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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史記世家

史記 卷四九. 外戚世家[竇太后]

by 柳川 2019. 6. 23.

                               卷四九. 外戚世家[竇太后]



竇太后,1) 趙之清河観津人也.2) 呂太后時, 竇姫以良家子入宮侍太后. 太后出宮人以賜諸王, 各五人, 竇姫與在行中. 竇姫家在清河, 欲如趙近家, 請其主遣宦者吏:3)「必置我籍趙之伍中.」宦者忘之, 誤置其籍代伍中. 籍奏, 詔可, 當行. 竇姫涕泣, 怨其宦者, 不欲往, 相彊, 乃肯行. 至代, 代王独幸竇姫, 生女嫖,4) 後生両男. 而代王王后生四男. 先代王未入立為帝而王后卒. 及代王立為帝, 而王后所生四男更病死. 孝文帝立數月, 公卿請立太子, 而竇姫長男最長, 立為太子. 立竇姫為皇后, 女嫖為長公主. 其明年, 立少子武為代王, 已而又徙梁, 是為梁孝王.

 

두태후(竇太后)는 조(趙)나라 청하(淸河)의 관진(觀津) 사람이다. 여태후가 살아 있었을 때 두희(竇姬)는 양가자(良家子)로서 입궁해 여후의 시중을 들었다. 후에 여후는 궁녀들을 내보내 여러 왕들에게 하사했는데, 왕 한 명당 5명씩으로 했다. 두희 또한 이 출궁(出宮) 행렬가운데 동행했다.

 

두희의 집은 청하군에 있었는데, 조나라가 집에서 가까운 것을 생각해내고는 그 궁녀의 송환을 주관하는 환관(宦官)에게 간청하기를 ‘저의 명부를 반드시 조나라로 가는 궁녀의 대오 가운데 놓아주십시오.’라 했다. 환관은 이 일을 잊고 잘못해 그녀의 명부를 대(代)나라로 가는 궁녀의 대오 가운데 놓았다. 명부가 위로 보고되자 여태후는 허락한다는 조서를 내렸으며 이것에 따라 출발해야만 했다. 두희는 흐느껴 울면서 그 환관을 원망하며 가지 않으려고 했으며, 강제로 동원하자 비로소 이에 따랐다.

 

대나라에 이르자 대왕(代王)은 오로지 두희만을 총애해 딸 표(嫖)를 낳았으며, 후에 두 명의 아들을 더 낳았다. 대 왕후(代王后)는 모두 네 명의 아들을 낳았으나 대왕이 아직 황제가 되지 않았을 때 세상을 떠났다. 대왕이 황제에 오르자 왕후가 낳은 네 명의 아들들 또한 잇달아서 병사(病死)했다.

 

 

효문제가 제위(帝位)를 이은 지 몇 개월 안 되어 공경대신(公卿大臣)들은 태자를 세우기를 간청했기에, 두희의 장남이 가장 연장자인지라 그를 태자로 세웠다. 이로써 두희는 황후(皇后)가 되었고 딸 표는 장공주(長公主)가 되었다. 그 다음해 막내아들 무(武)를 대왕(代王)으로 세웠으며, 머잖아 그는 다시 양(梁)나라로 옮겨갔는데 그가 바로 양 효왕(梁孝王)이다.

 

竇皇后親蚤卒, 葬観津.5) 於是薄太后乃詔有司, 追尊竇后父為安成侯, 母曰安成夫人. 令清河置園邑二百家, 長丞奉守, 比霊文園法.

 

두황후의 양친은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관진에 묻혔다. 이리하여 박태후는 관리에게 명령을 해 두황후의 부친을 안성후(安成侯)에 추서하게 했으며 그녀의 모친을 안성부인(安成夫人)이 되게 했다. 청하군(淸河郡)에 원읍을 설치해 2백 호(戶)를 할당했으며 장승(長丞)이 받들어 지키게 했는데, 영문후의 능원의 예의와 똑같게 했다.

 

竇皇后兄竇長君,6) 弟曰竇広国, 字少君.7) 少君年四五歳時, 家貧, 為人所略売, 其家不知其処. 傳十余家, 至宜陽, 為其主入山作炭, (寒)[暮]臥岸下百余人, 岸崩, 尽圧殺臥者, 少君独得脱, 不死. 自卜數日當為侯, 従其家之長安.8) 聞竇皇后新立, 家在観津, 姓竇氏. 広国去時雖小, 識其県名及姓, 又常與其姊採桑堕, 用為符信, 上書自陳. 竇皇后言之於文帝, 召見, 問之, 具言其故, 果是. 又复問他何以為験? 対曰:「姊去我西時, 與我決於傳舎中,9) 丐沐沐我,10) 請食飯我, 乃去.」於是竇后持之而泣, 泣涕交横下. 侍御左右皆伏地泣, 助皇后悲哀. 乃厚賜田宅金銭, 封公昆弟, 家於長安.11)

 

두황후의 오빠는 두장군(竇長君)이며, 동생은 두광국(竇廣國)이라고 부르는데 그의 자(字)는 소군(少君)이다. 소군이 4, 5세 때에 집안 형편이 어려웠는데, 어떤 사람에게 유괴를 당해 팔려갔다.

 

그를 판 집이 어느 곳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10여 집에 팔려 다닌 끝에 의양(宜陽)에 이르렀다. 소군은 주인을 위해서 산으로 들어가 숯을 구웠다. 저녁에 1백여 명이 절벽에서 잠을 잤는데, 절벽이 무너져 내려 거기에서 잠자던 사람들은 모두 압사했다. 다만 소군 한 사람만이 그곳에서 벗어나 죽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 점을 쳐보니 수일 내에 후(侯)에 봉해진다는 점괘가 나오자 주인집에서부터 장안(長安)으로 달려갔다.

 

이때 두황후가 새로 즉위했는데, 그 고향이 관진(觀津)이고 성이 두씨(竇氏)라는 것을 들었다. 광국은 집을 떠날 때에 비록 어렸을지라도 현(縣)의 이름과 성씨, 또 누이와 함께 뽕잎을 따다가 나무에서 떨어졌던 것을 기억해내고는 이것을 증거로 해 상서(上書)를 올려 자신을 설명했다. 두황후는 이 일을 문제(文帝)에게 알렸다. 문제가 광국을 불러들여 그에게 물어보자 광국은 그때의 정황을 일일이 설명해 주었는데 과연 같았다. 또다시 그에게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가를 묻자 광국은 대답하기를 ‘누이는 제가 서쪽으로 갈 때 저와 역참(驛站)의 숙박소에서 헤어졌는데 쌀 씻은 물을 구해다가 저의 머리를 씻어주었으며, 또 밥을 구해다가 저를 먹인 후 비로소 헤어졌습니다.’라 했다.

 

그러자 두황후는 그를 붙잡고서 울었으며 눈물과 콧물이 엉키어 흘러내렸다. 시자(侍者)들 또한 좌우에서 모두 땅바닥에 엎드려 통곡함으로써 황후가 동생과 만나는 비애의 분위기를 증가시켰다. 이리하여 광국에게 논밭, 그리고 집과 돈 등을 후하게 하사했으며, 다른 두씨 형제들까지 봉해 장안으로 집을 옮기게 했다.

 

 

絳侯、潅将軍等曰:「吾属不死, 命乃且県此両人. 両人所出微, 不可不為択師傅賓客, 又复效呂氏大事也.」於是乃選長者士之有節行者與居. 竇長君、少君由此為退譲君子, 不敢以尊貴驕人.

 

강후(絳侯), 관장군(灌將軍) 등이 이르기를 ‘우리들이 살아 있는 동안 우리들의 운명은 곧 이 두 사람의 손 안에 달려 있다. 그 두 사람은 출신이 미천하므로 그들을 위해서 스승이나 빈객(賓客)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또 여씨가 대사를 일으킨 것을 재현하게 될 것이다’라 했다. 이리하여 나이가 많고 너그럽고 관대한 학자 가운데서 양호하고 절조가 있으며, 품행이 방정한 사람을 선택해 그 둘과 함께 거하게 했다. 두장군과 소군은 이로부터 공손하고 겸손하며 양보하는 군자가 되었으며, 감히 존귀한 지위를 이용해 다른 사람 면전에서 자만해하지 않았다.

 

竇皇后病, 失明. 文帝幸邯鄲慎夫人、尹姫, 皆毋子. 孝文帝崩, 孝景帝立, 乃封広国為章武侯.12) 長君前死, 封其子彭祖為南皮侯.13) 呉楚反時, 竇太后従昆弟子竇嬰, 任侠自喜, 将兵, 以軍功為魏其侯.14) 竇氏凡三人為侯.

 

두황후가 중병을 얻어서 두 눈이 실명되었다. 한편 문제는 한단(邯鄲) 신부인(愼夫人), 윤희(尹姬)를 총애했으나 그녀들에게서는 모두 자식을 얻지 못했다. 효문제가 서거하자 효경제(孝景帝)가 즉위했으며, 그는 광국을 장무후(章武侯)에 봉했다. 두장군은 이전에 이미 죽었으므로 그의 아들 팽조(彭祖)를 남피후(南皮侯)에 봉했다.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두태후의 사촌 형제 두영(竇嬰)은 협사들과 교유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번에 군대를 통솔해 군공을 세움으로써 위기후(魏其侯)에 봉해졌다. 두씨는 이로써 모두 세 사람이 후에 봉해졌다.

 

竇太后好黄帝、老子言, 帝及太子諸竇不得不読黄帝、老子, 尊其術.

 

두태후는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학설을 좋아했기에, 경제(景帝)와 태자 및 두씨의 외척들은 모두 황제, 노자의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학술을 공경해 받들었다.

 

竇太后後孝景帝六歳(建元六年)崩,15) 合葬霸陵. 遺詔尽以東宮金銭財物賜長公主嫖.

 

두태후는 효경제보다 6년 늦게 서거했는데 문제와 패릉에 합장되었으며, 모든 동궁(東宮)의 금전 재물을 장공주 표에게 주라는 조서를 남겨놓았다.

 

각주

1 索隠按:皇甫謐云名猗房.

2 正義在冀州棗強県東北二十五里.

3 正義謂宦者為吏, 主発遣宮人也.

4 索隠音疋消反.

5 索隠按:摯虞注決錄云「竇太后父少遭秦亂, 隠身漁釣, 墜泉而死. 景帝立, 太后遣使者填父所墜淵, 起大墳於観津城南, 人閒号曰竇氏青山也」.

6 索隠按:決錄云建字長君.

7 正義括地志云:「竇少君墓在冀州武邑県東南二十七里.」

8 索隠謂従逐其宜陽之主人家, 而皆往長安也.

9 索隠決者, 別也. 傳音転. 傳舎謂郵亭傳置之舎. 蓋竇后初入宮時, 別其弟於傳舎之中也.

10 索隠丐音蓋. 丐者, 乞也. 沐, 米潘也. 謂后乞潘為弟沐.

11 索隠按:公亦祖也, 謂皇后同祖之昆弟, 如竇嬰即皇后之兄子之比, 亦得家於長安. 故劉氏云「公昆弟謂広国等」.

12 索隠地理志県名, 属勃海. 正義括地志云:「滄州魯城県.」

13 索隠地理志県名, 属勃海. 正義括地志云:「故南皮城在滄州南皮県北四里, 漢南皮県也.」

14 索隠地理志県名, 属琅邪.

15 索隠是當武帝建元六年, 此文是也. 而漢書作「元光」, 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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