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五九. 五宗世家경제의 후손들
<경제의 아들들과 율희의 세 아들> 하간(河間)의 헌왕(獻王) 유덕은 효경제 전원 2년(기원전 155년)에 황제의 아들로서 하간왕에 봉해졌다. 유학을 좋아하여 복장이나 행동을 꼭 유생을 본받으니 산동의 유생들이 많이 그를 따르면서 교류했다. 즉위 26년 만에 죽고, 아들 공왕(共王) 유불해(劉不害)가 섰다. (유불해는) 4년 만에 죽고, 아들 강왕(剛王) 유기(劉基)가 뒤를 이었다. (유기는) 12년 만에 죽고, 아들 경왕(頃王) 유수(劉授)가 뒤를 이었다. 임강(臨江)의 애왕(哀王) 유알우는 효경제 전원 2년 황자의 신분으로 임강왕이 되었다. 3년 만에 죽고, 후계자가 없어 나라를 해제되어 군이 되었다. 임강의 민왕(閔王) 유영은 경제 전원 4년(기원전 153년)에 황태자가 되었으나 4년 뒤 폐출되어 원래 태자의 신분으로 임강왕이 되었다. 민왕 4년에 종묘의 담장 밖 빈터를 침범하여 궁실을 지은 죄에 연루되어 주상이 유영을 불러들였다. 유영이 길을 나서 강릉(江陵城) 북문 신도에서 제를 올리고 수레에 올랐는데 수레 축이 부러지면서 수레가 망가졌다. 강릉의 부로들이 눈물을 흘리며 “우리 왕이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며 속삭였다. 유영이 도착하자, 중위부(中尉府)로 가서 심문을 받았는데 중위 질도(郅都)가 왕을 심문하니 왕이 겁을 먹고 자살해버렸다. 남전(藍田)에 묻었는데 수만 마리의 제비들이 흙을 물어다가 봉분 위에 갖다놓으니 백성들이 가엾게 여겼다. 유영은 맏아들로 죽은 뒤, 후계자가 없어 나라는 해제되고 땅은 한나라로 편입되어 남군(南郡)이 되었다. 위 세 나라의 첫 왕들은 모두 율희의 아들들이다.
<정희 소생의 아들들> 26년 만에 죽고, 아들 유광(劉光)이 뒤를 이었다. (유광이) 처음에는 음악, 수레, 말 따위를 좋아했으나 만년에는 인색해져 그저 재물이 모자라면 어쩌나 걱정했다. 강도(江都)의 역왕(易王) 유비(劉非)는 경제 전원 2년에 황제의 아들로서 여남왕(汝南王)이 되었다. 오초(吳楚)의 반란 때 유비는 15세였는데 힘이 넘쳐 오나라를 치겠다는 글을 올렸다. 경제가 유비에게 장군 도장을 주어 오나라를 치게 했다. 오나라가 격파당하고 2년 뒤 강도왕(江都王)으로 옮겨 오나라의 옛 땅을 다스리게 되었고, 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황제로부터 깃발을 받았다. (무제) 원광(元光) 5년(기원전 130년)에 흉노가 한나라를 대거 침입하자 유비는 흉노를 치고 싶다는 글을 올렸으나, 주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유비는 기력이 좋았고, 궁전 짓기를 즐겼으며 사방의 호걸들을 불러들이는 등 교만과 사치가 심했다. 즉위 26년에 죽고, 아들 유건(劉建)이 왕이 되었으나, 7년에 자살했다. 회남왕(淮南王)과 형산왕(衡山王)이 반란을 꾀했을 때 유건은 그 음모를 꽤 알고 있었다. 그는 나라가 회남과 가까워 어느 날 일이 터지면 회남에 합병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몰래 병기를 만들고 늘 그 아버지가 하사받은 장군 도장을 찬 채, 천자의 깃발을 달고 나갔다. 역왕이 죽고, 장례를 마치기도 전에 유건은 역왕이 총애하던 미인 요희(淖姬)에 눈독을 들여 밤에 사람을 시켜 빈소로 맞아들여 간통했다. 회남의 사건이 발각되어 그 일당을 치죄하는데 강도왕 유건이 꽤나 걸려 있었다. 유건이 겁이 나서 사람을 시켜 많은 금전으로 그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 또 무당을 신봉하여 사람을 시켜 기도와 제사를 올리며 (조정을) 저주했다. 유건은 또 여자 형제들과도 간통을 저질렀는데, 일이 알려지자 조정의 공경들이 유건을 잡아다 죄를 다스리자고 했다. 천자는 차마 그렇게는 못하고 대신을 시켜, 왕을 심문하게 하니 왕의 저지른 죄를 인정하고 자살했다. 나라를 해제되고 땅은 한나라 조정에 편입되어 광릉군(廣陵郡)이 되었다. 교서(膠西)의 우왕(于王) 유단은 경제 전원 3년 오초(吳楚) 7국의 난이 평정되고 난 뒤, 황제의 아들로서 교서왕이 되었다. 유단은 사람이 잔인하고 포악했고, 또 음위(陰痿, 발기부전) 증상이 있어 부인을 가까이 하면 몇 달을 아팠다. 그리고 총애하는 소년을 시랑으로 삼았는데, 시랑이 된 지 얼마 뒤, 후궁과 음란한 짓을 저질렀다. 유단은 그를 죽여 없애고 후궁과 그 사이에서 난 아들까지 죽였다. (유단이) 여러 차례 법을 어기자, 조정의 공경들이 유단을 죽이라고 여러 번 청했으나, 천자는 형제라서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러자 유단의 못된 짓은 더 심해졌다. 담당 관리가 다시 그 나라를 삭감하자고 청하여 태반을 삭감했다. 유단은 화가 나서 아무 생각 없이 행동했다. 창고가 허물어져 파손된 재물이 억을 헤아려도 옮기지 않고 그대로 방치했다. 관리들에게 세금을 걷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유단은 경호를 모두 물리치고 궁문을 봉쇄한 채, 한 쪽 문으로만 나다녔는데 성과 이름을 바꾸고 평민 복장을 한 채, 다른 군과 나라를 오갔다. (조정에서 교서로 파견한) 상(相)과 2천석 관리가 조정의 법에 따라 다스리려 하면 유단은 바로 그 죄를 찾아내어 고발하고, 죄가 없는 사람은 약이라 속여 독살을 했다. 온갖 속임수를 다 짜내어 대응했는데 남의 충고를 물리칠 정도로 강단이 있었고, 자신의 잘못을 꾸밀 수 있을 만큼 꾀도 많았다. 상이나 2천석 관리들이 왕(유단)을 따라 다스리면 한나라 조정은 법으로 그들을 다스렸다. 이 때문에 교서는 작은 나라였지만 죽거나 다친 2천석 관리들이 아주 많았다. (유단은) 47년 만에 죽었으나, 끝내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 나라는 해제되고 땅은 조정에 편입되어 교서군이 되었다. 위 세 나라의 첫 왕들은 모두 정희의 아들이었다.
<가 부인 소생의 아들들> 유팽조는 총애하는 첩과 자식들이 많았다. 상과 2천석 관리들이 조정의 법으로 (조나라를) 다스릴 경우, 조왕에게 해가 갈 것이 뻔했다. 이 때문에 상과 2천석 관리들이 올 때마다 유팽조는 검은 평민 복장을 하고 몸소 나가 맞이했고, 2천석 급 관리의 숙소를 청소하기까지 했다. 일부러 어려운 일들을 만들어 그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2천석 급 관리가 말실수로 (조정에서) 금기하는 말을 했다가는 바로 기록해두었다가 이 관리들이 법대로 다스리려 하면 이것으로 협박했고, 듣지 않으면 글을 올려 고발했는데 간사한 방법으로 이익을 취했다는 식으로 무고했다. 유팽조가 재위한 50여 년 동안 상이나 2천석 관리는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죄를 얻어 떠났는데, 심하면 죽고 가벼우면 형벌을 받았다. 이 때문에 2천석 관리는 감히 법대로 하지 못했다. 조왕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면 사람을 각 현으로 보내 교역을 독단하니 조정에 들어오는 세금보다 더 많았다. 이 때문에 조왕의 집에는 금전이 많았다. 하지만 첩과 자식들에 모조리 다 나누어 주었다. 유팽조는 지난 날 강도 역왕이 아끼던 첩이자 유건이 몰래 간통했던 요희를 첩으로 삼아 아주 아꼈다. 유팽조는 궁실을 짓거나 미신 따위는 좋아하지 않았으나, 관리들의 일을 직접 하길 좋아했다. 글을 올려 나라 안의 도적을 감독하겠다고 하여 밤마다 병사들을 데리고 한단을 순찰하고 다녔다. 오가는 사신과 객들은 험악한 유팽조 때문에 한단에 감히 머물질 못했다. 그의 태자 유단(劉丹)은 딸, 같은 배에서 난 누이들과 간통하는 바람에 그의 문객 강충(江充)과 틈이 벌어졌다. 강충이 유단을 고발하여 유단은 그 때문에 폐출되었다. 조나라는 다시 태자를 세웠다. 중산(中山)의 정왕(靖王) 유승은 효경제 전원 3년에 황제의 아들로서 중산왕(中山王)이 되었다. 14년에 효경제가 세상을 떠났다. 유승은 사람이 술과 여자를 좋아하여 자식이 모두 120명이 넘었다. 늘 형 조왕과 서로를 비난했는데 “형이 왕이 되어 관리들이나 하는 일을 한다. 왕이라면 날마다 음악을 듣고 여자를 즐겨야 한다.”라고 했다. 조왕 역시 유승을 비난하길 “중산왕은 매일 음탕함에만 빠져 천자를 도와 백성을 돌보지 않으니 어찌 (천자의) 울타리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재위 42년에 죽고, 아들 애왕(哀王) 유창(劉昌)이 이었으나, 일 년 만에 죽고 아들 유곤치(劉昆侈)가 중산왕을 이었다. 이상 두 나라의 첫 왕들은 가 부인의 아들이다.
<당희의 아들> 즉위 27년에 죽고 아들 강왕(康王) 유용(劉庸)이 섰다. 28년에 죽고, 아들 유부구(劉鮒鮈)가 장사왕으로 즉위했다. 위 나라의 첫 왕은 당희의 아들이다.
<왕아후의 아들들> 12년 만에 죽자, 아들 유제(劉齊)가 왕으로 즉위했다. 유제에게는 총애하는 신하 상거(桑距)가 있었다. 그 뒤 상거가 죄를 지어 상거를 죽이려고 하자, 상거가 도망쳤다. 왕은 상거의 가족을 잡아들였다. 상거가 왕을 원망하여 바로 글을 올려 왕 유제가 친누이들과 간통했다고 고발했다. 이 이후 왕 유제는 여러 차례 글을 올려 한나라 조정의 공경과 총애를 받는 신하 소충(所忠) 등을 고발했다. 교동(膠東)의 강왕(康王) 유기(劉寄)는 효경제 중원 2년에 황자의 신분으로 교동왕이 되었다가 28년 만에 죽었다. 회남왕이 반란을 꾀했을 때 유기는 이 일을 어느 정도 알고 몰래 전차며 화살촉 등을 만들어 전투 준비를 해 놓고는 회남왕이 일어나기만 기다렸다. 관리가 회남 사건을 조사하던 중 유기가 언급되어 나왔다. 유기는 주상과 가장 친했기 때문에 이에 마음이 상하여 병이 나서 죽었다. 아 때문에 후계자도 감히 정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주상에게 알려졌다. 유기에게는 맏아들 유현(劉賢)이 있었지만 어머니가 총애를 받지 못했다. 작은아들 유경(劉慶)은 어머니가 사랑을 받았고, 유기도 늘 유경을 세우고 싶었지만 차례가 아니고 잘못도 있던 터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주상이 이를 가엾게 여겨 유현을 교동왕으로 삼아 강왕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유경은 옛날 형산 땅에 봉하고 육안왕(六安王)이라 했다. 교동왕 유현이 즉위 14년에 죽자, 시호를 애왕(哀王)이라고 했다. 아들 유경(劉慶)이 왕이 되었다. 육안왕 유경은 무제 원수(元狩) 2년(기원전 121년)에 교동 강왕의 아들로서 육안왕이 되었다. 청하(淸河)의 애왕(哀王) 유승은 효경제 중원 3년(기원전 147년)에 황자의 신분으로 청하왕(淸河王)이 되었다. 12년에 죽었는데 후사가 없어 나라를 해제되고 땅은 조정에 편입되어 청하군(淸河郡)이 되었다. 상산(常山)의 헌왕(憲王) 유순은 효경제 중원 5년에 황자의 신분으로 상산왕(常山王)이 되었다. 유순은 황제(무제)와 가장 가까웠고 경제의 막내아들인지라 교만하고 음탕하여 여러 번 죄를 범했지만 주상은 늘 너그럽게 봐주었다. 즉위 32년에 죽었고, 태자 유발(劉勃)이 왕으로 즉위했다. 당초 헌왕 유순에게는 그가 총애하지 않는 첩이 낳은 맏아들 유탈(劉梲)이 있었다. 유탈은 어머니가 총애를 받지 못한 까닭에 그 또한 왕의 사랑을 얻지 못했다. 왕후 수(脩)가 태자 유발을 낳았다. 헌왕에게는 첩이 많았는데 그가 총애하는 첩이 아들 유평(劉平), 아들 유상(劉商)을 낳는 바람에 왕후는 총애를 받는 일이 아주 드물었다. 헌왕의 병이 심각해지자 총애하는 첩들이 늘 간병했는데, 왕후는 또 이를 질투하여 간병하지 않았고 가더라도 숙소로 바로 돌아왔다. 의사가 약을 올려도 태자 발은 직접 맛을 보지도 않았고 밤을 새워 간병하지도 않았다. 왕이 죽자 왕후와 태자는 그때서야 왔다. 헌왕은 평소 큰아들 유탈을 아들처럼 여기지 않아, 죽을 때도 재물을 나눠주지 않았다. 낭관이 태자와 왕후에게 여러 아들, 맏아들 탈과 재물을 함께 나누라고 했지만 태자와 왕후는 듣지 않았다. 태자가 즉위해서도 탈을 거두어 돌보지 않았다. 탈이 왕후와 태자에게 원한을 가졌다. 조정의 사신이 헌왕의 장례를 보러 오자, 유탈은 자신이 나서 헌왕의 병중에 왕후와 태자는 간병하지 않았고, 6일 만에 빈소를 나왔으며, 태자 발은 간통, 음주, 노름, 격축 등을 일삼으며 여자들과 수레를 타고 성과 저자를 돌아다니며 감옥에 가서 죄수를 구경했다고 고발했다. 천자는 대행(大行) 장건(張騫)을 보내 왕후와 왕 유발을 조사하게 했다. (장건은) 유발과 간통한 자들과 여러 증인들을 체포할 것을 요청했으나 왕(유발)이 그들을 숨겼다. 관리가 체포하길 요구하자 다급해진 유발은 사람을 시켜 그 관리를 때리고 멋대로 조정에서 의심하고 있던 죄수들을 석방시켰다. 담당 관리가 헌왕의 왕후 수와 왕 유발을 죽이고 청했다. 주상은 왕후 수가 행실이 좋지 않아 유탈을 죄인으로 만들었고 유발에게는 좋은 스승이 없었다고 생각하여 차마 죽이지 못했다. 담당 관리가 왕후 수와 왕 유발을 폐위시키고 그 가족들을 데리고 방릉(房陵)으로 옮길 것을 청하자 주상이 이를 허락했다. 유발은 몇 달 만에 방릉으로 옮겨졌고, 나라는 끊어졌다. 한 달 남짓 천자는 (유발과) 가장 가까웠던 점을 생각하여 담당 관리에게 “상산 헌왕이 요절하여 첩들이 불화하고 적자와 서자들이 서로 무고를 일삼는 등 불의에 빠져 나라가 없어졌으니, 짐은 이를 참으로 가련하게 생각한다. 헌왕의 아들 평에게 3만 호를 봉하여 진정왕(眞定王)으로 삼고 아들 유상에게 3만 호에 봉하여 사수왕(泗水王)으로 삼으라.”라고 명령했다. 진정왕 유평은 무제 원정(元鼎) 4년(기원전 113년)에 상산 헌왕의 왕자로서 진정왕이 되었다. 사수(泗水)의 사왕(思王) 유상은 무제 원정 4년에 상산 헌왕의 왕자로서 사수왕이 되었다. 11년에 죽고, 아들 애왕(哀王) 유안세(劉安世)가 즉위했다. 11년에 죽었는데 아들이 없었다. 이에 주상은 사수왕의 후손이 끊어진 것을 가엾게 여겨 안세의 동생 유하(劉賀)를 사수왕으로 삼았다. 이상 네 나라의 첫 왕들은 모두 왕 부인 아후의 아들들이다. 그 후 조정에서 그 방계 자손들까지 육안왕, 사수왕으로 삼았다. 아후의 자손으로 지금까지 모두 여섯 왕이 있었다.
<사마천의 논평> “고조 재위 때 제후들은 세금을 모두 누렸고 내사(內史) 이하를 모두 자신들이 임명했다. 조정에서는 승상만을 두어 황금으로 된 도장을 사용했다. 제후들은 또 어사, 정위정, 박사를 스스로 임명하니 천자를 방불케 했다. 오초(吳楚)의 반란 이후 오종이 왕이 되었을 때는 2천 석 급의 관리들은 모두 조정에서 파견하고, 승상은 상으로 바꾸어 부르는 한편 은 도장을 사용하게 했다. 제후들은 세금 수입만 가졌고 권력은 빼앗겼다. 그 뒤 제후들 중 가난한 자들은 소가 끄는 우차를 타는 정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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