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四六. 田敬仲完世家[宣王] 宣王元年, 秦用商鞅. 周致伯於秦孝公.
선왕 원년에는 진(秦)나라가 상앙(商鞅)을 임용했다. 주 천자가 진 효공(秦孝公)에게 패주(覇主)의 칭호를 주었다.
二年, 魏伐趙. 趙與韓親, 共撃魏. 趙不利, 戦於南梁.1) 宣王召田忌复故位. 韓氏請救於斉. 宣王召大臣而謀曰:「蚤救孰與晩救?」騶忌子曰:「不如勿救.」田忌曰:「弗救, 則韓且折而入於魏, 不如蚤救之.」2)孫子3)曰:「夫韓、魏之兵未獘而救之, 是吾代韓受魏之兵, 顧反聴命於韓也. 且魏有破国之志, 韓見亡, 必東面而愬於斉矣. 吾因深結韓之親而晩承魏之獘, 則可重利而得尊名也.」宣王曰:「善.」乃陰告韓之使者而遣之. 韓因恃斉, 五戦不勝, 而東委国於斉. 斉因起兵, 使田忌、田嬰将,4) 孫子為(帥)[師], 救韓、趙以撃魏, 大敗之馬陵,5) 殺其将龐涓, 虜魏太子申. 其後三晉之王皆因田嬰朝斉王於博望,6) 盟而去.7)
2년에는 위(魏)나라가 조(趙)나라를 공격했다. 조와 한(韓) 나라가 친해, 함께 위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가 불리하게도 남량(南梁)에서 전쟁을 했다. 선왕이 전기를 불러 원래의 직위를 회복시켰다. 한(韓)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선왕이 대신들을 소집해, 모의해 말하기를 “일찍 도와주어야 하나, 늦게 도와주어야 하나?”라고 하니, 추기자가 말하기를 “구원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했고, 전기는 말하기를 “구원하지 않으면, 한나라는 더욱 굴욕적으로 위(魏)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일찍 구원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손자(孫子)가 말하기를 “한과 위 나라의 군대가 지치기 전에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우리가 한나라를 대신해서 위나라 군과 싸우는 것으로, 돌이켜보건대 그것은 한나라의 명령을 듣는 것입니다. 황차 위나라가 한과 조에 대한 공격의 뜻이 있고, 한나라가 멸망에 직면하면, 반드시 동쪽으로 제나라에 호소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로써 한나라와 깊은 연맹을 맺고 위나라의 피로한 군대를 뒤늦게 맞이할 것인즉, 이익은 크고 명성 또한 얻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선왕이 “옳다”라 했다.
이에 한나라의 사자(使者)에게 몰래 알려주고, 그를 보냈다. 한나라는 제나라에 의지해 위(魏)나라와 전쟁을 했으나, 다섯 번 싸워서 이기지 못하자 동쪽으로 제나라에 의탁했다. 제나라는 이로써 군사를 일으켜, 전기와 전영으로 하여금 장수가 되게 하고, 손자를 지휘관으로 삼아, 한과 조 나라를 구원해 위나라를 공격하니, 마릉(馬陵)에서 그들을 대파했고, 적장 방연(龐涓)을 살해했고, 위나라 태자 신(申)을 포로로 삼았다.
그 후로 삼진(三晉)의 왕이 모두 전영을 통해 박망성(博望城)에서 제왕(齊王)에게 입조(入朝)해 맹서하고 갔다.
七年, 與魏王会平阿南.8) 明年, 复会甄. 魏恵王卒.9) 明年, 與魏襄王会徐州, 諸侯相王也. 十年, 楚囲我徐州. 十一年, 與魏伐趙, 趙決河水潅斉、魏, 兵罷. 十八年, 秦恵王称王.
7년에는 위(魏)나라 왕과 평아(平阿)의 남쪽에서 회맹했다. 다음해에는 견(甄)에서 다시 만났다. 위 혜왕(魏惠王)이 죽었다. 다음해에는 위 양왕(魏襄王)과 서주(徐州)에서 회맹해, 제후들 간에 서로 왕으로 칭하기로 승인했다. 10년에는 초 나라 군이 제나라의 서주를 포위했다. 11년에는 위(魏)나라와 함께 조나라를 공격했고, 조나라 군이 황하를 끌어들여서 제와 위 나라 군을 잠기게 해, 양국이 철군했다. 18년에는 진 혜왕(秦惠王)이 왕으로 칭했다.
宣王喜文学游説之士, 自如騶衍、淳于髡、10)田駢、11)接予、12)慎到、13)環淵14) 之徒七十六人, 皆賜列第, 為上大夫, 不治而議論. 是以斉稷下学士复盛, 且數百千人.15)
선왕(宣王)이 문학유사들을 좋아해, 추연(騶衍), 순우곤(淳于髡), 전병(田騈), 접여(接予), 신도(愼到), 환연(環淵) 같은 무리들 76명 모두에게 집을 하사해, 상대부(上大夫)로 삼고, 관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토론하게 했다. 이리하여 제나라의 직하(稷下)에는 학자들이 많아져서, 그 수가 수백 명에서 천 명을 넘어섰다.
十九年, 宣王卒, 子湣王地16)立.
19년에는 선왕이 죽고, 아들 민왕(湣王) 지(地)가 즉위했다.
각주 1 索隠晉太康地記曰:「戦国謂梁為南梁者, 別之於大梁、少梁也.」 正義括地志云:「故梁在汝州西南二百歩. 晉太康地記云『戦国時謂南梁者, 別之於大梁、少梁也』. 古蛮子邑也.」 2 索隠案:紀年威王十四年, 田■伐梁, 戦馬陵. 戦国策南梁之難, 有張田対曰「蚤救之」. 此云鄒忌者, 王劭云「此時鄒忌死已四年, 又斉威時未称王, 故戦国策謂之田侯. 今此以田侯為宣王, 又横称鄒忌, 皆謬矣」. 3 索隠孫臏也. 4 集解徐広曰:「嬰, 一作『■』.」 5 索隠在宣王二年. 6 正義括地志云:「博望故城在鄧州向城県東南四十五里.」 7 集解徐広曰:「表曰三年, 與趙会博望伐魏.」 8 正義沛郡平阿県也. 9 索隠明年, 梁恵王卒. 案紀年, 梁恵王乃是斉湣王為東帝, 秦昭王為西帝時. 此時梁恵王改元称一年, 未卒也. 而系家以其後即為魏襄王之年, 又以此文當斉宣王時, 実所不能詳考. 10 正義贅■, 斉之稷下先生也. 11 正義白眠反. 藝文志云田駢, 斉人, 遊稷下, 号天口駢, 作田子二十五篇也. 12 正義斉人. 藝文志云接予二篇, 在道家流. 13 正義趙人, 戦国時処士. 藝文志作慎子四十二篇也. 14 正義楚人. 孟子傳云環淵著書上下篇也. 15 集解劉向別錄曰:「斉有稷門, 城門也. 談説之士期会於稷下也.」 索隠劉向別錄曰「斉有稷門, 斉城門也. 談説之士期会於其下」. 斉地記曰「斉城西門側, 系水左右有講室, 趾往往存焉」. 蓋因側系水出, 故曰稷門, 古側稷音相近耳. 又虞喜曰「斉有稷山, 立館其下以待游士」, 亦異説也. 春秋傳曰「莒子如斉, 盟于稷門」. 16 索隠系本名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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