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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史記世家

史記 卷五十七. 絳侯周勃世家

by 柳川 2019. 6. 23.

                              

 

 

絳侯周勃者,沛人也。其先卷人,徙沛。勃以織薄曲為生,常為人吹簫給喪事,材官引彊。

  高祖之為沛公初起,勃以中涓從攻胡陵,下方與。方與反,與戰,卻適。攻豐。擊秦軍碭東。還軍留及蕭。複攻碭,破之。下下邑,先登。賜爵五大夫。攻蒙、虞,取之。擊章邯車騎,殿。定魏地。攻爰戚、東緡,以往至栗,取之。攻齧桑,先登。擊秦軍阿下,破之。追至濮陽,下甄城。攻都關、定陶,襲取宛朐,得單父令。夜襲取臨濟,攻張,以前至卷,破之。擊李由軍雍丘下。攻開封,先至城下為多。後章邯破殺項梁,沛公與項羽引兵東如碭。自初起沛還至碭,一歲二月。楚懷王封沛公號安武侯,為碭郡長。沛公拜勃為虎賁令,以令從沛公定魏地。攻東郡尉於城武,破之。擊王離軍,破之。攻長社,先登。攻潁陽、緱氏,絕河津。擊趙賁軍屍北。南攻南陽守齮,破武關、嶢關。破秦軍於藍田,至咸陽,滅秦。

  項羽至,以沛公為漢王。漢王賜勃爵為威武侯。從入漢中,拜為將軍。還定三秦,至秦,賜食邑懷德。攻槐裏、好畤,最。擊趙賁、內史保於咸陽,最。北攻漆。擊章平、姚卬軍。西定汧。還下郿、頻陽。圍章邯廢丘。破西丞。擊盜巴軍,破之。攻上邽。東守嶢關。轉擊項籍。攻曲逆,最。還守敖倉,追項籍。籍已死,因東定楚地泗、東海郡,凡得二十二縣。還守雒陽、櫟陽,賜與潁侯共食鍾離。以將軍從高帝反者燕王臧荼,破之易下。所將卒當馳道為多。賜爵列侯,剖符世世勿絕。食絳八千一百八十戶,號絳侯。

  以將軍從高帝擊反韓王信於代,降下霍人。以前至武泉,擊胡騎,破之武泉北。轉攻韓信軍銅鞮,破之。還,降太原六城。擊韓信胡騎晉陽下,破之,下晉陽。後擊韓信軍於硰石,破之,追北八十裏。還攻樓煩三城,因擊胡騎平城下,所將卒當馳道為多。勃遷為太尉。

  擊陳豨,屠馬邑。所將卒斬豨將軍乘馬絺。擊韓信、陳豨、趙利軍於樓煩,破之。得豨將宋最、雁門守圂。因轉攻得雲中守、丞相箕肆、將勳。定雁門郡十七縣,雲中郡十二縣。因複擊豨靈丘,破之,斬豨,得豨丞相程縱、將軍陳武、都尉高肆。定代郡九縣。燕王盧綰反,勃以相國代樊噲將,擊下薊,得綰大將抵、丞相偃、守陘、太尉弱、御史大夫施,屠渾都。破綰軍上蘭,複擊破綰軍沮陽。追至長城,定上穀十二縣,右北平十六縣,遼西、遼東二十九縣,漁陽二十二縣。最從高帝得相國一人,丞相二人,將軍、二千石各三人;別破軍二,下城三,定郡五,縣七十九,得丞相、大將各一人。

  勃為人木彊敦厚,高帝以為可屬大事。勃不好文學,每召諸生說士,東鄉坐而責之:「趣為我語。」其椎少文如此。

  勃既定燕而歸,高祖已崩矣,以列侯事孝惠帝。孝惠帝六年,置太尉官,以勃為太尉。十歲,高後崩。呂祿以趙王為漢上將軍,呂產以呂王為漢相國,秉漢權,欲危劉氏。勃為太尉,不得入軍門。陳平為丞相,不得任事。於是勃與平謀,卒誅諸呂而立孝文皇帝。其語在呂後、孝文事中。

  文帝既立,以勃為右丞相,賜金五千斤,食邑萬戶。居月餘,人或說勃曰:「君既誅諸呂,立代王,威震天下,而君受厚賞,處尊位,以寵,久之即禍及身矣。」勃懼,亦自危,乃謝請歸相印。上許之。歲餘,丞相平卒,上複以勃為丞相。十餘月,上曰:「前日吾詔列侯就國,或未能行,丞相吾所重,其率先之。」乃免相就國。

  歲餘,每河東守尉行縣至絳,絳侯勃自畏恐誅,常被甲,令家人持兵以見之。其後人有上書告勃欲反,下廷尉。廷尉下其事長安,逮捕勃治之。勃恐,不知置辭。吏稍侵辱之。勃以千金與獄吏,獄吏乃書牘背示之,曰「以公主為證」。公主者,孝文帝女也,勃太子勝之尚之,故獄吏教引為證。勃之益封受賜,盡以予薄昭。及系急,薄昭為言薄太后,太后亦以為無反事。文帝朝,太后以冒絮提文帝,曰:「絳侯綰皇帝璽,將兵於北軍,不以此時反,今居一小縣,顧欲反邪!」文帝既見絳侯獄辭,乃謝曰:「吏方驗而出之。」於是使使持節赦絳侯,複爵邑。絳侯既出,曰:「吾嘗將百萬軍,然安知獄吏之貴乎!」

  絳侯複就國。孝文帝十一年卒,諡為武侯。子勝之代侯。六歲,尚公主,不相中,坐殺人,國除。絕一歲,文帝乃擇絳侯勃子賢者河內守亞夫,封為條侯,續絳侯後。

  條侯亞夫自未侯為河內守時,許負相之,曰:「君後三歲而侯。侯八歲為將相,持國秉,貴重矣,於人臣無兩。其後九歲而君餓死。」亞夫笑曰:「臣之兄已代父侯矣,有如卒,子當代,亞夫何說侯乎?然既已貴如負言,又何說餓死?指示我。」許負指其口曰:「有從理入口,此餓死法也。」居三歲,其兄絳侯勝之有罪,孝文帝擇絳侯子賢者,皆推亞夫,乃封亞夫為條侯,續絳侯後。

  文帝之後六年,匈奴大入邊。乃以宗正劉禮為將軍,軍霸上;祝茲侯徐厲為將軍,軍棘門;以河內守亞夫為將軍,軍細柳:以備胡。上自勞軍。至霸上及棘門軍,直馳入,將以下騎送迎。已而之細柳軍,軍士吏被甲,銳兵刃,彀弓弩,持滿。天子先驅至,不得入。先驅曰:「天子且至!」軍門都尉曰:「將軍令曰『軍中聞將軍令,不聞天子之詔』。」居無何,上至,又不得入。於是上乃使使持節詔將軍:「吾欲入勞軍。」亞夫乃傳言開壁門。壁門士吏謂從屬車騎曰:「將軍約,軍中不得驅馳。」於是天子乃按轡徐行。至營,將軍亞夫持兵揖曰:「介胄之士不拜,請以軍禮見。」天子為動,改容式車。使人稱謝:「皇帝敬勞將軍。」成禮而去。既出軍門,群臣皆驚。文帝曰:「嗟乎,此真將軍矣!曩者霸上、棘門軍,若兒戲耳,其將固可襲而虜也。至於亞夫,可得而犯邪!」稱善者久之。月餘,三軍皆罷。乃拜亞夫為中尉。

  孝文且崩時,誡太子曰:「即有緩急,周亞夫真可任將兵。」文帝崩,拜亞夫為車騎將軍。

  孝景三年,吳楚反。亞夫以中尉為太尉,東擊吳楚。因自請上曰:「楚兵剽輕,難與爭鋒。原以梁委之,絕其糧道,乃可制。」上許之。

  太尉既會兵滎陽,吳方攻梁,梁急,請救。太尉引兵東北走昌邑,深壁而守。梁日使使請太尉,太尉守便宜,不肯往。梁上書言景帝,景帝使使詔救梁。太尉不奉詔,堅壁不出,而使輕騎兵弓高侯等絕吳楚兵後食道。吳兵乏糧,饑,數欲挑戰,終不出。夜,軍中驚,內相攻擊擾亂,至於太尉帳下。太尉終臥不起。頃之,複定。後吳奔壁東南陬,太尉使備西北。已而其精兵果奔西北,不得入。吳兵既餓,乃引而去。太尉出精兵追擊,大破之。吳王濞棄其軍,而與壯士數千人亡走,保於江南丹徒。漢兵因乘勝,遂盡虜之,降其兵,購吳王千金。月餘,越人斬吳王頭以告。凡相攻守三月,而吳楚破平。於是諸將乃以太尉計謀為是。由此梁孝王與太尉有卻。

  歸,複置太尉官。五歲,遷為丞相,景帝甚重之。景帝廢栗太子,丞相固爭之,不得。景帝由此疏之。而梁孝王每朝,常與太后言條侯之短。

  竇太后曰:「皇后兄王信可侯也。」景帝讓曰:「始南皮、章武侯先帝不侯,及臣即位乃侯之。信未得封也。」竇太后曰:「人主各以時行耳。自竇長君在時,竟不得侯,死後乃其子彭祖顧得侯。吾甚恨之。帝趣侯信也!」景帝曰:「請得與丞相議之。」丞相議之,亞夫曰:「高皇帝約『非劉氏不得王,非有功不得侯。不如約,天下共擊之』。今信雖皇后兄,無功,侯之,非約也。」景帝默然而止。

  其後匈奴王徐盧等五人降,景帝欲侯之以勸後。丞相亞夫曰:「彼背其主降陛下,陛下侯之,則何以責人臣不守節者乎?」景帝曰:「丞相議不可用。」乃悉封徐盧等為列侯。亞夫因謝病。景帝中三年,以病免相。

  頃之,景帝居禁中,召條侯,賜食。獨置大胾,無切肉,又不置櫡。條侯心不平,顧謂尚席取櫡。景帝視而笑曰:「此不足君所乎?」條侯免冠謝。上起,條侯因趨出。景帝以目送之,曰:「此怏怏者非少主臣也!」

  居無何,條侯子為父買工官尚方甲楯五百被可以葬者。取庸苦之,不予錢。庸知其盜買縣官器,怒而上變告子,事連汙條侯。書既聞上,上下吏。吏簿責條侯,條侯不對。景帝罵之曰:「吾不用也。」召詣廷尉。廷尉責曰:「君侯欲反邪?」亞夫曰:「臣所買器,乃葬器也,何謂反邪?」吏曰:「君侯縱不反地上,即欲反地下耳。」吏侵之益急。初,吏捕條侯,條侯欲自殺,夫人止之,以故不得死,遂入廷尉。因不食五日,嘔血而死。國除。

  絕一歲,景帝乃更封絳侯勃他子堅為平曲侯,續絳侯後。十九年卒,諡為共侯。子建德代侯,十三年,為太子太傅。坐酎金不善,元鼎五年,有罪,國除。

  條侯果餓死。死後,景帝乃封王信為蓋侯。

  太史公曰:絳侯周勃始為布衣時,鄙樸人也,才能不過凡庸。及從高祖定天下,在將相位,諸呂欲作亂,勃匡國家難,複之乎正。雖伊尹、周公,何以加哉!亞夫之用兵,持威重,執堅刃,穰苴曷有加焉!足己而不學,守節不遜,終以窮困。悲夫!

 

<索隱述贊>

 

絳侯佐漢,質厚敦篤。

始擊碭東,亦圍屍北。

所攻必取,所討鹹克。

陳豨伏誅,臧荼破國。

事居送往,推功伏德。

列侯還第,太尉下獄。

繼相條侯,紹封平曲。

惜哉賢將,父子代辱!

 

 

<주발의 내력과 군공>

 

 

강후() 주발()은 패현() 사람이다. 그 선조는 권()지역 사람인데 패현으로 이주했다. 주발은 대나무 따위로 만든 누에치기 용구를 만들어 생계를 꾸렸는데, 초상이 나면 늘 사람들을 위해 피리를 불어주다가 강한 활을 쏘는 재관()이 되었다.

 

고조()가 패공()으로 막 봉기하자 주발은 중연()으로 (고조를) 따라서 호릉()을 공격하고 방여()를 함락시켰다. 방여가 반발하자 전투에 참여하여 적을 물리쳤다. 풍읍()을 공격하고 탕군() 동쪽에서 진()나라의 군대를 공격했다. 군대를 유현()과 소현()으로 돌려 다시 탕군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하읍()을 함락할 때는 먼저 성에 올랐다. 오대부()의 작위가 내려졌다. 몽읍()과 우현()을 공격하여 취했다.

장한()의 전차병과 기병을 공격할 때는 맨 나중에 철수했다. 위()나라 지역을 평정했다. 원척()과 동민()을 공격하고 율()로 가서 그곳을 취했다. 설상()을 공격할 때에 성에 먼저 올랐다. 동아() 아래에서 진()나라의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했다. 복양()까지 뒤쫓아 견성()을 함락시켰다. 도관()과 정도()를 공격하고 완구()를 기습하여 취하고 선보() 현령을 잡았다. 밤에 임제()를 기습하여 취하고, 장현()을 공격하고, 선봉에 서서 권현()에 이르러 그곳을 격파했다. 옹구() 아래에서 이유()의 군대를 공격했다. 개봉()을 공격할 때는 먼저 성 아래에 이른 사람이 많았다. 그 뒤 장한이 항량()을 격파하고 죽이니, 패공은 항우()와 병사들을 이끌고 동쪽 탕군으로 갔다. 처음 패현에서 봉기하여 탕군으로 돌아올 때까지 일 년 두 달이었다.

초나라 회왕()은 패공을 안무후()에 봉하고 탕군의 군수로 삼았다. 패공은 주발을 호분령()에 임명했다. 호분령으로 패공을 따라 위()나라 지역을 평정했다. 성무()에서 동군() 군위()를 공격하여 격파했다. 왕리()의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했다. 장사()를 공격할 때 먼저 성루에 올랐다. 영양()과 구지()를 공격하여 황하 나루를 끊었다. 시향() 북쪽에서 조분()의 군대를 공격했다. 남쪽으로 남양() 군수 여의()를 공격했다. 무관()과 요관()을 격파했다. 남전()에서 진()나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함양()에 이르러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항우가 이르러 패공을 한왕()에 봉했다. 한왕은 주발에게 위무후()의 작위를 내렸다. (한왕을) 따라서 한중()으로 들어가자 장군에 임명했다. (관중으로) 돌아와 삼진()을 평정하고 진()나라에 이르자 (한왕은) 회덕현()을 식읍으로 내렸다.

괴리()와 호치() 공격에서도 공이 가장 많았다. 함양에서 조분과 내사() 보()를 공격할 때에도 최고였다. 북으로 칠현()을 공격했고, 장평()과 요앙()의 군대를 공격했으며, 서쪽으로 견현()을 평정했다. 돌아와 미성()과 번양()을 함락시켰다. 장한()을 폐구()에서 포위 공격했다. 서현(西) 현승()을 격파하고, 도파()의 부대를 공격하여 격파했다. 상규()를 공격하고 동쪽 요관()을 지켰다. 군대를 돌려 항적(항우)을 공격했다. 곡우() 공격에서도 최고였다. 돌아와 오창()을 지키다가 항우를 추격했다. 항우가 죽자, 그 참에 동쪽으로 초나라 지역인 사수()와 동해() 두 군()을 평정하고 모두 22개 현을 취했다.

돌아와 낙양()과 역양()을 수비했다. 종리현()을 영음후() 관영()과 공유하는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장군으로 고조를 따라 반란을 일으킨 연왕() 장도()를 역성() 아래에서 격파시켰다. 그가 이끄는 장수와 병졸들이 늘 앞장서서 길을 개척하는 경우가 많았다. 제후 반열에 올리고 부절을 나누어 대대로 끊어지지 않게 했다. 강() 8,180호를 식읍으로 삼게 하여 강후()로 불렀다.

 

<한나라 초기 정권 안정과 주발의 역할>


장군으로 고제를 따라서 반란을 일으킨 한왕() 신()을 대()에서 토벌하고 곽인현()을 항복시켰다. 앞장서서 무천()에 이르러 흉노의 기병을 공격하여 무천 북쪽에서 격파했다. 군대를 돌려서 한왕 신의 군대를 동제()에서 공격하여 격파했다. 돌아오면서 태원군()의 여섯 개의 성을 항복시켰다. 진양성() 아래에서 한왕 신과 흉노의 기병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진양성을 함락시켰다. 그 뒤 사석()에서 한왕 신의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북으로 80리를 뒤쫓았다. 돌아와 누번()의 성 세 개를 공격하고, 그 참에 평성() 아래에서 흉노의 기병을 공격했다. 그가 거느린 장수와 병졸들은 늘 앞장서서 길을 열었다. 주발은 태위()로 승진했다.

진희()를 공격하여 마읍현()을 도륙했다. 장졸들이 진희의 장군 승마치()를 베었다. 한왕 신, 진희, 조리()의 군대를 누번에서 공격하여 격파했고, 진희의 부장() 송최()와 안문군()의 군수 환()을 사로잡았다. 내친 김에 운중군()을 공격해서 군수 속(), 승상 기사()와 장군 훈()을 사로잡으니 안문군의 17개 현과 운중군의 12개 현이 평정되었다. 다시 기세를 타고 영구()에서 진희를 격파하여 진희를 베고 그의 승상 정종(), 장군 진무(), 도위() 고사()를 포로로 잡으니 대군()의 9개 현이 평정되었다.

연왕() 노관()이 반란을 일으키자 주발은 상국으로 번쾌() 대신 장수가 되어 계현()을 함락시켰고, 노관의 대장 지(), 승상 언(), 군수 경(), 태위 약()과 어사대부 시()를 잡고 혼도()를 도륙했다. 상란()에서 노관의 군대를 격파했고, 다시 저양()에서 노관의 군대를 격파하고는 장성()까지 추격하니 상곡군()의 12개 현, 우북평군()의 16개 현, 요서(西)와 요동()의 29개 현, 어양군()의 22개 현이 평정되었다. 고조를 따라서 도합 상국 1명, 승상 2명, 장군과 2천 석() 관리 각 3명을 잡았고, 별도로 2개 부대를 격파하고 3개의 성을 함락시켰고 5개 군, 79현을 평정했으며 승상과 대장 각 1명을 잡았다.

주발은 사람이 소박하고 강직하며 후덕하여 고제는 큰일을 맡길 수 있다고 여겼다. 주발은 글이나 꾸미는 것을 좋아 하지 않아서 매번 학자나 유세객들을 불러서는 동쪽을 향해 앉아서 “내게 할 말이 있으면 얼른얼른 하시오!”라며 재촉했다. 그 둔하고 꾸밈없기가 이와 같았다.

주발이 연()나라를 평정하고 돌아오니 고조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제후 반열에서 효혜제()를 섬겼다. 혜제 6년에 태위관()을 두어 주발을 태위로 임명했다. 10년 뒤, 여후()가 세상을 떠났다. 여록(祿)이 조왕()으로 한나라의 상장군()이 되었고, 여산()은 여왕()으로 한의 상국이 되어 한나라의 권력을 쥐고 유씨를 위태롭게 했다.

주발은 태위인데도 군문에 들어갈 수 없었고, 진평()은 승상인데도 일을 맡을 수 없었다. 이에 주발은 진평과 모의해 마침내 여씨들을 죽이고 효문황제()를 옹립했다. 이 일은 「여태후본기()」와 「효문제본기()」에 있다.

 

<만년의 주발>


문제()는 즉위하자, 주발을 우승상()으로 삼고, 황금 5천근과 식읍을 1만 호까지 내렸다. 한 달 남짓 뒤에 누군가가 주발에게 “그대가 여씨들을 죽이고 대왕을 옹립하니 그 위세가 천하를 떨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대는 큰 상과 귀한 자리를 받고 총애를 얻었으나 이것이 오래가면 화가 몸에 미칠 것입니다.”라고 했다.

주발은 두려웠다. 또 스스로 위기를 느끼고는 바로 사직을 청하고 승상의 도장을 반환하니 주상이 이를 허락했다.

일 년 남짓 지나 승상 진평이 죽자, 주상은 다시 주발을 승상에 임명했다. 열 달 남짓 뒤, 주상은 “지난 번 내가 조서를 내려 제후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라고 했는데 아직 떠나지 않고 있는 사람도 있소. 승상은 내게 소중한 사람이니 솔선하여 돌아가시오.”라고 했다. 이에 승상을 사직하고 봉국으로 돌아갔다.

일 년 남짓 지나 하동군()의 군수와 군위가 현을 순시하다가 강현에 이를 때마다 강후 주발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며, 늘 몸에 갑옷을 두르고 집안사람들에게도 병기를 지니고 그들을 만나게 했다.

그 뒤, 누군가가 글을 올려 주발이 반역을 꾀한다고 알리자 정위()에게 처리하게 했다. 정위는 그 일을 장안으로 내려 보내서 주발을 체포하여 다스리게 했다. 주발은 겁이 나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옥리가 갈수록 더 주발에게 모욕을 주자 주발은 천금을 옥리에게 주었다. 옥리는 목간의 뒷면에다 “공주를 증인으로 삼으라.”라고 써서는 주발에게 보여주었다. 공주는 효문제의 딸로 주발의 맏아들 승지()의 아내였다. 이 때문에 옥리는 공주를 끌어다 증인으로 삼으라고 한 것이다.

주발은 추가로 받았던 땅이며 상을 모두 박소()에게 준 바 있었다. 일이 급박해지자 박소가 박() 태후에게 주발을 위해 사정을 말했고, 박 태후 역시 반역과 같은 일은 없다고 여겼다. 문제가 인사를 드리러 오자, 태후는 두건으로 문제를 때리며 “강후는 황제의 옥새를 갖고 북군을 거느리고 있을 때도 반역하지 않았는데, 지금 작은 현 하나를 갖고서 반역을 꾀하려고 했겠습니까?”라고 했다.

문제는 강후의 옥중 진술서를 보았기에 바로 사죄하며 “관리들이 바로 증거를 살펴서 내보낼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사신을 시켜 부절을 가지고 가서 강후를 사면시키고 작위와 봉읍을 회복시켰다. 옥에서 나온 강후는 “내가 일찍이 백만 대군을 거느렸지만 옥리가 이렇게 대단한 줄 어찌 알았으랴!”라고 했다.

강후는 다시 봉국으로 돌아갔고, 효문제 11년에 죽었다. 시호를 무후()라 했다. 아들 주승지()가 후작을 이었다. 6년 뒤에 아내인 공주와 사이가 맞지 않고 살인에 연루되어 나라가 해체되었다. 나라가 끊어진 지 일 년 뒤 문제는 강후 주발의 아들 중 유능한 하내() 군수 주아부()를 택하여 조후()에 봉하여 강후의 뒤를 잇게 했다.

 

 
<오나라와 초나라, 7국의 난과 주아부의 공로>

주아부는 웃으며 “신의 형이 이미 아버님의 후작을 이었고, 돌아가시면 당연히 그 아들이 뒤를 이를 것이니 주아부가 어찌 제후가 된다고 말하시오? 또 허부 당신 말대로 부귀해진다고 해놓고 또 굶어죽는다는 것은 무슨 말이오? 내게 잘 좀 알려주시오.”

허부는 주아부의 입을 가리키며 “세로선이 입까지 내려와 있는데, 이것이 굶어죽을 징조입니다.”라고 했다.

그로부터 3년 뒤에 그 형 강후 승지가 죄를 지었고, 문제는 강후의 아들 중 똑똑한 자를 고르니 모두들 주아부를 추천하여 주아부를 조후에 봉하고 강후의 작위를 잇게 했다.

 

주발의 아들 주아부

 

문제 후원() 6년에 흉노가 변경을 대거 침입했다. 이에 종정() 유례()를 장군으로 삼아 패상()에 주둔시키고, 축자후() 서려()를 장군으로 삼아 극문()에 주둔시키는 한편 하내군수 주아부를 장군으로 삼아 세류()에 주둔시켜 흉노를 방비하게 하고는 주상이 몸소 군을 위로하러 갔다. 패상과 극문의 군영에 이르러서는 곧장 말을 달려 안으로 들어가니 장군 이하 모두가 말을 타고 나와 맞이했다. 다음으로 세류의 군영에 이르자 군사와 군리들이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병기를 들고 화살에 활을 팽팽하게 매겨놓고 있었다. 천자의 선발대가 도착했으나 들어갈 수 없었다.

선발대가 “천자께서 곧 오신다.”라고 하자 군문의 도위는 “장군께서 명령하시길 ‘군중에서는 장군의 명령을 듣지 천자의 조서라도 듣지 않는다.’고 하셨소.”라고 했다. 얼마 뒤 주상이 도착했으나 역시 들어갈 수 없었다. 이에 주상은 사신에게 부절을 갖고 가서 장군에게 “내가 들어가 군을 위로하여 한다.”라고 전하게 했다. 주아부는 그때서야 군영의 문을 열라고 전했다. 군영의 문을 지키는 군관이 황제를 따르는 수레와 기병들에게 “장군께서 군중에서는 말을 달릴 수 없다고 규정하셨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천자는 말고삐를 쥐고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군영에 이르자 장군 주아부가 무기를 든 채 가볍게 고개를 숙이면서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병사는 큰절을 하지 않으니 군대의 예로 인사를 드리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천자는 감동하여 얼굴색을 바꾸고 수레의 횡목을 잡고는 사람을 시켜 “황제께서 삼가 장군을 위로하는 바이오.”라고 치하했다. 예를 마치고 군영을 떠나 군문을 나서니 신하들이 모두 놀랐다. 문제는 “아, 이야말로 진정한 장군이로다! 지난 번 패상과 극문의 군대는 애들 놀이에 지나지 않는구나. 그 장수들은 기습하여 포로로 잡을 수도 있겠지만 주아부는 누가 감히 범하겠는가!”라며 한참 동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 달 지나 삼군은 모두 철수했고, 주아부를 중위()에 임명했다.

효문제가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태자에게 “급한 일이 있으면 주아부가 제대로 장병을 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일러두었다. 문제가 세상을 떠나자 주아부를 거기장군()에 임명했다.

효경제() 3년에 오()나라와 초()나라가 반란을 일으켰다. 주아부는 중위로서 태위()의 직무를 대행하여 동쪽으로 오나라와 초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면서 직접 주상에게 “오나라와 초나라가 강하고 민첩하여 맞서 싸우기 어렵습니다. 양나라에 맡겨 놓은 다음 저들의 식량 운송로를 끊으면 제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요청하니 주상은 이를 허락했다.

태위가 형양()에서 병사들과 합류하자 오나라가 막 양나라를 공격하고 있었다. 양나라가 위급해지자 구원을 요청했다. 주아부가 병사들을 이끌고 동북쪽 창읍()으로 가서는 보루를 깊이 판 채 수비에 들어갔다. 양나라가 하루가 멀다 하고 사신을 보내 태위에게 요청했으나 태위는 유리한 지형을 지킨 채 보내주지 않았다. 양나라가 경제에게 글을 올려 상황을 말하자 경제는 사신을 보내 양나라를 구하라는 조서를 내렸지만 태위는 조서를 받들지 않고 보루를 단단히 지키면서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는 궁고후() 등에게 경기병()으로 오나라와 초나라 군대의 후방 식량 보급로를 끊게 했다. 오나라군은 식량이 부족하여 굶주리자 몇 번이고 싸움을 걸어왔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한 번은 밤에 군중 안에서 서로 치고받는 소란이 일어나 태위의 군막까지 알려졌으나 태위는 끝내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뒤 다시 진정되었다.

그 뒤에 오나라군이 보루 동남쪽 귀퉁이를 습격했는데, 태위는 서북쪽을 방비하게 했다. 잠시 뒤 오나라군의 정예병이 과연 서북쪽을 공격해왔으나 침입하지 못했다. 오나라군은 굶주림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태위는 정예병을 내어 추격하여 대파했다.

오왕 유비()는 자신의 군대를 버리고, 장사 수천 명과 도주하여 강남 단도현()을 거점으로 삼았다. 한나라의 병력은 승세를 몰아 마침내 전부를 포로로 잡고 그 병사들을 항복키는 한편 오왕에게 천금을 현상금으로 걸었다. 한 달 남짓 지나자 월() 사람이 오왕의 머리를 가지고 알리러 왔다. 전후 서로 석 달 동안 치고 받은 끝에 오나라와 초나라를 깨고 평정했다. 이에 장수들은 태위의 계책이 옳았음을 알게 되었으나 이 때문에 양효왕과 태위 사이에는 틈이 생기고 말았다.

 

<주아부의 죽음>

돌아오자 다시 태위관()으로 복귀했고, 5년 뒤에는 승상으로 승진하니 경제가 더욱 그를 중시했다.

경제가 율태자()를 폐하려고 할 때 승상은 한사코 이를 따졌으나 소용없었다. 경제가 이 일로 그를 멀리 했다. 그리고 양효왕은 입조할 때마다 늘 태후에게 조후의 단점을 말했다.

두 태후가 “왕 황후의 오라비 왕신()이 제후가 될 만하오.”라고 했다. 경제는 “당초 남피후()와 장무후()는 선제께서 제후로 삼지 않으셨고, 신이 즉위하고서야 그들을 제후로 봉했습니다. 왕신은 봉할 수 없습니다.”라며 사양했다.

두 태후는 “군주는 때에 따라 일을 처리할 뿐입니다. 두장군()은 생전에 끝내 제후가 되지 못하고 죽은 뒤, 그 아들 두팽조()가 거꾸로 제후가 되었지요. 내가 이 일이 참 한이 됩니다. 황제께서는 어서 왕신을 제후로 삼으세요.”라고 했다.

경제는 “승상과 상의하도록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승상과 상의하자) 주아부는 “고제께서 맹약하시길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고, 공이 없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 맹약대로 하지 않으면 천하가 모두 그를 공격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왕신이 황후의 오라비이긴 하지만 공이 없습니다. 그를 제후로 삼는다는 것은 맹약을 어기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경제는 아무 말 없었고, 일은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그 뒤, 흉노 왕 유서로() 등 다섯 사람이 항복해오자, 경제는 이들을 제후로 삼아 뒤에 남은 자들을 자극하려 했다. 승상 주아부는 “저들이 자신의 군주를 배반하고 폐하께 항복했는데 폐하께서 저들을 제후로 삼는다면 절개를 지키지 않는 신하들을 무슨 수로 나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경제는 “승상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군요.”라며 바로 유서로 등 모두를 제후로 삼았다. 이에 주아부는 병을 구실로 휴가를 청했고, 경제 중원 3년 병을 이유로 승상에서 면직시켰다.

얼마 뒤 궁중에 있던 경제가 조후를 불러 먹을 것을 내리면서 큰 고기 덩어리 하나만 놓고는 잘게 썬 고기나 젓가락은 주지 않았다. 조후는 마음이 불편하여 고개를 돌려 술자리를 주관하는 상석()에게 젓가락을 가져오게 했다. 경제가 이를 보고는 웃으면서 “이 자리가 그대의 마음에 차지 않는 모양이오?”라고 했다. 조후는 모자를 벗어 사죄했다. 주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조후도 잰걸음으로 나가버렸다. 경제가 그가 나가는 것을 보면서 “저렇게 불만이 많은 자는 어린 군주의 신하가 될 수 없다!”라고 했다.

얼마 뒤, 조후의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공관()과 상방()에서 5백 건의 순장용 갑옷과 방패를 사들였다. 이것을 운반하는 고용인들이 힘들어 하자, 돈을 주지 않았다. 고용인들은 이 일이 나라의 기물을 몰래 사들인 것임을 알고는 화가 나서 조후의 아들을 위에다 고발했고, 일은 조후에까지 연루되었다.

문서가 주상에게까지 전해지자 주상은 담당 관리에게 내려 보냈다. 관리가 문서를 가지고 조후에게 따졌으나 조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경제가 욕을 하며 “내가 이걸로는 따지지 않겠다!”라며 조서를 내려 정위에게 넘겼다.

정위가 “그대가 반란을 일으키려 했소?”라고 문책했다. 주아부는 “신이 사들인 기물들은 순장품들인데 무슨 반란이란 말인가?”라고 했다. 관리가 “그대가 지상에서는 반란을 꾀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지하에서 반란하려고 하지 않았을까?”라고 했다. 관리의 다그침은 갈수록 심해졌다. 당초 관리가 조후를 체포했을 때 조후는 자살하려고 했으나 부인이 그를 말리는 바람에 죽지 못하고 정위에게 넘겨진 것이다. 이렇게 닷새 동안을 먹지 않다가 피를 토하면서 죽었다. 봉국은 해체되었다.

봉국과 작위가 끊어진 지 일 년만에 경제는 강후 주발의 다른 아들인 주견()을 평곡후()로 봉해 강후의 뒤를 잇게 했다. 19년 뒤, 그가 죽자 공후()란 시호를 내렸다. 아들 주건덕()이 후작을 이었고, 13년 뒤 태자태부()가 되었다. 그가 바친 종묘 제사에 쓰는 주금()의 질이 나빠 원정() 5년 죄를 받았고 나라는 해체되었다.

조후 주아부는 정말 굶어 죽었다. 죽은 뒤 경제는 왕신을 개후()에 봉했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강후 주발은 처음 평민이었을 때는 거칠고 소박한 사람이었다. 재능도 보통을 뛰어넘지 못했다. 고조를 따라 천하를 평정할 때 장상의 자리에 있었고, 여씨들이 난을 일으키려 하자, 주발은 나라를 난에서 구하고 제대로 되돌려 놓았다. 이윤()이나 주공()이라도 무엇을 더하겠는가? 주아부의 용병은 위엄이 넘치고 강인했으니 사마양저()라도 무엇을 더할 수 있겠는가? 자신에게 만족하며 배우질 않고, 절개를 지켰지만 불손하여 끝내 곤궁에 처하고 말았으니 슬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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