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四四. 魏世家[惠王]
十六年, 伐楚, 取魯陽.1) 武侯卒,2) 子罃立, 是為恵王.
16년에는 초(楚)나라를 공격해 노양(魯陽)을 취했다. 무후가 죽고 자앵(子罃)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혜왕(惠王)이다.
恵王元年, 初, 武侯卒也, 子罃與公中緩3)争為太子. 公孫頎4)自宋入趙, 自趙入韓, 謂韓懿侯5)曰:「魏罃與公中緩争為太子,6) 君亦聞之乎? 今魏罃得王錯,7) 挟上党, 固半国也. 因而除之,8) 破魏必矣, 不可失也.」懿侯説, 乃與趙成侯9)合軍并兵以伐魏, 戦于濁沢,10) 魏氏大敗, 魏君囲. 趙謂韓曰:「除魏君, 立公中緩, 割地而退, 我且利.」韓曰:「不可. 殺魏君, 人必曰暴;割地而退, 人必曰貪. 不如両分之. 魏分為両, 不彊於宋、衛, 則我終無魏之患矣.」趙不聴. 韓不説, 以其少卒夜去. 恵王之所以身不死, 国不分者, 二家謀不和也. 若従一家之謀, 則魏必分矣. 故曰「君終無適子, 其国可破也」.11)
혜왕 원년 초에 무후가 죽고, 자앵과 공중완(公中緩)이 태자(太子) 자리를 다투었다. 공손기(公孫頎)가 송(宋)나라로부터 조(趙)나라로, 다시 조나라에서 한(韓)나라로 들어와서 한 의후(韓懿侯)에게 이르기를 “위앵과 공중완이 태자 자리를 다투는데, 왕께서도 들으셨습니까? 지금 위앵은 왕착(王錯)을 얻어 상당(上黨)을 통제하고 있으니, 실로 이것은 위나라의 반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제거한다면 위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은 정해진 것입니다. 이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라 했다.
의후가 기뻐하며 이에 조 성후(趙成侯)와 연합해 위나라를 공격하니, 탁택(濁澤)에서 전투가 벌어져 위씨가 대패했고, 위나라 군이 포위당했다. 조(趙)나라가 한(韓)나라에게 이르기를 “위나라 왕을 제거하고 공자 완을 즉위시킨 후에 위나라 땅을 떼어 가지고 철수하면 우리에게 이롭습니다.”라고 하니, 한(韓)나라가 말하기를 “안 됩니다. 위나라 왕을 살해하면 남들이 우리를 잔악하다고 말할 것이며, 땅을 떼어 가지면 남들이 우리를 탐욕스럽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위나라를 둘로 나누는 것만 못합니다. 위나라를 둘로 나누면 송, 위(衛) 나라보다도 강하지 못하니, 우리는 영원토록 위나라로부터의 우환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으나, 조 성후가 듣지 않았다. 한 의후가 불쾌해해, 정예 부대를 이끌고 한밤에 철수했다. 혜왕(惠王)이 죽지 않고, 나라가 둘로 나뉘지 않은 까닭은 두 집의 모의가 불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만약에 한집의 모의를 따랐다면 위나라는 반드시 나누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왕이 적자가 없으면, 그 나라는 쳐부술 만하다.”라고 하는 것이다.
二年, 魏敗韓于馬陵, 敗趙于懐. 三年, 斉敗我観.12) 五年, 與韓会宅陽.13) 城武堵. 為秦所敗.14) 六年, 伐取宋儀台.15) 九年, 伐敗韓于澮. 與秦戦少梁, 虜我将公孫痤,16) 取龐. 秦献公卒, 子孝公立.
2년에는 위나라가 마릉(馬陵)에서 한(韓)나라를 패배시켰고, 회(懷)에서 조(趙)나라를 패배시켰다. 3년에는 제나라가 위나라의 관(觀) 땅에서 위나라 군을 물리쳤다. 5년에는 한 의후와 택양(宅陽)에서 회동했다. 무도(武堵)에 성을 축조했다. 한나라, 위나라 군대가 진(秦)나라에게 패배당했다. 6년에는 송(宋)나라의 의대(儀臺)를 공격해 취했다. 9년에는 회(澮) 땅에서 한나라를 패배시켰다. 진나라와 소량(少梁)에서 회전했는데, 진나라는 위장(魏將) 공손좌(公孫座)를 포로로 잡아갔고, 방(龐) 땅을 취했다. 진 헌공이 죽자 아들 효공(孝公)이 즉위했다.
十年, 伐取趙皮牢. 彗星見. 十二年, 星昼墜, 有声.
10년에는 조나라를 공격해 피뢰(皮牢)를 취했다. 혜성이 나타났다. 12년에는 유성이 낮에 떨어져 큰 소리가 났다.
十四年, 與趙会鄗. 十五年, 魯、衛、宋、鄭君來朝.17) 十六年, 與秦孝公会(社)[杜]平. 侵宋黄池, 宋复取之.
14년에는 조 성후와 호(鄗) 땅에서 회맹했다. 15년에는 노(魯), 위(衛), 송(宋), 정(鄭) 나라의 군주가 위 혜왕을 알현하러 왔다. 16년에는 진 효공(秦孝公)과 두평(杜平)에서 만났다. 송나라를 침공해 황지(黃池)를 빼앗았다가, 다시 송나라에 빼앗겼다.
十七年, 與秦戦元里, 秦取我少梁. 囲趙邯鄲. 十八年, 抜邯鄲. 趙請救于斉, 斉使田忌、孫臏救趙, 敗魏桂陵.
17년에는 진나라와 원리(元里)에서 전투해, 진나라가 위나라의 소량을 차지했다. 위나라가 조나라의 한단을 포위했다. I8년에는 한단을 함락했다. 조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해, 제나라는 전기(田忌), 손빈(孫臏)으로 하여금 조나라를 구원하게 해 계릉(桂陵)에서 위나라 군을 격퇴시켰다.
十九年, 諸侯囲我襄陵. 築長城, 塞固陽.18)
19년에는 제후들이 위나라의 양릉(襄陵)을 포위했다. 위나라는 장성을 축성하고, 고양(固陽)에 관새(關塞)를 만들었다.
二十年, 帰趙邯鄲, 與盟漳水上.19) 二十一年, 與秦会彤. 趙成侯卒.20) 二十八年, 斉威王卒. 中山君相魏.21)
20년에는 한단을 조나라에 되돌려주고, 장수(漳水) 위에서 맹약을 맺었다. 21년에는 동(彤)에서 진나라와 회동했다. 조 성후가 죽었다. 28년에는 제 위왕이 죽었다. 중산군(中山君)이 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三十年, 魏伐趙,22) 趙告急斉. 斉宣王用孫子計, 救趙撃魏. 魏遂大興師, 使龐涓将, 而令太子申為上将軍. 過外黄, 外黄徐子23)謂太子曰:「臣有百戦百勝之術.」太子曰:「可得聞乎?」客曰:「固願效之.」曰:「太子自将攻斉, 大勝并莒,24) 則富不過有魏, 貴不益為王. 若戦不勝斉, 則萬世無魏矣. 此臣之百戦百勝之術也.」太子曰:「諾, 請必従公之言而還矣.」客曰:「太子雖欲還, 不得矣. 彼勧太子戦攻, 欲啜汁者衆.25) 太子雖欲還, 恐不得矣.」太子因欲還, 其御曰:「将出而還, 與北同.」太子果與斉人戦, 敗於馬陵.26) 斉虜魏太子申, 殺将軍涓, 軍遂大破.
30년에는 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가 제나라에 급히 고했다. 제 선왕(齊宣王)이 손자병법을 사용해 조나라를 구하고 위나라를 격퇴시켰다. 위나라는 이에 군대를 크게 동원해 방연(龐涓)을 장수로 삼고, 태자 신(申)을 상장군으로 삼았다. 위나라 군대가 외황(外黃)을 지날 때, 외황 사람인 서자(徐子)가 태자에게 이르기를 “신에게는 백전백승의 전략이 있습니다.”라고 하니, 태자가 말하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라 했다.
서자가 말하기를 “본디 태자께 들려드리고자 했습니다.”라고 하며 말하기를 “태자께서 친히 장군으로써 제나라를 공격해 대승을 거두고 거(莒) 땅을 병점한다면, 이는 위나라의 부를 차지하는 것에 불과하고, 귀함도 위나라 왕이 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에 제나라에 승리하지 못한다면, 차후로는 위나라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말하는 백전백승의 전략입니다.”라고 하니, 태자가 말하기를 “좋소. 반드시 공의 말에 따라서 철군하게 하겠소.”라 했다.
서자가 말하기를 “태자께서 비록 철퇴하고자 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태자로 하여금 전쟁을 하게 권한 이들 중에는 공을 세우고자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태자께서 비록 철수하고자 해도, 아마 그리 되지는 않을 듯싶습니다.” 과연 태자가 철수하려고 하니, 그의 어자(御者)가 말하기를 “출정하려다가 귀환하는 것은 패배하는 것과 같습니다.”라 했다. 태자는 결국 제나라 군과 교전을 했고, 마릉(馬陵)에서 패했다. 제나라 군이 태자신을 포로로 삼고, 장수 방연을 죽임으로써 위나라 군은 이에 대패했다.
三十一年, 秦、趙、斉共伐我,27) 秦将商君詐我将軍公子卬而襲奪其軍, 破之. 秦用商君, 東地至河, 而斉、趙數破我, 安邑近秦, 於是徙治大梁.28) 以公子赫為太子.
31년에는 진(秦), 조(趙), 제(齊) 삼국이 합동으로 위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의 장수 상앙(商鞅)이 위나라의 장군 공자 인(印)을 속여 그의 군대를 빼앗고, 그를 격파했다. 진나라가 상앙을 임용해, 국토가 동으로는 황하에 이르렀다. 제와 조 두 나라가 위나라를 여러 차례 격파하니 안읍(安邑)이 진나라에 가까워서 대량(大梁)으로 천도했다. 공자 혁(赫)을 태자로 삼았다.
三十三年, 秦孝公卒, 商君亡秦帰魏, 魏怒, 不入. 三十五年, 與斉宣王会平阿南.29)
위 혜왕 33년에는 진 효공(秦孝公)이 죽고, 상앙이 진나라에서 도망해 위(魏)나라에 투항하려고 했다. 위 혜왕이 노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35년에는 제 선왕과 평아(平阿)의 남쪽에서 회맹했다.
恵王數被於軍旅, 卑礼厚幣以招賢者. 鄒衍、淳于髡、孟軻皆至梁. 梁恵王曰:「寡人不佞, 兵三折於外, 太子虜, 上将死, 国以空虚, 以羞先君宗廟社稷, 寡人甚醜之, 叟不遠千里,30) 辱幸至獘邑之廷, 将何利吾国?」孟軻曰:「君不可以言利若是. 夫君欲利則大夫欲利, 大夫欲利則庶人欲利, 上下争利, 国則危矣. 為人君, 仁義而已矣, 何以利為!」
혜왕이 여러 차례 전쟁에서의 고배를 마신 뒤 공손한 예절과 후한 하사품으로 현자(賢者)들을 초빙했다. 추연(鄒衍), 순우곤(淳于髡), 맹가(孟軻) 등이 모두 대량(大梁)에 모였다.
양 혜왕(梁惠王)이 말하기를 “과인이 재주가 없어서 세 번에 걸쳐서 장병들을 잃고, 태자가 포로가 되었으며, 상장(上將)이 전사했으니, 나라가 공허하고, 선왕과 종묘사직에 치욕을 주어 과인이 심히 부끄럽소. 노인장께서 천리를 멀다 하지 않으시고 우리나라에 왕림해 주셨으니, 장차 이 나라에 이로움이 있겠소?”라고 하니, 맹가가 말하기를 “왕께서는 이와 같이 이로움(利)에 대해서 말씀하지 마십시오. 왕께서 이로움을 바라신다면, 대부들도 이로움을 바랄 것이며, 대부들이 이로움을 바란다면, 평민들도 이로움을 바랄 것이니, 상하가 서로 이로움만 다툰다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입니다. 왕이 되는 데에는 인(仁)과 의(義)가 있을 따름이지, 어찌 이(利)를 바라십니까?”라 했다.
三十六年, 复與斉王会甄. 是歳, 恵王卒,31) 子襄王立.32)
36년에는 제나라 왕과 견(甄)에서 다시 회맹했다. 이해에 혜왕이 죽고, 아들 양왕(襄王)이 즉위했다.
각주
1 正義今汝州魯山県也.
2 索隠按紀年, 武侯二十六年卒.
3 正義中音仲.
4 索隠音祈.
5 索隠哀侯之子.
6 索隠按:紀年「武侯元年封公子緩. 趙侯種、韓懿侯伐我, 取蔡, 而恵王伐趙, 囲濁陽. 七年, 公子緩如邯鄲以作難」, 是説此事矣.
7 集解徐広曰:「汲冢紀年恵王二年, 魏大夫王錯出奔韓也.」
8 集解徐広曰:「除, 一作『倍』.」 正義按:除, 除魏罃及王錯也.
9 索隠系本云:「成侯名種.」
10 集解徐広曰:「長社有濁沢.」
11 索隠此蓋古人之言及俗説, 故云「故曰」.
12 集解徐広曰:「斉世家云献観以和斉. 年表曰伐魏取観. 今之衛県也.」 索隠田完系家云:「敗魏於濁津而囲恵王, 恵王請献観以和解.」 正義観音館. 魏州観城県, 古之観国. 国語注:「観国, 夏啓子太康第五弟之所封也, 夏衰, 滅之矣.」
13 正義括地志云:「宅陽故城一名北宅, 在鄭州滎陽県東南十七里也.」
14 集解徐広曰:「秦年表曰敗韓、魏洛陰.」
15 集解徐広曰:「一作『義台』.」 索隠按:年表作「義台」, 然義台見荘子, 司馬彪亦曰台名, 郭象云義台, 霊台.
16 集解徐広曰:「年表云虜我太子也.」
17 索隠按:紀年魯恭侯、宋桓侯、衛成侯、鄭釐侯來朝, 皆在十四年, 是也. 鄭釐侯者, 韓昭侯也. 韓哀侯滅鄭而徙都之, 改号曰鄭.
18 正義塞, 先代反. 括地志云:「棝陽県, 漢旧県也, 在銀州銀城県界.」按:魏築長城, 自鄭浜洛, 北達銀州, 至勝州固陽県為塞也. 固陽有連山, 東至黄河, 西南至夏、会等州. 棝音固矣.
19 正義邯鄲, 洺州県也. 漳, 水名. 漳水源出洺州武安県三門山也.
20 集解徐広曰:「年表云二十七年, 丹封名会. 丹, 魏大臣也.」
21 索隠按:魏文侯滅中山, 其弟守之, 後尋复国, 至是始令相魏. 其中山後又為趙所滅.
22 正義孫臏傳云「魏與趙攻韓, 韓告急斉」, 此文誤耳. 魏伐趙, 趙請救斉, 斉使孫臏救趙, 敗魏桂陵, 乃在十八年也.
23 集解劉向別錄曰:「徐子, 外黄人也.」外黄時属宋. 正義括地志云:「故圉城有南北二城, 在汴州雍丘県界, 本属外黄, 即太子申見徐子之地也.」
24 正義莒, 密州県也, 在斉東南. 言従西破斉, 并至莒地, 則斉土尽矣.
25 正義啜, 穿悦反. 汁, 之入反. 冀功勳者衆也.
26 集解徐広曰:「在元城.」 索隠徐広曰:「在元城.」按:紀年二十八年, 與斉田■戦于馬陵;上二年, 魏敗韓馬陵;十八年, 趙又敗魏桂陵. 桂陵與馬陵異処. 正義虞喜志林云:「馬陵在濮州鄄城県東北六十里, 有陵, 澗谷深峻, 可以置伏.」按:龐涓敗即此也. 徐説馬陵在魏州元城県東南一里, 龐涓敗非此地也. 田完世家云「宣王二年, 魏伐趙, 趙與韓親, 共撃魏, 趙不利, 戦於南梁. 韓氏請於斉, 斉使田忌、田嬰将, 孫子為師, 救韓、趙, 以撃魏, 大破之馬陵」. 按:南梁在汝州. 又此傳云「太子為上将軍, 過外黄」. 又孫臏傳云「魏與趙攻韓, 韓告急斉, 斉使田忌将而往, 直走大梁. 魏将龐涓聞之, 去韓而帰斉, 軍已過而西矣」. 按:孫子減灶退軍, 三日行至馬陵, 遂殺龐涓, 虜魏太子申, 大破魏軍, 當如虞喜之説, 従汴州外黄退至濮州東北六十里是也. 然趙、韓共撃魏, 戦困於南梁, 韓急, 請救於斉, 斉師走大梁, 敗魏馬陵, 豈合更渡河北, 至魏州元城哉? 徐説定非也.
27 索隠按:紀年「二十九年五月, 斉田■伐我東鄙. 九月, 秦衛鞅伐我西鄙. 十月, 邯鄲伐我北鄙. 王攻衛鞅, 我師敗績」是也. 然言二十九年, 不同.
28 集解徐広曰:「今浚儀.」駰案:汲冢紀年曰「梁恵成王九年四月甲寅, 徙都大梁」也. 索隠紀年以為恵王九年, 蓋誤也. 正義陳留風俗傳云「魏之都也, 畢萬十葉徙大梁」. 按:今汴州浚儀也.
29 集解地理志沛郡有平阿県也.
30 集解劉煕曰:「叟, 長老之称, 依皓首之言.」
31 索隠按紀年, 恵成王三十六年改元称一年, 未卒也.
32 索隠系本襄王名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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