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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史記世家

史記 卷四六. 田敬仲完世家[威王]

by 柳川 2019. 6. 23.

 卷四六. 田敬仲完世家[威王]

 

 

斉威王元年, 三晉因斉喪來伐我霊丘.1) 三年, 三晉滅晉後而分其地. 六年, 魯伐我, 入陽関.2) 晉伐我, 至博陵.3) 七年, 衛伐我, 取薛陵. 九年, 趙伐我, 取甄.4)

 

 

제 위왕(齊威王) 원년에는 삼진(三晉)이 제나라의 상사(喪事)를 틈타서 제나라의 영구(靈丘)를 침공했다. 3년에는 삼진이 진(晉)나라를 멸망시킨 후에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6년에는 노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해, 양관(陽關)까지 들어왔다. 진(晉)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해, 박릉(博陵)에 이르렀다. 7년에는 위(衛)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해, 설릉(薛陵)을 차지했다. 9년에는 조(趙)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해, 견(甄)을 차지했다.

 

 

威王初即位以來, 不治, 委政卿大夫, 九年之閒, 諸侯並伐, 国人不治. 於是威王召即墨大夫而語之曰:「自子之居即墨也,5) 毀言日至. 然吾使人視即墨, 田野闢, 民人給, 官無留事, 東方以寧. 是子不事吾左右以求誉也.」封之萬家. 召阿大夫語曰:「自子之守阿, 誉言日聞. 然使使視阿, 田野不闢, 民貧苦. 昔日趙攻甄, 子弗能救. 衛取薛陵, 子弗知. 是子以幣厚吾左右以求誉也.」是日, 烹阿大夫, 及左右嘗誉者皆并烹之. 遂起兵西撃趙、衛, 敗魏於濁沢而囲恵王. 恵王請献観以和解, 趙人帰我長城. 於是斉国震懼, 人人不敢飾非, 務尽其誠. 斉国大治. 諸侯聞之, 莫敢致兵於斉二十余年.

 

 

위왕(威王)이 처음 즉위한 이래로 국정을 잘 다스리지 못해서, 경대부(卿大夫)들에게 국정을 위탁하는데, 9년 동안에 제후들이 서로 공격해 나라가 잘 다스려지지 않았다.

 

 

이리하여 위왕이 즉묵(卽墨)의 대부를 불러서 말하기를 “그대가 즉묵을 다스린 뒤로, 그대를 비방하는 말이 매일 끊이지 않았소. 그러나 과인이 사람을 시켜서 즉묵을 보니, 밭을 개간해 백성들에게 주고, 관에 공무가 쌓인 일도 없이, 동쪽은 태평했소. 그럼에도 이러한 헛소문이 퍼진 것은 다만 그대가 과인의 측근들에게 명예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오.”라고 하고, 그에게 만호의 식읍을 봉했다.

 

 

아(阿)의 대부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가 아를 통치하는데, 칭찬의 소리가 날마다 들렸으나, 사람을 시켜서 아를 지켜보니, 밭은 개간하지 않고, 백성들은 빈곤했소. 전에 조나라가 견(甄)을 공격했을 때에도, 그대는 구원하지 못했소. 위(衛)나라가 설릉을 차지했을 때에도 그대는 알지 못했소. 이는 그대가 과인의 측근들에게 뇌물을 주어 명예를 구한 것이오.”라고 하고, 이날 아의 대부를 팽형(烹刑)에 처했다. 아울러서 그를 칭찬했던 측근들도 모두 팽형에 처했다.

 

 

이리하여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조(趙), 위(衛) 나라를 공격했고, 위(魏)나라를 탁택(濁澤)에서 패배시키고 위 혜왕(魏惠王)을 포위했다. 혜왕이 관(觀) 땅을 헌납하고 협상을 청했고, 조나라는 제나라에 장성(長城)을 돌려주었다. 이리하여 제나라는 국위를 떨치고, 사람들은 모두 가식과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성심껏 임무를 다했다. 비로소 제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제후들이 이를 듣고는 20여 년 동안 제나라에 군사를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騶忌子以鼓琴見威王, 威王説而舎之右室. 須臾, 王鼓琴, 騶忌子推戸入曰:「善哉鼓琴!」王勃然不説, 去琴按剣曰:「夫子見容未察, 何以知其善也?」騶忌子曰:「夫大弦濁以春温者, 君也;小弦廉折以清者, 相也;6)攫7)之深, 醳8)之愉者,9) 政令也;鈞諧以鳴, 大小相益, 回邪而不相害者, 四時也:吾是以知其善也.」王曰:「善語音.」騶忌子曰:「何独語音, 夫治国家而弭人民皆在其中.」王又勃然不説曰:「若夫語五音之紀, 信未有如夫子者也. 若夫治国家而弭人民, 又何為乎糸桐之閒?」騶忌子曰:「夫大弦濁以春温者, 君也;小弦廉折以清者, 相也;攫之深而舎之愉者, 政令也;鈞諧以鳴, 大小相益, 回邪而不相害者, 四時也. 夫复而不亂者, 所以治昌也;連而徑者, 所以存亡也:故曰琴音調而天下治. 夫治国家而弭人民者, 無若乎五音者.」王曰:「善.」

 

 

추기자(騶忌子)가 거문고를 가지고서 위왕(威王)을 만나니, 위왕이 기쁘게 그를 궁내 우실(右室)에 머물게 했다.

 

 

얼마 있지 않아서, 왕이 거문고를 타니, 추기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말하기를 “거문고를 정말 잘 타십니다.”라 했다. 왕이 불끈 화를 내면서, 거문고를 놓고, 대검을 잡고 말하기를 “대저 그대는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찌 잘 타는 줄 아시오?”라고 하니, 추기자가 말하기를 “대저 대현(大弦)은 넓으면서도 봄과 같이 온화해 군(君)에 비유되며, 소현(小弦)은 청렴하고 맑으니 재상에 비유됩니다. 잡을 때에는 깊게 잡고 놓을 때에는 서서히 풀어주니 법령에 비유되고, 모두 함께 소리를 내지만 크고 작음이 서로 다르며 굴절을 일으키면서 서로의 음을 해치지 않음이 4계절과 같으니, 제가 이로써 훌륭한 것을 알았습니다.”라 했다.

 

 

왕이 말하기를 “그대는 음률을 잘 구별하는구려.”라고 하자, 추기자가 말하기를 “어찌 음률만이겠습니까? 대저 국가를 다스리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도 이 속에 있습니다.”라 했다. 왕이 불끈 화를 내며 말하기를 “그렇다면 과인이 5음(五音)을 다스림이, 그대만 못할 것이오. 그런데 과인이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이 어찌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소?”라 했다.

 

 

추기자가 말하기를 “대저 대현(大弦)은 넓으면서도 봄과 같이 온화해 군(君)에 비유되며, 소현(小弦)은 청렴하고 맑으니 재상에 비유됩니다. 잡을 때에는 깊게 잡고 놓을 때에는 서서히 풀어주니 법령에 비유되고, 모두 함께 소리를 내지만 크고 작음이 서로 다르며 굴절을 일으키면서 서로의 음을 해치지 않음이 4계절과 같습니다. 대저 반복되면서도 어지럽지 않은 까닭은 국가가 잘 다스려지고 창성함이요, 상하좌우가 잘 이어지는 것은 보존되고 멸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문고의 음이 다스려지면 천하가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대저 나라가 다스려지고 백성들이 무고한 것은 바로 5음을 다스리는 이치와 같지 않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렇소”라 했다.

 

 

騶忌子見三月而受相印. 淳于髡見之曰:「善說哉! 髡有愚志, 願陳諸前.」騶忌子曰:「謹受教.」 淳于髡曰:「得全全昌,10) 失全全亡.」騶忌子曰:「謹受令, 請謹毋離前.」11)淳于髡曰:「狶膏棘軸, 所以為滑也, 然而不能運方穿.」12)騶忌子曰:「謹受令, 請謹事左右.」淳于髡曰:「弓膠昔幹,13) 所以為合也, 然而不能傅合疏罅.」14)騶忌子曰:「謹受令, 請謹自附於萬民.」淳于髡曰:「狐裘雖敝, 不可補以黄狗之皮.」騶忌子曰:「謹受令, 請謹択君子, 毋雑小人其閒.」淳于髡曰:「大車不較,15) 不能載其常任;琴瑟不較, 不能成其五音.」 騶忌子曰:「謹受令, 請謹脩法律而督姦吏.」 淳于髡說畢, 趨出, 至門, 而面其僕曰:「是人者, 吾語之微言五, 其應我若響之應聲, 是人必封不久矣.」16)居期年, 封以下邳, 號曰成侯.

 

 

추기자가 제나라 위왕(威王)을 만난지 3개월이 지나 재상의 인을 받았다.

순우곤이 그것을 보고 말했다. "말씀을 잘하십니다! 저에게 소견이 있는데 선생님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추기자가 대답했다.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순우곤이 말했다. “신하된 자가 군주에 대한 예절을 다하면, 몸과 명예가 창성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 잃을 것입니다.”

추기자가 대답했다.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절대로 그 말씀을 마음에서 멀리하지 않겠습니다.”

순우곤이, “돼지기름을 가시나무 바퀴 축에다가 칠하는 것은 바퀴의 회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함인데, 만약에 구멍을 각이 지게 뚫으면 돌아가지를 않습니다.”라고 하자, 추기자가 대답했다.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측근들을 잘 부리겠습니다.”

순우곤이 “활을 만들 때 뼈대에 아교를 칠하는 것은, 잘 붙게 하기 위한 것인데, 공간이 비고 틈새가 생기면 잘 결합시킬 수가 없습니다.”라 말하니,  추기자가 말했다.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스스로를 온 백성과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순우곤이 말하기를 “여우 가죽옷이 해어졌다고, 누런 개가죽으로 기우면 안 됩니다.”라고 하니, 추기자가 대답했다.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임명할 때에는 군자를 선택하게 하고, 소인배가 그 속에 섞이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순우곤이, “큰 수레일지라도 균형을 바로잡지 않으면 본래 실을 수 있는만큼 싣지 못하고, 현악기는 음을 맞춰놓지 않으면 5음을 이룰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추기자가 말했다.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법률을 잘 다듬고, 간사한 관리들을 잘 감독하겠습니다.”

순우곤이 말을 마친 후에 급히 나가면서, 대문에 이르러서 하인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내가 5 가지 비유를 했는데도, 이 사람이 질문에 대답한 말들이 모두 꼭 맞는 대답이었으니, 이 사람은 멀지 않아서 봉상(封賞)을 받을 것이로다.”라 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서 추기자는 과연 하비(下邳)를 받았고, 성후(成侯)로 불렸다.

 

 

 

威王二十三年, 與趙王会平陸. 二十四年, 與魏王會田於郊. 魏王問曰:「王亦有寶乎?」威王曰:「無有.」17)梁王曰:「若寡人國小也, 尙有徑寸之珠照車前後各十二乗者十枚, 奈何以萬乗之國而無寶乎?」威王曰:「寡人之所以為宝與王異. 吾臣有檀子者,18) 使守南城, 則楚人不敢爲寇東取, 泗上十二諸侯19)皆來朝. 吾臣有子者, 使守高唐, 則趙人不敢東漁於河. 吾吏有黔夫者, 使守徐州, 則燕人祭北門, 趙人祭西門,20) 徙而従者七千余家. 吾臣有種首者, 使備盗賊, 則道不拾遺. 将以照千里, 豈特十二乗哉!」梁恵王慚, 不懌而去.

 

 

위왕(威王) 23년에는 조나라 왕과 평륙에서 회맹했다. 24년에는 위(魏)나라 왕과 교외에서 사냥 회동을 했다. 위(魏)나라 왕이 묻기를 “왕께서도 보물이 있습니까?”라고 하니, 위왕(威王)이 말하기를 “없습니다”라 했다.

 

 

양왕(梁王)이 말하기를 “과인과 같이 작은 나라에서도 1촌(寸) 되는 진주가 수레 앞뒤에서 번뜩이는 것이 열두 수레요, 매 수레마다 열 개씩 있습니다. 어찌해 만승의 나라에서 보석이 없단 말입니까?”라고 하니, 위왕(威王)이 말하기를 “과인이 보물이라고 여기는 것은 왕과 다릅니다. 과인의 신하 중에 단자(檀子)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로 하여금 남쪽의 성을 지키게 하면, 초 나라가 감히 동쪽의 땅을 쳐들어오지 못하고, 사수(泗水)가의 12제후(十二諸侯)가 모두 조공(朝貢)을 합니다.

 

 

또 과인의 신하 중에는 반자(盼子)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고당(高唐) 지방을 지키도록 하면, 조나라 사람들이 감히 동쪽으로 와서 고기를 잡지 못합니다. 과인의 신하 중에는 검부(黔夫)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로 하여금 서주(徐州)를 지키게 하면, 우리가 침입할까 두려워서 연(燕)나라 사람들이 북문에 제사를 올리고, 조나라 사람들이 서문에 제사를 올리며, 그를 쫓는 무리가 7천여 호에 이릅니다. 과인의 신하 중에는 종수(種首)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도적들을 막도록 하면, 길거리 떨어진 것도 주워가지 않습니다.

 

 

이는 천리를 밝히는 것인데, 어찌 열두 수레만을 밝힐 뿐이겠습니까!”라 했다. 양 혜왕(梁惠王)이 부끄러워서, 흥을 잃고 가버렸다.

 

 

二十六年, 魏恵王囲邯鄲, 趙求救於斉. 斉威王召大臣而謀曰:「救趙孰與勿救?」騶忌子曰:「不如勿救.」段干朋曰:「不救則不義, 且不利.」威王曰:「何也?」対曰:「夫魏氏并邯鄲, 其於斉何利哉? 且夫救趙而軍其郊, 是趙不伐而魏全也. 故不如南攻襄陵21)以獘魏, 邯鄲抜而乗魏之獘.」威王従其計.

 

 

26년에는 위 혜왕(魏惠王)이 한단(邯鄲)을 포위해, 조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제 위왕이 대신들을 소집해, 모의해 말하기를 “구원하는 것이 좋겠소, 안 하는 게 좋겠소?”라고 하니, 추기자가 말하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했고, 단간붕(段干朋)은 말하기를 “구원하지 않으면 의롭지 못할 뿐 아니라, 이롭지도 못합니다.”라고 했다.

 

 

왕이 말하기를 “어째서 그러한가?”라고 하니, 단간붕이 대답해 말하기를 “위씨(魏氏)가 한단을 병점한다면,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차라리 조나라를 구원해 조나라의 교외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조나라를 공격하지 않으면, 위나라의 군대는 온전하게 보전됩니다. 그러므로 남으로 양릉(襄陵)을 공격해, 위(魏)나라 군을 괴롭히고, 한단이 함락되면, 위나라 군이 지쳐 있는 틈을 이용해야 합니다.”라 했다. 위왕(威王)이 이 계략을 따랐다.

 

 

其後成侯騶忌與田忌不善, 公孫閲22)謂成侯忌曰:「公何不謀伐魏, 田忌必将. 戦勝有功, 則公之謀中也;戦不勝, 非前死則後北, 而命在公矣.」於是成侯言威王, 使田忌南攻襄陵. 十月, 邯鄲抜, 斉因起兵撃魏, 大敗之桂陵.23) 於是斉最彊於諸侯, 自称為王, 以令天下.

 

 

그 후로 성후(成侯) 추기(騶忌)와 전기(田忌)의 사이가 나빠졌고, 공손열(公孫閱)이 성후 추기에게 말하기를 “공은 어찌해 위(魏)나라를 공격하려고 모의하지 않습니까? 전기가 반드시 수장이 될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해 공이 있다면 그대의 모의가 적중한 셈이고,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나아가서 전사하거나, 뒤로 후퇴해 패배할 것인즉, 전기의 목숨은 공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라 했다. 이리하여 성후가 위왕(威王)에게 진언해, 전기로 하여금 남으로 양릉을 공격하게 했다. 10월에 한단을 함락시켰다. 제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위(魏)나라를 공격해, 계릉(桂陵)에서 대파했다. 이리하여 제나라는 제후 중에서 가장 강하게 되었고, 스스로 왕으로 칭하며, 천하를 호령하기 시작했다.

 

 

三十三年, 殺其大夫牟辛.24)

 

 

33년에는 그의 대부(大夫) 모신(牟辛)을 죽였다.

 

 

三十五年, 公孫閲又謂成侯忌曰:「公何不令人操十金卜於市, 曰『我田忌之人也. 吾三戦而三勝, 声威天下. 欲為大事, 亦吉乎不吉乎』?」卜者出, 因令人捕為之卜者, 験其辞於王之所. 田忌聞之, 因率其徒襲攻臨淄, 求成侯, 不勝而奔.25)

 

 

35년에는 공손열이 또 성후 추기에게 이르기를 “공은 어찌해 사람을 시켜서 황금 2백 냥을 가지고 시장에 가서 점을 치면서 말하기를 ‘나는 전기(田忌)의 사람이다. 우리는 3전3승해, 명성을 천하에 떨치고 있다. 큰일을 행하고자 하는데, 점괘가 길한가, 불길한가?’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성후는 그의 말을 따랐다. 그는 점을 치고 나와서, 사람을 시켜 점치는 이를 잡아들여, 점괘의 내용을 왕이 듣게 했다. 전기가 이를 듣고 부하를 이끌고서 임치(臨淄)를 습격했다. 그러나 성후를 찾다가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다.

 

 

三十六年, 威王卒, 子宣王辟彊立.

 

 

36년에는 위왕이 죽고, 아들 선왕(宣王) 벽강(辟疆)이 즉위했다.

 

 

각주

1 正義霊丘, 河東蔚州県. 案:霊丘此時属斉, 三晉因喪伐之. 韓、魏、趙世家云「伐斉至霊丘」, 皆是蔚州.

2 集解徐広曰:「在鉅平.」 正義括地志云:「魯陽関故城在兗州博城県南二十九里, 西臨汶水也.」

3 正義在済州西界也.

4 正義音絹. 即濮州甄城県也.

5 正義莱州膠水県南六十里即墨故城是也.

6 集解琴操曰:「大弦者, 君也, 寛和而温. 小弦者, 臣也, 清廉而不亂.」 索隠大弦濁以温者君也. 案:春秋後語「温」字作「春」, 春気温, 義亦相通也. 蔡邕曰:「凡弦以緩急為清濁. 琴, 緊其弦則清, 縵其弦則濁.」

7 集解徐広曰:「以爪持弦也. 攫音己足反.」

8 集解徐広曰:「一作『舒』.」

9 索隠醳音釈, 與下文舎字並同. 愉音舒也.

10 索隠案:得全, 謂人臣事君之礼全具無失, 故云得全也. 全昌者, 謂若無失則身名獲昌, 故云全昌也.

11 索隠謂佩服此言, 常無離心目之前.

12 索隠狶膏, 豬脂也. 棘軸, 以棘木為車軸, 至滑而堅也. 然而穿孔若方, 則不能運転, 言逆理反経也. 故下忌曰「請謹事左右」, 言毎事須順従.

13 集解徐広曰:「一作『乾』.」 索隠音孤捍反. 昔, 久旧也. 幹, 弓幹也. 徐広又曰一作「乾」. 考工記作「■幹」, 則■昔音相近. 言作弓之法, 以膠被昔幹而納諸檠中, 則是以勢令合耳.

14 索隠傅音附. 罅音五嫁反. 以言膠幹可以勢暫合, 而久亦不能常傅合於疏罅隙縫. 以言人臣自宜弥縫得所, 豈待拘以礼制法式哉. 故下云「請自附於萬人」是也.

15 索隠較者, 校量也. 言有常制, 若大車不較, 則車不能載常任, 琴不能成五音也.

16 集解新序曰:「斉稷下先生喜議政事. 騶忌既為斉相, 稷下先生淳于髡之属七十二人皆軽騶忌, 以為設以微辞, 騶忌必不能及, 乃相與倶往見騶忌. 淳于髡之徒礼倨, 騶忌之礼卑. 淳于髡等称辞, 騶忌知之如應響, 淳于■等辞詘而去, 騶忌之礼倨, 淳于髡之礼卑. 故所以尚干将、莫邪者, 貴其立断也. 所以尚騏驥者, 為其立至也. 必且歴日曠久, 則系氂能挈石, 駑馬亦能致遠. 是以聡明捷敏, 人之美材也.」

17 索隠案:韓嬰詩外傳以為斉宣王, 其説異也.

18 索隠檀子, 斉臣. 檀, 姓;子, 美称, 大夫皆称子. ■子, 田■也. 黔夫及種首皆臣名. 事悉具戦国策也.

19 索隠邾、莒、宋、魯之比.

20 集解賈逵曰:「斉之北門西門也. 言燕、趙之人畏見侵伐, 故祭以求福.」

21 正義襄陵故城在兗州鄒県也.

22 索隠戦国策作「公孫閎」.

23 索隠在威王二十六年. 正義在曹州乗氏県東北二十一里.

24 集解徐広曰:「一作『夫人』.」 索隠牟辛, 大夫姓字也. 徐広曰一作「夫人」. 案:年表亦作「夫人」. 王劭案紀年云「斉桓公十一年殺其君母. 宣王八年殺王后」. 然則夫人之字, 或如紀年之説.

25 索隠案:戦国策田忌前敗魏於馬陵, 因被構, 不得入斉, 非是居斉歴十年乃出奔也. 是時斉都臨淄, 且孟嘗列傳云「田忌襲斉之邊邑」, 其言為得, 即與系家不同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