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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史記世家

史記 卷四九. 外戚世家[呂后]

by 柳川 2019. 6. 23.

                                   卷四九. 外戚世家[呂后]



 

自古受命帝王及継体守文之君,1) 非独内徳茂也, 蓋亦有外戚之助焉.2) 夏之興也以塗山,3) 而桀之放也以末喜.4) 殷之興也以有娀,5) 紂之殺也嬖妲己.6) 周之興也以姜原7)及大任,8) 而幽王之禽也淫於褒姒.9) 故易基乾坤, 詩始関雎, 書美釐降, 春秋譏不親迎.10) 夫婦之際, 人道之大倫也. 礼之用, 唯婚姻為兢兢. 夫樂調而四時和, 陰陽之変, 萬物之統也.11) 可不慎與? 人能弘道, 無如命何. 甚哉, 妃匹之愛,12) 君不能得之於臣,13) 父不能得之於子, 況卑下乎! 既驩合矣, 或不能成子姓;14)能成子姓矣, 或不能要其終:15)豈非命也哉? 孔子罕称命, 蓋難言之也. 非通幽明之変, 悪能16)識乎性命哉?

 

예로부터 천명을 받은 개국 군주(君主)들과 선제(先帝)의 뒤를 이어받고 성법(成法)을 계승한 군주들은 단지 그 개인의 품덕(品德)이 고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외척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夏)나라가 흥기한 것은 도산씨(塗山氏)가 있었기 때문이며, 걸(桀)이 유배된 것은 말희(末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은(殷) 왕조가 흥기한 것은 유융씨(有娀氏)가 있었기 때문이며, 주왕(紂王)이 주살당한 것은 달기(妲己)를 총애했기 때문이다. 주(周)나라가 흥기한 것은 강원(姜原)과 대임(大任)이 있었기 때문이며, 주 유왕(周幽王)이 포로로 잡히게 된 것은 포사(褒姒)에 탐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경(易經)』은 “건(乾)”, “곤(坤)” 양괘(兩卦)에 기초를 두었으며, 『시경(詩經)』은 「관저(關雎)」 편에서 시작되었다. 『상서(尙書)』는 요(堯)가 친히 두 명의 딸을 순(舜)에게 시집보내도록 처리한 일을 찬미했으며, 『춘추(春秋)』는 아내를 맞이하면서 친히 나가서 맞이하지 않는 실례 행위를 풍자했다. 부부간의 화목 관계는 사람들의 도덕규범의 근본 준칙이다.

 

예제(禮制)는 혼인에서 가장 주의해야 한다. 음조가 잘 어울리는 것은 사계절 절기의 조화가 잘 되는 것이며, 음양의 변화는 만물의 생장과 변화의 근본인데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인륜대도(人倫大道)에 대해서는 확대 발전시킬 수 있으나 천명(天命)에 대해서는 오히려 어찌할 수가 없다. 부부간의 사랑은 군주라고 해서 신하에게서 얻을 수 없으며, 아버지라고 해서 그것을 아들에게서 얻을 수 없다. 하물며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랴! 설령 남녀가 환합(歡合)했을지라도 혹 또 자손이 번성할 수 없을지도 모르며, 설령 자손을 생육할 수 있을지라도 혹 천수를 다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찌 이것이 천명이 아니겠는가?

 

 

공자(孔子)는 천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매우 적었는데, 이는 아마 또 매우 분명하게 말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음양의 변화에 통달할 수 없다면 어떻게 인성(人性)과 천명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太史公曰:秦以前尚略矣, 其詳靡得而記焉. 漢興, 呂娥姁17)為高祖正后, 男為太子. 及晩節色衰愛弛, 而戚夫人有寵,18) 其子如意幾代太子者數矣. 及高祖崩, 呂后夷戚氏, 誅趙王, 而高祖後宮唯独無寵疏遠者得無恙.19)

 

태사공(太史公)은 말한다.

 

“진(秦)나라 이전의 외척(外戚)의 정황은 매우 간략해 상세한 정황을 기술하기가 매우 어렵다.

 

한(漢)나라가 흥기하자 여아후(呂娥姁)는 고조(高祖)의 황후가 되었으며 아들은 태자가 되었다. 여아후가 만년에 이르러 자색(姿色)이 스러져서 총애를 잃게 되자 척부인(戚夫人)이 총애를 받았으며, 그녀의 아들 여의(如意)가 태자의 자리를 빼앗아 대신 들어서는 일이 여러 번 발생했다.

 

고조가 서거하자 여후(呂后)는 척씨를 멸하고 조왕(趙王) 여의를 주살했다. 고조의 후궁(後宮)과 비빈(妃嬪) 가운데 오직 고조에게 소외당해 총애를 받지 못했던 사람만이 편안히 아무 일도 없었다.”

 

 

각주

1 索隠按:継体謂非創業之主, 而是嫡子継先帝之正体而立者也. 守文猶守法也, 謂非受命創制之君, 但守先帝法度為之主耳.

2 索隠按:謂非独君徳於内茂盛, 而亦有賢后妃外戚之親以助教化.

3 索隠韋昭云:「塗山, 国名, 禹所娶, 在今九江.」應劭云:「九江當塗有禹墟. 大戴云『禹娶塗山氏之女, 謂之僑, 僑産啓』.」

4 索隠国語「桀伐有施, 有施人以妹喜女焉」, 韋昭云「有施氏女, 姓喜」.

5 索隠韋昭云:「契母簡狄, 有娀国女. 音嵩.」

6 索隠国語「殷辛伐有蘇氏, 有蘇氏以妲己女焉」. 按:有蘇, 国也. 己, 姓也. 妲, 字也. 包愷云「妲音丁達反」.

7 索隠系本云:「帝嚳上妃有邰氏之女, 曰姜原.」鄭玄箋詩云:「姜姓, 嫄名, 履大人跡而生后稷.」

8 索隠按:大任, 文王之母, 故詩云「摯仲氏任」, 毛(詩)[傳]云「摯国任姓之中女也」.

9 索隠国語曰:「幽王伐有褒, 有褒人以褒姒女焉.」按:褒是国名, 姒是其姓, 即竜漦之子, 褒人育而以女於幽王也. 然此文自「夏之興」至「褒姒」皆是魏如耳之母詞, 見国語及列女傳.

10 索隠按:公羊「紀裂繻來逆女, 何以書? 譏也, 譏不親迎也」.

11 索隠以言若樂声調, 能令四時和, 而陰陽変, 則能生萬物, 是陰陽即夫婦也. 夫婦道和而能化生萬物. 萬物, 人為之本, 故云「萬物之統」.

12 索隠妃音配, 又如字.

13 索隠以言夫婦親愛之情, 雖君父之尊而不奪臣子所好愛, 使移其本意, 是不能得也. 故曰「匹夫不可奪志」是也.

14 索隠按:鄭玄注礼記云「姓者, 生也. 子姓, 謂衆孫也」. 按即趙飛燕等是也.

15 索隠按:謂有始不能要其終也. 以言雖有子姓而意不能要終, 如栗姫、衛后等皆是也.

16 索隠上音烏. 悪猶於何也.

17 集解徐広曰:「姁音況羽反. 呂后姊字長姁也.」 索隠呂后字, 音況羽反. 按:漢書呂后名雉.

18 索隠漢書云得定陶戚姫.

19 索隠爾雅云「恙, 憂也」. 一説, 古者野居露宿, 恙, 噬人虫也, 故人相恤云「得無恙乎」.




呂后長女為宣平侯張敖妻, 敖女為孝恵皇后.1) 呂太后以重親故, 欲其生子萬方, 終無子, 詐取後宮人子為子. 及孝恵帝崩, 天下初定未久, 継嗣不明. 於是貴外家, 王諸呂以為輔, 而以呂祿女為少帝后, 欲連固根本牢甚, 然無益也.

 

여후의 장녀는 선평후(宣平侯) 장오(張敖)의 처가 되었으며, 장오의 딸은 효혜황후(孝惠皇后)가 되었다. 여태후는 효혜황후가 겹사돈이기 때문에 그녀가 자식을 낳게끔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았으나 결국은 자식을 낳지 못했기에 후궁의 자식을 데려와서 아들로 삼았다. 황위를 계승할 사람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외가(外家)를 중용했다. 여러 여씨(呂氏)들을 왕으로 봉해 보좌하게 했고 그리고 여록(呂祿)의 딸을 소제황후(少帝皇后)로 삼아 왕실의 뿌리를 견고히 하려고 했으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高后崩, 合葬長陵.2) 祿、産等懼誅, 謀作亂. 大臣征之, 天誘其統,3) 卒滅呂氏. 唯独置孝恵皇后居北宮.4) 迎立代王, 是為孝文帝, 奉漢宗廟. 此豈非天邪? 非天命孰能當之?

 

여후가 서거하자 장릉(長陵)에 고조와 합장시켰다. 여록, 여산(呂産) 등은 주살당할 것을 두려워해 반란을 음모했다. 대신(大臣)들은 그들을 정벌했으며, 하늘이 유씨(劉氏) 천하의 통기(統紀)를 계속 이어지게 하려고 하므로 마침내 여씨 집단이 소멸되었다. 단지 효혜황후만 북궁(北宮)에 머물도록 안배했다. 대왕(代王)을 황제로 맞이했는데, 그가 바로 효문제(孝文帝)로 그는 한가(漢家)의 종묘(宗廟)를 받들어 섬기었다. 이것이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천명이 아니면 누가 그러한 임무를 담당할 수 있겠는가!

 

각주

1 索隠按:皇甫謐云名嫣.

2 集解関中記曰:「高祖陵在西, 呂后陵在東. 漢帝后同塋, 則為合葬, 不合陵也. 諸陵皆如此.」

3 集解徐広曰:「一作『衷』.」

4 索隠按:宮在未央北, 故曰北宮. 正義括地志云:「北宮在雍州長安県西北十三里, 與桂宮相近, 在長安故城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