其適子而更求君?」趙盾患之, 恐其宗與大夫襲誅之, 廼遂立太子, 是為霊公, 発兵距所迎襄公弟於秦者. 霊公既立, 趙盾益専国政.

 

조순이 성계를 대신해 국정을 맡은 지 2년 만에 진 양공이 죽었다. 태자 이고(夷皐)가 아직 나이가 어렸기에, 조순은 국가에 어려운 일이 많은 것을 감안해 양공의 동생 옹(雍)을 옹립하려고 했다. 옹은 당시 진(秦)나라에 있었으므로 사신을 보내 그를 영접하려고 했다.

 

그러자 태자의 어머니가 밤낮으로 울며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선군(先君)께서 무슨 죄를 지으셨기에 그의 적자를 버리고 달리 군주를 구하십니까?”라고 조순에게 말했다. 조순은 이 일로 고심하다가, 그녀의 종친(宗親)과 대부(大夫)들이 자기를 습격해 주살(誅殺)할까 두려워서 태자를 즉위시켰는데 그가 바로 영공(靈公)이다. 동시에 군대를 보내 양공의 동생을 영접하러 진(秦)나라에 간 일행을 돌아오지 못하게 막았다. 영공이 즉위하고 나자 조순은 더욱더 국정을 독점했다.

 

 

霊公立十四年, 益驕. 趙盾驟諫, 霊公弗聴. 及食熊蹯, 胹不熟, 殺宰人, 持其尸出, 趙盾見之. 霊公由此懼, 欲殺盾. 盾素仁愛人, 嘗所食桑下餓人反扞救盾, 盾以得亡. 未出境, 而趙穿弑霊公而立襄公弟黒臀, 是為成公. 趙盾复反, 任国政. 君子譏盾「為正卿, 亡不出境, 反不討賊」, 故太史書曰「趙盾弑其君」. 晉景公2)時而趙盾卒, 謚為宣孟, 子朔嗣.

 

영공은 재위한 지 14년이 지나자 날이 갈수록 오만해졌다. 조순이 여러 차례 간했으나 영공은 듣지 않았다. 한번은 곰발바닥 요리를 먹다가 잘 익지 않았다며 요리사를 죽이고는 그 시체를 들고 나가게 했는데 조순이 그것을 보았다. 이 일로 겁이 난 영공은 조순을 죽이려고 했다.

 

본디 인자하고 동정심이 많은 조순은 일찍이 뽕나무 아래에 굶주려 쓰러진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 살려준 적이 있었는데, (조순이 위험에 처하자) 그 사람이 조순을 보호해 구해 주어, 조순은 비로소 도망칠 수가 있었다. 그가 아직 국경을 넘기도 전에 조천(趙穿)이 영공을 시해하고 양공의 동생 흑둔(黑臀)을 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바로 성공(成公)이다. 조순은 다시 돌아와서 국정에 임했다. 군자들은 “정경(正卿)의 몸으로서 도망하면서 국경도 넘지 않고, 되돌아와서는 역적을 주벌(誅伐)하지도 않았다.”라고 조순을 비난했다. 그래서 태사(太史)는 “조순이 그의 군주를 시해했다.”라고 적었다. 진 경공(晉景公) 때에 조순이 죽자 시호를 선맹(宣孟)이라고 했고 그의 아들 삭(朔)이 뒤를 이었다.

 

각주

1 索隠穆嬴也.

2 索隠成公之子, 名拠.

 

권43. 조세가(趙世家) 조삭(趙朔)

 

趙朔, 晉景公之三年, 朔為晉将下軍救鄭, 與楚荘王戦河上. 朔娶晉成公姊為夫人.

 

조삭은 진 경공 3년에 진(晉)나라의 하군(下軍)을 거느리고 정(鄭)나라를 구원하러 갔다가 황하 강변에서 초 장왕(楚莊王)과 교전했다. 삭은 진 성공(晉成公)의 손위 누이를 부인으로 삼았다.

 

晉景公之三年, 大夫屠岸賈欲誅趙氏.1) 初, 趙盾在時, 夢見叔帯持要而哭, 甚悲;已而笑, 拊手且歌. 盾卜之, 兆絶而後好. 趙史援占之, 曰:「此夢甚悪, 非君之身, 乃君之子, 然亦君之咎. 至孫, 趙将世益衰.」屠岸賈者, 始有寵於霊公, 及至於景公而賈為司冦, 将作難, 乃治霊公之賊以致趙盾, 遍告諸将曰:「盾雖不知, 猶為賊首. 以臣弑君, 子孫在朝, 何以懲罪? 請誅之.」韓厥曰:「霊公遇賊, 趙盾在外, 吾先君以為無罪, 故不誅. 今諸君将誅其後, 是非先君之意而今妄誅. 妄誅謂之亂. 臣有大事而君不聞, 是無君也.」屠岸賈不聴. 韓厥告趙朔趣亡. 朔不肯, 曰:「子必不絶趙祀, 朔死不恨.」韓厥許諾, 称疾不出. 賈不請而擅與諸将攻趙氏於下宮, 殺趙朔、趙同、趙括、趙嬰斉, 皆滅其族.

 

같은 해에 대부 도안고(屠岸賈)가 조씨를 주멸(誅滅)하려고 했다. 당초 조순이 살아 있을 때 꿈을 꾸었는데 숙대(叔帶)가 자기의 허리를 끌어안고 매우 슬피 울다가 잠시 후 크게 웃으며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조순이 점을 쳐보니 불로 지진 거북 껍질의 균열이 끊어졌다가 후에 다시 좋아졌다. 조(趙)나라의 사관(史官) 원(援)이 해석하기를 “이 꿈은 매우 흉한 것으로 당신 대(代)가 아니고 당신 아들 대에 들어맞겠으나, 그것 역시 당신의 잘못 때문입니다. 손자 대에 이르러서는 조씨 가문이 더욱 쇠락할 것입니다.”라 했다.

 

 

도안고라는 사람은 처음에 영공의 총애를 받다가 경공 때에 이르러 사구(司寇)가 되었다. 난을 일으키기 위해서 먼저 영공을 시해한 역적을 처벌한다는 빌미로 조순을 연루시켰다. 그리고는 두루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조순이 비록 사건의 내막을 몰랐으나 역시 역적의 두목입니다. 신하된 자로서 군주를 시해하고도 그의 자손이 조정에서 관직을 맡고 있으니 어떻게 죄 있는 사람들을 처벌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씨를 주멸합시다.”라고 했다. 한궐(韓厥)이 “영공께서 살해를 당하실 때 조순은 외지에 있었습니다. 우리의 선군(先君)께서 그가 무죄라고 여기시어 그를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여러분께서 그의 후손을 죽이시려고 하는 것은 선군의 뜻이 아니고 멋대로 주살하는 것입니다. 함부로 주살하는 것은 난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하가 큰일을 도모하는 데 군주에게 알리지 않음은 군주를 안중에 두지도 않은 것입니다.”라고 했으나 도안고는 듣지 않았다.

 

한궐이 조삭에게 빨리 도망가라고 일렀다. 그러나 조삭은 도망가려고 하지 않으면서 “그대가 틀림없이 조씨 가문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해주신다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소.”라고 말했다. 이를 응낙한 한궐은 병을 핑계삼아 외출하지 않았다. 도안고는 경공에게 지시도 청하지 않고서는 제멋대로 여러 장군들과 하궁(下宮)에서 조씨를 공격해 조삭(趙朔), 조동(趙同), 조괄(趙括), 조영제(趙嬰齊) 등을 죽였다. 마침내 그 일족을 모두 멸했다.

 

趙朔妻成公姊, 有遺腹, 走公宮匿. 趙朔客曰公孫杵臼, 杵臼謂朔友人程嬰曰:「胡不死?」程嬰曰:「朔之婦有遺腹, 若幸而男, 吾奉之;即女也, 吾徐死耳.」居無何, 而朔婦免身, 生男. 屠岸賈聞之, 索於宮中. 夫人置児叱罅中, 祝曰:「趙宗滅乎, 若号;即不滅, 若無声.」及索, 児竟無声. 已脱, 程嬰謂公孫杵臼曰:「今一索不得, 後必且复索之, 柰何?」公孫杵臼曰:「立孤與死孰難?」程嬰曰:「死易, 立孤難耳.」公孫杵臼曰:「趙氏先君遇子厚, 子彊為其難者, 吾為其易者, 請先死.」乃二人謀取他人嬰児負之, 衣以文葆,2) 匿山中. 程嬰出, 謬謂諸将軍曰:「嬰不肖, 不能立趙孤. 誰能與我千金, 吾告趙氏孤処.」諸将皆喜, 許之, 発師随程嬰攻公孫杵臼. 杵臼謬曰:「小人哉程嬰! 昔下宮之難不能死, 與我謀匿趙氏孤児, 今又売我. 縦不能立, 而忍売之乎!」抱児呼曰:「天乎天乎! 趙氏孤児何罪? 請活之, 独殺杵臼可也.」諸将不許, 遂殺杵臼與孤児. 諸将以為趙氏孤児良已死, 皆喜. 然趙氏真孤乃反在, 程嬰卒與倶匿山中.

 

조삭의 아내는 성공(成公)의 누나로 그 당시 임신 중이었는데 경공의 궁으로 도망가 숨었다. 조삭의 문객 중에 공손저구(公孫杵臼)라는 자가 있었다. 공손저구가 조삭의 친구 정영(程嬰)에게 “왜 같이 죽지 않는가?”라고 물으니, 정영은 “조삭의 부인이 임신 중인데 만약 다행히 아들을 낳으면 내가 부양하고, 딸을 낳는다면 나는 조금 천천히 죽을 따름이다.”라고 대답했다. 얼마 되지 않아 조삭의 부인이 분만했는데 아들을 낳았다.

 

도안고가 이 소식을 듣고 궁중을 수색했다. 부인이 갓난아기를 속바지 가랑이 사이에 넣고 “조씨 종족이 멸망하려면 네가 크게 울고 멸망하지 않으려면 아무 소리도 내지 말아라.”라고 기도했다. 수색할 때에 아이는 의외로 울지 않았다. 위험을 벗어나자 정영이 공손저구에게 “이번 한 차례 수색해 잡지 못했으니 다음에 또 수색할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할까?”라고 하자, 공손저구는 “고아를 부양하는 일과 죽는 일 중 어느 것이 어려운가?”라고 물었다. 정영이 “죽는 일은 쉬우나 고아를 부양하는 일은 어렵지”라고 하니, 공손저구가 “조씨의 선군이 당신을 후대했으니 당신은 힘을 다해서 어려운 일을 맡아주게. 나는 쉬운 일을 담당해 먼저 죽을 것일세.”라 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상의한 끝에 다른 사람의 아이를 데려다 등에 업고 화려한 강보로 덮고서는 산속에 숨었다.

 

정영이 산에서 내려와 거짓으로 여러 장군에게 이르기를 “이 정영은 불초해 조씨 고아를 부양할 능력이 없습니다. 누가 나에게 천금을 주신다면 조씨 고아가 숨어 있는 장소를 말해드리겠습니다.”라 했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며 그 조건을 수락하고 군사를 출동시켜 정영을 따라가서 공손저구를 공격했다. 공손저구가 거짓으로 “이 소인배 정영아! 예전에 하궁의 난(亂)에서 순사하지 않고 나와 더불어 조씨 고아를 숨기기로 상의했건만, 이제 와서 또 나를 배반하는구나. 아무리 네가 부양할 수 없었기로서니 차마 그를 배신할 수가 있단 말이냐?”라고 욕하며 아이를 안고 “하늘이여! 하늘이여! 조씨 고아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제발 그를 살려주시고 저만 죽여주소서.”라고 외쳤다.

 

여러 장수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마침내 공손저구와 고아를 죽였다. 여러 장수들은 조씨 고아가 정말로 죽은 줄 알고 모두 기뻐했다. 그러나 진짜 조씨 고아는 오히려 여전히 살아 있었으니 정영은 마침내 그와 함께 산속에 숨어있었던 것이다.

 

居十五年, 晉景公疾, 卜之, 大業之後不遂者為祟. 景公問韓厥, 厥知趙孤在, 乃曰:「大業之後在晉絶祀者, 其趙氏乎? 夫自中衍者皆嬴姓也. 中衍人面鳥噣, 降佐殷帝大戊, 及周天子, 皆有明徳. 下及幽厲無道, 而叔帯去周適晉, 事先君文侯, 至于成公, 世有立功, 未嘗絶祀. 今吾君独滅趙宗, 国人哀之, 故見亀策. 唯君図之.」景公問:「趙尚有後子孫乎?」韓厥具以実告. 於是景公乃與韓厥謀立趙孤児, 召而匿之宮中. 諸将入問疾, 景公因韓厥之衆以脅諸将而見趙孤. 趙孤名曰武. 諸将不得已, 乃曰:「昔下宮之難, 屠岸賈為之, 矯以君命, 并命群臣. 非然, 孰敢作難! 微君之疾, 群臣固且請立趙後. 今君有命, 群臣之願也.」於是召趙武、程嬰遍拝諸将, 遂反與程嬰、趙武攻屠岸賈, 滅其族. 复與趙武田邑如故.3)

 

15년이 흐른 후, 진 경공이 병이 나자 점을 쳤다. 대업(大業)의 후대가 순조롭지 못해 재앙이 생긴다는 점괘가 나왔다. 경공이 한궐에게 물으니 한궐은 조씨 고아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아는지라 “대업의 후대자손 중에 진(晉)나라에서 제사가 끊긴 것은 조씨가 아닙니까? 중연(中衍)의 후대는 모두 성이 영(嬴)입니다. 중연은 사람의 얼굴에 입은 새부리 모양으로 인간 세상에 내려와 은나라 왕 대무(大戊)를 보좌했으며 그 후 손은 주(周)나라의 천자를 보좌하는 등 모두 빛나는 덕행이 있었습니다. 그 후 유왕(幽王), 여왕(厲王)이 무도하자 숙대는 주나라를 떠나 진(晉)나라로 와서 선군 문후(文侯)를 섬겼고 성공(成公)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공을 세웠으며 제사가 끊긴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오직 군왕께서 조씨 종족을 멸하셨으니 백성들이 모두 그것을 슬퍼한 까닭에 거북 껍질과 시초(蓍草)에 나타난 것입니다. 다시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라 했다.

 

 

경공이 “조씨 가문에 아직 후대 자손이 있는가?”라고 묻자, 한궐은 모두 이실직고했다. 그러자 경공은 조씨 고아를 세우기로 한궐과 상의하고, 조씨 고아를 불러다가 궁중에 감추어두었다. 여러 장수들이 문병 차 입궁하자, 경공은 한궐의 많은 병력을 이용해 조씨 고아를 만날 수 있도록 장수들을 협박했다. 조씨 고아의 이름은 무(武)였다.

 

장수들은 마지못해 “지난번 하궁의 난은 도안고가 책동한 것으로 군주의 명이라고 사칭해 여러 신하에게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누가 감히 난을 일으켰겠습니까? 만약 군왕께서 병이 나지 않으셨더라도 저희들은 본래 조씨의 후예를 세울 것을 청원하려고 했습니다. 지금 군왕께서 명령하시니, 그것은 저희들이 진실로 바라던 바입니다.”라 했다. 이에 조무(趙武)와 정영을 불러 여러 장수들에게 두루 절하게 하니, 여러 장수들이 이번에는 반대로 정영, 조무와 함께 도안고를 공격해 그 종족을 주멸했다. 경공은 다시 원래대로 조씨의 옛 전읍(田邑)을 조무에게 하사했다.

 

각주

1 集解徐広曰:「按年表, 救鄭及誅滅, 皆景公三年.」

2 集解徐広曰:「小児被曰葆.」

3 集解徐広曰:「推次, 晉复與趙武田邑, 是景公之十七年也. 而乃是春秋成公八年経書『晉殺其大夫趙同、趙括』, 左傳於此説立趙武事者, 注云『終説之耳, 非此年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