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四六. 田敬仲完世家[湣王] 湣王元年, 秦使張儀與諸侯執政会于齧桑. 三年, 封田嬰於薛. 四年, 迎婦于秦. 七年, 與宋攻魏, 敗之観沢.
민왕 원년에는 진(秦)나라가 장의(張儀)를 시켜서 제후들의 재상들과 설상(齧桑)에서 회맹하게 했다. 3년에는 설(薛) 땅을 전영(田嬰)에게 봉했다. 4년에는 진나라에서 부인을 맞아들였다. 7년에는 송(宋)나라와 함께 위(魏)나라를 공격해, 관택(觀澤)에서 격퇴시켰다.
十二年, 攻魏. 楚囲雍氏,1) 秦敗屈丐. 蘇代謂田軫曰:「臣願有謁於公, 其為事甚完, 使楚利公, 成為福, 不成亦為福. 今者臣立於門, 客有言曰魏王謂韓馮、2)張儀曰:『煮棗将抜,3) 斉兵又進, 子來救寡人則可矣;不救寡人, 寡人弗能抜.』4)此特転辞也. 秦、韓之兵毋東, 旬余, 則魏氏転韓従秦, 秦逐張儀,5) 交臂而事斉楚, 此公之事成也.」田軫曰:「柰何使無東?」対曰:「韓馮之救魏之辞, 必不謂韓王曰『馮以為魏』, 必曰『馮将以秦韓之兵東卻斉宋, 馮因摶6)三国之兵, 乗屈丐之獘,7) 南割於楚, 故地必尽得之矣』. 張儀救魏之辞, 必不謂秦王曰『儀以為魏』, 必曰『儀且以秦韓之兵東距斉宋, 儀将摶三国之兵, 乗屈丐之獘, 南割於楚, 名存亡国, 実伐三川8)而帰, 此王業也』. 公令楚王9)與韓氏地, 使秦制和, 謂秦王曰『請與韓地, 而王以施三川,10) 韓氏之兵不用而得地於楚』. 韓馮之東兵之辞且謂秦何? 曰『秦兵不用而得三川, 伐楚韓以窘魏, 魏氏不敢東, 是孤斉也』. 張儀之東兵之辞且謂何? 曰『秦韓欲地而兵有案, 声威発於魏, 魏氏之欲不失斉楚者有資矣』. 魏氏転秦韓争事斉楚, 楚王欲而無與地,11) 公令秦韓之兵不用而得地, 有一大徳也.12) 秦韓之王劫於韓馮、張儀而東兵以徇服魏, 公常執左券13)以責於秦韓, 此其善於公而悪張子多資矣.」14)
12년에는 위(魏)나라를 공격했다. 초 나라 군이 옹지(雍氏)를 포위했고, 진나라가 초 나라 장수 굴개(屈丐)를 격퇴시켰다.
소대(蘇代)가 전진(田軫)에게 이르기를 “제가 선생을 배알하고자 함은 선생을 위해 멋진 일을 한 가지 할 것인즉, 초 나라로 하여금 당신께 이익이 되도록 할 것이니, 그것이 성사가 되어도 복을 얻는 것이요, 성사가 되지 않아도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근자에 제가 문에 서 있는데, 어떤 손님이 위(魏)나라 왕이 한풍(韓馮), 장의(張儀)에게 한 이야기를 이르기를 ‘자조(煮棗)는 곧 함락될 것이고, 제나라 군이 계속 진군하면, 그대들이 와서 과인을 구해 주면 되오. 과인을 구해 주지 않으면, 과인은 함락시킬 수가 없소’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특별히 전한 말입니다. 진과 한 나라의 군사들이 동으로 위나라를 구원하러 가기 전에, 10여 일 지나면, 위나라는 한나라를 떠나서 진나라에 복종할 것이고, 진나라는 장의의 계획을 좇아서 손을 잡고 제와 초 나라에 대처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선생이 성공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전진이 말하기를 “어떻게 진나라로 하여금 동쪽으로 출병하지 않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소대가 이렇게 대답했다. “한풍이 위나라를 구원하기 위해서 한 말은 필경 한나라 왕에게 ‘풍이 위나라를 구원하기 위해’가 아니고, ‘풍이 진과 한의 군대를 이용해, 동쪽의 제와 송을 격퇴시키고, 풍은 삼국의 군사를 규합해, 초 나라 장수 굴개가 지쳐 있는 틈을 타서, 남쪽 초 나라의 땅을 빼앗으면, 옛 땅을 완전히 되찾는 것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장의가 위나라를 구원하기 위해서 필경 진나라 왕에게 ‘의(儀)가 위나라를 구원하기 위해’라고 말하지 않고, ‘의가 진과 한 나라의 군대로서 동쪽의 제와 송 나라의 군대에 저항하게 하고, 의가 삼국의 군대를 취합해, 굴개가 실패한 틈을 타서, 남쪽의 초 나라 땅을 빼앗아야 합니다.
이것은 명목상으로는 망하는 나라를 보존하기 위함이나, 실질적으로는 한나라의 삼천(三川) 땅을 되찾는 것으로, 이것이 왕업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초 나라 왕으로 하여금 한나라의 영토를 주게 하고, 진나라로 하여금 강화조약을 맺도록 하며, 진나라 왕에게 말하기를 ‘초로 하여금 한나라 땅을 주게 하십시오. 왕께서는 삼천 지역에 군대를 포진하고, 한나라의 군대는 쓰지 않고 초 나라의 땅을 얻는 것입니다’라고 하십시오.”
“한풍이 동쪽으로 진군하는 것은 진나라 왕에게 어떻게 말합니까?” 소대가 대답해 말했다. “‘진나라의 군대는 쓰지 않고서 삼천을 얻고, 초와 한 나라를 공격해 위나라를 궁하게 하니, 위나라의 군대가 감히 동쪽으로 진군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제나라를 고립시키는 것입니다’라고 하십시오.” “장의가 군대를 동쪽으로 진군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이렇게 대답했다.
“‘진과 한 나라가 땅을 얻기 위해서 군대를 주둔시키고, 위나라에 성위(聲威)를 떨칠 것이고, 위나라는 제와 초 나라의 지원을 잃지 않고, 의지하려 할 것입니다’라고 하십시오. 위나라가 진과 한 나라로 돌아서려 하면서, 한편으로는 제와 초 나라와도 우호를 지키려는 것은, 초 나라 왕이 위나라로 하여금 자신을 받들도록 하는 욕심은 있으면서도 한나라의 땅은 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으로, 선생께서 진과 한나라의 군대를 쓰지 않고 땅을 얻을 수 있게 한다면, 양국에 커다란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국왕이 한풍과 장의의 속임수를 받아들여서 동쪽으로 군대를 파병해 위나라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면, 선생께서는 주도권을 잡고서 진과 한 나라에서 중책을 맡을 것으로, 이것이 바로 왕께서 선생을 좋아하고, 장의의 군사력 낭비를 증오하게 하는 것입니다.”
十三年, 秦恵王卒. 二十三年, 與秦撃敗楚於重丘.15) 二十四年, 秦使涇陽君質於斉. 二十五年, 帰涇陽君于秦. 孟嘗君薛文入秦, 即相秦. 文亡去. 二十六年,16) 斉與韓魏共攻秦, 至函谷軍焉. 二十八年, 秦與韓河外以和, 兵罷. 二十九年, 趙殺其主父. 斉佐趙滅中山.17)
13년에는 진 혜왕(秦惠王)이 죽었다. 23년에는 진나라와 함께 중구(重丘)에서 초 나라 군을 격퇴시켰다. 24년에는 진나라가 경양군(涇陽君)을 제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25년에는 경양군이 진나라로 돌아왔다. 맹상군(孟嘗君) 설문(薛文)이 진나라에 들어와서 재상에 임명되었지만 다시 진에서 도망쳤다. 26년에는 제와 한, 위 세 나라가 합동으로 진나라를 공격해,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러 주둔했다. 28년에는 진나라가 한나라에게 하외(河外)의 땅을 주고 강화를 맺어 군대를 철수시켰다. 29년에는 조나라 사람이 주부(主父) 무령왕(武靈王)을 죽였다. 제나라가 조나라를 도와서 중산국(中山國)을 멸망시켰다.
三十六年, 王為東帝, 秦昭王為西帝. 蘇代自燕來, 入斉, 見於章華東門.18) 斉王曰:「嘻, 善, 子來! 秦使魏冉致帝, 子以為何如?」対曰:「王之問臣也卒, 而患之所従來微, 願王受之而勿備称也. 秦称之, 天下安之, 王乃称之, 無後也. 且譲争帝名, 無傷也. 秦称之, 天下悪之, 王因勿称, 以収天下, 此大資也. 且天下立両帝, 王以天下為尊斉乎? 尊秦乎?」王曰:「尊秦.」曰:「釈帝, 天下愛斉乎? 愛秦乎?」王曰:「愛斉而憎秦.」曰:「両帝立約伐趙, 孰與伐桀宋之利?」19)王曰:「伐桀宋利.」対曰:「夫約鈞, 然與秦為帝而天下独尊秦而軽斉, 釈帝則天下愛斉而憎秦, 伐趙不如伐桀宋之利, 故願王明釈帝以収天下, 倍約賓秦, 無争重, 而王以其閒挙宋. 夫有宋, 衛之陽地危;20)有済西, 趙之阿東国危;21)有淮北, 楚之東国危;22)有陶、平陸, 梁門不開.23) 釈帝而貸之以伐桀宋之事, 国重而名尊, 燕楚所以形服, 天下莫敢不聴, 此湯武之挙也. 敬秦以為名, 而後使天下憎之, 此所謂以卑為尊者也. 願王孰慮之.」於是斉去帝复為王, 秦亦去帝位.
36년에는 제나라 왕이 동제(東帝)라고 칭했고, 진 소왕(秦昭王)이 서제(西帝)라고 칭했다. 소대(蘇代)가 연나라에서부터 제나라로 들어오다 장화궁(章華宮)의 동문(東門)에서 왕을 만났다.
제나라 왕이 말하기를 “아! 잘됐소. 선생이 오셨구려! 진나라가 위염(魏冉)을 시켜서 제호(帝號)를 가지고 오게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오?”라고 하니, 대답해 말하기를 “왕께서 신에게 하신 질문이 갑작스럽습니다. 화가 닥치는 것은 언제나 희미하고 서서히 오는 것이니, 왕께서는 제호를 받으시되 즉각 사용하지는 마십시오. 진나라가 제(帝)로 칭해 천하가 조용하면, 왕께서 제로 칭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황차 제(帝)를 사양해도 손해될 것이 없습니다. 진나라가 제(帝)로 칭해서 천하가 증오하면, 왕께서는 제로 칭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천하의 인심을 받을 것으로 큰 밑천이 됩니다. 황차 천하에 두 명의 제(帝)가 있다면, 왕께서는 천하가 제나라를 받들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진(秦)나라를 받들 것으로 생각하십니까?”라 했다.
왕이 말하기를 “진나라를 존경할 것이오.”라 했다. 대답해 말하기를 “제호를 포기하면, 천하가 제나라를 사랑하겠습니까? 아니면 진나라를 사랑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제나라를 사랑하고, 진나라를 증오할 것이오.”라 했다. 소대가 묻기를 “양제(兩帝)가 협약을 맺고서 조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이롭습니까? 아니면 송나라의 폭군을 공격하는 것이 이롭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송나라의 폭군을 공격하는 것이 이롭소.”라 했다.
소대가 대답해 말하기를 “대저 맹약은 균등하지만, 진나라와 함께 제(帝)라고 칭하면 천하는 진나라만을 존경하고, 제나라는 가벼이 대할 것이나, 제 칭호를 포기하면, 제나라를 사랑하고, 진나라를 증오할 것입니다. 조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송나라의 폭군을 공격하는 것보다 이로울 것이 없으므로, 원컨대 왕께서는 제 칭호를 포기하고 천하의 인심을 거두어서, 맹약을 어기고 진나라에 항거해, 두 번째 제 칭호를 다투지 마십시오. 그리고서 기회를 보아 송나라를 공격하십시오. 송나라를 차지하면 위(衛)나라의 양지(陽地)가 위험하며, 제서(濟西)를 차지하면 조나라의 아(阿) 땅이 위험하며, 회북(淮北)을 차지하면 초 나라의 하동(河東)이 위협을 받을 것이며, 도(陶)와 평륙(平陸)을 차지하면, 위나라가 성문을 감히 열지 못할 것입니다. 제 칭호를 포기하고, 대신 송나라의 폭군을 공격하면, 나라의 지위도 높아지고 명성도 높아져서, 연과 초 나라가 위세에 복종하게 되고, 천하에 저항하는 나라가 없을 것이니, 이는 탕왕(湯王), 주 무왕(周武王)의 업적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진나라를 존경한다는 미명하에 천하로 하여금 진나라를 증오하게 한다면, 이는 낮은 지위로서 높은 명예를 얻는 것입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심사숙고하십시오.”라 했다. 이리하여 제나라는 제 칭호를 포기하고 다시 왕으로 복귀했고, 진나라도 제위를 포기했다.
三十八年, 伐宋. 秦昭王怒曰:「吾愛宋與愛新城、陽晉同.24) 韓聶與吾友也, 而攻吾所愛, 何也?」蘇代為斉謂秦王曰:「韓聶之攻宋, 所以為王也. 斉彊, 輔之以宋, 楚魏必恐, 恐必西事秦, 是王不煩一兵, 不傷一士, 無事而割安邑也,25) 此韓聶之所祷於王也.」秦王曰:「吾患斉之難知. 一従一衡, 其説何也?」対曰:「天下国令斉可知乎? 斉以攻宋, 其知事秦以萬乗之国自輔, 不西事秦則宋治不安.26) 中国白頭游敖之士皆積智欲離斉秦之交, 伏式結軼27)西馳者, 未有一人言善斉者也, 伏式結軼東馳者, 未有一人言善秦者也. 何則? 皆不欲斉秦之合也. 何晉楚之智而斉秦之愚也! 晉楚合必議斉秦, 斉秦合必図晉楚, 請以此決事.」秦王曰:「諾.」於是斉遂伐宋, 宋王出亡, 死於温.28) 斉南割楚之淮北, 西侵三晉, 欲以并周室, 為天子. 泗上諸侯鄒魯之君皆称臣, 諸侯恐懼.
38년에는 송나라를 공격했다. 진 소왕이 분노하여 말하기를 “과인이 송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신성(新城), 양진(陽晉)과 같다. 한섭(韓聶)은 과인과 친구인데, 과인이 좋아하는 바를 공격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니, 소대가 위나라를 위해 진나라 왕에게 이르기를 “한섭이 송나라를 공격한 것은 왕을 위한 것입니다. 제나라는 강한데, 송나라가 제나라를 돕는다면, 초와 위 나라가 반드시 두려워할 것이고, 두려우면 그들은 필시 서쪽의 진나라를 섬길 것이니, 이는 왕께서 병력의 소모나 병사의 희생 하나 없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안읍(安邑)을 차지하는 것으로, 그것은 한섭이 왕께 기대하는 바입니다”라 했다.
진나라 왕이 말하기를 “과인은 제나라가 알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것이오. 때로는 합종(合縱)하고, 때로는 연횡(連橫)하는 것을 어떻게 말해야 되는가?”라고 하니, 대답해 말하기를 “천하의 모든 나라들의 명령을 어찌 제가 다 알 수 있습니까? 제나라가 이미 송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진나라를 섬기는 데는 만승지국(萬乘之國)의 역량으로 스스로를 무장해야 하고, 서쪽으로 진나라를 섬기지 않으면 송나라 땅은 안정을 꾀할 수 없음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원(中原) 각국의 능구렁이같이 늙고 간사한 유사(遊士)들이 모두 지혜를 모아 제와 진 사이의 관계를 이간질시키려고 하고, 빈번하게 서쪽으로 달려가는 무리들은 어느 사람도 제나라를 좋게 말하는 사람이 없으며, 빈번하게 동쪽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은 어느 사람도 진나라를 좋게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제와 진(秦)나라의 연합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찌해 진(晉)과 초 나라가 지혜로운데, 제와 진(秦) 나라가 우매하겠습니까! 진(晉)과 초 나라가 합치면 반드시 제와 진(秦) 사이의 연합을 해치려고 모의할 것이며, 제와 진(秦) 나라가 합치면 반드시 진(晉)과 초 나라를 칠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에 의거해 대사를 결행하십시오.”라고 하니, 진나라 왕이 말하기를 “좋다”라 했다.
이리하여 제나라가 송나라를 정벌하고, 송나라 왕이 도망해 온(溫) 땅에서 죽었다. 제나라는 남쪽으로는 초 나라의 회북(淮北)을 탈취하고, 서쪽으로는 삼진(三晉)을 침공해, 주 왕실과 나란히 천자가 되려고 했다. 사수(泗水)가의 제후인 추(鄒), 노(魯) 나라의 군주들은 모두 자신을 제나라의 신하로 칭했고, 천하의 제후들이 모두 제나라를 두려워했다.
三十九年, 秦來伐, 抜我列城九.
39년에는 진(秦)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해, 제나라의 성읍 9개를 함락시켰다.
四十年, 燕、秦、楚、三晉合謀, 各出鋭師以伐, 敗我済西.29) 王解而卻. 燕将樂毅遂入臨淄, 尽取斉之宝蔵器. 湣王出亡, 之衛. 衛君辟宮舎之, 称臣而共具. 湣王不遜, 衛人侵之. 湣王去, 走鄒、魯, 有驕色, 鄒、魯君弗内, 遂走莒. 楚使淖歯30)将兵救斉, 因相斉湣王. 淖歯遂殺湣王而與燕共分斉之侵地鹵器.31)
40년에는 연(燕), 진(秦), 초(楚), 삼진(三晉)이 공모해, 각기 정예부대를 출병시켜서 제나라를 공격해, 제서(濟西)에서 제나라를 물리쳤다. 제나라 왕의 군대가 와해되어 퇴각했다.
연나라 장수 악의(樂毅)가 임치(臨淄)에 들어가 제나라의 보물들을 모두 탈취했다. 민왕이 도망해 위(衛)나라로 갔다. 위(衛)나라 군주가 스스로 궁을 피해 민왕이 묵도록 하고, 민왕을 신하로 칭하면서 기물들을 함께 썼다. 민왕이 불손해, 위(衛)나라 사람이 그를 습격했다. 민왕이 위(衛)나라를 떠나서 추, 노 나라로 도망갔는데, 교만한 기색이 있자, 추와 노 나라의 군주도 그를 거두지 않았고, 이에 거(莒)나라로 갔다. 초 나라는 요치(淖齒)의 군사로 하여금 제나라를 구원하게 해, 그가 제 민왕의 재상이 되게 했다. 요치가 민왕을 죽이고서 연나라와 함께 제나라의 영토와 보물들을 나누어 가졌다.
湣王之遇殺, 其子法章変名姓為莒太史■32)家庸. 太史■女奇法章状貌, 以為非恆人, 憐而常窃衣食之, 而與私通焉. 淖歯既以去莒, 莒中人及斉亡臣相聚求湣王子, 欲立之. 法章懼其誅己也, 久之, 乃敢自言「我湣王子也」. 於是莒人共立法章, 是為襄王. 以保莒城而布告斉国中:「王已立在莒矣.」
민왕이 죽임을 당하고, 그의 아들 법장(法章)이 이름을 바꾸어 거(莒)나라의 태사 교(敫)의 하인이 되었다.
태사 교의 여식이 법장의 용모를 보고는 그가 범상하지 않음을 알고서 흠모해 몰래 그에게 의식(衣食)을 제공했고, 그와 정을 통했다. 요치가 이미 거 나라를 떠나고, 거 나라 사람들과 제나라의 유신(遺臣)들이 민왕의 아들을 찾아서 즉위시키려고 했다. 법장은 그들이 자신을 죽일 것을 두려워해, 한참 뒤에야 “내가 민왕의 아들이다.”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거 나라 사람들이 함께 법장을 즉위시키니, 그가 바로 양왕(襄王)이다. 양왕은 거 나라 성을 지키고서 제나라 백성들에 알리기를 “왕은 이미 거 나라에서 즉위하셨도다.”라 했다.
각주 1 集解徐広曰:「在陽翟, 属韓.」 2 集解徐広曰:「韓之公仲侈也.」 3 集解徐広曰:「在済陰宛朐.」 4 索隠能猶勝也. 言不勝其抜, 故聴斉抜之耳. 5 索隠逐, 随也. 6 集解徐広曰:「音専. 専猶并合制領之謂也.」 索隠摶音団, 団謂握領也. 徐作「専」, 亦通. 7 正義屈丐, 楚将, 為秦所敗, 今更欲乗之. 8 索隠韓也. 9 索隠公謂陳軫. 10 正義施, 張設也. 言秦王於天子都張設迫脅也. 11 集解徐広曰:「楚王欲得魏來事己, 而不欲與韓地也.」 12 正義蘇代謂陳軫, 今秦韓之兵不戦伐而得地, 陳軫於秦韓豈不有大恩徳. 13 索隠券, 要也. 左, 不正也. 言我以右執其左而責之. 14 正義左券下, 右券上也. 蘇代説陳軫以上券令秦韓不用兵得地, 而以券責秦韓卻韓馮、張儀以徇服魏, 故秦韓善陳軫而悪張儀多取矣. 15 集解徐広曰:「表曰與秦撃楚, 使公子将, 大有功.」 16 集解徐広曰:「孟嘗君為相.」 17 集解徐広曰:「三十年, 田甲劫王, 相薛文走.」 18 集解左思斉都賦注曰:「斉小城北門也.」而此言東門, 不知為是一門非邪? 正義括地志云:「斉城章華之東有閭門、武鹿門也.」 19 集解宋世家云:「宋王偃, 諸侯皆曰桀宋也.」 20 集解陽地, 濮陽之地. 正義案:衛此時河南独有濮陽也. 21 正義阿, 東阿也. 爾時属趙, 故云東国危. 22 正義淮北, 徐、泗也. 東国謂下相、僮、取慮也. 23 正義陶, 定陶, 今曹州也. 平陸, 兗州県也, 県在大梁東界. 24 正義括地志云:「新城故城在宋州宋城県界. 陽晉故城在曹州乗氏県西北三十七里.」 25 正義年表云秦昭王二十一年, 魏納安邑及河内. 26 索隠戦国策作「宋地不安」. 27 索隠軼音姪. 軼者, 車轍也, 言車轍往還如結也. 戦国策作「結靷」. 28 正義懐州有温城. 29 集解徐広曰:「案其余諸傳無楚伐斉事. 年表云楚取淮北.」 30 索隠淖音女教反. 31 正義鹵掠斉宝器也. 32 集解徐広曰:「音躍, 一音皎.」 |
'中國歷史와文學 > 史記世家' 카테고리의 다른 글
史記 卷四七. 孔子世家 (0) | 2019.06.23 |
---|---|
史記 卷四六. 田敬仲完世家[襄王 · 建] (0) | 2019.06.23 |
史記 卷四六. 田敬仲完世家[宣王] (0) | 2019.06.23 |
史記 卷四六. 田敬仲完世家[威王] (0) | 2019.06.23 |
史記 卷四六. 田敬仲完世家[田常] (0) | 2019.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