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四九. 外戚世家[薄太后] 薄太后, 父呉人, 姓薄氏, 秦時與故魏王宗家女魏媼通,1) 生薄姫, 而薄父死山陰, 因葬焉.2)
박태후(薄太后)의 부친은 오(吳)나라 사람으로 성은 박씨(薄氏)이다. 진(秦)나라 때에 그는 과거 위(魏)나라 왕의 종가(宗家) 사람인 위온(魏溫)과 사통해 박희(薄姬)를 낳았다. 박희의 부친은 산음(山陰)에서 죽었는데, 그로 인해서 그곳에 매장되었다.
及諸侯畔秦, 魏豹立為魏王, 而魏媼内其女於魏宮. 媼之許負所相, 相薄姫, 云當生天子. 是時項羽方與漢王相距滎陽, 天下未有所定. 豹初與漢撃楚, 及聞許負言, 心独喜, 因背漢而畔, 中立, 更與楚連和. 漢使曹參等撃虜魏王豹, 以其国為郡, 而薄姫輸織室. 豹已死, 漢王入織室, 見薄姫有色, 詔内後宮, 歳余不得幸. 始姫少時, 與管夫人、趙子児相愛, 約曰:「先貴無相忘.」已而管夫人、趙子児先幸漢王. 漢王坐河南宮成皐台,3) 此両美人相與笑薄姫初時約. 漢王聞之, 問其故, 両人具以実告漢王. 漢王心惨然, 憐薄姫, 是日召而幸之. 薄姫曰:「昨暮夜妾夢蒼竜拠吾腹.」高帝曰:「此貴徴也, 吾為女遂成之.」一幸生男, 是為代王. 其後薄姫希見高祖.
제후들이 진(秦)나라에 반역을 하자 위표(魏豹)는 위나라 왕이 되었는데, 위온은 그녀의 딸을 궁에 들어가게 했다. 위온은 허부(許負)에게 관상을 보게 했는데 박희가 천자를 낳을 수 있다고 했다. 이때에 항우(項羽)는 마침 한왕(漢王) 유방(劉邦)과 형양(滎陽)에서 대치하고 있었으므로 천하는 아직 형세가 정해지지 않았다. 위표는 당초 한(漢)나라와 연합해 초(楚)나라를 공격했는데, 허부의 말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이 때문에 한왕을 배반하고 중립을 지켰으며 더 나아가 초 나라와 연합해 화목했다.
이리하여 한나라는 조참(曹參) 등으로 하여금 공격하게 해 위표를 사로잡았으며, 그의 나라는 군(郡)으로 삼았다. 박희는 직실(織室)로 들여보내졌다. 위표는 이미 죽었다. 한왕은 몇 차례 직실에 드나들었는데, 박희가 자색이 있음을 보고 후궁으로 들이라고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1년여 동안 동침을 하지 않았다.
처음에 박희가 젊었을 때에 관부인(管夫人), 조자아(趙子兒) 등과 친하게 지냈다. 세 사람은 ‘누가 먼저 부귀하게 되든지 간에 서로를 잊지 말자’라고 약속을 했다. 얼마 되지 않아 관부인, 조자아가 먼저 한왕의 총애를 받았다. 한왕은 하남궁(河南宮)의 성고대(成皐臺)에 앉아 있었는데, 두 명의 미인은 박희와 당초에 했던 약속을 조롱해 웃었다.
한왕은 이러한 말을 듣고 그 까닭을 물었으며, 이에 두 사람은 사실을 한왕에게 말해 주었다. 한왕은 그것을 듣고서 마음속으로 매우 슬퍼했으며 박희를 불쌍히 여겼다. 그날로 박희를 불러 동침했다. 박희가 ‘어제 밤 저는 창룡(蒼龍)이 저의 배 위에 드러누워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라고 하자, 한왕은 ‘이것은 귀히 될 징조이다. 나는 너를 도와서 일을 이루게 하겠다.’라 했다. 이윽고 동침을 하자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뒤에 나올 대왕(代王)이다. 그러나 그 동침 이후에 박희는 한왕을 만나는 일이 아주 적었다.
高祖崩, 諸御幸姫戚夫人之属, 呂太后怒, 皆幽之, 不得出宮. 而薄姫以希見故, 得出, 従子之代, 為代王太后. 太后弟薄昭従如代. 代王立十七年, 高后崩. 大臣議立後, 疾外家呂氏彊, 皆称薄氏仁善, 故迎代王, 立為孝文皇帝, 而太后改号曰皇太后, 弟薄昭封為軹侯.4)
고조가 서거하자 고조의 시중을 들며 총애를 받던 척부인 등 비빈(妃嬪)에 대해 여태후는 매우 분노하여 그녀들을 모두 가두고 궁을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박희는 고조의 시중을 들며 잠자리를 같이한 것이 매우 적었던 연유로 궁 밖으로 나갈 수 있었으며, 아들을 따라 대(代)나라로 가서 대왕(代王)의 태후(太后)가 되었다. 태후의 동생 박소(薄昭) 또한 함께 대나라로 갔다.
대왕이 보위에 오른 지 17년이 지나서 고후(高后)가 서거했다. 대신들은 새로운 황제를 옹립할 것을 상의했다. 그들은 외척 여씨 세력이 강대해짐은 적대시했지만 박씨가(薄氏家)는 어질고 착하다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서 대왕(代王)을 영접해 효문제(孝文帝)로 세웠고 박태후(薄太后)를 황태후(皇太后)로 고쳐 불렀으며, 태후의 동생 박소를 지후(軹侯)에 봉했다.
薄太后母亦前死, 葬櫟陽北. 於是乃追尊薄父為霊文侯, 会稽郡置園邑三百家, 長丞已下吏奉守冢, 寝廟上食祠如法. 而櫟陽北亦置霊文侯夫人園, 如霊文侯園儀. 薄太后以為母家魏王後, 早失父母, 其奉薄太后諸魏有力者, 於是召复魏氏, (及尊)賞賜各以親疏受之. 薄氏侯者凡一人.
박태후의 모친은 이 이전에 세상을 떠났으며 역양(櫟陽)의 북쪽에 묻혔다. 이리하여 박태후의 부친에게 영문후(靈文侯)라는 존호(尊號)가 추서되었으며, 회계군(會稽郡)에 3백호(戶)를 분할해 원읍(園邑)을 두었다. 장승(長丞) 이하 관리들이 파견되어 능원(陵園)을 지켰으며, 사당에 음식을 바쳐 제사를 드리는 것은 모두 후위(侯位)의 예의에 따라서 진행되었다. 낙양 북쪽에 영문후 부인의 원(園)을 세웠는데 모든 예의는 영문후의 능원과 같았다.
박태후는 모가(母家)가 위(魏)나라 왕임을 알았으며, 부모는 일찍 서거했으나 자신을 도우며 힘을 냈던 사람들에 대해 그들의 부역 또는 각종 세금을 면제하게 명령을 내렸다. 또 친소(親疎) 정도에 따라 각기 달리 상을 하사했다. 박씨(薄氏) 가족 중 후(侯)에 봉해진 사람은 모두 한 명뿐이다.
薄太后後文帝二年, 以孝景帝前二年崩, 葬南陵.5) 以呂后会葬長陵, 故特自起陵, 近孝文皇帝霸陵.6)
박태후는 문제(文帝)보다 2년 늦은 효경제(孝景帝) 2년에 서거해 남릉(南陵)에 묻혔다. 여후가 고조와 장릉(長陵)에 합장되었기 때문에 박태후의 능묘(陵墓)는 특별히 단독으로 만들어졌는데, 위치는 효문제의 패릉(霸陵)에서 가깝게 했다.
각주 1 索隠媼音烏老反. 然媼是婦人之老者通号, 故趙太后自称媼, 及王媼、劉媼之属是也. 2 索隠顧氏按冢墓記, 在会稽県, 県西北楫山上今猶有兆域. 楫音荘洽反. 正義括地志云:「楫山在越州会稽県西北三里, 一名稷山.」楫音荘洽反. 3 索隠按:是河南宮之成皐台, 漢書作「成皐霊台」. 西征記云「武牢城内有高祖殿, 西南有武庫」. 正義括地志云:「洛州氾水県, 古東虢州, 故鄭之制邑, 漢之成皐県也.」 4 索隠按地理志, 軹県在河内, 恐地遠非其封也. 按:長安東有軹道亭, 或當是所封也. 5 索隠按:廟記云「在霸陵南十里, 故謂南陵」. 按:今在長安東滻水東東原上, 名曰少陰. 在霸陵西南, 故曰「東望吾子, 西望吾夫」是也. 正義括地志云:「南陵故県在雍州萬年県東南二十四里. 漢南陵県, 本薄太后陵邑. 陵在東北, 去県六里.」 6 集解徐広曰:「霸陵県有軹道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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